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한가위 안동 산책 ③ <끝>] 안동에 빠지다 – 도산서원, 권정생, 하회마을, 소호헌

서명수 여행작가의 《안동에 빠지다 안동홀릭》 리뷰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안동 도산사원. 사진=서고 제공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봉정사와 하회마을 그리고 유교경판, 모두 안동이 보유(?)하거나 안동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들이다.

 

국보가 5, 보물이 43개나 있어, 말 그대로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문화도시라는 명성에 손색이 없다.

 

도산서원은 인근의 병산서원과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등과 함께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에서 최초로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새롭게 정리한 퇴계 이황선생을 기리는 도산서원은 옛 모습 그대로다.

 

더하고 덜하고 할 것도 없이, 퇴계가 기거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농운정사와 광명실, 역락서재, 하고직사 등의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모두 간결하고 소박하고 검소했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IC에서 나와 안동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마을이 안동시 일직면 조탑마을다.

 

골목길을 따라 100m 쯤 가자 정생 샘을 닮아 나지막한 지붕의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 나타났다. 그야말로 단칸살이 오두막집이다. 댓돌 위에 올라서면 방 한 칸, 부엌 한 칸 있는 자그마한 토담집이다.

 

집 앞에 세워진 팻말을 보고서야 이 집이 권정생 선생이 살던 곳(1937~2007)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9791197937705.jpg

 

한가위를 맞아 출판사와 저자의 도움으로 3회에 걸쳐 안동에 빠지다 안동홀릭을 소개한다. 이번 글은 마지막 글이다.

 

다음은 서명수 여행작가의 글과 사진이다.

 

---------------------

 

 

퇴계의 향기, 도산서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다. ‘여우가 죽을 때 구릉(丘陵)을 향()해 머리를 두고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 한다는 의미로 많이 쓴다.

퇴계 이황 선생은 끊임없이 조정에 불려나가 진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69세가 되던 1569년 고향에 돌아와서 도산서당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퇴계(退溪)'라는 호가 '나의 고향 시냇가로 물러나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후 퇴계 선생이 더 존경스러워졌다. 퇴계 선생이 안동에서 기거하던 곳이 바로 계상서당(溪上書堂)이었으니 '물러나 계상서당으로 돌아간다.'는 퇴계라는 호의 의미가 딱 들어맞았다.

 

0000677293_002_20201219060022249.jpg

사진=서고 제공

 

퇴계는 낙향을 만류하던 선조 임금의 허락을 받아 마지막 벼슬을 물리치고 한양(漢陽)을 떠나 14일 만에 고향 도산으로 내려왔다. 그로부터 451년이 흘렀다.

혼탁한 세상이다. 서푼짜리 미관말직 벼슬이라도 얻으려고 너나할 것 없이 서울로 몰려가서 정치권 주변에서 유력정치인의 잡심부름을 마다하지 않고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고 혹은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얻기 위해 '감사합니다.'하며 고개를 수그리는 세태다. 서울 여의도 정치권 주변의 그런 세태를 보면 퇴계가 얼마나 위대한 우리의 스승이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퇴계의 가르침은 안동의 정신이다. 안동의 정신은 곧 퇴계의 가르침이고 그것은 안동을 우리 독립운동의 본산으로 만든 바탕이기도 하다.

 

안동 시내에서 퇴계의 삶의 자취를 찾아나서는 길은 꽤나 먼 편이다. 봉화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안동호를 끼고 30여분을 달려야 도착한다. 도산서원은 인근의 병산서원과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등과 함께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해서 도산서원의 위상이 달라진 것은 없다. 꼬불꼬불 호수가 보일락말락하는 호숫길을 지나면 도산서원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어서 도산서원까지는 오분 여 남짓 걸으면 오른쪽에 시원한 안동댐이 만든 안동호를 만나게 된다. 도산서원은 안동호를 바라보는 풍광좋은 도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 넓직한 마당에는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온 관광객과 배향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서원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아담하다.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기거하던 '도산서당'은 그저 작은 세 칸 반짜리 집으로 마루까지 갖추고 있지만 소박했다.

