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이 4월 1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언론의 부고 기사를 보면 대개 <동아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실장, <문화일보> 사장을 역임한 고인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1987년 박종철 사건을 용기 있게 연속 보도했던 것을 이 분의 큰 업적으로 꼽았다.
하지만 기자는 그보다는 고인이 언론계를 떠나 세종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이룩한 학술적 업적들로 고인을 기억한다. 고인은 2005년 <한국보수세력연구>을 펴냈다. 이 책에서 고인은 구한말 발간된 <한성순보>에서부터 구 소련 기밀문서, 뉴라이트 관련 논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종횡으로 섭렵하면서 우리나라 보수주의의 뿌리를 구한말 개화파에서 찾았다.2009년에는 <한국진보세력연구> 를 펴냈다. 광복 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부터 시작해 크고 작은 좌파 정당, 1980년대 이후의 급진좌파단체, 2000여 명에 달하는 좌파인사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 책은 ‘진보세력을 통해 본 한국현대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고인은 시대의 추이에 따라 이 두 책을 고쳐서 다시 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11년에는 <한국보수세력연구> 증보판을 ,2020년에는 3판을 냈다. <한국진보세력연구>도 2018년 개정증보판을 냈다.
고인의 또다른 학문적 업적은 6.25 당시 한미관계와 한미동맹의 탄생, 그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을 조명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2015년 나온 <6.25전쟁과 미국-트루먼 애치슨 맥아더의 역할>과 2020년 나온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다.
이 책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대한민국도, 한미동맹도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고심참담해 가며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저술들은 은퇴한 언론인의 단순한 학문적 도락이 아니라 좌파의 공세 속에서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을 걱정하는 애국심의 산물이었음도 느끼게 된다. 고인은 이러한 탐구를 통해 보수와 진보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세워보고자 했을 것이다.
고인의 저술들은 딱딱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참 읽기 쉽다. 저널리스트의 글이 대개 읽기쉬운데, 특히 고인은 "요즘 역사왜곡이 심해 젊은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읽혔으면 하는 생각에서 될 수 있으면 쉽게 쓰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고인의 책을 펴냈던 신동설 도서출판 청미디어 대표는 "남 교수님은 '<한국보수세력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를 쓰면서는 책에 거론되는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아야 한다면서, 이름의 한자 표기를 꼼꼼하게 신경 썼다'"고도 말했다.
언론계 원로로서 고인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 언론노조 등이 득세하면서 언론이 정치에 종속되고,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현실을 무척 안타까워 했다. 2009년 <월간조선> 9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고인은 “선동은 있어도 사실에 기초한 진정한 보도는 없다"면서 "정확한 보도, 균형 잡힌 보도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한국 언론의 미래는 없다”고 경고했다. 고인은 평소 언론인들이 직업적 정체성을 잃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현실도 못마땅해 했다. 신동설 대표는 "남 교수님은 '내가 박사 학위를 따더라도 책에 적는 이력에 그런 건 넣지 마라. 나는 언론인,교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고 말했다.
기자는 <한국보수세력연구>이 나온 후인 2006년 고인을 인터뷰한 이래 고인을 수 차례 인터뷰했고, 고인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열심히 소개했다. 고인도 까마득한 후배인 기자를 생각이 같은 언론인으로 대접하며 아껴 주셨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조각처럼 강건한 느낌을 주는 분이었고, 생각과 말씀도 단호했지만, 마음은 따뜻한, 진정한 '어른'이셨다. 무엇보다도 애국자셨다. 요즘 기준으로는 몇 년 더 사실 것 같았는데, 이상한 시절이 오는 걸 보기 싫어 그렇게 황망히 떠나셨나 싶어 안타깝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