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로타리의 위상은 세계 4위권… 한‧일 로타리, 매년 교류하며 봉사 현안 논의
⊙ “2027년 한국 로타리 100주년 맞아 회원 10만 명 배가운동 전개”
⊙ 부친 尹潽善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모친 孔德貴는 한국 여성운동의 代母
⊙ “젊은이들 맞춤 프로그램 개발로 매력적인 로타리클럽 만들 것”
- 사진=오동룡 기자
“이제껏 로타리 활동을 통해 받은 것이 너무 많기에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주어져 뜻깊은 영광입니다. 국내 7만여 로타리 회원들과 함께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며 선진 봉사국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일 것입니다.”
윤상구(尹商求‧75) 한국 로타리 백주년기념회 회장이 국제로타리(Rotary International) 차차기(2026~2027년도) 세계회장으로 선출됐다. 사상 두 번째 한국인 세계회장으로, 지난 8월 12일 선출된 후 8월 15일부터 공식적인 차차기 세계회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한국인 첫 세계회장은 2008~2009년도에 역임한 이동건(李東建) 부방 회장이다.
지난 10월 7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동서코포레이션 사무실에서 만난 윤상구 회장은 “회장 때 해야 할 것들을 미리 준비해야 해서 사실상 차차기 회장 임기를 시작했다”면서 “내년 7월 1일부터 2026년 6월 말까지 로타리 차기 회장으로 근무하고, 그 이듬해 회장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회장 임기는 1년이지만, 사실상 2년을 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회장이 로타리 회원국 200개국을 당해연도에 모두 방문할 수 없기에 절반은 차기 회장, 절반은 회장 임기 때 다닌다”며 “앞으로 전 세계 어려운 이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지속해서 펼치겠다”고 했다.
한국 로타리의 위상은 세계 4위권

로타리는 1905년 미국 시카고에서 청년 변호사 폴 해리스(Paul Harris)가 3명의 친구와 함께 활동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최초 결성된 시카고 로타리클럽을 모태로 전 세계 200여 개국에 4만6000여 로타리클럽 및 로타랙트클럽이 있다. 140만 회원이 활동하는 국제적인 민간 봉사단체다.
―한국 로타리의 위상은.
“국제 로타리에서 한국의 위상은 매우 높습니다. 1927년 경성 로타리클럽을 시작으로 국제로타리에 가입했어요. 6·25 직후 국제로타리의 수혜국에서 연간 2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는 세계 4위 기여국으로 발전했습니다. 회원 수(6만8000여 명)로도 미국, 인도, 일본에 이어 세계 4위예요.”
―로타리 조직은 ‘3650지구’처럼 숫자로 표기하는데요, 무슨 뜻인가요.
“국제로타리는 34개 지구로 나누는데, 그중에 11지구‧12지구 등 2개 지구가 한국에 있습니다. 11지구는 남한의 북쪽, 12지구는 남쪽을 뜻해요. 예컨대 ‘3650지구’라고 하면, 11지구의 강북을 말하고, ‘3640지구’는 강남을 담당해요. 이렇듯 한국로타리는 전국에 19개 지구, 1700여개의 클럽에서 약 7만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언제 로타리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1987년 새한양 로타리클럽의 창립회원으로 로타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양로타리클럽이란 ‘마더클럽’에서 새한양클럽을 만들 때 창립 멤버로 참가했던 거죠. 사실 로타리가 봉사하는 조직인데, 가입할 때는 봉사라는 의미도 모르고 가입했어요(웃음). 미국에서 귀국해 사업을 시작했는데, 한국 사회에 네트워크가 없어 끙끙 앓고 있었거든요. 한양로타리클럽 회원이셨던 아버지의 지인께서 새 클럽(새한양)을 만들면서 가입을 권유하셨지요.”
윤 회장은 국제로타리 세계이사, 로타리재단 세계이사 및 부이사장, 2016년 국제로타리 서울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 로타리 백주년기념회 회장을 맡고 있다.
―지금 한국로타리에서 37년째 활동하고 계십니다. 2016년엔 세계 로타리 서울대회 조직위원장을 하셨지요.
“매년 로타리가 세계대회를 개최하는데요, 로타리 120년 역사에서 110회 가까이 세계대회를 했을 겁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회원이 온 게 서울대회입니다.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렸는데, 전 세계 160여 개국에서 오는 2만3000명을 포함해, 모두 5만여 명이 한자리에 집결했으니까요.”
