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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마지막 풍류객’ 李輔亨 한국고음반연구회장

우리 소리 찾아 팔도유랑 40년

서철인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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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발표한 국악 연구논문 200여 편, 수집한 옛 음반 3000여 점
⊙ 사라져 가는 名人 名唱 찾아 전국 방방곡곡 누벼
⊙ “연로한 분들이 세상을 뜨고 나면 기록해야 할 문화유산의 폭이 줄어드는 것이어서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 100회까지 진행한 판소리 감상회 음반 전 세계 주요 도서관에 소장돼

李輔亨
⊙ 1937년 전북 김제 출생.
⊙ 전주고, 연세대 음대 작곡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 한국국악예술학교 전임강사, 연세대 음대 강사, 서울대 음대 및 대학원 강사, 국립문화재연구소
    상근전문위원, 서울시 문화재위원, 경기도 문화재위원 역임.
⊙ 現 단국대 대학원, 부산대 대학원 강사, 한국퉁소연구회장.
⊙ 저서: <노동과 굿-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 <경서토리 음구조 유형에 관한 연구> 등.
⊙ 상훈: 제16회 방일영국악상.
  일제 강점기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난 소년은 모내기 소리, 김매기 소리, 호미거리 소리 등의 노동요를 들으며 귀를 틔웠다. 신명나는 놀음판 굿판에 넋을 놓기도 했다. 음감을 타고난 소년은 일요일마다 초등학교 교실에 몰래 숨어들어 풍금을 치며 독학으로 악보 읽는 법을 터득했고, 생활 속에서 접하는 온갖 민요들을 악보로 옮기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6·25 동란 중에는 이웃마을로 피란 온 신석정(辛夕汀) 시인 덕분에 시(詩)에 눈을 떴다. 그에게 시는 또 다른 음악이었다. 한동안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집안 어른들은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 될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짓만 골라 한다며 야단이었다.
 
  감수성 예민했던 소년은 음악과 시에 젖어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유난히 조숙했던 이 소년의 이름은 이보형(李輔亨). 어느덧 칠순 중반에 접어든 그는 어린 시절의 소원대로 평생 우리 소리와 문화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살았다. 잦은 전란(戰亂)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맥이 끊기거나 사라져 가는 전통 음악을 복원하고 보존하기 위해 산골 오지에 숨어 있는 명인(名人) 명창(名唱)들을 찾아다니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논문으로 정리하는 일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연구논문이 200여 편, 수집한 옛 음반이 3000여 점에 이른다. 그가 발품과 땀으로 모으고 기록한 이 자료들은 국악을 연구하는 후학(後學)들에게 귀중한 보물이 되고 있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아무런 보상도 명예도 없는 이 일을 그는 40년 동안 해 왔고, 자칫 사장될 뻔했던 우리 소리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일조했다. 그 공로로 2009년 11월,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제16회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했다. 연구자로서는 두 번째 수상자였다.
 
  “신문에 그만큼 나갔으면 됐지, 뭘 더 취재하겠다는 거요. 해야 할 일도 많고, 더 이상 세상에 내놓을 얘기도 없으니 고만합시다.”
 
  전화로 인터뷰 제안을 했을 때 그는 거절부터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남에게 자랑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껏 어디와도 인터뷰한 적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생께서 전국에 숨어 있는 명인 명창을 만난 것처럼 찾아뵙고 우리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더니 겨우 만남을 허락했다.
 
 
  공릉동 자택은 국악의 보물창고
 
   약속 장소는 서울 공릉동 골목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선생의 자택. 한국고음반학회 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집의 위치를 그는 두 번에 걸쳐 꼼꼼히 설명해 주고도 모자랐는지 골목까지 마중 나와 필자를 맞았다. 개량한복에 빵떡모자를 쓰고 손바닥만한 가방을 길게 어깨에 둘러멘 모습이 소년처럼 해맑았다.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오셨네. 재개발 때문에 언제 집을 비워야 할지 몰라 집안이 어수선하니 양해하세요.”
 
  30년 살았다는 집은 반(半) 지하를 낀 3층 구조의 낡은 슬래브 주택이었다. 그는 “2층에 살림집, 1층에 작업실이 있다”며 필자를 1층으로 안내했다.
 
  자물쇠로 채워 놓은 현관문을 열자 고서(古書)에서 나는 특유의 닥종이 냄새가 흘렀다. 100㎡ 규모의 공간은 작은 서고(書庫)였다. 문학, 철학, 음악, 미술 관련 서적이 방마다 빼곡했다.
 
