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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10주년 - 이희완 해군 소령(交戰 당시 참수리 357號 부정장)

“從北세력은 敵이다”

글·사진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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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국제합조단은 광범위한 조사 통해 UN안보리에 제출한 결론 (북한 소행) 도달” (호주 국방부)

“북이 쏘는 포탄을 맞고 그냥 죽으라는 말입니까. 군인이야 전투에서 죽을 수 있다고 칩시다. 군인이 죽고 나면 우리 국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적의 도발에 수십 명이 전사하고, 다리를 잃거나 손이 잘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사는 군인도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 北 해안기지에서 對艦미사일 쏘려 해 예인하던 357호 홋줄 끊자 침몰
⊙ ‘우발적 사건’이라 보도한 언론과 사회 분위기에 피가 거꾸로 솟아
⊙ 제2연평해전 이후 수중공격 또는 해안포로 보복할 것이라 예상
⊙ 제주해군기지 건설 막는 검은 세력 존재… 從北세력의 오염 막아야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에 참전한 이희완 해군 소령.
  하얀 해군 제복을 입은 사나이가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며 다가간 곳은 ‘해군 소령 윤영하의 묘’ 앞이었다. 묘비 주위에 놓여 있던 꽃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회상에 잠긴 그는 곧바로 정자세를 취한 후 거수경례를 올렸다.
 
  이희완(李熙玩·37·海士54기) 소령. 그는 매년 현충일이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다. 이곳에는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전우(戰友)가 잠들어 있다.
 
  이 소령은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부정장(副艇長·당시 중위)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적(敵)의 도발로 사관학교 선배였던 윤영하(尹永夏·당시 대위) 정장(150t 이하의 함장을 정장이라 부름)과 대원 다섯 명의 최후를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 소령 또한 교전 중 오른쪽 다리를 통째로 잃었고 왼쪽 다리에 8cm 크기의 뼈 관통상을 당했다. 아홉 차례의 대수술 끝에 왼쪽 다리를 살렸지만 오른쪽 다리에는 의족을 채워야 했다.
 
  “함정 근무를 못하는 게 억울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다시 오면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겁니다.”
 
 
  귀 찢어지는 듯한 포성, 비처럼 쏟아지는 敵彈
 
이희완 소령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정장이었던 윤영하 소령의 묘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윤 정장은 원리원칙을 강조한 군인이었다고 한다.
  주먹을 불끈 쥔 이희완 소령은 불편한 다리를 끌며 전사한 대원들의 묘로 향했다. 가슴속에 묻어 뒀던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의 목소리가 대전현충원 묘역을 메아리치듯 들려 왔다.
 
  그는 천안함 전사자 묘역도 들렀다. 제2연평해전 때 부상했다가 현역으로 복귀한 후 천안함에 근무하다 폭침으로 산화(散華)했던 박경수 중사를 빼놓을 수 없었다. 가슴 아픈 기억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벌써 10년이 지났군요. 전투 상황은 35분가량 지속됐지만 실제 교전이 벌어진 시간은 2~3분에 불과해요.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던지…. 지금도 어제 일처럼 머리 속에 선합니다.”
 
  2002년 6월 29일. 축구대표팀이 4강까지 진출해 축제 분위기였던 한일(韓日)월드컵경기가 폐막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날 오전 10시25분, NLL 남쪽 3마일 해상. 참수리 357호 윤영하 정장과 이희완 부정장은 우리 해역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등산곶 684호)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예감했다. 북한 경비정의 함수(艦首·뱃머리)에 달린 85mm포와 함미(艦尾)에 있던 37mm포가 참수리 357호를 직접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참수리 357호와 같은 편대였던 참수리 358호(편대장 金燦)가 북한 경비정의 선수(船首)를 먼저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357호가 북한경비정을 향해 시위기동을 할 참이었다. 357호가 25노트 속력으로 북한 경비정에 왼쪽 측면을 노출시킨 채 지나가는 순간, 북한 경비정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포성이 들렸다.
 
