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깨끗한 右派와 가장 부패한 左派의 대결구도
⊙ 韓美日 동맹 재건으로 동북아를 넘어 세계 세력 균형을 바꿀 세계사적 사건
⊙ 민족사의 정통 세력이 이단 세력을 이겼다
⊙ 해방, 건국, 서울 수복에 버금가는 역전 드라마
⊙ 윤석열은 당대 최고의 연설가이자 이승만·김영삼·김대중급의 대중정치인
⊙ 韓美日 동맹 재건으로 동북아를 넘어 세계 세력 균형을 바꿀 세계사적 사건
⊙ 민족사의 정통 세력이 이단 세력을 이겼다
⊙ 해방, 건국, 서울 수복에 버금가는 역전 드라마
⊙ 윤석열은 당대 최고의 연설가이자 이승만·김영삼·김대중급의 대중정치인
- 윤석열 당선인은 3월 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마지막 유세를 벌였다. 사진=조선DB
역사의 큰 변화는 가끔 근소한 표차로 결정된다. 15만 표가 한국의 30년 진로를, 24만 표가 5000만의 운명을 결정하는 식이다. 근소한 표차로 결정된 윤석열(尹錫悅) 대통령 당선은 세계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5년 전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탄핵되던 날 그는 윤석열 시대를 열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24만7000표 차의 개표 드라마를 펼친 끝에 거의 혼자의 힘으로 좌익(左翼)운동권 정권으로부터 권력을 탈환하였다.
3월 9일 대선(大選)은 1963년 10월 15일 대선에서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5만6000표 차로 윤보선(尹潽善) 후보를 이긴 것과 비견되는, 국가 진로에 대한 국민적 결단이다. 표차는 비록 적었으나 1963년의 선택은 구(舊)정치인 주도의 명분론적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그 뒤 30년간 이어진, 군부(軍部) 엘리트에 의한 부국강병(富國强兵) 노선을 결정하였다.
이번 윤석열 당선은 30년간 이어진 좌익운동권 시대를 정리하고 한국을 다시 해양문명권의 일원으로 복귀시킴으로써 1948년 이후 이어지고 있는 기적의 한국 드라마를 다시 쓰도록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 사태로 국가의 개입이 세계적 추세가 되어 터키·헝가리 등 어중간한 민주국가들이 독재화되고 있는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한국이 좌익 포퓰리즘을 거부, 자유민주 노선을 지켜냈다. 이승만(李承晩)이 뿌린 자유민주의 씨를 윤석열이 거둔 셈인데, 3월 9일의 진정한 승자는 윤석열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총 한 방 쏘지 않고 좌익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게 만든 한국의 민주주의였다.
슈퍼스타의 탄생
나라의 운명이 거의 한 사람에 의하여 이렇게 바뀐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막강한 좌익선동권력에 맞선, 한 사람의 영웅적 투쟁으로 나라의 운명이 이렇게 역전(逆轉)된 적도 일찍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슈퍼스타, 슈퍼히어로이다. 국민이 따라주고 지켜주면 이승만, 박정희급의 역사적 인물이 될 수도 있다. 5년은 좀 짧지만.
* 거의 혼자의 힘으로 그것도 1년 만에 대중정치인으로 변신, 정권을 교체하여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냈다.
* 거의 혼자의 힘으로 극좌(極左)운동권 정권의 선동과 공작을 견뎌냈다.
* 선거운동 기간 중 줄기차게 극좌운동권 정권의 본질을, “철 지난 이념에 사로잡혀 끼리끼리 해먹고 국민을 약탈하는 부패한 기득권(旣得權) 세력”이라 폭로했다. 이 메시지를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킴으로써 3월 9일 선거를 김일성 악령(惡靈) 퇴치의 날로 만들었다.
* 엄청난 인내심으로, 그에게 적대적이던 이준석,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를 차례로 포용, 애국 세력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이루고 승리했다.
* 역대 자유 진영 후보로선 처음으로 안보와 이념 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삼았다. 선제(先制)타격론과 사드 추가 배치를 공약하고, 김정은에게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시진핑(習近平)에겐 상호존중의 자세를 확실히 함으로써 종북종중(從北從中) 노선의 폐기를 분명히 하였다.
* 선거운동 기간 중 당대 최고의 연설가, 성공적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이승만·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급의 대중적 인기가 그의 가장 큰 정치적 동력이 될 것이다.