 

유교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曲阜)에서 만난 공자의 유적들이 '대륙스케일'을 그대로 재현하듯이 웅장한 규모라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공자의 후손도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으로 추존된 안동의 도산서원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최초로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새롭게 정리한 퇴계 이황선생을 기리는 도산서원은 옛 모습 그대로다. 더하고 덜하고 할 것도 없이, 퇴계가 기거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농운정사와 광명실, 역락서재, 하고직사 등의 여러 건물들이 있지만 모두 간결하고 소박하고 검소했다. 퇴계의 생활 자체가 자연과 벗하면서 살아가는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서원에 들어서 가장 먼저 도산서당으로 향했다. 문패처럼 붙어있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작은 현판글씨가 이채로웠다. 이 도산서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퇴계가 직접 쓴 친필이라고 한다.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퇴계를 찾아오는 후학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북적이던 서당의 현판이 자그마한 나뭇조각에 작고 아담하고 글씨체로 쓰여있는 것이 여간 의아스럽지 않았다.

 

KakaoTalk_20230927_104853831_01.jpg

 

2020122521434355913_m.jpg

 

2020122521433571440_m.jpg

권정생 가옥. 사진=서고

 

 

아! 권정생

 

 

마당에서 이리 저리 뛰어놀다가 풀숲 한 구석에 주저앉아 똥을 싸는 우리 집 강아지 '보리'의 모습은 동화 <강아지똥>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기시감이 든다. 강아지똥은 시골에서는 늘 발에 채이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그런 강아지똥이 거름이 되어 예쁜 민들레꽃을 피우다니... 그래 하느님은 쓸모없는 건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세상 모든 건 다 귀하고 쓸모가 있어."

 

어떻게 그 옛날 시골교회에서 종을 치던 '종지기'가 이런 생각을 동화로 쓸 수가 있었을까...그저 참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강아지똥>은 이렇게 시작된다.

 

"돌이네 흰둥이가 똥을 눴어요.

골목길 담 밑 구석 쪽이에요.

흰둥이는 조그만 강아지니까

강아지똥이에요.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보더니

강아지똥 곁에 내려앉아 콕콕 쪼면서

"!! 에그, 더러워..."

하면서 날아가 버렸어요.

"뭐야! 내가 똥이라고? 더럽다고?"

강아지똥은 화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어요.

 

<강아지똥>을 쓴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을 찾아 나섰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IC에서 나와 안동으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마을이 안동시 일직면 조탑마을다. '조탑마을'이란 지명은 이 마을 한 가운데에 오층 전탑(보물 제 57)이 있어서 생겼다. 보물로 지정된 이 전탑은 최근 문화재청에서 무너진 부위에 대한 복원공사를 하면서 지붕을 씌워놓아 볼 수가 없다. 전탑 바로 앞 골목길 입구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권정생 샘의 대형걸개그림을 '양철 벽'에 그려놓았다. 소탈한 정생 샘의 모습이 보이자 마음이 울컥해졌다.

 

골목길을 따라 100m 쯤 가자 정생 샘을 닮아 나지막한 지붕의 작은 오두막집이 한 채 나타났다.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거기서도 산길을 걷고 냇물 돌다리를 건너고, 포플러 나무가 서 있는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 걸어 씩씩하게 살아주셨으면 합니다. '일하는 아이들'에 나오는 그런 개구쟁이들과 함께 별빛이 반짝이는 하늘 밑 시골집 마당에 둘러앉아 옥수수 까 먹으며 얘기 나누시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합니다. (중략) 선생님의 영전에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진달래꽃 한 다발 마음으로 바칩니다."

 

권정생 선생이 200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오덕 선생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오덕 선생이 떠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2007년 권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따뜻한 봄이 오면 '강아지똥'을 거름삼아 오롯이 들판 곳곳에서 꽃을 피우는 민들레꽃 한 다발 꺾어 빌뱅이 언덕에 바치고 싶다.

