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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列傳

마당극 30년 윤문식

“재주도 있고 싸가지도 있는 광대가 진짜 광대”

글 : 장원재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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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극은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다 부담 없이 즐기고 좋아할 수 있어”
⊙ “서양 번역극은 갓 쓰고 자전거 타는 느낌, ‘제대로 놀아 보자’는 생각에서 마당극 시작”
⊙ 마흔 살 넘어서 마당극으로 이름 알려

尹文植
⊙ 71세.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
⊙ 극단 가교, 극단 민예, 극단 현대극장, 국립극단, 극단 미추 등에서 활동.
⊙ 출연작: 연극 <탈의 소리> <우리 읍내> <미련한 팔자대감> <한네의 승천> <베니스의 상인>
    <맥베스> 등, 마당놀이 <심청전> <허생전> <춘향전> <애랑전> <마당놀이전> <평강온달전>
    <변강쇠>, 영화 <투캅스> <두사부일체> <공공의 적> <귀신이 산다> <가문의 귀환>,
    TV드라마 <왕룽일가> <여명의 눈동자> <삼국기> <토지> <추노> <대물> 등.

張源宰
⊙ 47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연극학 박사.
⊙ 前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現 SNS 바른소리사람들 대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 저서: 《증언연극사》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 《논어를 축구로 풀다》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근엄하지만 책임감에 홀로 힘겨워하는’ 이미지다. ‘아버지 세대’에게 던져진 세월은 유난히 가혹했다. 어려운 시대를 무사히 돌파하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지상과제였다. 소설가 김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 몸으로 바닥에 부딪치며 공회전(空回轉)’하는 것이 숙명이었던 시대다. 그로부터 반 발짝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아버지 상(像)이 있다. 해학과 유머로 삶의 어려움을 슬쩍 비켜 가는 사람. 모든 고난을 즉각 해결하지는 못해도 고생을 견딜 마음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누구. 그래서 윤문식(尹文植)이다.
 
  —고향이 충청남도 서산(瑞山)이네요. 부모님도 다 그곳 분인가요.
 
  “제가 1943년 1월생입니다. 아버님 함자는 윤도완(尹道完)이고 제가 일곱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 성함은 정규옥(鄭奎玉). 42년 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날짜를 잊지 못합니다.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났던 바로 그날이랑 같은 날이거든요.”
 
  기사를 찾아보니 대한민국 역대 최악의 화재로 꼽히는 사고가 일어난 날짜가 나왔다. 1971년 12월 25일이다.
 
  “아버지는 읍사무소 공무원이었답니다. 춤, 노래에 일가견이 있었고 선대(先代)의 재산을 거의 탕진했다고 들었습니다. 조부(祖父)님이 그 시절로는 아주 드물게 쌍둥이였는데, 쌍둥이 형님, 그러니까 제게는 큰할아버님 되는 어른은 염전도 크게 하고 지금도 후손들이 대산중학교라고, 사립학교 이사장을 할 만큼 재산관리를 잘하셨습니다. 저희 쪽 줄기는 물려받은 재산 다 없앤 거죠.”
 
 
  곡마단 공연 좋아해
 
  부모님은 슬하에 3남5녀를 두었다. 윤문식은 남자로는 두 번째, 전체로는 여섯 번째다. 큰누님의 며느리가 요즘 방송에서 단아한 말솜씨를 뽐내는 성우(聲優) 송도순이다. 윤문식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바닷가에서 2km쯤 떨어진 서산 읍내다. 읍내에 살았어도 서산사람의 성향은 여전히 완강해서 게장이라든가, 아무튼 뭐 비릿한 것 없이는 지금도 밥이 잘 안 넘어간다고 한다.
 
  —어려서도 흥이 많았나요.
 