한‧일 로타리, 양국 관계 발전 인물 재조명 작업도

―일본 로타리와의 교류는 활발합니까.
“멤버들이 매년 양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잠시 주춤했다가 올해 10월 24일 서울에서 재개합니다. 일본 로타리 회원 400여 명이 찾아오고, 미즈시마 고이치(水嶋光一) 주한일본대사도 초청했습니다. 한국로타리가 별도의 국가와 로타리 교류를 갖는 건 일본이 유일합니다. 양국 간 역사 문제로 갈등이 있지만, 한일 양국 로타리는 정치를 배제하고, 한일 간 민간외교 차원에서 함께 봉사할 사업을 토의합니다.”
―어떤 사업들을 해오셨나요.
“한일 간 함께할 로타리의 글로벌 이슈에 대해 논의하지만, 한일관계에서 좋은 역할을 하신 분들의 재조명 작업도 하고 있어요. 예컨대 코로나 19 직전에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렸던 한일 로타리 대회에선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화를 보존하고 산림을 보호하는 데 힘쓴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를 조명하는 행사를 열었고요, 일본에서 했을 땐 2001년 일본 유학 중 도쿄 JR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남성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李秀賢, 당시 26세)씨에 대해 추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하며 산림녹화에 힘썼다. 그의 형은 ‘조선 도자기의 신(神)’이라고 불리는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이며, 아사카와 다쿠미 자신도 조선의 공예를 좋아했다. 형에게 조선의 도자기 파편을 구해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을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오엽성(잣나무) 노천매장법’을 개발하는 등 헐벗은 조선의 산림 보호에도 헌신했다. 그의 생애는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2012)로 제작됐다. 그는 40세에 요절하여 유언에 따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국제로타리의 핵심 프로젝트, 소아마비 박멸사업

한국로타리는 한국 및 전 세계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회계연도(2023.7.1~2024.6.30)에는 281억 원 이상을 모금해 국제로타리 봉사 성금 전 세계 순위에서 미국, 인도, 대만에 이어 4위에 올랐다. 최근 3년간 연평균 311억 원 이상을 모금하며 적극적으로 기부와 봉사에 나서고 있다.
한국 로타리는 매년 천만 달러 이상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 세계 소외된 이들을 지원한다. 지난 3년간 106개 신규 기증 기금을 설립하는 등 인류애 실천과 초아(超我)의 봉사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고액기부자 수에서도 한국은 두각을 나타낸다. 누적 기부액 25만 달러(약 3억3200만 원)에 도달한 AKS(아치 클럼프 소사이어티) 회원은 전 세계 1584명이며, 이 가운데 한국인이 148명(2024년 7월 기준)으로 전 세계 4위다.
―한국로타리는 결핵 퇴치사업, 영아 사망률 낮추기 사업 등을 펼쳤는데, 그중에서 소아마비(Polio) 박멸사업이 가장 두드러진 것 같은데요?
“한국로타리의 가장 큰 사업은 바로 ‘소아마비 박멸사업’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3년간 소아마비 환자가 보고되지 않는 국가는 박멸국으로 공식 분류해요. WHO는 2000년 한국에 소아마비 박멸을 선언했습니다. 이어 인구 밀도가 높고 백신 접종률이 낮은 데다 위생 시설이 좋지 않았던 인도가 2015년 박멸 인증을 받았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아프리카 대륙마저 2020년 ‘소아마비 청정국’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인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아직 소아마비가 박멸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았습니다.”
―전쟁 중인 국가들은 왜 박멸이 어렵나요.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은 소아마비 접종 요원을 서방의 스파이라고 해서 폭탄테러로 살해한 적도 있어요. 아이들 백신 접종을 하려면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해서 맞춰야 하는데, 탈레반의 안전을 위해 그걸 못하고, 모스크 같은 곳에서 맞춰야 해요.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 전통에 따라 여자 혼자 아이를 데리고 모스크에 갈 수 없어요. 생업에 바쁜 아프가니스탄 남자들이 아이 백신 맞추는데 쫓아다니기 어렵죠. 미국이 빈 라덴을 잡을 때, 그의 소재를 빈 라덴의 아이를 통해 알았다고 해요. 빈 라덴의 아이가 아파 소아과 병원에 갔는데, 그 의사가 채취한 아이의 DNA 샘플이 미군 손에 들어갔어요. 미군은 즉시 빈 라덴을 추적해 잡았던 겁니다.”
