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協會 주최로 1944년 1월에 오하이오주의 애슐랜드에서 열린 韓國承認大會는 하와이를 포함한 114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하여 중계되었다. 이날의 李承晩의 연설은 美下院議事錄에 등재되었다. 李承晩은 대규모의 韓族大會를 열자고 제의했으나, 聯合委員會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聯合委員會가 워싱턴事務所를 설립하자 李承晩은 서둘러 駐美外交委員會의 協贊部를 조직했다.
반년 넘어 空轉하던 臨時議政院은 1944년 4월에 정상화되었다. 中國國民政府와 在美同胞들의 강력한 종용으로 韓國獨立黨과 朝鮮民族革命黨의 협상이 이루어져 改憲을 실시하고 聯立內閣이 출범했다.
臨時政府의 지시로 駐美外交委員部를 개조하기 위한 在美各團體代表會議가 소집되었으나, 李承晩과 同志會의 불참으로 聯合委員會의 일방적인 회의가 되고 말았다. 臨時政府는 李承晩을 위원장으로 하는 9명의 駐美外交委員會 위원들을 직접 선정하여 임명했으나, 聯合委員會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 하와이까지 中繼放送된 애슐랜드 韓國承認大會
1944년 1월21일부터 23일까지 오하이오주의 작은 도시 애슐랜드(Ashland)에서 열린 「한국 승인대회(recognition conference)」는 매우 특이한 행사였다. 애슐랜드의 여러 사회단체들이 한미협회를 초청하여 한국문제를 미국 전역에 선전하고 미국정부에 한국의 승인을 촉구하기 위하여 열린 행사였다. 비용은 애슐랜드 사회단체들이 부담했다. 이 대회는 카이로선언이 발표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는데,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분위기가 한결 고조되었다.
대회가 열리기에 앞서 李承晩은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통하여 「긴급서신」을 보내어 〈우리가 아직 잃은 강토만 못 찾았지 독립은 찾아 놓은 민족이니, 우리의 쾌활한 자유기상과 열렬한 애국심을 드러냅시다〉라면서 동포들의 많은 참석을 촉구하고, 참가자들은 태극기가 있거든 가져오고, 특히 부인들은 한복을 준비해 오기를 미국 친우들이 특청한다고 적었다.1)
오하이오주에는 한미협회에 동정적인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李承晩은 1943년 8월에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열린 오하이오주 재향군인회 총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는데, 총회는 미국무부에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었다. 李承晩은 애슐랜드의 한국승인대회를 준비하면서 오하이오 재향군인회에 미국전역의 200개 이상의 라디오 방송국이 대회를 중계하는 것을 지원해 줄 것을 교섭했다. 오하이오 재향군인회는 이에 대한 미국무부의 반응을 타진했고, 국무부는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회답했다.2)
『李承晩은 自由를 위해 싸우는 十字軍勇士』
한국승인대회가 열린 애슐랜드는 온 시가 축제 분위기였다. 몇 주일째 신문과 사교계가 선전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은 모두 대회참가자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큰 거리에는 「한국인 환영」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양쪽으로는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했다. 대회 사무실은 상업회의소였다. 동부 각 도시와 캘리포니아주와 몬태나주 등 서부지역에서 온 동포 50여 명이 등록했다. 애슐랜드 시장은 이들에게 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영창 문을 잠가 놓았으니까 무슨 행동이든지 자유롭게 하라고 말했다.
대회에는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James H.R. Cromwell) 전 주캐나다대사를 비롯하여 유타주 출신의 킹(William H. King) 전 상원의원, 아메리칸대학교 총장 더글러스(Paul F. Douglass) 박사, 高宗의 특사로 활동했던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피치(George A. Fitch) 부인, 뉴욕의 중국의료원조 미국사무국 부회장 윌리엄(Maurice William) 박사 등 많은 미국인사들이 참석했다. 대회는 교회와 학교와 컨트리클럽 등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오찬 연설회와 만찬 연설회로 진행되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1월22일 오후 2시부터 애슐랜드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라디오 방송 연설회였다. 이 연설회는 하와이를 포함한 전국 114개 라디오 방송국에서 중계되었다. 대회의 명예회장 마이어스(Guy C. Myers) 부인은 개회사를 통하여 한국인들은 〈잊어버린 나라(the forgotten land)〉를 대표한다고 말하고, 애슐랜드 주민들은 그들에 대해 알게 된 최초의 미국인 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지난가을에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열렬한 십자군 용사를 만났다면서 李承晩을 추어올렸다. 킹 전 상원의원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어 신상근(James Shinn) 의사와 李承晩의 연설이 있었다.
李承晩은 먼저 카이로선언 이래로 한국은 이제 〈잊어버린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한국민들이 4,200년의 역사를 통하여 인류문명에 기여한 업적을 아직도 존재하는 세계 최초의 천문대, 미대륙이 발견되기 전에 인쇄된 112편의 백과사전, 구텐베르크의 활자발명보다 앞선 금속활자 발명 등의 보기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이 한국을 〈잊어버린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李承晩은 또한 1882년에 맺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아직도 유효하고 파기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承認要求는 武器援助 받기 위한 것
李承晩이 미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 의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우리 국민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고, 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승인은 여러분의 민주주의의 무기고에서 나오는 항공기와 대포와 탄약의 일부가 지금과 같이 우리에게 거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막대한 인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또한 한국인들과 싸우는 왜적은 미국 군인과 싸우는 왜적의 수를 그만큼 줄인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궁극적인 승리는 미합중국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전쟁이 10년이고 15년이고 계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서방세계의 정치가들이 아시아 인민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무기와 탄약, 폭탄과 항공기가 있다면 여러분의 병사들이 동양에서 실제로 얼마나 덜 싸울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적들을 책임질 것입니다.…』
그것은 李承晩이 진주만 공격 이래로 줄곧 주장해 온 대로,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의 목적이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원조임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여러분은 제가 미국은 위기에서 언제나 그 영혼을 찾는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정화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이 축복받은 땅에서 재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행과 재난은 저 자신의 나라 인민들에게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세계의 도덕적 사상과 정의의 지도자이기를 기대합니다. 한때, 오래 전에, 여러분은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고 우리를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때와 같은 손을 지금, 우리의 손이 여러분에게 뻗쳐져 있을 때에, 부디 거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미국인들의 청교도적인 자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수사였다. 라디오 중계방송은 李承晩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끝냈다. 라디오 중계방송이 끝난 뒤에도 연설회는 계속되었다. 헐버트 박사가 한국 국내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정황을 설명하다가 목이 메이자 수백 명의 청중이 일제히 눈물을 흘렸다.
강연회가 끝나고는 시가행진이 있었다. 미국인들과 한국인 참가자들은 오하이오 재향군인회 군악대의 선도로 성조기와 태극기를 섞어 들고 흔들면서 시가를 행진했다. 행렬 가운데에서 가장 인기를 모은 것은 한국 부인들의 한복차림이었다. 시가행진에 이어 만찬 연설회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 이 대회 명예회장 마이어스 부인의 남편 존 마이어스(John Myers)가 일어나서 『李承晩 박사에게 1,000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또한 지역 유지들은 한미협회 지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공식 행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1월23일은 일요일이었다. 뉴욕에서 온 배민수(裵敏洙) 목사, 시카고에서 온 김광연 목사와 신상근 의사 등은 각 교회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설교와 강연을 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동포들만의 만찬시간을 가졌다.3)
이 승인대회의 연설문들은 오하이오주 출신 하원의원 맥그리거(J. Harry McGregor)에 의하여 2월7일자 미국 하원 의사록에 등재되었다.4)
承認大會 이어 韓族大會 소집 제의
李承晩이 한미협회를 통하여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국으로 중계되는 한국승인대회를 개최한 것은 미국 의회에 한국에 동정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것이나, 그러한 효과는 한족연합위원회를 제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뒤로 동포사회에 고조되는 조국독립에 대한 열기를 배경으로 하여 승인대회와는 별도로 모든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하는 한족대회를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李承晩은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은 한국인들이 하기에 달렸음을 경고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족대회 소집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각 단체 인도자들의 지각과 애국심을 믿나니, 옳은 생각으로 함께 모이면 서로 각오와 양해를 얻어서 각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권리를 회복해야 될 것을 깨달을지니, 일심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옹대해야만 될 것을 다 알게 될지라.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니, 이 목적으로 대회를 주장함이다.…〉
李承晩은 이처럼 대회의 목적이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지시에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대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위원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위원부에서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지위나 권리나 재력 등등에 관계되는 문제는 제출하지 않을 것이요, 다만 한 가지 토의하야 해결하고자 하는 바는 임시정부 아래 우리가 다 합동하야 연합을 다하야 쾌쾌히 선언하기를 우리가 지금은 활동할 준비가 되었노라 할 만치 만들자는 것이다.…〉5)
李承晩은 한족대회를 3월31일에 워싱턴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한족연합위원회를 비롯한 동포 관계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애슐랜드의 승인대회가 끝나자 李承晩은 캘리포니아에서 참석한 李薩音(이살음) 목사와 같이 워싱턴으로 와서 이살음을 李元淳의 집에 묵게 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했다.6) 이살음은 1943년 1월에 李承晩을 옹호하는 중부 캘리포니아 민중대회를 주도했다가 북미국민회 집행위원에서 제명된 뒤에 동지회 북미총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聯合委員會는 韓族大會를 거부해
李承晩은 거듭해서 한족대회의 취지를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승인을 받고 누가 승인을 못 받는 것은 다 우리끼리 사소한 집안 내 일이요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 독립을 찾는 것만 제일인 줄로 각오하므로 즉시 한족대회를 소집하자는 의견을 발표하였나니, 우리는 이에 대하야 아무 의사나 계획이 도무지 없고 다만 한 가지 정한 목적은 모든 단체나 모든 민중이 함께 모여서 무슨 방책으로 든지, 무슨 제도로 든지 다 협동하야 진행하기로 작정만 되면 우리는 불계하고 찬성하야 대단결을 이루려 하는 목적 한 가지뿐이다.〉
李承晩은 이처럼 어떤 복안을 가지고 한족대회를 소집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그러므로 공연한 의혹을 품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개인이나 단체 간에 시비가 자기 원대로 못하는 데서 생기나니, 위원부에서 전에는 일정한 순서를 세워 놓고 그리로 모든 사람이 따라야 된다 하므로 불찬성하는 이들이 분쟁을 품어 시비가 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위원부에서 다 터놓고자 하므로 다 와서 대회석에서 힘껏 토의하야 한 가지 제일 좋은 의사와 방책을 취하야 동일히 나가 보자 하는 터이니,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 어디 있으리요. 그런즉 이에 대하야 공연한 의혹이나 무고히 염려하는 것을 버리고, 한번 모여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독립 찾는 데 같이 나가 보기를 각각 우리의 기회요 우리의 직책으로 알기를 바라노라.〉7)
李承晩은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통하여 여러 차례 한족대회 소집의 취지를 설명하고 나서, 2월25일에 각 단체 앞으로 3월31일에 워싱턴에서 한족대회를 개최한다는 공함을 보내고, 이원순으로 하여금 미주 각 지방의 동포들을 방문하여 대회참석을 독려하게 했다.8)
그러나 이미 李承晩과의 결별 방침을 확고히 하고 있던 한족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의 한족대회 개최제의를 거부했다. 북미국민회의 기관지 「新韓民報」는 장문의 사설을 통하여 李承晩의 제안을 〈자기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파괴하는 것을, 더욱이 카이로선언 이후에 파괴하는 것을 가리워 자기가 저지른 책임을 다른 데 전가시키고저 하는 계획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9) 사설은 李承晩이 카이로선언 이후에 자신이 총재로 있는 대한인동지회를 연합위원회에서 탈퇴시켜 놓고는 카이로선언으로 재미한인단체들의 합동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하는 주장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사설은 또한 李承晩이 한족대회 소집의 목적을 임시정부 아래 활동할 것을 토의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한 데 대해 무슨 근거로 재미한인사회가 임시정부 아래 합동되지 않았다고 하느냐고 따졌다. 로스앤젤레스의 연합위원회 집행부는 호놀룰루에서 오는 대표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서 결정하겠다고 했고, 북미국민회에서는 연합위원회가 대표권을 가졌으므로 따로 대표를 보낼 수 없다고 회답했다.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마침내 李承晩은 한족대회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10) 1943년의 3·1절을 기하여 백악관과 국무부 앞에서 추도시위를 벌이고자 했던 계획이 한족연합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에 이어 李承晩의 의욕적인 계획이 연합위원회의 비협조로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金九의 3·1절 메시지는 葛藤 우려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의 갈등은 가뜩이나 조선민족혁명당과의 알력으로 고심하는 金九의 입장을 여간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2월26일에 주미외교위원부로 보낸 金九의 3·1절 경축전문은 金九의 고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승전을 앞두고 동포사회를 격려하면서 희망과 용기를 일깨우는 메시지가 아니라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일반 형편은 나날이 우리에게 좋게 되어 갑니다. 최근에 동맹국 해군이 달성한 성공은 동맹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의 전쟁 노력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줍니다. 이러한 신성한 기회를 당하여 우리는 동포들을 낙심시키거나 모든 우리 친우들을 실망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결심합시다. 불필요한 분쟁으로 우리의 대업을 훼손하지 맙시다.
동맹국의 승리를 위한 우리의 공헌은 적들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우리는 무조건의 자유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난날의 모든 이견과 편벽을 용서하고 잊읍시다. 새로운 희생적 정신으로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쟁에 새로 협력합시다. 우리의 있는 힘을 다합시다.…
우리는 해내 해외의 동포들의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분이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를 계속해서 정성껏 지원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11)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를 계속해서 지원하라는 金九의 전보는 결국 李承晩에 대한 지지를 애둘러 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金九의 메시지와 관련하여 李承晩은 임시정부의 근거가 견고해지고 활동력이 많아질수록 재미한인은 일치 합동하여 중앙정부와 외교위원부를 한층 더 후원함으로써 대업성취를 속히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2)
이러한 金九의 3·1절 메시지에 대해 한족연합위원회는 크게 불만이었다. 연합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金九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김구 대통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모든 차이와 이의를 잊고 서로 용서하며 정부와 위원부 밑에서…』하였다. 단지 동방예의국의 영수로 도덕에 젖은 말이다. 그러나 잃어버렸던 국가를 회복하고 건설코자 하는 대사를 경영함에 과거의 과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과실이 이미 국가재건 전체 운동에 영향을 미친 연고이다. 과실을 지었으면 반드시 징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차이와 이의를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전체 운동을 위하야 이 차이와 이의를 때려 부시고 한 목적으로 나아가 속히 독립을 획득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13)
趙素昻 등은 美國訪問 추진해
이 무렵 임시정부는 외무부장 趙素昻과 의정원 의원 楊宇朝 등의 미국 방문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두 사람 이외의 일행은 한국독립당 당원인 의사 林義鐸, 항공기 조종사인 崔用德 대령, 그리고 양우조의 부인 崔素貞[崔善嬅]이었다.14) 양우조는 일찍이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서 2년 동안 수학한 것을 포함하여 10년 동안 미국에 체류했었다. 그는 애국부인회 서기로 일하고 있는 부인 최소정과 어린 두 아이들을 대동하고자 했다. 이들의 방미는 1943년의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채택된 제의안에 따른 것이었다.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앞에서 보았듯이 회의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외교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10월12일에는 李貞浩, 金尙德, 孫斗煥, 金元鳳 네 의원이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의 4개국에 상주대표를 파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고, 이틀 뒤인 10월14일에는 정치, 군사, 재정 등의 일체 대외사무는 임시정부의 외교기구를 통해서만 수행하고 각 당파의 개별적 활동은 철저히 방지하자는 결의안이 柳林, 安勳〔趙擎韓〕, 朴建雄 등 여섯 의원에 의하여 제출되었다. 같은 날 양우조, 趙時元, 閔弼鎬 등 다섯 의원이 정부대표단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11월20일에 미국, 영국, 소련에 대표단을 파견하자는 수정안으로 조정되어 채택되었다. 그 밖에 김원봉, 손두환 등 네 의원이 제출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임시정부의 세포조직을 두자는 결의안도 10월21일에 채택되었다.15) 조소앙 일행은 의정원 결의안에서 제시된 목적뿐만 아니라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도 도미의 중요한 임무였을 것이다.
李承晩은 3월27일에 미국무부에 이들 다섯 사람의 입국허가를 신청했다. 미국무부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국무장관 헐(Codell Hull)은 신청서를 접수한 이튿날로 주중국대사 고우스(Clarence E. Gauss)에게 이들의 방문제의에 대해 미육군 당국과 중국 정부의 의견을 비공식적으로 알아보고 고우스 자신의 견해와 건의사항을 보내라고 훈령했다. 그러면서 헐은 이들 한국대표단의 방미계획의 숨은 목적이 1)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승인을 달성하고, 2)미국과 중국에 있는 그들의 조직들이 미국의 무기대여법 원조를 받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하며, 3)얼마쯤 불안해진 것으로 믿어지는 李承晩의 입지를 북돋우어 주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16)
고우스는 4월4일에 국민정부 외교부장 宋子文을 방문하여 조소앙 일행의 방미에 대한 그의 비공식 견해를 물었다. 송자문은 한국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가 없으므로 1주일 뒤에 만찬을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송자문은 중국 정부는 원칙적으로 이들의 방미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17)
송자문과 고우스는 4월11일 저녁에 만났다. 송자문은 이 문제에 대해 蔣介石 총통과 협의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장개석은 조소앙 일행이 미국에 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송자문은 말했다. 장개석은 이들의 방미가 극동상황에 대한 관심과 한국의 독립에 대한 약속을 진전시킬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었다.18) 그리고 미육군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나 이들의 미국 방문에는 이의가 없으며 대사관의 건의에 따르겠다고 말했다.19)
그러나 중국 국민정부의 강력한 종용에 따라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임시의정원이 정상화되고 개혁안이 통과되는 등 급전직하의 상황 속에서 조소앙 일행의 방미계획은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정부의 입국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소앙은 5월15일에 미대사관을 방문하고 임시정부 승인문제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방미하면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장관을 예방할 수 있겠는지 고우스에게 묻고 있다.20)
韓族聯合委員會의 워싱턴事務所 설립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의 길항상태가 더욱 첨예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4월2일부터 1주일 동안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토의된 것은 연합위원회의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하는 문제였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는 연합위원회 활동의 중점을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하는 일로 정하고,21) 1943년 12월27일에는 의사부 위원장 安元奎 명의로 李承晩의 외교실책을 규탄하고 워싱턴사무소 설립 방침을 정식으로 발표했다.22) 그러나 안원규가 지적한 李承晩의 외교실책이란 1942년 3월에 李承晩이 동포단체에 미국 국무부와의 교섭은 끝났다고 했던 말을 가리켜 국교단절을 선언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미국무부의 태도를 옹호하는 듯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워싱턴사무소 설립안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연합위원회 전체위원회는 설립안이 다수결로 강행처리되자 분열되고 말았다. 워싱턴사무소 설립안에 극력 반대하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와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결정에 반발하여 회의 폐막 하루 전인 4월7일에 연합위원회를 탈퇴했다.23) 뒤이어 북미국민회 내부에서도 분란이 일어났다. 집행위원장 宋憲澍(송헌주)를 비롯한 申斗湜, 白一圭, 黃思宣 등 집행위원 여섯 사람이 워싱턴사무소 설치안 결의에 반대하여 사임했다.24) 하와이의 카우아이 단합회도 연합위원회를 탈퇴했다.25)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반대 이유는 민족혁명운동의 제일 급선무는 군사운동이며, 외교는 반드시 정부기관을 통해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6) 유학생총회는 외교위원부 문제를 임시정부와 끝까지 교섭하고 민간외교의 필요조건이 생길 때까지 연기 또는 무효화할 것을 주장했다.27) 북미국민회 집행위원장직을 사퇴한 송헌주는 이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민회를 아예 탈퇴했다. 그는 이번 전체 위원회의 결정은 민중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민간단체에서 외교기관을 설립한 것은 한족연합위원회가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주장했다.28)
이러한 반대에 대해 「新韓民報」는 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대리기관이고 워싱턴사무소는 외교기관이 아닌 연합위원회의 사무기관이며 원칙상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보조기관이라면서 이번 사무소 설치가 임시정부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했다.29) 그러나 그것은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 반발과 일반 동포들의 의구에도 불구하고 한족연합위원회는 워싱턴사무소 설립계획을 강행하여, 마침내 6월10일에 워싱턴사무소를 개소했다.30) 전임자로는 의사부의 金元容, 都鎭鎬, 田耕武와 집행부의 金龍中 네 사람을 선임하고 예산은 3만 달러를 책정했다.31) 그러나 김용중은 이미 1943년11월쯤에 워싱턴에 자신이 설립한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 업무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사양했고, 도진호는 하와이 당국의 조사를 받느라고 하와이를 떠날 수 없었다.32) 그리하여 연합위원회 워싱턴사무소는 위원장 김원용이 한인사회의 연락 업무를 맡고, 선전부장 전경무가 대외교섭 업무를 맡아 업무를 시작했다. 워싱턴에는 또 1943년 12월에 柳一韓이 설립한 한국경제회(Korean Economic Society)가 「한국경제 다이제스트(Korean Economic Digest)」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33)
이렇게 하여 연합국의 승리로 조국의 해방이 확실해진 시점에 워싱턴에는 임시정부의 대표기관인 李承晩의 주미외교위원부뿐만 아니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지원을 받는 중한민중동맹단의 韓吉洙와 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사무소가 미국 정부와 정계인사들을 상대로 경쟁적으로 선전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김용중의 한국사정사와 유일한의 한국경제회는 정부나 정치단체 차원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정을 홍보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에 미국사회에 한국문제를 여론화시키는 데 유익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모든 선전활동이 정부기관으로 일원화되기를 바라는 임시정부나 李承晩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활동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었다.34) 李承晩은 외교위원부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협찬부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2) 改憲과 聯立內閣의 성립
1943년 10월에 개원한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80일가량이나 유회되면서 회기 연장을 거듭한 끝에 해를 넘겼다. 임시정부의 주도권 쟁취를 위한 조선민족혁명당의 도전은 치열했다. 이에 대응하는 金九와 한국독립당의 태도도 단호했다. 그것은 李承晩의 말마따나 잃은 강토만 못 찾았지 독립은 찾아 놓은 상황에서 전개되는 적나라한 권력투쟁이었다.
