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8년 5월 민의원 선거, 9월 재선거, 1960년 1월 재재선거 모든 종류의 불·탈법 시도된 선거로 얼룩
⊙ 민주당 김상순 후보는 선거소송 두 차례 제기해 모두 勝訴
⊙ 당시 영일 현장 취재한 기자가 훗날 8선의 국회의장 이만섭… 의장 시절 김상순과 재회
⊙ 소설가 김일광 선생이 당시 부정선거 소재로 청소년 소설 《1958, 위험한 심부름》 펴내
⊙ 한국 헌정사에 가장 어리석고 치욕스러우며 아픈 교훈
⊙ 민주당 김상순 후보는 선거소송 두 차례 제기해 모두 勝訴
⊙ 당시 영일 현장 취재한 기자가 훗날 8선의 국회의장 이만섭… 의장 시절 김상순과 재회
⊙ 소설가 김일광 선생이 당시 부정선거 소재로 청소년 소설 《1958, 위험한 심부름》 펴내
⊙ 한국 헌정사에 가장 어리석고 치욕스러우며 아픈 교훈
- 《경향신문》 1958년 9월 21일 자 2면 〈정전 속에서 선거사상 처음 보는 불법 자행〉 기사다. 맨 오른쪽에 굵은 글씨로 ‘김상순씨 유리하자 돌연 정전’이라 적혀 있다.
바다가 보이는 포항 호미곶에서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김일광(金日光·69) 선생이 최근 장편소설 《1958, 위험한 심부름》(단비)을 펴냈다. 이 소설은 흥미롭게도 1958~60년 사이에 있었던 경북 영일군 을(乙)구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일어난 기상천외한 부정선거를 소재로 쓴 ‘팩션’이다. 옛 선거구인 경북 영일군 을구는 현재 포항 남구·울릉도 선거구로 바뀌었다.
초등교사 출신의 김일광 선생이 소설에 담은 메시지는 “어린 학생들이 착하게 살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다. 착하게 사는 길과 당당하게 사는 길은 다르다. 당당하게 살기 위해선 “생각을 키워야 하고 나답게 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민주사회에서 자기 생각과 권리를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선거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한 표가 침해되면 ‘나답게’ 살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가 그래서 중요하다. 22대 총선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작가 김일광 선생의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행복할 권리가 있죠. 그런데 그런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 없이는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소중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기자는 2023년 11월 22일 경북 포항으로 내려갔다.
1958년 5월 2일에 있었던 ▲제4회 민의원 선거(현 국회의원 선거)와 ▲6월 21일 대법원 선거무효 판결 ▲9월 19일 재선거 ▲1959년 11월 4일 대법원 선거무효 판결 ▲1960년 1월 23일 재재선거와 관련한 기막힌 포항의 선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한국 헌정사에 야당 후보에 의한 두 번의 선거무효 소송과 승소 판결, 그리고 재선거, 재재선거까지 간 선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지옥 선거였다.
최백호가 부른 ‘영일만 친구’의 고장
자유당 정권을 끌어내렸던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전초전으로 투표함 바꾸기, 투표함 가로채기와 올빼미 개표[개표 도중 단전(斷電)], 피아노표 조작(기표한 옆 난에 도장을 한 번 더 찍어 무효표 만들기) 등 기상천외한 선거부정이 모두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의 ‘예행연습’인 셈이었다.
뒤집어 생각해 포항 재선거, 재재선거의 교훈을 깨우쳤더라면 3·15 부정선거도 4·19 혁명도 일어날 수 없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붕괴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어리석고 치욕스러우며 아픈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기자는 포항으로 차를 몰며 가수 최백호가 부른 ‘영일만 친구’를 들었다.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는 노랫말을 곱씹으며 포항 사람들의 기개(氣槪)와 강단(剛斷)을 떠올려 보았다. 온갖 종류의 불·탈법이 들끓을 때, 김일광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어렵고 힘들지만 당당하게 바른 생각을 지켰던 사람들’이 포항 시민이었다. 물론 부정선거를 획책한 이도 이곳 사람들이었다.
기자는 포항 송도 죽도시장 근처에서 김일광 선생과 박이득(朴二得·81) 전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김익진(金翊振·76) 대한은퇴자협회 포항지회장을 만났다. 포항의 하늘은 높았고 파도는 낮았다. 그러나 이따금 바람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듯 불고 지나갔다.
박 전 회장은 포항 MBC PD와 《영남일보》 기자,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 포항 지역 국회의원 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포항 지역 선거사에 정통하다.
김 회장은 1958년 민의원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김상순(金相淳·1917~2002년)의 차남이다. 김상순은 자유당 ‘표 도둑’들에 의해 억울하게도 당선을 빼앗긴 인물이다.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2차례나 선거소송을 제기해 대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정작 금배지는 달지 못했다. 지난 2002년 세상을 떠났다. 아들 김익진의 말이다.
“남들은 우리 어른을 두고 훌륭하다고 하지만 저는 세상 볼 줄 모르셨다고 봅니다. 대나무도 바람이 불면 휠 줄 아는데 아주 꼿꼿하셨습니다. 대나무 꼬챙이 같은 분이셨죠.”
