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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년 전 개봉한 佛 영화 <세 가지 색 : 레드> 다시 보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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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드> 포스터와 1994년 9월 국내 개봉 당시 영화 포스터.

1994년 국내 개봉한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 <세 가지 색: 레드(Trois couleurs: Rouge)>를 지난 주말 다시 보았다.

 

30년 전 프랑스의 낡은 집들과 차량들, 오래된 계단, 복고풍의 옷들을 보는 즐거움 외에도 ‘자유’, ‘평등’과 더불어 <레드>에 담긴 박애정신을 느껴보고 싶었다.

 

제네바 대학생이자 모델인 발렌틴 투소와 늙은 전직 판사가 <레드>의 스토리 구조를 이어가는 주인공인데 발렌틴의 이웃에 사는 법대생(이후 판사) 오귀스트 브루나이가 스치듯 앞서거니뒷서거니 등장한다.


전직 노() 판사의 무작위 도청에 오귀스트와 그의 애인의 통화 내용이 잠시 등장하지만 발렌틴은 그가 이웃집 남자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서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발렌틴과 오귀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서로를 응시하게 된다. 영화가 우연이 마치 필연의 만남인양 관객이 느끼게끔 설정돼 있지만 이후 스토리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돌려놓았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이렇다. 패션쇼를 마치고 귀가하던 발렌틴이 우연히 개를 치는 사고를 낸다. 개 목줄에 적힌 주소로 가니 늙은 전직 판사의 집이었다. 그러나 이 노인이 인근 주민들의 전화통화를 무작위로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발렌틴은 큰 충격을 받고 그 사실을 주위에 알리려 하지만, 통화내용(남편의 불륜 통화)이 알려질 경우 겪게 될 그 가정의 불화가 걱정돼 침묵한다.


발렌틴은 노인의 전화 도청을 혐오하지만, 사랑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노인의 말에 점점 귀 기울이게 된다. 노인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후 도청사실을 경찰에 자백한다.


이 과정에서 이웃집 남자 오귀스트는 길에 떨어뜨린 법학책에서 펼쳐진 그 폐이지를 운명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판사 시험에 합격하게 되고 그러나 애인의 외도를 확인하고 절망한다. 나중에 노판사도 판사 시험 준비에서 우연히 펼친 페이지를 공부해서 합격했다는 경험담을 발렌틴에게 말해주기도 한다.


발렌틴은 자신에게 집착하는 애인 미셸과 결별하기 위해, 그리고 배다른 남동생과 혼자 남겨진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노인은 발렌틴에게 비행기 대신 영국행 페리호를 탈 것을 권한다.


그 페리호에 오귀스트도 타게 되는데 배가 전복돼 1000여명의 승객 중 7명만이 구조된다. 그 중 살아남은 두 명이 발렌틴과 오귀스트다. 두 사람이 구조돼 수건으로 몸을 감싸는 TV 속 장면을 노인이 지켜보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영화 속 우연히 만났다가 계속 헤어지는 발렌틴과 오귀스트는 관계의 인드라망(Indra's net), 불교 용어인 연기(緣起)를 떠올리게 한다.

 

직접 두 사람이 연결은 안 되지만 한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되는 인간관계처럼 오귀스트와 처음부터 발렌틴을 만나진 않지만 노 판사의 도청 내용 중에 오귀스트가 나오고, 둘이서 집 주변이나 법원 등지에서 스치듯 지나간다. 음반 판매점에서 간발의 차이로 오귀스트가 CD를 먼저 사는 바람에 발렌틴이 못 사기도 한다. 발렌틴이 볼링을 치러 갔을 때, 바로 옆 레인에서 오귀스트와 그의 애인 카린이 볼링을 하고 있었던 장면도 떠오른다.

또 발렌틴이 개를 친 사고를 내던 밤에, 차를 운전하고 갈 때 오귀스트가 걷던 길을 지나간다. 이때 오귀스트는 차가 스쳐 지나가자마자 책을 떨어뜨린다.


영화는 세 가지 색시리즈 중 블루와 화이트의 여주인공도 생존자로 잠시 얼굴이 비친다. 줄리에트 비노쉬와 줄리 델피. 또 늙은 전직 판사와 오귀스트의 삶이 상당히 닮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치 노인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하다. 둘 다 판사이고 애인의 외도로 절망하는 점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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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드>(1994) 포스터.


"떠나야지그게 운명이라면" "모르시겠어요그를 살리신 거예요."


다음은 영화의 주요 대사다.

