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스가 살아 있다면 애플 癌센터를 세웠을지도
⊙ 2003년 10월 희귀 췌장암 진단, 9개월 후 첫 수술
⊙ 채식주의, 약초요법 고집… 간으로 전이된 암세포 더 커져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항암제 투여, 방사선 표적치료도 받아… 자신의 DNA 염기서열까지 분석
李相旭
⊙ 49세. 연세대 의대 졸업. 연세대 대학원 의학박사.
⊙ 서울아산병원 실험동물실 연구부장.
⊙ 대한방사선종양학회 최우수 논문상,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 학술상 수상.
⊙ 2003년 10월 희귀 췌장암 진단, 9개월 후 첫 수술
⊙ 채식주의, 약초요법 고집… 간으로 전이된 암세포 더 커져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항암제 투여, 방사선 표적치료도 받아… 자신의 DNA 염기서열까지 분석
李相旭
⊙ 49세. 연세대 의대 졸업. 연세대 대학원 의학박사.
⊙ 서울아산병원 실험동물실 연구부장.
⊙ 대한방사선종양학회 최우수 논문상,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 학술상 수상.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영감과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이 속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두 사람이 떠오른다. 팝의 황제라 불렸던 마이클 잭슨과 혁신적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스티브 잡스. 아마도 두 사람은 21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되돌아봐도 21세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꼽힐 것이다.
2011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 그의 병명(病名)은 알려졌지만 생전 그가 어떤 투병생활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이에 그의 전기(傳記)를 통해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의학적 분석을 해보려 한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암(癌)에 대한 정보도 많고 자칭 전문가도 참 많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암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 같은 학문은 어렵기는 하지만 의학처럼 논란의 여지가 많지는 않다. 일본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癌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를 보면 그 단면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암에 걸렸던 다치바나는 관련 질환을 공부하고 TV프로그램도 진행했으며, 강의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암이란 이런 병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비슷한 특성을 가진 환자들에게 똑같은 치료를 시행해도 암이 반응하는 양상은 다양했다.
암 진단받고도 마스크·산소통 디자인 불평
필자는 ‘연구년’을 이용, 미국 휴스턴에 머문 적이 있다. 아이폰이 갓 세상에 나온 때였는데 전 세계에서 모인 많은 의학연구자가 잡스의 아이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물론 필자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란 정도의 상식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잡스는 애플 왕국을 만들며 승승장구했다. 그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암 상태 말기. 잡스 스스로 투병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 했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그의 성격은 매우 까칠했다.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암 환자로서도 매우 까다로웠다.
윌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마지막 상황에 닥쳐서야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는 산소호흡기 마스크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스크 착용을 거절하기도 했다. 의료진이 여섯 가지 디자인의 마스크를 보여줬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마스크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의 가족과 의료진에 의해 반(半)강제로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를 쓴 잡스는 이번에는 환자용 산소통의 모양이 보기 싫다고 불평했다. 사실 필자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수십 년째 모양이 바뀌지 않는 게 환자용 산소통이다. 중환자가 있는 병실 분위기를 한층 어둡게 하는 데 한몫하는 게 바로 투박한 모양의 산소통인 것이다.
잡스는 성격만큼이나 까다로운 암을 앓았다. 까다롭단 의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우선 치료하기 매우 까다로운 곳(장기)에 암세포가 생겼고 병명 역시 흔치 않았다. 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잡스의 몸 상태 역시 좋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암에 걸린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년 10월이었다. 무슨 병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5년 전 비뇨기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비뇨기과 전문의는 신장과 수뇨관(오줌은 신장에서 생성되고 수뇨관을 통해 방광으로 모인다)의 상태를 보기 위해 복부 CT 촬영을 했다. 그런데 신장과 수뇨관은 이상이 없었는데 췌장에 종양을 의심할 수 있는 병변(病變·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생체의 변화)이 관찰됐다.
CT 검사를 받았음에도 암이라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비록 종양이 의심되어도 조직학적 진단이 되지 않은 상태라면 일반적으로 ‘병변’ 등으로 표현한다.