  적의 포탄은 357호의 조타실을 명중했고 곧이어 화염이 솟구쳤다. 조타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피격을 받은 357호 대원들은 조건반사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40mm함포와 20mm포, M-60 기관총, K-2 소총 사수들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북한 경비정의 공격은 집요했다. 357호의 조타실, 기관실, 갑판 등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 치밀히 계산된 의도적 도발이었다. 조타장비가 고장난 357호는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아 오른쪽으로 빙빙 돌았고 기관실 피격으로 동력(動力)까지 끊겼다. 대원들은 기관포를 수동 모드로 전환해 응사했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습니다. 곧바로 배가 흔들렸고 비가 오듯 적탄(敵彈)이 357호에 박혔어요. 통신 헬멧을 통해 대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포와 기관총, 소총으로 대응사격에 들어갔죠. 그 순간 또다시 적의 포탄이 357호를 강타했습니다.
 
  ‘쿵’ 하는 소리에 옆을 보니 윤영하 정장님이 쓰러졌습니다. ‘괜찮습니까’라며 물어볼 틈도 없었어요. 적의 공격은 계속됐고 대응사격도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적의 포탄(37mm)이 또 날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제 오른쪽 다리를 날렸어요. 곧이어 왼쪽 다리 뼈를 총알이 뚫고 지나갔습니다. 다리는 휘어졌고 몸을 지탱하지 못해 그대로 넘어졌어요.”
 
 
  “벌건 피가, 그 엄청난 양의 피가”
 
  ―포탄을 맞는 순간, 어땠습니까.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총알이 날아오고 포가 날아오는데 아플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함교(전투를 지휘하는 갑판 중 가장 높은 곳) 바닥에 나뒹군 저는 먼저 쓰러져 있던 윤 정장님을 쳐다봤어요. 눈만 깜박깜박거리더니 얼마 후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더군요. 윤 정장님의 등쪽에서 벌건 피가, 그 엄청난 양의 피가 ….”
 
  말을 잇지 못한 이희완 소령은 잠시 하늘을 쳐다본 후 다시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때 대원이 정장님과 저를 구하러 함교 쪽으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적의 표적이 된다. 총알 날아온다. 나는 괜찮으니 정장님 먼저 살펴라’고 했습니다.”
 
  윤영하·이희완 두 젊은 장교가 쓰러질 무렵, 앞서 북한 경비정을 지나갔던 아군(我軍) 편대의 358호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격파사격에 들어갔다. 곧바로 다른 편대까지 가세해 북한 경비정은 기동력과 화력을 잃고 주춤했다. 몇 분 후 북한 경비정은 다른 적함(敵艦)에 예인돼 북방한계선(NLL) 북쪽으로 도망쳤다. 교전에서 북은 사망 13명, 부상 25명 등 38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도발에 나선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는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 때 아군의 공격을 받고 반파(半破)된 북측 경비정이었다. 수리 후 다시 실전배치돼 기회를 엿보다 보복에 나선 것이다. 이 경비정은 2004년에도 NLL을 넘어와 우리 해군의 경고사격을 받고 되돌아갔다. 등산곶 684호는 도발 전담 적함(敵艦)이었다.
 
  ―2002년 6월 29일 이전 북의 도발이 있을 것이라 예측했습니까.
 
  “도발 징조가 뚜렷했습니다. 하루 전날인 6월 28일에는 NLL을 침범하며 기동 연습까지 하더군요. 뭔가 행동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요. 그런데 전투 당일에는 NLL 남쪽으로 3마일까지 내려오더군요. 작정하고 내려온 겁니다.”
 
  ―당시 전투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때 상황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전투였습니다. 물론 다른 상황이었다면 더 큰 성과를 얻을 수도 있었지요.”
 
  ―‘다른 상황’이라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사실 교전 이후 한동안 자유롭게 말할 상황이 못됐습니다.”
 
  ―교전 당시 아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을 충분히 격침시킬 수 있었다고 하는데 왜 추가공격을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상부에서는 확전(擴戰)을 우려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교전 당시 북측은 수세에 몰리자 아군 함정을 향해 미사일 공격까지 하려 했다면서요.
 
  “지원에 나선 아군 함정이 북한 경비정을 공격하는 동안 기습공격을 당한 357호를 예인할 때였습니다. 저놈들은 자신들의 함정과 병력의 피해가 심각하자 우리를 향해 대함(對艦) 미사일을 쏠 준비를 했지요. 우리측 초계함이 북측 해안기지에서 발사된 미사일 레이더 전파를 포착했습니다. 우리 함정은 채프(레이더 전자파 교란용 금속물질)를 발사한 후 신속히 이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를 예인하던 홋줄을 끊고 아군 함정은 연평도 기지로 복귀했지요. 저놈들은 자신들이 미사일 전파를 발사하면 우리가 확전을 피하기 위해 공격을 멈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물론 반파(半破) 상태였던 북한 경비정이 자력(自力)으로 복귀하지 못하자 구출을 위한 시간 벌기용으로 미사일 레이더 전파를 쏜 측면도 있습니다.”
 