‘몽골을 푸르게’ 프로젝트
윤상구 회장은 ‘몽골을 푸르게’ 프로젝트를 비롯해 33개국에서 80여 개의 봉사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2004년부터 황사 방지를 위해 고비사막에 35만여 그루 규모의 방풍림을 조성하는 ‘몽골을 푸르게’ 프로젝트의 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한양로타리클럽 회원들과 몽골의 사막화 방지를 위해 매년 봄에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고비사막으로 가서 나무를 심었다면서요?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나무를 심었습니다. 처음엔 5년 동안 50킬로미터의 나무를 일렬로 심어 방풍림을 조성해 보자는 생각으로 몽골엘 갔죠. 몽골을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라고 머릿속에 그리고 실제로 가보니 딴판이었어요. 산과 강, 그리고 절벽도 있는 거예요. 결국 광활한 고비사막에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나무를 심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나무를 심어나가니까 몽골의 지방정부 곳곳에서 고비사막 이외의 지역에도 나무를 심어달라고 요청을 해오더군요.”
―상당한 성과가 있었네요?
“한국로타리클럽이 2004~2005년 ‘몽골 프로젝트’를 시작해 한 프로젝트당 3년씩 5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40헥타르(약 12만 평)를 몽골 정부의 협조로 부지를 받아 조성했는데, 지하수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한 곳을 제외하고 그중 4개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현재 나무도 잘 자라고, 그중 하나는 몽골에서 가장 큰 비타민나무(갈매보리수나무) 농장이 됐어요. 비타민나무는 풍부한 비타민 덕분에 과거 말의 모피 윤기를 살리고, 살을 찌우는 용도로 쓰였답니다.”
―국내에도 건강식으로 유행하고 있는데, 잘하면 수익사업이 되겠군요.
“조성한 방풍림을 유지관리 하려면 돈이 들잖아요? 기름을 사서 우물의 펌프질도 해야 하고…. 돈을 로타리에서 계속 부담할 수 없으니까 자연히 나무 사이에다 과수(果樹)나 농작물을 심어 그 수익으로 유지관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몽골에서 나는 비타민 열매가 칭기즈칸이 건강을 위해 먹을 정도로 아주 좋다고 해요. 열매를 원료로 주스도 만들고, 화장품 원료로도 쓰이는데, 일본으로 대량 수출을 한답니다.”
―몽골 정부에서 관심을 가졌겠는데요?“몽골사람들은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까지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때였어요. 우리가 나무를 심어 숲으로 변하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몽골 정부는 중국의 ‘만리장성(The Great Wall)’을 본 따 ‘녹색 만리장성(The Great Green Wall)’을 쌓겠다는 정책을 만들었습니다. 국제로타리 본부도 우리의 고비사막 방풍림 프로젝트 ‘몽골을 푸르게’ 영상을 보고받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덕분에 저는 몽골 대통령으로부터 우호 친선 훈장을 받았지요.”
―지금도 몽골에 비타민나무 농장을 운영하고 계신가요.
“한국로타리에서 3년 동안 농장을 가꿔서 몽골 측에 인계해 주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농과대학을 나온 젊은 농장주가 인계받아 450헥타르(136만 평) 규모로 키웠어요. 우리가 인계하는 조건은 단순해요. 1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하면, 새로 식재(植栽)하든, 보식(補植)하든 매년 10만 그루보다 한 그루 이상씩은 늘리라는 겁니다.”
“정치할 생각 없었다”

윤상구 회장은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1897~1990) 제4대 대통령(재임 1960~1962년)의 장남이다. 그는 뉴욕 시러큐스대학교에서 건축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 자재 및 엔지니어링 회사인 동서코포레이션의 창립자이자 CEO이며, 한옥 문화유산 보존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여러 시민 단체에 참가하고 있다.
그는 경복고교 2학년인 196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윤 회장은 “아버지는 오십이 넘어 본 손자 같은 두 아들이 얼른 자라 독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찍 미국으로 보내신 것 같다”고 했다. 뉴욕주 소재 시러큐스대 건축학과에 다니다가 귀국해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나갔다. 이후 1975년 시러큐스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부터 8년간 미 LA에서 의류업을 하며 사업을 익혔고, 1983년 귀국하면서 전공을 살려 건축자재 수입회사를 차렸다.
