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살당한 일본 총리들. 왼쪽부터 이토, 하라, 다카하시, 하마구치, 이누카이, 사이토, 아베.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7월 8일 전직 해상자위대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1885년 근대적 내각제도가 도입된 이후 현 기시다 후미오 총리(제101대)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사람은 모두 64명이다. 사무라이의 나라여서 그럴까? 역대 일본 총리 가운데 재직 중 혹은 퇴임 후에 암살된 사람은 아베 전 총리를 포함해서 모두 7명에 이른다. 아베 전 총리(제90,100대)는 전후(戰後) 총리 가운데 처음으로 암살된 사람이다.
초대, 5대, 7대, 10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토 히로부미는 역대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자기가 직접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조슈(長州)의 존왕양이파 지사였던 그는 하나다 지로라는 국학자와 그의 문하생을 칼로 베어 죽였다.
제19대 총리를 지낸 하라 다카시는 메이지유신의 주역이던 조슈-사쓰마나 귀족 출신이 아니라 비주류 출신의 의회주의 정치인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921년 11월 4일 도쿄역에서 나카오카 곤이치의 칼에 찔려 죽었다.
제27대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총리가 됐다. 그는 해군군축조약을 승인하고, 만주사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군부와 우익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는 1930년 11월 도쿄역에서 극우청년 사고야 도메오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는 1년 후 사망했다.
제29대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는 1932년 5월 15일 총리 관저에서 극우 성향의 해군 청년장교에게 살해됐다. 그는 관저에 난입한 청년장교들에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네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달래려 했으나 청년장교들은 “문답 무용(問答 無用), 발사!”라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문답 무용”이라는 말은 이후 극우 질풍노도의 시대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이 시절 총리 암살범들은 ‘애국자’로 대접을 받았다. 재판에 회부되어도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극우파나 청년장교들은 도쿠가와막부 말기의 ‘유신(維新) 지사(志士)’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쇼와(昭和)유신’을 부르짖었다.
이런 식으로 축적된 왜곡된 혁명의 열기는 1936년 2‧26쿠데타로 폭발했다. 도쿄 인근에 주둔한 육군부대에 근무하던 위관급 장교들은 15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당시 총리인 오카다 게이스케를 비롯한 정부 요인들을 ‘천황 주위의 간신’으로 규정하고, 닥치는대로 살상했다. 1936년 2월 26일은 전-현직, 그리고 미래의 일본 총리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한 날이었다.
제20대 총리를 지낸 다카하시 고레히요와 제30대 총리 사이토 마코토는 쿠데타군에게 사살됐다. 다카하시 고레히요는 러일전쟁 당시 전비(戰費)조달과 1920년대 금융‧재정위기를 잘 처리한 경제통이었다.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러 차례 대장대신(재무장관)을 맡아 일본경제를 이끌었으나,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군비축소를 추진하다가 군부의 반발을 샀다.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제독 출신의 정치인으로 3‧1운동 후 조선 총독으로 부임, 소위 ‘문화정치’를 폈던 인물. 그는 총리에서 물러난 후 내대신(內大臣‧천황의 고문)으로 일하다가 ‘천황을 그르치는 간신’으로 낙인찍혀 살해됐다.
당시 총리였던 오카다 게이스케(제31대)도 쿠데타군의 습격을 받았으나, 가정부 방의 반침에 몸을 숨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쿠데타군은 그의 처남으로 비서 역할을 하던 마쓰오 덴조 해군 대좌를 오카다로 오인, 살해했다.
쿠데타군은 해군의 원로로 천황의 시종장이던 스즈키 간타로의 저택도 습격했다. 쿠데타군은 스즈키에게 총격을 가한 후, 그의 목을 베려 했으나 스즈키 부인의 애원에 그만두고 그곳을 떠났다. 총상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스즈키는 1945년 4월 제42대 총리에 취임, 일본의 항복을 이끌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전범(戰犯)으로 처형된 총리도 있다. 외교관 출신으로 제32대 총리를 지낸 히로타 고키와 육군대신 출신으로 제40대 총리를 지낸 도조 히데키가 그들이다. 도조 히데키는 미군이 전범으로 체포하러 왔을 때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부가 일으킨 전쟁 탓에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불평하던 국민들은 “육군 대장이 제대로 총도 못 쏘냐?”며 도조를 조롱했다.
제34,38,39대 총리를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는 패전 후 전범으로 구속된다는 소식을 듣고 1945년 12월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조선총독과 제41대 총리 등을 역임한 고이소 구니아키는 극동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1950년 옥사(獄死)했다.
앞에서 말한 스즈키 겐타로 외에도 죽음의 직전에서 목숨을 건진 후 나중에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다. 제44대 총리를 지낸 시데하라 기주로가 그 사람이다. 그는 주중공사로 있던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 겸 천장절(히로히토 천황의 생일) 행사에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 공격을 받고 한쪽 다리를 잃었다. 원래 외교관 출신으로 친(親)서방 온건노선을 걷던 그는 패전 직전에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어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 서명식에 참석했고, 그해 10월 총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