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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이념과 정치

“비상식이 보편적인 시기에는 상식을 말하는 것이 혁명적 행위다”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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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常識은 이질적인 사회를 통합하기 위한 近代의 산물
⊙ 토머스 페인, ‘상식’ 내걸고 美 독립 주장
⊙ “良識(bon sens)보다 더 급진적이면서도 더 보수적인 것은 없다”(에밀 드 지라르댕)
⊙ “良識은 진실과 허위를 판별하는 힘”(데카르트)
⊙ 윤석열이 선언한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은 정상의 회복을 위한 절체절명의 대결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을 선언했다. 사진=조선DB
  ‘상식(常識)’은 평범하다. 사전(辭典)에서는 상식을 “일반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가지고 있어야 할 보통의 지식”으로 풀이한다. 더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해 빠진 생각이나 지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상식’이라는 단어에서 ‘혁명(革命)’을 떠올리게 되지는 않는다. 혁명은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비일상적 사건이지만 상식은 일상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식’이 강력한 혁명의 구호가 된 경우가 있었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 당시가 그랬다.
 

  영국 출신 미국의 작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1737~1809년)이 1776년 1월 10일 소책자 하나를 출간했다. 제목은 《상식(Common Sense)》이었다. 50쪽짜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소책자가 출간 3개월 만에 12만 부가 팔리고 1년 만에 50만 부가 나갔다. 요지는 간단했다. ‘미국의 독립이 당연하다’는 거였다. 페인은 독립의 당위(當爲)를 이렇게 비유했다.
 
  “하나의 대륙이 섬에 의해 영구히 통치돼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다. 자연을 보라. 위성(衛星)이 그의 행성(行星)보다 큰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영국과 아메리카의 관계도 이런 자연의 질서를 뒤집을 수 없다.”
 
  1783년 9월 3일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종전(終戰)에 합의했다. 페인의 팸플릿 제목을 빌려 표현하자면 ‘상식의 승리’인 셈이다.
 
 
  ‘상식’의 등장
 
《상식》의 저자 토머스 페인.
  상식은 전문적 지식을 일컫는 게 아니다. 보통 사람이 가진 혹은 지녀야 할 일반적 지식이나 분별력 등을 말한다. 그래서 흔한 생각이라 할 수도 있다. 《상식》의 토머스 페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까지는 학교에 다녔으나 가난 때문에 여러 직업을 전전(轉轉)해야 했다. 타고난 자질은 있었겠지만 그의 식견이 무엇보다도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이론이기보다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서구(西歐) 정신사에서 상식이라는 개념의 역사는 간단치 않은 뿌리가 있다. BC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타고난 5가지 기본 감각을 말했다. 시각(視覺)·청각(聽覺)·미각(味覺)·후각(嗅覺)·촉각(觸覺)이다. 이 타고난 오감(五感)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공통감각’이 있다고 했다. 이게 라틴어로는 센수스 코뮤니스(sensus communis)이다. 커먼센스(common sense)의 어원(語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감각’은 일단은 해부학에 바탕한 심리학적 개념이었다. 그런데 시대를 경과하면서 의미가 확장되어 어느덧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근대사회가 성장하면서 결정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은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성공회(聖公會)라는 국교회(國敎會)를 기본으로 했지만 가톨릭이나 청교도(淸敎徒) 등에게도 공존(共存)의 기회는 줘야 했다. 이때 이질적(異質的)인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두된 게 바로 상식(common sense)이었다.
 
  1737년 《커먼센스》라는 잡지가 등장했다. 영향력이 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상식’이라는 개념은 나름의 권위를 갖게 됐다. ‘흔한 생각’일 수 있는 상식이 역사와 법, 관습(慣習), 신앙, 논리, 이성(理性) 등 기존의 권위 있는 개념에 뒤지지 않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상식이라는 개념의 정착은 근대적 산물이었다.
 