* 거짓말, 위선, 쇼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소탈한 인간미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좋은 인성(人性)과 인상(人相)은 국민이 대통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국민이 윤석열을 불러내고 키워주는 과정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 등장한 것이다.
* 정권, 사법, 시민사회, 노조, 선동기관을 장악한 극좌운동권으로부터 평화적으로 권력을 되찾아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여기에 5년의 치적을 보태면 역사적 대인물이 될 것이다.
윤석열, 자유의 핵심을 쉽게 설명
3월 7일 밤, 윤석열 후보의 마지막 유세 일정이 제주도-부산-대구-대전-서울로 이어진다는 뉴스를 본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간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비행기를 많이 타고 비행기 사고를 많이 취재한 나는 항공사고 가능성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다. 8일 오전 윤 후보가 제주도를 출발, 부산에 무사 착륙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가족이 제주도로 간다고 했을 때도 걱정해본 적이 없는 내가 왜 이러지? 2019년 조국 일가 수사 이후 윤석열만큼 많은 국민의 아낌을 받은 정치인이 있었을까?
3월 8일 밤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윤석열 후보의 마지막 유세는 축제 분위기였고, 그의 연설은 너무나 진지했다. 혼신의 설득력으로 가슴을 울렸다. 취임연설 같기도 했다. 광장을 꽉 메운 인파는 “윤석열! 대통령!”을 연호했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건성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정치인이야 많지만 윤석열처럼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또 누구나 쉽게 그 핵심을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선택(選擇)의 자유(自由)’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그의 확신이 정책적 가치관의 핵심을 이룬다. 이날도 그는 귀에 익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 국민은 너무 똑똑해서 정부가 바보짓만 안 하면 못 살 수가 없습니다.”
“정치 신인인 저는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습니다. 다만 국민들에게만 부채(負債)가 있습니다.”
“탄핵? 하라면 하라 이겁니다”
이날 제주도 유세에서도 “저는 여의도의 문법도, 여의도의 셈법도 모르는 사람입니다”고 말한 뒤 “저는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고 어떠한 패거리도 없습니다. 국민만이 제가 부채를 지고 있는 분들입니다”고 했다.
“이 민주당 사람들은 국민들의 지지로 제가 대통령이 되면 180석을 가지고 제대로 정부를 운영할 수 없게 방해하거나 심지어는 우리 당의 이탈자들을 모아 탄핵을 칠 수도 있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저는, 하라면 하라 이겁니다! 저에게는 가장 막강한 정치적 지지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국민 아닙니까, 여러분.”
‘국민이 윤석열을 불러내고 키웠다’는 말은 윤석열 또한 국민들을 믿었다는 이야기이다. 상호 간의 이런 신뢰는 이승만급이다. 이승만은 농담으로도 “한국인은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없다. 조선이 식민지화되어가는 순간에도 “조선 양반은 세계에서 하지하(下之下)지만 백성은 상지상(上之上)”이라 했다. 한국인의 좋은 점에 대한 이승만의 신뢰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표현된다. 1948년 8월 15일 건국기념연설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선(善)이 이긴다고 믿고 민주주의를 밀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고 했었다.
윤석열 후보는 유세 때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 하지 않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대화식 연설을 하곤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국민들을 이렇게 존중해주면 레이건 같은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가 될지 누가 아는가? 그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를 멀게 만들어온, 절간 같은 청와대 시대를 끝장내겠다고 공약한 상태이다.
철 지난 운동권 권력 심판!
윤석열의 승리는 한국인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서 민족해방, 대한민국 건국, 낙동강 전선(戰線) 사수, 인천상륙작전과 비견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윤석열 세상과 이재명 세상의 차이를 상상해보라! 선동에 넘겨준 나라를 피를 흘리지 않고 도로 찾았으니 조상들과 호국영령들에게 면목이 서게 되었고, 피를 흘려 공산당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미국 등 참전국에 떳떳하게 되었으며, 박근혜의 탄핵과 문재인의 등장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어’라던 일본 우파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 정말로 세계 7대 강국 자격이 있으며 이런 국력에 어울리는 대통령을 뽑았다는 믿음도 생긴다.
윤석열 당선은, 김일성의 악령에 영혼을 판 좌익운동권 세력에 대한 심판이다. 지난 30년간 민주투사로 위장, 국정을 농단했던 이들의 정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교육한 이가 윤석열 당선자이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철 지난 이념으로 끼리끼리 뭉쳐서 이권을 갈라 먹고 국민들을 갈라 치기 한 무능부패 기득권 패거리”라고 되풀이 설명했고 여기에 국민들이 공감했다.