잡스는 비뇨기과 전문의로부터 췌장 조직검사를 권유받았다. 의료진은 위(胃) 내시경 하듯 카메라를 식도를 통해 십이지장의 중간 부위까지 도달케 한 후 쓸개에서 나오는 담즙과 췌장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가 나오는 구멍으로 조영제를 투여해 췌장과 담도의 관을 관찰했다. 내시경에 달린 바늘을 이용해 조직 샘플도 얻었다. 이런 시술은 숙련된 전문의가 아니면 하기도 어렵고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수술 거절한 잡스
당초 잡스는 조직검사 받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다. 표면상으로 바쁘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암 환자들이 나타내는 전형적인 심리현상이다. 잡스는 부인의 강력한 권유로 ERCP(내시경 역행 췌담관 조영술) 검사를 한 후 최종적으로 췌장의 도세포(islet cell) 기원의 신경내분비(neuroendocrine carcinoma)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잡스의 병에 대해 ‘희귀한 췌장암’이라 표현했다.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해 혈당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진다. 장에서 인슐린을 만드는 세포가 도세포이다. 잡스의 암세포는 췌장의 일부 도세포가 암세포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암은 발병률이 매우 낮다. 그래서 희귀암인 것이다.
신경내분비암은 WHO(세계보건기구) 분류에 따르면, 크게 세 단계(low, intermediate, high grade)로 나뉜다. Low grade일수록 종양은 천천히 자라고 High grade일수록 빨리 자란다. 잡스의 암은 low 또는 intermediate grade일 가능성이 있다. 잡스가 암 진단 후 8년 동안 생존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잡스가 암 진단을 받자 주위의 동료나 친구들은 즉각 수술받을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잡스는 수술을 거부했다. 잡스가 암 진단을 받은 후 가장 먼저 전화한 사람은 래리 브릴리언트(Larry Brilliant)였다. 인격적으로 신뢰하거나 가장 좋아하는 의사여서 제일 먼저 상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래리 브릴리언트는 의사이면서 역학자(질병 집단적 발생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현재 구글재단의 이사로 있다. 잡스는 수술 없이 완치를 꿈꿨는지 모른다.
스티브 잡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인지 자신의 병 역시 치유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채식주의자였던 잡스는 이 시기에 채식을 하기도 하고 단식도 했다. 그는 신선한 당근과 과일주스로 구성된 엄격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수했다. 의사 입장에서 볼 때 채식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다 보면 편식(偏食)을 하게 되는데 이게 문제다.
잡스는 자연치료 센터에서 대체의학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약초요법에 의한 치료제도 사용했다. 암 진단 9개월 후 2004년 7월, 종양이 더욱 커지자 결국 잡스는 수술에 응했다. 수술팀은 간으로 전이된 암 조직을 발견, 육안으로 관찰되는 암 조직을 모두 제거했다. 췌장암은 간으로 쉽게 전이되고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 잡스의 의료진은 이를 많이 걱정했다.
췌장·십이지장 절제하는 휘플 수술
잡스는 2004년 7월 스탠퍼드 의대병원에서 휘플 수술(Whipple procedure)을 받았다. 췌장·십이지장 절제술이라 할 수 있다. 췌장 일부와 십이지장 일부, 위장 일부와 담낭과 담관의 일부를 떼어내는 대(大)수술이다. 수술 과정 또한 매우 복잡하다. 수술 시간이 길고 의사들에게는 고된 수술로 통한다.
당시 스티브 잡스의 건강 상태는 수술을 시행받고 회복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복부를 열고 소화기관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회복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잡스는 10대(代)부터 채식 위주의 편협한 식단을 고수해 왔는데 당시 의사들은 빠른 회복을 위해 단백질 섭취를 권유했다. 그러나 잡스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우유, 생선, 고기 등을 일절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로 복귀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의 부인은 이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았으면 아무리 스티브 잡스라 하더라도 의사들이 핀잔을 많이 줘 단백질을 먹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설명한 후 환자를 설득한다.
스티브 잡스가 투병 중인 사실을 몰랐던 일반인들은 잡스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란 기사를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잡스가 아이폰, 아이패드처럼 앞으로도 새롭고 신기한 제품을 많이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의 아쉬움은 매우 컸다.