 
  햇볕정책 속의 계속된 기습도발
 
북측 경비정 등산곶 684호는 NLL남쪽의 우리 해역을 상습적으로 침범하는 적함(敵艦)이다.
  북의 미사일 공격 우려로 예인 중이던 참수리 357호는 서해 바다에 홀로 남게 됐고 그날 오전 11시59분경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53일 후 인양된 참수리 357호는 현재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 안보교육용으로 전시돼 있다.
 
  제2연평해전은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권 때까지 서해교전으로 불렸다. 공식 행사는 해군 2함대사령부가 주관하는 정도였다. 당시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전사자나 부상자들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2008년 이명박(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승리한 전투로 재평가받아 제2연평해전으로 명칭이 변경됐고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정부 기념행사로 격상됐다.
 
  ―잊혀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발 같은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일들이 벌어지면서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높아진 것 같아요. 매년 현충원에 오지만 올해는 특히 차가 많이 막히더군요. 관심이 여전하다고 봅니다.”
 
  ―교전 직후 억울한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전우가 죽고 부상자도 적지 않았는데 당시 햇볕정책을 추진하던 정부는 조용히 넘어가려는 분위기였지요.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게 군인입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당시 국군통수권자가 햇볕정책을 추진했고 남북한은 화해 무드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싸우지 않고 잘 지내 보자는 거였지요. 그런 큰 정책이 있는 상황에서, 월드컵 축제 분위기 때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햇볕정책을 열심히 추진했는데도 결국에는 우리 해군이 공격을 당했고 아까운 생명까지 잃었습니다.”
 
  ―지금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사실, 군대만큼 국가정책에 최선을 다해 따르는 조직이 없을 것입니다. 통수권자의 명령을 받드는 군인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굳이 표출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 전역한 우리 대원들은 불만이 아주 많았어요. 특히 우리가 북한 경비정을 자극해 잘못 대응했다는 식의 얘기가 나올 때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작전상황을 보면, 북한 경비정은 NLL 아래쪽 우리 해역을 깊숙이 침범해 기습공격을 했어요. 의도적 도발이었던 겁니다. 그걸 그냥 놔둘 수는 없지요.”
 
 
  “轉役요? 원수를 갚아야죠”
 
2002년 8월 21일 참수리 357호 선체가 침몰 53일 만에 인양되고 있다.
  이희완 소령은 당시 언론의 보도행태와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했다고 했다.
 
  “교전 후 군병원에서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으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TV와 일부 신문을 중심으로 이상한 보도가 나왔습니다. 기사의 제목이 ‘의도적 vs. 우발적’이었어요.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요.
 
  직접 취재해 보도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나쁜 의도를 갖고 관련 자료를 제공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도를 하면 국민들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저놈들이 치밀히 계획하고 연습까지 한 후 내려와 기습공격까지 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우발적이라니.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잠을 못 잤어요. 심지어 우리측 어선이 NLL을 왔다 갔다 하니까 북한이 열 받아서 공격했다는 보도도 있었어요. 참으로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업통제선은 NLL보다 한참 아래쪽에 있어요. 우리 어선은 어업통제선 이남에서 조업을 해요. NLL까지 올라갈 일이 없었습니다.
 
  전투에 참가해 다리를 잃고 불구가 된 군인의 입장에서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느꼈습니다. 제가 주변 분들에게 그랬어요. ‘기자들 다 데려오라. 직접 설명하겠다. 왜 의도적 공격이었는지를 구체적인 증거까지 대며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제2연평해전이 ‘우발적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 보도는 교전 이후 계속됐다. 2년 뒤 2004년에는 MBC의 한 프로그램이 ‘우발적인 교전’이라는 제목으로 NLL 이남의 해역이 우리의 영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방송을 내보낸 적도 있다.
 