그의 집권은 운동권 정권의 친북종중 노선을 정리하고 대한민국의 번영을 보장하였던 자유해양문화권으로 복귀하는 신호탄이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를 넘어 세계의 세력 균형을 바꿀 만한 세계사적 사건이란 말이다. 문명의 기초인 사실·과학·법치(法治)를 부정하는 정책만 골라서 밀어붙였던 문재인 정권을 극복하고, 언론 자유와 공존하는 법치를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 생일까지 지워버렸던 민족사의 이단(異端) 세력을 국가 지휘부에서 몰아내고 정통 세력에 다시 국가 조종실을 맡겼다. 국민들은 돈과 거짓을 총동원한 운동권 세력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비록 근소한 표차이지만 문명 세력을 선택한 점에서 일류시민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가장 깨끗한 우파와 가장 부패한 좌파의 대결구도
윤석열 시대의 좌우(左右)대결은 과거와 질(質)이 다르다. 윤석열 당선자와 그를 중심으로 뭉친 우파는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치 집단이다. 윤석열 당선자는 지긋지긋한 흑색선전과 수사공작을 다 이겨냈고 우파는 문재인 정권의 가혹한 정치보복 수사를 통과함으로써 결백을 입증받았다. 민주국가에선 깨끗하면 강력하다. 반대로 좌익운동권 세력은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 지난 5년간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린 기득권 집단이다. 검찰이 덮은 수사만 재개(再開)해도 정치 세력으로 존립할 수 없을 지경이다. 대한민국 세력이 이렇게 유리한 고지를 점한 적이 없다. 사실과 과학과 헌법만 어기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윤석열 당선자는 이념과 안보를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놓고 정면 승부한 최초의 우파 후보였다. 좌익운동권 패거리 규정, 사드 추가 배치, 선제타격, 한미일(韓美日) 동맹론을 내어놓고 논리적으로 이를 방어, 표를 얻었다. 안보는 표가 되지 않는다는 우파의 패배주의를 불식시켰다. 특히 일본을 포함한 한미일 동맹을 강조한 것은 한일 관계의 정상화로 북핵(北核)과 중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에 대응할 것임을 선언한 셈이다.
윤석열 당선자는 ‘이재명 민주당’이란 표현으로 민주당의 변화를 촉구했다. 좋은 민주당 사람들과 ‘폼 나게’ 경쟁하고 협치(協治)하고 싶다고도 했다. 민주당을 장악한 좌익운동권과 양식 있는 정치 세력이 결별할 때 탈(脫)운동권 정치판이 열릴 것이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다당제(多黨制)나 개헌(改憲)이 아니고 반(反)헌법 세력의 퇴출(退出)에 의한 정치판의 풍토 개량이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정치개혁은 그가 청와대 시대를 마감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옮긴다는 것은 나라의 분위기와 권력 핵심의 생리를 바꾸는 일대 사건이다. 대통령이 광화문에서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근무한다는 것, 국민도 대통령을 가까이 느끼며 생활한다는 것이 끼치는 심리적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절간 같은 청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현실과 멀어져 아부하는 측근들의 포로가 되었었다. 권력의 심장부를 대중 속에서 열어버리는 것, 이게 제왕적(帝王的) 대통령제를 개조하는 진짜 정치개혁이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가의 진로와 국민의 운명을 바꾸었거나 바꿀 가장 중요한 선거가 15만6000표와 24만7000표 차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점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대통령에겐 압도적 표차보다는 근소한 표차에 의한 당선이 국민들의 한 표, 한 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 나게 할 것이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지난 1년간 미얀마 군부가 민간 시위대를 학살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박정희가 집권 18년간 수많은 반정부 시위를 겪었지만 단 한 번도 발포(發砲)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점에 새삼 감탄했다. 반박정희 시위대는 화염병과 돌을 던졌지만 1964년 서울과 1979년 부산의 계엄령하에서도 박정희는 군인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미국에서 이런 시위가 벌어졌다면 경찰 발포로 수백 명이 죽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교양과 품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가 세 번 치열한 대선을 경험한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윤보선과 대결한 선거에서 군정(軍政) 기간의 실적을 국민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대승(大勝)을 기대했었다. 그는 경주로 내려가서 불국사 관광호텔에 머물며 개표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었다. 당시 18세 고교생이던 필자는 박정희·김종필(金鍾泌) 팬이었는데 부산에서 개표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10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 후보는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에서 크게 앞섰다. 박정희는 전라도, 경상도에서 몰표를 받았지만 뒤지기 시작했다. 23만 표 차까지 벌어졌다. 군인들이 몰려 사는 지역에서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민기식(閔機植) 육군참모총장은 선거에서 지면 자결할 준비를 했다. 군사혁명 주체 세력 출신인 공화당 간부들은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개표를 중단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16일 아침 박정희는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및 주치의와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명선거란 집권자가 떨어져도 좋다는 결심이 있어야 가능해.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5·16 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다”
10월 16일 오전부터 그동안 개표가 늦었던 전라도, 경상도의 투표함이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박정희 우세로 역전되었다. 10월 17일 오후 3시에 개표가 끝났을 때 박정희는 470만2640표, 윤보선은 454만6614표, 그 차는 15만6026표였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체험을 했던 박정희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10월 16일 새벽을 넘기는 일은 5·16 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다.”