2004년 7월 잡스가 췌장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을 때 암세포는 이미 간으로 전이됐다. 현대 의학 수준으로는 사실상 완치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일부 환자의 경우 장기간 생존하거나 완치되기도 한다. 대장암이 간에 퍼진 경우 확률은 낮지만 완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잡스가 2003년 10월 암 진단을 최초로 받았을 당시 곧바로 수술을 했더라면 간으로의 전이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필자의 진료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추정한다면 암 진단 당시에도 이미 간에 암세포가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다. 잡스가 걸린 암은 빠른 속도로 자라는 암이 아니다. 진단 후 9개월 뒤 수술할 때 간에서 종양을 발견했다는 것은 오래전 암세포가 간에 전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잡스의 운명은 진단 당시 이미 정해진 셈이다.
하지만 잡스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완치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잡스가 없는 ‘애플 왕국’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잡스에게 낙관론을 심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암세포의 특징
암세포가 간에 전이됐다고 하면 간암이 생긴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통상 간에서 자체적으로 종양이 생긴 경우 의사들은 원발성(原發性) 간암이라 한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다른 특징이 있는데 우선 오래, 영원히 산다는 점이다. 1951년 미국의 한 흑인 여성이 자궁암에 걸렸는데 이 여성은 그해 암으로 죽었지만 당시 떼어낸 암조직에서 배양한 암세포는 지금도 많은 연구자가 사용하고 있다. 즉 환자 자신은 죽었지만 그 환자의 암세포는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암세포는 혈관이나 림프관을 뚫고 몸 안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고 다시 혈관 밖으로 나와 암 덩어리를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암 덩어리를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하더라도 다른 장기에서 재발할 수 있다. 따라서 전이암 덩어리를 모두 제거한다 하더라도 완치됐다고 볼 수 없다. 전신에 퍼진 암세포들이 시간차를 두고 계속해서 자라나면 또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간, 폐, 뼈 등에서 작은 종양을 발견해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하는 이유는, 현대 의학에서 사용하는 항암제로는 고형암(혈액암을 제외한 덩어리로 이뤄진 암)을 완치할 수 없다는 방증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아마도 치료 효과가 가장 좋을 것으로 예측되는 항암제를 선택해 치료를 받았던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모여 치료방법을 논의했다. 의사들의 진료회의에는 그의 아들 ‘리드’가 참석했다. 잡스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래에 자신의 아들이 스탠퍼드대학에서 암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2008년 초 잡스의 암이 재발하면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팀이 꾸려졌다. 책임자는 스탠퍼드대학의 조지 피셔였다. 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팀이 꾸려진 것은 아마도 충분한 금전적 보상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잡스는 최근에 개발되어 임상에 쓰이고 있는 표적 항암제를 투여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느 회사의 약을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화이자가 개발한 ‘수텐’이라는 약은 100%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텐은 난치성 종양, 즉 기존의 항암제로는 치료 불가능한 종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잡스는 또 다른 항암제를 몇 가지 더 사용했고 기존의 항암제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염기서열까지 분석한 잡스
스티브 잡스는 10만 달러를 들여 자신의 정상세포의 염기서열과 암세포의 염기서열을 비교·분석했다. 그리고 어떤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는지 확인, 유전자 돌연변이에 기초해 선택된 표적 항암치료제를 투여했다.
잡스가 자신의 염기서열까지 분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은 주로 단백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인간은 에너지원으로 단백질을 섭취한다. 이것이 체내에 흡수되고 분해되어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 생명 현상에 사용되는, 즉 신호전달물질로 이용되는 단백질은 대부분 세포 내에서 합성된다. DNA에서 mRNA가 만들어지고 mRNA로부터 아미노산이 만들어져야 정상적인 단백질 합성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에 의해 생명 유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해 돌연변이가 있는 유전자를 찾아낸 후 자신의 몸에 생긴 암세포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해 그에 맞는 항암제를 투여하고자 했다. 이제까지 밝혀진 의학적 사실에 의하면, 특정 암세포에는 특정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생긴다. 암세포에는 특정 단백질이 과도하게 만들어진다. 이런 암세포에서 특정 단백질의 합성을 약으로 방해하면 암세포가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물론 유전자 염기서열을 아무리 정확하게 분석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암을 치료할 수는 없다.
잡스는 수술, 항암제 투여 외에 방사선 표적치료라는 것을 추가로 받았다. 암세포를 방사선으로 죽이는 것이다. 일종의 방사선 치료법이다.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를 받기 위해서 잡스는 스위스 바젤까지 갔다. 당시 투여하려 했던 방사선 표적치료제는 미국 FD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위스로 가야 했던 것이다.