  미로 게임을 하듯 촘촘한 서가(書架)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한쪽에 유성기 음반(SP)과 전축 음반(LP), 카세트 테이프, 수첩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는 방이 나왔다. 일제와 광복 후 1960년대 초까지 출시된 유성기 음반에는 한인호(韓仁浩)·김창환(金昌煥)·김초향(金楚香)·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栢)·임방울(林芳蔚) 등 일반인들도 한두 번은 들어봤음직한 명인 명창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전남 구례 출신의 판소리 명창 송만갑의 음반이 가장 귀하다”고 말했다.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라고 한다.
 
  음반 진열장 안쪽에는 커다란 릴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테이프 감기는 장치가 영사기기만큼이나 컸다. 그는 “민요 채록을 위해 무게가 20kg이나 되는 이 녹음기를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좋아서 하는 일이라 힘든 줄 몰랐다”며 웃었다.
 
  녹음기 옆 서가에는 단행본 사이즈의 노트가 수백 권 쌓여 있었다. 민요 채록 현장에 들고 다닌 메모 수첩이었다. 1970년대에 사용한 수첩 한 권을 들어 펼쳐 보니 전라도 산골 마을에서 만난 어느 소리꾼이 들려준 민요 가사가 적혀 있고, 공연에 필요한 의상과 악기, 춤사위 동작 등이 그림으로 자세히 묘사돼 있었다. 즉석에서 듣고 옮긴 듯 음표도 그려져 있었다.
 
  40년이나 된 수첩 속에서 한바탕 굿판이 벌어질 것처럼 기록이 생생해 깜짝 놀랐다. 음악은 물론 글과 그림, 전각(篆刻) 솜씨까지 전문가 수준인 그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멀티플레이어이고, 옛날 식으로 하면 영락없는 풍류가객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민요 채보
 
이보형씨는 문학, 철학, 음악, 미술 관련 서적들을 두루 탐독했다. 서울 공릉동에 있는 그의 자택은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했다.
  이보형씨가 민요 채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주고 재학 중 한 신문에서 나운영(羅運榮) 교수가 쓴 칼럼을 읽으면서다. 당시 연세대 음대에 재직 중이던 나 교수는 ‘우리 음악의 역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민요를 채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 교수가 예를 들어 언급한 민요들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듣고 자란 노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말이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마을에는 전통문화가 그대로 살아 있었어요. 상투를 틀고 트레머리를 한 노인들이 많았지요. 농사 절기마다 구전되는 노래가 있었고, 어느 집에 잔치가 있는 날이면 청장년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육자배기 같은 소리를 한 곡절씩 주고받곤 했지요.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이라 농한기가 되면 동네 어른들은 이웃마을에 사는 명창들을 불러다 흥을 돋우기도 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소리를 못하면 못난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민요 한 곡조씩 할 줄 알았고, 북이나 장구 등의 악기도 잘 다뤘지요.”
 
  그는 마을에서 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을 열심히 채보(採譜)했고, 그것을 나운영 교수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어린애가 장난삼아 보내는 것으로 알고 관심을 갖지 않았던지 나 교수의 답장은 없었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민요에 관심을 가졌고, 문학, 철학, 미술 서적을 탐독하며 실존주의에 빠져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사춘기를 보냈다.
 
  내성적인 데다 자기 세계가 강한 그를 두고 친구들은 ‘괴짜’라고 불렀다.
 
  1950년대 후반 그가 다니던 전주고에는 피란 삼아 낙향한 유명 시인들이 교편을 잡고 있었다. 시인 서정주(徐廷柱)·신석정, 시조시인 정경택 등이 국어를 가르쳤다. 이 중 시조 명창이기도 했던 정경택 시인은 “서양음악보다 국악을 해야 한다”며 교내에 국악반을 조직했다.
 
  그는 국악반과 문예반을 들락거리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전주고 동창 중에는 지금도 내가 뭘 하고 사는지 모르는 친구들이 많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고교 재학 중이던 1957년 그는 전주 시내 서점에서 우연히 <한국음악연구>라는 책자를 발견했다. 당시 국악학회 회장으로 있던 이혜구(李惠求) 박사가 집필한 이 책을 보고 그는 ‘국악도 학문으로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는 데 놀란 한편,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이혜구 박사의 <한국음악연구>는 궁중음악을 다룬 책이에요. 그걸 보는 순간 민가에 전해져 오는 음악 연구는 황무지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솟더군요. 집안 어른들의 바람과는 점점 다른 길로 가고 있었던 셈이죠.”
 
