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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탐구

한국 중공업 건설의 숨은 주역 김재관 박사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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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호 유치 해외 과학자… 철강·조선·자동차 산업 건설 과정에서 활약
⊙ 포철(포스코) 건설 당시 ‘高爐 방식에 의한 1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주장해 관철시켜
⊙ ‘한국형 고유 모델 자동차’ 주창해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기틀 마련
1972년 5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달의 수출품으로 선정된 자동차 부품에 대해 설명하는 김재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1964년 12월 13일 일요일 오전 9시. 뮌헨의 피어 야레스자이텐 캠핀스키 호텔 1층 소연회실에서는 독일을 방문 중이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재독(在獨) 유학생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우리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공부하는 과학자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은 심정으로 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과 공업의 발전을 위해서 애쓰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나라를 잘사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가지고 계신 전문 과학지식을 우리 국가를 위해 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 길지 않은 연설을 마친 후 박 대통령은 좌중을 돌아보면서 “혹시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때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뮌헨공대에서 금속재료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세계 유수의 철강회사이던 데마그(DEMAG) 종합기획실에서 근무하던 김재관(金在官·1933~2017년) 박사였다.
 
 
  대통령에게 〈철강산업육성방안〉 올린 유학생
 
  김재관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이 준비한 세 권의 책자를 올렸다. 그중 하나가 〈한국의 철강공업육성방안〉이었다. 김 박사가 말했다.
 
  “각하, 철강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이고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제가 쓴 기획안입니다. 혹시라도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안 그래도 철강 산업 건설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대통령은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내 돌아가서 꼭 제대로 된 철강회사를 만들겠습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이날 김재관이 박 대통령에게 산업화 관련 문건들을 올린 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 교민들 가운데서도 ‘군사정권’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된 독일 유학생 모임 퇴수회(退修會) 회원들은 “적어도 우리는 발전적인 의견이나 제안을 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고 그 역할이 김재관 박사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마침 김 박사도 오래전부터 〈한국의 철강공업육성방안〉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것은 ‘라인강의 기적’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함보른탄광 강당에 모인 파독(派獨)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눈물을 쏟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박정희 대통령도 지쳤다. 이럴 때 얼큰한 김치찌개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비서들은 교민들에게 무엇이든 좋으니 한국 음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뮌헨에 살던 양혜숙 박사가 급히 잡채를 만들어가지고 호텔로 달려갔다. 육영수 여사는 “정말 고맙다”면서 교민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해온 침대보를 답례로 주었다. 육 여사도, 박 대통령도 당시에는 몰랐지만, 양혜숙 여사는 바로 김재관 박사의 부인이었다.
 
 
  ‘준비된 일꾼’
 
포항제철 착공식에 참석한 김재관 박사(뒷줄 왼쪽). 앞줄 가운데가 박태준 사장.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었다. 초대(初代) 연구소장인 최형섭(崔亨燮·전 과학기술처 장관) 박사는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 유치(誘致)에 나섰다. 당시 대한민국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 최고의 연구 환경을 약속했지만, 이미 선진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그들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당장 월급만 해도 몇 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도 18명의 과학자가 기꺼이 거기에 응했다. 그들은 돈보다 가난한 조국을 잘살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은 것을 더 귀하게 여긴 사람들이었다.
 
  18명의 첫 번째 해외 유치 과학자 가운데 17명은 최형섭 박사가 미국 전역을 돌면서 스카우트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바로 김재관 박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그를 지명하고 불러들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2년 전 자신에게 〈철강산업육성방안〉을 올렸던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관 박사는 ‘준비된 일꾼’이었다. 1호 유치 과학자 중 한 명인 윤여경 박사의 회고다
 
  “그 당시 참여한 사람 중 김재관 박사는 달랐어요. 김재관 박사는 이미 귀국 전부터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준비하고 온 사람이었어요. 이미 한국의 산업화에 대한 계획과 꿈을 가슴속 깊이 담고 있던 분이었지요. 한국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67년 귀국길에 오른 김재관 박사는 이후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일관제철소 건설 주장
 