“거물급 야당 정치인이 포항에 오면…”
1958년 5월 2일 민의원 선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자유당 김익로(金益魯) 후보가 3만2108표로 무소속 이신근(李伸根, 4365표), 최장수(崔長壽, 2534표) 후보를 누르고 득표율 82.3%로 당선됐다. 일방적인 싱거운 승리였다. 그런데 선거 구도를 자세히 보면 야당 후보 자체가 없었다. 싱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시 김상순은 민주당 공천을 받았는데 석연찮은 이유로 후보 등록조차 못 했다. 그러자 헌정사 처음으로 선거소송을 제기해 그해 6월 21일 대법원은 김상순의 손을 들어주며 선거무효 판결을 내렸다.
김익진 “야당 후보에 대한 차별과 사퇴 강요의 불법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어요. 아예 후보조차 못 되게 등록을 무효화시켜버렸던 겁니다. 아버지는 영일군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선거소송을 제기했는데 이게 우리 헌정사 선거소송 1호입니다. 돌려 말하면 우리 어른은 대한민국 민주화 투사 1호인 겁니다.”
김일광 “자유당 당선자인 김익로와 김상순은 같은 ‘수원(水原) 김씨’ 문중이고 촌수도 십몇 촌일 정도인데다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정치적 선택 때문에 한쪽은 가해자, 다른 한쪽은 피해자가 된 겁니다. 따지고 보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셈이지요.”
박이득 “고향 사람끼리 원수로 갈라져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재선거, 재재선거 때 포항 사람들은 잠을 못 이뤘어요. 거기에 가가(가서) 부정 저지른 사람, 부정 막은 사람, 팔짱 끼고 구경한 사람… 전부 포항 사람입니다.”
김익진 “재선거, 재재선거까지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이면(裏面)의 제안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소송을 포기하면, 출마를 포기하면 포항에서 제일 큰 공사를 주겠다’ ‘돈을 얼마 주겠다’…. 그걸 받았더라면…. 우리 어른은 가족 생각을 못 했다 이 말입니다. 그걸 누가 알아줍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른이 민주주의를 지키려 한 민주화 인사인데….”
― TK에서 원외 야당 정치인으로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치인 김상순’은 어떤 분이었나요.
김익진 “1950년대 아버지는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던 분이십니다. 동교동계 6선(選)의 후농(後農) 김상현(金相賢·1935~2018년)이 처음 정치를 할 때 아버지와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죠. 같은 ‘상’ 자 돌림이고.
우리 어른이 김대중(金大中· 1924~ 2009년) 전 대통령보다 선배거든요. DJ가 강원도 인제에 출마할 때 조병옥(趙炳玉·1894~1960년) 박사에게 데리고 가서 ‘김 동지가 인제에 출마하고 싶어 한다’고 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조 박사가 ‘거기(인제)에 누가 많으냐’고 해서 ‘호남 사람이 많이 산다’고 권해 공천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 어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컸죠.”
김익진씨는 “조병옥·장면(張勉·1899~1966년)·박순천(朴順天·1898~1983년) 같은 거물급 야당 인사들이 포항에 오면 먼저 아버지를 찾았다”고 했다.
“그때 우리 집이 (포항) 대흥동에 있었어요. 유명한 신라여관 바로 앞이 우리 집이었죠. 제가 열 살쯤이던가? 조 박사가 오셔서 신라여관에 머물렀습니다. 아침에 아버지를 따라 문안드리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장면 박사가 포항에 오셨을 때는 금화여관에서 주무셨어요. 박순천 여사, 조재천(曺在千·1912~1970년), 김상돈(金相敦·1901~1986년)씨도 여기 (포항에) 안 오신 분이 없었습니다. 윤보선(尹潽善·1897~1990년) 대통령의 경우, 포항 장기에서 선거유세를 할 때 장기에 변변한 여관이 없으니까 그곳에서 제일 집이 좋은 정필화씨 댁에 머무셨지요. 대한민국 거물들이 다 포항에 왔다 갔지….”
결국 자유당 붕괴의 도화선
― 그렇게 해서 그해 9월 19일 재선거를 하게 됐네요.
박이득 “자유당 김익로와 민주당 김상순이 맞붙게 됐지요. 한데 이 과정에서 부정투표가 노골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김익진 “개표 과정에서 밤에 불을 끄고 표를 훔쳐가는 ‘올빼미’ 부정선거가 일어났습니다. 김상순 표 한 뭉텅이를 빼서 김익로 표로 바꿔치기한 겁니다. 300 몇 표가 날아간 겁니다.”
박이득 “‘피아노 표’라고, 기표한 김 상순 표 옆 난에 도장을 한 번 더 찍어 무효표로 만들기도 했어요.”
김익진 “덧붙여 설명하자면, 개표 중에 헐렁한 핫바지에다 고무줄을 매단 투표 붓대롱을 숨겨와 기표한 옆 난에 도장을 한 번 더 찍어 무효표를 만드는 식이죠. 손을 놓으면 붓대롱이 핫바지 속으로 들어가고. 유효표를 무효표로 만든 겁니다.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스르륵 문질러버리는 ‘피아노 표’도 있었고요.
1958년 9월 19일 재선거 결과 자유당 김익로 후보는 1만4310표, 민주당 김상순 후보는 1만3986표가 나왔다. 고작 324표 차이였다. 다시 김익로가 당선됐다.