  “6·25 때 비행기 폭격이 있으면 방공(防空) 사이렌이 울리거든요. 방에서 옥수수밭으로 피란을 가는데 저는 얼른 달려가서 탄피 집어 올 생각을 했어요. 비행기 기총소사 탄피가 덩어리도 크고 엿도 많이 바꿔 줬거든. 6·25 동란 이야기는 사실 웃으며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죠. 인민군이 둠벙에서 수영하는 것도 보고 남로당이 대창으로 주민들 살해하는 것도 목격하고….
 
  아무튼, 저는 애초에 사람 많은 곳을 좋아했어요. 서커스, 그때는 곡마단이죠. 언제 공연을 한다 그러면 며칠 전부터 밥도 못 먹을 만큼 설레고 가슴도 뛰고…. 곡마단 단원들이 동네 다니면서 머물 곳을 찾아 민박을 했거든요. 부부, 가족 단위 단원들이 많았으니까요.
 
  저는 그분들 찾아가서 심부름도 해 주고 호박도 따 주고, 대신에 공연을 공짜로 보았습니다. 남들은 1부 서커스 공연이 좋다는데 저는 2부에서 공연하는 연극이 정말 좋더라고요. 지금도 기억나는 작품이 많아요. 예를 들어 <원수 맺은 두 남매>. 계모가 전실(前室) 자식들을 학대한다는 내용인데 아이들을 인두로 지지는 대목을 그림자극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대목에 객석에서 비명소리가 나고 울음보가 터지고 난리가 납니다. 계모 역으로 나왔던 배우한테 방을 내줬던 집에서는 ‘당장 방 빼라!’며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저는 공연을 보고 돌아와서 어머니 친구들에게 모노드라마처럼 재연을 했습니다.”
 
 
  “배우 아니면 무당 되었을 것”
 
  살짝 추가설명을 하기로 하자.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이라면 여성들이 집 밖으로 구경다니는 것을 점잖지 못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연속극이 정말 보고 싶은데, 집안 어른들과 식구들이 모여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 일이라, 남편이 살짝 열어 준 문틈으로 동냥하듯 텔레비전을 보던 분들이 60년대, 70년대의 어머니들이다. 아이들이 재롱 떠는 걸 보는 일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으니 윤문식은 말하자면 이야기에 주린 어머니와 친구 분들을 위해 ‘중계방송’을 한 셈이다.
 
  “문제는 이 짓이 성에 안 차더라, 그 말입니다. 어머니 앞에서만 하지 말고 서커스단에서 진짜로 하고 싶었어요. 만약에 제가 연극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면 무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뭔가 일상에서 벗어난 흥겨움과 떠들썩함, 거기에 가미된 약간의 불온한 기운이 그의 유전자에 정통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자기고백이다. 소년은 그 운명을 일찍 감지한 것이다.
 
  —배우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인 계기는 어떤 것입니까.
 
  “제가 서산초·중을 거쳐서 서산농림고등학교(현 서산 중앙고)에 진학을 했습니다. 농고니까 농사를 짓는 것이 교과과정에 포함된 실습이거든요. 학생들이 일해서 추수하면 쌀이 500가마, 고구마가 200가마 정도 나왔습니다. 그러면 가을에 추수감사절이라고 해서 목욕탕에다 고구마 쪄서 학생들한테 두 개씩 나누어 주고 국화빵 두어 개 주고 끝나요. 명목은 실험실습이지만 농사일은 학생들이 주로 다 한 거잖습니까. 500가마 수확했는데 도(道)에다가는 200가마 나왔다고 보고하고 나머지는 선생님들끼리 나누어 갖는 겁니다.
 
  추수감사절에 학교에서 소인극(素人劇·아마추어 연극)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제가 이 이야기를 소재로 작품을 쓰고 공연을 했거든요. 말하자면 오늘날 마당놀이 비슷한 공연이었죠. 자기들을 욕하는 건데 선생님들이 좋아하고 관객 반응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반이 항상 1등을 했어요. 3년 내내.
 