有記名投票냐 無記名投票냐
임시의정원은 개회 벽두부터 격돌했다. 국무위원 선거방법을 두고 한국독립당은 유기명투표를 주장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은 무기명투표를 주장했다. 유기명투표는 의회주의의 일반적인 원칙에는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임시정부의 위기정부(crisis government)로서의 속성상 불가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실제로 무기명투표로 국무위원들을 선출할 경우 조소앙, 朴贊翊 등 뿐만 아니라 金九마저도 낙선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35) 양쪽이 자신들의 주장을 양보하지 않자 1월3일의 회의에서 의장 洪震이 이 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표결 결과는 공교롭게도 24대 24로 가부동수가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27석이고 민족혁명당은 13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36) 무기명투표안이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安原生 등 한국독립당 소속의 젊은 의원들이 무기명투표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37) 安重根의 조카인 안원생은 한국독립당 당원이면서 7,80명의 회원을 거느린 조선청년회의 총간사를 맡고 있었다. 조선청년회의 부총간사 한지성은 민족혁명당 당원이었다.38) 가부동수일 때에는 의장이 표결권을 행사한다는 임시의정원 규정에 따라 홍진은 무기명투표안에 찬성했다. 한국독립당 소속인 홍진이 무기명투표안에 찬성한 것은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무위원 선거방식은 민족혁명당의 주장대로 무기명투표로 결정되었다.
민족혁명당이 홍진에게 비밀히 주석 자리를 약속했다는 소문이 있던 터였으므로 한국독립당은 의장결정에 불복하고 퇴장하면서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39) 홍진은 의장단은 중립을 지키겠다면서 부의장 崔東旿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했다. 한국독립당은 이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내부 분열로 당세가 더욱 위축되었고, 합작파이자 중앙집행위원장인 조소앙의 입지도 약화되었다.40)
金元鳳은 中國政府에 별도로 50萬元 借款 요청
한국독립당 소속 의원들이 임시의정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조선민족혁명당은 자신들의 주장을 양보하여 1)무기명투표 방식을 취소하고 유기명투표 방식을 채택하고, 2)7대 4의 국무위원 인선 비율을 받아들인다는 두 가지 타협조건을 제시했다.41) 강경한 태도로 협상에 응하지 않던 한국독립당은 타협의 전제조건으로 홍진의 탈당취소 성명을 요구했고, 홍진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다시 1)金九의 주석직 옹호는 굳이 바라지 않으나, 2)의정원선거는 어떤 방식이 되든지 趙琬九, 박찬익, 柳東說, 김원봉, 金奎光[金星淑]은 선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당연히 국무위원이 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고, 민족혁명당은 이 조건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양쪽은 2월5일에 만나서 약정서에 서명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함으로써 임시의정원 회의는 또다시 무기 휴회 상태에 들어갔다.42)
한국독립당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데에는 중국 정부의 자금지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金九가 임시정부의 과거의 분쟁은 대부분 자금분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듯이,43) 중국 정부가 지원한 자금의 분배 문제는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사이의 분쟁의 핵심적인 사안이었다.44) 임시의정원이 정돈상태에 있던 1월 하순에 중국 정부는 차관자금 100만원 가운데에서 이미 지급한 20만원 이외에 그동안 지급을 보류했던 80만원을 임시정부에 지급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민족혁명당에도 통보했다.45)
중국 정부의 차관자금을 수령한 한국독립당은 민족혁명당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자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46) 김원봉은 2월22일에 吳鐵城 비서장에게 민족혁명당의 활동비로 50만원의 차관을 요청했으나, 오철성은 이미 임시정부에 100만원의 차관을 지급했다면서 거절했다.47)
金九는 2월26일에 미주동포에게 보낸 3·1절 기념 메시지에서 새 국무위원 선출이 늦어지고 있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최근 미국 군대의 위대한 해군 승리는 인내와 작량과 협동의 정신을 보이고 있습니다. 각 개인은 반드시 우리의 거룩한 광복운동을 위하야 자기의 최선을 다할 것이올시다. 나 자신이 역시 이 정신을 원칙으로 삼아 나아가나 나의 많은 결함으로 인하여, 또는 어떤 동지들의 이해치 못함으로 인하야 새 내각을 선출하기에 불능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정책을 후원하는 다수의 동지와 또는 중국 친우들의 이해 있는 동정으로 이전 내각이 변경이 없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카이로회의 이후에 중국 정부는 우리를 더욱 후원하고 원조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우리를 격려함이 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혁명활동의 신속 진행을 중강할 것을 결심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견고케 하기를 계속하고 또 후원하기를 진정으로 희망합니다. …〉48)
「韓國臨時政府工作計劃 大綱」 제출
金九는 이처럼 〈어떤 동지들〉, 곧 민족혁명당의 이해부족 때문에 새 국무위원 선거가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金九의 생각은 3월8일에 오철성에게 제출한 「한국임시정부 공작계획 대강」에도 잘 드러나 있다. 金九는 이 문건의 서두에 적은 「임시정부의 선후문제에 관하여」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투항할 때까지 휴회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시의정원이 지난 10월에 개막된 이래 의견의 대립과 혼란으로 인하여 연기를 거듭하여 올해 1월까지 온갖 위법, 배신, 사기, 기만 등 사리에 어긋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여 마침내 수습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처럼 계속 시일을 미루어 한 가지 일도 결행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잠시 동안 폐원하여 쓸데없는 투쟁을 멈추고 실제공작에 착수하여,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스스로 막힌 가슴을 풀고 감정을 융통시켜 서로 양해할 때에 이르러 새 국무위원을 선출하여 각자 져야 할 책임을 나누면, 곧 과거의 여러 문제가 깨끗이 사라질 것이며 허다한 중요문제도 스스로 잘 풀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한국독립당 전체 의원의 결정을 거쳐 잠시 폐원하고 새로 선출한 국무위원이 직무를 볼 때까지 원임 국무위원(각당 각파 포함)이 직무를 계속 집행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임시의정원의 개폐막된 경과입니다. 최근의 조선민족혁명당의 그릇된 사실은 법리와 인정의 적합 여부를 돌아보지 않고 마침내 해괴한 문자를 공공연히 발표한 것입니다. 내 집의 냄새를 전 세계에 뿌려 안으로 국민들의 심리를 현혹케 하고 적들에게 선전자료를 공급하며, 밖으로 여러 우방의 시청을 어지럽히고 스스로 깎아내려 저열하게 하여 맹방의 신뢰와 원조를 막아 버리게 하니, 천부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응당 이렇게 나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 독립당만이 시종 이를 진정시켜 저 난폭한 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로서 응해 주어 그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49)
金九가 이 「공작계획대강」에서 제시한 사업은 1)초무공작을 위한 총판사처[사무소] 설치, 2)훈련 공작, 3)국내 조직 문제, 4)동맹국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의 네 가지였다. 위의 네 가지 사업을 위한 경비로는 초무공작 총판사처 운영 경비로 5,500만원, 동맹국에 파견할 대표 여비로 1,500만원 이상, 합계 7,000만원을 계상했다.50)
金九는 이렇듯 민족혁명당을 배제하고 한국독립당만으로 임시정부의 당면한 사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亡命政府를 다시 만드는 일을 防止해야』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립이 극한상황으로 치닫자 중국 국민정부에서 중재에 나섰다. 蔣介石은 何應欽과 朱家?와 오철성에게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51) 이 지시에 따라 4월13일에 1)한국문제에 대하여 구체적 방안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미국과 상의하여 진행하고, 2)한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내부의 단결을 촉구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제공하며, 3)원조경비에 관해서는 차관 명의로 지급하고 실제 용도를 조사하며, 4)한국광복군에 대해서는 역량을 강화하여 후방공작을 발전시키도록 한다는 「한국문제처리원칙」을 마련했다. 한국문제를 미국과 상의하여 진행한다고 한 1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시키기로 선포한 카이로회의 이후 한국의 지위는 이미 보증을 획득했다. 다만 영국과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같지 않으므로, 표현하는 태도 역시 각기 다르다. 중국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로서 밀접한 관계가 있고 안위를 같이 한다.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마땅히 원조를 제공하여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고, 외교부는 총재가 지시한 방침에 따라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아울러 수시로 미국과의 밀접한 연계를 취하여 진행을 상의해야 한다.〉
「한국문제처리원칙」에서 주목되는 점은 임시정부의 내부갈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체의 원조를 임시정부로 집중시킨다고 한 대목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분규에 대해서는 압력을 행사하여 단결과 합작의 길을 열어 주고 임시정부의 지위를 안정시켜서, 그들이 현재 있는 임시정부 이외의 다른 망명정부를 다시 만드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앞으로 일체의 원조는 임시정부를 대상으로 하며, 두 당에 대한 태도에서 독립당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도 무방하며, 민족혁명당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 밖의 두 개의 작은 당(무정부주의자 및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승인하지 않는다. 한국임시정부가 우리에게 고문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면 허가해 주어도 괜찮으며, 중앙당부가 본 당 간부 인원을 선발 파견하여 그 임무를 담당케 함으로써 임시정부가 광복운동 공작을 전개하는 것을 협조한다.〉52)
이러한 방침에 따라 중국 국민당의 한국문제 담당 실무자들은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청취하고 양자의 합작을 권고했다. 거듭되는 합작권고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립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마침내 중국 국민당은 최후의 수단으로 경제적 압력을 가하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1944년 2월까지도, 비록 임시정부를 통해서 지급하기는 했으나, 각 당파별로 액수를 지정해서 보조금을 지급해 왔으나, 그것이 한국 각 당파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1944년 3월부터 임시정부에만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다른 당파나 단체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金九에게도 최단시일 안에 합작정부를 만들지 않으면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53)
韓族聯合委員會도 正常化 촉구해 와
재미한인동포들도 하루속히 임시정부를 정상화시킬 것을 촉구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는 집행부 위원장 韓始大와 각 회원 단체 연명으로 4월 5일에 金九를 비롯하여 의정원 의장 홍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조소앙,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김규식에게 능률 있는 내각의 조직과 독립적인 한국인 전투부대의 편성을 요구하는 전보를 쳤다.54)
〈이곳에서 개회 중에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는 서반구에 있는 전체 한인들로부터 특별자금을 모집하여 중국에 있는 한인의 군사활동을 최고 한도로 후원하기를 결정하였습니다. 본 회의가 충심으로 한국 임시정부에 기대하는 바는 중국에 있는 우리 군대를 독립전투부대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과 중경에 있는 우리 지도자들은 임시정부 및 의정원과 협동하여 독립사업에 좀더 효과 있게 공헌하도록 내각을 강화하기를 요구합니다. 원동에서 한인의 정치적 지위와 이상의 요구한 사건에 대하야 분명한 회답을 속히 주시기 바랍니다.〉55)
중국 정부의 압력에 이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이러한 전보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태도를 바꾸어 민족혁명당과 협상에 나섰다. 임시정부 개편문제에 대해 연일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두 당은 4월11일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해 비밀협정을 맺었다.
(1)제35회 의회는 폐회하고, 폐회 후 곧바로 임시의회를 소집한다.
(2)약헌개정안 가운데 정부조직에 관해서는 국무위원을 14인으로 늘리고, 따로 주석과 부주석 각 1인을 둔다. 각부 부장은 주석이 국무회의에 천거하여 찬성 통과 후에 임명한다.
(3)국무위원 인원수의 비례는 한국독립당 8석, 민족혁명당 4석, 기타 두 소당 각 1석으로 하고, 주석은 한국독립당에서, 부주석은 민족혁명당에서 내도록 한다.
이때에 김원봉은 군무부장과 재무부장을 민족혁명당에서 맡기를 희망했으나,56) 그것은 과욕이었다.
양당의 비밀협정에 따라 4월15일에 제35회 임시의정원회의를 폐회하고 4월20일 오전 9시에 41명의 의원이 참석하여 제36회 임시의회가 개원되었다. 개원식에 이어 바로 제1차 회의를 시작하여 헌법개정안 심의를 시작했다. 헌법 수개 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헌법개정안은 1943년 12월13일에 본회의에 회부되어 있었다. 개헌안은 약간의 조문 수정을 거쳐 이튿날 회의에서 출석 의원 37명 가운데 35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57)
主席의 權限은 弱化돼
전문과 7장 62조로 구성된 이 헌장은 실질적으로 제정이나 다름없었던 1919년의 제1차 개헌 이래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개정된 헌법으로서, 임시정부의 6개 헌법전 가운데에서 가장 방대하고 체제를 갖춘 헌법전이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1년 넘어 논란과 수정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논란과 수정 때문에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헌법은 그 제정 및 개정권자들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문제점은 곧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정치적 대립이 얼마나 첨예했는가를 말해 준다. 제1차 개정 이래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던, 근대헌법의 두 유형인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형태의 권력구조는 이 헌장에서도 기본적으로 변경이 없었다.
개정된 임시헌장의 특징으로는 우선 임시의정원 규정에 종래의 약헌에는 없던 조항을 신설한 점이다. 그 하나는 임기규정이 없던 임시의정원 의원의 임기를, 비록 연속 선출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일단 3년으로 규정한 것이다(제12조). 또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의결정족수 규정에서 출석의원의 과반수로 의안을 결정한다고 규정하면서도, 일체의 법안, 조세와 세율, 예산과 결산, 국무위원회 주석과 부주석 및 국무위원 선거, 조약체결과 선전 및 강화의 동의 등은 3분의 2의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규정한 점이다(제23조). 그것은 실제로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합의 없이는 임시의정원의 어떠한 의사진행도 불가능하게 한 규정으로서, 두 당의 상호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 준다.
둘째로, 임시의정원과 행정부의 관계 규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주석과 부주석과 국무위원에 대하여 임시의정원이 탄핵권과 불신임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게 한 점이다(제18조). 탄핵권은 대통령중심제 헌법에, 불신임권은 내각책임제 헌법에 해당되는 사항인데, 두 가지 권한을 다 행사할 수 있게 하여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면직하고 불신임을 당했을 때에는 스스로 사직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탄핵안 규정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1919년의 개정헌법에서는 〈탄핵 또는 심판한다〉고 규정했다가(제21조 14항), 1925년 헌법에서는 〈심판 처벌〉하는 것으로(제26조 4항), 1927년 약헌에서는 〈심판 또는 면직〉하는 것으로(제19조), 그리고 1940년 약헌에서는 〈심판하여 면직하게〉 하는 것으로(제14조) 규정했다.
셋째로, 행정부의 권한이 주석과 국무위원회에 애매하게 양분되고 있는 점이다(제30조, 제32조). 그것은 1940년 약헌에 비하여 주석의 권한이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주석의 권한에 대해서는 개헌안 심의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다. 그리하여 개정초안과 수정안에서도 주석의 직권이 크게 바뀌었다. 개정 초안에서는 주석의 직권을 1)국무위원회를 대표함, 2)국무위원회를 소집하며 그 주석이 됨, 3)국서, 법률, 명령, 문무관 임면에 서명함이라는 세 가지로 축소하고, 주석의 권한이었던 국군통수권과 사면권을 국무위원회에 귀속시켰다. 개정안 설명서는 주석의 권한을 축소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전에 통수부(대본영), 참모본부, 회계검사원 등을 대통령에게 직속케 하였던 것이 대통령제가 폐지된 후에는 그 조직계통이 미분명하야 혹은 현 제도의 주석에게 예속될 것 같이도 추단하나, 현 제도의 주석은 독특한 조직계통을 가지지 않고 국무위원회의 수반이 될 뿐인 이상에는 일체의 조직계통을 국무위원회에 귀속시킨 것이며, 임시의정원에 대하야는 국무위원회에서 분담된 각 부장이 책임을 직접 질 것이 아니라 국무위원회, 즉 그 구성원 전체가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임.〉58)
國軍統帥權은 主席과 國務委員會에 兩分
국군통수권에 대해서는 개헌과정에서 그냥 주석의 직권에 속하게 하고 오직 국무위원회의 의결로 국군을 總監한다고 개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류되고, 원래 주석 직권에 속하게 했던 국군총감과 사면권을 국무위원회에서 관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국무위원회에 귀속시켰던 것이다.59)
그러나 〈국군을 총감함〉이라는 국무위원회의 권한규정은 확정안에서 다시 국무위원회는 〈군무에 관한 사항을 의결〉하고 주석은 〈국군을 통감함〉이라고 바뀌어, 국군통수권이 주석과 국무위원회에 양분되는 애매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넷째로, 행정부를 국무위원회와 행정연락회의의 이중구조로 개편한 점이다.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는 국무위원들로 구성되는 국무위원회는 復國과 건국의 방책, 예산결산, 선전 및 강화, 군무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정책결정 기관이고, 국무위원회가 결정한 정책은 주석의 추천으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면하는 각부 부장들이 집행하되, 행정 각부서 사무의 연락과 통제를 위하여 주석 이 주재하는 연석회의를 열도록 한 것이다(제30조, 제40조). 행정부의 이러한 이중구조는 각 정파가 집결된 임시정부 후기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서, 국무위원회가 독립운동의 원로들과 각 정당의 대표자들로 안배 구성되는 데 비해, 행정연락회의는 현실적인 정책집행능력본위와 金九 직계의 인물들로 구성하려는 데 있었다.
다섯째로, 그동안 막연히 써오던 「광복운동자」의 개념을 명문으로 규정한 것이다. 광복운동자에 대한 명문화 작업은 개헌과정에서 가장 활기를 띤 논제의 하나였다. 처음 기초의원에 의하여 제안된 개정안에서는 〈광복운동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직접 간접으로 그 운동에 종사하는 자로 함〉(제7조)이라고 막연하게 표현되었으나, 재수정안을 거쳐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광복운동자는 조국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인하고 간단없이 노력하거나 또는 간접이라도 광복사업에 정력 혹 물력의 실천공헌이 있는 자로 함. 단, 광복운동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있을 시에는 광복운동자의 자격을 상실함〉(제8조).
그것은 국권회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독립운동자들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다고 선언한 데 이어(제4조), 모든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광복운동자에게만 한정되었고(제10조, 제11조), 주석, 부주석 및 국무위원은 위의 규정에 해당되는 자로서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했다(제34조).