  고교 졸업 후 그는 나운영 교수가 재직 중인 연세대 음대에 진학했다. 대학에 국악과가 개설되기 전이라 순전히 나운영 교수만 보고 선택한 학교였다.
 
 
  불교 공부하라고 절에 보냈더니 중이 된 격
 
이보형씨가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명인 명창들의 노래와 인터뷰 내용을 채록하기 위해 메고 다닌 릴 녹음기.
  서울 신촌에 하숙방을 구한 그는 상경하자마자 이혜구 박사가 있는 국악학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미군(美軍)들을 위한 국악 공연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또 국악고와 국악예술학교에서 아마추어들을 상대로 하는 국악 강습에도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밤마다 피리며 가야금 연습을 하니 하숙집에서는 그를 ‘괴상한 놈’으로 취급했다.
 
  학부 시절부터 그는 나운영 교수와 함께 전국의 민요를 채집하러 다녔다. “서양음악을 작곡해도 한국적인 작품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던 나 교수는 그가 국악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으니까 은근히 걱정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나운영 선생님은 제가 서양음악을 알고 전통음악에도 관심이 많으니까 우리 음악을 서양음악 문법으로 작곡할 방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체계화해 주기를 바라셨어요. 그런데 제가 국악 현장을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것을 보고 ‘불교 연구하라고 절에 보냈더니 중이 된 격’이라며 혀를 찼습니다. 솔직히 당시의 저는 서양음악에 몰입할 생각이 없었어요. 이미 국악에 깊이 빠져 있었으니까요.”
 
  그는 나운영 교수와 함께 민요 채집을 하는 틈틈이 도시의 뒷골목 시장에서 고인(故人)이 된 명인 명창들의 유성기 음반들을 수집했다. 전축상 마루 밑이나 고물상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잡동사니 속을 뒤져 보면 음반이 한두 개씩 나왔다.
 
  이보형씨가 유성기 음반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부터다. 국악계 어른인 이혜구 박사와 성경린(成慶麟) 박사가 모 방송에 출연해 대담을 나누던 중 “옛 명인 명창들의 노래가 담긴 유성기 음반은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 그것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안타깝다”는 말을 해서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나서였다고 한다. 이씨의 말이다.
 
  “유성기 음반이 그렇게 귀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혜구 박사를 찾아가 뵀어요. 박사께서는 유성기 음반을 6·25 직전까지 500장 모았는데, 피란 갔다 오니 사람들이 모두 훔쳐가 허탈했다고 하시더군요. 그 이후로는 기운이 빠져 모으지 않았대요. KBS와 국악원 자료실에도 문의해 보니 유성기 음반이 없다고 하기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유성기가 전축에 밀려 시장에서 사라져 가고 있던 시기라 서둘러 수집하지 않으면 유성기 음반은 모두 폐품 처리될 상황이었어요.”
 
 
 
유성기 음반 수집

 
그는 우리 소리가 담긴 음반 3000여 점을 수집 보관하고 있다. 그중 유성기 음반을 꺼내 보이고 있다.
  유성기 음반은 재질이 수액(樹液)이어서 질기지만 잘 부서지고 불에 약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전축이 나온 후 쓸모가 없어진 이 음반을 아이들이 원반던지기용 장난감으로 사용하거나 학교에서 공작 재료로 쓰기 위해 불에 굽는 일이 흔했다. 엿장수에게 고물로 판 것들은 옷에 다는 단추로 만들어지거나 등잔용 연료로 재활용됐다.
 
  그는 나운영 교수와 민요 채집을 하러 제주도에 갔다가 일이 끝나면 홀로 통통배를 타고 부산으로, 목포로 갔다. 그러곤 도시의 오래된 시장 골목을 누볐다.
 
  어느 지역을 가든 도회지 시장 골목에는 유성기를 수리하는 노인이 한두 명씩 있게 마련이었다. 과거 유성기상을 했던 이들은 전축에 밀려 고물 취급을 받는 유성기를 수리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 벽지나 도서 지방 사람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자주 드나들어 얼굴이 눈에 익다 보니 노인들은 그가 오면 미리 찾아놓은 음반들을 내놓곤 했다.
 
