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12월호 마감을 앞두고 기파랑 출판사에서 신간안내를 해 달라고 회사로 책이 하나 왔다. 지난 총선 때 광주(光州)동남을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박은식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의 《당신을 설득하고 싶습니다》였다. ‘지난 총선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낙선한 소회(所懷)를 담은 책이려니...’ 싶었다. ‘광주 출신 청년 의사의 좌파 탈출기’라는 부제(副題)가 있었지만 《당신을 설득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에 가려져 버렸다. 《월간조선》 12월호에는 「총선 ‘낙선기’ 책 펴낸 청년의사 박은식씨」라는 제목으로 ‘사람들’이라는 화보 코너에 소개했다.
그런데 책을 읽어보니 ‘낙선기’라고 소개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오히려 훌륭한 ‘사회/역사 교과서’였다. 299페이지의 책 가운데 총선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부분은 채 20페이지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나 ‘김대중’과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5.18의 한(恨)을 확대재생산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나 좌파 이념을 갖게 되었던 청년이 의사가 되고 군 복무를 하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고, 그 결과 그 누구보다도 건실한 ‘청년보수’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자는 기생충학 시간에 노(老)교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면서 기생충도 몰아낸 박정희 대통령 얘기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박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의사 수련 과정을 차례로 밟고 의료 일선에서 위급한 순간들을 넘겨가면서 ‘축적(蓄積)’의 중요함을 알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깨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북한의 핵실험을 보고, 최전방 3사단 백골부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북한이 우리의 주적(主敵)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난정(亂政)과 ‘내로남불’을 겪으면서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허상을 목도하고, 자유시장경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좌파의 경제정책이나 퍼주기식 복지의 문제점을 확인해 나간다. 역사를 공부하면서는 호남이 원래는 좌파의 온상이 아니라 김성수‧송진우 등을 통해 근대화와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보수우파의 요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고향 광주를 낙후된 상태로 놔두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볼모로 붙잡아 두려는 민주당 및 586정치세력에 분노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좌파 사회운동가들의 말이 향기로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악취 나는 배설물 같습니다. 스스로 지키지도 못할 말들을 내뱉으면서도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꼴이 꼭 길거리에 똥오줌 싸 놓고 자기만 시원하다고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니까요.”
‘호남대안연대’에 참여해 정율성 기념공원 반대 등 ‘호지스탕스’활동을 벌이던 저자는 결국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광주에서 출마한다. 비례대표나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지역구 공천 제안이 있었지만 마다했다. 총선을 앞둔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변 분들에게 ‘어차피 떨어질 곳인데 왜 나가냐’하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광주는요, 험지(險地)가 아닙니다. 사지(死地)도 아닙니다. 제 고향입니다.....이 나라의 미래가 달린 엄청난 전투에서 제가 있어야 할 전장(戰場)은 바로 광주입니다.”
저자는 또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수우파의 이념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정치인이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앞장서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우리나라 보수우파 정치인 중에서도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은 버릴 줄 아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아이고 키 크고 젊고 빠지는 게 없는디 왜 2번으로 나온당가?”하는 말은 양반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저는 어차피 당선 안 돼요. 그런데요, 제가 여기서 20프로는 받아야 윤석열에게 예산 달라고 할 면이 서요”라는 호소도 외면당했다. 그 결과는 8.6% 득표. 선거비용을 보전(補塡)받을 수도 없는 참패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로 돌아왔다.
이러한 다양한 체험을 바탕으로 저자는 좌파의 왜곡된 역사관이나 경제관 등을 명쾌하게 논파(論破)해 나간다. 앞에서 이 책을 ‘훌륭한 사회/역사 교과서’라고 한 것도 그래서이다. 근래 좌파의 논리를 공박하는 대안교과서 형태의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 서술방식 등이 딱딱한 것이 아쉬웠던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주장을 펼쳐나가기 때문인지 술술 읽힌다. 역시 ‘체험’만한 교과서는 없다!
저자는 보수우파를 향해 쓴소리도 한다.
“그들(좌파)은 옳건 그르건 소명 의식을 가지고 반독재, 통일, 인권, 민주화, 환경운동을 수행했습니다. 때론 목숨도 걸었어요. 그렇게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반공과 경제성장, 지역 구도’면 모두 우파가 이겼던 시대를 뒤엎은 것이죠.우파들도 이제 진지전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대중에게 다가가려 노력 중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되는 알고리즘의 한계가 있는 플랫폼에만 콘텐츠를 올리거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광장에 홀로 서서 그저 자기 생각만 내지르며 소음을 양산해, 도리어 우파에 대한 혐오감만 양산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참 절절한 ‘광주 출신 청년 의사의 좌파 탈출기’인 이 책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참 좋은 ‘사회/역사 교과서’이기도 하다. 자유시장경제, 소주성(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복지, 보수와 진보, 남북관계, 통일, 한미동맹, 반일 선동, 친일파 및 과거사 청산, 식민지 근대화론, 해방 전후사에 대한 인식, 건국,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등에 대한 인식, 북핵문제, 새만금 잼버리 대회로 대표되는 ‘빨대 꽂기’ 등 안 다루는 문제가 없다.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도 다룬다. 참 답답한 시절이지만, 이 책을 보면서 ‘보수우파’의 새로운 희망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