『聯立政府 성립은 獨立運動史上의 新紀元…』
개정된 임시헌장을 공포하고 이틀 뒤인 4월24일의 제3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주석과 부주석과 국무위원 선거를 실시했다. 재석의원 34명 가운데 각각 31표로 주석에 金九, 부주석에 김규식이 당선되고,60) 국무위원으로는 李始榮, 曺成煥, 黃學秀, 조완구, 車利錫, 박찬익, 조소앙, 조경한(이상 한국독립당), 張建相, 成周寔, 김원봉, 金朋濬(이상 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 柳林(조선혁명자연맹)이 선출되었다.61) 이로써 임시정부는 반년에 걸친 분쟁이 종결되고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이었다. 임시의정원은 4월 24일에 「제36회 임시의회선언」을 발표하여 〈전 민족 통일전선의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 〈이번 의회의 최대 성공인 동시에 우리 민족독립운동사상의 신기원이 될 만한 중대한 의의가 있는 사실〉이라고 평가하고, 국내외 동포의 지지를 호소했다.62) 또한 같은 날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네 단체 연명으로 「한국 각 혁명당 옹호 제36차 회의 선언」을 발표하여, 1)개정된 임시헌장을 전 민족 행동의 최고 준칙으로 준수하고, 2)金九 주석을 비롯하여 부주석과 전체 국무위원을 민족 최고의 영도자로 솔선하여 성심으로 옹호 지지하고, 3)임시정부 기치 아래 전 민족을 총동원하여 일본 제국주의자와 최후의 대결전을 과감히 전개하고, 4)최단기일 안에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유력한 국제원조를 취득하기 위해서 적극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63)
임시의정원은 이어 4월26일에 金九를 비롯한 신임 국무위원의 선서를 받고 폐회했다. 이튿날 金九가 「新韓民報」에 보낸 다음과 같은 전문은 개헌파동으로 인한 그의 고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나는 과거 1년 동안 무한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재미한인의 정치적 착잡 전과 후에 이곳의 정세는 비상히 혼란을 시작하야 거의 정점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정원 회의는 7개월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풍설과 비평과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포들과 동지들의 애국심과 그 충성을 굳게 믿으며, 참음과 침묵으로 사실이 증명될 것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충성스러운 후원과 의심 없는 통일을 위하야 협동하는 것이 우리 독립운동기념사에 한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한국 임시정부 밑에서 국가적 통일과 민주주의적 협동이 강화하야질 것이외다. 그러므로 한국 임시정부 사업은 이로부터 속력으로 진행될 것이외다. 우리 한인만이 이를 기뻐할 뿐 아니라 우리의 연합국 친우들도 우리에게 동정의 후원을 줄 것이외다. 마지막으로 내가 진정으로 재미한인에게 바라는 것은 재미한인은 재미한인의 모든 착잡과 오해를 청산하는 것인 동시에 나도 역시 나의 최선을 다하야 성취할 바에 노력할 것이외다.〉64)
財務部長은 韓國獨立黨이, 軍務部長은 民族革命黨이
5월8일에 소집된 국무위원회는 金九의 추천으로 국무위원 조소앙을 외무부장 겸임으로, 국무위원 김원봉을 군무부장 겸임으로, 국무위원 조완구를 재무부장 겸임으로, 申翼熙를 내무부장으로, 최동오를 법무부장으로, 嚴恒燮을 선전부장으로, 崔錫淳을 문화부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金九의 추천으로 국무위원 車利錫을 국무위원회 비서처 비서장으로 임명했다.65)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최석순이 군무부장과 문화부장에 임명된 것은 민족혁명당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였다. 자금을 관장할 재무부장 자리는 한국독립당이 양보하지 않았다.
제5차 개헌을 통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은 부주석과 국무위원 4석, 행정부 부장 2석의 자리를 확보했다. 임시정부 성립 이래 처음으로 설치된 부수반제는 정부운영상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석인 김규식을 위해 마련된 정치적 타협의 상징적 직위였다. 또한 김원봉은 국무위원으로 군무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군무부장의 지위도 〈직위만 주고 실권은 거세한다〉는 한국독립당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허용된 것이었다.66) 한국독립당은 임시약헌을 개정하면서 군사업무에 관한 권한을 국무위원회에 부여함으로써, 군무부장의 권한을 약화시킨 뒤에 김원봉을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67)
中國政府는 잇달아 祝賀會 열어
임시정부가 연립내각을 구성하자 내외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임시정부가 빨리 정상화되기를 염원하던 재미동포들은 임시정부의 통합내각 출범을 크게 환영했다. 재미동포들은 다투어 임시정부에 축전을 보내고 각지에서 경축대회를 열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제3차 전체위원회에서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1944년을 제1기로 정하고 10만 달러 이상을 모집하며 군사운동금은 다만 일체 군사운동에만 쓰기로 함〉이라고 결의한 데 이어, 4월29일의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일인당 평균 50달러 이상의 군사운동금을 모금하기로 결의했다.68)
중국 국민정부의 입법원장이며 중한문화협회 이사장인 孫科, 중국 국민당 비서장 오철성, 전 조직부장 주가화, 선전부장 梁寒操, 해외부장 張道藩 등 중국 국민당의 주요 인사들도 잇달아 축전을 보내왔다. 주가화는 5월13일에 임시정부의 주석과 부주석 및 국무위원 전원과 각 부장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만찬회를 열었다.69) 5월15일에는 임시정부 강당에서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각부 부장의 취임 선서식이 열렸다.
중국 정부 주요 인사들의 축하회는 계속되었다. 중한문화협회는 5월28일에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한 다화회를 열었고, 6월7일에는 중국공산당 대표 董必武와 林祖涵이 중한문화협회에서 주석과 부주석과 국무위원 및 각부 부장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6월17일에는 오철성, 陳果夫, 양한조, 장도번, 段錫朋 등이 중국 국민당을 대표하여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앙당부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날 金九는 긴 답사를 통하여 한중 관계의 역사와 합작의 의의를 강조했다.70)
(3) 駐美外交委員部를 駐美外交委員會로
우여곡절 끝에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의 하나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재미독립운동자들의 분규였다. 그리하여 5월15일의 국무회의에서 주석 및 부주석과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군무부의 부장들로 미주문제해결방침위원회를 구성하여 선후 방침을 정하도록 위임했다.71) 그러나 위원회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했다. 임시정부의 연립내각 구성이 발표되자 축하와 함께 임시정부를 성의있게 후원하겠다고 타전했던 한족연합위원회는 새 내각도 외교위원부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外交委員部의 協贊部를 새로 組織
한편 李承晩은 연합위원회가 워싱턴 사무소 설치를 강행하자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외교위원부의 협찬부를 조직했다.72) 李承晩이 5월24일에 내무, 교육, 경제, 정치의 4개 위원회에 걸친 25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는 것을 보면,73) 비록 전원이 사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수락한 것은 아니더라도, 여러 지역에 동지회 회원 말고도 많은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월31일에 워싱턴에서 한족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던 것도 이러한 인맥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을 것이다. 협찬부는 6월4일에 뉴욕, 뉴저지, 워싱턴, 디트로이트, 시카고에서 온 22명이 외교위원부 사무실에 모여 결성했다. 이 참가자들 전원을 포함한 27명이 내무부, 교육부, 경제부, 정치부, 전무부의 5부에 부장과 서기, 그리고 협찬원으로 선정되었다. 위의 다섯 부 이외에 재정부와 그 밖의 몇 부를 더 조직하고, 사업진전에 따라서 서부지역과 하와이 군도에 있는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협찬부위원을 추가로 선정하기로 했다.
협찬부의 사업목적은 (1)일반 한인들의 사상과 운동을 통일적으로 발전시켜서 임시정부에 성충을 다하고 전후의 한국 정부에 봉사할 지도인격을 양성하며, (2)전후 한국의 산업발전과 노동, 상업, 신용제도의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준비하며, (3)연합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한국의 입장과 목표를 널리 알리며, (4)한국의 모든 자원을 항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직하며, (5)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었다.74)
협찬부는 6월22일에는 협찬부의 「목적과 직무」를 한결 구체적으로 천명했는데, 그것은 독립적인 정치단체의 정강정책과 같은 느낌을 주는 내용이었다. 경제부와 정치부의 「목적」과 「직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제부의 「목적」은 노동안정과 재원발달을 위하여 미국의 회사 및 은행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고, 「직무」는 전후 한국의 경제, 농업, 은행, 신용, 운수, 통신에 대한 연구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75) 정치부의 「목적」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광복군에 무기대여법 원조를 해줄 것을 미국 정부에 계속 교섭하는 것이었고, 「직무」는 다른 부들과 협동하여 대한공화국헌법자료를 수집하고 개정하여 한국 국회에 제출하게 하며, 임시정부 시대에서 정식 정부로 전환되는 동안에 필요한 특별제도를 편집하며, 미국무부와 연락을 취하며, 수시로 관계 연합국, 특히 영국, 미국, 중국, 소련 4개국과 의견을 교환하며, 망명국 정부들의 외교정책과 운동방략을 알도록 하며, 무기대여법 원조계획에 한국이 참가하여 군사, 경제회복, 교육 등에 대하여 연구하며 신속히 실시하도록 할 것과 그밖에 모든 설비와 재력을 다하여 한인이 참전하도록 힘쓴다는 것이었다.76)
『外交委員部를 臨時政府와 같은 地位에 끌어올리고…』
李承晩이 협찬부를 조직하자 「新韓民報」는 협찬부의 조직은 한국 임시정부와 방불한 조직이라고 말하고, 〈사실상 李박사는 지금 한국외교위원부장인 동시에 스스로 새로 정치기관을 준비하야 영수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고는 李承晩이 임시정부의 승낙을 얻어서 이 새 정치기관을 조직했는지 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와 관계를 끊은 독립기관인지 묻고,77) 李承晩이 외교위원부의 협찬부를 조직하는 동기가 스스로 현재의 한국임시정부를 몽상하며 나아가 한국의 헌법적 정부를 몽상하는 것이 아닌가고 힐난했다.78)
연합위원회 집행부는 6월11일의 회의에서 외교위원부 협찬부의 조직이 정부제도와 유사하고, 李承晩이 동부 학생들의 사환[仕宦: 벼슬살이]욕을 자극하여 자파세력을 확장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고, 임시정부에 대하여 외교위원부의 개조의 필요성과 함께 재정통일을 한족연합위원회에 일임할 것과 재미한인의 대표권을 연합위원회에 부여할 것을 품청하기로 결의했다.79)
李承晩은 연합위원회의 이러한 의혹과 비판을 일축했다. 전후계획을 준비해서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시기에〉라는 말을 강대국들 마음대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우리끼리 능히 우리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자는 취지에서 구상된 것이라고 말하고, 〈어느때든지, 어디서든지, 누가 무슨 명목으로 하든지,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를 도와서 회를 조직할진대, 그 속에 다른 의미가 있기 전에는 임시정부나 외교위원부에서 막을 이치가 없다〉80)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이 외교위원부 협찬부를 조직한 사실을 내세워 李承晩과 金九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金乎 후임의 1944년도 집행부 위원장 韓時大는 6월13일, 14일, 16일, 19일에 잇달아 金九에게 전보와 편지를 보내어, 李承晩과 연합위원회의 관계는 1944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단절되었고 李承晩은 개인적인〈내각〉을 조직하여 스스로 한국정부의 영수가 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외교위원부 문제에 대해 단안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81)
金九는 주미외교위원부의 처리문제가 여간 고민스럽지 않았다. 그는 6월24일에 嚴恒燮을 시켜 「新韓民報」 앞으로 새 국무위원회가 재미한인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든 정보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타전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따름이었다.82)
李承晩은 韓國獨立黨에 入黨
李承晩에 대한 金九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李承晩을 임시정부의 전권대표로 미국 정부에 통보했고,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로 여러 가지 대미교섭을 李承晩에게 의존해 왔던 金九의 입장에서는 예상되는 강화회의 등을 앞두고 그를 배제하는 조치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李承晩은 워싱턴의 외교무대에서 한국대표로 인식되고 있었다. 李承晩 내외는 6월1일에 魏道明 중국대사 관저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초대되기도 했다.83) 올리버가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기고한 글에서 이제 한국이 태평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4월에 출범한 연립정부는 4개 정당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정당인 한국독립당은 한국 임시정부의 전직 대통령인 李承晩과 현직 대통령인 金九가 이끌고 있다고 적은 것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84) 올리버의 글에 대해 연합위원회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김원용은 올리버의 글이 보도된 이튿날로 올리버에게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고, 전경무는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와 하와이의 의사부로 그 사실을 알렸다.85) 李承晩은 金九에게 자신도 한국독립당에 입당할 것을 신청하여 12월에 정식 당원이 되었다.86) 李承晩은 당원 의연금 송부성적이 누구보다도 좋았다고 한다.87)
워싱턴 機關들의 統合 추진
한편 李承晩은 연합위원회의 워싱턴사무소를 외교위원부로 통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협찬회의 내무부장 黃思溶을 워싱턴으로 불러 작업을 하게 했다. 7월4일에 외교위원부의 이원순의 집에서 李承晩, 이원순, 황창하, 황사용과 연합위원회의 김원용, 전경무 그리고 한국사정사의 김용중이 모였다. 모임에 앞서 김원용과 전경무는 통합의 조건으로 1)모든 회합에는 李承晩, 전경무, 김원용과 韓吉洙가 참가하고, 2)李承晩은 최근에 조직한 정치기관인 협찬부를 해체한 다음 이를 공표하고, 3)연합위원회 주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하는 민중대회에 李承晩이 참석하여 외교위원부와 연합위원회의 지난날의 관계와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설명하고, 4)통합계획을 위한 임시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의 연구 분석을 위해 李承晩은 외교위원부의 서류를 넘겨주고, 5)외교위원부의 재조직을 위한 방식과 인선의 대강을 작성하여 임시정부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을 것을 제시했다.88) 그러나 이튿날 전경무가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와 하와이의 의사부에 李承晩이 통합을 제의한 것은 임시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는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을 따름이라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89) 위와 같은 조건도 李承晩의 통합제의를 아예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회담은 7월25일까지 몇 차례 계속되었으나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이 자기네의 요구조건을 회피하고, 연합위원회를 외교위원부 권능 아래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90) 실제로 李承晩은 김원용과 전경무에게 외교위원부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작정하는 대로 알려 달라고 했다.91) 그러나 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을 재미동포사회에서 배제할 결의를 굳히고 임시정부에 대해 거듭 결단을 촉구했다.
金九는 7월18일에 다시 엄항섭을 통하여 「新韓民報」 앞으로 전보를 쳤다.
〈서로 다른 의견을 표명한 재미동포들의 많은 제의를 받았습니다. 국무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곧 내릴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몇몇 재미친우들에게 보내는 회람장에 적었습니다. 그것은 李承晩 박사를 통하여 전달될 것입니다.〉92)
이러한 金九의 전보를 받은 연합위원회는 격분했다. 한시대는 7월21일에 이전보다 한결 단호한 입장을 金九에게 타전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24일에는 다시 연합위원회 소속 10개 단체연명으로 金九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정돈상태로 계속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우리는 강력하고 신뢰받는 우리 대표부를 워싱턴에 정식으로 설립했습니다. 임시정부는 한족연합위원회를 택하시든지 李承晩을 택하시든지 빨리 결정하시어 바로 회답하시기 바랍니다.〉93)
같은 날 한시대는 조선민족혁명단의 김규식과 김원봉 및 한국독립당에도 외교위원장의 임무 수행에 실패한 李承晩을 배제하고 새 위원장을 선출할 권리를 연합위원회에 맡겨 달라고 말하면서, 金九에게 보낸 것과 같은 내용의 요구사항을 타전했다.94)
國務會議에서 「美洲問題 解決方案」 결의
마침내 임시정부는 8월3일의 국무회의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교위원회로 개편하기로 하고 「주미외교위원회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편의 골자는 주미외교위원회는 7인 내지 15인의 위원으로 조직하되, 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비서주임 1인과 비서 약간인을 두고(제2항), 위원장, 부위원장 및 위원은 주석의 천거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면하며(제3항), 일체의 주요사항은 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집행하고(제5항), 위원회의 경비는 예산서를 임시정부 외무부에 제출하여 인준을 받도록(제7항) 한 것이었다. 또 이날의 국무회의는 이와 관련된 「미주문제 해결방안」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미주 각지의 한인단체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개편하라는 것이었다. 「해결방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재미한인연합위원회 주최로 각 주요단체와 협상하여 먼저 주비회를 조직하고,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각지 한인단체의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할 것.
(2)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방식은 국무위원회에서 개정한 주미외교위원회의 신규정에 의하여 하되, 신규정 제3항 인원선거에 관하여는 이번에 한하여 미주에서 소집하는 단체대표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인수를 7인 내지 15인 이내로 自定하고, 직접 선거한 뒤에 정부에 보고하여 추인을 요구할 것.
(3)한인단체 대표회의의 조직은 연합위원회의 현재 있는 구성단체 및 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한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동 하와이총지부, 학생회 및 그밖의 일체 한인단체의 참가를 요하되, 적어도 재미 각 단체수 10분의 7 이상의 참가를 요할 것.
(4)현 주미외교위원부와 연합위원회에서 파견한 선전기구는 위원부 개조가 완성될 때까지 각기 공작을 정지하고 개조가 완성되는 즉시로 폐지할 것.95)
임시정부는 8월12일에 국무위원회의 결정을 「新韓民報」에 통보하고,96) 李承晩에게는 별도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李承晩 선생.
본 국무위원회는 재미한인 혁명세력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서 연합회의 주최로서 미주, 하와이, 멕시코 등지 각지 한인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야 주미외교위원부를 통일적으로 확대개조하기를 결정하였사오니, 귀하는 즉시 연합회 당국자와 협상하야 한인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시오. 정부에서 연합회에 보낸 전문을 첨부하여 보내니 이것에 의거하야 신속히 개조하심을 바랍니다.
주석 김구
외교부장 조소앙〉97)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 문제를 둘러싼 분쟁의 해결을 이미 결별상태인 한족연합위원회와 李承晩의 타협에 맡긴 이러한 결정은 임시정부의 중대한 책임회피가 아닐 수 없었다. 위의 지시사항 가운데에서 (4)항은 한 달 뒤에 취소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판단의 한 보기였다.98)
李承晩은 예상하기는 했으나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은 그 당혹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특전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외교위원부 조직에 관한 것과 각 단체대표회 소집 등인데, 위원부도 일찍이 미국과 하와이 한인단결책을 누차 임정에 문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전보의 뜻이 좀 모호한 점이 있어 다시 알아본 뒤에 발표하려 하노라.〉99)
조선민족혁명당은 외교위원부의 개조문제에 관련된 국무위원회의 결정을 임시정부보다 먼저 미국에 알렸다. 「독립」지의 중경통신원 신기언은 국무회의의 결의가 있던 이튿날로 그 사실을 타전했고,100) 김규식과 김원봉은 8월11일자 전보와 13일자 중경방송을 통하여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와 하와이총지부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각단체대표회의에 공정하게 참여하라고 지시했다.101)
뉴욕市長이 李承晩 환영식 열어
국치기념일인 8월29일에는 전에 없던 일이 있었다. 한미협회 주최로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만찬 연설회에는 동포들과 외국인사 150명가량이 모였다. 이채로운 것은 이날 오후 2시쯤에 라과르디아(Fiorello H. LaGuardia) 뉴욕시장이 李承晩 내외를 비롯하여 한미협회 인사들과 동포 10여 명을 뉴욕시청으로 초대하여 환영식을 연 것이었다. 호텔에서 시청까지 가는 동안 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선도했고 李承晩 일행이 탄 세대의 승용차는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했다. 1916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된 라과르디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1922년부터 1933년까지 하원의원 생활을 한 다음, 1934년부터 10년째 뉴욕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날의 행사에 대해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은 〈뉴욕시장의 접대식은 국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리 정부대표자를 국빈으로 맞은 것은 우리 각 개인 개인을 독립국의 시민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자평하고,102) 그것은 〈대한독립 승인의 첫 계단〉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103)
同志會中央部와 婦人救濟會는 처음부터 不參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를 위한 각단체대표대회 준비는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와 하와이의 의사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로스앨젤레스에서는 9월10일에 국민회 총회관에서 대한인국민회 미주총회 대표를 비롯한 6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준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동지회 북미총회와 그 자매단체인 대한인부인회 대표들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전체대표회에 참석할 각 단체의 대표수는 실제 회원 100명 이상인 단체는 5명, 그 이하인 단체는 3명으로 정했다. 전체대표회 소집 날짜는 잠정적으로 10월1일로 정하고 의사부에서 요청이 있으면 연기할 수 있게 했다.104)
10월1일이 되어도 하와이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날 모인 각 단체 대표들은 비공식회의를 열고, 회원수를 불문하고 각 참가단체의 대표수를 5명으로 고쳐 정했다. 그리고 주미외교위원 후보 15명을 선정하여 하와이에서 선정해 오는 15명을 합친 30명을 놓고 전체대표회에서 15명을 선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체대표회는 의사부대표들이 도착하는 날로부터 10일 후에 개최하기로 했다.105)
하와이에서 연락이 없었던 것은 연합위원회 의사부 주최로 대표대회를 별도로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에서는 9월18일에 하와이국민회를 비롯한 8개 단체 대표 24명이 호놀룰루의 국민총회관에 모여 회의를 열고 玄楯, 朴相夏, 金鉉九 등 5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동지회 중앙부와 동지회의 자매단체인 부인구제회 및 갓 조직된 대한인부인회는 참가하지 않았다.106)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자신들의 회의를 각단체대표대회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9월24일에 열린 제2차 대표대회에는 제1차 회의 때의 8개 단체 이외에 영남부인실업동맹회 대표도 참석했다. 대회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문제뿐만 아니라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통일책과 군사책과 외교책도 토의했다. 회의는 26일까지 계속되어 우선 통일책으로 연합위원회를 상설기관으로 선정하고 각 단체 대표들은 연합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가결했다.107) 이어 9월30일에 주미외교위원 후보 선거투표를 실시하여 한길수, 정한경, 전경무, 현순, 백일규, 김원용, 윤병구, 송헌주, 장세운, 황창하, 유진석, 김용중, 양유찬, 정덕건, 강영훈의 15명을 선정했다.108) 그것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동지회를 포함한 각 단체의 대표가 비교적 고루 망라된 인선이었다.