선거 과정의 부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표 과정의 도둑 표, 개표장 내 폭력, 단전, 투표용지 교부 수와 투표 수의 상이, 개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타락 선거가 극에 달했다.
김익진 “그 무법천지 시절에 다시 선거소송을 우리 어른이 했습니다.”
― 대단한 용기와 뚝심입니다.
김익진 “용기… 없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식하시고 어떻게 보면 용기 100배이시고 가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셨습니다. 불의에 ‘무뎃포(無鐵砲)’로 저항하셨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김일광 “어느 자료를 보니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58년 9월 재선거, 60년 1월 재재선거는 3·15 부정선거 예행연습으로 실시된 선거였다’고요.”
재재선거에선 김익로·김상순 두 후보 모두 출마할 수 없었다. 김상순의 경우, 다시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의 압력으로 끝내 사퇴하고 말았다. 재재선거 후보는 자유당 김장섭(金長涉), 민주당 현석호(玄錫虎) 후보였다.
재재선거 날을 닷새 앞둔 1960년 1월 18일 자유당은 경북 포항에 경북도청 공무원들을 대거 파견했다고 한다.
김일광 “재재선거의 경우, 투표 개시 전 자유당에 기표한 투표용지(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4할 사전 투표’, 3명 혹은 9명이 짝을 지어 조장이 기표 사실을 확인한 후 자유당 선거위원의 검수하에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3인조, 9인조’ 공개 투표를 할 정도였어요.”
김익진 “경찰도 저쪽 편, 선관위도 저쪽 편… 우리는 편이 없었습니다. 그때 야당 국회의원이 총출동했어요. 장면 박사와 해공(海公 申翼熙·1894~1956년) 선생의 비서도 내려와 투표함을 지켜야 한다고 했었죠. 그런데도 개표 과정에 불 끄고 깡패들이 야당 국회의원을 졸(卒)로 보고 마구잡이로 폭력을 가했던 무법천지였죠.”
1960년 1월 23일 재재선거의 결과는 자유당 김장섭 2만9402표, 민주당 현석호 3857표. 득표율 88.4%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자유당 후보가 이겼다. 이러한 부정은 두 달 뒤 3·15 선거에서 다시 자행됐고 결국 4·19 혁명이란 역풍을 맞고 자유당 정권은 최후를 맞았다.

‘기자 아저씨’는 훗날 이만섭 국회의장
김일광 선생의 소설 《1958, 위험한 심부름》에는 부정선거를 세상에 알린 ‘기자 아저씨’가 등장한다. ‘기자 아저씨’는 ‘세상이’라는 정의로운 소년에게 불법 현장을 찍은 카메라를 맡기며 이렇게 말한다.
〈기자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내 목에다 작은 가방 하나를 걸어주었다.
“잡히면 안 된다. 지금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라. 경주역에서 내리면 부산서 올라오는 서울행 열차가 올 것이다. 그 기차에서 너를 찾는 사람이 내릴 거야. 그 사람에게 이 가방을 넘겨라. 더 자세한 것은 그 가방 속에 미리 적어두었다.”
아저씨는 단숨에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나를 골목길로 떠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차를 타더니 바로 달려갔다. 나는 으슥한 골목 구석에 엎드려 있었다.〉
― 1958년 9월 재선거의 부정은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됐나요.
김일광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가 포항에 직접 내려와 취재했어요.”
이만섭(李萬燮·1932~2015년)이 누군가. 8선의, 두 차례나 국회의장을 역임한 원조 ‘미스터(Mr.) 쓴소리’가 아닌가. 의장 시절 “나는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지조를 지키려 애썼던 강골의 정치인이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이만섭이었다.
박이득 “처음엔 신문사 정치부 차장이나 부장 시절에 그 무시무시한 부정선거를 취재한 줄 알았는데 신출내기 시절에 취재한 거였어요.”
김익진 “병아리 기자니까 이걸 하지(부정선거 폭로 기사를 쓰지), 오래 했다면 못 합니다.”
당시 포항 영일군 재선거를 취재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김준하(金準河·1927~2017년) 기자와 이만섭 기자, 사진기자 이명동(李命同·1920~2019년) 기자였다. 이명동 기자가 개표 도중 갑자기 전기가 나간 틈을 타고 여당 후보 측이 투표지를 빼돌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잡는 데 성공했다고 전한다.
이만섭은 회고록 《나의 정치 인생 반세기》(2004)에서 당시 현장의 뒷얘기를 이렇게 남겼다.
〈내 눈에 비친 재선거는 한마디로 불법이 총동원된 원천적인 부정선거였다. 손에 흰 붕대를 감은 깡패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특히 야당 측 운동원과 취재기자들에게 공갈·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투표소마다 유권자들의 번호표를 일일이 검사한 후 투표를 허락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무더기 투표·대리투표·릴레이식 투표 등 온갖 부정이 난무했다. (중략)
그토록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부정선거가 감행됐는데도 막상 뚜껑을 열자 처음부터 자유당 공천의 김익로 후보가 민주당의 김상순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표차가 갈수록 벌어지자 개표 작업을 하던 종사원들이 이상하리만큼 느리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날이 새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관리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개표 종사원들이 피로하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표를 중단합니다.”