  졸업 무렵에 교장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윤군은 만약에 대학을 가면 연극영화과로 가는 것이 좋겠다. 자네는 그쪽에 재능이 확실하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때부터 제가 바람이 들어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美7사단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해
 
박인환(왼쪽)과 최주봉(오른쪽)은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기들이다.
  ‘과부’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름대로 공부를 잘하던 아들이 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배우라니. 연극영화과 진학을 결사반대한 건 당연한 이치다. 그는 어떻게 했을까.
 
  “가출했습니다. 학교는 가고 싶고 어머니는 완강하고 수중에 돈은 없고…. 동두천 미7사단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돈을 모았죠. 그 돈으로 콜롬비아학원이라고 종합반 다니면서 재수 준비하고 입학금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중앙대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지더라고요. 어머니는 제가 학교 졸업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동기 중에는 최주봉·박인환이 유명하다. KBS 드라마국장을 역임한 최상식, 국립극단 단장을 지낸 최치림도 동기동창이다. 대학은 1964년 입학, 1974년 졸업이다. 어머니는 1971년 가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전국대학생 연극경연대회에서 아들이 김상열 작(作) 연출의 <탈의 소리>로 대상(大賞)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등에서 열연한 안병경이 함께 출연했던 무대다.
 
  “그 작품이 어머니가 제 공연을 보신 유일한 작품입니다. 전국 각 대학에서 참가했다고는 하지만, 대학생들 연극이 뭐 별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입장료는 무료였으니까 사람이 많이 오기는 왔는데, 저희는 다른 학교와는 좀 다르게 특색 있는 공연을 해 보자, 그래서 판소리탈춤을 하면서 계백장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무세중 선생께 석 달 동안 탈춤, 판소리 배워서 제대로 놀았죠. 사람들이 박수치고 신나하니까 어머니가 제일 앞에 앉았다가 일어나셔서 ‘저게 우리 아들이요!’ 하며 좋아하셨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죠.”
 
  —대학교를 좀 길게 다녔네요.
 
  “1964년 5월에 입대를 했습니다. 처음엔 강원도 화천의 6사단 교육중대의 행정병이었죠. 병장 때 사단 군악대에 차출되어서 대민봉사활동도 하고 인근지역 위문공연도 다녔어요. 사회도 보고 만담도 하고. 여기서 일단 3년을 보냈고, 제대 후엔 중대 출신들이 만든 극단 가교에 들어가서 활동했습니다. 연극하다 중간에 등록금 벌면 또 한 학기 다니고, 또 연극하고, 그러다 보니 학교 마치는 데 11년이 걸린 거죠.”
 
  1969년 극단 가교의 이근삼 작 이승규 연출 <미련한 팔자(八字)대감>이 그의 데뷔작이다. 한센병 환자의 자녀들이 학교에 진학하자 다른 학부형들이 이들을 ‘미감아’라 부르며 등교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센병은 전염병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교도소 재소자들이 가장 훌륭한 관객”
 
  “경비는 가톨릭 구라회(救癩會)가 부담하고 보건사회부·내무부·문교부가 후원해서 전국을 돌았습니다. 강원도·제주도는 상대적으로 한센병 환자가 드물어서 가지 않고 전국 72개 지역을 순회했어요. 4월에 시작해서 보리타작 끝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단원은 연출에 이승규·김상열, 배우로는 김동욱·박인환·최주봉·이효춘 등이 활동했죠.”
 
  구경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30리 밖에서도 공연을 보러 왔다. 공회당이라도 있는 지역은 실내에서 공연했지만 때로는 산비탈이, 개울가가 즉석 무대가 되기도 했다.
 