李承晩은 代表大會에 초연해
연합위원회 집행부는 각단체대표대회를 준비하면서 李承晩과는 협의도 하지 않았다. 李承晩도 침묵을 지키고 초연한 입장을 취했다. 李承晩은 9월24일에 협찬회 임시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각단체 대표회의에 대해 〈위원부는 이 대회를 속히 열어 원만한 성공이 있기를 원하며, 대한독립에 큰 도움이 되기를 속심으로 바란다〉는 의견을 표명한 데 이어,109)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표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인 10월25일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임시정부에서 미주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에 전보하야 위원부를 개조하라는 훈시를 받고 위원부에서는 그 진척여부를 몰라 주저하였으나, 그 내용을 알게 된 후에는 즉시 침묵을 지키고 각 단체가 협동하야 원만히 조처되기를 기다리고 있나니, 이번 한족대회가 대동단결을 이루면 이에서 더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110)
그러는 한편으로 李承晩은 10월2일에 임시정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그것은 그의 불편한 심기를 토로한 것이었다.
〈주미외교위원부는 모든 그룹을 임시정부 휘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소.… 만일 당신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해임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나를 계속 당신들의 대표로 둘 수 없고 내 사람들을 반대자들이 차지하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오.>111)
李承晩은 또한 대회가 임박해서야 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해 줄 것을 제의한 김원용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112)
民族革命黨은 聯合委員會를 비판해
연합위원회의 워싱턴사무소 설립에 반대하여 연합위원회를 탈퇴했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는 연합위원회가 대표대회를 준비하면서 참가단체들에 회원수와 소속 회원들의 의무금 납부상황까지 보고하라고 한 사실을 들어 연합위원회가 월권행동을 한다고 비난했다.113) 또 외교위원부를 조직하는 일은 정부의 직무인데 그것을 어느 한 부분의 거류민이나 단체에 그 권리를 위임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불합리한 문제발생의 화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114) 지난해 9월에 임시의정원회의가 개회될 때에 주미외교위원부문제를 임시정부에 상세히 보고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극동에서 〈과감한 인물〉이 와서 새로 활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던 사실을 밝혔다.115)
한편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으로 새로 선출된 조선민족혁명당의 박상하는 〈임시정부의 연립내각이나 하와이 한족연합회의 연립위원회와 비스럼하게〉 연립주미위원부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116)
재미한족 전체대표대회는 10월28일 저녁에 로스앤젤레스의 국민회총회관에서 개막되었다. 하와이에서는 대표들이 참가하지 않고 워싱턴에 있는 김원용에게 대표권을 위임했다. 참가자들은 대한인국민회, 조선민족혁명단 미주총지부, 대한여자애국단,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4개 단체 대표 19명(20명 가운데 1명 불참)과 하와이의 9개 단체를 대표한 김원용을 합하여 모두 20명이었다. 김원용은 혼자서 북미 4개 단체의 총 투표권 20표의 두 배가 넘는 45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준비회의에 참가했던 대한인동지회와 대한인부인회는 李承晩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대회 하루 전인 10월27일에 대회불참을 통보했다. 불참이유는 첫째로 임시정부로부터 전보나 공문을 받은 바 없고 연합위원회로 보낸 전보에도 모호한 점이 많아서 金九 주석의 친필이 있기 전에는 아무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겠고, 둘째로 그 전보가 임시정부 훈전이라 하더라도 준비회에서 그 전보와 위반되는 결의와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17)
동지회의 불참은 대회의 효력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대회는 동지회와 협력해야 한다는 임시정부의 훈령의 문구해석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회의는 공전했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가 동지회의 설득을 자임하고 나섰다. 학생회는 외교위원 선정에 대해 민중투표로 선거하거나 임시정부에 선정을 위임하자는 제안을 해놓고 있었다. 민중투표로 위원을 선정한다면 대회 결정에 따르겠느냐는 학생회의 전보를 받고 李承晩은 그러마고 타전했다.118) 동지회도 李承晩이 뽑히거나 말거나 민중투표에 부쳐서 행사한다면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했다.119) 그러나 민중투표안은 임시정부의 훈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지회 참가문제로 논란을 거듭하던 대표대회는 대회 8일째인 11월4일에 하와이대표회의와 북미대표회의에서 1차선정한 각 15명씩의 후보 가운데에서 투표로 외교위원 15명을 다음과 같이 선출했다.
김원용(위원장), 한시대(부위원장), 전경무(총서기), 한길수·裵義煥(서기), 김용성, 鄭基源 , 김호, 宋鐘翊, 김병연, 강택모, 김용중, 張基亨, 유진석, 김현구.
이들 15명 가운데에는 동지회 쪽 인사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각단체 대표회의를 주도한 북미국민회의 오만이었다.
그리고 대표회의는 새로 조직될 외교위원회의 예산으로 연간 3만 달러를 책정했다.120)
李承晩을 委員長으로 한 委員 9명을 臨時政府에서 새로 任命
연합위원회는 11월7일에 13개 참가단체 연명으로 대회결과를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인준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1월11일에 동지회 대표가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동지회 대표가 선출되지 않은 인선을 인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121)
전체대표대회 의장 한시대는 11월15일에 임시정부의 훈령대로 10분의 7 이상의 단체대표들이 참석한 회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임시정부가 어느 일파를 동정하기 위하여 다수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무슨 처사를 하시든지 더 준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임시정부에 타전했다.122)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李承晩을 위원장으로 하는 9명의 외교위원을 선정하고 11월21일에 연합위원회와 李承晩에게 각각 통보했다.123)
이승만(위원장), 김원용(부위원장), 정한경(총서기), 한시대, 김호, 이살음, 변준호, 안원규, 송헌주.
그것은 동지회, 북미국민회, 하와이 국민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 및 무소속을 고루 안배한 인선이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의 권위를 빌려 李承晩을 축출하려 한 연합위원회의 기도는 실패했다.
임시정부는 11월28일자로 「대재미동포 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가 주미외교위원부를 직접 선정하여 임명한 이유를 1)전쟁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대미외교의 긴급성, 2)정부의 위신 존중, 3)민족적 인격 제고, 4)재미동포의 신망 보전, 5)국내민중의 열망, 6)각 우방의 기대에 부응, 7)연래의 파쟁이 초래한 손실을 청산하고 최후 성공을 쟁취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과거의 위원부위원이나 각 방면에서 각기 파견하였던 인원이나 이번 대표회의에서 선출한 인원이나 어느 방면을 재론하지 말고, 또 잘못한 책임의 무겁고 가벼움을 비교해서 논하지 말고 이번에 정부에서 임명한 9인 위원과 간부 인물에 대하야 이 정부에서 신임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신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124)
같은 날 한시대는 임시정부에 전문을 보내어 李承晩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가 李承晩과 동지회만으로 일하겠다면 뜻대로 하라고 을러댔다.125) 이제 임시정부와 한족연합위원회의 관계도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李承晩은 그 나름대로 임시정부의 조치가 불만이었다. 통보를 받은 李承晩은 임시정부에 다음 네 가지 조건을 타전했다.
(1) 매월 총액으로 2,000달러나 되는 9인의 봉급을 누가 지급할 것인가.
(2) 대표가 참가한 단체에서 옹호지지할 것을 약속할 것.
(3) 위원장이 분규를 일으키는 위원을 조치할 수 있을 것.
(4) 각 위원은 자문성질로 공작에만 복무할 것.
李承晩은 위의 네 가지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책임지기 어렵다고 말하고, 그럴 경우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만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1)항과 (2)항은 위원들이 취임한 뒤에 협의하에 해결하고, (3)항은 위원장이 독단으로 조처할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에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며, (4)항은 자문기관이 아니라 회의체라고 회답했다.126)
그러나 한족연합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통보를 불복함으로써 외교위원회의 구성은 흐지부지되었다. 연합위원회는 워싱턴사무소를 계속 유지했다.●
1) 「주미외교위원부통신」, 1943년 12월20일자, 「긴급서신」. 2)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302 Harry A. Eaton to Cordell Hull, Nov. 24, 1943, Adolf A. Berle to Harry A. Eaton.
3)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7호), 1944년 1월31일자, 「한국승인대회」. 4) Congressional Record,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eb. 7, 1949, “The Korean Movement, Extention of Remarks of Hon. J. Harry McGregor”. 5)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8호), 1944년 1월7일자, 「한인대회 소집에 대하야」. 6)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7호), 1944년 1월31일자, 「한국승인대회」. 7)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8호), 1944년 2월9일자. 8)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9호), 1944년 2월15일자, 「공함」 및 「리원순씨 각 지방 심방」.
9) 「新韓民報」, 1944년 3월9일자, 「社說: 주미한국외교위원부의 한족대회 소집 목적을 묻노라」. 10)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64호), 1944년 3월, 「한족대회 연기」. 11)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6호), 1944년 2월, 「1944년 2월26일발 중경전보」. 12)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62호), 1944년 3월9일자, 「김구씨 전보와 한인합동」. 13) 「新韓民報」, 1944년 3월2일자, 「임시정부대통령 김구씨의 3·1절 메시지와 재미한인의 희망」. 14)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1994, 國史編纂委員會, 389쪽, 393쪽.
15)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5) 임시의정원 Ⅳ」, 2005, 국사편찬위원회, 10쪽, 12쪽, 14~15쪽. 16) Hull to Gauss, March 28, 1944,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이하 FRUS), 1944, vol.Ⅴ., The Near East, South Asia and Africa, The Far East,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5, p.1290. 17) C.E.Gauss, “Memorandum of Conversation”, Apr. 4, 1944,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388쪽. 18) C.E.Gauss, “Memorandum of Conversation”, Apr. 12, 1944,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392쪽. 19) Gauss to Hull, Apr. 13, 1944, FRUS, 1944, vol.Ⅴ, p.1291. 20) Gauss to Hull, May 19, 1944, FRUS, 1944, vol.Ⅴ, pp.1292~1293. 21) 「國民報-太平洋週報」, 1943년 12월22일자, 「카이로선언과 위원회의 새 공작」. 22) 「國民報-太平洋週報」, 1943년 12월29일자, 「이박사와 그의 외교실책」. 23)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 결의안」; 「國民報」, 1944년 4월19일자, 「제3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위원회 결의안」.
24)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제1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 25) 「독립」, 1944년 8월23일자, 「하와이동포 군사후원회 조직」. 26)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조선민족혁명당의 연합위원회 탈퇴의 공문」. 27) 「독립」, 1944년 4월13일자, 「학생회의 탈퇴이유」. 28) 「독립」, 1944년 5월3일자, 송헌주, 「성명서」. 29)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社說: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와 북미한인학생회의 진퇴」. 3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84, “Report of UKC in America, Washington Office of Secretary of Republic Relations, June 5, 1944-February 5, 1945, p.5. 31) 「新韓民報」, 1944년 4월20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 회록개요」. 32)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002, J.Kyuang Dunn to UKC Hawaii & UKC Los Angeles, June 20, 1944. 33) 李炫熙, 「柳一韓의 獨立運動硏究」,1995, 동방도서, 171~173쪽. 34) 洪善杓,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23쪽. 35) 「韓國臨時議政院會議陷入局之經過」(1944. 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1971, 延世大出版部, 351~352쪽.
36) 「韓國兩黨現狀及其爭執之點」(1944.1.1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1972, 延世大出版部, 61쪽. 37) 安炳武, 「七佛寺의 따오기」, 1988, 汎友社, 140쪽. 38) 「改憲에 대한 臨政首腦의 意見」,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68쪽. 39) 「第二十五週年三一節紀念宣言」(1944.3.7),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5쪽. 40) 「韓國兩黨現狀及其爭執之點」(1944.1.1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62쪽. 41) 「第二十五週年三一節紀念宣言」(1944.3.7),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5쪽. 42) 「韓國臨時議政院會議陷入局之經過」,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50~352쪽. 43) 「改憲에 對한 臨政首腦의 意見」,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69쪽. 44) 胡春惠著, 辛勝夏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出版部, 1978, 237쪽. 45) 「吳鐵城이 朱家?에게 보낸 1944년 1월21일자 편지」 및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4년 1월22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ⅩⅡ」, 1994, 國史編纂委員會, 33쪽 ; 「百萬元借款件의 發給에 關한 通報」,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0쪽. 46) 「韓國臨時議政院會議陷入局之經過」,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52쪽; 「會見金若山談話紀要」(1944.2.2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1~232쪽.
47) 「工作費用五十萬元借款要請」(1944.2.22) 및 「五十萬元借款要請에 對한 回信」(1944.3.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0~231쪽, 233쪽. 48) 「新韓民報」, 1944년 3월2일자, 「임시정부대통령 김구씨 三一절 메시지」. 49) 「韓國臨時政府工作計劃大綱」(1944.3.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417쪽. 50) 「韓國臨時政府工作計劃大綱」(1944.3.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416~419쪽. 51) 「何應欽이 朱家?에게 보낸 1944년 2월6일자 편지」 및 「朱家?가 何應欽에게 보낸 194년 2월10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ⅩⅡ」, 1994, 國史編纂委員會, 33~34쪽, 35쪽.
52) 中國國民黨 中央執行委員會, 「處理之韓國問題原則」(1944.4.13),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688~690쪽. 53)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의 책, 106쪽, 134~136쪽. 54)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임시정부연합내각 조직」. 55)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능률있는 내각을 조직하라! 독립적 전투부대를 요구한다!」. 56) 「韓國黨派紛糾近況」(1944.4.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62쪽.
57)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2005, 국사편찬위원회, 4~6쪽. 5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6) 임시의정원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05쪽. 59)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6) 임시의정원Ⅴ」, 106쪽; 필자는 1944년의 개헌 때 주석의 권한이 더욱 제고되었다고 분석한 적이 있으나(「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臨時憲法改定過程을 중심으로」, 「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 1969, 東亞日報社, 929쪽), 이는 착오이다.
60)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6쪽. 61)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312쪽. 62) 「新韓民報」, 1944년 7월20일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6차 임시의회선언」. 63) 「韓國各革命黨擁護第三十六屆議會」(1944.4.24),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53~354쪽 ; 「新韓民報」, 1944년 7월20일자, 「4단체연합선언」. 新韓民報는 「선언」이 발표된 날짜를 4월21일로 적고 있으나, 내용으로 볼 때에 주석과 국무위원을 선출한 뒤인 4월24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64)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임시정부 연합내각 조직」. 65)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314쪽. 66)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354쪽. 67) 裵慶植, 「중경시기 『반한독당세력』의 임시정부개조운동」, 한국근현대사학회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1999, 國家報勳處, 650쪽. 68)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임시정부 연합내각 조직」. 69) 「新韓民報」 1944년 5월25일자, 「중국정계의 동정」; 「獨立新聞」, 1944년 8월15일자, 「한국임시정부의 확대 강화, 한중 각계에서 열렬한 경축을 표시」. 70) 「新韓民報」, 1944년 6월22일자, 「한중문화협회다화회」; 「獨立新聞」, 1944년 8월15일자, 「임시정부의 확대강화, 한중 각계에서 열렬한 경축을 표시」 및 「김주석 답사」. 71) 「大韓民國臨時議政院文書」, 1974, 國會圖書館, 850쪽. 72)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3호), 1944년 5월23일자, 「외교위원부에서 위원회를 조직」. 73)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461, Syngman Rhee’s Letter, May 24, 1944.
74)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6호), 1944년 6월15일자, 「협찬부조직」 및 Korean Commission Invites Public Participation in Our Cause. 75)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7호), 1944년 6월22일자, 「외교위원부 협찬부의 목적과 직무」. 76) 위와 같음. 77) 「新韓民報」, 1944년 6월15일자 , 「한국외교위원부는 소속정치기관을 조직」. 78) 「新韓民報」, 1944년 6월22일자, 「한국외교위원부의 정치기관 조직동기는 무엇」.
79) 홍선표 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회의록」, 2005, 연세대 출판부, 274~275쪽. 80)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8호), 1944년 6월29일자, 「협찬부 조직에 관하야」. 81)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14, Sidai Hahn to Kim Koo, June 13, 1944; 도915, Sidai Hahn to Kim Koo, June 14, 1944; 도916, Sidai Hahn to Kom Koo, June 16, 1944; 도917, Sidai Hahn to Kim Koo, June 19, 1944. 82)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19 Umhangsup to Press New Koreans , June 24, 1944. 83)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4호), 1944년 6월1일자, 「리승만 박사와 동부인은 두 연회에 초대를 받음」. 84) Robert T. Oliver, “Korea Now Plays Key Role in Pacific”, The Washington Post, Jul. 30, 1944. 85)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456, Warren Y. Kim to Robert T.Oliver, Jul. 31, 1944.; 도990 J. Kyuang Dunn to UKC Honolulu & UKC Los Angeles, Jul. 31, 1944. 86) 「國民報」, 1944년 12월20일자, 「한국독립당원으로 이승만씨를 허가」; 12월27일, 「리승만씨는 독립당에 입당」. 87) 趙擎韓 증언. 88) 「國民報」, 1944년 8월2일자, 「연합회 워싱턴 사무직원의 보고」;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462, Commission - UKC Washington Office Meeting, Jul. 5, 1944.
89) 독립기념과 소장문서 도995, J. Kyuang Dunn to UKC Honolulu & UKC Los Angeles, Jul. 6, 1944. 9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92, J. Kyuang Dunn to UKC Honolulu & UKC Los Angeles, Jul. 26, 1944. 91)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2호), 1944년 10월25일자, 「외교위원부 개조에 대하야」. 92)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20, Umhangsup to Press New Koreans , Jul. 18, 1944. 93)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21, UKC to Kim Koo, Jul. 24, 1944. 94)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22-1, Sidai Hahn to Kimkiusic Kim Yaksan, Jul. 24, 1944; 도923 Sidai Hahn to Korean Independence Party, Jul. 24, 1944. 95)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322쪽, 330~331쪽, 333~334쪽. 96) 「新韓民報」, 1944년 8월17일자, 「임정의 외교위원부 개조책」. 97) 「앞길」, 1944년 8월29일자, 「在美韓族各團體에 向하여 駐美外交委員部改組의 電을 發送」.
98)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0호), 1944년 10월5일자, 「김구씨의 전보」. 99)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4호), 1944년 8월18일자, 「중경특전」. 100) Refound Shin, “Korean Commission in Washington D.C. To be Reorganized”, Korea Independence, Aug. 9, 1944. 101)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자료 970036-3, Kiusic Kim, Yaksan Kim to Korean Revolutionary Party, Aug. 11, 1944; Aug. 13 A.M. Radio. 102)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7호), 1944년 9월14일자, 「뉴욕 국치기념일 후소식」. 103)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8호), 1944년 9월21일자, 「동포여 힘쓰고 애쓰라」. 104) 「新韓民報」, 1944년 9월14일자, 「전체대표회 소집준비회 회록 요약」. 105) 「新韓民報」, 1944년 10월5일자, 「전체대표회 준비회록 초략」. 106) 「國民報」, 1944년 9월20일자, 「대표대회 개최」, 「각단체대표대회 진행」.
107) 「國民報」, 1944년 9월27일자, 「각단체대표대회 준비위원회 심의안보고서」, 「각단체대표대회 제2차 속회, 제3차 속회, 제4차 속회」. 108) 「國民報」, 1944년 10월11일자, 「연합위원회전체회 결의안」. 109)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9호), 1944년 9월28일자, 「오는 연합대회의 성공을 바람」. 110)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2호), 1944년 10월25일자, 「외교위원부개조에 대하야」. 111)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0-1444. Division of Japanes Affairs, “Memorandum”, Oct. 14, 1944. 112)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문서 970034-3, Syngman Rhee to Warren Y. Kim, Oct. 26, 1944. 113) 「독립」, 1944년 9월20일자, 「구미위원부 재조직과 평화회의」. 114) 「독립」, 1944년 10월4일자, 리강원, 「워싱턴외교부 개조문제」. 115) 「독립」, 1944년 7월12일자, 「시국과 우리민족운동」. 116) 「國民報」, 1944년 10월18일자, 박상하, 「경애하는 애국동지 앞에」. 117)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1쪽.
118)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6쪽. 119) 「독립」, 1944년 11월15일자, 「구미위원부재조직을 위한 연합대표대회의 전말」. 12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13~15쪽; 「新韓民報」, 1944년 11월9일자, 「전체대표회 결의안」. 121)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17쪽. 122) 위와 같음. 123) 「新韓民報」, 1944년 11월23일자, 「전체대표회 회록」;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7호), 1944년 11월30일자, 「임정 전보」. 12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345쪽. 125)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문서 970036-3, Sidai Hahn to KOPOGO, Nov. 28, 1944. 126)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三)」, 197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744~745쪽.
반년 넘어 空轉하던 臨時議政院은 1944년 4월에 정상화되었다. 中國國民政府와 在美同胞들의 강력한 종용으로 韓國獨立黨과 朝鮮民族革命黨의 협상이 이루어져 改憲을 실시하고 聯立內閣이 출범했다.