―시러큐스대학 건축학과는 건축학 분야에서 미국 내 3위를 기록할 정도로 명문이군요.
“제가 다닐 때는 일류 건축학과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최고 수준의 건축학과라고 하네요(웃음). 당시 중동 붐이 불면서 졸업하자마자 건축설계보다 취업을 생각했습니다. 해외 유학파 동기들은 건설회사에 수월하게 입사했는데, 전 그게 어려웠어요. 정부와 가까운 건설사 회장이 찾아와 다른 사람보다 좋은 조건으로 저를 데려가려 했는데, 취업시킨 미끼로 아버지를 압박하려는 걸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취업은 포기하고 비즈니스 세계로 뛰어들었죠.”
―집안에서 정치인들을 보면서 성장하지 않았나요?
“아버지는 자신을 ‘가드너(정원사)’라고 하셨어요. 선거 유세 나갈 때 잠깐 집을 비우는 것 말고는 일 년 열두 달 바깥출입을 한 적이 없고, 정치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도 않으셨어요. 아버지와 장면(張勉) 총리 같은 분들은 자신을 정치인이라 하지 않고, ‘독립투사’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주위에서 ‘정치 영입’ 제의는 없었나요?
“그런 얘기도 조금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가 정치 쪽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물론 저도 정치할 생각이 없었고요.”
북촌문화포럼 대표 맡아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고택(古宅)’은 다섯 세대에 걸쳐 고풍스러운 안국동 일대를 지켜온 19세기 전통 한옥이자 사적 제438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고종 때인 1870년경 민대감(閔大監)이 지은 집으로 민가로써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저택으로 건축됐다. 이후 고종이 민 대감의 집을 매입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영혜 옹주의 남편 박영효(朴泳孝, 1861~1939)에게 하사해 머물게 했다. 이후 한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10년대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치소(尹致昭, 1871~1944)가 매입했다. 이후 4대째 윤씨 일가가 살고 있다.
―평생 한옥에서 사셨는데, 불편하지 않으세요?
“겨울엔 추워서 아내(梁恩仙)도 처음엔 힘들어했는데, 지금은 익숙해졌지요. 아버지도 겨울에 장갑 끼고, 외투 입고, 벽난로 앞에 앉아계시곤 했지요.”
―북촌문화포럼 대표를 맡으셨던 적이 있었는데, 북촌은 한옥문화의 상징이고 수도 서울의 정신이 깃든 곳 같아요.
“주말이면 북촌 한옥촌에 젊은이들로 북새통입니다. 국제로타리 해외 멤버들 가운데 서울을 방문했을 때 ‘윤보선 고택’을 찾는 분들도 꽤 있어요. 북촌에 젊은이들이 몰리는 걸 보면, 그들의 DNA에 ‘한옥’이 있는 것 같아요. 북촌의 상권이 확대되다 보니, 원주민들이 하나둘 떠나고, 북촌 보존의 대의(大義)가 장사하는 분들의 상업적 논리에 밀리는 게 아쉬워요.”

―윤보선 고택 앞에 안동교회(예장 통합)가 있는데, 일제하에서 한글을 지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한글학자 이윤재(李允宰) 선생이 안동교회의 장로로 시무했더군요.
“맞습니다. 100년에 가까운 역사 가운데 안동교회는 수많은 인재를 육성, 배출해 사회와 교회에 이바지한 유서 깊은 교회입니다. 안동교회와 마주하고 있는 윤보선 고택에서 평생을 지내며 대대로 믿음을 쌓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당에 가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예배를 드리시던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서 부모님의 체취를 느끼지요. 교회가 너무 가까워서 주일성수를 안 하고 도망칠 수가 없죠(웃음).”
―‘윤보선 고택’이 야당의 사무실 겸 회의실 역할을 했다고 하지요?
“장면 국무총리가 공관이 없어 반도호텔을 쓰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러한 장면 총리에게 집을 개수(改修)해서 사저로 옮겨 집무하겠으니, 총리에게 청와대를 사용하라고 권유하기도 하셨습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민주당 시절엔 야당의 회의실로 쓰이다시피 했습니다.”
―‘윤보선 고택’이 ‘민주당 사랑방’이 됐군요.