잡스 사후(死後) 그를 사업에 이용한 사례가 많았다.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Technology Review》에 실린 기사(잡스는 맞춤의학에 유산을 남겼다·Steve Jobs Left a Legacy on Personalized Medicine)를 읽어보면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사실 잡스가 맞춤의학에 유산을 남긴 것은 특별히 없다. 그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현실의 벽이 높다는 사실만 확인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잡스의 전기에는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암을 치료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거나, 혹은 이러한 방법을 썼음에도 죽은 거의 마지막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잡스가 죽은 지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잡스처럼 죽어가는 사람은 많다. 염기서열 분석을 위해 잡스는 10만 달러를 사용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맞춤의학에 대한 연구는 분명 진행돼야 한다. 그것은 앞으로 의학이 나아갈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학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적처럼 이뤄진 간 이식 수술
2011년 1월 《중앙일보》에 스티브 잡스의 치료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2009년 잡스가 스위스 바젤 대학병원에서 치료받은 내용에 관한 기사였다. 잡스가 스위스에서 받은 치료는 ‘방사선미사일 치료’라 불리었다. 신경내분비암세포의 표면에만 선택적으로 붙는 옥트레오타이드란 단백질이 있는데, 이 단백질에 이트륨(Y)-90이나 루테움(Lu)-177을 결합시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은 이론적으로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이미 수십 년 전에 고안됐다. 20년 전 미국에 연수를 갔던 필자의 스승들도 미국에서 이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돌아오곤 했다. 20~3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 현재까지 상용화되지 못한 것은 실제 암환자에게 적용해 봐도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잡스의 병은 점차 심해졌다. 간 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연장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잡스의 부인 파월은 잡스를 간 이식 대상자 명단에 올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미국 내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캘리포니아 간 이식 대기자 명단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데, 문제는 간 이식 순서가 되기 전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파월은 다급해졌다. 잡스에게 맞는 간 공여자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뇌사자의 간을 공여받으려면 우선 혈액형 등 거부 반응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뇌사자가 있어야 했다. 조건에 맞는 간 공여자는 적고, 간을 이식받으려는 환자는 많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파월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미국은 두 개의 주(州)에 간 이식 수혜자로 신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제도는 일반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무의미했다. 그 이유는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8시간 내에 병원에 도착해야 하는데 미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크다 보니 일반인이 병원에 8시간 내에 도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용기나 헬기를 언제든지 띄울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잡스는 가능했다. 그의 부인은 2009년 2월 테네시주 간 이식 수혜자 명단에 남편 이름을 올렸다. 천신만고 끝에 잡스는 대기자 1번이 됐다. 하지만 간 공여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20대(代) 중반의 남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잡스는 그의 간을 이식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전용기를 타고 새벽 4시에 멤피스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물론 회복기에 위 내용물이 폐로 들어가 폐렴으로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진두지휘한 의사는 이식센터 책임자 제임스 이슨 박사였다. 그는 잡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잡스는 수술 후 회복기간에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과일 스무디만 먹었다. 그것도 여덟 종류의 스무디를 준비토록 한 후 입에 당기는 한 가지를 골라 먹었다. 이런 광경을 보다 못한 주치의 이슨 박사는 잡스에게 “맛이 문제가 아니다. 음식이 아니라 약이라 생각하고 드시라”고 충고했다.
필자 역시 이런 유사한 경험을 많이 한다. 환자들은 대부분 입안이 헐고 미각을 잃어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기 어렵다. 잘 먹지 않으려는 환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록 암을 죽이는 치료는 의사인 제가 하지만 환자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병을 온전히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의사와 환자가 서로 협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암과 싸워 이길 수 없어요.”
환자들 중에서는 “병원에서 알아서 치료해 주세요.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라는 마음으로 치료에 임하는 이가 있다. 이럴 때는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설득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간 이식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가 있다. 바로 서울아산병원 이승규(李承奎) 교수다. 가족 중 한 명으로부터 간을 공여받아 환자에게 안전하게 이식하는 수술능력을 이 교수는 갖고 있다. 만약 잡스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뇌사자의 간을 기다리지 않고 가족의 도움으로 편하게 이식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잡스는 간 이식 후 곧바로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얼마 후 2010년 1월 그는 검은색 폴라 상의와 청바지를 입고 제품 발표장에 나와 신품(新品) 아이패드를 세계인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2011년 7월 잡스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암세포가 뼈까지 퍼진 것이다. 잡스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2011년 8월 24일 애플에서 물러난 그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 나이로 그는 절명(絶命)했다.
