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구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4개월 구치소 생활… 鄭東泳 측, 『영장 없는 불법감금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 났다』
● 李龍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 『이철을 만난 기억은 있으나 정동영은 본 적 없다. 아마 정동영은 단순 가담자였을 것』
● 李龍澤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 『이철을 만난 기억은 있으나 정동영은 본 적 없다. 아마 정동영은 단순 가담자였을 것』
鄭東泳 前 장관은 최근 민주화운동의 「정통세력」임을 자부하고 있다. 과연 그가 정치적 修辭(수사)를 넘어, 치열한 민주화투쟁을 벌였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鄭東泳 前 장관은 서울大 국사학과 72학번이다. 서울大 문리대 72학번은 維新과 독재에 맞서 온몸으로 싸운 세대다. 1973년 10월 維新반대 시위를 비롯해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1975년 5월 긴급조치 반대시위 등 현대사의 굵직한 현장에서 몸으로 저항했다. 이들은 대학 졸업 후 「마당」이란 모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두 달에 한 번씩 모인다.
「마당」 멤버들은 「탄압받던 동지」가 아니라 主流(주류)의 위치에 서 있다. 鄭東泳 前 장관을 비롯, 李海瓚(이해찬) 前 총리,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대표적 예다. 박찬욱(서울大 정치학과), 최갑수(서울大 서양사학과), 조흥식(서울大 사회복지학과), 박영서(연세大 사학과), 안병우(한신大 사학과), 권학만(경희大 국제관계학과) 교수 등 대학교수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언론계에는 정해영(조선일보), 문형우(한겨레), 김일(중앙일보), 김석원(매일경제) 등이 있다.
鄭 前 장관이 서울大에 입학할 당시 서울大 문리대 대학 캠퍼스에는 維新반대 집회와 시위, 농성, 퇴학과 정학 처분만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공부에 매달렸던 기억은 별로 없다. 학교는 항상 불안정했고, 걸핏하면 문을 닫았다. 3학년 가을, 학적 변동자로 징집돼 군대에 갈 때까지 3년 동안 제대로 강의를 받고 책과 씨름하며 보낸 학기는 한 번도 없었다>(자서전 「개나리 아저씨」 中에서)
「책보다는 막걸리, 도서관보다는 유치장과 취조실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했다.
鄭東泳 前 장관은 「1974년 4월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에 가담해 3개월 동안 구속됐다」고 주장한다. 앞서 1973년 10월 維新반대 시위로 얻은 「구류 30일」 처분을 민주화 훈장으로 여긴다.
鄭 前 장관은 이후 민주화운동과는 무관하게 살았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18년(1978~1996) 동안 방송기자로 제도권에 안착, 안정적인 삶을 구가했다. 민청학련 운동을 같이 했던 많은 동기들이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고 거리로, 공장으로 도망치며 핍박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삶은 호사스러울 정도다.
『대학 시절, 성향이 과격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鄭東泳 前 장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투사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고 말한다. 李海瓚 前 총리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운동권이었다』고 평한다.
『그 시절, 李海瓚씨는 학생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서대문·안양 구치소, 대전·육군·안동·춘천 교도소를 전전했고, 「잠수」(수배생활)를 타며 서울 뒷골목 지리를 꿰뚫을 정도였어요. 학교에서 쫓겨난 뒤 책방을 하고 번역일도 했습니다. 고집이 셌고 논쟁에 적극적이었어요.
하지만 鄭東泳씨는 시위의 앞자리에 서지 않았고, 운동의 「브레인」 역할을 맡을 학번도 아니었습니다. 시대적 울분을 품던 여느 대학생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정치를 하면서 운동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왠지 낯설어요』( 언론인 출신 「마당」 멤버)
『대단한 운동권 출신으로 비춰지지만 성향 자체가 과격하지 않았고, 학창 시절 운동을 주도하진 않았어요. 정치권에 들어오니까 구속된 이력이 나오고 대단한 저항운동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곽성문 의원·서울大 국사학과 72학번 동기)
서울大 문리대 72학번 운동권 그룹이었던 「마당」 멤버는 이렇게 얘기했다.
『維新이라는 억압적 정치상황에 시대적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鄭東泳씨 역시 마찬가지였고 과격하기보다는 온순한 분이었어요. 그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그가 자서전(「개나리 아저씨」)에서 자신이 시대적 열정에 가득찬 것인 양 묘사한 것이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어요.
같은 72학번인 李海瓚씨의 경우, 운동권의 핵심이었어요. 치열한 反유신 투쟁의 현장, 거리투쟁에서 鄭東泳씨와 함께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鄭 前 장관조차 『대학 시절 李海瓚 따라다니다가 고생 많이 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다. 민주화 경력으로 친다면 두 사람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鄭 前 장관은 재수를 해서 동기들보다 한 살이 많았다. 자신의 전공보다는 정치학에 관심이 많아 정치학과 교수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鄭東泳 前 장관은 1973년 10월2일 維新반대 첫 학생시위로 기록되는 서울大 문리대 학생들의 데모에 참가했다가 「구류 30일」을 산다. 그날 시위로 도종수(학생회장·사회 71), 정윤재(정치 71), 황지우(미학 72), 김종명(종교 72), 김일(사회 72), 성상건(철학 72), 김영기(철학 72) 등이 구속된 것을 감안하면 가벼운 처벌이었다.
