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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권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이낙연 전 대표의 지지율이 매우 잘 나올 당시 이 전 대표의 대선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백제 쪽이 주체가 돼서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이긴다면 역사라고 생각했다”는 발언에 대해 ‘호남 비하’ 논란이 제기됐다.
호남 출신은 대권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재명 지사의 발언은 ‘전남 영광’ 출신인 이낙연 전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전 대표 측 배재정 대변인은 24일, 논평을 내고 “호남 필패론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 전 대표도 같은 날 페이스북 글을 통해 “국가의 시곗바늘은 숨 가쁘게 앞으로 가는데,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분의 시곗바늘은 한참 뒤로 돌아갔다”며 “민주당의 후보께서 한반도 5천년 역사를 거론하며, 호남 출신 후보의 확장성을 문제 삼았다. ’영남 역차별’ 발언을 잇는 중대한 실언”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재명 지사 측은 “이낙연 후보를 극찬하며 지역주의 초월의 새 시대가 열리길 기대했는데, 떡 주고 뺨 맞은 격”이라며 "상대 후보를 칭찬하자 돌아온 것은 허위사실 공격과 왜곡 프레임”이라고 주장했다. 이 지사의 ‘의도’를 떠나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백제 쪽이 주체가 돼서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는 발언은 그 파장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여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호남’은 이 나라의 ‘개혁 진보 세력’의 요람이라고 자처한다. 걸핏하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에 실제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들 지역의 주체성, 정통성, 개혁성, 중요성 등을 주장한다.
참고로, ‘약무호남 시무국가’는 조선조 이순신 장군의 유고집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등장하는 글귀다. 이는 “곡창지대인 호남을 왜군에게 잃는다면, 전쟁에서 패배해 나라를 잃게 된다”는 취지의 표현이다.
바꿔 말하면, 호남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 글귀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호남 출신 정치인, 해당 지역 주민들은 이를 마치 “이순신 장군이 말하기를 호남이 우리나라의 근간이라고 했다”는 식으로 왜곡해 애향심을 고취하고 있다.
그런 만큼 호남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여타 지역과 달리 이 나라를 지키는 데 가장 큰 활약을 했고, 이 나라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가장 많은 희생을 했다는 ‘의식’이 강하다. 그 과정에서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가장 심한 핍박과 탄압, 차별을 당했다고 여긴다. 이런 지역을 향해 이재명 지사는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백제 쪽이 주체가 돼서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발언한 것이다.
이재명 지사는 “달을 가리켰더니 손가락을 보고 뭐라고 한다”며 “말꼬리 잡지 마라”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겠지만, 그 맥락과 무관하게 해당 발언은 지역 자존심을 건드리는 후폭풍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뒤집어 얘기하면, “호남은 지금껏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역사의 주체가 된 일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일제 식민사관 논리 중 하나인 ‘타율성론’을 연상케 한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의 역사가 주체적인 역량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에 의해 좌우됐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 역사는 중국에서 유래한 기자조선 또는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의 북부,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남부를 차지한 이후 비로소 역사 시대가 시작됐다는 식의 궤변이다.
또한 이재명 지사의 발언은 역사적 상식과 배치되는 부분이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주120 시간 노동’ 발언에 대한 이 지사의 반박 논리를 그대로 차용해 분석하고자 한다. 윤 전 총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주 52시간제를 ‘실패한 정책'’이라고 비판하며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기업환경에 맞게 자율적으로 노동 시간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이었지만, 곧이곧대로 수용되지 않고 ‘윤석열 때리기’ 소재로 이용됐다. 이와 관련, 이재명 지사는 “윤 전 총장처럼 일주일에 120시간 일하면 사람이 죽는다” “사람이 견딜 수 있겠나” “예를 들다가 과하게 표현한 것 같은데 그런 생각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이재명 지사의 논리대로 그의 ‘백제 발언’을 살피면, 여러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사는 ““한반도 5000년 역사”라고 표현했지만, 한반도의 역사는 그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얘기하는 ‘5000년 역사’의 기원은 만주와 중국 하북성 일대에서 시작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서 비롯한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4354년 전의 일이다. 즉, 장소를 한반도로 특정한 이 지사의 표현은 잘못됐다. 뒤이어 이 지사는 ‘백제’를 언급했는데, 그렇다면 ‘5000년 역사’가 아니라 ‘2000년 역사’라고 표현해야 했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백제의 건국 시기는 ‘기원전 17년’이다. 따라서 ‘백제’ 운운하기 위해서는 ‘5000년’이 아니라 ‘2000년’을 언급했어야 했다.
이재명 지사가 ‘호남’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백제’를 얘기한 것에도 오류가 있다. 백제는 비류, 온조 등으로 상징되는 부여 또는 고구려 출신 북방계인 왕족 ‘부여씨’와 토착 세력인 진씨, 해씨, 국씨, 목씨, 사씨, 연씨, 백씨, 협씨 등 소위 ‘대성팔족(大姓八族)’이 다스리던 나라였다. 당시 이들의 근거지는 첫 도읍지인 한성이었다. 사씨와 연씨는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성장한 세력이다. 백제 시대 당시 지금의 호남 지역 세력이 백제 중앙에 진출해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한 일은 없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호남을 얘기하면서 구태여 ‘백제’를 언급한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비유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글=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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