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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李翰雨가 말하는 ‘태종을 통해 배우는 리더십’

“太宗, 시대적 과제를 先制的으로 파악해서 그걸 향해 나아간 사람”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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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宗의 삶을 한 단어로 말하면 至公… 자기가 권세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고 국가를 번성시키는 일을 자기의 業으로 여기는 마음”
⊙ “태종,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항상 신하와 함께 일을 추진”
⊙ ‘인재란 다 갖춰진 사람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 천하에 어찌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태종)
⊙ 政敵 정도전의 아들 정진, 위화도 회군 告變者 최유경 등 중용… 인재 등용의 기준은 곧음[直]
⊙ “論功行賞은 功이 있는 자에게 賞은 줘도 자리는 주지 말라는 의미… 功臣은 私”
⊙ “윤석열은 公憤이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 친인척 관리 등 잘할 것”
  《월간조선》에 ‘신당의통략(新黨議通略)’을 연재하고 있는 이한우(李翰雨·61) 논어등반학교 교장을 보면,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글[翰]을 비[雨]처럼 쏟아내는 사람이다. 20대 시절부터 저술 작업을 해온 그는 지금까지 100권 가까운 저서(著書)와 역서(譯書)를 펴냈다. 최근 그는 자신의 저서 리스트에 또 다른 대작(大作)들을 보탰다. 하나는 2017년에 시작해서 작년 12월에 완간(完刊)한 《이한우의 태종실록》(21세기 북스 펴냄)이다. 《이한우의 태종실록 별책》까지 합쳐 모두 19권에 달한다. 다른 하나는 《이한우의 태종 이방원(상, 하)》이다. ‘태종풍(太宗風) 탐구’라는 부제(副題)가 눈길을 끈다. 그는 2005년에는 ‘군주열전’ 시리즈의 하나로 《태종-조선의 길을 열다》(해냄)를 펴낸 바 있다. 17년간 태종을 ‘탐구’해온 셈이다.
 
  마침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1367~1422년)이 여러 가지로 재조명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KBS는 5년여 만에 다시 대하사극을 방송하기 시작했는데, 제목부터가 〈태종 이방원〉이다. 과거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의 사극에서 태종 이방원이 등장한 적은 있지만, 온전히 ‘태종 이방원’을 중심에 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이 드라마는 중간에 잠시 방송을 중단하는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8~11%대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가(家)’에서 ‘국(國)’으로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다.
 
  태종 이방원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고려말 조선 초기의 난세(亂世)를 수습하고 조선왕조를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세종(世宗) 시대의 태평은 이방원이 그 길을 닦아놓은 덕분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공신(功臣)들과 처남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처남 네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는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1375~1419년)까지 죽였다. 자신과 아들의 처가를 박살 낸 것은 외척(外戚)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태종의 리더십과 친인척·측근 관리는 새 대통령의 당선과 맞물리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 관훈동에 있는 경제사회연구원 사무실에서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을 만났다.
 
 
  태종과 朴正熙
 
이한우 교장은 태종 이방원에게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 20년 가까이 태종을 봐왔는데, 그렇게까지 태종에게 매료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요. 태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3년에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라는 책을 내면서부터였어요. ‘세종에게 길을 닦아준 사람이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이 태종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잖아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어떻게 준비를 해줬나를 알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니 결국 태종, 정종(定宗), 태조(太祖)까지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 어떤 충격입니까.
 
  “태종은 시대적 과제를 선제적(先制的)으로 파악해서 그걸 향해 나아간 사람이라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러니 신하들 중에서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권세나 누리려던 사람들이 나자빠지는 거지. 그걸 보고 나니 태종은 대단한 정치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도 선제적으로 과제를 파악해 돌파하면서 이루어가는 것이 리더, 특히 국가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태종을 보면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했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떠오르더군요.”
 