야당의 항의로 개표 시각이 오후 4시로 앞당겨졌지만 개표 종사원들이 억지를 부려 결국 저녁 7시10분경에 속개됐다.
그런데 이만섭 기자의 눈에 이상한 낌새가 보였다. 개표하는 바로 옆 교실에 대구 시내에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 우두머리는 당시 대구 사회에서 유명한 자유당 소속 전세덕(全世德) 경북도의원이었다. ‘불상사가 나겠구나’ 직감했다고 한다.
이만섭과 김상순의 재회
다음은 《나의 정치 인생 반세기》 중 일부다.
〈개표는 속개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투표함을 개봉해 자유당 표와 민주당 표를 분류해 쌓아 놓은 것을 보니 한눈에도 민주당 쪽이 훨씬 많았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 중 갑자기 전깃불이 나가버렸다. 두어 차례 깜빡깜빡하더니 세 번째는 아예 끊겨버렸다. 나는 올 게 왔음을 느꼈다. 역시 불이 나가자마자 옆방의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며 개표장으로 난입했다. 그와 동시에 민주당 조재천 대변인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표 도둑이야! 표 도둑이야!”〉
잠시 후 깡패들이 사라진 뒤 장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개표소 안으로 들어온 경찰은 엉뚱하게도 기자들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나중에 전기가 들어온 뒤에 보니, 역시나 쌓여 있던 민주당 지지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만섭 기자는 “어림짐작으로 3600여 표나 되는 상당한 양이었다”고 회고했다.
분이 머리끝까치 치민 이만섭은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개표소에 던지며 이렇게 소리쳤다.
“야!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표 도둑놈들아.”
이 과정에서 이만섭은 깡패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는데 이 때문에 평생 허리에 신경통이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개표 방해죄’였다. 며칠 동안 친구 집, 친척 집으로 피신하며 숨어 지냈다.
박이득씨는 국회의장 시절 이만섭과의 만남을 기억했다.
“제가 포항 국회의원이던 재선의 황대봉(黃大鳳·1927~2015년) 의원 보좌관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만섭 의장을 뵌 일이 있는데 제가 포항 출신인 걸 알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사람아, 영일 을구 부정선거 때 내가 갔어.’
그리고 이내 ‘김상순씨는 훌륭한 분이야’라고 말씀하셨어요. 훌륭한 분! 그 전설 같은 이야기는 제 또래 사내라면 포항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그래서 의장님께 말씀드렸죠. ‘그때 고생하신 줄 잘 압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김익진씨가 말을 받았다.
“그분이 국회의장으로 계실 때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상경한 일이 있습니다. 본청 국회의사당에 도착해 의장님을 뵙고 싶다고 비서실에다 메모를 넣었어요. ‘포항 김상순이 의장님을 뵈러 왔다’고요. 1시간이 돼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비서실에서 막았던 것이겠죠.
저는 의장이고 나발이고 괘씸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쳐들어갔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유별나지 않습니까? 저도 괄괄하지만 선친은 더 쩌렁쩌렁하십니다. 그랬더니 의장님이 나오시는데 아버지를 보자마자 ‘아이고 형님!…’. 비서들을 향해 ‘자네들, 이 어른이 누군지 모르지? 옛날에 영일 을구 취재를 갔다가 이 형님과 으쌰으쌰 했어’ 이러는 겁니다.
의장님은 금배지를 못 단 아버지를 위로하며 오랜 정담을 나누었지요. 아버지의 오래 묵은 한(恨)을 다 풀어주셨죠.”
굶어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심정으로
― 이후 김상순 선생은 선거에 출마하거나 공직에 나간 적이 있었나요.
김익진 “없었습니다. 뭐 굶어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심정으로 사셨으니 이 어른이 어리석다 이 말이야.
남자는 살다 보면 꺾입니다. 특히 가정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나면 꺾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박살이 났는데도 우리 어른은 안 꺾여요. 안 꺾이니까 우리가 봐서는 부모가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인 거죠.”
그는 아픈 가정사를 털어놨다.
“아버지가 초혼 후 마누라를 놔두고 떠나버렸단 말이야. 남편이 안 오니까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가버린 겁니다. 나한테는 황씨 어머니인 거지.
우리 어른이 만주 가서 활동하던 시절에 어머니(金貴仁·1922~1982년)를 만나 연애결혼을 하셨어요. 어머니 친정은 함경도 회령이었죠. 그 시절, 어머니가 스타킹 신고 숄더백 들고 비단으로 온 몸을 치장한 채 포항에 내려왔어요. 일제강점기 때 스타킹이 어딨고 숄더백이 어딨어요? 그렇게 멋쟁이셨어요.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아무 의지할 데가 없으니 우울증이 생기셨어요. 또 본부인이 있었다는 얘길 듣고 속으로 삭이다 병이 생기셨어요. 그 울화증을 어떻게 풀었냐. 자식들한테 몽둥이찜질을 하셨어요. 우리 어른이 한창 선거 운동하실 때 어머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제가 평생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렇게… 큰 잘못 없이… 잘 늙어가니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른은 (자식) 교육의 ‘교’ 자도 모르시고 오직 정치밖에 모르셨죠. 그런데 우리 어른이 불행한 게 뭐냐 하면 주변에 인물이 없어. 전부 농사짓는 사람뿐이니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참 불행하게….
