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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사제 70년....지혜의 말씀 남기고 떠난 정의채 몬시뇰

“하루만, 한 번만 미사를 봉헌하고 죽게 해주소서”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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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한 정의채 몬시뇰. 사진=조현호

평북 정주 출신의 한국 천주교회 정의채(鄭義采·) 몬시뇰이 27일 선종했다.

 

‘한국 가톨릭의 지성’이라 불린 정 몬시뇰은 로마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명동성당 주임신부, 가톨릭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올해 사제 수품 70주년이었다.


고인은 함경도 원산에 위치한 덕원수도원을 나왔다. 성 베네딕도 수도원인 덕원수도원 출신으로 훗날 교회 지도자가 된 이는 윤공희 대주교와 지학순·김남수 주교 등이다.

 

기자는 월간조선20194월호를 통해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일이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저에게 신과 죽음에 대한 24가지 질문을 한 뒤 답을 듣지 못한 채 떠나갔다며 정 몬시뇰은 이렇게 회고했었다.

 

이병철 회장은 산전수전, 온갖 경험을 한 사람이거든요. 부자라고 하지만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 사람은 죽음 앞에서 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죽기 전 저를 찾아온 것이에요.”

 

기자는 월간조선 20201월호를 통해 정 몬시뇰과 다시 만났다. 당시 6.25 체험담을 들었는데 오래 잊히지 않았다. 고인의 말이다.

 

“19495월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고, 6·25 발발 이후에도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북쪽에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사제를 꿈꾸었던 모든 희망이 사라져 암흑세계에 갇힌 것이죠. 저는 순간순간 죽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요. 195010월 하순에 접어들 무렵, 북한 전역은 유엔군의 공습으로 마비가 됐어요. 인민군은 퇴각 중이었고, 무차별적 반동분자 소탕으로 집집마다 곡()소리가 났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북한 노동당 세포위원장과 간부급에게는 총이 주어져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했지요.

 

저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마을 뒷산 능선을 타고 이웃 동네 친척 집으로 피해 갔어요. 인민군 부상병인 5촌 조카의 군복을 빼앗다시피 해서 갈아입은 채 다시 도망을 쳤어요. 그때 동네 노동당 세포위원장이 10m 뒤에서 총을 쐈는데 다행히 저를 비켜갔어요. 하느님이 신부가 되려는 이 정의채를 도운 것이 아닐까요.


저는 서해안을 따라 걷다가 40리가량 북쪽에 위치한 정주 읍내로 들어갔어요. 거기서도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또다시 북쪽으로 30리가량 걸어 고모댁을 난생처음 찾았습니다. 그날 저녁이 되니 숨어 있던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어요. 그래서 고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그 동네를 나왔어요. 나중 듣기로, 제가 떠난 뒤 7~8명의 마을 청년들이 모두 체포돼 모래사장에서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무작정 정주읍을 향해 걸었는데, 날은 어두웠지만 달은 유난히 밝았습니다. 읍으로 가는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앞에서 인민군복을 입은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거기 꼼짝 말고 서라고 하더군요. 순간 이제 최후를 맞겠구나하고 느꼈어요. 한 사람은 대위고 다른 사람은 상사쯤 되어 보였는데, 상사가 제 가슴에 총을 겨눴고 대위는 저를 심문했어요.”

 

하루만, 한 번만 미사를 봉헌하고 죽게 해주소서


대위는 동무는 누구며 왜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느냐고 다그쳤고, 저는 차분하게 후퇴하는 인민군인데 신의주로 집결하는 길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왜 혼자냐고 묻기에 뿔뿔이 헤어졌다고 했죠. ‘왜 지금 이 시간이냐고 하기에 낮에는 공습으로 숲속에서 잠이 들어 늦었다고 했고요. ‘그러면, 무슨 부대 소속이냐고 물었는데 ‘2천 몇백 부대라고 아무렇게나 둘러댔어요.


아마 그 대위는 제가 인민군이 아닌 걸 알아차린 것 같았어요. 저는 지금도 그 순간, 성령님과 성모님이 도우셔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준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대위는 빨리 가서 본대에 합류하시오했는데 상사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이 동무를 본부로 데려가 신분을 더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상사는 두 번, 세 번 완강하게 나를 다그쳤어요. 그러자 대위는 그만하면 됐으니 빨리 갈 길을 가자고 명령하듯이 말했어요.

 

그들과 헤어져 저는 마구 걸었죠. 갈 곳도 없었습니다. 노끈으로 만든 묵주로 감사기도와 간구기도를 드리며 남으로 남으로 향했습니다. 그 길에서 우연히 고모님 댁에서 만난 청년과 동행하게 됐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떠나고 마을 청년들이 모두 총살당했는데 그는 옆 사람이 총에 맞는 순간, 같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는 겁니다. 총 맞은 사람의 피를 같이 뒤집어쓴 채 말이죠. 그랬더니 인민군이 한 방에 둘이 죽었네하며 같이 땅에 묻어버리더란 겁니다.

 

남으로 내려가며 제 기도는 더 절박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사제가 되어 1년만이라도 사목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사정이 급박해지자 1개월만, 더 급박해지자 일주일만, 죽음이 경각(頃刻)에 달린 순간에는 하루만, 한 번만 미사를 봉헌하고 죽게 해주소서, 하고 혼신(渾身)을 다해 기도했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한 번만미사를 드리게 해달라는 기도가 66년간 기도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네요.”

 

정 몬시뇰은 이런 말도 했다.

 

저와 같이 말할 수 없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이렇게 큰 것이거늘 다른 사람에게야 얼마나 더 큰 것이겠는가. 저는 그저 '무한히 자비하신 주님은 찬미받으소서'의 외마디 기도 외에 지금 달리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화면 캡처 2023-12-28 064433.jpg

부산 피난시절 정의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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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수품을 받을 당시의 정의채 신부

 

2001_238.jpg

2019년 4월 월간조선과 인터뷰 당시의 모습이다.

 

정의채 몬시뇰이 걸어온 길

 

1925 평북 정주(定州)

1948 덕원신학교 고등부 졸업

1952 가톨릭 대학교 졸업

1953 사제 수품

1953~1955 부산 초량 천주교회 보좌 신부

1955~1957 부산 서대신동 천주교회 보좌 신부

1961 로마 우르바노대학교 철학 박사학위

1961~1985 가톨릭 대학교 철학 교수

1974-1976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장

1978~1979 성심학원 재단 이사장

1981~1985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부위원장 (실무 총책임자)

1984~1988 서울 불광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1985 '윤리와 가치윤리와 교육' 국제 학술회의 주최

1985~1988 서강대학교 철학 교수

1988 서울 명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1988~1991 가톨릭대학교 총장

1990~1991 8차 시노드(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교황청) 발표 "가톨릭 종합대학 안에서의 신학교 교육"

1992~1993 서강대학교 부설 생명문화연구소 창설 및 초대 소장

1999~2003 아시아 가톨릭 철학인회 회장 2회 연임

2005 교황 명예고위성직자 서임

2008 대통령 위촉 건국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

2009~2010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2대 역임 중

2009~ 대한민국 기영회(耆英會) 위원

 

수상

1991 국민훈장 모란장 (학문적 업적과 공로)

2009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 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라틴 한글 번역상 외 다수

 

저서 및 역서

형이상학, 존재의 근거 문제, 토마스아퀴나스의 유와 본질에 관하여(라틴-한글대역), 토마스아퀴나스 신학대전(한글-라틴 대역: 1~6, 10~11, 16) 등 다수

입력 :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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