  ― 태종에게 있어서 시대적 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려 말기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아파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죠. 고려 말기 사회는 겉으로는 귀족(貴族)이라고 하지만 실은 작은 군벌(軍閥)이 사병(私兵)에 대한 군권(軍權)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고 있었지요. 물론 이성계(李成桂·1335~1408년)도 마찬가지였죠. ‘나도 저런 군벌, 귀족이 되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군벌, 귀족들에게 당하며 사는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을 마음 아파했다는 것이 태종의 위대한 점입니다.”
 
 
  ‘백성의 고통을 마음 아파한 임금’
 
  ― 태종이 백성들의 고통을 아파하고 그것을 해결해주려 노력했다는 것이 실제로 실록에서 보입니까.
 
  “보이죠. 태종은 말로만 백성을 사랑하라고 한 게 아니라 백성에 대한 사랑을 체화(體化)한 임금이었습니다. 태종 6년(1406년) 청계천 공사를 할 때에 태종은 야간작업을 금지하고 공사 현장에 의원(醫員)들을 배치했어요. 공사를 마친 후 노역에 동원됐던 백성들이 귀향(歸鄕)할 때에는 그들이 한강을 서둘러 건너다가 사고라도 날까 봐 관원들을 보내서 살피게 했어요. 지금도 그런 리더를 보기가 어렵잖아요?”
 

  《태종 이방원》에는 태종의 애민(愛民)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여럿 나온다.
 
  태종 12년(1412년) 태종은 “누문(樓門)의 노대(路臺)에 깔아야 할 돌도 1만 개이면 충분할 텐데 선군(船軍)으로 하여금 3만 개씩이나 실어오게 해 내 백성[吾民]을 수고롭게 함은 무슨 짓이냐?”면서 신하들을 질책한다. 이한우 교장은 “‘내 백성’이라는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고 했다.
 
  태종 16년(1416년)에 왜(倭)의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으로 팔려간 우리 백성들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태종이 이예(李藝·1373~1445년)를 보내 이들을 데려오라고 하는 얘기도 나온다. 호조판서 황희(黃喜)가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하지만, 태종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것은 본래 귀천(貴賤)에 따른 차이가 없다’며 황희의 진언을 일축한다.
 
 
  私兵 혁파와 文臣 정치의 출현
 
태종의 최대 政敵이었던 정도전.
  이한우 교장은 “저는 이런 사례들이 일회성(一回性)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태종은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백성들에게 고통이 되지 않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태종이 정종 2년(1400년) 세자가 된 후 전격적으로 사병 혁파(革罷)를 하잖아요. 사병 혁파라는 게 단순히 정치투쟁이 아니에요. 사병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군권을 가진 자들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고, 비로소 문신(文臣)들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에 의한 정치의 영역’이 탄생하는 것이죠. 이는 왕명(王命)이 정립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명이 정립되어야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하려는 왕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 그렇군요.
 
  “태종은 이런 정치체제에 대한 구상을 상당히 일찍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태종은 조선 건국 후 아버지 시대 7년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이나 남은(南誾·1354~1398년)이 하는 정치는 고려말의 연장선이었잖아요. 태종은 그걸 보면서 ‘이럴 거면 무엇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했지’ 하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 하지만 정도전도 사병 혁파를 추진했었죠.
 
  “정도전이 그걸 일찍 추진했으면 나름 설득력을 가졌겠지요. 하지만 명(明)나라에서 정도전을 겨냥해 계속 압력을 가해오니 그걸 회피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사병 혁파를 추진하는 한편 이를 통해 이방원을 잡으려고 하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당하게 된 거죠. 사병 혁파라는 겉모습은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정도전이 추진했던 사병 혁파는 신권(臣權)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이방원이 추진했던 것은 왕권(王權)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2005년에 태종에 대해 쓸 때에는 사병 혁파의 의미를 잘 몰랐어요. 실록까지 번역하면서 보니 사병 혁파와 문신 정치의 탄생이 연결된다는 것이 보이더군요.”
 
  ― 태종의 그런 시스템 개혁에 대한 구상은 대략 언제쯤부터 시작됐을까요.
 