臨時政府의 지시로 駐美外交委員部를 개조하기 위한 在美各團體代表會議가 소집되었으나, 李承晩과 同志會의 불참으로 聯合委員會의 일방적인 회의가 되고 말았다. 臨時政府는 李承晩을 위원장으로 하는 9명의 駐美外交委員會 위원들을 직접 선정하여 임명했으나, 聯合委員會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 하와이까지 中繼放送된 애슐랜드 韓國承認大會

대회가 열리기에 앞서 李承晩은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통하여 「긴급서신」을 보내어 〈우리가 아직 잃은 강토만 못 찾았지 독립은 찾아 놓은 민족이니, 우리의 쾌활한 자유기상과 열렬한 애국심을 드러냅시다〉라면서 동포들의 많은 참석을 촉구하고, 참가자들은 태극기가 있거든 가져오고, 특히 부인들은 한복을 준비해 오기를 미국 친우들이 특청한다고 적었다.1)
오하이오주에는 한미협회에 동정적인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李承晩은 1943년 8월에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열린 오하이오주 재향군인회 총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는데, 총회는 미국무부에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었다. 李承晩은 애슐랜드의 한국승인대회를 준비하면서 오하이오 재향군인회에 미국전역의 200개 이상의 라디오 방송국이 대회를 중계하는 것을 지원해 줄 것을 교섭했다. 오하이오 재향군인회는 이에 대한 미국무부의 반응을 타진했고, 국무부는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회답했다.2)
『李承晩은 自由를 위해 싸우는 十字軍勇士』
한국승인대회가 열린 애슐랜드는 온 시가 축제 분위기였다. 몇 주일째 신문과 사교계가 선전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은 모두 대회참가자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큰 거리에는 「한국인 환영」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양쪽으로는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했다. 대회 사무실은 상업회의소였다. 동부 각 도시와 캘리포니아주와 몬태나주 등 서부지역에서 온 동포 50여 명이 등록했다. 애슐랜드 시장은 이들에게 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영창 문을 잠가 놓았으니까 무슨 행동이든지 자유롭게 하라고 말했다.
대회에는 한미협회 회장 크롬웰(James H.R. Cromwell) 전 주캐나다대사를 비롯하여 유타주 출신의 킹(William H. King) 전 상원의원, 아메리칸대학교 총장 더글러스(Paul F. Douglass) 박사, 高宗의 특사로 활동했던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피치(George A. Fitch) 부인, 뉴욕의 중국의료원조 미국사무국 부회장 윌리엄(Maurice William) 박사 등 많은 미국인사들이 참석했다. 대회는 교회와 학교와 컨트리클럽 등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오찬 연설회와 만찬 연설회로 진행되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1월22일 오후 2시부터 애슐랜드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라디오 방송 연설회였다. 이 연설회는 하와이를 포함한 전국 114개 라디오 방송국에서 중계되었다. 대회의 명예회장 마이어스(Guy C. Myers) 부인은 개회사를 통하여 한국인들은 〈잊어버린 나라(the forgotten land)〉를 대표한다고 말하고, 애슐랜드 주민들은 그들에 대해 알게 된 최초의 미국인 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지난가을에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열렬한 십자군 용사를 만났다면서 李承晩을 추어올렸다. 킹 전 상원의원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필요한가를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이어 신상근(James Shinn) 의사와 李承晩의 연설이 있었다.
李承晩은 먼저 카이로선언 이래로 한국은 이제 〈잊어버린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고, 한국민들이 4,200년의 역사를 통하여 인류문명에 기여한 업적을 아직도 존재하는 세계 최초의 천문대, 미대륙이 발견되기 전에 인쇄된 112편의 백과사전, 구텐베르크의 활자발명보다 앞선 금속활자 발명 등의 보기를 들어 설명했다. 그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이 한국을 〈잊어버린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李承晩은 또한 1882년에 맺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아직도 유효하고 파기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承認要求는 武器援助 받기 위한 것
李承晩이 미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 의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우리 국민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고, 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승인은 여러분의 민주주의의 무기고에서 나오는 항공기와 대포와 탄약의 일부가 지금과 같이 우리에게 거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의 막대한 인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또한 한국인들과 싸우는 왜적은 미국 군인과 싸우는 왜적의 수를 그만큼 줄인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궁극적인 승리는 미합중국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전쟁이 10년이고 15년이고 계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서방세계의 정치가들이 아시아 인민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무기와 탄약, 폭탄과 항공기가 있다면 여러분의 병사들이 동양에서 실제로 얼마나 덜 싸울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적들을 책임질 것입니다.…』
그것은 李承晩이 진주만 공격 이래로 줄곧 주장해 온 대로,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의 목적이 무기대여법에 의한 무기원조임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여러분은 제가 미국은 위기에서 언제나 그 영혼을 찾는다고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정화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전쟁이 시작된 이래 이 축복받은 땅에서 재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행과 재난은 저 자신의 나라 인민들에게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세계의 도덕적 사상과 정의의 지도자이기를 기대합니다. 한때, 오래 전에, 여러분은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고 우리를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때와 같은 손을 지금, 우리의 손이 여러분에게 뻗쳐져 있을 때에, 부디 거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미국인들의 청교도적인 자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수사였다. 라디오 중계방송은 李承晩의 연설을 마지막으로 끝냈다. 라디오 중계방송이 끝난 뒤에도 연설회는 계속되었다. 헐버트 박사가 한국 국내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정황을 설명하다가 목이 메이자 수백 명의 청중이 일제히 눈물을 흘렸다.
강연회가 끝나고는 시가행진이 있었다. 미국인들과 한국인 참가자들은 오하이오 재향군인회 군악대의 선도로 성조기와 태극기를 섞어 들고 흔들면서 시가를 행진했다. 행렬 가운데에서 가장 인기를 모은 것은 한국 부인들의 한복차림이었다. 시가행진에 이어 만찬 연설회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에 이 대회 명예회장 마이어스 부인의 남편 존 마이어스(John Myers)가 일어나서 『李承晩 박사에게 1,000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여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또한 지역 유지들은 한미협회 지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공식 행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1월23일은 일요일이었다. 뉴욕에서 온 배민수(裵敏洙) 목사, 시카고에서 온 김광연 목사와 신상근 의사 등은 각 교회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설교와 강연을 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는 동포들만의 만찬시간을 가졌다.3)
이 승인대회의 연설문들은 오하이오주 출신 하원의원 맥그리거(J. Harry McGregor)에 의하여 2월7일자 미국 하원 의사록에 등재되었다.4)
李承晩이 한미협회를 통하여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국으로 중계되는 한국승인대회를 개최한 것은 미국 의회에 한국에 동정적인 여론을 환기시키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을 것이나, 그러한 효과는 한족연합위원회를 제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李承晩은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뒤로 동포사회에 고조되는 조국독립에 대한 열기를 배경으로 하여 승인대회와는 별도로 모든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하는 한족대회를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李承晩은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시기에〉라는 구절은 한국인들이 하기에 달렸음을 경고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한족대회 소집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가 각 단체 인도자들의 지각과 애국심을 믿나니, 옳은 생각으로 함께 모이면 서로 각오와 양해를 얻어서 각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면 먼저 그 나라의 권리를 회복해야 될 것을 깨달을지니, 일심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옹대해야만 될 것을 다 알게 될지라.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니, 이 목적으로 대회를 주장함이다.…〉
李承晩은 이처럼 대회의 목적이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지시에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대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위원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위원부에서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지위나 권리나 재력 등등에 관계되는 문제는 제출하지 않을 것이요, 다만 한 가지 토의하야 해결하고자 하는 바는 임시정부 아래 우리가 다 합동하야 연합을 다하야 쾌쾌히 선언하기를 우리가 지금은 활동할 준비가 되었노라 할 만치 만들자는 것이다.…〉5)
李承晩은 한족대회를 3월31일에 워싱턴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한족연합위원회를 비롯한 동포 관계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애슐랜드의 승인대회가 끝나자 李承晩은 캘리포니아에서 참석한 李薩音(이살음) 목사와 같이 워싱턴으로 와서 이살음을 李元淳의 집에 묵게 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했다.6) 이살음은 1943년 1월에 李承晩을 옹호하는 중부 캘리포니아 민중대회를 주도했다가 북미국민회 집행위원에서 제명된 뒤에 동지회 북미총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聯合委員會는 韓族大會를 거부해
李承晩은 거듭해서 한족대회의 취지를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승인을 받고 누가 승인을 못 받는 것은 다 우리끼리 사소한 집안 내 일이요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 독립을 찾는 것만 제일인 줄로 각오하므로 즉시 한족대회를 소집하자는 의견을 발표하였나니, 우리는 이에 대하야 아무 의사나 계획이 도무지 없고 다만 한 가지 정한 목적은 모든 단체나 모든 민중이 함께 모여서 무슨 방책으로 든지, 무슨 제도로 든지 다 협동하야 진행하기로 작정만 되면 우리는 불계하고 찬성하야 대단결을 이루려 하는 목적 한 가지뿐이다.〉
李承晩은 이처럼 어떤 복안을 가지고 한족대회를 소집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그러므로 공연한 의혹을 품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개인이나 단체 간에 시비가 자기 원대로 못하는 데서 생기나니, 위원부에서 전에는 일정한 순서를 세워 놓고 그리로 모든 사람이 따라야 된다 하므로 불찬성하는 이들이 분쟁을 품어 시비가 되었던 것인데, 지금은 위원부에서 다 터놓고자 하므로 다 와서 대회석에서 힘껏 토의하야 한 가지 제일 좋은 의사와 방책을 취하야 동일히 나가 보자 하는 터이니,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 어디 있으리요. 그런즉 이에 대하야 공연한 의혹이나 무고히 염려하는 것을 버리고, 한번 모여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독립 찾는 데 같이 나가 보기를 각각 우리의 기회요 우리의 직책으로 알기를 바라노라.〉7)
李承晩은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을 통하여 여러 차례 한족대회 소집의 취지를 설명하고 나서, 2월25일에 각 단체 앞으로 3월31일에 워싱턴에서 한족대회를 개최한다는 공함을 보내고, 이원순으로 하여금 미주 각 지방의 동포들을 방문하여 대회참석을 독려하게 했다.8)
그러나 이미 李承晩과의 결별 방침을 확고히 하고 있던 한족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의 한족대회 개최제의를 거부했다. 북미국민회의 기관지 「新韓民報」는 장문의 사설을 통하여 李承晩의 제안을 〈자기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파괴하는 것을, 더욱이 카이로선언 이후에 파괴하는 것을 가리워 자기가 저지른 책임을 다른 데 전가시키고저 하는 계획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9) 사설은 李承晩이 카이로선언 이후에 자신이 총재로 있는 대한인동지회를 연합위원회에서 탈퇴시켜 놓고는 카이로선언으로 재미한인단체들의 합동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하는 주장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사설은 또한 李承晩이 한족대회 소집의 목적을 임시정부 아래 활동할 것을 토의 해결하려는 것이라고 한 데 대해 무슨 근거로 재미한인사회가 임시정부 아래 합동되지 않았다고 하느냐고 따졌다. 로스앤젤레스의 연합위원회 집행부는 호놀룰루에서 오는 대표들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서 결정하겠다고 했고, 북미국민회에서는 연합위원회가 대표권을 가졌으므로 따로 대표를 보낼 수 없다고 회답했다.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마침내 李承晩은 한족대회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10) 1943년의 3·1절을 기하여 백악관과 국무부 앞에서 추도시위를 벌이고자 했던 계획이 한족연합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에 이어 李承晩의 의욕적인 계획이 연합위원회의 비협조로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의 갈등은 가뜩이나 조선민족혁명당과의 알력으로 고심하는 金九의 입장을 여간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2월26일에 주미외교위원부로 보낸 金九의 3·1절 경축전문은 金九의 고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승전을 앞두고 동포사회를 격려하면서 희망과 용기를 일깨우는 메시지가 아니라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일반 형편은 나날이 우리에게 좋게 되어 갑니다. 최근에 동맹국 해군이 달성한 성공은 동맹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의 전쟁 노력에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줍니다. 이러한 신성한 기회를 당하여 우리는 동포들을 낙심시키거나 모든 우리 친우들을 실망시키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결심합시다. 불필요한 분쟁으로 우리의 대업을 훼손하지 맙시다.
동맹국의 승리를 위한 우리의 공헌은 적들의 무조건 항복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우리는 무조건의 자유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난날의 모든 이견과 편벽을 용서하고 잊읍시다. 새로운 희생적 정신으로 자유를 위한 우리의 투쟁에 새로 협력합시다. 우리의 있는 힘을 다합시다.…
우리는 해내 해외의 동포들의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분이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를 계속해서 정성껏 지원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11)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를 계속해서 지원하라는 金九의 전보는 결국 李承晩에 대한 지지를 애둘러 표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金九의 메시지와 관련하여 李承晩은 임시정부의 근거가 견고해지고 활동력이 많아질수록 재미한인은 일치 합동하여 중앙정부와 외교위원부를 한층 더 후원함으로써 대업성취를 속히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2)
이러한 金九의 3·1절 메시지에 대해 한족연합위원회는 크게 불만이었다. 연합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金九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김구 대통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반드시 과거의 모든 차이와 이의를 잊고 서로 용서하며 정부와 위원부 밑에서…』하였다. 단지 동방예의국의 영수로 도덕에 젖은 말이다. 그러나 잃어버렸던 국가를 회복하고 건설코자 하는 대사를 경영함에 과거의 과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과실이 이미 국가재건 전체 운동에 영향을 미친 연고이다. 과실을 지었으면 반드시 징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차이와 이의를 우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전체 운동을 위하야 이 차이와 이의를 때려 부시고 한 목적으로 나아가 속히 독립을 획득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13)
趙素昻 등은 美國訪問 추진해
이 무렵 임시정부는 외무부장 趙素昻과 의정원 의원 楊宇朝 등의 미국 방문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두 사람 이외의 일행은 한국독립당 당원인 의사 林義鐸, 항공기 조종사인 崔用德 대령, 그리고 양우조의 부인 崔素貞[崔善嬅]이었다.14) 양우조는 일찍이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서 2년 동안 수학한 것을 포함하여 10년 동안 미국에 체류했었다. 그는 애국부인회 서기로 일하고 있는 부인 최소정과 어린 두 아이들을 대동하고자 했다. 이들의 방미는 1943년의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채택된 제의안에 따른 것이었다.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앞에서 보았듯이 회의록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외교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10월12일에는 李貞浩, 金尙德, 孫斗煥, 金元鳳 네 의원이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의 4개국에 상주대표를 파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고, 이틀 뒤인 10월14일에는 정치, 군사, 재정 등의 일체 대외사무는 임시정부의 외교기구를 통해서만 수행하고 각 당파의 개별적 활동은 철저히 방지하자는 결의안이 柳林, 安勳〔趙擎韓〕, 朴建雄 등 여섯 의원에 의하여 제출되었다. 같은 날 양우조, 趙時元, 閔弼鎬 등 다섯 의원이 정부대표단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11월20일에 미국, 영국, 소련에 대표단을 파견하자는 수정안으로 조정되어 채택되었다. 그 밖에 김원봉, 손두환 등 네 의원이 제출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임시정부의 세포조직을 두자는 결의안도 10월21일에 채택되었다.15) 조소앙 일행은 의정원 결의안에서 제시된 목적뿐만 아니라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도 도미의 중요한 임무였을 것이다.
李承晩은 3월27일에 미국무부에 이들 다섯 사람의 입국허가를 신청했다. 미국무부는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국무장관 헐(Codell Hull)은 신청서를 접수한 이튿날로 주중국대사 고우스(Clarence E. Gauss)에게 이들의 방문제의에 대해 미육군 당국과 중국 정부의 의견을 비공식적으로 알아보고 고우스 자신의 견해와 건의사항을 보내라고 훈령했다. 그러면서 헐은 이들 한국대표단의 방미계획의 숨은 목적이 1)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승인을 달성하고, 2)미국과 중국에 있는 그들의 조직들이 미국의 무기대여법 원조를 받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하며, 3)얼마쯤 불안해진 것으로 믿어지는 李承晩의 입지를 북돋우어 주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16)
고우스는 4월4일에 국민정부 외교부장 宋子文을 방문하여 조소앙 일행의 방미에 대한 그의 비공식 견해를 물었다. 송자문은 한국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가 없으므로 1주일 뒤에 만찬을 하면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송자문은 중국 정부는 원칙적으로 이들의 방미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17)
송자문과 고우스는 4월11일 저녁에 만났다. 송자문은 이 문제에 대해 蔣介石 총통과 협의한 내용을 알려 주었다. 장개석은 조소앙 일행이 미국에 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송자문은 말했다. 장개석은 이들의 방미가 극동상황에 대한 관심과 한국의 독립에 대한 약속을 진전시킬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었다.18) 그리고 미육군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나 이들의 미국 방문에는 이의가 없으며 대사관의 건의에 따르겠다고 말했다.19)
그러나 중국 국민정부의 강력한 종용에 따라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임시의정원이 정상화되고 개혁안이 통과되는 등 급전직하의 상황 속에서 조소앙 일행의 방미계획은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정부의 입국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소앙은 5월15일에 미대사관을 방문하고 임시정부 승인문제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방미하면 루스벨트 대통령과 헐 장관을 예방할 수 있겠는지 고우스에게 묻고 있다.20)
韓族聯合委員會의 워싱턴事務所 설립
李承晩과 한족연합위원회의 길항상태가 더욱 첨예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4월2일부터 1주일 동안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토의된 것은 연합위원회의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하는 문제였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는 연합위원회 활동의 중점을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하는 일로 정하고,21) 1943년 12월27일에는 의사부 위원장 安元奎 명의로 李承晩의 외교실책을 규탄하고 워싱턴사무소 설립 방침을 정식으로 발표했다.22) 그러나 안원규가 지적한 李承晩의 외교실책이란 1942년 3월에 李承晩이 동포단체에 미국 국무부와의 교섭은 끝났다고 했던 말을 가리켜 국교단절을 선언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오히려 미국무부의 태도를 옹호하는 듯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워싱턴사무소 설립안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연합위원회 전체위원회는 설립안이 다수결로 강행처리되자 분열되고 말았다. 워싱턴사무소 설립안에 극력 반대하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와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결정에 반발하여 회의 폐막 하루 전인 4월7일에 연합위원회를 탈퇴했다.23) 뒤이어 북미국민회 내부에서도 분란이 일어났다. 집행위원장 宋憲澍(송헌주)를 비롯한 申斗湜, 白一圭, 黃思宣 등 집행위원 여섯 사람이 워싱턴사무소 설치안 결의에 반대하여 사임했다.24) 하와이의 카우아이 단합회도 연합위원회를 탈퇴했다.25)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반대 이유는 민족혁명운동의 제일 급선무는 군사운동이며, 외교는 반드시 정부기관을 통해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6) 유학생총회는 외교위원부 문제를 임시정부와 끝까지 교섭하고 민간외교의 필요조건이 생길 때까지 연기 또는 무효화할 것을 주장했다.27) 북미국민회 집행위원장직을 사퇴한 송헌주는 이어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민회를 아예 탈퇴했다. 그는 이번 전체 위원회의 결정은 민중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민간단체에서 외교기관을 설립한 것은 한족연합위원회가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주장했다.28)
이러한 반대에 대해 「新韓民報」는 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대리기관이고 워싱턴사무소는 외교기관이 아닌 연합위원회의 사무기관이며 원칙상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보조기관이라면서 이번 사무소 설치가 임시정부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했다.29) 그러나 그것은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 반발과 일반 동포들의 의구에도 불구하고 한족연합위원회는 워싱턴사무소 설립계획을 강행하여, 마침내 6월10일에 워싱턴사무소를 개소했다.30) 전임자로는 의사부의 金元容, 都鎭鎬, 田耕武와 집행부의 金龍中 네 사람을 선임하고 예산은 3만 달러를 책정했다.31) 그러나 김용중은 이미 1943년11월쯤에 워싱턴에 자신이 설립한 한국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 업무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사양했고, 도진호는 하와이 당국의 조사를 받느라고 하와이를 떠날 수 없었다.32) 그리하여 연합위원회 워싱턴사무소는 위원장 김원용이 한인사회의 연락 업무를 맡고, 선전부장 전경무가 대외교섭 업무를 맡아 업무를 시작했다. 워싱턴에는 또 1943년 12월에 柳一韓이 설립한 한국경제회(Korean Economic Society)가 「한국경제 다이제스트(Korean Economic Digest)」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33)
이렇게 하여 연합국의 승리로 조국의 해방이 확실해진 시점에 워싱턴에는 임시정부의 대표기관인 李承晩의 주미외교위원부뿐만 아니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지원을 받는 중한민중동맹단의 韓吉洙와 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사무소가 미국 정부와 정계인사들을 상대로 경쟁적으로 선전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김용중의 한국사정사와 유일한의 한국경제회는 정부나 정치단체 차원의 활동이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정을 홍보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에 미국사회에 한국문제를 여론화시키는 데 유익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모든 선전활동이 정부기관으로 일원화되기를 바라는 임시정부나 李承晩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활동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었다.34) 李承晩은 외교위원부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협찬부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2) 改憲과 聯立內閣의 성립
1943년 10월에 개원한 제35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80일가량이나 유회되면서 회기 연장을 거듭한 끝에 해를 넘겼다. 임시정부의 주도권 쟁취를 위한 조선민족혁명당의 도전은 치열했다. 이에 대응하는 金九와 한국독립당의 태도도 단호했다. 그것은 李承晩의 말마따나 잃은 강토만 못 찾았지 독립은 찾아 놓은 상황에서 전개되는 적나라한 권력투쟁이었다.