  “마당극과 뮤지컬, 즉석 기타연주 등을 섞은 공연이었다고 할까요. 공연 시간은 50분 정도였나? 얼른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또 판을 벌여야 하니까 길게 못 놀았죠. 어찌나 아쉬워들 하는지…. 공연 도중에 객석(?)과 무대 사이로 소달구지가 지나가기도 하고, 비 내리면 다 맞아 가면서 배우도 관객도 다 젖은 채 같이 웃고 떠들고, 이동 도중에 청년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예정에 없던 산골로 들어가 즉석공연을 한 번 더 한 일도 있고…. 아무튼 에피소드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극단 가교의 프로젝트는 미국인 선교사 모어 여사와 만나면서 성극(聖劇)으로 확대된다.
 
  “그림자연극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꾸민 <평화의 왕자>, 식모살이를 하는 복순이 이야기로 코믹하게 번안한 <민나 막달레나> 같은 작품을 가지고 또 전국을 돌았습니다. 교도소 순회공연만 해도 3~4년을 계속했지요. 내가 그래서 남들 안 가 본 곳을 많이 가 봤어요. 심지어는 육군교도소인 이른바 남한산성에서 공연한 적도 있으니까. …”
 
  —특이한 장소에서 특별한 관객들을 상대한 거네요.
 
  “교정시설에는 다 강당이나 극장이 있습니다. 수감자들을 교화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관람 태도는 최고입니다. 전 세계에서 이들만큼 훌륭한 관객은 없을 겁니다. 작은 단서에도 울고 웃고, 집중력이 대단해요. 반응이 뜨겁고 즉각적이죠. 단, 영등포구치소만 빼고. 여기는 미결수들이 있는 곳이라 관객 태도가 불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휘파람 불고 공연 방해하고…. 영등포 구치소는 다시는 안 갑니다.”
 
 
  극단 가교의 지방공연
 
1996년 극단 미추에서 공연한 <봄이 오면 산에 들에>에 출연한 윤문식(오른쪽).
  —한센병과 관련한 계몽연극인 <미련한 팔자대감>을 한센병 환우들 앞에서 공연한 적은 혹시 없습니까.
 
  “왜 없겠어요? 뭍에서 주민증 맡기고 소록도로 들어갔습니다. 주민들 말씀이, 종교인 빼고는 건강한 외지인 실물로 본 것은 저희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이듬해에 다른 작품 가지고 또 공연했는데, 배우들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고,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 소록도 안에도 교정시설이 있어요. 거기 가서도 공연을 했습니다.”
 
  —교도소 순회공연 중의 에피소드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극단 총무 최주봉이 철제 가방에 소도구를 넣고 관리를 했는데,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겁니다. 공연 못할 뻔했죠. 교도관이 객석에다 ‘1033번, 열어!’라고 소리치니 전문가(?)가 바로 달려 나오더군요. 가방에다 눈 감고 귀 대고 다이얼 돌려서 바로 가방 열었습니다. 씩 웃더니 ‘난 날 밝으면 일이 안 돼’라더군요. 이 말을 연극 대사에 저희가 그대로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지방공연의 추억은 더 있다. 모파상의 <비계덩어리>를 번안한 작품과 이근삼 작 <율보>를 가지고 ‘천막극장’을 기획한 일이다. 아랍족장들의 천막을 보고 영감을 받아 500명 정도가 들어갈 만한 텐트를 제작하고 만리포해수욕장, 명지대 수영장, 도봉산장, 연곡해수욕장 등을 돌며 공연을 했다.
 
  “지방공연은 다니고 싶어서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공연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명동 국립예술극장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봄에 2~3개월 가을 2~3개월밖에 대관을 안 했습니다. 극장을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죠. 게다가 가교는 후발주자로 출발한 극단이라 대관 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담당자한테 갈비를 사다주고 로비(?)를 해도 차례가 거의 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극장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가자’라고 발상을 전환한 결과가 지방공연입니다.
 
  대한민국 팔도강산 안 가 본 곳이 없죠. 횃불 켜 놓고 공연하고 제방이나 둑도 무대로 쓰고, 물론 다 무료로. 극단 가교 멤버들이 현장성이 강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겁니다. 사실은 마당놀이의 시초가 극단 미추라고 알고 있는데, 제 견해로는 가교의 지방공연이 마당극의 원조(元祖)입니다.”
 