잡스가 살아 있다면…
필자는 가끔 스티브 잡스가 완치돼 살아 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라이벌인 삼성전자를 향해 더 많은 특허소송을 제기했을 수도 있다. 인류가 암이란 거대한 질병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잡스는 자신을 괴롭혔던 암을 정복하기 위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미국의 많은 병원은 거액(巨額)의 재산 기부자들에 의해 생겨났다. 미국의 유명 병원들이 대부분 사람 이름에서 비롯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런 병원에서 인류의 질병을 해결하는 많은치료법이 탄생했다. 잡스가 살아 있다면 아이폰·아이패드로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애플 암센터’를 세웠을지 모른다.⊙
2011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 그의 병명(病名)은 알려졌지만 생전 그가 어떤 투병생활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이에 그의 전기(傳記)를 통해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의학적 분석을 해보려 한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암(癌)에 대한 정보도 많고 자칭 전문가도 참 많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암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 같은 학문은 어렵기는 하지만 의학처럼 논란의 여지가 많지는 않다. 일본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癌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를 보면 그 단면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암에 걸렸던 다치바나는 관련 질환을 공부하고 TV프로그램도 진행했으며, 강의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암이란 이런 병이다’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비슷한 특성을 가진 환자들에게 똑같은 치료를 시행해도 암이 반응하는 양상은 다양했다.
암 진단받고도 마스크·산소통 디자인 불평
필자는 ‘연구년’을 이용, 미국 휴스턴에 머문 적이 있다. 아이폰이 갓 세상에 나온 때였는데 전 세계에서 모인 많은 의학연구자가 잡스의 아이폰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물론 필자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CEO란 정도의 상식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잡스는 애플 왕국을 만들며 승승장구했다. 그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의 암 상태 말기. 잡스 스스로 투병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 했다.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그의 성격은 매우 까칠했다.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암 환자로서도 매우 까다로웠다.
윌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마지막 상황에 닥쳐서야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는 산소호흡기 마스크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스크 착용을 거절하기도 했다. 의료진이 여섯 가지 디자인의 마스크를 보여줬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마스크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의 가족과 의료진에 의해 반(半)강제로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를 쓴 잡스는 이번에는 환자용 산소통의 모양이 보기 싫다고 불평했다. 사실 필자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수십 년째 모양이 바뀌지 않는 게 환자용 산소통이다. 중환자가 있는 병실 분위기를 한층 어둡게 하는 데 한몫하는 게 바로 투박한 모양의 산소통인 것이다.
잡스는 성격만큼이나 까다로운 암을 앓았다. 까다롭단 의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우선 치료하기 매우 까다로운 곳(장기)에 암세포가 생겼고 병명 역시 흔치 않았다. 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잡스의 몸 상태 역시 좋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가 암에 걸린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년 10월이었다. 무슨 병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5년 전 비뇨기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비뇨기과 전문의는 신장과 수뇨관(오줌은 신장에서 생성되고 수뇨관을 통해 방광으로 모인다)의 상태를 보기 위해 복부 CT 촬영을 했다. 그런데 신장과 수뇨관은 이상이 없었는데 췌장에 종양을 의심할 수 있는 병변(病變·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생체의 변화)이 관찰됐다.
CT 검사를 받았음에도 암이라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비록 종양이 의심되어도 조직학적 진단이 되지 않은 상태라면 일반적으로 ‘병변’ 등으로 표현한다.
잡스는 비뇨기과 전문의로부터 췌장 조직검사를 권유받았다. 의료진은 위(胃) 내시경 하듯 카메라를 식도를 통해 십이지장의 중간 부위까지 도달케 한 후 쓸개에서 나오는 담즙과 췌장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가 나오는 구멍으로 조영제를 투여해 췌장과 담도의 관을 관찰했다. 내시경에 달린 바늘을 이용해 조직 샘플도 얻었다. 이런 시술은 숙련된 전문의가 아니면 하기도 어렵고 성공 확률도 높지 않다.