 
  상식학파
 
상식학파의 창시자 토머스 리드.
  17~18세기 영국을 시작으로 서구에서 근대사회가 급성장해나갔다. 도시들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근대적 인문(人文) 문화도 발달하고 익어갔다. 유럽 전역에서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자라나고 퍼져나갔다. 대륙의 계몽주의는 이성을 절대시하는 합리론(合理論)이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경우는 경험론(經驗論)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론의 바탕 위에서 또 하나의 사상 조류(潮流)가 등장했다. 상식학파였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경험론의 대표적 철학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년)은 극단적인 회의주의(懷疑主義)로 객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상식학파는 여기에 반대하는 흐름이었다.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토머스 리드(Thomas Reid·1710~1796년)가 시작이었다. 리드를 비롯한 상식학파는 흄의 철학이 인류 공통의 경험과 의식에 모순되는 것이라 비판하고, 지식의 기초를 상식에서 찾았다.
 
  한편 개신교(改新敎)를 필두로 하여 회의주의에 맞서는 도덕운동도 일어났다. 일단의 목사와 대학교수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철학자들만이 진리를 획득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비록 언어에 관한 한 철학자들이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현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리 문제에서는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륙 쪽의 반응은 좀 달랐다. 독일의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년)는 회의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흄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대중의 의견’을 지나치게 평가하는 상식철학은 반(反)지성주의의 악영향을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긴 했다. 상식 또한 우상화(偶像化)되면 결국 비상식적인 일탈(逸脫)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아직은 그런 단계는 아니었다. 근대의 성장과 함께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고 그러면서 새로운 상식이 형성되어가는 시대였다. 근대적 상식론은 과거의 습속(習俗)에 대한 맹신(盲信)에 매달리는 건 아니었다. 경험론에 바탕한 상식론은 이성주의의 합리론과는 다르지만 맹신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건강한 분별을 견지하려는 절제된 힘이 있었다. 때문에 그 사상 조류는 말 그대로 상식적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져 갔다. 유럽대륙으로, 또 신대륙으로도 건너갔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의 논지(論旨)는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테르미도르의 反動
 
  한편 18세기 후반 네덜란드에서도 ‘상식’이 힘을 발했다. 네덜란드는 유럽대륙이지만 분위기는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랐다. 유대인도 삶을 누리는 데 큰 불편이 없을 만큼 종교적 차이가 용인됐다. 그러면서 시민(市民)의 현실적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가 있었다. 시장(市場)의 힘이었다.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근대적 시장경제의 성장・발전이 강력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네덜란드의 독특하고 강력한 실용적 문화는 이렇게 형성됐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이랬던 상식의 문화는 프랑스에선 급진주의에 맞서는 무기가 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도 상식의 힘을 인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인민들에게선 아직 상식을 기대하기 이르다고 여겼다. 그에게 프랑스 인민들은 여전히 계몽의 대상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사제(司祭) 노릇을 하는 ‘최고 존재의 제전’이라는 기괴한 신판 종교제전을 개최했다. ‘이성의 신(神)’ 숭배를 내건 것인데 그걸로 인민을 계몽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정치를 감행했다. 이성이 새로운 우상이 되고 공포를 부르는 폭력이 됐다. 이성을 앞세웠지만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다. 광기(狂氣)였다. 이리하여 상식은 이 같은 광기에 반대하는 쪽의 것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1794년 7월 27일 반대파들에 의해 급작스럽게 종막을 고했다. 이를 일컬어 ‘테르미도르 반동(反動)’이라 한다. 마르크스 등에게 있어 이것은 말 그대로 혁명을 배반하는 반동이었다. 그러나 좌익 사가와 평론가들이 뭐라던 간에 이것은 반동이 아니라 사실은 ‘비상식의 종식’이었다. 반동이라고 했지만 앙시앵레짐이라는 구체제(舊體制)의 왕정(王政)으로 되돌아간 게 아니었다. 혁명의 기본 틀은 유지되었으며 광적(狂的)으로 폭주(暴走)하던 공포정치를 종식시켰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은 ‘상식의 회복’이었다.
 
 
  언론 사업가 지라르댕
 
‘언론산업’의 개척자 에밀 드 지라르댕.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미국 독립혁명만이 아니라 1789년 시작된 프랑스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페인 자신이 1787년 프랑스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살펴보았듯이 결코 미국의 독립혁명처럼 진행되지는 않았다. ‘상식’에서 벗어나 폭주했다.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에서 나폴레옹 시대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진통(陣痛)을 거듭했다.
 