 
  천막극장
 
마당놀이 <삼국지>(2004년)에 출연한 김성녀, 윤문식, 김종엽(오른쪽부터). 30년간 마당놀이를 함께 한 ‘마당놀이 3총사’다.
  —20세기 후반에 환경연극이라고, 관객들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공연하는 방식이 유럽에서 유행했는데, 가교는 몇십 년 전에 첨단을 달린 거로군요.
 
  “독일에 수레극이라고 있었죠. 수레에다 무대를 꾸미고 여러 군데에 분산배치해 놓고 이쪽에서 1막 하면 저쪽에서 2막 하고…. 그 뒤로 이동무대라는 것도 있었잖아요. 관객들 모아 놓고 1번 팀이 와서 공연하고 가면 2번 팀이 다가와서 공연하는…. 가교의 연극이 바로 그런 식이었죠. 지금이야 극장도 많고 여건이 좋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 자체가 없었습니다.”
 
  천막극장은 충남 대천 해변에서 해일(海溢)로 유실된다. 그 전에, 강릉 경포대에 천막을 치고 야학살리기 공연을 했다. 연출가 이승규가 한때 교사로 일했던 흙벽돌 야학 풍호중학교가 땅 주인의 철거지시로 위기에 봉착하자 수익금을 남겨 땅을 사 줬다.
 
  “저희 힘만으로 일이 된 것은 아니고요, 이 이야기가 《선데이서울》에 기사화되었거든. 현대시멘트에서 시멘트 2000포대 기부해서 건물도 올리고, 진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나중에 미국공연을 갔을 때 현지 공항에 마중나온 교포 하나가 “저 풍호중학 출신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윤문식은 이 사건을 일생에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윤문식은 악극과 마당극을 주로 해 온 배우다’라고 대중들은 생각한다. 마당극 3총사로 윤문식, 김성녀, 김종엽을 떠올리는 관객들도 많다.
 
  “에이, 그래도 딸린 식구들이 40~50명 정도 되는데…. 그렇게 말씀하면 곤란하고요. 왜 마당극을 했느냐.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좋아하고 공연을 할 때마다 객석을 다 채워 줬으니까 계속한 거죠. 결국 마당극을 이어 간 건 관객의 힘이라고 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마당극이 30년 넘게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까.
 
  “30년 넘도록 공연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동안에 우리가 해 왔던 연극들이 너무 공연하는 사람들 위주로 해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마당극은 대중성을 파고들어 갔기 때문에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다 부담 없이 즐기고 좋아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것이 공연을 오래할 수 있었던 이유 같습니다.”
 
 
  일본 배우들의 춘향전
 
  —공연하는 사람들 위주의 공연이라면 혹시 번역극을 말하는 건지요. 선생님 젊었을 때는 번역극이 대세였는데 좀 외로웠겠습니다.
 
  “제가 연극 처음 시작한 세월이 벌써 50년 이쪽저쪽입니다.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 서양 번역극은 하는 사람도 모르고, 보는 사람도 모르고, 그러니까 마치 갓 쓰고 자전거 타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배우가 진실성을 가지고 관객과 만나야 하는데, 자꾸 헛도는 거죠. 등장인물 이름만 해도 서양이름을 그대로 썼는데, 저는 이게 영 어색하더라고요. 연극이라는 물건이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 이외에도 미세하게 표현해야 할 사항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문화와 관습을 속속들이 꿰지 않고는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제가 그걸 언제 느꼈느냐. 일본의 꽤 유명한 극단이 국립극장에 와서 <춘향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부 일본 배우가 나와서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영 어색한 겁니다. 예를 들면, 방자랑 사또랑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술을 먹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나중에 방자가 이도령과 춘향이를 연결해 주면서 신분 차이를 미묘하게 뒤집는 유머, 그걸 극적으로 구사할 수 없는 거죠. 왜. 이미 동석해서 술자리를 같이할 만큼 평등한 존재니까.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면, 우리가 번역극을 공연할 때 그런 실수를 안 했으리라고는 장담 못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공연한 번역극의 경유지(經由地)였던 일본 연극계도 서양의 역사, 문화, 풍속을 다 알고 번역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실수 투성이였겠죠. 그런 혼란이 젊어서는 영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1년에 한 번씩 번역극도 해”
 
  —마당극은 몸에 맞는 옷 같은 느낌이 들던가요.
 
