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이라고 하면, ‘이승만 역도’밖에 기억이 안 나요”(탈북 여대생)
⊙ 이승만의 《독립정신》, 독립·건국투쟁, 건국업적 등 총 10회 강의
⊙ 토론 시간에 “이승만, 민주주의 거부… 사기꾼·협잡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 않나?” 질문도 나와
⊙ 이승만의 《독립정신》, 독립·건국투쟁, 건국업적 등 총 10회 강의
⊙ 토론 시간에 “이승만, 민주주의 거부… 사기꾼·협잡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 않나?” 질문도 나와
- 10월 8일 이승만학당 첫 강의.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이승만의 청년시절에 대해 강의했다.
“이승만에 대해 어떻게 배웠냐고요? 기억이 안 나네요.”
10월 8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자유통일문화원(원장 이애란) 강의실. 이승만학당(교장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강의 시작 전, 강의에 참석한 탈북 여대생에게 “북한에서는 이승만에 대해 어떻게 배웠느냐?”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곁에 있던 이애란 원장이 거들었다. “북한에서는 혁명역사교과서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언급되는데, ‘이승만 역도가 먼저 정권을 수립해 민족을 분단시켰다’ ‘이승만 역도가 침략해 와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나와요.”

이승만학당은 자유통일문화원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정신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지난 9월 22일 설립했다. 이날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될 이승만 강좌의 첫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탈북학생과 청년 20여 명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이애란 원장은 다음 시간부터 교재로 사용할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이 원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책값은 9000원이야. 그냥 나누어주면 좋겠지만, 그러면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제 돈을 내고 책을 사 봐야 ‘내 책이다’하는 생각이 들고,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책 한 권 산다고 밥 못 먹는 사람은 여기 없지?” 여기저기서 조그맣게 “네”하는 소리가 들렸다. 돈 내라는 얘기에 김이 조금 샌 듯했다.
청년시절까지의 이승만 강의
이영훈 교수가 강의를 시작했다.
“어느 나라나 건국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를 국부(國父)라고 합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한민국에서 그런 분은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좌우(左右)합작에 의한 민족통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고 했습니다. 만일 좌우합작정부가 들어섰다면, 내각책임제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크고, 동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산당이 작용해서 결국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걸 막은 분입니다. 이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분단을 감수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 후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불행히도 건국 당시의 갈등이 커서 지금도 많은 국민이 그분의 업적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첫 강의인 오늘은 ‘유년기와 청년기의 이승만’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대통령의 생애는 오늘 하루에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청년기에 그 사상 대부분이 형성되는 만큼 청년기까지만 이야기해도 그분에 대해 기본적인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웨덴 기자가 본 조선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1875년 3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는 얘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양녕대군의 후예라는 이승만의 자의식(自意識), 배재학당 진학, 만민공동회에서의 활약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제사학자인 이영훈 교수는 단순히 이승만의 청년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조선(대한제국)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온 아손 크래프트라는 스웨덴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성전옥서(典獄署·교도소)를 방문했는데, 전옥(교도소장)이 조심스럽게 ‘당신의 등을 좀 만져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손 크래프트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러라고 했죠. 그러자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아손 크래프트의 등을 만져보던 전옥이 말했습니다. ‘이상하네. 왜 등에 뿔이 없지요?’”
학생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영훈 교수가 강의를 이어갔다. “지금으로 치면 국장급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19세기도 아니고 20세기에 접어든 1904년에 서양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 이 정도였습니다. 내가 경제사학을 하면서 지방 양반들이 남긴 일기 같은 걸 많이 읽어보았는데, 어느 일기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서울 수원동에서는 양이(洋夷)들이 어린이들을 사서 구워먹거나 삶아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원동이라는 동네가 어딘가 찾아보았는데, 당시 그런 동네는 없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얘기,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 시골 양반은 자기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청년 이승만이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했다가 5년7개월간의 한성감옥 생활을 하게 됐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영훈 교수는 다시 아손 크래프트가 본 당시 조선의 행형(行刑)제도의 잔인함에 대해 말했다.