  프랑스의 19세기는 ‘급진주의’의 여진(餘震)이 계속되는 진통의 시대였다. 1830년에는 7월혁명이, 1848년에는 2월혁명이 있었다. 프랑스는 그러면서 스스로의 잠재력을 소진(消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중에도 근대적 시민사회로서의 의식과 질서가 서서히 자리 잡혀가기는 했다.
 
  급진주의가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많은 지식분자가 유행처럼 그에 기울어진 자세를 보였지만 양식과 균형을 갖춘 사상가들도 등장했다. 《미국의 민주주의》(1835)와 함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1856) 등의 저술을 쓴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Tocqueville·1805~1859년)이 그런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토크빌 경우와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만한 인물도 있다. 에밀 드 지라르댕(Emile de Girardin·1802~1881년)이다. 저널리스트다. 그런데 글만 쓴 그저 그런 저널리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 사업가였다.
 
  19세기는 근대적 언론이 탄생하고 틀이 잡혀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프랑스도 그랬다. 근대적 신문과 저널리스트가 등장했다. 지라르댕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836년 《라 프레스(La Presse)》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그런데 이 신문이 근대 저널리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유료 광고와 연재소설
 
  《라 프레스》는 유료(有料) 광고를 게재한 최초의 신문이다. 지라르댕은 광고 게재를 통해 당시 1년 구독료 80프랑을 반값인 40프랑으로 끌어내려 판매 부수를 늘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문화 기사를 늘리고 1면에 연재소설을 실었다. 그 작가는 바로 프랑스 근대 문학의 대표적 문호 중의 한 명인 발자크(Honoréde Balzac·1799~1850년)였다.
 
  발자크는 《라 프레스》 창간호 1면 하단에 〈노처녀〉라는 연재소설을 실었다. 최초의 신문 연재소설이다. 발자크는 1828~1830년에 책으로 2500프랑을 벌었는데 신문에 글을 쓰면서 5000프랑을 웃도는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렇게 최초의 신문 연재 소설가로도 활약한 발자크는 1850년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구독료 인하와 함께 특히 연재소설 게재는 구독자 수 증가에 크게 공헌했다. 그 결과 《라 프레스》는 창간 3개월 만에 판매 부수 1만 부를 돌파했다. 당시로선 놀라운 성장이었다. 이렇게 《라 프레스》가 성공을 거두면서 당시 프랑스의 다른 신문들도 그 예를 따라가게 되었다. 구독료를 낮추고 유료 광고를 게재하고 수많은 소설가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게 되었다. 프랑스 근대의 또 다른 대문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1802~1870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의 대표작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도 모두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지라르댕의 《라 프레스》는 이렇게 하여 이전까지의 저널리즘의 틀을 혁신하는 길을 열었다. 그런데 이 신문에 자신의 소설을 연재한 발자크는 나중에 저널리즘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기자생리학(Monographie de la presse parisienne)》(1842년 출간, 2021 한국판, 류재화 번역)에서 그는 “신문 발행을 출세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천직(天職)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도 그런 문제는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사실 발자크의 이 같은 언급에는 사적(私的)인 배경도 있었다. 발자크는 낭비벽이 심했다. 말년에는 자신이 창간한 신문이 실패하여 빚쟁이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좌파(左派) 평론가들과 역사가들은 발자크의 이 같은 감정적 배경은 뺀 채 단지 그 언급만을 빌려 지라르댕을 ‘돈벌이와 출세를 위해 신문을 이용한 한 전형’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공정한 비판이 아니었다. 출세 운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돈벌이 운운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좌파 평론가들의 식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상업적 자립성(自立性)을 갖추는 것은 근대 저널리즘으로서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회주의’ ‘나쁜 사회주의’
 
  그런데 지라르댕은 그렇게 찍힐 만했다. 그와 《라 프레스》의 정치 성향은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했지만 말하자면 우파(右派)였다. 그렇다고 당시 유행을 하던 사회주의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좌파의 입장에선 지라르댕은 그냥 반대편이었다.
 
  지라르댕은 1850년 자신의 신문에 ‘사회주의와 세금(Le Socialisme et l’Impot)’이라는 기사를 썼다. 기사에서 지라르댕은 ‘좋은’ 사회주의와 ‘나쁜’ 사회주의가 있다고 했다. 그는 ‘좋은 사회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조화를 촉진하는 사회주의를 말하고, ‘나쁜 사회주의’는 자본과 노동의 전쟁을 조장하는 사회주의를 말한다고 했다.
 