하지만 소신껏 사셨고, 할 일 다 하시고, 할 말 다 하시고 사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도 자기 무덤 다 만들어놓으시고 별안간 떠나셨어요.”
한편, 경북 영일군 을구 투·개표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된 포항 대송면사무소나 대송초등학교는 포스코가 들어서는 바람에 지금은 모두 이전해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초등교사 출신의 김일광 선생이 소설에 담은 메시지는 “어린 학생들이 착하게 살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다. 착하게 사는 길과 당당하게 사는 길은 다르다. 당당하게 살기 위해선 “생각을 키워야 하고 나답게 살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민주사회에서 자기 생각과 권리를 드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선거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한 표가 침해되면 ‘나답게’ 살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가 그래서 중요하다. 22대 총선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작가 김일광 선생의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행복할 권리가 있죠. 그런데 그런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 없이는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소중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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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포항 영일군 민의원 선거를 설명하는 소설가 김일광과 박이득씨, 김익진씨(왼쪽부터). |
1958년 5월 2일에 있었던 ▲제4회 민의원 선거(현 국회의원 선거)와 ▲6월 21일 대법원 선거무효 판결 ▲9월 19일 재선거 ▲1959년 11월 4일 대법원 선거무효 판결 ▲1960년 1월 23일 재재선거와 관련한 기막힌 포항의 선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한국 헌정사에 야당 후보에 의한 두 번의 선거무효 소송과 승소 판결, 그리고 재선거, 재재선거까지 간 선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지옥 선거였다.
최백호가 부른 ‘영일만 친구’의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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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광이 최근 펴낸 장편소설 《1958, 위험한 심부름》(단비) |
뒤집어 생각해 포항 재선거, 재재선거의 교훈을 깨우쳤더라면 3·15 부정선거도 4·19 혁명도 일어날 수 없었으며 이승만 정권의 붕괴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어리석고 치욕스러우며 아픈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기자는 포항으로 차를 몰며 가수 최백호가 부른 ‘영일만 친구’를 들었다.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는 노랫말을 곱씹으며 포항 사람들의 기개(氣槪)와 강단(剛斷)을 떠올려 보았다. 온갖 종류의 불·탈법이 들끓을 때, 김일광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어렵고 힘들지만 당당하게 바른 생각을 지켰던 사람들’이 포항 시민이었다. 물론 부정선거를 획책한 이도 이곳 사람들이었다.
기자는 포항 송도 죽도시장 근처에서 김일광 선생과 박이득(朴二得·81) 전 한국예총 포항지회장, 김익진(金翊振·76) 대한은퇴자협회 포항지회장을 만났다. 포항의 하늘은 높았고 파도는 낮았다. 그러나 이따금 바람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듯 불고 지나갔다.
박 전 회장은 포항 MBC PD와 《영남일보》 기자, 경북문인협회 부회장, 포항독립운동사 발간 추진위원장, 포항 지역 국회의원 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포항 지역 선거사에 정통하다.
김 회장은 1958년 민의원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김상순(金相淳·1917~2002년)의 차남이다. 김상순은 자유당 ‘표 도둑’들에 의해 억울하게도 당선을 빼앗긴 인물이다.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2차례나 선거소송을 제기해 대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정작 금배지는 달지 못했다. 지난 2002년 세상을 떠났다. 아들 김익진의 말이다.
“남들은 우리 어른을 두고 훌륭하다고 하지만 저는 세상 볼 줄 모르셨다고 봅니다. 대나무도 바람이 불면 휠 줄 아는데 아주 꼿꼿하셨습니다. 대나무 꼬챙이 같은 분이셨죠.”
“거물급 야당 정치인이 포항에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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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피해를 본 김상순씨. 우리 헌정사에서 최초로 선거소송을 제기했다. |
당시 김상순은 민주당 공천을 받았는데 석연찮은 이유로 후보 등록조차 못 했다. 그러자 헌정사 처음으로 선거소송을 제기해 그해 6월 21일 대법원은 김상순의 손을 들어주며 선거무효 판결을 내렸다.
김익진 “야당 후보에 대한 차별과 사퇴 강요의 불법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어요. 아예 후보조차 못 되게 등록을 무효화시켜버렸던 겁니다. 아버지는 영일군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선거소송을 제기했는데 이게 우리 헌정사 선거소송 1호입니다. 돌려 말하면 우리 어른은 대한민국 민주화 투사 1호인 겁니다.”
김일광 “자유당 당선자인 김익로와 김상순은 같은 ‘수원(水原) 김씨’ 문중이고 촌수도 십몇 촌일 정도인데다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정치적 선택 때문에 한쪽은 가해자, 다른 한쪽은 피해자가 된 겁니다. 따지고 보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셈이지요.”
박이득 “고향 사람끼리 원수로 갈라져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재선거, 재재선거 때 포항 사람들은 잠을 못 이뤘어요. 거기에 가가(가서) 부정 저지른 사람, 부정 막은 사람, 팔짱 끼고 구경한 사람… 전부 포항 사람입니다.”
김익진 “재선거, 재재선거까지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이면(裏面)의 제안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소송을 포기하면, 출마를 포기하면 포항에서 제일 큰 공사를 주겠다’ ‘돈을 얼마 주겠다’…. 그걸 받았더라면…. 우리 어른은 가족 생각을 못 했다 이 말입니다. 그걸 누가 알아줍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어른이 민주주의를 지키려 한 민주화 인사인데….”