 

<발렌틴: 엄마는 혼자 사세요. 동생에게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지만 3일만에 떠났어요. 전 다음주에 영국으로 가요. 얼마나 있을지는 몰라요. 엄마랑 동생을 방치하고 있었어요. 동생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요.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노판사: 떠나야지. 그게 운명이라면. 동생을 대신해서 살 순 없어.

발렌틴: 동생을 사랑해요. 도울 수만 있다면.

노판사: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노판사: 한 선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내 인생 최악의 실수였어. 오판을 내렸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지. 그는 유죄였어.

발렌틴: 그 후 어떻게 됐나요.

노판사: 결혼해서 세 자녀를 낳고 손자 하나와 평화롭게 살더군.

발렌틴: 그의 인생을 구했군요. 옳은 방식으로. 모르시겠어요? 그를 살리신 거예요.

노판사: 글쎄,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오판을 더 내렸을까?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일은 무모한 행위 같아.

발렌틴: 무상함.

노판사: 맞아. 무상함.>

 

<발렌틴: 선생님은 더 아픈 이야기는 숨기셨어요. 사랑했던 여자 이야기. 그녀가 선생님을 배신했죠? 그녀가 선생님을 아프게 했어요. 선생님은 이유를 알 수 없으셨겠죠. 아직도 사랑하는 그녀를 잊지 못하세요.

노판사: 어떻게 그걸 전부 알지?

발렌틴: 추측일 뿐이에요. 어떻게 생겼어요?

노판사: 두 살 연상의 대학선배였지. 금발이고 섬세하며 지적이었고 가녀린 목이 아름다웠지. 그녀의 옷과 모든 가구들은 밝은 색깔이었어요. 그중 테두리가 흰 거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거울을 통해 무언가를 보고 있었지. 그녀의 벌어진 하얀 다리 사이로, 한 남자가 보이더군.

발렌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노판사: 휴고 호블링이라는 남자는그녀가 원하는 걸 잘 알았지. 둘은 떠났어. 그리고 난 뒤쫓았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도버 해협을 건넜어. 난 모멸감에 휩싸였지. 사고로 그녀가 죽은 그날 이후로 지금가지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시작하지 않았어. 맞아. 여자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

아니면 믿을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아마 너 같은 여자를 말이야.

발렌틴: 그걸로 끝이었나요?

노판사: 몇 년 후 어려운 재판을 맡았는데 피고 이름이 휴고 호블링이었어.

발렌틴: 그 남자.

노판사: 그래. 돌아왔던 거지

발렌틴: 그 재판을 맡지 말았어야 했어요.

노판사: 안 맡으려고 했지만 그를 사형에 처하고 싶었어.

달라질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결국 그는 판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지. 그가 지은 건물이 무너지면서 여러 명이 사망했어. 나는 유죄를 선고했고, 재판은 완벽하게 공정했지. 그리곤 일찍 퇴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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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4년 9월 19일자 15면에 실린 영화 <레드> 광고다.


영화 속 박애는

 

박애(博愛)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애(philanthropy)를 뜻하는 그리스어(φιλανθρωπία)에서 유래된 말이다. 불어로 박애라는 뜻의 프라테르니테(fraternité)는 형제애, 우애도 포함하고 있단다.


<레드>의 주인공 발렌틴이 사고로 개를 다치게 한 후 보듬었고, 개 주인(노인)에게 돌려주려 했고 새끼를 임신한 사실까지 덤으로 알렸으니 이것만큼 확실한 박애는 없을지 모른다. 박애는 동물에 대한 사랑도 포함돼야 마땅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뒤 혼자 살아가는 전직 판사인 노인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아픔을 끌어낸 발렌틴의 마음이 박애의 마음이 아닐까. 또 발렌틴이 쓸쓸히 살아가는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 영국으로 가려한 것도 박애의 마음일 수 있겠다.

 

전직 판사인 노인이 한 선원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인생 최고의 실수였다고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발렌틴이 인생을 구한 판결이고, 그를 살린 옳은 방식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최고의 실수가 아니라 옳은 방식으로 그를 살린판결이란 것이다.

그 판결이 바로 박애일지 모른다. 노인이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것은 무모한 행위라고 고백하는데, 정의 위에 박애가 있음을 알려준다.

 

세 가지 색의 영화 3편이 모두 1994년 개봉되었다. <레드>는 벤쿠버국제영화제, 뉴욕 비평가협회상, 시카고비평가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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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9월 셋째 주에 <레드>와 함께 국내 개봉한 영화의 포스터들이다.

입력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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