  좌파가 이것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라르댕의 ‘선한 사회주의 이론’은 사회주의가 전혀 아니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역설적(逆說的)이게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같은 비판은 적절했다. 지라르댕은 어떻든 절대로 좌익이 아니었다. 그의 정치 성향은 당시 프랑스가 정치적으로 계속 요동치던 만큼 항상 일관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라 프레스》는 기본적으로는 보수우파적이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그의 저작이 있다. 프랑스에서 1848년 2월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나온 《상식, 선의(Bon sens, bonne foi)》라는 책이다.
 
  ‘봉상스(bon sens)’는 직역하자면 양식이다. 영어로는 ‘good sense’다. 프랑스어로 상식은 ‘상스 코(sens commun)’이다. 그래서 토머스 페인의 《상식》도 프랑스어로는 《Sens commun》이라고 옮긴다. 하지만 봉상스는 ‘올바른 상식’이라는 차원에서 상식의 함의도 갖는다. 그래서 지라르댕의 《Bon sens, bonne foi》는 말하자면 당시 프랑스판 ‘상식론’이라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양식이라 해야겠지만 지금의 우리의 상황에 실감이 나도록 ‘상식’이라는 함의로 읽으며 그의 말을 음미해보자.
 
 
  ‘올바른 상식’은 急進的이면서 保守的
 
  “양식(bon sens)보다 더 급진적이면서도 더 보수적인 것은 없다. 양식이 급진적인 이유는 그것이 모든 남용을 개혁하고 모든 잘못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식이 보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사회의 존속과 인민의 안녕과 문화의 발전에 속하는 모든 것을 지켜나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견고한 균형이 있다. 지라르댕의 이 같은 ‘양식론’은 프랑스 시민사회의 정신문화가 급진좌파의 발호로 끊임없이 진통을 겪으면서도 균형을 회복해가고 있던 시대상도 보여준다.
 
  양식론에는 프랑스 나름의 지적(知的) 전통도 있었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1596~1650년)가 《방법서설》(1637)에서 ‘양식’을 이미 논한 바 있었다. 데카르트는 양식이란 “진실과 허위를 판별하는 힘”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배분되어 있다”라고 했다.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있다는 것이다. 평등하고 보편적이라는 차원에서 상식이며, 올바르다는 차원에서 양식이다. 지라르댕의 ‘양식론’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폭주로 지울 수 없는 상흔(傷痕)을 남기고 그 뒤로도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상식과 선의’를 말하고 ‘자본과 노동의 전쟁을 부추기는 나쁜 사회주의’를 비판한 지라르댕의 지적은 적어도 그것을 이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프랑스에선 ‘봉상스(양식)’는 매우 중요한 시민적 미덕(美德)으로 간주(看做)되고 있다.
 
 
  정상의 회복
 
  그런데 그 모든 상식의 역사에 비춰 지금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지라르댕의 양식론에 빗대자면 “상식보다 더 급진적이면서도 더 보수적인 것은 없다”고 해야 할 상황이다. 난장판에 이른 비상식이 상식을 혁명적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좌익 혁명 같은 차원에서의 얘기는 아니다. 정상의 회복이며 수호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보수다. 하지만 이 회복은 이제 가차 없는 단호함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상식은 획기적이거나 기발한 게 아니다. ‘흔한 생각’이다. 흔함은 대개는 귀하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흔한 것이라고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가장 흔하디흔한 게 있다. 공기(空氣)다. 그런데 이 흔하디흔한 공기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절대적이다.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못 산다. 오염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일상에선 공기의 중요함을 마치 잊은 듯 살아간다. 몰라서가 아니다. 새삼 떠올리거나 거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담담함이다. 평범함과 흔함은 그 같은 두드러지지 않는 담담함을 이어가게 한다.
 
  하지만 그 담담함은 평범함이 지켜지고 있을 때까지다. 그 흔한 공기의 평범한 정상 상태에 이상이 오면 담담함은 깨진다. ‘미세먼지’가 엄습해올 때면 다들 마스크를 썼다.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선 더욱이 그렇다. 오염되고 더러워진 공기, 어지간하면 견딘다. 하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계속 이러면 못 산다.
 