당선이 확실해진 17일 오전 경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위한 강력한 정치를 펴 나가겠다”면서 “서구 민주주의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속으론 선거의 무서움을 새겼을 것이다.
1971년 4월 27일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53.2-45.3% 차로 이겼다. 표차는 약 96만 표. 김대중 후보는 선거를 앞두고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다. 당시 북한은 약 300만 명의 노농(勞農)적위대를 갖고 있었다. 향토예비군 창설은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이 계기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이 표를 얻기 위해 안보를 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박 대통령은 김종필을 불러 국민들에 대한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선동에 취약한 이런 국민과 위험한 직선제를 두고는 국가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1년 뒤의 유신(維新) 선포는 이때부터 준비된 것이다.
윤석열 후보도 3월 9일 밤 이재명 후보에게 밀릴 때, 믿었던 국민들에 대하여 잠시 박정희와 비슷한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방역지원금 살포 후 여론 反轉
지난 1월 16일 MBC의 김건희씨 녹취록 방송은 이번 대선의 분수령(分水嶺)이었다. 치명적 폭로가 나올 것이란 우려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김건희씨의 수더분한 말투가 오히려 호감을 사고 쥴리설(說)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돋보여 시한폭탄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방송을 듣자마자 “아, 이걸로 윤석열이 이기는구나”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다음 위기는 지난 2월 23일 전후였다. 정부가 자영업자 330만 명에게 1인당 300만원씩 약 10조원의 방역지원금을 지급한 것이다. 조갑제닷컴도 해당 업종이라 오전에 신청했더니 오후에 바로 입금(入金)되었다. 투표를 9일 앞두고 뿌린 이 돈(약 100억 달러)의 효력은 금방 여론조사에 반영되었다(자영업자들의 가족과 직원을 계산하면 영향권은 1000만 명).
평소에 반정부적이던 자영업자들의 지지율이 이재명 우세로 돌았다. 2월 25일 금요일에 발표된 한국갤럽 주간조사에선, 전주(前週)에 이재명 후보에게 6%p나 앞섰던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역전되어 1%p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TV토론에서 이재명 후보는 이번 선거기간 최악의 실언(失言)을 한다. 윤석열 후보를 치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보 정치인이라 매도하면서 쓸데없이 푸틴을 자극, 전쟁을 불러들였다고 한 것이다. 그 젤렌스키가 미국의 피신 권유를 받고는 “나는 여기 있겠다. 무기를 달라, 무임(無賃)승차는 사절한다”라고 말하면서 영웅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재명의 실언은 국내외의 망신으로 비화하고 윤석열 후보가 집중공격했다. 연일 언론을 뒤덮은 전쟁 기사는 안보 대통령의 이미지를 굳힌 윤석열 후보에게 유리하였다. 2월 27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선 윤석열 후보가 다시 5%p 앞서는 것으로 나왔는데 자영업자들의 지지율을 회복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3월 9일, 압승(壓勝)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윤석열 후보가 0.73%p 차로 신승(辛勝)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연구가 필요하다. 전라도 사람들의 막판 결집, 젊은 여성층의 반발, 우파 내의 부정선거 음모론, 단일화에 대한 역풍, 이준석의 10%p 압승론 등이 상호작용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나는 선동이란 괴물의 그림자를 느낀다. 선거와 소셜미디어(SNS)가 선동적으로 결합될 때 나라가 순간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다. 24만7000표 차로 이재명 세상이 될 수도 있었다!