  그는 수집한 음반들을 들으며 우리 국악 연주나 창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연구하고 논문으로 기록했다. 국악학회의 요청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교장으로 있던 박헌봉(朴憲鳳) 선생과 연이 닿았다. 국악에 조예가 깊었던 박 교장은 그에게 “수집한 음반을 녹음해 달라”고 부탁한 데 이어 국악예술학교 강사로 와 달라고 제의했다. 제도권 안에서 마음껏 연구하라는 배려에서였다. 대학원까지 마친 후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경남 산청 출신의 박헌봉 교장은 규율이 엄격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漢學)을 공부하던 중 소리에 끌려 국악에 몸담게 된 사람이었다. 박 교장은 소리뿐만 아니라 서화(書畵)와 한시(漢詩)에도 능하고, 창도 즐길 줄 아는 풍류가객이었다.
 
  집안의 완고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악인이 된 박 교장은 국악을 사랑하는 지인(知人)들로부터 기금을 모아 1960년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했다. 사립으로 출발한 이 학교는 2008년 국립으로 전환됐다.
 
  1960년대 후반 서울 운니동에 있던 국악예술학교는 명인 명창들의 집합소였다. 판소리 춘향가 명창 김소희(金素姬), 심청가 명창 정권진(鄭權鎭), 수궁가 명창 박초월(朴初月), 거문고 명인 신쾌동(申快童), 해금 산조 명인 지영희(池映熙) 등이 실기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정권진 명창 집에서 기숙
 
현장에서 들은 음악을 악보로 옮긴 수첩. 그의 방에는 이런 취재 수첩이 수백 권이나 됐다.
  박 교장은 그가 이들과 섞이길 원했던지 이론 강사인 그를 실기과에 배치했다. 그의 이야기다.
 
  “나이가 지긋한 명인 명창들 사이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분들은 쉬는 시간이면 강사실에 모여 판소리가 어떻고 명창이 어떻고 주저리주저리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게 저에게는 모두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었지요.”
 
  이들 인간문화재급 강사들은 저녁이면 학교에 모여 밤새도록 소리를 하며 놀았다. 젊은 그도 소리판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자 하루는 정권진 명창이 불러 “자네 신촌에서 하숙한다고 했지. 그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라고 말했다.
 
  당시 정권진 명창의 집은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고, 지금은 인간문화재가 된 판소리 명창 조상현(趙相賢)씨와 성창순(成昌順)씨 등이 전수생으로 있었다.
 
  정권진 명창은 그가 집으로 들어오자 “소리를 연구하려면 북을 배워야 한다”며 판소리 고법(鼓法) 예능 보유자였던 김명환(金命煥) 고수를 소개해 줬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고수에게 정식으로 북을 배웠고, 밤이면 명창들 앞에서 실습을 하곤 했다.
 
  국악예술학교는 1970년 석관동으로 이전했다. 이씨도 학교를 따라 석관동에서 가까운 공릉동으로 이사했다. 몇 년 후 박헌봉 교장이 연로해 학교에서 물러났고, 그 역시 교편을 놓고 문화재연구소 상근 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대학원 때와 마찬가지로 전국을 누비며 민요를 채집하고, 틈틈이 국악 음반과 명인 명창들의 유적이나 행적을 찾아다녔다. 그의 말이다.
 
  “전국을 돌며 민요 하는 사람, 가야금 산조 하는 사람, 풍류객, 풍각쟁이 등을 열심히 만났어요. 연로한 이분들이 세상을 뜨고 나면 기록해야 하는 문화유산의 폭이 줄어드는 것이어서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지요. 연구소 일을 하며 틈틈이 해야 하는 상황이라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소리꾼들을 만나기 위해 그는 팔도 사투리와 방언을 철저히 익혔다. 어느 지역에서 누구를 만나든 친근하게 다가가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고, 제대로 알아들어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전라도 출신인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현지인처럼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전라도에 국악이 발달한 이유

 
전라도 지역의 한 시골마을에서 소리하는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경상도건 전라도건 1970년대 시골 마을은 교통이 안 좋아 아예 버스가 없거나 하루에 두 번만 들어가는 곳이 많았다. 이 때문에 수십 리 길을 걸어다녀야 했고 끼니를 거르는 일도 허다했다. “중간에 주막이라도 하나 있어서 두부에 막걸리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었다”고 한다.
 
