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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일가 우상화에 ‘동조’한 박승춘 보훈처

김일성 친척·좌익 인사에겐 ‘건국훈장’… 독립운동한 임정 고문·고승은 서훈 불가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thegood@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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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춘 보훈처장, “김일성 부모 서훈 검토해 보겠다”
⊙ 북한, 김일성 숙부 김형권 동상 ‘혁명열사릉’ 등 곳곳에 설치·우상화
⊙ 김일성, 외숙 강진석이 항일무장단체 백산무사단 만들었다고 날조
⊙ 보훈처, ‘상훈법’ 개정해 서훈 취소하겠다지만… 야당 동의 여부는 미지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좌)은 2012년 김일성(우)의 외숙 강진석을 ‘독립유공자’로 추천했고, 강진석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의 엉터리 서훈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 2010년과 2012년에 각각 북한 김일성의 숙부 김형권, 외숙 강진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김형권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둘째 동생, 강진석은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큰오빠다.
 
  보훈처는 두 사람이 김일성의 친·외삼촌인 줄 모르고 훈장을 줬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리고 각종 기록에서 김형권과 강진석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 등 조직적으로 두 사람의 수훈 사실을 은폐해 국민을 속이려 했다.
 
  6월 28일, 국회 정무위원회 보훈처 업무보고 자리에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김일성 삼촌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한데 대해 지적하자, 박승춘 보훈처장은 “연좌제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김형권과 강진석은 독립운동을 했고, 1945년 해방 이전에 사망했으니 북한 정권과 무관하다는 취지였다. 박 처장은 한 발 더 나아가 김일성 부모인 김형직과 강반석에 대한 서훈도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죽인 반국가단체의 수괴 가족들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주는 건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행위다. 북한이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그의 일가를 ‘백두혈통’이라 부르며 우상화하는 데 협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예비역 육군 중장인 박승춘 보훈처장이 이를 알지 못했다면 무능함을 드러낸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이적(利敵)’ 행위를 한 것과 같다.
 
  우리 정부가 좌익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을 준 건 김영삼 정부 당시인 1995년부터다. ‘사회통합’이 명분이었다. 좌익 인사들에 대한 서훈이 활발해진 건 노무현 정부 들어서다. 2004년 8월 25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좌우 대립의 비극적인 역사 때문에 독립운동사 한쪽은 일부러 알면서도 묻어 두는 측면이 있다”면서 좌익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서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서훈 기준은 ‘좌익활동을 했지만, 월북하거나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였다.
 
 
  김일성 숙부와 외숙의 공적 사항 은폐한 보훈처
 
  당시 노무현 정부는 ▲여운형(대통령장) ▲김철수(독립장) ▲윤자영(독립장) ▲장지락(애국장) ▲주세죽(애족장) 등을 비롯한 다수의 좌익 인사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한 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 건국에 공이 있다고 훈장을 준 것이다. 이들에 대한 서훈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아직 우리 사회 내부에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는지, 정말 공산혁명을 꿈꿨는지 판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형권과 강진석이 무슨 공적으로 건국훈장 중 4등급에 해당하는 애국장을 받았을까.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있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검색했다. 김형권의 경우 1990년 애족장을 받은 경남 사천 출신의 독립유공자 ‘김형권’ 선생의 공적만 조회됐다. ‘강진석’을 조회할 때는 ‘등록된 공훈록이 없습니다’란 문구가 떴다. 박승춘 보훈처장이 두 사람의 수훈에 대해 “연좌제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변한 것과 달리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선 이들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국회도서관에서 보훈처가 매해 펴내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찾았다. 이미 발간한 책이라서 보훈처가 수정·삭제하지 못한 김형권, 강진석의 공적 사실을 확인했다.
 