“아손 크래프트는 한국에 있는 동안 강도·강간·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를 교형(絞刑)에 처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당시 교형은 지금처럼 교수대에서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처형에 앞서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먼저 두 팔을 부러뜨렸습니다.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며 거의 혼절했지요. 이어 두 발을 차례로 부러뜨린 후 밧줄로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나라가 당시의 조선이었습니다. 아손 크래프트는 이 장면을 본 후 나흘간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을 다른 동료 죄수들도 둘러싸고 보게 했습니다. 이승만도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어쩌면 저렇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이승만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이승만이 만들던 영어사전
이야기는 어느새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이승만이 〈한영사전〉 편찬 작업을 중지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게 되는 시기까지 왔다. 이영훈 교수가 이승만이 편찬하다가 중단한 〈한영사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family’에 대해 뭐라고 했나 봤더니 ‘가족’이라는 말은 안 보이고 ‘가솔, 가원(家員)’이라는 당시 사용하던 말을 사용했더군요. ‘가족’은 나중에 일본을 통해 들어온 말입니다. ‘country’라는 말은 ‘국가’라는 말 대신에 그냥 ‘국(國)’이라고 했어요. ‘국가’도 일본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 등에서 ‘나라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건 ‘국가’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조선은 근대 개념어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러일전쟁 후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모습, 한규설(韓圭卨)·민영환(閔泳煥)의 지시를 받고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가 헤이 국무장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등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일 등을 이야기한 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던 이승만이 귀국 후 YMCA에서 일하다가 다시 미국 망명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로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탈북대학생, “이승만, 민주주의 거부”
1시간20여 분에 걸친 강의를 마친 후, 이영훈 교수는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토론을 하자. 무슨 말이든 좋다”고 했다. 처음 지명을 받은 여학생은 “이승만 대통령이 그 힘든 감옥 생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전도를 하고, 독립에 대한 생각을 잃지 않은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이 든 탈북자 남학생이 질문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웠지만, 대통령이 된 후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독재로 간 것은 사실 아닙니까? 자기가 민주주의를 얘기해 놓고 그걸 거부했다면 그건 일관성이 부족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기꾼·협잡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분을 잘 지적해 주었다”면서 “나도 20대, 30대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1948년에 과연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아직도 성리학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 민주주의, 인권, 자유 이런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아마 전 국민의 3분의 2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정치지도자들은 저마다 생각이 달랐습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제냐, 내각제냐로 갈등을 겪었고, 건국한 지 불과 1년3개월 만에 야당은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내각제는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은 아는 게 없고, 정치 엘리트는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카리스마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권위주의 통치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주·양반 세력에 바탕을 둔 과두제적(寡頭制的) 지배구조에 변화가 왔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독재’라는 말은 문명을 파괴하고 국민을 가난 속으로 몰아넣었던 스탈린, 히틀러,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게나 쓰는 것”이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기는 했지만 독재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들어가면서 머리를 깎았다고 했는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설명해 달라” “이승만 대통령이 상하이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후 5개월이 지나서야 상하이로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나왔다.
이승만 업적 잘 정리한 북한군 출신 탈북자
북한군 대위 출신이라는 김영철(가명)씨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민주공화국 수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무교육 도입, 농지개혁 실시, 여순반란사건 후 숙군(肅軍) 등을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 꼽았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 아니겠느냐”면서 “나는 이승만 대통령을 ‘시대와 불화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현대사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는 게 느껴졌다. 이영훈 교수는 그의 말을 받아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영훈 교수가 “토론을 하자”고 할 때만 해도 ‘학생들이 쭈뼛거리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 활발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질문을 한 남학생도 거침이 없었다. 문득 ‘북한에서 자아비판이나 정치학습을 많이 해서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애란, “남한이 잘사는 것은 이승만 덕분”
이승만학당은 이날 강의를 포함해 총 10회에 걸쳐 매월 두 차례씩 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2~5회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교재로 해 이영훈 교수가 강의하고, 나머지 4회는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류석춘 연세대 교수,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 등이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승만의 건국투쟁, 건국 후 이승만의 업적, 이승만의 경쟁자들에 대해 강의한다.
이승만학당은 ‘탈북여성박사 1호’로 유명한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장의 노력으로 문을 열게 됐다. 1997년 생후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탈북한 이 원장은 이화여대에서 식품영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내외에서 북한인권 실태에 대한 고발에 앞장서 2010년 미국 국무부가 주는 ‘용기 있는 국제여성상’을 수상했다.