  “그렇죠. 번역극을 20년 하다가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우리 놀이문화를 가지고, 우리의 언어와 정서를 가지고 우리의 춤사위, 우리의 노래, 우리의 말을 이입해서 공연을 해 보자’ 하고 조심스럽게 출발했던 장르가 마당놀이였어요. 국수주의나 민족주의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제대로 놀아 보자, 딱 이거 하나입니다.
 
  사실은, 불안하게 출발했죠. 관객들 반응이 어떨지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한데 문화체육관에서 공연하는 날 난리가 났어요. 유리창이 깨지고…. 공연 첫날 눈이 펑펑 내렸는데 관객들 줄이 몇십 미터 쭉 늘어선 걸 봤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원하는 걸 외면하고, 내가 무슨 대단한 철학자라고 어려운 연극을 해야 하는가, 마당극을 가지고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자기확신이 생기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서양연극의 가치와 작품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양 것도 대단한 물건이 많아요. 저는 번역극도 한 해에 한 번씩은 공연합니다. 다만, 제 방식대로 소화하고 삭혀서 재미있게 하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광대 역만 10번 맡아
 
  윤문식은 국립극단 시절 <베니스의 상인>을 연출했던 영국 내셔널시어터의 상임연출 패트릭 터커를 잊지 못한다.
 
  “서양 연극의 진수(眞髓)가 이런 것이로구나, 아주 맛을 제대로 봤어요. 저는 광대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패트릭 터커는 머릿속에 완벽한 플랜을 다 집어넣고 연습장에 나타납니다. 배우들을 데리고 여기 가 봐라, 저렇게 해 봐라, 속칭 ‘장기를 두지’ 않더군요. 가능성이 보이는 배우에게는 주문량이 늘어납니다. 그걸 소화하고 추가주문 받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더군요.
 
  공연 하루 전날에는 배우들을 다 쉬게 하고 자기 혼자 나와서 조명을 맞춰보며 세세하게 계산을 했습니다. 연극 안팎의 모든 흐름을 다 꿰고 있는데도 다시 한 번 정밀하게 마무리를 하는 겁니다. 존경스러웠죠.”
 
  셰익스피어의 연극에는 광대나 광인(狂人)이 자주 등장한다. 일상(日常)과 비(非)일상의 경계에 자리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특이한 존재다. 그들은 미래의 사건을 암시하고, 사람들이 차마 남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하는 속마음을 넌지시 말한다.
 
  윤문식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10편 했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광대 역을 연기했다. 이런 역할을 자주 맡은 것은 무슨 뜻일까. 말하자면 꽉 짜인 틀 속에서 그래도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배역이 혹시 광대여서가 아니었을까. 본인도, 연출가들도 그 점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평론가 구히서는 “윤문식의 광대는 서양광대가 아니라 조선광대”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윤문식의 경력은 가교를 거쳐 극단 민예로, 현대극장으로, 다시 민예를 거쳐 국립극단으로 이어진다. 거의 조연으로만 떠돌던,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던 배우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윤문식은 무명(無名)시절이 길었던 배우다.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건 마흔이 넘어서다. 마당놀이를 하면서 비로소 배우로서의 재능과 명성이 만개(滿開)했고 전국적인 인지도를 획득했다. 그래서 마당놀이는 배우 윤문식에게 밥을 먹게 해 준, 고맙고도 편안한 공연이다.
 