 
  김형권과 강진석이 독립운동을 한 건 사실
 
김일성의 숙부 김형권은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애국장’을 받아 독립유공자가 됐다.
  김형건(金亨鍵)
  이명: 김형권(金亨權)
  생몰년: 1905. 10. 4~1934. 5. 5
  출신: 평남 대동
  운동 계열: 만주 방면
  훈격: 애국장(2010)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출신이며, 독립운동 당시에는 안도현 가대서리에 거주했다. 1930년 8월 장백현에서 최병일의 권유로 국민부에 가담했으며, 국민부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했다. 이후 최효일 등 2명과 함께 각각 권총 1정과 탄환 200여 발 및 약간의 여비를 소지하고,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했다. 동월 12일 풍산군의 중리주재소를 습격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도 순사부장을 처단했고, 다른 순사에게 총상을 입혔다. 이로 인해 김형건은 동년 9월 체포됐으며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등의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4년 5월 5일 옥중 순국했다.
 
강진석은 백산무사단의 일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 모금을 하던 중 일경에게 발각돼 8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강진석(康晋錫)
  이명: 김재룡(金在龍), 한성룡(韓成龍)
  생몰년: 1890년 12월 29일~미상
  출신: 평남 대동
  운동 계열: 만주 방면
  훈격: 애국장(2012)
 
  평남 평양의 청년회와 백산무사단 제2부 외무원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중략) 1920년 음력 7월 고향인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이춘성과 함께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에서 박봉욱과 홍치룡으로부터 각각 군자금 150원과 50원을 모집했다. 군자금 모집 후 9월 27일 중국 임강현 모아산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백산무사단 서기로 활동하던 이준삼을 만나 백산무사단에 가입했다. (중략) 1920년 12월 20일 무사단 제2부 외무원으로 임명된 그는 이듬해 2월 27일 이준삼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략) 4월 2일 신훤과 함께 평북 자성군 여연면의 양기조로부터 군자금 100원을 모집한 뒤 평양으로 이동했다. 4월 14일 평양 도착 후 일행 7명과 염점리 여인숙에 투숙했으나 이들의 정보를 입수한 평안남도경찰부와 평양경찰서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1921년 8월 9일 평양지방법원으로부터 소위 강도·공갈·가택 침입·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3년을 받고 평양형무소와 경성형무소에서 7년 11월 17일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28년 3월 28일 경성형무소에서 가출옥으로 출소했다.
 
 
  북한, 1990년에 함남 풍산군을 ‘김형권군’으로 개칭
 
북한은 김형권 일행이 일본 순사부장을 쏜 풍산군 파발리에 소위 ‘파발 혁명전적지’를 조성하고 김형권의 동상과 혁명사적비를 세웠다.
  1990년대에 북한에서 나온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김형권과 강진석의 활동상이 등장한다. 김일성은 이 책에서 김형권이 ‘조선혁명군’의 일원으로 자신의 지시를 받아 항일투쟁을 했다고 주장했다. ‘조선혁명군’은 1912년생인 김일성이 18살인 1930년 남만주의 이통현(伊通縣) 고유수(孤楡樹)에서 조직했다고 내세우는 ‘항일 유격대’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혁명군’은 만주의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민족주의 계열의 세 항일 조직이 통합해 1929년 발족한 국민부 산하의 군사 조직이다. 조선혁명군 중대장이었던 이종락이 1930년 8월 공산혁명을 주창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나가 ‘조선혁명군 길강 지휘부’로 개칭했는데, 김일성은 당시 이 부대의 대원일 뿐이었다. 다음은 김일성이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형권에 대해 기술한 대목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조선 혁명군은 공산주의 이념에 의해서 지도되며 군중정치 사업도 하고, 군사활동도 하는 정치 및 반군사 조직이었다. 우리는 형권 삼촌을 조장으로 하고 최요일과 박차석 등을 망라한 또 한패의 공작소조를 국내에 내보내기로 했다. 내가 국내에 들어간 형권 삼촌네 무장소조의 활동 소식을 제일 처음으로 접한 것은 신문지상을 통해서였다. 신문을 보니 풍산땅에 4명의 무장단이 나타나 순사부장을 쏴 제낀 후 북청에서 넘어오는 자동차를 뺏어 타고 후치령으로 사라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형권 삼촌은 법정에서 일제의 죄상을 추상같이 단죄하면서 무장한 강도들과는 무장으로 싸워야 한다고 소리 높이 외쳤다. 삼촌이 이처럼 법정에서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혁명에 대한 신념과 충실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김형권은 북한에서 우상화 대상이다. 북한은 김형권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삼촌이시며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라고 추켜세운다. 다음은 북한의 대외 교육·홍보 사이트 ‘김일성방송대학’이 선전하는 김형권에 대한 설명이다.
 