  ―전역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무슨 소리, 전혀요. 원수를 갚아야죠. 저놈들 때려잡으려면 군에 남아 있어야죠. 첫 수술 하고 난 다음 눈물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어릴 적부터 꿈이 군인이었어요. 장교가 되어 군생활을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다리를 잃어 군인의 길을 접는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지요. 그러던 중 희망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루는 큰형님이 중환자실에 있던 저에게 관보를 들고 와 ‘희완아, 기뻐해라. 군 인사법이 개정됐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도 심사를 거쳐 현역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이전에는 부상자는 당연히 전역을 해야 했죠.”
 
  희망적인 소식을 접한 이희완은 이후 병원생활 1년 동안 치료와 재활훈련에 적극 임했다고 한다.
 
  이희완 소령과 윤영하 소령 묘비 앞에서 대화를 한창 나눌 무렵 정복을 입은 육해공군 사관학교 생도 여러 명이 나타났다. 공사 여생도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소령은 후배 생도들에게 당시 전투상황과 윤영하 소령의 생전(生前) 활동상을 들려줬다.
 
  “오늘 현충일이자 공휴일인데 이렇게 대전까지 찾아와 고맙다. 윤 정장님은 군인으로서 원리원칙을 강조하신 분이다. 윤 정장님의 부친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이셨는데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 부친께서는 아들을 잃고 난 후 지금 귀관들이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영하야, 너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고 아버지로서 자랑스럽다’고 하셨다. 아들이 젊은 나이에 전사했음에도 아버지는 눈물을 전혀 흘리지 않으셨다.
 
  윤 정장님은 평상시 전투상황을 가정해 실전훈련을 많이 시키셨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일반 작전활동을 하고 기지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다음날 예정에 없던 훈련을 시키셔서 ‘대원들 모두가 힘들어 하니까 하루 정도 쉬자’고 건의했더니 ‘귀관은 잠이 온다고 전투를 안 하겠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정말 부끄러웠다. 윤 정장님은 전사하기 직전까지 나라를 생각하셨다. 전투 당시 주어진 상황이 안좋았지만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사관생도들과의 대화를 마친 이희완 소령은 “학교에서 시킨 것도 아닌데 최근 들어 현충원을 찾는 생도들이 늘고 있다”고 했다.
 
 
  北은 명백한 主敵
 
이희완 소령과 육해공군 사관 생도들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현재 이희완 소령은 해군 교육사령부 교육운영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교육사령부 리더십센터·해군사관학교 등 교육 관련 부서에서 일해 왔다. 해군 측은 이 소령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해 함상근무 대신 육상근무를 명(命)한 것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심리학 석사학위도 받았다.
 
  이희완 소령은 군부대를 비롯해 공공기관, 중고등학교에서 ‘확고한 안보관이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주제로 안보강연을 많이 한다.
 
  ―군인 대상으로 교육을 할 때는 무슨 얘기를 많이 합니까.
 
  “안보교육의 첫 번째가 주적(主敵) 개념입니다. ‘적이 누구냐’라는 거지요. 나한테 적이 있고 그 적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격과 방어가 가능하지요.”
 
  ―우리에게 적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북한이죠. 명백히 말하면 북한 정권이고 군인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인민군입니다.”
 
  ―적의 실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합니까.
 
  “북은 언제든지 우리 영토·영해를 침입해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는 실존하는 세력입니다. 우리가 피땀 흘려 이뤄 놓은 역사와 발전상을 하루아침에 까뭉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북한 정권입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줍니까.
 
  “물론입니다.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너희들한테 총을 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다’고 얘기하지요.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어린 학생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공무원 시험에도 역사과목이 빠졌지요.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또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천안함 국제합조단에 참가한 호주 국방부의 확고한 입장
 
  “합조단의 풍부한 경험, 광범위한 조사… UN안보리에 제출한 결론(북한 소행) 도달”
 
  지난 5월 《月刊朝鮮》은 천안함 폭침 당시 국제합동조사단에 적극 참여했던 호주 국방부 측에 취재를 의뢰했다. 《月刊朝鮮》은 30여개 항목의 질문지를 보냈고 관련자료를 요청했다. 이에 호주 국방부는 관련 자료와 답변서를 보내 왔다. 호주 국방부는 “천안함 합동조사단은 가장 광범위하고 풍부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며 “조사방법들은 적절했으며 조사에 참여한 5개국 모두 2010년 5월 20일 기자회견과 2010년 6월 14일 유엔(UN)안보리에 제시된 결론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호주 국방부가 밝힌 주요 내용이다.
 