  “태종이 젊어서부터 선비들에게 자신을 낮추었다는 얘기가 나와요. 귀한 사람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유가(儒家)에서 핵심적인 것인데, 이는 태종이 위민(爲民) 정치를 위한 인적·물적 토대를 갖추기 위해 상당히 일찍부터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조선 임금 중 유일한 ‘文科 급제자’
 
  이한우 교장은 “사병 혁파 이후 문신정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다음은 결국 왕이 신하를 고르게 되면서 지인지감(知人之鑑)의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인지감’은 이한우 교장이 천착(穿鑿)해온 문제 중 하나다. 그는 공자(孔子)의 말씀을 담은 《논어(論語)》를 ‘선비의 심신수양서’가 아니라 ‘군왕(君王)을 위한 지인지감 교과서’로 본다. 그런 관점에서 《월간조선》에 ‘이한우의 지인지감’을 연재하고, 책으로 내기도 했다.
 
  ― 태종 이방원의 지인지감은 어떻게 길러진 것일까요.
 
  “태종은 조선 임금 가운데서 유일한 문과(文科) 급제자였습니다[우왕 10년(1383년) 문과에서 33명 중 10등으로 급제]. 임금에 오르기 전 ‘문과 급제’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자 고려말 조정 관리로 근무하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직접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것이 집권 후 큰 힘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신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그들의 장단점을 접하면서 대등한 차원에서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훗날 인재 발탁에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아무래도 왕자나 세자로 있다가 임금이 된 사람들보다는 낮은 눈높이에서 사람 보는 눈을 익혔겠지요. 그리고 《주역(周易)》 《논어》 《한서(漢書)》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에 대한 태종의 이해(理解)는 당대 문신들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
 
  ― 여태까지 나온 ‘태종 3종 세트’의 특징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시죠.
 
  “2005년 군주열전 시리즈로 나온 《태종》은 가벼운 입문서, 19권의 《태종실록》은 실제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에 쓴 《태종 이방원》은 제가 지난 20년 동안 해온 동양·우리나라 역사와 경전(經典) 연구의 총화(總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해온 역사·경전 연구의 총화’라는 말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태종 이방원》을 단순히 ‘태종 리더십’에 대한 책으로 여기고 선택한 사람들은 책 중에서 수시로 《논어》와 《주역》 《대학(大學)》 《중용(中庸)》 같은 경서(經書)나 《한서》 《대학연의》 같은 사서(史書)의 내용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질려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단순한 평전(評傳)이나 리더십 교과서로 생각하고 책을 집어 든 사람들은 《태종 이방원》을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모르고 그 사람의 평전을 쓰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건 저 자신이 너무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문제입니다.
 
  2005년 《태종》을 쓸 때만 해도 태종이 수련한 학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태종의 심사(深思), 즉 그의 정신세계를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려냈던 태종은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즉 ‘타고난 정치적 인간’이었습니다. 태종의 정치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겉으로 나타난 모습들로만 이해했지요. 그동안의 경전 공부와 역사 공부를 통해 태종의 정신세계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후에 태종을 다시 보니, 그가 정치적 숙청을 할 때에 왕실 사람과 처가 사람들을 왜 다르게 취급했는지, 공신들을 왜 그렇게 다루었는지 등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至公은 ‘스스로 내려놓는 것’”
 
  ― 태종을 통해 우리 시대에 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공(至公)이죠. 태종의 삶을 한 단어로 말하면 지공입니다.”
 
  ― 조금 막연한 얘기 같은데, 지공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한마디로 ‘스스로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능하다는 것도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일을 해보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도 얼마든지 중용(重用)하고 그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에게 뛰어난 인재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이죠.”
 
  ―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요즘 정치인들도 참 많이 하죠.
 
  “말로는 많이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 ‘자기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 허기(虛己)입니다. 자기가 권세를 누리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고 국가-옛날에는 종묘사직(宗廟社稷)-를 번성시키는 일을 자기의 업(業)으로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李承晩)·박정희 대통령은 뛰어난 분들이기는 했지만 지공은 아니었던 거죠. 만일 그분들이 지공의 전통을 남겼더라면 좌파(左派)들이 이렇게 설쳐댈 빌미도 안 줬을 것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라면 재선(再選) 임기 8년을 마친 후 권좌에서 내려온 미국의 초대(初代)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지공을 실천한 경우겠군요.
 