― TK에서 원외 야당 정치인으로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치인 김상순’은 어떤 분이었나요.
김익진 “1950년대 아버지는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던 분이십니다. 동교동계 6선(選)의 후농(後農) 김상현(金相賢·1935~2018년)이 처음 정치를 할 때 아버지와 형님, 동생 하던 사이였죠. 같은 ‘상’ 자 돌림이고.
우리 어른이 김대중(金大中· 1924~ 2009년) 전 대통령보다 선배거든요. DJ가 강원도 인제에 출마할 때 조병옥(趙炳玉·1894~1960년) 박사에게 데리고 가서 ‘김 동지가 인제에 출마하고 싶어 한다’고 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조 박사가 ‘거기(인제)에 누가 많으냐’고 해서 ‘호남 사람이 많이 산다’고 권해 공천을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 어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히 컸죠.”
김익진씨는 “조병옥·장면(張勉·1899~1966년)·박순천(朴順天·1898~1983년) 같은 거물급 야당 인사들이 포항에 오면 먼저 아버지를 찾았다”고 했다.
“그때 우리 집이 (포항) 대흥동에 있었어요. 유명한 신라여관 바로 앞이 우리 집이었죠. 제가 열 살쯤이던가? 조 박사가 오셔서 신라여관에 머물렀습니다. 아침에 아버지를 따라 문안드리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장면 박사가 포항에 오셨을 때는 금화여관에서 주무셨어요. 박순천 여사, 조재천(曺在千·1912~1970년), 김상돈(金相敦·1901~1986년)씨도 여기 (포항에) 안 오신 분이 없었습니다. 윤보선(尹潽善·1897~1990년) 대통령의 경우, 포항 장기에서 선거유세를 할 때 장기에 변변한 여관이 없으니까 그곳에서 제일 집이 좋은 정필화씨 댁에 머무셨지요. 대한민국 거물들이 다 포항에 왔다 갔지….”
결국 자유당 붕괴의 도화선
― 그렇게 해서 그해 9월 19일 재선거를 하게 됐네요.
박이득 “자유당 김익로와 민주당 김상순이 맞붙게 됐지요. 한데 이 과정에서 부정투표가 노골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김익진 “개표 과정에서 밤에 불을 끄고 표를 훔쳐가는 ‘올빼미’ 부정선거가 일어났습니다. 김상순 표 한 뭉텅이를 빼서 김익로 표로 바꿔치기한 겁니다. 300 몇 표가 날아간 겁니다.”
박이득 “‘피아노 표’라고, 기표한 김 상순 표 옆 난에 도장을 한 번 더 찍어 무효표로 만들기도 했어요.”
김익진 “덧붙여 설명하자면, 개표 중에 헐렁한 핫바지에다 고무줄을 매단 투표 붓대롱을 숨겨와 기표한 옆 난에 도장을 한 번 더 찍어 무효표를 만드는 식이죠. 손을 놓으면 붓대롱이 핫바지 속으로 들어가고. 유효표를 무효표로 만든 겁니다.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스르륵 문질러버리는 ‘피아노 표’도 있었고요.
1958년 9월 19일 재선거 결과 자유당 김익로 후보는 1만4310표, 민주당 김상순 후보는 1만3986표가 나왔다. 고작 324표 차이였다. 다시 김익로가 당선됐다.
선거 과정의 부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표 과정의 도둑 표, 개표장 내 폭력, 단전, 투표용지 교부 수와 투표 수의 상이, 개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타락 선거가 극에 달했다.
김익진 “그 무법천지 시절에 다시 선거소송을 우리 어른이 했습니다.”
― 대단한 용기와 뚝심입니다.
김익진 “용기… 없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식하시고 어떻게 보면 용기 100배이시고 가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셨습니다. 불의에 ‘무뎃포(無鐵砲)’로 저항하셨기에 가능했다고 봐야….”
김일광 “어느 자료를 보니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58년 9월 재선거, 60년 1월 재재선거는 3·15 부정선거 예행연습으로 실시된 선거였다’고요.”
재재선거에선 김익로·김상순 두 후보 모두 출마할 수 없었다. 김상순의 경우, 다시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의 압력으로 끝내 사퇴하고 말았다. 재재선거 후보는 자유당 김장섭(金長涉), 민주당 현석호(玄錫虎) 후보였다.
재재선거 날을 닷새 앞둔 1960년 1월 18일 자유당은 경북 포항에 경북도청 공무원들을 대거 파견했다고 한다.
김일광 “재재선거의 경우, 투표 개시 전 자유당에 기표한 투표용지(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두는 ‘4할 사전 투표’, 3명 혹은 9명이 짝을 지어 조장이 기표 사실을 확인한 후 자유당 선거위원의 검수하에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는 ‘3인조, 9인조’ 공개 투표를 할 정도였어요.”
김익진 “경찰도 저쪽 편, 선관위도 저쪽 편… 우리는 편이 없었습니다. 그때 야당 국회의원이 총출동했어요. 장면 박사와 해공(海公 申翼熙·1894~1956년) 선생의 비서도 내려와 투표함을 지켜야 한다고 했었죠. 그런데도 개표 과정에 불 끄고 깡패들이 야당 국회의원을 졸(卒)로 보고 마구잡이로 폭력을 가했던 무법천지였죠.”