괴물의 그림자
역대 대선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긴 후보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계층은 자영업자라고 한다. 윤석열 후보는 자영업자들로부터 51%를 얻어 47%의 이재명 후보를 눌렀다(출구조사). 투표 직전 10조원의 ‘돈비’를 맞고도 이 정도의 분별력을 유지하였으니 3월 9일, 그 진정한 승자(勝者)는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정신이 아닐까? 그러나 선동이란 괴물은 죽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언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여담(餘談)이지만 민주당과 이재명 캠프가 윤석열을 잡으려고 무속인(巫俗人)을 비방한 것은 큰 실수였다. 한국인의 원초적 심성(心性)을 구성하는 원시종교 샤머니즘을 통째로 사교(邪敎)처럼 매도했으니 수많은 무속인이 누구를 위해 빌며, 누구를 저주하였겠는가?⊙
3월 9일 대선(大選)은 1963년 10월 15일 대선에서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5만6000표 차로 윤보선(尹潽善) 후보를 이긴 것과 비견되는, 국가 진로에 대한 국민적 결단이다. 표차는 비록 적었으나 1963년의 선택은 구(舊)정치인 주도의 명분론적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그 뒤 30년간 이어진, 군부(軍部) 엘리트에 의한 부국강병(富國强兵) 노선을 결정하였다.
이번 윤석열 당선은 30년간 이어진 좌익운동권 시대를 정리하고 한국을 다시 해양문명권의 일원으로 복귀시킴으로써 1948년 이후 이어지고 있는 기적의 한국 드라마를 다시 쓰도록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 사태로 국가의 개입이 세계적 추세가 되어 터키·헝가리 등 어중간한 민주국가들이 독재화되고 있는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한국이 좌익 포퓰리즘을 거부, 자유민주 노선을 지켜냈다. 이승만(李承晩)이 뿌린 자유민주의 씨를 윤석열이 거둔 셈인데, 3월 9일의 진정한 승자는 윤석열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총 한 방 쏘지 않고 좌익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게 만든 한국의 민주주의였다.
슈퍼스타의 탄생
나라의 운명이 거의 한 사람에 의하여 이렇게 바뀐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막강한 좌익선동권력에 맞선, 한 사람의 영웅적 투쟁으로 나라의 운명이 이렇게 역전(逆轉)된 적도 일찍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슈퍼스타, 슈퍼히어로이다. 국민이 따라주고 지켜주면 이승만, 박정희급의 역사적 인물이 될 수도 있다. 5년은 좀 짧지만.
* 거의 혼자의 힘으로 그것도 1년 만에 대중정치인으로 변신, 정권을 교체하여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냈다.
* 거의 혼자의 힘으로 극좌(極左)운동권 정권의 선동과 공작을 견뎌냈다.
* 선거운동 기간 중 줄기차게 극좌운동권 정권의 본질을, “철 지난 이념에 사로잡혀 끼리끼리 해먹고 국민을 약탈하는 부패한 기득권(旣得權) 세력”이라 폭로했다. 이 메시지를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킴으로써 3월 9일 선거를 김일성 악령(惡靈) 퇴치의 날로 만들었다.
* 엄청난 인내심으로, 그에게 적대적이던 이준석, 홍준표, 유승민, 안철수를 차례로 포용, 애국 세력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을 이루고 승리했다.
* 역대 자유 진영 후보로선 처음으로 안보와 이념 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삼았다. 선제(先制)타격론과 사드 추가 배치를 공약하고, 김정은에게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시진핑(習近平)에겐 상호존중의 자세를 확실히 함으로써 종북종중(從北從中) 노선의 폐기를 분명히 하였다.
* 선거운동 기간 중 당대 최고의 연설가, 성공적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이승만·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급의 대중적 인기가 그의 가장 큰 정치적 동력이 될 것이다.
* 거짓말, 위선, 쇼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소탈한 인간미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좋은 인성(人性)과 인상(人相)은 국민이 대통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국민이 윤석열을 불러내고 키워주는 과정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 등장한 것이다.
* 정권, 사법, 시민사회, 노조, 선동기관을 장악한 극좌운동권으로부터 평화적으로 권력을 되찾아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여기에 5년의 치적을 보태면 역사적 대인물이 될 것이다.
