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벚꽃 일러스트=조선일보DB
은월(銀月) 김혜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아득하고 멀도록》(인문학사)이 최근 출간되었다. 시집의 표제시 <아득하고 멀도록>을 먼저 찾아 읽었다.
‘그리움은 앞산에서 뒷산으로 숨는다’는 첫 행이 독자의 마음을 이끈다. 2연의 문장도 서사적 풍경이 담겨 있다. 3연에서 ‘메아리를 불러 그리움을 찾아 헤매다/ 두 다리를 뻗고 우는 나뭇가지를 본다’고 쓴다. 지금껏 나무와 관련한 은유와 상징의 시를 여러 편 읽었지만 ‘두 다리를 뻗고 우는 나뭇가지’만큼 강렬한 표현이 또 있었나 싶다. 4연에서 ‘계절마다 아득하고 먼’, ‘서성 서성 가슴 치는 그리움’, ‘앞산이 부르면 뒷산이 대답하는’, ‘잘 있다 말 가운데 멀리 달음질치는 매시간’을 거쳐 마지막 행 ‘어머니’에 다다르며 감동을 완성하고 있다.
그리움은 앞산에서 뒷산으로 숨는다
구름이 내 눈에서 뒷머리로 돌아
바람을 끼고 돌 때 와르르 쏟아지는
나뭇잎처럼 바닥을 치고
메아리를 불러 그리움을 찾아 헤매다
두 다리를 뻗고 우는 나뭇가지를 본다
그렇게 계절마다 아득하고 멀도록
그리움이 서성 서성 가슴을 치다가
앞산이 부르면 뒷산이 대답하는
잘 있다 말 가운데 멀리 달음질치는 매시간
어머니도 그러했고 나도 그랬다
-시 <아득하고 멀도록> 전문
시 <하늘공원>은 화장장에서 어머니와 이별하는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때는 벚꽃이 활짝 핀(하냥 벙그린) 봄이다. 화자는 화장장에서 어머니와 이별하는 장면을 ‘하늘공원 길목/ 돌아돌아 올라가는 길’이라 표현한다.
삭신을 내어준 어머니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지상에 활짝 핀 벚꽃은 ‘무너져 내려 버렸다’. 화장장 ‘하늘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내려오는 길’이라고 썼는데, 그 길에 ‘훈계가 가득하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평소 하신 말씀(잔소리)이 훈계일지, 세상을 떠나시며 건넨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가 훈계일지 알 수는 없다.
벚꽃 하냥 벙그리고
그리움은 점점 차오르고
목젖 안에 불러도 대답없는
단어 두 자만 쌓여 있다
하늘공원 길목
돌아돌아 올라가는 길
벚꽃이 한참 피는가 하더니
내려오는 길은
훈계가 가득하고
꽃가지마다
그대로 지상으로 무너져 내려 버렸다
꽃 지고 엄마도 떠나셨다
-시 <하늘 공원> 전문
*하늘공원: 울산 하늘공원 승화원 화장터
시 <구월>, 시 <노란 나무 부채>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조락의 계절이 찾아오는 9월이면 그리움도 더 커져가는 것일까. 2연에서 시인은 ‘구름 두둥 하늘 강/ 마음을 타고 내리는 9월’이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내 소리 없는 고독’의 원인은 어머니의 부재(不在)다.
시 <노란 나무 부채>는 요양원에 모셨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무릎이나 허리가 좋지 않아 인공 연골을 넣는 수술을 한 후 요양원에 입원을 하셨다. 그곳에서 노란 나무 부채를 만드는 공작 시간이 있었는데 부챗살에 책갈피에 넣어둔 은행잎을 붙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한켠에 놓인 부채를 보며 시인은 슬픔에 잠긴다. 얼마나 슬펐던지 3연의 마지막 2행이 단순한 과장(‘와르르’, ‘천 년만큼’)을 넘어 강렬한 진심의 표현으로 다가온다. 때로 과장의 수사만큼 날카롭고 사실적 표현도 없다.
발치에 선득선득
계절이 오는 소리에
귀가 내려오고
구름 두둥 하늘 강
마음을 타고 내리는 9월은
내 멀었던 간극의 거리
말갛게 열어 하늘 높이 치올리고
내 소리 없는 고독
잊었던 이들을 생각하며
구월엔 다시 듣는
뱃속부터 차오는
내 어머니의 진한 사랑
듣는다
-시 <구월> 전문
부챗살 가지에 삼각 조각
노란색 종이를 붙이고
손잡이 끝에 젤 큰 종이붙이며
언제 왔느냐 하는, 요양원 유리문으로
비치는 어머니의 공작 시간
수십 번의 계절 넘나들며 폈다 오므린
시간 때문에 두 다리에 30년 넘은
가짜연골 넣고 느림보 걸음 걸어온 세월
올봄 어머니 저세상 가시고
책갈피에 넣어둔 은행잎을 덕지덕지 붙이다 만
부챗살 가지 사이사이에서 와르르
은행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 년만큼 들렸다
-시 <노란 나무 부채> 전문
김혜숙 시인은 2013년 계간 ‘서울문학’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어쩌자고 꽃》(2017), 둘째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2021)가 있다. 시전문지 ‘시인마을’ 문학상(2017), 국제문학시인대상 문학상(2021)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