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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1기’ 신현수 장군 별세

예비역 육군 중장, 1980년 서산 간첩선 격침 작전 지휘

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libert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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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생도1기’ 고 신현수 예비역 육군 중장. 사진=KBS

6·25전쟁 당시 사관생도 신분으로 참전했던 육군사관학교(육사) ‘생도1기(육사 10기)’ 신현수 예비역 중장이 2월 15일 별세했다.


고인은 6·25전쟁, 베트남전 등에서 활약하고 육군 수도사단장, 6군단장, 합동참모본부 본부장(대간첩 대책본부) 등을 역임하고 198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합참 대간첩 대책본부장 재임 시 ‘서산 간첩선’ 격침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80년 6월 20일 해안초소에서 발견한 간첩선이 서해로 도주하자 F-5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군용 수송기로 조명탄을 발사했다. 이에 북한 미그기 12대가 출격하고 북한 해군 군함 5척도 남하했다. 20일 오후 5시 55분(간첩선 발견)부터 시작된 작전은 21일 오전 5시 40분 간첩선 격침으로 종료됐다.

 

육사 생도1기· 생도2기, 전쟁 나자 포천으로… 막대한 인명 손실

 

6·25전쟁이 터지자, 생도1기(312명)와 2기(330명)는 ‘생도대대’로 편성돼 개인당 실탄 56발을 지급받아 ‘포천 372고지’로 투입됐다. 사관생도를 전선에 투입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장차 국가의 간성으로 성장할 인재들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은 본토에 대한 미군의 상륙작전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사관생도와 장교 후보생을 전선에 내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생도대대 일부는 28일 아침 육사로 복귀했고 태릉 일대에 저지선을 구축해 북한군에 맞섰다. 밀리고 밀려 30일에는 수원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저지선을 구축하며 질서 있게 후퇴해야 했기에 남쪽으로 후퇴하는 중에도 북한군과 다시 싸워야 했다.


7월 2일 수원을 거쳐 다시 대전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6일에야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 모인 인원은 생도1기 약 130명, 생도2기 약 150명. 열흘 만에 절반 이상이 감소했다. 

 

6·25전쟁 중 생도1기 113명, 생도2기 132명이 전사했다. 생도2기는 입교 3주 만에 43%가 전사했다. 생도1기 134명은 1950년 7월 10일 대전 원동초동학교에서 소위로 임관했다.


후퇴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생도1기 10명, 2기 3명 등은 7사단 소속 군인 7명과 함께 불암산을 근거로 해 암호명 ‘호랑이’, ‘불암산 유격대’를 결성해 싸웠다.


불암산 유격대는 9월 21일 남양주 내곡리에서 북한군 수십 명을 사살하고 납북되던 국민 10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불암산 유격대는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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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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