  “극단 가교에서 민예로 가서 몇년 있었어요. 허규 선생님이 ‘문식이는 우리랑 맞아’라며 스카우트했습니다.”
 
 
  연극 <놀부뎐>
 
마당놀이 <심청>(2004년). 배우와 관객이 함께 호흡하는 데 매력이 있다.
  윤문식은 <한네의 승천>에서 동네사람으로 나왔고 <물도리동> <서울 말뚝이> 등에도 출연했다. <다시라기>는 연극 외적인 이유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초연 때 10·26이 일어났고 재공연할 때 12·12가 일어났다. 장충동에서 공연을 마치고 걸어 내려오는데 무장군인들이 늘어서서 실전(實戰)모드로 무전을 주고받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계가 막연하던 차에 현대극장에서 뮤지컬을 한다며 월급제 단원을 뽑는다고 해서 옮겨갔는데 석 달인가, 넉 달인가 지나니 급여가 끊어졌다.
 
  “그래도 거기서 타이틀 롤도 해 봤지.”
 
  무명배우라더니 웬 타일틀 롤?
 
  “해태제과가 제작비를 대서 만들었던 어린이 명작극장, <프란다스의 개>의 ‘개’가 나였고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난장이 중 하나가 저였습니다. 추송웅이 후크 선장으로 출연한 <피터 팬>에서는 해적이었죠.”
 
  윤문식이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공연이 있다. 1980년 마당세실극장에서 공연한 <놀부뎐>이다. 소설가 최인훈의 장편을 각색하고, 김종엽 김성녀 윤문식 셋이 나와 시류(時流)에 어울리는, 예를 들어 ‘형님 나는 갚는다면 갚는 놈이요’ 같은 대사를 집어넣어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던 연극이다. (10·26 당시 김재규가 했던 ‘형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를 패러디)
 
  “마당놀이의 핵심은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이잖아요. 연극은 관객들 마음의 허전한 부분을 대리만족시키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고. 이 연극이 히트한 것은 현장감을 실시간으로 살려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슈화되었던 모든 문제들을 애드립으로 치는 거죠.
 
  지금 제가 예를 든 건 정치적인 풍자였지만 세태를 반영한 대사도 많았습니다. 그때 쥐포가 막 유행했는데 놀부가 흥부집에 찾아오니까 판소리에 나오는 산해진미를 쭉 대고서 나중에 ‘쥐포를 너무 타지 않게 구워서’라는 한 마디를 집어넣는 겁니다. 관객들이 다 뒤집어져요. <놀부뎐>을 확대해서 발전시키고 스케일을 크게 가져간 공연이 바로 마당놀이입니다.”
 
  —흥부의 재산은 제비가 물어다 준 것이 아니라 관료가 몰래 묻어 둔 물품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죠. 형제가 다 도둑으로 몰려 관아에 갇혔을 때 흥부(윤문식)가 ‘형님 우리 병보석으로 나갑시다’라고 침 찍어 바르며 보석금 액수를 계산하는 대목도 아주 재밌었습니다.
 
 
  원작자와의 異見 때문에 상연 중단
 
  “그 당시에 정치인들, 권력 있는 사람들은 일단 잡혀가더라도 다 보석으로 풀려나고…. 그렇게 잘못된 사회상을 풍자한 겁니다. 제가 바로 다음 대목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한 구절을 집어넣었어요. ‘백성은 몽매하니 속임수로 다스려라.’
 
  그런 것이 우리 전통극의 저력 아닐까요? 서양연극을 보면 하인이 절대 주인을 때리지 못해요. 바른말을 해도 항상 돌려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뚝이가 양반을 때리잖아요. 그것이 굉장히 적극적인 행동이라 관객들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마당놀이 <이춘풍전>에서도 이춘풍보다 춘풍의 처가 더 훌륭하지요. 몽둥이로 때리잖아요, 바람난 남편을 잡아다가.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신분제 질서가 단단했던 만큼 억울한 사연들이 많았고, 그것을 풀어 주는 역할을 연극이 수행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흐름이 지하수처럼 우리 유전자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전설의 작품은 더 이상 공연을 못한다. 원작자와의 이견(異見) 때문이다.
 