  “바로 그거죠. 그리고 덩샤오핑(鄧小平)도 자신이 가진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잣대로 보면 시진핑(習近平) 같은 경우는 완전히 3류입니다. 우리는 그것만 봐도 결국 저 나라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것, 향후 어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剛明한 군주
 
이성계. 태종은 외모에서 아버지 이성계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 태종의 역사적 의미, 역할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당시로 돌아가서 말한다면, 태종으로 인해 더 이상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해야겠지요. 흔히 그렇게 된 것은 세종 시절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태종 치세 18년을 거치면서 조선에서는 더 이상 고려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이젠 조선에서 살아야겠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이한우 교장은 태종을 두고 ‘강명(剛明)하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태조 이성계는 태종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자 “강명한 임금이니 권세가 반드시 아래로 옮겨가지는 않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 태종을 두고 ‘강명하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강(剛)은 ‘뛰어나지 않은 자가 진출하는 것을 막아내서 뛰어난 자들이 자리에 있도록 한결같이 노력하는 것’을, 명(明)은 ‘뛰어나거나 뛰어나지 않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말합니다.
 
  원래 ‘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입니다. 먼저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하니까요. 선조(宣祖) 같은 경우는 사람을 볼 줄 하는 명군(明君)이기는 하지만 강군(剛君)은 아니었습니다. 지켜줘야 할 사람을 오래 지켜주지 못했죠. 그때 인재가 엄청 많았는데….”
 
  ― 조선 시대 임금으로 강명했던 사람은 누굴 꼽을 수 있을까요.
 
  “태종, 세종, 그리고 숙종(肅宗)을 들 수 있겠죠.”
 
 
  이세민과 이방원
 
唐 태종 이세민.
  시법(諡法)에서 ‘태종’이라는 묘호(廟號)는 흔히 개국 초기의 난세를 수습하고 태평천하를 이룬 사람에게 붙는다.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대표적이다.
 
  ― 당 태종 이세민의 경우 말년이 되면 간언(諫言)을 점차 멀리하고 후계구도를 잘못 짜는 등 밝음[明]이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태종 이방원이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시경종(愼始敬終), 시작을 신중하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임금이 끝마무리를 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후계자를 잘 고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종 이방원은 후계자를 잘 길렀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을 기르고 가려내는 일도 잘했어요. 세종에게 넘길 만한 신하는 넘기고, 그렇지 않은 신하는 솎아냈죠. 세상에 이런 임금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해주었는데도 못하면 그게 바보죠. 그런데 세종은 ‘경종’을 하지 못했어요.”
 
  ― 세종과 문종(文宗)이 죽은 후에 단종(端宗) 때에 김종서(金宗瑞·1383~1453년)·황보인(皇甫仁·1387~1453년) 등의 전횡, 그리고 세조(世祖)의 정변이 있었죠.
 
  “그렇죠. 임금이 준비를 안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태종은 일에 임하는 자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공(公)이었고, 한순간도 그걸 놓치지 않았어요.”
 
 
  ‘반드시 재상에게 물었다’
 
  ― 태종이 일관되게 그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태종은 어떤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하륜(河崙·1348~1416년)이나 박은(朴·1370~1422년) 같은 재상(宰相)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혼자서 결정하는 법이 없어요.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그러는 과정을 통해 공론(公論)을 만들어나가는 거죠. 재상에게만 물은 게 아닙니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을 늘 실천했어요.”
 
  ― 재상에게 의견을 물은 후 받아들이는 자세는 어땠습니까.
 
  “완전 오픈 마인드(open mind)!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어요. 항상 신하와 함께했어요. 관제(官制)개혁을 할 때에는 하륜, 사병 혁파를 할 때에는 대사헌(大司憲) 권근(權近)에게 상소를 올리게 해서 일을 추진했지요.
 