윤석열, 자유의 핵심을 쉽게 설명
3월 7일 밤, 윤석열 후보의 마지막 유세 일정이 제주도-부산-대구-대전-서울로 이어진다는 뉴스를 본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간다는 것이 꺼림칙했다. 비행기를 많이 타고 비행기 사고를 많이 취재한 나는 항공사고 가능성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다. 8일 오전 윤 후보가 제주도를 출발, 부산에 무사 착륙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가족이 제주도로 간다고 했을 때도 걱정해본 적이 없는 내가 왜 이러지? 2019년 조국 일가 수사 이후 윤석열만큼 많은 국민의 아낌을 받은 정치인이 있었을까?
3월 8일 밤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윤석열 후보의 마지막 유세는 축제 분위기였고, 그의 연설은 너무나 진지했다. 혼신의 설득력으로 가슴을 울렸다. 취임연설 같기도 했다. 광장을 꽉 메운 인파는 “윤석열! 대통령!”을 연호했다.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건성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정치인이야 많지만 윤석열처럼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또 누구나 쉽게 그 핵심을 설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선택(選擇)의 자유(自由)’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그의 확신이 정책적 가치관의 핵심을 이룬다. 이날도 그는 귀에 익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 국민은 너무 똑똑해서 정부가 바보짓만 안 하면 못 살 수가 없습니다.”
“정치 신인인 저는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습니다. 다만 국민들에게만 부채(負債)가 있습니다.”
“탄핵? 하라면 하라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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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당선인은 ‘국민이 키운 윤석열’을 자임했다. |
“이 민주당 사람들은 국민들의 지지로 제가 대통령이 되면 180석을 가지고 제대로 정부를 운영할 수 없게 방해하거나 심지어는 우리 당의 이탈자들을 모아 탄핵을 칠 수도 있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저는, 하라면 하라 이겁니다! 저에게는 가장 막강한 정치적 지지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국민 아닙니까, 여러분.”
‘국민이 윤석열을 불러내고 키웠다’는 말은 윤석열 또한 국민들을 믿었다는 이야기이다. 상호 간의 이런 신뢰는 이승만급이다. 이승만은 농담으로도 “한국인은 안 돼”라고 말한 적이 없다. 조선이 식민지화되어가는 순간에도 “조선 양반은 세계에서 하지하(下之下)지만 백성은 상지상(上之上)”이라 했다. 한국인의 좋은 점에 대한 이승만의 신뢰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표현된다. 1948년 8월 15일 건국기념연설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야 합니다. 종국에 가서는 선(善)이 이긴다고 믿고 민주주의를 밀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고 했었다.
윤석열 후보는 유세 때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 하지 않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대화식 연설을 하곤 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국민들을 이렇게 존중해주면 레이건 같은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가 될지 누가 아는가? 그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를 멀게 만들어온, 절간 같은 청와대 시대를 끝장내겠다고 공약한 상태이다.
윤석열의 승리는 한국인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서 민족해방, 대한민국 건국, 낙동강 전선(戰線) 사수, 인천상륙작전과 비견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윤석열 세상과 이재명 세상의 차이를 상상해보라! 선동에 넘겨준 나라를 피를 흘리지 않고 도로 찾았으니 조상들과 호국영령들에게 면목이 서게 되었고, 피를 흘려 공산당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미국 등 참전국에 떳떳하게 되었으며, 박근혜의 탄핵과 문재인의 등장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어’라던 일본 우파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이 정말로 세계 7대 강국 자격이 있으며 이런 국력에 어울리는 대통령을 뽑았다는 믿음도 생긴다.
윤석열 당선은, 김일성의 악령에 영혼을 판 좌익운동권 세력에 대한 심판이다. 지난 30년간 민주투사로 위장, 국정을 농단했던 이들의 정체를 가장 효과적으로 국민들에게 교육한 이가 윤석열 당선자이다. 그는 선거유세에서 “철 지난 이념으로 끼리끼리 뭉쳐서 이권을 갈라 먹고 국민들을 갈라 치기 한 무능부패 기득권 패거리”라고 되풀이 설명했고 여기에 국민들이 공감했다.