 

그야말로 단칸살이 오두막집이다. 댓돌 위에 올라서면 방 한 칸, 부엌 한 칸 있는 자그마한 토담집이다. 마당에는 선생이 기거할 때 사용하던 툇마루와 의자도 널부러지듯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마치 잠시 출타한 것처럼 보였다. 집 바로 옆에는 선생이 아침마다 세수를 하던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고 마당에서는 권 선생이 평생 종을 치며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직교회 종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집 앞에 세워진 팻말을 보고서야 이 집이 권정생 선생이 살던 곳(1937~2007)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댓돌위에 올라서서 인기척 소리를 내면 권 선생이 문을 열고 "거기 누구신가?"하며 내다보실 것 같다. '내가 죽거든 이 집도 허물어라'라고 할 정도로 소유를 죄스러워한 그는 평생을 소박하고 소탈하고, 무엇보다 가난한 삶을 살았다. 오죽했으면 쌀밥을 먹게 되면, 평생 쌀밥 한 그릇 마음껏 드시지 못하고 고생하시다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을까.

 

집 뒤로 난 언덕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권 선생이 늘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던 빌뱅이 언덕이다. <강아지똥><몽실언니>, <엄마까투리> 등 수많은 동화와 소설 등 작품을 탄생시킨 산책길이다.

 

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고생하던 선생을 위해 동네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아래 지어준 자그마한 토담집이 이 집이다.그는 이 집에 이사와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2021032620112281704_l.jpg

양진당을 관람하는 관광객들

 

 

하회마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봉정사와 하회마을 그리고 유교경판, 모두 안동이 보유(?)하거나 안동에 있는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들이다. 안동과 같은 작은 지방 도시가 유네스코가 선정한 다섯 개 정도의 세계 유산을 자랑한다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안동에는 세계문화유산 외에도 국보가 다섯 개, 보물이 43개나 있어, 말 그대로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문화도시라는 명성에 손색이 없다.

 

KakaoTalk_20230927_104853831_09.jpg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사진=서고

 

'부용'(芙蓉)은 연꽃이다. 하회마을의 옛 이름은 부용촌(芙蓉村)이었다. 마을이 형성된 형상이 연꽃이 핀 모양을 연상케 했다. '북애'(北崖)라고도 불리던 마을 북쪽 강 건너 절벽이 '부용대'(芙蓉臺)가 된 것은 연꽃마을을 내려다보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낙동강이 휘돌아 감싸 안아 '하회(河回)마을'이라고 명명된 이 곳은 원래 부용대에서 바라보게 되면 연꽃이 활짝 피는 모양으로 보여서 오래 전부터 '부용마을'로 불렸다.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난 후 부용대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방금 둘러본 고택들을 한 눈에 넣어보는 것도 좋지만, 아예 하회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전경을 바라보는 것도 하회마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부용대에서는 내려오면서 서애 류성룡이 지은 옥연정사와 서애의 맏형 류운룡의 겸암정사도 봐야 한다. 예전에는 부용대에서 하회마을로 건너갈 수가 있었다. 나룻배를 탈 수도 있었고 앤드루 왕자가 방문하게 되자 섶다리까지 설치해 놓았으나 지금은 섶다리로는 통행할 수 없도록 했다.

 

하회마을은 2010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오랜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증거로 예술성이 담긴 축제나 행사가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히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인간과 문화유산이 잘 조화를 이루는 보편적인 사례라는 극찬도 받았다. 하회별신굿 놀이 등의 전통문화가 잘 보존돼있다는 점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회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하회마을 입구 하회장터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은 후 주차장에서 (무료셔틀버스를 타거나, 하회마을 만송정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1.2km 걸어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하회마을 안으로는 마을 주민 차량이나 공무 외에는 차량 출입이 금지돼있다. 그러나 하회마을을 천천히 걷더라도 1시간 정도면 대충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규모이기 때문에 오솔길을 통해 걸어서 들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오솔길로 들어서서 걷다 보면 낙동강이 보이고 멀리 부용대도 나타난다.