  이게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태종의 리더십 중 하나입니다. 이미 자신도 다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신하가 있으면 그 신하와 의논을 해서 마치 그 신하가 한 일인 것처럼 만들어나가는 것이죠.”
 
  ― 그런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세종)으로 세자를 바꿀 때, 태종은 물론 자기 생각이 있으면서도, 신하들에게 적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천해보라면서 신하들과 핑퐁을 하잖아요. 그러다가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형식으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정했죠. 후일 박은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울 때의 공로를 내세우면서 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태종은 ‘그 당시에 큰 의견을 결정하기는 실로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밖의 토의로 된 것이 아니거늘 박은 등이 무슨 공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천하에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인사(人事)’이다. ‘인사가 만사(萬事)’라고 말했던 대통령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망사(亡事)로 이어졌다는 조롱을 받았다. 《태종 이방원》을 읽다 보면 인사와 관련해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들이 있다.
 
  “인재란 다 갖춰진 사람을 구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비록 이 점에서는 미흡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저 점에서는 달통할 것이니 천하에 어찌 쓰지 못할 자가 있겠는가?”
 
  “이직(李稷·1362~1431년)과 황희는 비록 죄를 범하기는 했으나 일에 정통한 구인(舊人·앞 시대의 인재)이므로 버릴 수 없다. 가히 불러서 쓸 만하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위장 전입이니 부동산 투기, 소셜미디어(SNS)니 하는 걸로 사람의 발목을 잡는 시절에 참으로 상쾌한 이야기다.
 
  또 하나 태종 이방원의 인사를 보면 그야말로 인사의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든다. 하륜, 권근, 황희 등은 당초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이지만, 내내 중용됐다.
 
  조선 개국이나 이방원에게 반대했던 이들도 적극적으로 썼다. 대사헌을 지낸 최유경(崔有慶·1260~1334년)은 위화도 회군 당시 이성계 밑에 있다가 우왕과 최영에게 달려가 쿠데타 발생 사실을 알린 인물이다. 태종 이방원의 가장 큰 정적(政敵)이었던 정도전의 아들인 정진(鄭津·1361~1427년)은 한때 수군(水軍)으로 충원(充員)되었지만 다시 벼슬길에 올라 판한성부사(서울시장)를 거쳐 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태종은 자기가 죽인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아들 정종성과 정종본도 등용했지만, 본인들이 불초해서 높이 올라가지는 못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한편이 되어 태종에게 맞서다가 죽은 남은의 경우 태종 대에 태조(太祖)의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剛直과 忠直
 
  ― 태종이 사람을 쓰는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곧음[直]이었죠. 단점이 있다고 해도 그 바탕이 곧다고 생각하면 썼습니다. 대신 곧지 못하면[不直], 죽음을 면치 못했지요. 그런데 곧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 어떤 게 있습니까.
 
  “제일 좋은 것은 순직(純直)입니다.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순전히 곧다는 뜻입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讓位)하면서 ‘충녕은 순직하니 대임(大任)을 맡길 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은 강직(剛直) 또는 경직(直)인데, 굳세고 곧은 것을 말합니다. 영의정을 지낸 유정현(柳廷顯·1355~1426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임금에게 할 말은 하는 유형이죠.”
 
  ― 또 있습니까.
 
  “다음으로 공직(公直)이 있습니다. 공평정직(公平正直)하다는 말입니다. 이성계의 호위무사 출신으로 좌의정까지 오른 조영무(趙英茂·1338~1414년) 같은 사람이 해당됩니다. 조영무에 대해 태종은 질직(質直)하다고도 했는데 ‘바탕이 곧다’는 뜻입니다.
 
  충직(忠直)은 좌의정을 지낸 박은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는데, 자칫하면 임금의 뜻에만 맞추는 것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눌직(訥直)이 있는데, ‘말은 어눌하지만 마음속은 곧은 것’을 말합니다.
 