1960년 1월 23일 재재선거의 결과는 자유당 김장섭 2만9402표, 민주당 현석호 3857표. 득표율 88.4%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자유당 후보가 이겼다. 이러한 부정은 두 달 뒤 3·15 선거에서 다시 자행됐고 결국 4·19 혁명이란 역풍을 맞고 자유당 정권은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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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재선거 취재 때 경찰과 충돌하는 이만섭 기자의 모습이다. 이만섭의 회고록 《나의 정치 인생 반세기》(2004). |
〈기자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내 목에다 작은 가방 하나를 걸어주었다.
“잡히면 안 된다. 지금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라. 경주역에서 내리면 부산서 올라오는 서울행 열차가 올 것이다. 그 기차에서 너를 찾는 사람이 내릴 거야. 그 사람에게 이 가방을 넘겨라. 더 자세한 것은 그 가방 속에 미리 적어두었다.”
아저씨는 단숨에 거기까지 말을 하고는 나를 골목길로 떠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차를 타더니 바로 달려갔다. 나는 으슥한 골목 구석에 엎드려 있었다.〉
― 1958년 9월 재선거의 부정은 어떻게 해서 알려지게 됐나요.
김일광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가 포항에 직접 내려와 취재했어요.”
이만섭(李萬燮·1932~2015년)이 누군가. 8선의, 두 차례나 국회의장을 역임한 원조 ‘미스터(Mr.) 쓴소리’가 아닌가. 의장 시절 “나는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지조를 지키려 애썼던 강골의 정치인이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이만섭이었다.
박이득 “처음엔 신문사 정치부 차장이나 부장 시절에 그 무시무시한 부정선거를 취재한 줄 알았는데 신출내기 시절에 취재한 거였어요.”
김익진 “병아리 기자니까 이걸 하지(부정선거 폭로 기사를 쓰지), 오래 했다면 못 합니다.”
당시 포항 영일군 재선거를 취재했던 《동아일보》 기자는 김준하(金準河·1927~2017년) 기자와 이만섭 기자, 사진기자 이명동(李命同·1920~2019년) 기자였다. 이명동 기자가 개표 도중 갑자기 전기가 나간 틈을 타고 여당 후보 측이 투표지를 빼돌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잡는 데 성공했다고 전한다.
이만섭은 회고록 《나의 정치 인생 반세기》(2004)에서 당시 현장의 뒷얘기를 이렇게 남겼다.
〈내 눈에 비친 재선거는 한마디로 불법이 총동원된 원천적인 부정선거였다. 손에 흰 붕대를 감은 깡패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특히 야당 측 운동원과 취재기자들에게 공갈·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투표소마다 유권자들의 번호표를 일일이 검사한 후 투표를 허락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무더기 투표·대리투표·릴레이식 투표 등 온갖 부정이 난무했다. (중략)
그토록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해 부정선거가 감행됐는데도 막상 뚜껑을 열자 처음부터 자유당 공천의 김익로 후보가 민주당의 김상순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표차가 갈수록 벌어지자 개표 작업을 하던 종사원들이 이상하리만큼 느리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날이 새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선거관리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개표 종사원들이 피로하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표를 중단합니다.”
야당의 항의로 개표 시각이 오후 4시로 앞당겨졌지만 개표 종사원들이 억지를 부려 결국 저녁 7시10분경에 속개됐다.
그런데 이만섭 기자의 눈에 이상한 낌새가 보였다. 개표하는 바로 옆 교실에 대구 시내에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 우두머리는 당시 대구 사회에서 유명한 자유당 소속 전세덕(全世德) 경북도의원이었다. ‘불상사가 나겠구나’ 직감했다고 한다.
정치인 김상순은… “포항 시민들의 권리를 팔아먹지 않았습니다” 김상순은 1917년생으로 영일보통학교를 나와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고)에 진학했으나 ‘친일 매국노 규탄’ 작문으로 일경(日警)에게 쫓기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다. 만주국립대 하얼빈학원을 졸업하고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 박사 등과 교유하다 귀국해 백범(白凡) 선생 휘하의 한독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백범이 타계하자 민주당에 입당해 민주당 경북 영일 을구 초대~6대 지구당위원장을 역임했고 민주당 경북도당과 중앙당 상무위원을 지냈다.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 부정선거를 목격한 뒤 선거소송을 제기, 재선거와 재재선거를 이끄는 뚝심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할 리 없었다. 자유당으로부터 무고(誣告)를 50차례나 당하며 경찰로, 검찰로, 법원으로, 형무소로 끌려다녀야 했다. “인간 이하의 수모를 당하면서 반(反)독재 법정투쟁을 120여 차례나 했다”고 한다. 아들 김익진의 토로다. “아버지는 선거소송을 취하하라며 파렴치한 협상 조건을 제의 받으셨지만 포항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결코 응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의 아버지는 정치를 멀리하시고 지역의 문화재 보존회 활동을 하시며 사적(史蹟)을 수집(蒐集), 문집을 발간하시며 평안히 사셨어요. 떠나실 때도 홀연히 세상을 등지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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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김상순씨. 이만섭 의장을 만나 빼앗긴 금배지의 한(恨)을 풀었다고 한다. |
〈개표는 속개됐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투표함을 개봉해 자유당 표와 민주당 표를 분류해 쌓아 놓은 것을 보니 한눈에도 민주당 쪽이 훨씬 많았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 중 갑자기 전깃불이 나가버렸다. 두어 차례 깜빡깜빡하더니 세 번째는 아예 끊겨버렸다. 나는 올 게 왔음을 느꼈다. 역시 불이 나가자마자 옆방의 깡패들이 소리를 지르며 개표장으로 난입했다. 그와 동시에 민주당 조재천 대변인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표 도둑이야! 표 도둑이야!”〉
잠시 후 깡패들이 사라진 뒤 장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개표소 안으로 들어온 경찰은 엉뚱하게도 기자들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나중에 전기가 들어온 뒤에 보니, 역시나 쌓여 있던 민주당 지지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만섭 기자는 “어림짐작으로 3600여 표나 되는 상당한 양이었다”고 회고했다.