“그런 셈이죠. 그 시절 야당 정치인들은 생활이 어려워 삼시 세끼를 고택에서 해결했습니다. 민주당의 모든 회의를 우리 집에서 했고, 회의가 끝나면 어른들은 당시 김영삼(金泳三) 대변인(전 대통령)을 불러 회의 내용을 구술했고, 이것을 대문 간에 대기하던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해주었습니다. 《동양통신》에 있다가 《동아일보》로 옮긴 이만섭(李萬燮) 기자(전 국회의장)는 키가 크고 삐쩍 말라 전봇대 같은 이미지로 기억에 남아요.”
신학자 공덕귀 여사

윤상구 회장의 모친 공덕귀(孔德貴‧1911~1997) 여사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인권운동가다. 공덕귀 여사는 남편 윤보선의 아내이자 정치적 신념을 같이하는 동지이기도 했다. 2022년 11월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덕귀 여사의 평전 《공덕귀: 생애와 사상》(박영사) 출판기념회가 열리기도 했다.
―어머니인 공덕귀 여사(1997년 별세)는 여성 운동가였는데?
“평생 교회의 전도사로 살고 싶어 했던 분이죠. 1980년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두자, 어머니는 구속자가족협의회 의장, 양심범가족협의회 회장 등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바깥 활동을 하셨어요. 하지만 여성운동을 하려고 나선 건 아니고, 기독교인으로서 인권운동을 하신 겁니다.”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孔道彬), 어머니 방말선(方末善)씨의 5녀 2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9년 8세 때 통영공립고등학교 1학년생 공덕귀는 3‧1운동을 목격했고, 1932년 부산 동래의 일신여고 재학 중엔 YWCA 여학생회장을 지냈다. 1936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로 입학해 신학수업과 동시에 재일교포 교회에서 봉사했다.
―모친께서는 1940년 요코하마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도 하셨지요?
“송창근(宋昌根)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경북 김천의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에 연루돼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기도 했지요. 김천이라고 하는 시골 마을에, 한국 교회 내로라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함께 목회를 한 건에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월, 송창근 목사가 주도하고 김재준(金在俊), 한경직(韓景職), 정대위(鄭大爲), 조선출(趙善出) 목사 등이 교수로 있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셨어요.”

―아버지 윤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어머님이 학문적 갈망으로 인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하러 가려는데, 덕수교회 최거덕(崔巨德) 목사님이 송창근 목사님을 통해 중매를 서는 바람에 1949년 38세의 나이에 서울시장이던 51세의 아버지와 결혼하셨지요. 황금동교회 송 목사님이 입학허가 서류를 숨기셨대요(웃음). 함태영(咸台永) 목사님이 주례를 섰답니다. 1950년 39세에 장남인 저를 낳고 부산 피난 중 42세에 차남 윤동구(尹同求)를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해요.”
―만약 모친께서 프린스턴으로 떠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학위 받고 돌아오셔서 평생 독신으로 전도자의 삶을 사셨을 거예요.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따로 배우신 적도 없으셨죠. 손님을 청하면 아버지가 메뉴를 정하셨고, 메뉴에 따라 어머니가 시장을 봐오셨죠. 그렇다고 어머님은 음식을 만드시진 않았고요. 자녀 교육 문제도 학교를 따라 다니지 못하시니까 발만 동동 구르셨죠.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인사를 드리니, 아버지께서 ‘이제야 제대로 대접을 받겠다’며 좋아하셨어요(웃음).”
―모친께선 남편 윤 대통령이 정치인 시절 내조를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머니는 남편이 서울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 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던 거죠. 1960년 8월 아버지가 대한민국 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영부인이 된 이후에도 조용한 영부인으로 지냈습니다. 영부인으로 내조는 했지만,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지요. 영부인의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신념처럼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를 고집했습니다.”
―모친 공 여사는 기독교계와 정치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셨지요?
“김재준, 한경직, 강신명(姜信明) 등 한국 정치에 영향력이 큰 기독교 지도자들과 남편을 연결해, 아버지가 독재와 인권탄압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끌도록 고무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새벽 3~4시면 일어나 나라를 위한 구국의 기도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밤낮없는 데모와 불안한 시국을 보며 ‘주여, 이 백성을 어찌하시렵니까’라고 기도했고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공 여사는 윤보선 대통령이 1962년 3월 22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날 때,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피우려 할 즈음 총칼 앞에 중책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하는 아픔이 왜 없었겠는가”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사임한 후,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온 공 여사는 박순천(朴順天), 이우정(李愚貞), 이태영(李兌榮) 등과 함께 여성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1997년 11월 안국동 자택에서 86세를 일기로 소천해 충남 아산에 잠든 해위 곁에 묻혔다.