  가장 흔한 경우로 정직, 근직(勤直), 질직, 후직(厚直)이 있습니다. 정직, 질직, 후직은 대체로 다른 능력은 없이 부지런하거나 묵묵히 맡은 바 일을 잘 해내는 사람에게 썼는데, 토목공사에 능해 청계천 공사 등을 맡은 박자청(朴子靑·1357~1423년)이 그런 경우입니다. 후직은 마음가짐이나 남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두터웠다는 뜻으로, 그 밖의 다른 능력은 없는 경우에 쓰였습니다.”
 
 
  拙直했던 맹사성, 狂直했던 이숙번
 
  ― 재미있네요.
 
  “순직은 고분고분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환관(宦官)에 대해 쓰였습니다. 졸직(拙直)은 ‘다소 고지식하면서도 곧은 것’을 말하는데, 세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리석고 곧다’는 우직(愚直)은 많이 들어보았겠지만, 치직(癡直)이라고도 합니다.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한 무장 이종무(李從茂·1360~1425년)를 치직하다고 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을 범해도 악의(惡意)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봐서 어지간한 잘못을 해도 용서를 했습니다. 곧음의 맨 끝에 있는 것은 광직(狂直)입니다.”
 
  ― 그건 어떤 겁니까.
 
  “‘너무 솔직하다’는 의미인데, 요즘 말로 하면 ‘또라이 기질이 있지만 바탕은 곧다’쯤 될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 이숙번(李叔蕃·1373~1440년) 아닌가요.
 
  이숙번은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던 태종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이다.
 
  “맞아요. 태종은 어린 세종이 그를 제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내쳤지만 ‘광직하니 죽일 것은 없다’면서 목숨은 살려주었습니다.”
 
  ― 곧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 선을 넘어 부직(不直)한 사람은 죽었지요. 공신 이무(李茂·1355~ 1409년)가 죽은 것은 그가 부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功臣은 私, 社稷之臣은 公”
 
KBS 사극 〈태종 이방원〉. ‘家에서 國으로’라는 副題가 눈길을 끈다.
  ― 역대 정권에서도 늘 그랬지만 대선이 끝나면 저마다 자기 공을 내세울 것이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한다고 시끄럽겠네요.
 
  “흔히 논공행상이라는 말을 잘못 쓰고 있는데, 이는 ‘공(功)을 논해서 상(賞)을 주라’는 의미입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상을 주더라도 자리는 주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자리는 현(賢), 즉 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5년마다 공신이 만들어지는데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줬다가 난리가 나는 것 아닙니까?”
 
  ― 자리를 얻으려고 캠프에도 참여하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자리를 주더라도 국민의 삶과 관계없는 한직(閑職) 같은 걸 줘야지, 국민의 삶과 관계되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같은 자리를 주면 안 됩니다. 이런 면에서 문재인(文在寅) 정부는 공(公)이 없었던 거지요. 새 정부도 공신한테 자리를 주는 정치를 하면 어느 쪽이 되든 나는 그런 정부에는 반대입니다.”
 
  ― 왕자의 난으로 집권했던 태종은 공신들을 어떻게 통제했습니까.
 
  “여기서도 태종의 지공이 드러납니다. 태종은 공신과, 즉 나라를 맡길 사직지신(社稷之臣)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공신은 사(私)예요. 사직지신은 공입니다. 공신들을 우대하다가 ‘공신의 나라’가 되는 것은 고려말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태종에게는 공신들보다 백성이 더 중요했습니다. 태종의 이런 생각을 모르고 지분을 요구하다가 제일 먼저 희생된 사람이 이거이(李居易)였죠.”
 
  ― 태종이 공신들에게 단호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우선 태종은 자신이 조선 개국에서도 사실상 특등공신이었고, 두 번의 정난(靖難)도 본인이 주도한 것이었기 때문에 공신들을 통제할 힘이 있었어요. 그 점에서 갑자기 얹혀서 임금이 됐던 중종(中宗)이나 반정(反正)에 약간의 지분(持分)만 있었던 인조(仁祖)와는 달랐지요. 그리고 지인지감이 있었고요.”
 