  한 점 먼지도 없는 공기는 없다. 인간 삶의 상식적 평범함도 그와 같다. 욕망이 있고, 야심의 교차가 부르는 분란도 있고, 여기저기서 범죄도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본래 그렇다. 하지만 공기가 그렇듯 정도껏이다.
 
  마스크를 쓰는 정도는 불편함이다. 대개의 사람은 불편함은 감수한다. 좀 지나면 괜찮아지려니 하는 믿음도 있다. 하지만 오염이 일시적 수준의 도를 넘어 아예 일상적으로 방독면(防毒面)을 써야 한다면 어떨까? 이런 지경의 오염조차 그러려니 하고 견딜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오염의 근원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제거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식과 평범함의 분노
 
  지금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이 그러한 지경에 처했다. 문재인(文在寅) 정권 5년, 정상적 일상이 다 무너졌다. 엉망진창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정치적 더러움이 사회 전 영역을 오염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파괴시켰다.
 
  토머스 페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문명 상태가 시작된 이후 살아갈 때의 조건이 문명 이전에 살아갈 경우보다 더 나쁘지 않아야 한다.”
 
  그렇듯 “모든 국민은 하나의 정권이 시작된 이후 살아갈 때의 조건이 그 정권 이전에 살아간 경우보다 더 나쁘지 않아야 한다”. 이게 ‘상식’이다. 그런데 어떠한가?
 
  우리 현대사 내내 곡절과 진통이 없었던 적은 없다. 그래도 크게 보면 경제는 어떻든 계속 성장해왔고 국민들의 살림살이도 각각의 차이는 있어도 늘 나아져 왔다. 그래서 힘들어도 내일에 대한 희망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 정권은 수많은 사람, 특히 청년 세대를 더 이상 내일을 꿈꾸기 힘든 벼락거지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이 정권 패거리의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내로남불 행태는 끝이 없었다. 급기야 희대의 엽기적(獵奇的) 행각의 인물을 대선(大選) 후보로 내세웠다. ‘화천대유’ 아수라 범죄의 일당은 하나같이 ‘그분’을 거론한다. 그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상식이 짓밟혔다.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 삶이 파괴됐다. 그런데 비상식이 상식의 유린을 넘어 군림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평범한 대다수 우리 국민은 그 후안무치한 야욕에 매서운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상식과 평범함의 분노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 평범함이 서릿발 같은 비범한 혁명적 서슬이 되고 있다.
 
  이 정권의 거짓말은 헤아릴 수도 없다. 아니 그 존재의 시작과 끝 자체가 거짓의 점철이다. 출발부터가 말도 안 되는 거짓 선동의 탄핵(彈劾) 정변(政變)에 의한 정권 탈취였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거짓과 기만으로 일관했다. 이제 그 말미의 시점에서도 여전하다. ‘대가리가 깨져도 좋다’는 광적인 지지 패거리가 거리낌 없이 역(逆)선택 공작을 자행했다. 악하다.
 
 
  진실의 혁명
 
조지 오웰
  그럼에도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윤석열로 확정됐다. 후보로 확정되면서 윤석열에 대한 지지는 더욱 치솟고 있다. 국민의힘에 대한 당 지지도도 그와 함께 전례 없이 오르고 있다. 이 지지는 근본적으로는 윤석열 후보 자체와 국민의힘에 대한 직접적 지지가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 정권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집결이다.
 
  윤석열 후보를 마땅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 국민은 아무리 마땅찮아도 이재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리고 그 같은 인물을 후보로 내세워놓고는 야당 후보에 대해선 갖은 악랄한 책동을 벌이고 있는 이 정권 무리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윤석열 후보는 수락연설에서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다. 그런데 이 싸움은 그저 그런 통상의 싸움이 아니다. 정상의 회복을 위한 절체절명의 대결이다. 악랄한 기만(欺瞞)의 무리와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대결이다.
 
  “기만이 보편적인 시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적 행위다(In a time of universal deceit - telling the truth is a revolutionary act).”
 
  사악한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맞섰던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년)의 말이다.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이 그렇다. 오웰이 오늘날 한국 땅에 되살아난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비상식이 보편적인 시기에는 상식을 말하는 것이 혁명적 행위다.”
 
  지금 한국에서는 ‘상식’과 ‘진실’이 ‘혁명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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