  <한국이 주도한 국제합동조사단 활동에 참여한 호주는 국방부와 해군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호주의 기여에 대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조사활동 참가자들도 높이 평가하였다.
 
  호주는 여타 참여국가와 함께 대부분의 조사활동에 관여했으며, 합조단의 중요한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호주 해군 관계자들은 조사단의 4개 핵심분야에 모두 직접적으로 관여했는데, 회수한 천안함의 선체를 점검하는 작업뿐 아니라 선체구조 관리팀과 함께 증거 분석에도 참여했으며, 폭발유형 분석과 정보분석팀의 토론 및 분석 과정에도 동참했다. 또한 조사단장인 파월(Powell) 중령은 조사결과 공유를 위해 거의 매일 합조단 단장 및 여타 팀리더들과 모임을 가졌다. 또한 호주 해군 관계자 1명이 백령도에 머물면서 선체 인양작업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호주 해군 파견단이 참여해 공동작업을 수행한 천안함 합조단은 가장 광범위하고 풍부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사과정에 사용된 방법들은 적절했으며 조사방식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사에 참여한 5개국 모두 2010년 5월 20일 기자회견과 2010년 6월 14일 UN 안보리에 제시된 결론에 동의하였다. 호주 해군은 조사에 적합한 자격을 갖춘 인력을 파견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작전 똑바로 해라, 또 내려온다”
 
제2연평해전 당시 우리 해군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 이 사진은 8km쯤 떨어진 위치에 있던 참수리 365호의 추성훈 당시 중위가 개인 카메라로 촬영한 것이다.
  ―제2연평해전 이후 그와 같은 기습도발이 또 다시 있을 것이라 예상한 적은 있습니까.
 
  “그런 예상을 안 했다면 군인이 아닐 겁니다. 직접 전투경험을 해 봐서인지 북의 도발의도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999년 제1연평해전 이후 3년 만에 제2연평해전이 터졌죠. 2004~ 2006년에 또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 시절 연평해전과 같은 굵직한 전투는 없었지만, 크고 작은 무력도발은 계속됐어요. 저는 ‘저놈들 또다시 도발할 것’이라고 주위 동료들에게 계속 얘기했습니다. 특히 수중이나 해안포 공격을 예상했지요.”
 
  ―왜 그런 예상을 했습니까.
 
  “저놈들이 해상에서는 우리에게 안되니까요. 도발은 북한의 실체이고 본질입니다. 이것 해 보고 안되면 저것 해 보는, 악질 같은 존재이죠. 경험상 저놈들은 믿을 가치가 전혀 없어요. 우리를 공격해서 괴롭히고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게 북한의 본색입니다. 북이라는 존재, 한편으로는 대단한 집단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목표, 핵심가치를 모두가 공유하며 에너지를 한곳으로 집중시켜요. 그 목표와 핵심가치가 올바른 것이라면 대단한 나라가 됐을 겁니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결국 2009년 서해에서 또다시 교전(대청해전)이 벌어졌습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남북관계가 경색됐는데요.
 
  “동료 선후배들에게 ‘긴장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해상작전을 하는 동료들에게는 ‘작전 똑바로 해라. 곧 내려온다. 준비해라. 거짓말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해 준 적이 있어요. 대청해전이 벌어지고 얼마 후 전투에서 승리한 참수리 325호 정장이 제게 ‘고맙다’고 하더군요.”
 
  ―2010년 3월 26일 있었던 천안함 폭침 소식은 어떻게 들었습니까.
 
  “그날 9시 넘어 군 연락망을 통해서였죠. 지금 해군 초계함(PCC)이 피격돼 가라앉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해군 2함대 벙커에 전화했더니 난리가 났더군요. 해상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한순간에 ‘펑’ 하는 폭음만 있고 함정이 두 동강 났다고 하더군요. 순간 ‘이 새끼들 드디어 밑으로 왔구나’고 직감했죠.”
 
  ―수중 도발은 예상했지만 실제로 감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닌가요.
 