有記名投票냐 無記名投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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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20일에 開院한 제36회 臨時議政院開院式 순서〔「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4) 임시의정원Ⅲ」(2005), 국사편찬위원회〕에서. |
민족혁명당이 홍진에게 비밀히 주석 자리를 약속했다는 소문이 있던 터였으므로 한국독립당은 의장결정에 불복하고 퇴장하면서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39) 홍진은 의장단은 중립을 지키겠다면서 부의장 崔東旿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했다. 한국독립당은 이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내부 분열로 당세가 더욱 위축되었고, 합작파이자 중앙집행위원장인 조소앙의 입지도 약화되었다.40)
金元鳳은 中國政府에 별도로 50萬元 借款 요청
한국독립당 소속 의원들이 임시의정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자 조선민족혁명당은 자신들의 주장을 양보하여 1)무기명투표 방식을 취소하고 유기명투표 방식을 채택하고, 2)7대 4의 국무위원 인선 비율을 받아들인다는 두 가지 타협조건을 제시했다.41) 강경한 태도로 협상에 응하지 않던 한국독립당은 타협의 전제조건으로 홍진의 탈당취소 성명을 요구했고, 홍진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다시 1)金九의 주석직 옹호는 굳이 바라지 않으나, 2)의정원선거는 어떤 방식이 되든지 趙琬九, 박찬익, 柳東說, 김원봉, 金奎光[金星淑]은 선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당연히 국무위원이 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고, 민족혁명당은 이 조건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양쪽은 2월5일에 만나서 약정서에 서명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함으로써 임시의정원 회의는 또다시 무기 휴회 상태에 들어갔다.42)
한국독립당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데에는 중국 정부의 자금지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金九가 임시정부의 과거의 분쟁은 대부분 자금분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듯이,43) 중국 정부가 지원한 자금의 분배 문제는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사이의 분쟁의 핵심적인 사안이었다.44) 임시의정원이 정돈상태에 있던 1월 하순에 중국 정부는 차관자금 100만원 가운데에서 이미 지급한 20만원 이외에 그동안 지급을 보류했던 80만원을 임시정부에 지급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민족혁명당에도 통보했다.45)
중국 정부의 차관자금을 수령한 한국독립당은 민족혁명당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자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46) 김원봉은 2월22일에 吳鐵城 비서장에게 민족혁명당의 활동비로 50만원의 차관을 요청했으나, 오철성은 이미 임시정부에 100만원의 차관을 지급했다면서 거절했다.47)
金九는 2월26일에 미주동포에게 보낸 3·1절 기념 메시지에서 새 국무위원 선출이 늦어지고 있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최근 미국 군대의 위대한 해군 승리는 인내와 작량과 협동의 정신을 보이고 있습니다. 각 개인은 반드시 우리의 거룩한 광복운동을 위하야 자기의 최선을 다할 것이올시다. 나 자신이 역시 이 정신을 원칙으로 삼아 나아가나 나의 많은 결함으로 인하여, 또는 어떤 동지들의 이해치 못함으로 인하야 새 내각을 선출하기에 불능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정책을 후원하는 다수의 동지와 또는 중국 친우들의 이해 있는 동정으로 이전 내각이 변경이 없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카이로회의 이후에 중국 정부는 우리를 더욱 후원하고 원조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런 사실은 우리를 격려함이 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혁명활동의 신속 진행을 중강할 것을 결심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견고케 하기를 계속하고 또 후원하기를 진정으로 희망합니다. …〉48)
「韓國臨時政府工作計劃 大綱」 제출
金九는 이처럼 〈어떤 동지들〉, 곧 민족혁명당의 이해부족 때문에 새 국무위원 선거가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金九의 생각은 3월8일에 오철성에게 제출한 「한국임시정부 공작계획 대강」에도 잘 드러나 있다. 金九는 이 문건의 서두에 적은 「임시정부의 선후문제에 관하여」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투항할 때까지 휴회상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시의정원이 지난 10월에 개막된 이래 의견의 대립과 혼란으로 인하여 연기를 거듭하여 올해 1월까지 온갖 위법, 배신, 사기, 기만 등 사리에 어긋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여 마침내 수습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처럼 계속 시일을 미루어 한 가지 일도 결행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잠시 동안 폐원하여 쓸데없는 투쟁을 멈추고 실제공작에 착수하여, 사실이 드러나는 대로 스스로 막힌 가슴을 풀고 감정을 융통시켜 서로 양해할 때에 이르러 새 국무위원을 선출하여 각자 져야 할 책임을 나누면, 곧 과거의 여러 문제가 깨끗이 사라질 것이며 허다한 중요문제도 스스로 잘 풀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한국독립당 전체 의원의 결정을 거쳐 잠시 폐원하고 새로 선출한 국무위원이 직무를 볼 때까지 원임 국무위원(각당 각파 포함)이 직무를 계속 집행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임시의정원의 개폐막된 경과입니다. 최근의 조선민족혁명당의 그릇된 사실은 법리와 인정의 적합 여부를 돌아보지 않고 마침내 해괴한 문자를 공공연히 발표한 것입니다. 내 집의 냄새를 전 세계에 뿌려 안으로 국민들의 심리를 현혹케 하고 적들에게 선전자료를 공급하며, 밖으로 여러 우방의 시청을 어지럽히고 스스로 깎아내려 저열하게 하여 맹방의 신뢰와 원조를 막아 버리게 하니, 천부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응당 이렇게 나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직 우리 독립당만이 시종 이를 진정시켜 저 난폭한 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로서 응해 주어 그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49)
金九가 이 「공작계획대강」에서 제시한 사업은 1)초무공작을 위한 총판사처[사무소] 설치, 2)훈련 공작, 3)국내 조직 문제, 4)동맹국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의 네 가지였다. 위의 네 가지 사업을 위한 경비로는 초무공작 총판사처 운영 경비로 5,500만원, 동맹국에 파견할 대표 여비로 1,500만원 이상, 합계 7,000만원을 계상했다.50)
金九는 이렇듯 민족혁명당을 배제하고 한국독립당만으로 임시정부의 당면한 사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亡命政府를 다시 만드는 일을 防止해야』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립이 극한상황으로 치닫자 중국 국민정부에서 중재에 나섰다. 蔣介石은 何應欽과 朱家?와 오철성에게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51) 이 지시에 따라 4월13일에 1)한국문제에 대하여 구체적 방안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미국과 상의하여 진행하고, 2)한국 임시정부에 대하여 내부의 단결을 촉구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제공하며, 3)원조경비에 관해서는 차관 명의로 지급하고 실제 용도를 조사하며, 4)한국광복군에 대해서는 역량을 강화하여 후방공작을 발전시키도록 한다는 「한국문제처리원칙」을 마련했다. 한국문제를 미국과 상의하여 진행한다고 한 1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자유 독립시키기로 선포한 카이로회의 이후 한국의 지위는 이미 보증을 획득했다. 다만 영국과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같지 않으므로, 표현하는 태도 역시 각기 다르다. 중국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로서 밀접한 관계가 있고 안위를 같이 한다.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마땅히 원조를 제공하여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고, 외교부는 총재가 지시한 방침에 따라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아울러 수시로 미국과의 밀접한 연계를 취하여 진행을 상의해야 한다.〉
「한국문제처리원칙」에서 주목되는 점은 임시정부의 내부갈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체의 원조를 임시정부로 집중시킨다고 한 대목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분규에 대해서는 압력을 행사하여 단결과 합작의 길을 열어 주고 임시정부의 지위를 안정시켜서, 그들이 현재 있는 임시정부 이외의 다른 망명정부를 다시 만드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앞으로 일체의 원조는 임시정부를 대상으로 하며, 두 당에 대한 태도에서 독립당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도 무방하며, 민족혁명당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 밖의 두 개의 작은 당(무정부주의자 및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승인하지 않는다. 한국임시정부가 우리에게 고문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면 허가해 주어도 괜찮으며, 중앙당부가 본 당 간부 인원을 선발 파견하여 그 임무를 담당케 함으로써 임시정부가 광복운동 공작을 전개하는 것을 협조한다.〉52)
이러한 방침에 따라 중국 국민당의 한국문제 담당 실무자들은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청취하고 양자의 합작을 권고했다. 거듭되는 합작권고에도 불구하고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대립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마침내 중국 국민당은 최후의 수단으로 경제적 압력을 가하기로 했다. 중국 정부는 1944년 2월까지도, 비록 임시정부를 통해서 지급하기는 했으나, 각 당파별로 액수를 지정해서 보조금을 지급해 왔으나, 그것이 한국 각 당파의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1944년 3월부터 임시정부에만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다른 당파나 단체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했다. 金九에게도 최단시일 안에 합작정부를 만들지 않으면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53)
韓族聯合委員會도 正常化 촉구해 와
재미한인동포들도 하루속히 임시정부를 정상화시킬 것을 촉구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는 집행부 위원장 韓始大와 각 회원 단체 연명으로 4월 5일에 金九를 비롯하여 의정원 의장 홍진,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조소앙,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김규식에게 능률 있는 내각의 조직과 독립적인 한국인 전투부대의 편성을 요구하는 전보를 쳤다.54)
〈이곳에서 개회 중에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는 서반구에 있는 전체 한인들로부터 특별자금을 모집하여 중국에 있는 한인의 군사활동을 최고 한도로 후원하기를 결정하였습니다. 본 회의가 충심으로 한국 임시정부에 기대하는 바는 중국에 있는 우리 군대를 독립전투부대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과 중경에 있는 우리 지도자들은 임시정부 및 의정원과 협동하여 독립사업에 좀더 효과 있게 공헌하도록 내각을 강화하기를 요구합니다. 원동에서 한인의 정치적 지위와 이상의 요구한 사건에 대하야 분명한 회답을 속히 주시기 바랍니다.〉55)
중국 정부의 압력에 이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이러한 전보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태도를 바꾸어 민족혁명당과 협상에 나섰다. 임시정부 개편문제에 대해 연일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두 당은 4월11일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에 대해 비밀협정을 맺었다.
(1)제35회 의회는 폐회하고, 폐회 후 곧바로 임시의회를 소집한다.
(2)약헌개정안 가운데 정부조직에 관해서는 국무위원을 14인으로 늘리고, 따로 주석과 부주석 각 1인을 둔다. 각부 부장은 주석이 국무회의에 천거하여 찬성 통과 후에 임명한다.
(3)국무위원 인원수의 비례는 한국독립당 8석, 민족혁명당 4석, 기타 두 소당 각 1석으로 하고, 주석은 한국독립당에서, 부주석은 민족혁명당에서 내도록 한다.
이때에 김원봉은 군무부장과 재무부장을 민족혁명당에서 맡기를 희망했으나,56) 그것은 과욕이었다.
양당의 비밀협정에 따라 4월15일에 제35회 임시의정원회의를 폐회하고 4월20일 오전 9시에 41명의 의원이 참석하여 제36회 임시의회가 개원되었다. 개원식에 이어 바로 제1차 회의를 시작하여 헌법개정안 심의를 시작했다. 헌법 수개 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한 헌법개정안은 1943년 12월13일에 본회의에 회부되어 있었다. 개헌안은 약간의 조문 수정을 거쳐 이튿날 회의에서 출석 의원 37명 가운데 35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57)
主席의 權限은 弱化돼
전문과 7장 62조로 구성된 이 헌장은 실질적으로 제정이나 다름없었던 1919년의 제1차 개헌 이래로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개정된 헌법으로서, 임시정부의 6개 헌법전 가운데에서 가장 방대하고 체제를 갖춘 헌법전이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1년 넘어 논란과 수정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논란과 수정 때문에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헌법은 그 제정 및 개정권자들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문제점은 곧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정치적 대립이 얼마나 첨예했는가를 말해 준다. 제1차 개정 이래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던, 근대헌법의 두 유형인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형태의 권력구조는 이 헌장에서도 기본적으로 변경이 없었다.
개정된 임시헌장의 특징으로는 우선 임시의정원 규정에 종래의 약헌에는 없던 조항을 신설한 점이다. 그 하나는 임기규정이 없던 임시의정원 의원의 임기를, 비록 연속 선출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일단 3년으로 규정한 것이다(제12조). 또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의결정족수 규정에서 출석의원의 과반수로 의안을 결정한다고 규정하면서도, 일체의 법안, 조세와 세율, 예산과 결산, 국무위원회 주석과 부주석 및 국무위원 선거, 조약체결과 선전 및 강화의 동의 등은 3분의 2의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규정한 점이다(제23조). 그것은 실제로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합의 없이는 임시의정원의 어떠한 의사진행도 불가능하게 한 규정으로서, 두 당의 상호불신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 준다.
둘째로, 임시의정원과 행정부의 관계 규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주석과 부주석과 국무위원에 대하여 임시의정원이 탄핵권과 불신임권을 모두 행사할 수 있게 한 점이다(제18조). 탄핵권은 대통령중심제 헌법에, 불신임권은 내각책임제 헌법에 해당되는 사항인데, 두 가지 권한을 다 행사할 수 있게 하여 탄핵을 당했을 때에는 면직하고 불신임을 당했을 때에는 스스로 사직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탄핵안 규정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1919년의 개정헌법에서는 〈탄핵 또는 심판한다〉고 규정했다가(제21조 14항), 1925년 헌법에서는 〈심판 처벌〉하는 것으로(제26조 4항), 1927년 약헌에서는 〈심판 또는 면직〉하는 것으로(제19조), 그리고 1940년 약헌에서는 〈심판하여 면직하게〉 하는 것으로(제14조) 규정했다.
셋째로, 행정부의 권한이 주석과 국무위원회에 애매하게 양분되고 있는 점이다(제30조, 제32조). 그것은 1940년 약헌에 비하여 주석의 권한이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주석의 권한에 대해서는 개헌안 심의과정에서 논란이 많았다. 그리하여 개정초안과 수정안에서도 주석의 직권이 크게 바뀌었다. 개정 초안에서는 주석의 직권을 1)국무위원회를 대표함, 2)국무위원회를 소집하며 그 주석이 됨, 3)국서, 법률, 명령, 문무관 임면에 서명함이라는 세 가지로 축소하고, 주석의 권한이었던 국군통수권과 사면권을 국무위원회에 귀속시켰다. 개정안 설명서는 주석의 권한을 축소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전에 통수부(대본영), 참모본부, 회계검사원 등을 대통령에게 직속케 하였던 것이 대통령제가 폐지된 후에는 그 조직계통이 미분명하야 혹은 현 제도의 주석에게 예속될 것 같이도 추단하나, 현 제도의 주석은 독특한 조직계통을 가지지 않고 국무위원회의 수반이 될 뿐인 이상에는 일체의 조직계통을 국무위원회에 귀속시킨 것이며, 임시의정원에 대하야는 국무위원회에서 분담된 각 부장이 책임을 직접 질 것이 아니라 국무위원회, 즉 그 구성원 전체가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임.〉58)
國軍統帥權은 主席과 國務委員會에 兩分
국군통수권에 대해서는 개헌과정에서 그냥 주석의 직권에 속하게 하고 오직 국무위원회의 의결로 국군을 總監한다고 개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류되고, 원래 주석 직권에 속하게 했던 국군총감과 사면권을 국무위원회에서 관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국무위원회에 귀속시켰던 것이다.59)
그러나 〈국군을 총감함〉이라는 국무위원회의 권한규정은 확정안에서 다시 국무위원회는 〈군무에 관한 사항을 의결〉하고 주석은 〈국군을 통감함〉이라고 바뀌어, 국군통수권이 주석과 국무위원회에 양분되는 애매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넷째로, 행정부를 국무위원회와 행정연락회의의 이중구조로 개편한 점이다.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는 국무위원들로 구성되는 국무위원회는 復國과 건국의 방책, 예산결산, 선전 및 강화, 군무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정책결정 기관이고, 국무위원회가 결정한 정책은 주석의 추천으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면하는 각부 부장들이 집행하되, 행정 각부서 사무의 연락과 통제를 위하여 주석 이 주재하는 연석회의를 열도록 한 것이다(제30조, 제40조). 행정부의 이러한 이중구조는 각 정파가 집결된 임시정부 후기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서, 국무위원회가 독립운동의 원로들과 각 정당의 대표자들로 안배 구성되는 데 비해, 행정연락회의는 현실적인 정책집행능력본위와 金九 직계의 인물들로 구성하려는 데 있었다.
다섯째로, 그동안 막연히 써오던 「광복운동자」의 개념을 명문으로 규정한 것이다. 광복운동자에 대한 명문화 작업은 개헌과정에서 가장 활기를 띤 논제의 하나였다. 처음 기초의원에 의하여 제안된 개정안에서는 〈광복운동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직접 간접으로 그 운동에 종사하는 자로 함〉(제7조)이라고 막연하게 표현되었으나, 재수정안을 거쳐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광복운동자는 조국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인하고 간단없이 노력하거나 또는 간접이라도 광복사업에 정력 혹 물력의 실천공헌이 있는 자로 함. 단, 광복운동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있을 시에는 광복운동자의 자격을 상실함〉(제8조).
그것은 국권회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독립운동자들의 특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가 광복되기 전에는 주권이 광복운동자 전체에 있다고 선언한 데 이어(제4조), 모든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광복운동자에게만 한정되었고(제10조, 제11조), 주석, 부주석 및 국무위원은 위의 규정에 해당되는 자로서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했다(제34조).
『聯立政府 성립은 獨立運動史上의 新紀元…』
개정된 임시헌장을 공포하고 이틀 뒤인 4월24일의 제3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주석과 부주석과 국무위원 선거를 실시했다. 재석의원 34명 가운데 각각 31표로 주석에 金九, 부주석에 김규식이 당선되고,60) 국무위원으로는 李始榮, 曺成煥, 黃學秀, 조완구, 車利錫, 박찬익, 조소앙, 조경한(이상 한국독립당), 張建相, 成周寔, 김원봉, 金朋濬(이상 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해방동맹), 柳林(조선혁명자연맹)이 선출되었다.61) 이로써 임시정부는 반년에 걸친 분쟁이 종결되고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이었다. 임시의정원은 4월 24일에 「제36회 임시의회선언」을 발표하여 〈전 민족 통일전선의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 〈이번 의회의 최대 성공인 동시에 우리 민족독립운동사상의 신기원이 될 만한 중대한 의의가 있는 사실〉이라고 평가하고, 국내외 동포의 지지를 호소했다.62) 또한 같은 날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네 단체 연명으로 「한국 각 혁명당 옹호 제36차 회의 선언」을 발표하여, 1)개정된 임시헌장을 전 민족 행동의 최고 준칙으로 준수하고, 2)金九 주석을 비롯하여 부주석과 전체 국무위원을 민족 최고의 영도자로 솔선하여 성심으로 옹호 지지하고, 3)임시정부 기치 아래 전 민족을 총동원하여 일본 제국주의자와 최후의 대결전을 과감히 전개하고, 4)최단기일 안에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유력한 국제원조를 취득하기 위해서 적극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63)
임시의정원은 이어 4월26일에 金九를 비롯한 신임 국무위원의 선서를 받고 폐회했다. 이튿날 金九가 「新韓民報」에 보낸 다음과 같은 전문은 개헌파동으로 인한 그의 고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나는 과거 1년 동안 무한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재미한인의 정치적 착잡 전과 후에 이곳의 정세는 비상히 혼란을 시작하야 거의 정점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정원 회의는 7개월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풍설과 비평과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동포들과 동지들의 애국심과 그 충성을 굳게 믿으며, 참음과 침묵으로 사실이 증명될 것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충성스러운 후원과 의심 없는 통일을 위하야 협동하는 것이 우리 독립운동기념사에 한 새로운 기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한국 임시정부 밑에서 국가적 통일과 민주주의적 협동이 강화하야질 것이외다. 그러므로 한국 임시정부 사업은 이로부터 속력으로 진행될 것이외다. 우리 한인만이 이를 기뻐할 뿐 아니라 우리의 연합국 친우들도 우리에게 동정의 후원을 줄 것이외다. 마지막으로 내가 진정으로 재미한인에게 바라는 것은 재미한인은 재미한인의 모든 착잡과 오해를 청산하는 것인 동시에 나도 역시 나의 최선을 다하야 성취할 바에 노력할 것이외다.〉64)
財務部長은 韓國獨立黨이, 軍務部長은 民族革命黨이
5월8일에 소집된 국무위원회는 金九의 추천으로 국무위원 조소앙을 외무부장 겸임으로, 국무위원 김원봉을 군무부장 겸임으로, 국무위원 조완구를 재무부장 겸임으로, 申翼熙를 내무부장으로, 최동오를 법무부장으로, 嚴恒燮을 선전부장으로, 崔錫淳을 문화부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金九의 추천으로 국무위원 車利錫을 국무위원회 비서처 비서장으로 임명했다.65)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과 최석순이 군무부장과 문화부장에 임명된 것은 민족혁명당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한 결과였다. 자금을 관장할 재무부장 자리는 한국독립당이 양보하지 않았다.