  그가 많이 다닌 곳은 아무래도 전라도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소리 문화는 이 지역에서 번성했고, 오랜 세월 명맥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유교적 사회 규범이 강한 곳에서 국악의 명맥이 더 빨리 끊겼어요. 양반들이 많이 살았던 경상도 내륙과 충청도 지역이 대표적인 곳이죠. 유교 문화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는 국악이 비천하고 상스런 음악으로 규정돼 금기시됐습니다. 경북 안동이나 봉화 지역에서는 여자들이 강강술래를 하는 것조차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요.”
 
  경상도에서는 소리를 할 줄 알아도 숨기고 사는 이가 많았다. 반면 유교 문화가 약했던 전라도 지역에서는 양반이건 상민이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이가 대접을 받았다. 남녀 구별 없이 소리 한 자락 하고, 북이나 장구로 장단을 맞출 줄 알아야 잘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에게 북을 가르쳐 준 김명환 고수도 이런 전라도 문화 때문에 탄생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씨의 설명이다.
 
  “김명환 고수는 전남 담양 분인데, 옥과로 장가를 들어 첫날밤 마을 청년들과 소리 겨루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수께서는 소리는 좀 배워 할 줄 알았는데, 북은 쳐 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다고 하더군요. 이에 마을 청년들은 ‘북도 못 치는 바보 신랑’이라고 놀렸고, 자존심이 상한 고수는 그날 이후 ‘이놈의 것 내가 배워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북채를 손에 쥐었다가 아예 그 길로 들어섰다고 하시더군요.”
 
  시조 명창이자 그의 고교 은사인 정경택 시인도 이 같은 전라도 문화가 키운 명인이다. 정씨는 전북 부안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혀 한시에 능했다. 일제 때 발간된 시조 문예지에 서당 훈장과 함께 작품을 공모해 훈장은 입선, 그는 장원을 할 정도의 문재(文才)였다.
 
  정씨는 사랑채가 있는 대가댁에서 자란 까닭에 집안에 풍류객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것을 보아왔다. 이씨의 말이다.
 
  “전라도에서 사랑채는 주인이 과객들을 대접하는 공간이었어요. 시를 짓거나 소리를 하는 사람, 풍수나 관상을 보는 사람 등이 사랑채를 드나들었죠. 한학을 공부하던 선생께서 옆길로 새기 시작한 것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사랑채를 지키게 되면서였다고 하더군요. 그 무렵 장가도 들었는데, 장인이 사위들을 불러 놓고 시조를 한 수씩 지어 보라 했답니다. 당연히 선생의 작품이 발군이었고, 이에 자존심이 상한 손위 동서들이 ‘새신랑은 시조창은 못한다’고 기를 꺾었다고 해요. 분한 마음에 그날부터 사랑채에서 소리하는 과객들에게 시조창법을 배웠고, 너무 깊이 빠져 그만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서른아홉에 늦장가
 
2009년 11월 조선일보사에서 주관하는 제16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 후 부인과 함께한 모습.
  국악 연구에 빠져 사느라 그는 결혼을 느지막하게 했다. 대부분의 청년이 20대 중·후반에 장가를 가던 시절에 그가 서른을 넘기자 집안은 물론 고향 마을이 “총각귀신 하나 나오게 생겼다”며 발칵 뒤집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국악을 연구하며 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주선해 주어 맞선은 여러 번 봤어요. 그런데 정상적인 여자라면 나처럼 생각이 엉뚱한 사람을 배우자로 좋아할 턱이 없지.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싹수가 노랗다는 것을 대번에 아니까 다들 도망가더라고요.”
 
  집안에서도 포기한 듯 뒷짐지고 있는 동안 어느덧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 되었다. 집안에서는 더 이상 방관했다가는 정말로 총각귀신이 되겠다고 여겼던지 하루는 “고향에 내려오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다”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집안 어른들이 “보형이는 정신을 빼놓고 사는 놈이니 여자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어야 한다”며 배필감을 찾아 정해 놓고 내려오면 강제로 맺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부인 김병림(金炳琳)씨다. 그는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안사람은 처음부터 내게 호감을 가졌고, 나 역시 마음에 들었다”며 “우리 안사람이 잘못 걸려든 것”이라고 했다.
 
  결혼 후에도 그는 정신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학교에 매이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다며 이 대학 저 대학에서 들어오는 교수직 제의를 뿌리쳤다. 부인 김씨는 불만 없이 두 아들을 낳아 잘 키웠고, 근검절약해 집도 마련했다. 그는 “정신없이 사느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아내는 신혼시절 생활이 어려워 결혼반지까지 팔았더라”고 했다.
 
