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의 신문 만평 ‘왈순 아지매’로 유명한 정운경 화백이 10월 12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기자는 《월간조선》 2000년 11월호에 ‘[그룹 인터뷰] 스트레스와 싸워 이긴 사람들의 비밀’이라는 기사를 쓰면서 정운경 화백을 인터뷰한 바 있었다. 정 화백은 이 기사에서 ‘왈순 아지매’라는 이름은 사촌 형수님의 친구 분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혔다. 정 화백은 또 “만화를 가장 그리기 편했던 것은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면서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다시 점점 신문 만화에 대한 외압이 늘어갔다”고 토로했었다. 당시의 기사를 다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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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시사만화가는 네 칸 혹은 한 칸의 지면(紙面)에 그림을 통해 세상 만사에 대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풍자를 담아내야 하는 직업이다.
정운경(鄭雲耕·65·중앙일보) 화백은 신문 시사만화가가 받는 스트레스에 대해 한마디로 “프로 바둑기사를 연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시사만화가는 비슷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는 세상사를 새롭고 기발하게 표현해야 하는데다가, 늘 마감 시간에 쫓긴다는 점에서, 대국(對局)을 할 때마다 다른 수가 전개되고, 초읽기에 쫓기는 프로 바둑기사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정 화백은 만화를 그리면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면 거리로 나가 정처없이 헤매거나, 윤전실이나 화장실에 가서 앉아 있기도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쓰는데, “그럴 때는 정말 끔찍하다”고 했다.
때로는 꿈을 꾸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는데, 정 화백은 그때 잠이 깨면 얼른 머리맡에 놓아둔 종이에 메모를 해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분명히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별것 아닌 경우가 많아요. 역시 꿈속에서 생각나는 아이디어는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정 화백에 의하면 중앙일보에 만평(漫評)을 그리던 박기정(朴基楨·63) 화백은 만평 그리는 일을 그만둔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마감 시간까지 만화를 그리지 못해 쩔쩔매는 꿈을 꾼다고 한다.
만화가에게 네 컷짜리 만화와 한 컷짜리 만평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그리기 어려울까?
“네 컷짜리 만화가 더 힘이 듭니다. 네컷짜리 만화에는 그 안에 스토리가 있고, 마지막에 가서 반전(反轉)의 묘미를 안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 화백은 그런 어려움 때문에 신문의 네 컷짜리 만화를 담당한 신인 만화가들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신문의 네 컷짜리 만화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에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신문 만화에 대한 외압이 극심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정화백에 의하면 만화를 그리기에 가장 어려웠던 때는 제5공화국 시절이었고, 가장 그리기 편했던 것은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고 한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다시 점점 신문 만화에 대한 외압이 늘어가는 상황을, 정 화백은 “자꾸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이 좁아지고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정 화백은 옛날에는 주로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요즘에는 퇴근길에 순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집이 있는 여의도 입구까지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문득 정 화백이 그려온 ‘왈순 아지매’라는 이름의 유래가 궁금해졌다.
“‘왈순 아지매’, 그 이름을 지을 때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았습니다. 나도 ‘고바우’나 ‘두꺼비’처럼 평생을 같이 갈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전화번호부를 뒤지다 좋은 이름이 안 나와 온 서울 주택가를 돌아다니며 문패를 살펴보기도 하고…. 하루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리가 아파 잠시 쉴 생각으로 사촌형님 댁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사촌형수님의 친구분을 빕게 되었습니다. ‘월선’이라는 그분 성함을 접하는 순간, ‘왈순 아지매’라는 이름이 떠오르더군요.”
정 화백은 “(‘왈순 아지매’라는) 그 여자를 얻어 산 지도 벌써 42년이 지났다”는 말로 ‘왈순 아지매’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