그의 집권은 운동권 정권의 친북종중 노선을 정리하고 대한민국의 번영을 보장하였던 자유해양문화권으로 복귀하는 신호탄이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를 넘어 세계의 세력 균형을 바꿀 만한 세계사적 사건이란 말이다. 문명의 기초인 사실·과학·법치(法治)를 부정하는 정책만 골라서 밀어붙였던 문재인 정권을 극복하고, 언론 자유와 공존하는 법치를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 생일까지 지워버렸던 민족사의 이단(異端) 세력을 국가 지휘부에서 몰아내고 정통 세력에 다시 국가 조종실을 맡겼다. 국민들은 돈과 거짓을 총동원한 운동권 세력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고 비록 근소한 표차이지만 문명 세력을 선택한 점에서 일류시민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가장 깨끗한 우파와 가장 부패한 좌파의 대결구도
윤석열 시대의 좌우(左右)대결은 과거와 질(質)이 다르다. 윤석열 당선자와 그를 중심으로 뭉친 우파는 역사상 가장 깨끗한 정치 집단이다. 윤석열 당선자는 지긋지긋한 흑색선전과 수사공작을 다 이겨냈고 우파는 문재인 정권의 가혹한 정치보복 수사를 통과함으로써 결백을 입증받았다. 민주국가에선 깨끗하면 강력하다. 반대로 좌익운동권 세력은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 지난 5년간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린 기득권 집단이다. 검찰이 덮은 수사만 재개(再開)해도 정치 세력으로 존립할 수 없을 지경이다. 대한민국 세력이 이렇게 유리한 고지를 점한 적이 없다. 사실과 과학과 헌법만 어기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윤석열 당선자는 이념과 안보를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놓고 정면 승부한 최초의 우파 후보였다. 좌익운동권 패거리 규정, 사드 추가 배치, 선제타격, 한미일(韓美日) 동맹론을 내어놓고 논리적으로 이를 방어, 표를 얻었다. 안보는 표가 되지 않는다는 우파의 패배주의를 불식시켰다. 특히 일본을 포함한 한미일 동맹을 강조한 것은 한일 관계의 정상화로 북핵(北核)과 중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에 대응할 것임을 선언한 셈이다.
윤석열 당선자는 ‘이재명 민주당’이란 표현으로 민주당의 변화를 촉구했다. 좋은 민주당 사람들과 ‘폼 나게’ 경쟁하고 협치(協治)하고 싶다고도 했다. 민주당을 장악한 좌익운동권과 양식 있는 정치 세력이 결별할 때 탈(脫)운동권 정치판이 열릴 것이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다당제(多黨制)나 개헌(改憲)이 아니고 반(反)헌법 세력의 퇴출(退出)에 의한 정치판의 풍토 개량이다.
눈에 보이는 가장 큰 정치개혁은 그가 청와대 시대를 마감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을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로 옮긴다는 것은 나라의 분위기와 권력 핵심의 생리를 바꾸는 일대 사건이다. 대통령이 광화문에서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근무한다는 것, 국민도 대통령을 가까이 느끼며 생활한다는 것이 끼치는 심리적 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절간 같은 청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현실과 멀어져 아부하는 측근들의 포로가 되었었다. 권력의 심장부를 대중 속에서 열어버리는 것, 이게 제왕적(帝王的) 대통령제를 개조하는 진짜 정치개혁이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가의 진로와 국민의 운명을 바꾸었거나 바꿀 가장 중요한 선거가 15만6000표와 24만7000표 차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점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대통령에겐 압도적 표차보다는 근소한 표차에 의한 당선이 국민들의 한 표, 한 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 나게 할 것이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지난 1년간 미얀마 군부가 민간 시위대를 학살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박정희가 집권 18년간 수많은 반정부 시위를 겪었지만 단 한 번도 발포(發砲)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는 점에 새삼 감탄했다. 반박정희 시위대는 화염병과 돌을 던졌지만 1964년 서울과 1979년 부산의 계엄령하에서도 박정희는 군인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미국에서 이런 시위가 벌어졌다면 경찰 발포로 수백 명이 죽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교양과 품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가 세 번 치열한 대선을 경험한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윤보선과 대결한 선거에서 군정(軍政) 기간의 실적을 국민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대승(大勝)을 기대했었다. 그는 경주로 내려가서 불국사 관광호텔에 머물며 개표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었다. 당시 18세 고교생이던 필자는 박정희·김종필(金鍾泌) 팬이었는데 부산에서 개표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10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 후보는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에서 크게 앞섰다. 박정희는 전라도, 경상도에서 몰표를 받았지만 뒤지기 시작했다. 23만 표 차까지 벌어졌다. 군인들이 몰려 사는 지역에서도 윤보선이 이기고 있었다. 민기식(閔機植) 육군참모총장은 선거에서 지면 자결할 준비를 했다. 군사혁명 주체 세력 출신인 공화당 간부들은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개표를 중단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16일 아침 박정희는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및 주치의와 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명선거란 집권자가 떨어져도 좋다는 결심이 있어야 가능해.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5·16 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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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박정희 대통령. 그는 15만6026표 차이로 당선됐다. 사진=조선DB |
“10월 16일 새벽을 넘기는 일은 5·16 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다.”