수술 거절한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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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췌장의 위치. |
언론에서는 잡스의 병에 대해 ‘희귀한 췌장암’이라 표현했다. 췌장은 인슐린을 분비해 혈당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진다. 장에서 인슐린을 만드는 세포가 도세포이다. 잡스의 암세포는 췌장의 일부 도세포가 암세포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암은 발병률이 매우 낮다. 그래서 희귀암인 것이다.
신경내분비암은 WHO(세계보건기구) 분류에 따르면, 크게 세 단계(low, intermediate, high grade)로 나뉜다. Low grade일수록 종양은 천천히 자라고 High grade일수록 빨리 자란다. 잡스의 암은 low 또는 intermediate grade일 가능성이 있다. 잡스가 암 진단 후 8년 동안 생존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잡스가 암 진단을 받자 주위의 동료나 친구들은 즉각 수술받을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잡스는 수술을 거부했다. 잡스가 암 진단을 받은 후 가장 먼저 전화한 사람은 래리 브릴리언트(Larry Brilliant)였다. 인격적으로 신뢰하거나 가장 좋아하는 의사여서 제일 먼저 상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래리 브릴리언트는 의사이면서 역학자(질병 집단적 발생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현재 구글재단의 이사로 있다. 잡스는 수술 없이 완치를 꿈꿨는지 모른다.
스티브 잡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인지 자신의 병 역시 치유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채식주의자였던 잡스는 이 시기에 채식을 하기도 하고 단식도 했다. 그는 신선한 당근과 과일주스로 구성된 엄격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수했다. 의사 입장에서 볼 때 채식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다 보면 편식(偏食)을 하게 되는데 이게 문제다.
잡스는 자연치료 센터에서 대체의학 치료를 받기도 했다. 약초요법에 의한 치료제도 사용했다. 암 진단 9개월 후 2004년 7월, 종양이 더욱 커지자 결국 잡스는 수술에 응했다. 수술팀은 간으로 전이된 암 조직을 발견, 육안으로 관찰되는 암 조직을 모두 제거했다. 췌장암은 간으로 쉽게 전이되고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 잡스의 의료진은 이를 많이 걱정했다.
췌장·십이지장 절제하는 휘플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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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췌장, 십이지장을 절제하는 휘플 수술법. |
당시 스티브 잡스의 건강 상태는 수술을 시행받고 회복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복부를 열고 소화기관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회복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잡스는 10대(代)부터 채식 위주의 편협한 식단을 고수해 왔는데 당시 의사들은 빠른 회복을 위해 단백질 섭취를 권유했다. 그러나 잡스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우유, 생선, 고기 등을 일절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업무로 복귀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의 부인은 이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았으면 아무리 스티브 잡스라 하더라도 의사들이 핀잔을 많이 줘 단백질을 먹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의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설명한 후 환자를 설득한다.
스티브 잡스가 투병 중인 사실을 몰랐던 일반인들은 잡스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란 기사를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잡스가 아이폰, 아이패드처럼 앞으로도 새롭고 신기한 제품을 많이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의 아쉬움은 매우 컸다.
2004년 7월 잡스가 췌장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을 때 암세포는 이미 간으로 전이됐다. 현대 의학 수준으로는 사실상 완치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일부 환자의 경우 장기간 생존하거나 완치되기도 한다. 대장암이 간에 퍼진 경우 확률은 낮지만 완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잡스가 2003년 10월 암 진단을 최초로 받았을 당시 곧바로 수술을 했더라면 간으로의 전이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필자의 진료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추정한다면 암 진단 당시에도 이미 간에 암세포가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다. 잡스가 걸린 암은 빠른 속도로 자라는 암이 아니다. 진단 후 9개월 뒤 수술할 때 간에서 종양을 발견했다는 것은 오래전 암세포가 간에 전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잡스의 운명은 진단 당시 이미 정해진 셈이다.