  국악 사료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한편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의 후원으로 매주 판소리 감상회도 진행했다. 이 일은 “라디오와 TV의 등장으로 설 자리를 잃은 명인 명창들의 생계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고 한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앙 무대에 진출한 명인 명창들은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국악은 무대를 통해 생음악으로만 감상할 수 있던 시절이라 공연이 많았죠. 그런데 1950년대 말 라디오와 TV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이런 공연들이 흥행이 안되니까 각종 국악 단체들이 해산되고, 국악인들이 설 무대가 사라졌어요. 이 때문에 일류 명창 중에도 생계가 어려운 분이 많았지요. 이런 분들을 굶게 하는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이라 여겨 당시 서울대 국문과 정병욱(鄭炳昱) 교수, 덕성여대 국문과 강한영(姜漢永) 교수를 설득해 이분들과 함께 판소리 감상회를 열었습니다.”
 
  판소리 감상회는 완창 중심으로 진행됐고, 총 100회까지 이어졌다. 그는 무보수 해설을 맡았다. 공연은 <뿌리 깊은 나무> 편집진에 의해 전부 녹음된 후 텍스트로 만들어져 무료로 배포됐다.
 
 
  한국고음반연구회 조직
 
현장에서 가야금 명인의 연주를 녹음하고 기록하고 있는 모습.
  이 감상회 덕분에 대중은 판소리가 거리의 유랑극이 아니라 수준 높은 우리 민족의 공연예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또 수많은 국문학도가 이때 만든 텍스트를 바탕으로 판소리를 연구해 학문화했다. 1982년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제작한 판소리 전집 음반은 전 세계 주요 도서관에 소장돼 한국 전통음악의 우수성을 알리는 표본이 됐다.
 
  판소리 감상회에 문화재 위원으로서의 업무는 물론 각 대학·대학원 강의까지 동분서주하려니 힘이 부쳤다. 이전에 비해 국악 사료 발굴과 수집을 위해 전국을 누비는 일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 1970년대에 발행되던 한 레코드 전문 잡지에 국악 음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의 칼럼을 읽은 클래식 음반 동호회들이 유성기 음반 수집에 나선 것이다.
 
  “그 무렵에는 새로 들어온 유성기 음반이 있나 싶어 수리상에 가면 ‘요새는 젊은 사람들이 오데’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젊은 수집가들 때문에 허탕 치는 일이 많았지만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반들이 이들 클래식 동호회 회원들에 의해 보존되는 것은 좋은데, 개인이 소장하는 까닭에 학술적으로 공유할 기회가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한 번 칼럼을 썼다.
 
  그러자 이들 중 뜻있는 젊은이 7~8명이 그를 찾아와 학회를 만들어 연구도 하고 전시회도 열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고음반연구회가 조직됐다. 단순히 고음반 수집에 취미가 있어 연구회에 가담한 이들은 함께 복각 작업을 하고 전시회를 열면서 전공이나 직업을 아예 국악 분야로 바꾼 이가 많았다.
 
  카이스트에서 화학을 전공하다 국악으로 진로를 바꾼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다 국악 전문가가 된 배연형 동국대 문화학술원 교수, 취미 생활로 음반을 수집하다 국악 공연 전문 기획사 대표가 된 양정환 탑예술기획 대표, 그가 쓴 칼럼에 매료돼 연구회 회원이 된 후 국악음반박물관을 운영하게 된 노재명 관장, 30년 은행 생활을 접고 국악계 일을 하고 있는 정창관 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늙은이가 해야 할 일
 
   이들 외에도 권도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성기련 한국교원대 음악교육과 교수 등 수많은 국악 이론 연구자가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거나 이곳을 거쳐 학자가 되었다.
 
  어느덧 국악계 어른으로 자리한 그는 지난 10여 년 동안 맡았던 각종 국악단체의 위원직과 민속경연대회 심사위원, 방송사 해설위원 자리를 모두 내놓았다. 그런 일은 자신이 아니어도 젊은 국악인들이 잘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젊은 사람들이 못하는 일”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명인 명창들의 유적이나 행적을 찾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생기는 것도 없어서 젊은 사람들이 하기에는 부담스럽습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쉬엄쉬엄 해야지요.”
 
  그는 스스로를 ‘늙은이’라고 표현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는 여전히 음악과 시에 젖어 있는 소년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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