제5차 개헌을 통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은 부주석과 국무위원 4석, 행정부 부장 2석의 자리를 확보했다. 임시정부 성립 이래 처음으로 설치된 부수반제는 정부운영상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주석인 김규식을 위해 마련된 정치적 타협의 상징적 직위였다. 또한 김원봉은 국무위원으로 군무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군무부장의 지위도 〈직위만 주고 실권은 거세한다〉는 한국독립당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허용된 것이었다.66) 한국독립당은 임시약헌을 개정하면서 군사업무에 관한 권한을 국무위원회에 부여함으로써, 군무부장의 권한을 약화시킨 뒤에 김원봉을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다.67)
中國政府는 잇달아 祝賀會 열어
임시정부가 연립내각을 구성하자 내외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임시정부가 빨리 정상화되기를 염원하던 재미동포들은 임시정부의 통합내각 출범을 크게 환영했다. 재미동포들은 다투어 임시정부에 축전을 보내고 각지에서 경축대회를 열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제3차 전체위원회에서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1944년을 제1기로 정하고 10만 달러 이상을 모집하며 군사운동금은 다만 일체 군사운동에만 쓰기로 함〉이라고 결의한 데 이어, 4월29일의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일인당 평균 50달러 이상의 군사운동금을 모금하기로 결의했다.68)
중국 국민정부의 입법원장이며 중한문화협회 이사장인 孫科, 중국 국민당 비서장 오철성, 전 조직부장 주가화, 선전부장 梁寒操, 해외부장 張道藩 등 중국 국민당의 주요 인사들도 잇달아 축전을 보내왔다. 주가화는 5월13일에 임시정부의 주석과 부주석 및 국무위원 전원과 각 부장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만찬회를 열었다.69) 5월15일에는 임시정부 강당에서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각부 부장의 취임 선서식이 열렸다.
중국 정부 주요 인사들의 축하회는 계속되었다. 중한문화협회는 5월28일에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한 다화회를 열었고, 6월7일에는 중국공산당 대표 董必武와 林祖涵이 중한문화협회에서 주석과 부주석과 국무위원 및 각부 부장을 초청하여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6월17일에는 오철성, 陳果夫, 양한조, 장도번, 段錫朋 등이 중국 국민당을 대표하여 金九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앙당부로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날 金九는 긴 답사를 통하여 한중 관계의 역사와 합작의 의의를 강조했다.70)
(3) 駐美外交委員部를 駐美外交委員會로
우여곡절 끝에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의 하나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재미독립운동자들의 분규였다. 그리하여 5월15일의 국무회의에서 주석 및 부주석과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군무부의 부장들로 미주문제해결방침위원회를 구성하여 선후 방침을 정하도록 위임했다.71) 그러나 위원회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했다. 임시정부의 연립내각 구성이 발표되자 축하와 함께 임시정부를 성의있게 후원하겠다고 타전했던 한족연합위원회는 새 내각도 외교위원부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外交委員部의 協贊部를 새로 組織
한편 李承晩은 연합위원회가 워싱턴 사무소 설치를 강행하자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외교위원부의 협찬부를 조직했다.72) 李承晩이 5월24일에 내무, 교육, 경제, 정치의 4개 위원회에 걸친 25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는 것을 보면,73) 비록 전원이 사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수락한 것은 아니더라도, 여러 지역에 동지회 회원 말고도 많은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월31일에 워싱턴에서 한족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던 것도 이러한 인맥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었을 것이다. 협찬부는 6월4일에 뉴욕, 뉴저지, 워싱턴, 디트로이트, 시카고에서 온 22명이 외교위원부 사무실에 모여 결성했다. 이 참가자들 전원을 포함한 27명이 내무부, 교육부, 경제부, 정치부, 전무부의 5부에 부장과 서기, 그리고 협찬원으로 선정되었다. 위의 다섯 부 이외에 재정부와 그 밖의 몇 부를 더 조직하고, 사업진전에 따라서 서부지역과 하와이 군도에 있는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협찬부위원을 추가로 선정하기로 했다.
협찬부의 사업목적은 (1)일반 한인들의 사상과 운동을 통일적으로 발전시켜서 임시정부에 성충을 다하고 전후의 한국 정부에 봉사할 지도인격을 양성하며, (2)전후 한국의 산업발전과 노동, 상업, 신용제도의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준비하며, (3)연합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한국의 입장과 목표를 널리 알리며, (4)한국의 모든 자원을 항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직하며, (5)한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도록 힘쓰는 것이었다.74)
협찬부는 6월22일에는 협찬부의 「목적과 직무」를 한결 구체적으로 천명했는데, 그것은 독립적인 정치단체의 정강정책과 같은 느낌을 주는 내용이었다. 경제부와 정치부의 「목적」과 「직무」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제부의 「목적」은 노동안정과 재원발달을 위하여 미국의 회사 및 은행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고, 「직무」는 전후 한국의 경제, 농업, 은행, 신용, 운수, 통신에 대한 연구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75) 정치부의 「목적」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광복군에 무기대여법 원조를 해줄 것을 미국 정부에 계속 교섭하는 것이었고, 「직무」는 다른 부들과 협동하여 대한공화국헌법자료를 수집하고 개정하여 한국 국회에 제출하게 하며, 임시정부 시대에서 정식 정부로 전환되는 동안에 필요한 특별제도를 편집하며, 미국무부와 연락을 취하며, 수시로 관계 연합국, 특히 영국, 미국, 중국, 소련 4개국과 의견을 교환하며, 망명국 정부들의 외교정책과 운동방략을 알도록 하며, 무기대여법 원조계획에 한국이 참가하여 군사, 경제회복, 교육 등에 대하여 연구하며 신속히 실시하도록 할 것과 그밖에 모든 설비와 재력을 다하여 한인이 참전하도록 힘쓴다는 것이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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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5월에 駐美外交委員部 協贊部 조직에 참가한 사람들. 앞줄 왼쪽부터 鄭基元, 金顯哲, 裵敏洙 목사. 강택모. 뒷줄 왼쪽부터 韓永敎, 신상근, 林昌榮, 세 사람 건너 林炳稷, 金世旋, 오른쪽 끝이 李元淳〔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1996)에서〕. |
『外交委員部를 臨時政府와 같은 地位에 끌어올리고…』
李承晩이 협찬부를 조직하자 「新韓民報」는 협찬부의 조직은 한국 임시정부와 방불한 조직이라고 말하고, 〈사실상 李박사는 지금 한국외교위원부장인 동시에 스스로 새로 정치기관을 준비하야 영수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러고는 李承晩이 임시정부의 승낙을 얻어서 이 새 정치기관을 조직했는지 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와 관계를 끊은 독립기관인지 묻고,77) 李承晩이 외교위원부의 협찬부를 조직하는 동기가 스스로 현재의 한국임시정부를 몽상하며 나아가 한국의 헌법적 정부를 몽상하는 것이 아닌가고 힐난했다.78)
연합위원회 집행부는 6월11일의 회의에서 외교위원부 협찬부의 조직이 정부제도와 유사하고, 李承晩이 동부 학생들의 사환[仕宦: 벼슬살이]욕을 자극하여 자파세력을 확장하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고, 임시정부에 대하여 외교위원부의 개조의 필요성과 함께 재정통일을 한족연합위원회에 일임할 것과 재미한인의 대표권을 연합위원회에 부여할 것을 품청하기로 결의했다.79)
李承晩은 연합위원회의 이러한 의혹과 비판을 일축했다. 전후계획을 준비해서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시기에〉라는 말을 강대국들 마음대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우리끼리 능히 우리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자는 취지에서 구상된 것이라고 말하고, 〈어느때든지, 어디서든지, 누가 무슨 명목으로 하든지, 임시정부와 외교위원부를 도와서 회를 조직할진대, 그 속에 다른 의미가 있기 전에는 임시정부나 외교위원부에서 막을 이치가 없다〉80)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이 외교위원부 협찬부를 조직한 사실을 내세워 李承晩과 金九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金乎 후임의 1944년도 집행부 위원장 韓時大는 6월13일, 14일, 16일, 19일에 잇달아 金九에게 전보와 편지를 보내어, 李承晩과 연합위원회의 관계는 1944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단절되었고 李承晩은 개인적인〈내각〉을 조직하여 스스로 한국정부의 영수가 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외교위원부 문제에 대해 단안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81)
金九는 주미외교위원부의 처리문제가 여간 고민스럽지 않았다. 그는 6월24일에 嚴恒燮을 시켜 「新韓民報」 앞으로 새 국무위원회가 재미한인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든 정보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타전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따름이었다.82)
李承晩은 韓國獨立黨에 入黨
李承晩에 대한 金九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李承晩을 임시정부의 전권대표로 미국 정부에 통보했고,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로 여러 가지 대미교섭을 李承晩에게 의존해 왔던 金九의 입장에서는 예상되는 강화회의 등을 앞두고 그를 배제하는 조치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실제로 李承晩은 워싱턴의 외교무대에서 한국대표로 인식되고 있었다. 李承晩 내외는 6월1일에 魏道明 중국대사 관저에서 열린 가든파티에 초대되기도 했다.83) 올리버가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기고한 글에서 이제 한국이 태평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4월에 출범한 연립정부는 4개 정당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정당인 한국독립당은 한국 임시정부의 전직 대통령인 李承晩과 현직 대통령인 金九가 이끌고 있다고 적은 것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84) 올리버의 글에 대해 연합위원회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김원용은 올리버의 글이 보도된 이튿날로 올리버에게 기사의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고, 전경무는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와 하와이의 의사부로 그 사실을 알렸다.85) 李承晩은 金九에게 자신도 한국독립당에 입당할 것을 신청하여 12월에 정식 당원이 되었다.86) 李承晩은 당원 의연금 송부성적이 누구보다도 좋았다고 한다.87)
워싱턴 機關들의 統合 추진
한편 李承晩은 연합위원회의 워싱턴사무소를 외교위원부로 통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협찬회의 내무부장 黃思溶을 워싱턴으로 불러 작업을 하게 했다. 7월4일에 외교위원부의 이원순의 집에서 李承晩, 이원순, 황창하, 황사용과 연합위원회의 김원용, 전경무 그리고 한국사정사의 김용중이 모였다. 모임에 앞서 김원용과 전경무는 통합의 조건으로 1)모든 회합에는 李承晩, 전경무, 김원용과 韓吉洙가 참가하고, 2)李承晩은 최근에 조직한 정치기관인 협찬부를 해체한 다음 이를 공표하고, 3)연합위원회 주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하는 민중대회에 李承晩이 참석하여 외교위원부와 연합위원회의 지난날의 관계와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설명하고, 4)통합계획을 위한 임시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의 연구 분석을 위해 李承晩은 외교위원부의 서류를 넘겨주고, 5)외교위원부의 재조직을 위한 방식과 인선의 대강을 작성하여 임시정부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을 것을 제시했다.88) 그러나 이튿날 전경무가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와 하와이의 의사부에 李承晩이 통합을 제의한 것은 임시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는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을 따름이라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89) 위와 같은 조건도 李承晩의 통합제의를 아예 거부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회담은 7월25일까지 몇 차례 계속되었으나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이 자기네의 요구조건을 회피하고, 연합위원회를 외교위원부 권능 아래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90) 실제로 李承晩은 김원용과 전경무에게 외교위원부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작정하는 대로 알려 달라고 했다.91) 그러나 연합위원회는 李承晩을 재미동포사회에서 배제할 결의를 굳히고 임시정부에 대해 거듭 결단을 촉구했다.
金九는 7월18일에 다시 엄항섭을 통하여 「新韓民報」 앞으로 전보를 쳤다.
〈서로 다른 의견을 표명한 재미동포들의 많은 제의를 받았습니다. 국무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곧 내릴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몇몇 재미친우들에게 보내는 회람장에 적었습니다. 그것은 李承晩 박사를 통하여 전달될 것입니다.〉92)
이러한 金九의 전보를 받은 연합위원회는 격분했다. 한시대는 7월21일에 이전보다 한결 단호한 입장을 金九에게 타전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24일에는 다시 연합위원회 소속 10개 단체연명으로 金九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정돈상태로 계속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우리는 강력하고 신뢰받는 우리 대표부를 워싱턴에 정식으로 설립했습니다. 임시정부는 한족연합위원회를 택하시든지 李承晩을 택하시든지 빨리 결정하시어 바로 회답하시기 바랍니다.〉93)
같은 날 한시대는 조선민족혁명단의 김규식과 김원봉 및 한국독립당에도 외교위원장의 임무 수행에 실패한 李承晩을 배제하고 새 위원장을 선출할 권리를 연합위원회에 맡겨 달라고 말하면서, 金九에게 보낸 것과 같은 내용의 요구사항을 타전했다.94)
國務會議에서 「美洲問題 解決方案」 결의
마침내 임시정부는 8월3일의 국무회의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교위원회로 개편하기로 하고 「주미외교위원회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편의 골자는 주미외교위원회는 7인 내지 15인의 위원으로 조직하되, 위원장 1인, 부위원장 1인, 비서주임 1인과 비서 약간인을 두고(제2항), 위원장, 부위원장 및 위원은 주석의 천거로 국무위원회에서 임면하며(제3항), 일체의 주요사항은 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집행하고(제5항), 위원회의 경비는 예산서를 임시정부 외무부에 제출하여 인준을 받도록(제7항) 한 것이었다. 또 이날의 국무회의는 이와 관련된 「미주문제 해결방안」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미주 각지의 한인단체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개편하라는 것이었다. 「해결방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재미한인연합위원회 주최로 각 주요단체와 협상하여 먼저 주비회를 조직하고,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각지 한인단체의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할 것.
(2)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방식은 국무위원회에서 개정한 주미외교위원회의 신규정에 의하여 하되, 신규정 제3항 인원선거에 관하여는 이번에 한하여 미주에서 소집하는 단체대표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인수를 7인 내지 15인 이내로 自定하고, 직접 선거한 뒤에 정부에 보고하여 추인을 요구할 것.
(3)한인단체 대표회의의 조직은 연합위원회의 현재 있는 구성단체 및 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한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동 하와이총지부, 학생회 및 그밖의 일체 한인단체의 참가를 요하되, 적어도 재미 각 단체수 10분의 7 이상의 참가를 요할 것.
(4)현 주미외교위원부와 연합위원회에서 파견한 선전기구는 위원부 개조가 완성될 때까지 각기 공작을 정지하고 개조가 완성되는 즉시로 폐지할 것.95)
임시정부는 8월12일에 국무위원회의 결정을 「新韓民報」에 통보하고,96) 李承晩에게는 별도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李承晩 선생.
본 국무위원회는 재미한인 혁명세력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서 연합회의 주최로서 미주, 하와이, 멕시코 등지 각지 한인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야 주미외교위원부를 통일적으로 확대개조하기를 결정하였사오니, 귀하는 즉시 연합회 당국자와 협상하야 한인 각 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시오. 정부에서 연합회에 보낸 전문을 첨부하여 보내니 이것에 의거하야 신속히 개조하심을 바랍니다.
주석 김구
외교부장 조소앙〉97)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 문제를 둘러싼 분쟁의 해결을 이미 결별상태인 한족연합위원회와 李承晩의 타협에 맡긴 이러한 결정은 임시정부의 중대한 책임회피가 아닐 수 없었다. 위의 지시사항 가운데에서 (4)항은 한 달 뒤에 취소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판단의 한 보기였다.98)
李承晩은 예상하기는 했으나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은 그 당혹스러움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경 임시정부의 특전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외교위원부 조직에 관한 것과 각 단체대표회 소집 등인데, 위원부도 일찍이 미국과 하와이 한인단결책을 누차 임정에 문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전보의 뜻이 좀 모호한 점이 있어 다시 알아본 뒤에 발표하려 하노라.〉99)
조선민족혁명당은 외교위원부의 개조문제에 관련된 국무위원회의 결정을 임시정부보다 먼저 미국에 알렸다. 「독립」지의 중경통신원 신기언은 국무회의의 결의가 있던 이튿날로 그 사실을 타전했고,100) 김규식과 김원봉은 8월11일자 전보와 13일자 중경방송을 통하여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와 하와이총지부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각단체대표회의에 공정하게 참여하라고 지시했다.101)
뉴욕市長이 李承晩 환영식 열어
국치기념일인 8월29일에는 전에 없던 일이 있었다. 한미협회 주최로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만찬 연설회에는 동포들과 외국인사 150명가량이 모였다. 이채로운 것은 이날 오후 2시쯤에 라과르디아(Fiorello H. LaGuardia) 뉴욕시장이 李承晩 내외를 비롯하여 한미협회 인사들과 동포 10여 명을 뉴욕시청으로 초대하여 환영식을 연 것이었다. 호텔에서 시청까지 가는 동안 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선도했고 李承晩 일행이 탄 세대의 승용차는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했다. 1916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된 라과르디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1922년부터 1933년까지 하원의원 생활을 한 다음, 1934년부터 10년째 뉴욕시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날의 행사에 대해 「주미외교위원부통신」은 〈뉴욕시장의 접대식은 국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리 정부대표자를 국빈으로 맞은 것은 우리 각 개인 개인을 독립국의 시민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자평하고,102) 그것은 〈대한독립 승인의 첫 계단〉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103)
同志會中央部와 婦人救濟會는 처음부터 不參
주미외교위원부의 개조를 위한 각단체대표대회 준비는 로스앤젤레스의 집행부와 하와이의 의사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로스앨젤레스에서는 9월10일에 국민회 총회관에서 대한인국민회 미주총회 대표를 비롯한 6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준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동지회 북미총회와 그 자매단체인 대한인부인회 대표들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전체대표회에 참석할 각 단체의 대표수는 실제 회원 100명 이상인 단체는 5명, 그 이하인 단체는 3명으로 정했다. 전체대표회 소집 날짜는 잠정적으로 10월1일로 정하고 의사부에서 요청이 있으면 연기할 수 있게 했다.104)
10월1일이 되어도 하와이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날 모인 각 단체 대표들은 비공식회의를 열고, 회원수를 불문하고 각 참가단체의 대표수를 5명으로 고쳐 정했다. 그리고 주미외교위원 후보 15명을 선정하여 하와이에서 선정해 오는 15명을 합친 30명을 놓고 전체대표회에서 15명을 선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전체대표회는 의사부대표들이 도착하는 날로부터 10일 후에 개최하기로 했다.105)
하와이에서 연락이 없었던 것은 연합위원회 의사부 주최로 대표대회를 별도로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에서는 9월18일에 하와이국민회를 비롯한 8개 단체 대표 24명이 호놀룰루의 국민총회관에 모여 회의를 열고 玄楯, 朴相夏, 金鉉九 등 5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동지회 중앙부와 동지회의 자매단체인 부인구제회 및 갓 조직된 대한인부인회는 참가하지 않았다.106)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자신들의 회의를 각단체대표대회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9월24일에 열린 제2차 대표대회에는 제1차 회의 때의 8개 단체 이외에 영남부인실업동맹회 대표도 참석했다. 대회는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문제뿐만 아니라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통일책과 군사책과 외교책도 토의했다. 회의는 26일까지 계속되어 우선 통일책으로 연합위원회를 상설기관으로 선정하고 각 단체 대표들은 연합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가결했다.107) 이어 9월30일에 주미외교위원 후보 선거투표를 실시하여 한길수, 정한경, 전경무, 현순, 백일규, 김원용, 윤병구, 송헌주, 장세운, 황창하, 유진석, 김용중, 양유찬, 정덕건, 강영훈의 15명을 선정했다.108) 그것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동지회를 포함한 각 단체의 대표가 비교적 고루 망라된 인선이었다.
李承晩은 代表大會에 초연해
연합위원회 집행부는 각단체대표대회를 준비하면서 李承晩과는 협의도 하지 않았다. 李承晩도 침묵을 지키고 초연한 입장을 취했다. 李承晩은 9월24일에 협찬회 임시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각단체 대표회의에 대해 〈위원부는 이 대회를 속히 열어 원만한 성공이 있기를 원하며, 대한독립에 큰 도움이 되기를 속심으로 바란다〉는 의견을 표명한 데 이어,109)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표대회가 개최되기 직전인 10월25일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임시정부에서 미주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에 전보하야 위원부를 개조하라는 훈시를 받고 위원부에서는 그 진척여부를 몰라 주저하였으나, 그 내용을 알게 된 후에는 즉시 침묵을 지키고 각 단체가 협동하야 원만히 조처되기를 기다리고 있나니, 이번 한족대회가 대동단결을 이루면 이에서 더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110)
그러는 한편으로 李承晩은 10월2일에 임시정부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그것은 그의 불편한 심기를 토로한 것이었다.