하지만 잡스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완치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잡스가 없는 ‘애플 왕국’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잡스에게 낙관론을 심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암세포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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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췌장암은 수술해도 완치가 어렵고 항암제도 잘 듣지 않는 질병이다. 내시경 초음파로 췌장을 검진하는 모습. |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다른 특징이 있는데 우선 오래, 영원히 산다는 점이다. 1951년 미국의 한 흑인 여성이 자궁암에 걸렸는데 이 여성은 그해 암으로 죽었지만 당시 떼어낸 암조직에서 배양한 암세포는 지금도 많은 연구자가 사용하고 있다. 즉 환자 자신은 죽었지만 그 환자의 암세포는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암세포는 혈관이나 림프관을 뚫고 몸 안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고 다시 혈관 밖으로 나와 암 덩어리를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암 덩어리를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하더라도 다른 장기에서 재발할 수 있다. 따라서 전이암 덩어리를 모두 제거한다 하더라도 완치됐다고 볼 수 없다. 전신에 퍼진 암세포들이 시간차를 두고 계속해서 자라나면 또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간, 폐, 뼈 등에서 작은 종양을 발견해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하는 이유는, 현대 의학에서 사용하는 항암제로는 고형암(혈액암을 제외한 덩어리로 이뤄진 암)을 완치할 수 없다는 방증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아마도 치료 효과가 가장 좋을 것으로 예측되는 항암제를 선택해 치료를 받았던 것 같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모여 치료방법을 논의했다. 의사들의 진료회의에는 그의 아들 ‘리드’가 참석했다. 잡스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래에 자신의 아들이 스탠퍼드대학에서 암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2008년 초 잡스의 암이 재발하면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팀이 꾸려졌다. 책임자는 스탠퍼드대학의 조지 피셔였다. 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팀이 꾸려진 것은 아마도 충분한 금전적 보상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잡스는 최근에 개발되어 임상에 쓰이고 있는 표적 항암제를 투여받았다. 구체적으로 어느 회사의 약을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화이자가 개발한 ‘수텐’이라는 약은 100%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텐은 난치성 종양, 즉 기존의 항암제로는 치료 불가능한 종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잡스는 또 다른 항암제를 몇 가지 더 사용했고 기존의 항암제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염기서열까지 분석한 잡스
스티브 잡스는 10만 달러를 들여 자신의 정상세포의 염기서열과 암세포의 염기서열을 비교·분석했다. 그리고 어떤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는지 확인, 유전자 돌연변이에 기초해 선택된 표적 항암치료제를 투여했다.
잡스가 자신의 염기서열까지 분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명 현상은 주로 단백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인간은 에너지원으로 단백질을 섭취한다. 이것이 체내에 흡수되고 분해되어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 생명 현상에 사용되는, 즉 신호전달물질로 이용되는 단백질은 대부분 세포 내에서 합성된다. DNA에서 mRNA가 만들어지고 mRNA로부터 아미노산이 만들어져야 정상적인 단백질 합성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백질에 의해 생명 유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해 돌연변이가 있는 유전자를 찾아낸 후 자신의 몸에 생긴 암세포의 유전적 특징을 파악해 그에 맞는 항암제를 투여하고자 했다. 이제까지 밝혀진 의학적 사실에 의하면, 특정 암세포에는 특정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생긴다. 암세포에는 특정 단백질이 과도하게 만들어진다. 이런 암세포에서 특정 단백질의 합성을 약으로 방해하면 암세포가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물론 유전자 염기서열을 아무리 정확하게 분석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암을 치료할 수는 없다.
잡스는 수술, 항암제 투여 외에 방사선 표적치료라는 것을 추가로 받았다. 암세포를 방사선으로 죽이는 것이다. 일종의 방사선 치료법이다.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를 받기 위해서 잡스는 스위스 바젤까지 갔다. 당시 투여하려 했던 방사선 표적치료제는 미국 FD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위스로 가야 했던 것이다.