하회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락 걷다 보면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들의 새 순이 순간 순간 올라오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 터뜨리기 시작하는 벚꽃 군락과 충효당과 양진당 마당의 벚꽃과 목련까지 다 만날 수 있다. 고택에 핀 꽃을 만나는 일은 도심에서 만나는 봄꽃보다 더 반가울 수밖에 없다. 봄마다 철마다 피는 꽃이라도 수백년 역사를 담고 있는 유서 깊은 고택의 봄은 남다르다.


하회마을은 계절의 변화를 유감 없이 잘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은 마을이다. 봄이면 봄꽃, 여름이면 짙어진 녹음과 더불어 낙동강의 유량과 유속이 빨라지면서 '물돌이 마을'의 정취를 흠씬 느끼게 해주고, 가을에는 초가 지붕 위로 살포시 드러난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홍시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어준다. 하회마을의 겨울은 추울 듯 하지만 눈 내린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소호헌



조선은 왕의 나라인가? 신하의 나라인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개국부터 1910년 순종까지 조선은 27명의 왕이 이어받아 519년간 존속했다. 그 오백년의 시간은 왕의 시간이었을까, 대신의 시간이었을까, 혹은 백성의 시대였을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은 왕의 나라도, 신하의 나라도 아니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기반 아래 완비된 과거제도 등에 의해 선발된 엘리트들이 관리하는 통치 체제가 구축된 나라였다.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있었지만 고위관리인 내, 외직의 임명과 파직은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권한이었다. 이조는 오늘날의 총무처 그리고 인사혁신처의 역할을 다 갖고 있었다.


2021040222011605294_l.jpg

 

2021040222011523381_l.jpg

사진=서고


왕도 신하도 독단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절묘한 상호 권력 견제장치였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간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었고 조선시대는 당파싸움, 즉 당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파는 조선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의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서인과 동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그리고 '대북과 소북'으로 당파는 사안에 따라 분화돼나갔다.


당파싸움의 시작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한명회가 대표적인 훈구파의 거두라면 사림파는 훈구파에 의해 사화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조정에 진출한 선비들이었다.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화되고 대표적인 동인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었다. 즉 초야에 묻혀있던 선비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에 진출해서 사림파가 되었고 그들의 노선 차이가 다시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서게 한 것이다.


안동은 동인의 태두인 퇴계학파의 본산이었다.조선에서 주자학을 최초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가르친 이가 퇴계였다. 퇴계는 인간의 존재를 이() ()로 구분하고 '이기이원론'을 폈다. 여기에 고봉 기대승은 반론을 폈고 율곡은 고봉의 주장을 이어받았다. 그것이 '이기일원론'이었다. 조선의 당쟁은 이처럼 주자학을 해석하는 예송논쟁과 '이기'를 둘러싼 해석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퇴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하기 전의 사림이었지만 스스로 당쟁의 주역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인과 대립했고 그래서 조정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림파의 일원이었던 동인과 서인이 늘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나 계상(溪上)서당에 머물고 있던 퇴계를 만나기 위해 1558년 봄 안동에 찾아온 적도 있다. 58세의 퇴계와 약관 23세의 율곡의 세기적인 만남이었다.


퇴계의 수제자가 학봉 김성일(1538~1593)이듯, 안동은 그때부터 퇴계학파의 중심이었고 주자학의 본향이 되었다.


<강아지똥>의 동화작가 권정생 샘의 향기가 묻어나는 안동 일직에는 기념비적인 공간 하나가 있다. 대구에서 의성을 지나 안동 경계에 들어서게 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 일직이다. 일직면 소재지에 도달하기 전, 소호리 국도변에 오래된 고택 한 채가 고즈넉하게 있다. '소호헌'(蘇湖軒)이다.