〈주미외교위원부는 모든 그룹을 임시정부 휘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소.… 만일 당신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해임하시오. 그러나 당신들은 나를 계속 당신들의 대표로 둘 수 없고 내 사람들을 반대자들이 차지하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오.>111)
李承晩은 또한 대회가 임박해서야 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해 줄 것을 제의한 김원용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112)
民族革命黨은 聯合委員會를 비판해
연합위원회의 워싱턴사무소 설립에 반대하여 연합위원회를 탈퇴했던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는 연합위원회가 대표대회를 준비하면서 참가단체들에 회원수와 소속 회원들의 의무금 납부상황까지 보고하라고 한 사실을 들어 연합위원회가 월권행동을 한다고 비난했다.113) 또 외교위원부를 조직하는 일은 정부의 직무인데 그것을 어느 한 부분의 거류민이나 단체에 그 권리를 위임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불합리한 문제발생의 화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114) 지난해 9월에 임시의정원회의가 개회될 때에 주미외교위원부문제를 임시정부에 상세히 보고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극동에서 〈과감한 인물〉이 와서 새로 활동해야 한다고 건의했던 사실을 밝혔다.115)
한편 하와이의 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으로 새로 선출된 조선민족혁명당의 박상하는 〈임시정부의 연립내각이나 하와이 한족연합회의 연립위원회와 비스럼하게〉 연립주미위원부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116)
재미한족 전체대표대회는 10월28일 저녁에 로스앤젤레스의 국민회총회관에서 개막되었다. 하와이에서는 대표들이 참가하지 않고 워싱턴에 있는 김원용에게 대표권을 위임했다. 참가자들은 대한인국민회, 조선민족혁명단 미주총지부, 대한여자애국단, 북미대한인유학생회의 4개 단체 대표 19명(20명 가운데 1명 불참)과 하와이의 9개 단체를 대표한 김원용을 합하여 모두 20명이었다. 김원용은 혼자서 북미 4개 단체의 총 투표권 20표의 두 배가 넘는 45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준비회의에 참가했던 대한인동지회와 대한인부인회는 李承晩의 의향을 알아차리고 대회 하루 전인 10월27일에 대회불참을 통보했다. 불참이유는 첫째로 임시정부로부터 전보나 공문을 받은 바 없고 연합위원회로 보낸 전보에도 모호한 점이 많아서 金九 주석의 친필이 있기 전에는 아무 회의에도 참가하지 않겠고, 둘째로 그 전보가 임시정부 훈전이라 하더라도 준비회에서 그 전보와 위반되는 결의와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117)
동지회의 불참은 대회의 효력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대회는 동지회와 협력해야 한다는 임시정부의 훈령의 문구해석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회의는 공전했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가 동지회의 설득을 자임하고 나섰다. 학생회는 외교위원 선정에 대해 민중투표로 선거하거나 임시정부에 선정을 위임하자는 제안을 해놓고 있었다. 민중투표로 위원을 선정한다면 대회 결정에 따르겠느냐는 학생회의 전보를 받고 李承晩은 그러마고 타전했다.118) 동지회도 李承晩이 뽑히거나 말거나 민중투표에 부쳐서 행사한다면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했다.119) 그러나 민중투표안은 임시정부의 훈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지회 참가문제로 논란을 거듭하던 대표대회는 대회 8일째인 11월4일에 하와이대표회의와 북미대표회의에서 1차선정한 각 15명씩의 후보 가운데에서 투표로 외교위원 15명을 다음과 같이 선출했다.
김원용(위원장), 한시대(부위원장), 전경무(총서기), 한길수·裵義煥(서기), 김용성, 鄭基源 , 김호, 宋鐘翊, 김병연, 강택모, 김용중, 張基亨, 유진석, 김현구.
이들 15명 가운데에는 동지회 쪽 인사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각단체 대표회의를 주도한 북미국민회의 오만이었다.
그리고 대표회의는 새로 조직될 외교위원회의 예산으로 연간 3만 달러를 책정했다.120)
李承晩을 委員長으로 한 委員 9명을 臨時政府에서 새로 任命
연합위원회는 11월7일에 13개 참가단체 연명으로 대회결과를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인준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1월11일에 동지회 대표가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또 동지회 대표가 선출되지 않은 인선을 인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121)
전체대표대회 의장 한시대는 11월15일에 임시정부의 훈령대로 10분의 7 이상의 단체대표들이 참석한 회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임시정부가 어느 일파를 동정하기 위하여 다수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무슨 처사를 하시든지 더 준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임시정부에 타전했다.122)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李承晩을 위원장으로 하는 9명의 외교위원을 선정하고 11월21일에 연합위원회와 李承晩에게 각각 통보했다.123)
이승만(위원장), 김원용(부위원장), 정한경(총서기), 한시대, 김호, 이살음, 변준호, 안원규, 송헌주.
그것은 동지회, 북미국민회, 하와이 국민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 및 무소속을 고루 안배한 인선이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의 권위를 빌려 李承晩을 축출하려 한 연합위원회의 기도는 실패했다.
임시정부는 11월28일자로 「대재미동포 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가 주미외교위원부를 직접 선정하여 임명한 이유를 1)전쟁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대미외교의 긴급성, 2)정부의 위신 존중, 3)민족적 인격 제고, 4)재미동포의 신망 보전, 5)국내민중의 열망, 6)각 우방의 기대에 부응, 7)연래의 파쟁이 초래한 손실을 청산하고 최후 성공을 쟁취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과거의 위원부위원이나 각 방면에서 각기 파견하였던 인원이나 이번 대표회의에서 선출한 인원이나 어느 방면을 재론하지 말고, 또 잘못한 책임의 무겁고 가벼움을 비교해서 논하지 말고 이번에 정부에서 임명한 9인 위원과 간부 인물에 대하야 이 정부에서 신임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신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124)
같은 날 한시대는 임시정부에 전문을 보내어 李承晩을 맹렬히 비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가 李承晩과 동지회만으로 일하겠다면 뜻대로 하라고 을러댔다.125) 이제 임시정부와 한족연합위원회의 관계도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李承晩은 그 나름대로 임시정부의 조치가 불만이었다. 통보를 받은 李承晩은 임시정부에 다음 네 가지 조건을 타전했다.
(1) 매월 총액으로 2,000달러나 되는 9인의 봉급을 누가 지급할 것인가.
(2) 대표가 참가한 단체에서 옹호지지할 것을 약속할 것.
(3) 위원장이 분규를 일으키는 위원을 조치할 수 있을 것.
(4) 각 위원은 자문성질로 공작에만 복무할 것.
李承晩은 위의 네 가지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책임지기 어렵다고 말하고, 그럴 경우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만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1)항과 (2)항은 위원들이 취임한 뒤에 협의하에 해결하고, (3)항은 위원장이 독단으로 조처할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에 보고하여 처리하도록 하며, (4)항은 자문기관이 아니라 회의체라고 회답했다.126)
그러나 한족연합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통보를 불복함으로써 외교위원회의 구성은 흐지부지되었다. 연합위원회는 워싱턴사무소를 계속 유지했다.●
1) 「주미외교위원부통신」, 1943년 12월20일자, 「긴급서신」. 2)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302 Harry A. Eaton to Cordell Hull, Nov. 24, 1943, Adolf A. Berle to Harry A. Eaton.
3)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7호), 1944년 1월31일자, 「한국승인대회」. 4) Congressional Record,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eb. 7, 1949, “The Korean Movement, Extention of Remarks of Hon. J. Harry McGregor”. 5)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8호), 1944년 1월7일자, 「한인대회 소집에 대하야」. 6)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7호), 1944년 1월31일자, 「한국승인대회」. 7)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8호), 1944년 2월9일자. 8)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9호), 1944년 2월15일자, 「공함」 및 「리원순씨 각 지방 심방」.
9) 「新韓民報」, 1944년 3월9일자, 「社說: 주미한국외교위원부의 한족대회 소집 목적을 묻노라」. 10)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64호), 1944년 3월, 「한족대회 연기」. 11)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56호), 1944년 2월, 「1944년 2월26일발 중경전보」. 12)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62호), 1944년 3월9일자, 「김구씨 전보와 한인합동」. 13) 「新韓民報」, 1944년 3월2일자, 「임시정부대통령 김구씨의 3·1절 메시지와 재미한인의 희망」. 14)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1994, 國史編纂委員會, 389쪽, 393쪽.
15)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5) 임시의정원 Ⅳ」, 2005, 국사편찬위원회, 10쪽, 12쪽, 14~15쪽. 16) Hull to Gauss, March 28, 1944,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이하 FRUS), 1944, vol.Ⅴ., The Near East, South Asia and Africa, The Far East,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5, p.1290. 17) C.E.Gauss, “Memorandum of Conversation”, Apr. 4, 1944,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388쪽. 18) C.E.Gauss, “Memorandum of Conversation”, Apr. 12, 1944,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5) 臨政篇 Ⅹ」, 392쪽. 19) Gauss to Hull, Apr. 13, 1944, FRUS, 1944, vol.Ⅴ, p.1291. 20) Gauss to Hull, May 19, 1944, FRUS, 1944, vol.Ⅴ, pp.1292~1293. 21) 「國民報-太平洋週報」, 1943년 12월22일자, 「카이로선언과 위원회의 새 공작」. 22) 「國民報-太平洋週報」, 1943년 12월29일자, 「이박사와 그의 외교실책」. 23)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 결의안」; 「國民報」, 1944년 4월19일자, 「제3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위원회 결의안」.
24)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제1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 25) 「독립」, 1944년 8월23일자, 「하와이동포 군사후원회 조직」. 26)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조선민족혁명당의 연합위원회 탈퇴의 공문」. 27) 「독립」, 1944년 4월13일자, 「학생회의 탈퇴이유」. 28) 「독립」, 1944년 5월3일자, 송헌주, 「성명서」. 29)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社說: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와 북미한인학생회의 진퇴」. 3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84, “Report of UKC in America, Washington Office of Secretary of Republic Relations, June 5, 1944-February 5, 1945, p.5. 31) 「新韓民報」, 1944년 4월20일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3차 전체위원회 회록개요」. 32)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002, J.Kyuang Dunn to UKC Hawaii & UKC Los Angeles, June 20, 1944. 33) 李炫熙, 「柳一韓의 獨立運動硏究」,1995, 동방도서, 171~173쪽. 34) 洪善杓, 「在美韓族聯合委員會硏究(1941~1945)」, 2002, 漢陽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23쪽. 35) 「韓國臨時議政院會議陷入局之經過」(1944. 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1971, 延世大出版部, 351~352쪽.
36) 「韓國兩黨現狀及其爭執之點」(1944.1.1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1972, 延世大出版部, 61쪽. 37) 安炳武, 「七佛寺의 따오기」, 1988, 汎友社, 140쪽. 38) 「改憲에 대한 臨政首腦의 意見」,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68쪽. 39) 「第二十五週年三一節紀念宣言」(1944.3.7),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5쪽. 40) 「韓國兩黨現狀及其爭執之點」(1944.1.1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62쪽. 41) 「第二十五週年三一節紀念宣言」(1944.3.7),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5쪽. 42) 「韓國臨時議政院會議陷入局之經過」,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50~352쪽. 43) 「改憲에 對한 臨政首腦의 意見」,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69쪽. 44) 胡春惠著, 辛勝夏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 檀國大出版部, 1978, 237쪽. 45) 「吳鐵城이 朱家?에게 보낸 1944년 1월21일자 편지」 및 「朱家?가 金九에게 보낸 1944년 1월22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ⅩⅡ」, 1994, 國史編纂委員會, 33쪽 ; 「百萬元借款件의 發給에 關한 通報」,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0쪽. 46) 「韓國臨時議政院會議陷入局之經過」,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52쪽; 「會見金若山談話紀要」(1944.2.2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1~232쪽.
47) 「工作費用五十萬元借款要請」(1944.2.22) 및 「五十萬元借款要請에 對한 回信」(1944.3.2),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230~231쪽, 233쪽. 48) 「新韓民報」, 1944년 3월2일자, 「임시정부대통령 김구씨 三一절 메시지」. 49) 「韓國臨時政府工作計劃大綱」(1944.3.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417쪽. 50) 「韓國臨時政府工作計劃大綱」(1944.3.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416~419쪽. 51) 「何應欽이 朱家?에게 보낸 1944년 2월6일자 편지」 및 「朱家?가 何應欽에게 보낸 194년 2월10일자 편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7) 臨政篇ⅩⅡ」, 1994, 國史編纂委員會, 33~34쪽, 35쪽.
52) 中國國民黨 中央執行委員會, 「處理之韓國問題原則」(1944.4.13),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688~690쪽. 53)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의 책, 106쪽, 134~136쪽. 54)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임시정부연합내각 조직」. 55) 「新韓民報」, 1944년 4월13일자, 「능률있는 내각을 조직하라! 독립적 전투부대를 요구한다!」. 56) 「韓國黨派紛糾近況」(1944.4.8),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2)」, 62쪽.
57)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2005, 국사편찬위원회, 4~6쪽. 58)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6) 임시의정원Ⅴ」, 2005, 국사편찬위원회, 105쪽. 59)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6) 임시의정원Ⅴ」, 106쪽; 필자는 1944년의 개헌 때 주석의 권한이 더욱 제고되었다고 분석한 적이 있으나(「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臨時憲法改定過程을 중심으로」, 「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 1969, 東亞日報社, 929쪽), 이는 착오이다.
60)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4) 임시의정원Ⅲ」, 6쪽. 61)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2005, 국사편찬위원회, 312쪽. 62) 「新韓民報」, 1944년 7월20일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6차 임시의회선언」. 63) 「韓國各革命黨擁護第三十六屆議會」(1944.4.24), 秋憲樹編, 「資料 韓國獨立運動(1)」, 353~354쪽 ; 「新韓民報」, 1944년 7월20일자, 「4단체연합선언」. 新韓民報는 「선언」이 발표된 날짜를 4월21일로 적고 있으나, 내용으로 볼 때에 주석과 국무위원을 선출한 뒤인 4월24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64)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임시정부 연합내각 조직」. 65)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314쪽. 66) 趙擎韓, 「白岡回顧錄」, 1979, 韓國宗敎協議會, 354쪽. 67) 裵慶植, 「중경시기 『반한독당세력』의 임시정부개조운동」, 한국근현대사학회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상)」, 1999, 國家報勳處, 650쪽. 68) 「新韓民報」, 1944년 5월4일자, 「임시정부 연합내각 조직」. 69) 「新韓民報」 1944년 5월25일자, 「중국정계의 동정」; 「獨立新聞」, 1944년 8월15일자, 「한국임시정부의 확대 강화, 한중 각계에서 열렬한 경축을 표시」. 70) 「新韓民報」, 1944년 6월22일자, 「한중문화협회다화회」; 「獨立新聞」, 1944년 8월15일자, 「임시정부의 확대강화, 한중 각계에서 열렬한 경축을 표시」 및 「김주석 답사」. 71) 「大韓民國臨時議政院文書」, 1974, 國會圖書館, 850쪽. 72)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3호), 1944년 5월23일자, 「외교위원부에서 위원회를 조직」. 73)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461, Syngman Rhee’s Letter, May 24, 1944.
74)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6호), 1944년 6월15일자, 「협찬부조직」 및 Korean Commission Invites Public Participation in Our Cause. 75)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7호), 1944년 6월22일자, 「외교위원부 협찬부의 목적과 직무」. 76) 위와 같음. 77) 「新韓民報」, 1944년 6월15일자 , 「한국외교위원부는 소속정치기관을 조직」. 78) 「新韓民報」, 1944년 6월22일자, 「한국외교위원부의 정치기관 조직동기는 무엇」.
79) 홍선표 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회의록」, 2005, 연세대 출판부, 274~275쪽. 80)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8호), 1944년 6월29일자, 「협찬부 조직에 관하야」. 81)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14, Sidai Hahn to Kim Koo, June 13, 1944; 도915, Sidai Hahn to Kim Koo, June 14, 1944; 도916, Sidai Hahn to Kom Koo, June 16, 1944; 도917, Sidai Hahn to Kim Koo, June 19, 1944. 82)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19 Umhangsup to Press New Koreans , June 24, 1944. 83)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74호), 1944년 6월1일자, 「리승만 박사와 동부인은 두 연회에 초대를 받음」. 84) Robert T. Oliver, “Korea Now Plays Key Role in Pacific”, The Washington Post, Jul. 30, 1944. 85)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456, Warren Y. Kim to Robert T.Oliver, Jul. 31, 1944.; 도990 J. Kyuang Dunn to UKC Honolulu & UKC Los Angeles, Jul. 31, 1944. 86) 「國民報」, 1944년 12월20일자, 「한국독립당원으로 이승만씨를 허가」; 12월27일, 「리승만씨는 독립당에 입당」. 87) 趙擎韓 증언. 88) 「國民報」, 1944년 8월2일자, 「연합회 워싱턴 사무직원의 보고」;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1462, Commission - UKC Washington Office Meeting, Jul. 5, 1944.
89) 독립기념과 소장문서 도995, J. Kyuang Dunn to UKC Honolulu & UKC Los Angeles, Jul. 6, 1944. 9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92, J. Kyuang Dunn to UKC Honolulu & UKC Los Angeles, Jul. 26, 1944. 91)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2호), 1944년 10월25일자, 「외교위원부 개조에 대하야」. 92)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20, Umhangsup to Press New Koreans , Jul. 18, 1944. 93)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21, UKC to Kim Koo, Jul. 24, 1944. 94)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922-1, Sidai Hahn to Kimkiusic Kim Yaksan, Jul. 24, 1944; 도923 Sidai Hahn to Korean Independence Party, Jul. 24, 1944. 95)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322쪽, 330~331쪽, 333~334쪽. 96) 「新韓民報」, 1944년 8월17일자, 「임정의 외교위원부 개조책」. 97) 「앞길」, 1944년 8월29일자, 「在美韓族各團體에 向하여 駐美外交委員部改組의 電을 發送」.
98)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0호), 1944년 10월5일자, 「김구씨의 전보」. 99)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4호), 1944년 8월18일자, 「중경특전」. 100) Refound Shin, “Korean Commission in Washington D.C. To be Reorganized”, Korea Independence, Aug. 9, 1944. 101)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자료 970036-3, Kiusic Kim, Yaksan Kim to Korean Revolutionary Party, Aug. 11, 1944; Aug. 13 A.M. Radio. 102)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7호), 1944년 9월14일자, 「뉴욕 국치기념일 후소식」. 103)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8호), 1944년 9월21일자, 「동포여 힘쓰고 애쓰라」. 104) 「新韓民報」, 1944년 9월14일자, 「전체대표회 소집준비회 회록 요약」. 105) 「新韓民報」, 1944년 10월5일자, 「전체대표회 준비회록 초략」. 106) 「國民報」, 1944년 9월20일자, 「대표대회 개최」, 「각단체대표대회 진행」.
107) 「國民報」, 1944년 9월27일자, 「각단체대표대회 준비위원회 심의안보고서」, 「각단체대표대회 제2차 속회, 제3차 속회, 제4차 속회」. 108) 「國民報」, 1944년 10월11일자, 「연합위원회전체회 결의안」. 109)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89호), 1944년 9월28일자, 「오는 연합대회의 성공을 바람」. 110)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2호), 1944년 10월25일자, 「외교위원부개조에 대하야」. 111) 미국무부 문서번호 895.01/10-1444. Division of Japanes Affairs, “Memorandum”, Oct. 14, 1944. 112)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문서 970034-3, Syngman Rhee to Warren Y. Kim, Oct. 26, 1944. 113) 「독립」, 1944년 9월20일자, 「구미위원부 재조직과 평화회의」. 114) 「독립」, 1944년 10월4일자, 리강원, 「워싱턴외교부 개조문제」. 115) 「독립」, 1944년 7월12일자, 「시국과 우리민족운동」. 116) 「國民報」, 1944년 10월18일자, 박상하, 「경애하는 애국동지 앞에」. 117)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1쪽.
118)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6쪽. 119) 「독립」, 1944년 11월15일자, 「구미위원부재조직을 위한 연합대표대회의 전말」. 120)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13~15쪽; 「新韓民報」, 1944년 11월9일자, 「전체대표회 결의안」. 121) 독립기념관 소장문서 도5-1, 「재미한족 전체대표회 회록」, 17쪽. 122) 위와 같음. 123) 「新韓民報」, 1944년 11월23일자, 「전체대표회 회록」; 「주미외교위원부통신」(제97호), 1944년 11월30일자, 「임정 전보」. 124)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1) 헌법·공보」, 345쪽. 125)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문서 970036-3, Sidai Hahn to KOPOGO, Nov. 28, 1944. 126)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三)」, 197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744~7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