로타리가 NGO가 아니라는 정부

2027년 한국 로타리는 국제로타리 가입 100주년을 맞이한다. 또한, 지구촌 곳곳을 찾아가 ▲질병 예방 및 치료 ▲수자원 보호 및 위생 ▲문해력 증진 ▲모자보건 ▲평화 증진 및 분쟁 예방 ▲지역사회 경제 개발 등의 폭넓은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 로타리 백주년기념회 회장을 맡은 윤 회장은 한국 로타리를 널리 알리고 10만 회원 달성을 목표로 ▲백주년 기념 공모전 ▲로타리 브랜드 캠페인 ▲백주년 기념 웹사이트 오픈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특히 젊은 세대가 로타리에 관심을 두고 참여할 다양한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 로타리는 100주년을 맞아 구체적으로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있나요.
“한국 로타리는 무료 급식, 사랑의 김장 및 연탄 전달, 주거 환경 개선을 비롯해 지구 및 글로벌 보조금 사업을 통한 대형 봉사 프로젝트를 작년부터 준비하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로타리를 우리 사회에서 더 영향력 있는 단체로 만들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7만 명의 회원을 10만 명까지 배가하는 운동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젊은 세대가 로타리에 관심을 가질 만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현재 로타리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단체에 가입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 있어요. 젊은이들이 가입해서 지속할 수 있도록 하려면 뭔가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게 관건인데요. 그래서 로타리 가입 권유 대신, 원하는 봉사에 참여하라고 이야기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봉사에 참여해 재미를 붙여 로타리에 매력을 느끼면 그게 연속성을 갖는 것 아니겠어요?”
―회장님도 직접 봉사를 하시는 걸 사진을 통해 많이 봤습니다만.
“예를 들어 ‘세이브더칠드런’이나 ‘컴패션’ 같은 NGO들은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이 ARS 후원을 통해 지정액을 기부하게 되고, 그 돈으로 NGO 단체가 봉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로타리는 우리가 모은 돈으로 봉사를 해요. ‘손과 발’로 봉사하는 게 특징인데, 이것이 로타리만의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부에선 스스로 돈을 모아 활동을 하니까 NGO로 인정을 해주지 않고 있어요.”
―정부가 NGO로 인정하지 않으면 활동에 어려움이 있을까요.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로타리가 자원봉사단체로서 NGO가 틀림이 없음에도 인정을 못 받는다는 게 섭섭한 거죠. 예전엔 돈 있는 사람의 ‘놀이터’ 쯤으로 로타리를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로타리가 돈 많은 사람만의 모임이 아니잖아요? 로타리 가입 조건은 봉사 마인드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입할 수 있고, 물질이나 자기 재능으로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 7만 명 회원 가운데 서울의 2개 지구 회원은 4000명에 불과하고, 지방으로 갈수록 더 활발합니다.”
구글 규모의 ‘봉사 플랫폼’ 만든다

―이전엔 ‘소아마비 박멸사업’을 로타리의 중점사업으로 삼았는데, 재임 중엔 가장 중점을 두려는 사업은요.
“유엔에서 추진하는 기아, 빈곤, 교육, 복지 등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 17개 가운데 7개를 중점으로 삼아 봉사하려고요.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매력 있는 단체로 만드는 게 가장 큰 숙제입니다. 또 하나는 로타리가 아마존이나 구글처럼 로타리가 봉사하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거대한 ‘봉사 플랫폼’을 만들 계획입니다. 봉사 플랫폼이 되려면 많은 경험과 지식, 인구가 필요한데, 로타리 안에는 120년의 역사, 140만 명의 회원 등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윤상구 회장은 “성공회대 총장을 지내신 김성수(金成洙) 주교가 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강화의 장애우 근로시설 ‘우리마을’에 김장거리를 전달하고, 쪽방촌에 있는 ‘요셉의원’에서 자원봉사를 마치고 회원들끼리 모여 저녁 식사를 할 때면 밥맛이 꿀맛”이라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사실은 자신을 위해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