  ― ‘윤석열 당선인 주변에 인(人)의 장막이 쳐졌다’ ‘주변에 예스맨들만 있다’ ‘윤 당선인이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돌고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럼 망하는 거죠. 신시(愼始), 시작을 잘해야 합니다. 첫 인사에서 승패가 갈릴 텐데, 정말 능력 위주로 사람들을 잘 써야 합니다.”
 
 
  “尹, 유능하고 반듯한 사람 가까이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軍 출신이면서도 널리 인재를 썼다.
  ― 윤 당선인이 잘할 수 있을까요.
 
  “본인이 인사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아서 거기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첫 인사에서 자기와 잘 안다고 해서, 자기에게 기여한 게 있다고 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쓴다는 것을 보여주면, 손바닥 비비는 놈들은 저절로 떠나가게 될 겁니다.”
 
  ―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잘할 것 같아요. 나도 걱정이 되어서 좀 알아봤는데, 윤석열 당선인이 검찰에서 가까이했던 사람들을 보면 한동훈 검사장을 비롯해서 대체로 유능하고 반듯한 사람들입니다.
 
  또 조국(曺國) 전 장관에 대한 수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자기가 ‘수사를 해라, 마라’ 한 게 아니에요. 실무자들에게 수사에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게 한 후, 그 의견을 물어서 ‘수사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말이 나오니까 ‘그럼 그대로 진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담백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자질이라고 봅니다.”
 
  ―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윤석열 당선인이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한 것도 보면, 그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인사는 제일 잘했어요. 윤석열 당선인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인 일입니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 인사를 그렇게 잘한 걸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전재국(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 시공사 사장에게 ‘당신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인재를 잘 썼나’라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전 사장이 자기도 그게 신기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대요.”
 
  ― 전두환 전 대통령이 뭐라고 했다던가요.
 
  “‘아, 그게 뭐 복잡하나. 각 부처별로 인사 파일이 다 있고, 거기에 평가가 다 있는데, 제일 위에 있는 세 사람 중에서 나하고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을 하나 골라서 시키면 된다. 이미 부처에서 다 검증한 사람 중에서 뽑아 쓰는데 뭘 실패하나’라고 하더랍니다.”
 
  ― 전두환 정권 시절에 개각(改閣) 명단을 보고 아버지가 ‘군사정권이니 뭐니 하지만, 다 될 만한 사람이 됐다’고 하던 게 기억이 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공신들이 난리를 쳤을 법도 한데 그걸 잘 제어하면서 사람들을 잘 찾아서 썼어요. 그 시절에 큰 사람들이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때까지도 활약했잖아요. 사람을 기른 거죠. 그런 걸 잘 배워야 합니다.”
 
  ― 윤석열 당선인을 보면, 대체(大體)를 짚을 줄 알고, 사소한 것까지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매달리는 스타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럼요. 요새 하는 걸 보면서 저도 놀라고 있습니다. 굉장히 빨리 정치인, 그것도 그냥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지도자에 걸맞게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잘할 것 같아요.”
 
 
  公憤
 
  ― 윤석열 당선인은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거의 직관적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토론회 때 드러나던데, 그거야말로 공분(公憤)이 느껴지더군요. 윤 당선인은 공분이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에요. 이재명(李在明) 후보가 제일 부족한 게 그 부분입니다. 공분이 없는 사람이 테크닉으로 세상을 어떻게 해보려다가 거덜 나 버린 거죠.”
 
  ― 민주당이 그래도 김대중 정권 이후 두 번이나 정권을 잡았던 정당인데 어쩌다가 그런 처참한 사람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이 민심(民心)과 동떨어지게 된 것은 1차적으로 당원들 책임이죠. 정권 교체 여론이 50% 이상인 상황이 2년 이상 계속되어 왔는데도 이게 엄중하다는 걸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핵심은 ‘내로남불’이잖아요. 다소 분칠을 해서라도 ‘이 사람은 내로남불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호소했을 때 먹혀들 만한 사람을 내놓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매일 ‘돈 퍼주겠다, 뭐 하겠다’ 하니 민심이 미동(微動)도 안한 것이죠.”
 
  ― 2020년 총선 때 그렇게 돈 뿌려서 승리하고 나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죠.
 
