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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싸우다 망한 중국 왕조(王朝)들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본다 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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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휘종 시절 수도 변경(개봉)의 번영을 그린 장택단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원칙 없는 외교
 
그 사이에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200여 년간 북방의 강자였던 요가 쇠퇴하고 만주에서 여진족의 금이 등장한 것이다. 송은 이 기회를 타서 금과 손잡고 거란에 빼앗긴 북방 영토(연운 16주)를 탈환하려 들었다. 연운 16주의 회복은 건국 이래 송의 숙원이었다.
 
휘종은 그 숙원을 달성해서 국가적 자존심을 고양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다.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송과 금은 함께 요를 치고 송은 연운 16주 가운데 6개주를 돌려받기로 약속했다.
 
1120년 절강에서 ‘방랍의 난’이 일어났다. 마니교 신자 방랍이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해 일으킨 민란이었다. 방랍의 세력은 20만명에 달했다. 요를 치러 가려던 15만명 송군이 방랍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는 450여 일이 걸렸다. 희생자는 200만명에 달했다.
 
1122년 뒤늦게 북으로 출정한 송군은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요군에게 연전연패했다. 결국 연운 16주를 손에 넣은 것은 금의 군대였다. 그래도 송은 금에 당초 약속한 땅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금은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송은 금에 제공하기로 한 군량 20만 석의 제공을 거부하는가 하면 금의 판도 아래 있던 지방 세력의 귀순을 받아들이는 등 금을 자극했다. 여기에 더해 휘종과 환관 동관은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와 연합해 금을 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격분한 금은 1124년 송으로 쳐들어왔다. 금을 달래기 위해 휘종이 퇴위하고 아들 흠종(欽宗·재위 1125~1127년)이 즉위했다. 수도 개봉이 포위된 상황에서 송은 ‘성하의 맹(城下之盟)’이라고 불리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와중에 부정부패로 나라를 파멸로 이끈 채경과 환관 동관 등에 대한 탄핵 상소가 잇달았다. 채경의 아들 채유와 채조는 참수됐다. 채경은 멀리 해남도로 유배됐다가 장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강화조약을 맺고 금군이 철수하자 송 조정에서는 다시 강경론이 대두했다. 1126년 가을 금군이 다시 침공했다. 그해 12월 개봉이 함락됐다. 이후 2년 동안 개봉에 축적되어 있던 재부(財富)의 90% 이상이 금군에게 약탈당했다. 휘종이 막대한 돈을 들여 수집했던 서화와 골동품들도 이때 사라졌다.
 
1127년 봄 금군은 휘종과 흠종을 비롯한 황족, 귀족, 고관들을 만주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강(靖康)의 변(變)’이라고 한다. 금나라는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라는 치욕적인 봉호(封號)를 내렸다. 휘종은 1135년 황량한 북만주 오국성(하얼빈 인근)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불에 반쯤 태워진 후 구덩이에 던져졌다.
 

‘야윈 늑대’와 ‘살찐 양’
 
금에 멸망당할 당시 송(북송)은 전에 없는 경제·문화적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미 이때 근대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화폐경제도 고도로 발전해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북송은 번영의 절정에서 망국을 맞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송은 ‘굶주린 야윈 늑대’에게 잡아먹힌 ‘살찐 양’이나 다름없었다.
 
비극은 송이 자초한 것이었다. 송은 오랫동안 국방을 국내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서 국방력 강화 노력을 게을리했다. 군대를 ‘국가의 간성’이 아니라 ‘잠재적 쿠데타 세력’으로 보고 군의 힘을 빼는 일에만 주력했다. 휘종은 ‘국가적 자존심의 회복’이라는 허상을 좇아 오랫동안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 온 요와의 관계를 파기하고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적인 금과 동맹을 체결했다.
 
그 과정에서 송은 자신의 실력을 넘어서는 요구를 했다. 금과의 약속을 여러 차례 어겼다. 나중에 가서는 자기들이 배반했던 요와 다시 동맹을 맺어 금을 치려고 시도했다. 북한이 ICBM을 발사하는 마당에 ‘남북관계의 주도적 역할’ 운운하면서 북한에 연일 대화를 요청하고 중국에는 추파를 던지면서 전통적 우방인 미국·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으려는 문재인 정부의 모습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구법당과 신법당의 오랜 당쟁도 ‘정강의 변’의 한 원인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상대방을 ‘적폐 세력’으로 몰아서 말살하려 드는 극한 당쟁의 와중에 능력과 품성을 갖춘 이들은 관직을 떠났다. 애국심도 비전도 없는 기회주의적 관료들이 득세했다. 그들에게 국가 백년을 바라보는 전략과 정책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악비와 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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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회복을 위해 분투하다 억울하게 죽은 악비.
개봉이 함락될 무렵 강남으로 탈출한 휘종의 9번째 아들 조구가 임안(항주)에서 남송(南宋)을 세웠다. 이와 함께 곳곳에서 금에 항거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악비(岳飛)였다. ‘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불린 악비의 군대는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
 
악비는 평소 “오랑캐를 모두 도살하고 두 황제(휘종과 흠종)를 도성에 맞아들여 본래의 국토를 되찾아 조정에 불안이 없어 황제께서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는 남송을 세운 고종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금으로 잡혀간 휘종과 흠종이 돌아오면 제위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틈을 파고든 사람이 진회(秦檜)였다. 진회는 금이 괴뢰국가 초(楚)를 세우고 송의 재상 장방창을 황제로 앉혔을 때 이에 반대하다가 금으로 끌려갔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3년 만에 항주에 있는 고종의 조정에 나타난 진회는 주화파(主和派)로 변해 있었다. 진회는 감시병을 살해한 후 배를 훔쳐 타고 극적으로 탈출해 왔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적었다. 진회가 금의 세작(細作)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고종은 진회를 재상으로 중용했다.
 
1140년 5월 우쥬가 이끄는 금군이 남송을 침공했다. 악비는 하남 언성에서 우쥬의 군대를 격파하고 옛 수도인 개봉에서 25km 떨어진 주선진까지 진격했다. 이때 진회는 물밑에서 금과 강화조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었다. 진회는 고종을 움직여 악비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악비는 “이런 기회는 다시 없다”면서 계속 싸우려 했다. 고종은 하루에 12번이나 소환령을 내려 악비를 닦달했다. 악비는 결국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좌절한 악비는 관직을 내놓고 은거했다. 하지만 진회는 모반죄를 덮어씌워 악비를 체포했다. 악비와 함께 당대의 명장(名將)으로 이름을 떨치던 한세충이 진회를 만나 악비가 모반을 했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따졌다. 진회는 이렇게 답했다.
 
“없지는 않은 것 같다(莫須有).”
 
한세충은 “그런 말로 어찌 천하의 인심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다. ‘막수유’라는 말은 이후 중국에서는 ‘모함’과 ‘억울한 사건’을 뜻하는 대명사가 됐다. 결국 악비는 아들과 감옥에서 비밀리에 처형됐다. 민간에는 악비 부자가 살껍질을 벗기는 혹형을 받고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141년이었다. 이듬해 남송과 금 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진회는 채경과 마찬가지로 오랜 당쟁이 낳은 기회주의·출세주의적 관료의 전형이었다. 그런 사람을 많이 본다. 대한민국 체제 아래서 관료나 군인으로 성장했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좌파 정권을 위해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는 사람, 젊은 시절 보수 정권 아래서 일할 때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행세를 하다가 지연(地緣) 때문인지 한번 좌파 정권에 중용된 후에는 좌파 진영의 원로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계속)

입력 : 201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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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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