  “최인훈 선생은 놀부를 좀 더 주체적이고 멋있는 인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배우 입장에서는 풍자와 해학이 들어가려면 놀부가 너무 멋있게만 나와서는 곤란하고…. 의견접근을 해서 죽기 전에는 꼭 한 번 다시 하고 싶네요.”
 
 
  “결국 진솔한 사람이 이긴다”
 
1996년 TV사극 <임꺽정>에 출연한 윤문식(왼쪽 끝).
  —나중에 TV드라마랑 영화도 많이했죠?
 
  “먹고살려고요. 기억나는 작품은 ‘싸가지’라는 유행어를 히트시킨 <투캅스>가 있습니다. 영화 단역은 20편 정도 찍었고, 텔레비전 드라마로는 KBS <토지>의 주갑이 역이 떠오릅니다. 술 먹고 김삿갓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인물인데, 제 성정과 비슷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했습니다.”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스스로를 ‘광대(廣大)’라고 했다. 배우와 광대는 미묘하게 다른 개념일까.
 
  —윤문식에게 연극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모든 것이죠. 연극을 하려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네요. 고생을 각오하고 덤비되 성공에 연연하지 말라고.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이 멋진 인생이다, 라는 신념을 가지라고.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몰라.”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한국 신극(新劇)의 출발이 지사적(志士的) 연극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젊었을 때는 연극인들 가운데서도 자기들을 애국자 비슷하게 여기는 분들이 계셨어요. 잠자는 청춘들을 일깨워서 그 사람들에게 인생의 비전을 발견하게 한다든가, 미래의 희망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겠지요. 여기에 덧붙여 현실의 고통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광대(廣大)인 것이고. 광대는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출 수도 있는 유연한 사람입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서두르지 말라는 이야기도 꼭 하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진솔한 사람이 이깁니다.”
 
 
  최주봉과 박인환
 
  여기서 윤문식은 동기인 최주봉, 박인환의 얘기를 했다.
 
  “최주봉은 삽교, 박인환은 청주로 다 충청도 동향인 데다 셋 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모두 20년 이상 자기 앞가림도 못할 만큼 어렵게 지냈지만 결국 다들 살아남아서 지금도 활동을 계속합니다. 각자 자기만이 할 수 있는 특장을 개발한 거죠. 최주봉은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특이하게 확대하는 재능이 있고, 박인환은 인물의 성격분석을 치밀하게 해 와서 다른 배우들의 중심까지 잡아 주는 안정감이 뛰어납니다.
 
  이것은 재능에 수십 년의 수련과 노력이 합쳐진 결과입니다. 무슨 직업이든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분들을 저는 그래서 존경합니다. 제일 중요한 건 후세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배우죠. 대중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배우가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구성지게 이어지는 윤문식의 말투와 흥에 겨워 배어 나오는 어깻짓을 문자로 옮기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 문자는 얼마나 덧없는가. 연극은 그래서 총체적(總體的) 예술인 것인가. 상념이 이어지는데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광대들 중에는 재주 많은 것들이 ‘싸가지’가 없는 경우가 많아. 재주도 있고 싸가지도 있는 광대가 진짜 광대지.”
 
  드디어 윤문식의 유행어를 오리지널로 한 번 들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사투리와 몸짓은 어쩌면 우리 아버지 세대가 걸어온 생애의 축소판은 아닌가. 엄하고 과묵하며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는 아버지도 훌륭하지만, 풍자와 해학으로 버티며 세상과 어울리는 아버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문식은 천생 유쾌한 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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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대식    (2014-11-06) 찬성 : 99   반대 : 237
우리네 서산사람들의 영웅입죠
선배님 부디 오래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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