이애란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주목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처음 탈북해서 대한민국에 왔을 때만 해도, 나는 남한 사람들이 유능하고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아서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북한 사람들도 결코 게으르지 않았고, 열심히들 일했어요. 북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남한 사람들보다 머리가 나쁘거나 무능할 리도 없고요. 같은 민족인데 북한은 왜 가난하고 남한은 잘사는가를 생각하다가 7~8년 전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님이 지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책을 읽고 ‘아,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잘살게 된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년쯤 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쓴 《독립정신》을 읽었는데, 가슴이 끓어오르더군요.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1904년 조선의 모습과 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습이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지금의 북한은 그때만도 못하겠지요. 그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깊이 존경하게 됐어요.”
이영훈, “자유통일의 전사들이 나오기를…”
이애란 원장은 “정치인이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연방제 통일이니, ‘선(先)경제 후(後)통일’이니 하면서 어렵게만 생각하는데, 통일은 공산왕조 체제인 북한에 이승만 대통령이 생각했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입각한 공화국을 세우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비용 문제를 많이 걱정하는데,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철학을 심어줘서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면, 북한 주민들의 힘으로 북한 경제는 스스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애란 원장은 “이승만학당을 만들게 된 것도 탈북학생·청년들을 교육시켜 통일의 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1945년에도 갑자기 해방을 맞이하는 바람에 갈피를 못 잡고 혼란을 겪었잖아요. 언젠가 북한에 변고가 생기고 북한에 새로운 국가질서를 세워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탈북학생과 청년들을 교육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탈북학생들에게 이승만을 가르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애란 원장도 인정했다. “탈북학생·청년들에게 이승만학당 입학원서를 받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더니, 독재자, 부정선거, 친일파 등 한국 사회에서 흔히 하는 부정적인 얘기는 다 나오더군요.”
그는 “북한은 김정은이 김일성을 흉내 내는 ‘향수(鄕愁)정치’를 할 정도로 김일성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망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너무 멀리 떠나보내서 망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이승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9월 말 이승만학당 개교식 뉴스가 인터넷신문 등을 통해 나간 후 격려전화를 많이 받았다. ‘탈북학생들만이 아니라 국내인, 직장인 대상 강좌는 없느냐’는 전화도 있었고,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학당 미국분교도 만들어달라’는 분도 있었다”면서 “이런 데서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이승만학당 교장 이영훈 교수도 “학생들이 공부하고 취직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도 상당히 적극적이고 열의가 있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정신》에서 ‘우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성된 마음으로… 흉악한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이 학생들 속에서 언젠가 자유통일의 전사(戰士)들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며 희망을 덧붙였다.⊙
10월 8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자유통일문화원(원장 이애란) 강의실. 이승만학당(교장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강의 시작 전, 강의에 참석한 탈북 여대생에게 “북한에서는 이승만에 대해 어떻게 배웠느냐?”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곁에 있던 이애란 원장이 거들었다. “북한에서는 혁명역사교과서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언급되는데, ‘이승만 역도가 먼저 정권을 수립해 민족을 분단시켰다’ ‘이승만 역도가 침략해 와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나와요.”

이승만학당은 자유통일문화원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정신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지난 9월 22일 설립했다. 이날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될 이승만 강좌의 첫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탈북학생과 청년 20여 명이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이애란 원장은 다음 시간부터 교재로 사용할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이 원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책값은 9000원이야. 그냥 나누어주면 좋겠지만, 그러면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제 돈을 내고 책을 사 봐야 ‘내 책이다’하는 생각이 들고,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 책 한 권 산다고 밥 못 먹는 사람은 여기 없지?” 여기저기서 조그맣게 “네”하는 소리가 들렸다. 돈 내라는 얘기에 김이 조금 샌 듯했다.
청년시절까지의 이승만 강의
이영훈 교수가 강의를 시작했다.