  “그렇게 해서 180석 가까이 차지하고 나니 오만에 빠진 거죠. 이미 작년 4·7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경고가 갔는데도 아직까지 도취(陶醉)되어 있는 거예요. 밑바닥까지…. 그만큼 절박하지 않았던 것이죠.”
 
  ― 이번에 윤석열 당선인이 하는 걸 보면서, 과거 보수정당 대선 후보들과는 많이 달랐고, 그 때문에 호응을 얻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100%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윤석열 당선인이 이렇게 부각된 것은 국민의힘 덕분이 아니잖아요. 일반 사람들 눈에 국민의힘은 꼴 보기도 싫었거든요. ‘자기들 주군(主君)인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이 저렇게 잡혀 들어갔는데도 의원직 사퇴하는 사람 하나 없는 ×××들’이라고 본 거죠.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을 잡아넣었던 사람이 후보로 나오니까 정권 교체를 바라는 중간의 사람들이 따라온 것입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20%의 중도를 오른쪽에 붙어 있게 잘 관리하면, 민주당은 되살아나기 어려울 겁니다.”
 
  ―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당선인은 자신의 캐릭터로 승리한 것이기 때문에 국민의힘이나 당내 중진 정치인들에게 신세 진 게 없는 셈이 되겠네요.
 
  “윤석열 당선인은 지분 관계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요. 국민의힘이 윤석열 당선인에게 신세 진 거지, 윤 당선인이 국민의힘에 신세 진 게 아니거든요.”
 
 
  “尹, 친인척 잘 관리할 듯”
 
윤석열 검찰총장과 한동훈 부산고검 차장의 관계를 보면 윤 당선인의 인사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사진=조선DB
  ― 윤석열 당선인이 부인 김건희씨나 장모 문제 때문에 선거 기간 중 논란이 됐었죠. 윤 당선인의 친척 형 하나가 벌써부터 ‘나를 통하면 윤 당선인과 통할 수 있다’고 설치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가차 없을 겁니다. 검찰총장까지 올라가는 동안에 그런 일은 하나도 없었어요. 저도 여러 사람을 통해 알아보았는데, 친인척 문제는 초반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수준으로 잘 관리할 것 같아요. 김건희씨 문제는 한번 불거졌기 때문에 본인이 조심하겠지요. 장모야 무슨 사고를 친다고 한들, 사실 당선인과 무슨 상관입니까.”
 
  ― 태종이 집권 후 처남 네 명을 모두 죽여가면서 여흥 민씨 집안을 박살 낸 것은 양녕대군이 세자가 될 경우에 척족(戚族)이 발호(跋扈)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가요.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앞에서 말했던 공신은 공이냐 사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더군요. 민씨 집안은 태종에게는 공신 중의 공신입니다. 왕자의 난 때 군사를 동원한 것도 민씨 집안인데다가, 게다가 부인이잖아요. 태종의 최측근인 하륜조차 몇 년이 지나도록 민씨 눈치를 보았어요.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두면 민씨 정치가 될 판이었어요. 그러면 태종이 거사를 일으킨 명분이 없어지는 것이었죠.”
 
 
  “문재인, 明宗과 비슷”
 
  ― 문재인 대통령과 비슷한 조선 시대 임금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명종(明宗) 아닐까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혼군(昏君). 촛불로 집권했다니 한 칸 높여주면 중종(中宗).”
 
  ― 여태까지 드러난 걸로 봤을 때, 윤석열 당선인은 조선 시대 임금 누구하고 비슷할까요.
 
  “캐릭터로 보면 시원시원한 게 세조 스타일이죠. 세조가 일도 좀 하고, 놀기도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물론 세조는 모범으로 삼아야 할 리더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공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국가와 자신, 국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고(思考)와 일이라는 패턴이 체화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각 분야가 다 자기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는 기본 룰(rule), 공심(公心)에 입각한 룰, 그것만 잘하면 됩니다. 윤석열 당선인이 검찰 차원이기는 하지만, 공적(公的) 마인드는 특출 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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