안동에서 '소호헌'은 국가가 지정한 보물 이상의 각별한 의미를 갖는 공간이다. '소호헌'은 퇴계 문하가 아닌 율곡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장한 약봉 서성의 태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향에서 서인 계열의 소호헌이 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던 사화를 밥 먹듯이 벌이는 적대적인 당쟁과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약봉 서성의 부친인 서해가 퇴계의 제자였다면, 어쩔 수 없이 어린 나이에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 약봉이 율곡문하에서 공부함에 따라 서해, 서성 부자는 각각 퇴계와 율곡에게 사사받아 동인과 서인을 넘나들게 된 집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호헌은 조선전기 문신 서해(徐嶰 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을 지은 고성 이씨 집안의 이명(李洺)이 자신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가 결혼을 하게 되자 분가시키면서 지어준 집이었다. 그런데 대구 서 씨인 서해가 이고의 앞을 못보는 딸과 결혼하자, 선물로 이 소호헌을 내어준 것이다.


서해는 당대 안동 최고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대구 서씨 또한 서거정과 같은 가문으로 서해의 부친 서고(徐固)가 예조참의를 지내는 등 당당한 명문가였다.


안타깝게도 서해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서해의 아내는 소호헌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서성(徐渻 1558~1631)을 데리고 한양으로 가서 술과 약과를 만들어 팔면서 아들을 공부시켰다. 이 소호헌 왼쪽 건물이 바로 약봉(藥峯) 서성의 태실이다.


약봉은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한양으로 올라가 율곡문하에서 공부를 한 덕에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성의 네 아들도 모두 입직해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첫째는 우의정에 올랐고 둘째는 종친부전첨, 셋쌔는 현감, 넷째는 선조의 사위가 됐다. 셋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거느리고 안동 소호헌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소호리 태생 서성이 서울로 올라가서 집안을 크게 일으킨 셈이다.


지금의 소호헌은 대구 서씨 종중 소유로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소호헌에 도착한 때는 노을이 지기 직전이었다. 오백년이 더 지난 고택이었지만 관리가 잘 된 덕분인지 지금도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와서 낯선 손님을 맞이할 것 같았다. 소호헌 뒷뜰 목련은 봄 햇살을 받아 작열하듯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야흐로 봄의 절정이었다. 그 옆 작은 정원에 '소호헌 보물 제 47'라고 장난스럽게 장식을 해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호헌은 앞면 3, 옆면 2칸이 대청이다. 앞면 1, 옆면 2칸은 누마루가 놓여있다. 누마루에 붙은 대청은 ''자로 꺾였는데 앞면 2칸 옆면 1칸 크기의 온돌방이 붙어 'T'자 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소호헌의 지붕 모서리를 장식한 기와에는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민가나 여염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용 문양이다. 누마루의 숫막새에는 봉황문양이 있다. 용과 봉황을 새겨넣은 기와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사치를 부린 건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조선 후기에 일반 민가에서 용문양이 들어가 있는 기와를 사용해서 집을 지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아마도 역모의 죄를 범하였다며 삼대가 멸문지화를 당했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집을 지은 이고가 99칸짜리 임청각을 짓는 등 민간에서는 최고의 집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로 소호헌을 지으면서도 나름 최고의 집을 꾸민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당시로서도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용과 봉황 문양을 기와 문양으로 쓴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건축을 실제 담당한 대목수의 실수가 아니라면, 용 문양을 쓸 수 있는 큰 인물이 이 가문에서 나기를 기대하는 보다 큰 뜻이 담겨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추해볼 수 있지만 근거는 없다.

 

'소호헌'에서 국도를 따라 6.5km정도 안동으로 가다가 낙동강의 지류인 미천이 구비도는 암산유원지 바로 옆에는 고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서원은 퇴계학파의 대학자로 인정받으며 '소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이 강학한 서원이다. 퇴계학파의 고산서원과 율곡 이이에게 사사받은 약봉의 소호헌이 지척 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당쟁의 격화라기 보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가 이곳에서도 소박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끝)

 

20231002094935_yqgynviw.jpg

여행작가 서명수

 

입력 : 2023.10.0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김태완 ‘Stand Up Daddy’

kimchi@chosun.com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