“어느 나라나 건국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나라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를 국부(國父)라고 합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대한민국에서 그런 분은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좌우(左右)합작에 의한 민족통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고 했습니다. 만일 좌우합작정부가 들어섰다면, 내각책임제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크고, 동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산당이 작용해서 결국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걸 막은 분입니다. 이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분단을 감수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 후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불행히도 건국 당시의 갈등이 커서 지금도 많은 국민이 그분의 업적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첫 강의인 오늘은 ‘유년기와 청년기의 이승만’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대통령의 생애는 오늘 하루에 다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청년기에 그 사상 대부분이 형성되는 만큼 청년기까지만 이야기해도 그분에 대해 기본적인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웨덴 기자가 본 조선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1875년 3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는 얘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양녕대군의 후예라는 이승만의 자의식(自意識), 배재학당 진학, 만민공동회에서의 활약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제사학자인 이영훈 교수는 단순히 이승만의 청년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조선(대한제국)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온 아손 크래프트라는 스웨덴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성전옥서(典獄署·교도소)를 방문했는데, 전옥(교도소장)이 조심스럽게 ‘당신의 등을 좀 만져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손 크래프트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러라고 했죠. 그러자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아손 크래프트의 등을 만져보던 전옥이 말했습니다. ‘이상하네. 왜 등에 뿔이 없지요?’”
학생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영훈 교수가 강의를 이어갔다. “지금으로 치면 국장급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19세기도 아니고 20세기에 접어든 1904년에 서양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 이 정도였습니다. 내가 경제사학을 하면서 지방 양반들이 남긴 일기 같은 걸 많이 읽어보았는데, 어느 일기에는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서울 수원동에서는 양이(洋夷)들이 어린이들을 사서 구워먹거나 삶아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원동이라는 동네가 어딘가 찾아보았는데, 당시 그런 동네는 없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얘기,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 시골 양반은 자기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청년 이승만이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했다가 5년7개월간의 한성감옥 생활을 하게 됐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영훈 교수는 다시 아손 크래프트가 본 당시 조선의 행형(行刑)제도의 잔인함에 대해 말했다.
“아손 크래프트는 한국에 있는 동안 강도·강간·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를 교형(絞刑)에 처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당시 교형은 지금처럼 교수대에서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처형에 앞서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먼저 두 팔을 부러뜨렸습니다. 사형수는 비명을 지르며 거의 혼절했지요. 이어 두 발을 차례로 부러뜨린 후 밧줄로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나라가 당시의 조선이었습니다. 아손 크래프트는 이 장면을 본 후 나흘간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을 다른 동료 죄수들도 둘러싸고 보게 했습니다. 이승만도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보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어쩌면 저렇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이승만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이승만이 만들던 영어사전
이야기는 어느새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 이승만이 〈한영사전〉 편찬 작업을 중지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게 되는 시기까지 왔다. 이영훈 교수가 이승만이 편찬하다가 중단한 〈한영사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family’에 대해 뭐라고 했나 봤더니 ‘가족’이라는 말은 안 보이고 ‘가솔, 가원(家員)’이라는 당시 사용하던 말을 사용했더군요. ‘가족’은 나중에 일본을 통해 들어온 말입니다. ‘country’라는 말은 ‘국가’라는 말 대신에 그냥 ‘국(國)’이라고 했어요. ‘국가’도 일본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 등에서 ‘나라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건 ‘국가’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조선은 근대 개념어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었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러일전쟁 후 고종이 국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모습, 한규설(韓圭卨)·민영환(閔泳煥)의 지시를 받고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가 헤이 국무장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등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일 등을 이야기한 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던 이승만이 귀국 후 YMCA에서 일하다가 다시 미국 망명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로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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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에 서명하는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의 통치는 권위주의 통치였지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웠지만, 대통령이 된 후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독재로 간 것은 사실 아닙니까? 자기가 민주주의를 얘기해 놓고 그걸 거부했다면 그건 일관성이 부족했던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결국 사기꾼·협잡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이영훈 교수는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분을 잘 지적해 주었다”면서 “나도 20대, 30대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1948년에 과연 이 나라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아직도 성리학적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 민주주의, 인권, 자유 이런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아마 전 국민의 3분의 2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정치지도자들은 저마다 생각이 달랐습니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대통령제냐, 내각제냐로 갈등을 겪었고, 건국한 지 불과 1년3개월 만에 야당은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내각제는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은 아는 게 없고, 정치 엘리트는 분열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카리스마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권위주의 통치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주·양반 세력에 바탕을 둔 과두제적(寡頭制的) 지배구조에 변화가 왔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독재’라는 말은 문명을 파괴하고 국민을 가난 속으로 몰아넣었던 스탈린, 히틀러,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게나 쓰는 것”이라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기는 했지만 독재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들어가면서 머리를 깎았다고 했는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 설명해 달라” “이승만 대통령이 상하이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후 5개월이 지나서야 상하이로 갔던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나왔다.