  〈김형권 동지께서는 김형직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위대한 수령님의 지도밑에 혁명투쟁을 더욱 줄기차게 벌려나가시였다. (중략)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국내에 들어가 비밀근거지를 설치하고 정치사업과 무장활동을 통하여 반일대중을 묶어세울 데 대한 임무를 받으신 김형권 동지께서는 (중략) 탄알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원쑤놈들을 쓸어 눕히며 용감하게 싸우시다가 불행하게도 놈들에게 체포되시였다. (중략) 김형권 동지께서는 어느날 동지들이 구하여 준 《동아일보》를 통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눈부신 활동에 관한 소식을 알게 된 다음부터 새로운 신심과 용기에 넘쳐 더욱 힘있게 옥중투쟁을 벌려나가시였다.〉
 
  북한은 1973년 김형권을 칭송하는 《견결한 공산주의자 김형권 선생》이란 책을 펴냈다. 1990년에는 함경남도 풍산군과 풍산읍을 각각 ‘김형권군’ ‘김형권읍’으로 개칭했다.
 
  북한은 김형권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평양 대성산의 이른바 ‘혁명열사릉’에 그의 반신상을 설치했다. 김형권 일행이 일본 순사부장을 쏜 풍산군 파발리에 소위 ‘파발 혁명전적지’를 조성했다. 여기에 김형권의 동상과 혁명사적비를 설치하고, 파발중학교를 ‘김형권중학교’로 부르게 했다. 함남 홍원군 홍원읍에도 그의 동상과 ‘김형권 동지 혁명사적탑’을 세웠다. 이 밖에 함남 이원군 문앙리와 대덕리, 덕성군 직동리, 홍원군 학송리에도 혁명사적관 또는 혁명사적비를 조성했다.
 
  1997년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소재 신포사범대학의 이름을 ‘김형권사범대학’으로 바꾸고, 김형권의 활동상을 담은 선전 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제작했다.
 
 
 
“강진석 선생은 열렬한 반일혁명투사”

 
김형권과 강진석이 투옥됐던 서대문형무소다.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의 외삼촌 강진석이 백산무사단을 만들었다는 허위 사실을 기술했다. 강진석의 수형 기간을 약 14년이라고 적은 것도 보훈처 공적 사실과 다르다.
 
  〈강진석 외삼촌이 임강에 들어와 백산무사단을 조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외삼촌은 그 후 국내에 나가 무장소조 활동을 벌이기 위해 임강을 떠났다. 외삼촌은 임강을 떠난 후 무장소조원들을 데리고 자성, 개천, 평양 일대에서 맹렬한 활동을 벌이다가 1921년 4월 평양에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15년 장기형을 받고 13년 8개월 동안이나 옥중 생활을 했는데, 보석으로 집에 나왔다가 1942년에 세상을 떠났다. 혁명은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화를 잘하고 영향만 잘 주면 누구든지 세계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혁명투쟁에서 놀라운 위훈을 발휘할 수 있다.〉
 