  사실 김재관 박사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의 ‘벼슬’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에 그쳤다. KIST 제1연구부장·특수기재연구실장, 초대 상공부 중공업차관보,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 초대 한국표준연구소장 등을 거쳐 인천대 교수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도 그렇게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재관 박사는 겉으로 보이는 이력서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산업들의 산파역(産婆役)이었다. 포항종합제철을 만들 때, 그는 고로(高爐) 방식에 의한 10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주장해 성사시켰다. 건설자금을 대는 일본 측에서는 한국의 역량이나 경제 수준으로 보아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인 데마그에서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하게 주장을 전개하는 김재관 박사에게는 일본 측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자동차 및 선박용 후판(厚板) 생산설비를 미리 갖추어놓아야 한다고 주장, 이를 관철시켰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이 자동차 산업과 조선(造船)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덕에 먹고살 수 있는 것은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형 고유 모델 자동차’ 개발 주창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
  대한민국 경제가 김재관 박사의 통찰력에 빚진 부분은 또 있다. 바로 ‘자동차 기술 독립’이다. 한마디로 ‘한국형 고유 모델’의 자동차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건설의 건설자로 널리 알려진 오원철(吳源哲) 경제2수석비서관은 여기에 반대했다. 자동차 산업은 당초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에서도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공부 중공업차관보였던 김재관 박사는 상공부 차관과 장관, 오원철 수석을 뛰어넘어 박정희 대통령과 독대(獨對)했다. 그는 “고유 기술 없는 자동차 산업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면서 고유 모델 자동차 정책 추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민 끝에 그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결국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자동차 산업 정책은 ‘외국 모델 기반의 부품 국산화’에서 ‘톱다운 고유 모델 확보 및 수출·양산화’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고유 모델 확보’라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가려는 자동차 회사는 없었다. 당시 그만한 역량이 있던 회사는 아세아자동차, GM코리아였지만, 이들은 ‘외국 모델’을 베껴다가 국내 시장에 판매하는 데 안주하려 했다. 삼륜차를 만들다가 자동차 산업 진입 기회를 노리던 기아산업도 말할 나위 없었다.
 
  김재관 박사는 당시만 해도 자동차 업계의 후발(後發)주자였던 현대자동차의 정세영(鄭世永) 사장을 불러들여 간곡히 설득했다. 최초의 한국 고유 모델 자동차 ‘포니’는 그렇게 탄생했다.
 
  1997년 IMF사태 후 외국 자동차 기업에 매각된 르노삼성이나 한국GM은 오늘날 본사(本社)에서 배당하는 모델과 물량에 목을 매고 있다. 만일 김재관 박사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은 선진국 업체의 하청공장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포니’도, 오늘날 세계 5위의 자동차 기업 현대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 시스템의 생리상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킨 관료가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홍하상 지음, 백년동안 펴냄)에서는 ‘이를 계기로 김재관과 오원철은 멀어지게 된다’는 정도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김재관 박사가 1975년 초대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장으로 나가게 된 것은 아마 오원철 경제2수석과의 그런 마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재관 박사는 5년간 표준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국가표준의 확립’에 진력(盡力)했다. 모든 산업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것이 표준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나노미터급 낸드플래시 메모리 분야의 최강자(最强者)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자동차·조선·철강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한국표준과학원의 뒷받침 덕분이다.
 
 
  戰時에도 인재를 키운 李承晩
 
  대통령에게 당돌하게 〈철강공업육성방안〉을 내민 젊은이를 중용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지만, 그 젊은이를 키운 것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었다. 6·25가 일어난 1950년 서울대 기계공업과에 입학한 김재관은 전란(戰亂) 중에도 전장(戰場)으로 나가지 않고 전시(戰時)연합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 덕분이었다. “못 배운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는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이후 국가를 일으키려면 우수한 인재들을 살려내고 가르쳐야 한다고 확신했다.
 
  김재관 박사가 그 가난했던 1950년대에 독일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승만 대통령 덕분이었다. 김 박사는 독일 유학 시험에 붙을 무렵 산업은행 입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산업은행은 변변한 직장이 없던 당시 국내 최고의 직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독일 유학시험 합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구용서(具鎔書) 산은 총재는 그가 유학을 가 있는 동안 월급을 지급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덕분에 김 박사는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덜고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구용서 총재가 실제 근무하지도 않는 신입 직원에게 월급까지 주면서 유학을 도운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재 양성 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학을 간 젊은이는 죽어라 하고 공부했다. 그리고 가난한 조국으로 돌아와 철강·자동차·조선 산업을 일으키고, 반도체 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전쟁통에도 인재를 길렀던 노(老) 대통령, 그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젊은 공학도, 그 젊은 공학도를 알아본 40대 군인 출신 대통령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역사는 청산하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다.
 
  아쉽게도 ‘김재관’이라는 이름은 박태준(朴泰俊), 오원철, 정주영(鄭周永), 정세영, 최형섭 같은 개발연대(開發年代)의 스타들에게 묻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 시대에 활약했던 원로(元老) 과학기술자들이나 그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할 뿐이었다. 다행히 최근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평전이 나왔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제대로 알리려는 이런 노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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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jeshi@yahoo.com    (2022-03-13) 찬성 : 2   반대 : 0
충분히 이해가 가는 내용 이네요. 특히 역사는 청산하고 단절하는게 아니라 면면히 이어가는 것이다 갈라치기 안하고 온국민이 힘을 합해서 이룬 경제기적입니다

20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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