분이 머리끝까치 치민 이만섭은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개표소에 던지며 이렇게 소리쳤다.
“야!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표 도둑놈들아.”
이 과정에서 이만섭은 깡패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는데 이 때문에 평생 허리에 신경통이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개표 방해죄’였다. 며칠 동안 친구 집, 친척 집으로 피신하며 숨어 지냈다.
박이득씨는 국회의장 시절 이만섭과의 만남을 기억했다.
“제가 포항 국회의원이던 재선의 황대봉(黃大鳳·1927~2015년) 의원 보좌관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만섭 의장을 뵌 일이 있는데 제가 포항 출신인 걸 알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사람아, 영일 을구 부정선거 때 내가 갔어.’
그리고 이내 ‘김상순씨는 훌륭한 분이야’라고 말씀하셨어요. 훌륭한 분! 그 전설 같은 이야기는 제 또래 사내라면 포항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그래서 의장님께 말씀드렸죠. ‘그때 고생하신 줄 잘 압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김익진씨가 말을 받았다.
“그분이 국회의장으로 계실 때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상경한 일이 있습니다. 본청 국회의사당에 도착해 의장님을 뵙고 싶다고 비서실에다 메모를 넣었어요. ‘포항 김상순이 의장님을 뵈러 왔다’고요. 1시간이 돼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비서실에서 막았던 것이겠죠.
저는 의장이고 나발이고 괘씸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쳐들어갔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유별나지 않습니까? 저도 괄괄하지만 선친은 더 쩌렁쩌렁하십니다. 그랬더니 의장님이 나오시는데 아버지를 보자마자 ‘아이고 형님!…’. 비서들을 향해 ‘자네들, 이 어른이 누군지 모르지? 옛날에 영일 을구 취재를 갔다가 이 형님과 으쌰으쌰 했어’ 이러는 겁니다.
의장님은 금배지를 못 단 아버지를 위로하며 오랜 정담을 나누었지요. 아버지의 오래 묵은 한(恨)을 다 풀어주셨죠.”
굶어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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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순(1917~2002)은 평생 대쪽같이 살았다고 전한다. 사진은 그의 묘지다. |
김익진 “없었습니다. 뭐 굶어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심정으로 사셨으니 이 어른이 어리석다 이 말이야.
남자는 살다 보면 꺾입니다. 특히 가정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나면 꺾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박살이 났는데도 우리 어른은 안 꺾여요. 안 꺾이니까 우리가 봐서는 부모가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인 거죠.”
그는 아픈 가정사를 털어놨다.
“아버지가 초혼 후 마누라를 놔두고 떠나버렸단 말이야. 남편이 안 오니까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가버린 겁니다. 나한테는 황씨 어머니인 거지.
우리 어른이 만주 가서 활동하던 시절에 어머니(金貴仁·1922~1982년)를 만나 연애결혼을 하셨어요. 어머니 친정은 함경도 회령이었죠. 그 시절, 어머니가 스타킹 신고 숄더백 들고 비단으로 온 몸을 치장한 채 포항에 내려왔어요. 일제강점기 때 스타킹이 어딨고 숄더백이 어딨어요? 그렇게 멋쟁이셨어요.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아무 의지할 데가 없으니 우울증이 생기셨어요. 또 본부인이 있었다는 얘길 듣고 속으로 삭이다 병이 생기셨어요. 그 울화증을 어떻게 풀었냐. 자식들한테 몽둥이찜질을 하셨어요. 우리 어른이 한창 선거 운동하실 때 어머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제가 평생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렇게… 큰 잘못 없이… 잘 늙어가니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른은 (자식) 교육의 ‘교’ 자도 모르시고 오직 정치밖에 모르셨죠. 그런데 우리 어른이 불행한 게 뭐냐 하면 주변에 인물이 없어. 전부 농사짓는 사람뿐이니 힘이 되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참 불행하게….
하지만 소신껏 사셨고, 할 일 다 하시고, 할 말 다 하시고 사셨습니다. 돌아가실 때도 자기 무덤 다 만들어놓으시고 별안간 떠나셨어요.”
한편, 경북 영일군 을구 투·개표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된 포항 대송면사무소나 대송초등학교는 포스코가 들어서는 바람에 지금은 모두 이전해 옛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