이승만 업적 잘 정리한 북한군 출신 탈북자
북한군 대위 출신이라는 김영철(가명)씨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민주공화국 수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무교육 도입, 농지개혁 실시, 여순반란사건 후 숙군(肅軍) 등을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 꼽았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 아니겠느냐”면서 “나는 이승만 대통령을 ‘시대와 불화했던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현대사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는 게 느껴졌다. 이영훈 교수는 그의 말을 받아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영훈 교수가 “토론을 하자”고 할 때만 해도 ‘학생들이 쭈뼛거리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뜻밖에 활발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했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질문을 한 남학생도 거침이 없었다. 문득 ‘북한에서 자아비판이나 정치학습을 많이 해서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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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 원장. |
이승만학당은 ‘탈북여성박사 1호’로 유명한 이애란 자유통일문화원장의 노력으로 문을 열게 됐다. 1997년 생후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탈북한 이 원장은 이화여대에서 식품영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내외에서 북한인권 실태에 대한 고발에 앞장서 2010년 미국 국무부가 주는 ‘용기 있는 국제여성상’을 수상했다.
이애란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주목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처음 탈북해서 대한민국에 왔을 때만 해도, 나는 남한 사람들이 유능하고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아서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북한 사람들도 결코 게으르지 않았고, 열심히들 일했어요. 북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남한 사람들보다 머리가 나쁘거나 무능할 리도 없고요. 같은 민족인데 북한은 왜 가난하고 남한은 잘사는가를 생각하다가 7~8년 전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님이 지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책을 읽고 ‘아,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잘살게 된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2년쯤 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쓴 《독립정신》을 읽었는데, 가슴이 끓어오르더군요. 이승만 대통령이 말한 1904년 조선의 모습과 지금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습이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지금의 북한은 그때만도 못하겠지요. 그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깊이 존경하게 됐어요.”
이영훈, “자유통일의 전사들이 나오기를…”
이애란 원장은 “정치인이나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연방제 통일이니, ‘선(先)경제 후(後)통일’이니 하면서 어렵게만 생각하는데, 통일은 공산왕조 체제인 북한에 이승만 대통령이 생각했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입각한 공화국을 세우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비용 문제를 많이 걱정하는데,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철학을 심어줘서 스스로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면, 북한 주민들의 힘으로 북한 경제는 스스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애란 원장은 “이승만학당을 만들게 된 것도 탈북학생·청년들을 교육시켜 통일의 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1945년에도 갑자기 해방을 맞이하는 바람에 갈피를 못 잡고 혼란을 겪었잖아요. 언젠가 북한에 변고가 생기고 북한에 새로운 국가질서를 세워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탈북학생과 청년들을 교육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탈북학생들에게 이승만을 가르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애란 원장도 인정했다. “탈북학생·청년들에게 이승만학당 입학원서를 받으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더니, 독재자, 부정선거, 친일파 등 한국 사회에서 흔히 하는 부정적인 얘기는 다 나오더군요.”
그는 “북한은 김정은이 김일성을 흉내 내는 ‘향수(鄕愁)정치’를 할 정도로 김일성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망하고 있고, 대한민국은 이승만을 너무 멀리 떠나보내서 망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이승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9월 말 이승만학당 개교식 뉴스가 인터넷신문 등을 통해 나간 후 격려전화를 많이 받았다. ‘탈북학생들만이 아니라 국내인, 직장인 대상 강좌는 없느냐’는 전화도 있었고,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학당 미국분교도 만들어달라’는 분도 있었다”면서 “이런 데서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이승만학당 교장 이영훈 교수도 “학생들이 공부하고 취직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도 상당히 적극적이고 열의가 있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정신》에서 ‘우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성된 마음으로… 흉악한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던 것처럼, 이 학생들 속에서 언젠가 자유통일의 전사(戰士)들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며 희망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