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 갔다. 도로는 넓었고 스페인어는 정겨웠다. 얼마나 말이 빠른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해발 667m. 3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만사나레스 강이 흐르는 곳. 해질녙 스페인 왕궁 주변을 거닐어도 보았다. 낮에는 프라도 박물관,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를 찾았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무슨 이야기를 건네도 들어줄 것만 같았다.
프라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에 갔다. 프라도는 ‘초원’이라는 뜻이다. 옛날 귀족들이 초원에 저택을 세워 자신의 수집품을 전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술관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피카소가 스페인에 머무를 때 프라도 미술관에 들러 이 작품 앞에 의자를 갖다놓게 한 다음 자주 머물렀다고 전한다.)였다.
그리고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1746~1828)의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1814)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교과서에서 본 그림이지만 이 그림이 저렇게 클 줄 몰랐다. 힘차고 대담한 붓터치가 실물 그림을 보니 더 생동감 있고 놀라웠다. 268cm x 347cm...
19세기 포르투갈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노렸다. 처음에 스페인 민중은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티즘이 자신들을 카를로스 4세와 마누엘 고도이의 폭정에서 구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2일>
1808년 3월 폭동을 일으켜 카를로 스 4세가 쫓겨났다. 그제야 나폴레옹이 속내를 드러냈다. 스페인 왕위를 노렸던 것이다. 그해 5월 2일 스페인 민중이 봉기했다. 프랑스군은 경멸스럽게도 이집트 용병대(맘루크 기병)를 동원해 진압, 급기야 시가전을 통해 마드리드를 장악했다.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은 프랑스 군이 봉기한 스페인 민중을 처형한 장면이다. 그림 가운데 노란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놀란 눈동자가 오래 여운을 주었다. 눈알이 빠질 듯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니 청년의 양 손바닥에 상처가 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컴컴한 밤, 총살당하는 민중들을 등불이 비추고 있다. 마치 무대 조명처럼.
이 그림은 선한 민중과 살인하는 군대로 양분시켜 선악의 판단을 민중의 시각에 맞췄다. 훗날 독재자에 저항하는 전 세계 민중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이 두 작품은 들라크루아(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 1798~1863)의 기념비적 작품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영감을 주었다.
들라쿠루아아의 그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14년 궁정화가인 고야는 스페인의 섭정 루디 드 부르봉으로부터 1808년 5월 2일과 3일 이틀 동안 일어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첫 번째 그림이 <1808년 5월 2일: 맘루크 용병들의 돌격>이었고 두 번째 그림이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혔지만 1813년 6월 21일 영국 웰링턴 공작이 조제프를 물리치자 이후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이 물러나게 되었다. 앞서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실패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페르난도 7세가 6년만에 귀국해 스페인은 또다시 절대군주 체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