  “연평해전 이후 동기들, 선후배들 만나면 항상 하는 얘기가 ‘저놈들 위로 오든 밑으로 오든 분명히 다른 형태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수함 장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한번은 천안함 폭침이 있기 전 동료 잠수함 장교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잠수함으로 오는 것 아냐. 저놈들 서해에 잠수함 수십 척 갖다놓고 훈련하잖아. 돈도 없고 기름도 없는데 왜 할까. 저걸로 우리 공격할 것 같지 않아?’라고 했더니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저 새끼들 수상전으로는 안될 것 같으니까 다음에는 밑으로 올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서해는 낮은 수심과 심한 조류, 흑탕물 등의 이유로 잠수함 기동이 안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였는데요.
 
  “바다 특성상 수중공격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수중으로 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어요. 어쨌든 저놈들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우리 내부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지더군요. 그 무렵 국방 담당 기자가 제게 전화를 걸어 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더군요. 하도 어이가 없기에 제가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되물었어요. ‘북한이 했겠죠?’라고 말하길래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주로 좌파 진영에서 선체 피로설(說), 미국 잠수함 공격설, 6·25 기뢰설 등이 나왔습니다. 북한 소행을 믿지 않는 국민도 적지 않았지요.
 
  “저는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걸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그때만큼은 대한민국이 싫었습니다. 지금도 일부 국민들이 천안함 폭침을 북한 소행으로 믿지 않는데 정말 슬픕니다.”
 
▣ 서해5도 주요 海戰
 
  ▲제1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발생한 전투이다.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와 어뢰정 3정 등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아군(我軍)을 공격했다. 이에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와 초계함 등이 반격을 가해 북한 함정 2척을 대파(大破)했다. 북은 교전책임을 거론하며 김대중(金大中) 정부에 강력 반발, 당시 전투를 지휘한 제2함대사령관 박정성 제독이 한직(閑職)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제2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서해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2척이 아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기습공격했다. 30여 분간의 전투 끝에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북측의 피해는 더 컸다. 사망 13명, 부상 25명 등 총 38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청해전: 2009년 11월 10일 발생한 대청해전은 NLL 부근 대청도에서 동쪽으로 9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 북한 경비정 1척이 NLL을 침범해 우리 측 함정을 공격하자 참수리 325호 등이 즉각 응사했다. 북한 경비정은 반파(半破)돼 돌아갔다.
 
  북한 이롭게 하는 어두운 조직
 
  ―일반 선박이나 군함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배에 관한 한 나름 전문가라고 보면 됩니다. 사관학교 생도 때도 배우고 임관 후에도 전문교육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배가 오래돼 두 동강이 났다거나 좌초됐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멀쩡한 배가 갑자기 두 동강 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좌초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는 지도가 있듯 바다에도 해저지형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백령도 인근 해저지형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천안함 정도의 군함이 좌초되려면 수심이 아주 낮거나 큰 암초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좌초되면 배에 난 구멍으로 물이 들어와 한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집니다. 천안함처럼 그렇게 두 동강 날 수가 없어요. 정말이지 좌초라는 건 말도 안됩니다.”
 
  이희완 소령은 천안함 폭침과 관련해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언행(言行)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정치를 하시는 분들, 또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 좌초설 등을 말씀하셨는데 정말 걱정이 많이 됐어요. 그분들께 좌초란 단어의 뜻을 묻고 싶었고 또 PCC를 직접 타 보고 하시는 말씀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물론 비(非)전문가이니까 그런 말씀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인들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국민이 혼란에 빠집니다.
 
  강연할 때 가끔 천안함 관련 질문을 받습니다. ‘진짜 북한이 한 거 맞느냐’고요. 저는 답변 첫마디로 ‘국제조사단이 발표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어떤 걸 믿고 싶은 겁니까. 북한이 아니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고 얘기하죠.”
 
  ―우리 국민이 진실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봅니까.
 
  “북한 소행이라 믿지 않도록 뒤에서 조종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남한을 어렵게 하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어두운 조직, 강력한 조직 때문입니다.”
 
  ―그 조직이 북의 조종을 직접 받는다고 봅니까.
 
  “제주해군기지 건설사업을 예로 들어 봅시다. 환경운동 차원에서 반대하는 분들도 있지만 정치적 의도를 갖고 집요하게,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반대하는 검은 세력들도 있어요. 건설 반대라는 명확한 목적을 설정한 후 순수 시민단체라고 믿기 어려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어두운 세력이 있잖아요.”
 