  북한은 김형권과 마찬가지로 강진석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외삼촌이시며 열렬한 반일혁명투사’라고 선전한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님과 련계를 가지시고 그이의 혁명활동을 적극 도우시였다. (중략) 강진석 선생님께서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여러 차례 국내에 나오시여 벌리신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수많은 선진적인 청년들이 압록강을 건너 김형직 선생님의 주위에 집결하게 되였다. 강진석 선생님께서는 주체 10(1921)년 4월 국내공작 임무를 수행하시다가 평양 대동려관에서 일제경찰 놈들에게 체포되시였다. (중략) 13년 8개월 동안의 감옥생활 끝에 가출옥하신 선생님께서는 원쑤들의 악착한 고문에 의하여 생긴 병환으로 하여 조국해방의 그날을 보시지 못한 채 52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시였다. 강진석 선생님께서는 서거하시였으나 선생님의 고결한 애국정신과 불굴의 투쟁정신은 조국청사에 영원히 살아있다.〉 —‘김일성방송대학’의 인물 설명 중
 
  김형권과 강진석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타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들은 김일성 가계의 일원이다. 북한은 김일성 우상화에 이들을 활용하고 있다. 두 사람이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교시를 받아 활동하다가 김형직 사망 후에는 김일성의 영도하에 조국 해방과 혁명을 위해 싸웠다고 선전한다. 김형권과 강진석은 현재 북한 정권을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는 셈이다.
 
  이를 외면한 채 보훈처가 기계적으로 같은 심사기준을 적용해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건 북한 독재정권을 합리화시켜 준 것과 같다.
 
 
  일제 작위 반납 안 했다며 임정 고문 서훈 안 해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좌)과 어머니 강반석이다.
  보훈처는 국가 정체성과 맞지 않는 좌익 인사들과 김일성 친인척에게 ‘건국훈장’을 줬지만, 아직 국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독립지사들이 부지기수다. 뚜렷한 공적이 있는데도 그렇다.
 
  동농 김가진은 1905년 을사늑약에 격렬히 반대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대한제국의 종1품 이상 신료에게 수여한 작위(남작)를 받았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대동단의 총재 및 고문으로 활동했다. 대동단은 귀족, 관료, 의병, 승려 등 각계각층 수만 명이 모인 국내 비밀결사로 《대동신문》을 발간하고,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을 중국으로 망명시키려 했다.
 
  상하이 망명 이후 김가진은 전면적인 독립전쟁을 주창했다.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의 명의로 포고문을 배포했다. 국내 대동단 조직이 일제에 의해 해체당한 뒤에는 임시정부와 항일무장단체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하다 1922년 7월 별세했다.
 
  그의 장례식엔 이동녕 등 임정 요인을 비롯한 상하이 교민 250여 명이 참석했다. 장지에도 백수십 명이 따라나섰다. 하관에 앞선 추도식에선 임정 주석 홍진이 개식사를 하고, 조완구가 김가진의 생애를 설명했다. 이발과 안창호가 추도사를 했다. 사실상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치른 장례였다.
 
  김가진의 항일정신을 이어받은 장남 의한은 임정에 몸담았다. 사남 용한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다가 후유증으로 숨졌다. 손자 석동은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3대에 걸쳐 항일투쟁을 한 셈이다.
 
  김가진 사후 104년이 지난 현재 그의 시신은 상하이에 있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연구실장은 “김가진의 후손들이 두 차례에 걸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보훈처는 매번 ‘보류’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처음에 신청했을 때는 일제로부터 받은 작위를 반납하지 않았다며 ‘보류’ 결정을 내렸어요. 두 번째 신청은 2년 전에 했는데요. 그때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을 때 문상 간 걸 이유로 다시 보류했어요. 당시는 대한제국 법부대신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간 건데도요. 동농 선생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긴 했지만, 70이 넘은 고령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어요. 보훈처가 동농 선생에 대한 서훈을 계속 보류하는 건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인정한 독립운동가를 부정하는 것과 같아요.”
 