당선이 확실해진 17일 오전 경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위한 강력한 정치를 펴 나가겠다”면서 “서구 민주주의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속으론 선거의 무서움을 새겼을 것이다.
1971년 4월 27일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게 53.2-45.3% 차로 이겼다. 표차는 약 96만 표. 김대중 후보는 선거를 앞두고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다. 당시 북한은 약 300만 명의 노농(勞農)적위대를 갖고 있었다. 향토예비군 창설은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이 계기였다. 박정희는 김대중이 표를 얻기 위해 안보를 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박 대통령은 김종필을 불러 국민들에 대한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선동에 취약한 이런 국민과 위험한 직선제를 두고는 국가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1년 뒤의 유신(維新) 선포는 이때부터 준비된 것이다.
윤석열 후보도 3월 9일 밤 이재명 후보에게 밀릴 때, 믿었던 국민들에 대하여 잠시 박정희와 비슷한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지난 1월 16일 MBC의 김건희씨 녹취록 방송은 이번 대선의 분수령(分水嶺)이었다. 치명적 폭로가 나올 것이란 우려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김건희씨의 수더분한 말투가 오히려 호감을 사고 쥴리설(說)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돋보여 시한폭탄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방송을 듣자마자 “아, 이걸로 윤석열이 이기는구나”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다음 위기는 지난 2월 23일 전후였다. 정부가 자영업자 330만 명에게 1인당 300만원씩 약 10조원의 방역지원금을 지급한 것이다. 조갑제닷컴도 해당 업종이라 오전에 신청했더니 오후에 바로 입금(入金)되었다. 투표를 9일 앞두고 뿌린 이 돈(약 100억 달러)의 효력은 금방 여론조사에 반영되었다(자영업자들의 가족과 직원을 계산하면 영향권은 1000만 명).
평소에 반정부적이던 자영업자들의 지지율이 이재명 우세로 돌았다. 2월 25일 금요일에 발표된 한국갤럽 주간조사에선, 전주(前週)에 이재명 후보에게 6%p나 앞섰던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역전되어 1%p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TV토론에서 이재명 후보는 이번 선거기간 최악의 실언(失言)을 한다. 윤석열 후보를 치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보 정치인이라 매도하면서 쓸데없이 푸틴을 자극, 전쟁을 불러들였다고 한 것이다. 그 젤렌스키가 미국의 피신 권유를 받고는 “나는 여기 있겠다. 무기를 달라, 무임(無賃)승차는 사절한다”라고 말하면서 영웅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재명의 실언은 국내외의 망신으로 비화하고 윤석열 후보가 집중공격했다. 연일 언론을 뒤덮은 전쟁 기사는 안보 대통령의 이미지를 굳힌 윤석열 후보에게 유리하였다. 2월 27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선 윤석열 후보가 다시 5%p 앞서는 것으로 나왔는데 자영업자들의 지지율을 회복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3월 9일, 압승(壓勝)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윤석열 후보가 0.73%p 차로 신승(辛勝)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연구가 필요하다. 전라도 사람들의 막판 결집, 젊은 여성층의 반발, 우파 내의 부정선거 음모론, 단일화에 대한 역풍, 이준석의 10%p 압승론 등이 상호작용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나는 선동이란 괴물의 그림자를 느낀다. 선거와 소셜미디어(SNS)가 선동적으로 결합될 때 나라가 순간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다. 24만7000표 차로 이재명 세상이 될 수도 있었다!
괴물의 그림자
역대 대선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긴 후보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계층은 자영업자라고 한다. 윤석열 후보는 자영업자들로부터 51%를 얻어 47%의 이재명 후보를 눌렀다(출구조사). 투표 직전 10조원의 ‘돈비’를 맞고도 이 정도의 분별력을 유지하였으니 3월 9일, 그 진정한 승자(勝者)는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정신이 아닐까? 그러나 선동이란 괴물은 죽지 않고 숲속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언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여담(餘談)이지만 민주당과 이재명 캠프가 윤석열을 잡으려고 무속인(巫俗人)을 비방한 것은 큰 실수였다. 한국인의 원초적 심성(心性)을 구성하는 원시종교 샤머니즘을 통째로 사교(邪敎)처럼 매도했으니 수많은 무속인이 누구를 위해 빌며, 누구를 저주하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