 
  백령도, 휴전선 이남 공격할 것
 
연평해전 유가족들이 제2함대사령부에 마련된 전사자 부조를 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이희완 소령은 “천안함 폭침 원인과 관련해 유엔에 서신을 보낸 단체가 있었는데 편지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G20, 핵(核)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한 나라입니다. 만약 당시 국제조사단의 천안함 조사결과가 조작됐다면 비밀유지가 가능할까요.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더 이상 국제무대에 설 수 없습니다.”
 
  ―천안함에 대해 의문을 갖는 젊은 군인들은 없습니까.
 
  “사회에 있다가 군에 들어와 사실관계를 알고 나면 북한 소행에 다들 분노합니다. 팩트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당한 겁니까.
 
  “1200t급 초계함이라 하더라도 수중 기습공격을 받으면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참수리 357호도 기습을 당한 겁니다. 우리가 먼저 북한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규정상 그렇게 돼 있어요. 저놈들이 공격하면 그 후에 대응사격을 해요. 그런데 기습공격을 받고 대응체계가 무력화되면 그걸로 끝입니다. 먼저 공격해 오는 것을 운 좋게 피할 수는 있겠지만 당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물론 기습공격을 24시간 대비하고 있지만 물밑 기습공격은 첨단장비를 갖춘 미군 함정도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중공격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돼 있습니까.
 
  “정확히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천안함 폭침 이후 다양한 장비를 마련하고 여러 가지 전술도 구사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2010년 11월 북한은 연평도를 대낮에 드러내 놓고 도발했습니다. 수법이 더욱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정상이 아닙니다. 북한 정권 관계자 한명 한명은 정상일지 모르지만 집단이 되면 ‘또라이’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은 또다시 공격할 겁니다. 이번에는 백령도나 휴전선 이남 지역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종북(從北)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등장했습니다. 배경이 뭐라고 봅니까.
 
  “저는 군인이라 정치를 모릅니다. 다만 그런 분이 지역구에 출마했다면 찍지 않았을 겁니다.”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이 최근 방송인터뷰에서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처럼 북한이 도발해도) 맞불을 놓으며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북이 공격해도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 같은데요.
 
  “북이 쏘는 포탄을 맞고 그냥 죽으라는 말이군요. 군인이야 전투에서 죽을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군인이 죽고 나면 우리 국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국가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적의 도발에 대한민국 젊은이 수십 명이 전사하고, 저처럼 다리를 잃거나 손이 잘려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국가안보의 궁극적 주체는 국민 모두
 
2001년 당시 하사였던 곽진성씨(가운데)가 참수리 357호 갑판에서 박경수 상사(왼쪽), 황도현 중사와 함께 찍은 사진. 황 중사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했고, 박 상사는 2010년 천안함 폭침 때 실종돼 시신을 찾지 못했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종북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사람은 군인입니다. 그러나 국가안보의 궁극적 주체는 국민 모두입니다.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북을 알고 나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아무리 경제가 중요해도 북이라는 주적이 존재하는 한 안보가 우선입니다.”
 
  ―종북세력을 어떻게 봅니까.
 
  “한마디로 북과 동일한 세력입니다. 군인의 입장에서 북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죠. 그렇다면 종북세력은 적입니다. 군에서는 종북세력 오염방지 교육을 합니다. 그런 세력이 확산되고 사회를 오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이지요. 우리는 종북세력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해요. 우리 사회에서 종북세력은 정말 위험한 존재입니다. 섬뜩할 정도입니다. 국민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희완 소령은 대한민국 동시대의 일반인과 다르다. 보통의 군인과도 다르다. 그는 20대(代) 젊은 나이에 북의 실체를 경험한 엘리트 군인이다. 6·25 분단 이후 화해·대결이라는 이중적 구조 속에 숨어있는 북의 악마적 본질이 10년 전 한순간에 응축돼 그의 몸을 강타한 것이다. 그의 북한관(觀)은 흔히 말하는 북한 전문가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채운 그의 다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2002년 6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경기 폐막식 참석 차 일본을 들렀다. 이듬해 군통수권자가 된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단 한 차례도 제2연평해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달라지고 기념식도 정부 주관으로 격상됐지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다. 종북세력이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흔들고 있는 요즘, 헌법 수호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을 국민들은 눈여겨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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