잡스 사후(死後) 그를 사업에 이용한 사례가 많았다.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Technology Review》에 실린 기사(잡스는 맞춤의학에 유산을 남겼다·Steve Jobs Left a Legacy on Personalized Medicine)를 읽어보면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사실 잡스가 맞춤의학에 유산을 남긴 것은 특별히 없다. 그런 시도를 해보았지만 현실의 벽이 높다는 사실만 확인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잡스의 전기에는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암을 치료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거나, 혹은 이러한 방법을 썼음에도 죽은 거의 마지막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잡스가 죽은 지 2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잡스처럼 죽어가는 사람은 많다. 염기서열 분석을 위해 잡스는 10만 달러를 사용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맞춤의학에 대한 연구는 분명 진행돼야 한다. 그것은 앞으로 의학이 나아갈 방향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학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적처럼 이뤄진 간 이식 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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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잡스가 2011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세계개발자콘퍼런스(WWDC)에 등장해 새 서비스 ‘아이클라우드’를 소개했다. 그는 2011년 3월 아이패드 2 출시행사 때보다 더 수척했고, 발표 시간도 짧았다. |
이 치료법은 이론적으로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는 이미 수십 년 전에 고안됐다. 20년 전 미국에 연수를 갔던 필자의 스승들도 미국에서 이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돌아오곤 했다. 20~3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 현재까지 상용화되지 못한 것은 실제 암환자에게 적용해 봐도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잡스의 병은 점차 심해졌다. 간 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연장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잡스의 부인 파월은 잡스를 간 이식 대상자 명단에 올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미국 내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캘리포니아 간 이식 대기자 명단 순서를 기다려야 하는데, 문제는 간 이식 순서가 되기 전에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파월은 다급해졌다. 잡스에게 맞는 간 공여자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뇌사자의 간을 공여받으려면 우선 혈액형 등 거부 반응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뇌사자가 있어야 했다. 조건에 맞는 간 공여자는 적고, 간을 이식받으려는 환자는 많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파월에게 묘안이 떠올랐다. 미국은 두 개의 주(州)에 간 이식 수혜자로 신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런 제도는 일반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무의미했다. 그 이유는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8시간 내에 병원에 도착해야 하는데 미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크다 보니 일반인이 병원에 8시간 내에 도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용기나 헬기를 언제든지 띄울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일이었다.
잡스는 가능했다. 그의 부인은 2009년 2월 테네시주 간 이식 수혜자 명단에 남편 이름을 올렸다. 천신만고 끝에 잡스는 대기자 1번이 됐다. 하지만 간 공여자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2009년 3월 21일 토요일 20대(代) 중반의 남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잡스는 그의 간을 이식받을 수 있었다. 물론 전용기를 타고 새벽 4시에 멤피스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물론 회복기에 위 내용물이 폐로 들어가 폐렴으로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진두지휘한 의사는 이식센터 책임자 제임스 이슨 박사였다. 그는 잡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잡스는 수술 후 회복기간에도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과일 스무디만 먹었다. 그것도 여덟 종류의 스무디를 준비토록 한 후 입에 당기는 한 가지를 골라 먹었다. 이런 광경을 보다 못한 주치의 이슨 박사는 잡스에게 “맛이 문제가 아니다. 음식이 아니라 약이라 생각하고 드시라”고 충고했다.
필자 역시 이런 유사한 경험을 많이 한다. 환자들은 대부분 입안이 헐고 미각을 잃어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기 어렵다. 잘 먹지 않으려는 환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록 암을 죽이는 치료는 의사인 제가 하지만 환자가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병을 온전히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의사와 환자가 서로 협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암과 싸워 이길 수 없어요.”
환자들 중에서는 “병원에서 알아서 치료해 주세요. 나는 가만히 있을 테니”라는 마음으로 치료에 임하는 이가 있다. 이럴 때는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설득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간 이식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가 있다. 바로 서울아산병원 이승규(李承奎) 교수다. 가족 중 한 명으로부터 간을 공여받아 환자에게 안전하게 이식하는 수술능력을 이 교수는 갖고 있다. 만약 잡스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뇌사자의 간을 기다리지 않고 가족의 도움으로 편하게 이식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잡스는 간 이식 후 곧바로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얼마 후 2010년 1월 그는 검은색 폴라 상의와 청바지를 입고 제품 발표장에 나와 신품(新品) 아이패드를 세계인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2011년 7월 잡스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암세포가 뼈까지 퍼진 것이다. 잡스는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2011년 8월 24일 애플에서 물러난 그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 나이로 그는 절명(絶命)했다.
잡스가 살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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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바꾼 남자, 스티브 잡스. 그가 살아 있다면 전혀 새로운 방식의 ‘애플 암센터’를 세웠을지 모른다. |
미국의 많은 병원은 거액(巨額)의 재산 기부자들에 의해 생겨났다. 미국의 유명 병원들이 대부분 사람 이름에서 비롯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런 병원에서 인류의 질병을 해결하는 많은치료법이 탄생했다. 잡스가 살아 있다면 아이폰·아이패드로 암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애플 암센터’를 세웠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