 
 
총독 꾸짖고 비폭력 항일투쟁 전개한 고승(高僧)도 탈락

 
  만공 선사는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와 병합하려는 일제에 맞서 비폭력 항일투쟁을 이끌던 승려다. 그는 1937년 3월 11일 미나미 지로 총독이 31개 본산 주지들을 불러 중이 결혼하고 육식을 하는 일본 불교처럼 만들겠다고 얘기할 때 만공 선사는 다음과 같이 미나미를 꾸짖었다.
 
  “전 총독(데라우치)은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이다. 그는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조선 불교를 진흥시키려면 수행을 통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수밖에 없다. 총독부는 간섭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일 것이다.”
 
  만공 선사는 일제의 갖은 회유를 뿌리치고 한국 불교를 지키기 위한 구심체 ‘선학원’을 설립했다. 1941년에는 일본의 식민 불교 정책에 맞서 ‘한국 불교 고수 투쟁’을 선언하고, 독립을 갈망하는 1000일 기도를 했다. 만해 한용운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만공 선사를 기리는 경허만공선양회는 2015년 5월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허만공선양회장 옹산 스님(전 수덕사 주지)에 따르면 보훈처는 만공 선사가 일제에 체포됐거나 복역한 기록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서훈을 보류했다.
 
 
  항일 비행사·독립운동한 안중근 여동생도 거절
 
  임도현은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항일투쟁을 한 독립투사다. 그는 1931년 12월 일본 도쿄 다치카와(立川) 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던 중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중국에 도착한 후 쓰촨(四川)성 충칭중앙군사정부 직속부대에 소속돼 장제스(蔣介石)를 보좌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4년 임도현은 만주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도중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 1934년 일본 상하이영사관에 붙잡힌 그는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인 제주도에 돌아왔다. 이후 해방 때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국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고향에서 공출과 징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임도현의 조카 임정범씨는 10여년간 백부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훈처에 신청했지만, 결과는 매번 ‘탈락’이었다.
 
  보훈처는 이 밖에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심사에서 제외하거나 서훈 보류 결정을 내리고 있다. 가장 주된 이유는 “증빙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보훈처는 주로 일제 수사·사법 당국의 기록물, 당시 기사를 놓고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를 심사한다. 유족들에게도 같은 종류의 공적 자료를 요구한다. 이는 당연히 보훈처가 해야 할 일을 유족에게 미루는 일종의 ’직무유기‘다. 일제 당국에 검거된 이를 제외한 상당수 독립운동가의 활동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공식적인 문건 자료가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일제 당국의 자료들은 분단과 전쟁 등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소실됐다. 외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자료를 구하려면 현지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 일반인이 보훈처가 제시하는 기준을 맞추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야당이 의석 과반… 상훈법 개정 쉽지 않을 것
 
2015년 1월 1일, 김정은이 김일성ㆍ김정일의 무덤인 소위 ‘금수산 태양궁전’을 찾았다. 김일성 친척들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한 건 북한이 김일성 3대를 우상화하는 데 협조한 것과 같다. 사진=조선일보
  보훈처는 6월 29일 보도자료를 통해 “김일성 친인척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을 두고 논란이 야기되고 국민 정서와 배치된다는 지적에 따라 새로운 공훈 심사 기준을 마련해 국민정서에 맞게 심사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훈법’ 개정을 추진해 김일성의 숙부 김형권과 외숙 강진석에 대한 서훈을 빠른 시일 내에 취소하겠다고도 밝혔다.
 
  현행 상훈법상 서훈을 취소할 수 있는 경우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 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 ‘관세법’ ‘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해 사형,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경우뿐이다. 법률을 고치지 않으면 김형권과 강진석의 서훈 공적을 취소할 수 없다.
 
  현재 국회는 더불어민주당 121석, 국민의당 38석 등 야당이 의석의 과반을 점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대주주 문재인 전 대표가 지난해 8월 해방 이후 월북해 노동당 국가검열상 등을 지낸 김원봉에게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싶다”고 한 걸 감안하면 ‘상훈법’ 개정에 더불어민주당이 동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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