그는 남대문경찰서에서 이틀간 조사를 받은 뒤 「단순 가담자」로 분류돼 서울 서부 즉결심판소로 넘겨진다. 동기들은 『鄭東泳씨는 구류 30일이 아니라 25일을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鄭東泳은 출감 후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학교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읽은 책이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최문환의 「민족주의의 전개과정」, 김윤환의 「노동운동사」,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 등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사고의 틀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듬해 그는 학생운동의 분기점이었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다. 鄭東泳 前 장관은 어딜 가나 자신이 「민청학련 구속자」임을 내세운다. 朴槿惠(박근혜) 前 한나라당 대표와 만나서는 자신이 維新 시절 민청학련 연루자임을 내세웠다.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어 전국에서 1000여 명이 넘는 학생과 재야인사가 투옥됐다. 민청학련의 본산인 문리대는 초토화되었다. 나 역시 민청학련 가담혐의로 구속돼 3개월 동안 동대문서 유치장과 서대문 구치소에 투옥된 뒤 그해 가을 군대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개나리 아저씨」 中에서)
鄭東泳이 말하는 「구속」의 의미
鄭 前 장관은 자서전에서 「구속됐다」는 표현을 썼지만, 형사처벌의 의미는 아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어느 자료에도 그가 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았다는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에 대한 재판은그해 6월15일부터 10월11일까지 199일간 계속돼 비상군법회의 공판정은 연일 사형, 무기징역, 20년刑, 15년刑 등 유래 없는 중형이 내려졌다.
鄭 前 장관은 영장 없는 불법감금 상태에서 기소유예로 풀려 났다. 경북大 여정남이 사형을 선고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서울大 선배인 李哲(이철)·柳寅泰(유인태)가 무기징역, 동기인 李海瓚이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했다.
<두 달 동안 동대문 경찰서 보호실과 유치장에 불법 감금되었다가―당시는 영장 없이도 얼마든지 身柄(신병)의 구속 구금이 가능했다―6월 하순에 서대문 구치소로 넘어갔다. 수갑과 포승줄에 묶여 고등조사법원에 끌려가기도 했으나 구속자가 너무 많았던 탓인지 보름쯤 지났을 때 중앙정보부에 가서 각서를 쓰고 이용택 정보부 수사국장으로부터 이른바 정신교육을 받은 뒤 풀려났다.
5共 시절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이용택씨는 지난 97년 大選 당시 국민회의에 입당해 여권의 용공조작과 북풍공작에 대항하는 「북풍대책委」에서 나와 같이 활동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순가담 정도로 봐야겠지요』(李龍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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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유신정권에 항거한 대학생들을「유신학번」,「긴급조치」세대라고 부른다. |
『워낙 관련자가 많아 다 기억을 못 해요. 통일부 장관 시절 한 세미나에서 만났더니 「민청학련 사건으로 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때 조사받던 대학생이 1000여 명이 됩니다. 기억할 수 없어요』
―전혀 기억이 안 납니까. 잡혀 온 학생들을 직접 조사한 일은 없나요.
『조사는 담당과장이 합니다. 수사국장 밑에 과장이 10명이나 되고 직원 수는 수백 명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일일이 학생들을 만나 「앞으로 시위하지 말라」는 식의 각서를 받았겠어요? 당시 李哲씨는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있지만 다른 학생들은 전혀 만난 일이 없습니다』
―鄭 前 장관이 유치장에 3개월 정도 수감됐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당시엔 영장 없이 체포·구금이 가능하던 시절이었어요. 3개월 정도 구치소에 있었다면 주범이나 주모자가 아니었을 겁니다. 1000여 명을 조사해 200여 명이 법정에 섰음을 감안하면 단순 가담 정도로 봐야겠지요. 한마디로 維新반대 시위에 동참했던 많은 대학생의 일부였을 겁니다』
1974년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학생을 포함한 1024명이 조사를 받고, 이 중 253명을 군법에 송치하여 54명이 1차로 기소되었다』고 발표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維新독재가 터졌습니다. 신입생 때인데요. 그때는 동토의 왕국이었습니다. 아무도, 광주시민도, 서울시민도,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피 끓는 젊은이로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서울大 문리대 1973년 10월2일 維新타도 데모, 그것으로 저항의 횃불이 올랐습니다. 저는 그때 열심히 데모하다 끌려가서 구류 한 달 살고 나왔습니다.
3학년이 되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습니다. 서대문구치소에서 몇 달 살았습니다. 그리고 고등군사재판소 왔다 갔다 하다가 풀어 주길래 보니까 군대로 가라고 그래서 군대 갔습니다』(지난 3월11일 광주·전남 통일부국포럼 강연)
『1973년 10월2일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維新 타도」, 「朴正熙 타도」라는 봉화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때 친구들과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제 신세는 불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민청학련 사건이 터져서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고 강제징집이 돼서 보안사로 끌려가 간첩 누명을 쓰고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잡혀 들어갔는지 제가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지난 6월29일 광주·전남 경영자 총연합회 초청강연)
민주화 前歷의 실체
鄭東泳 前 장관은 자신의 민주화운동 경력을 어딜 가나 강조한다. 강연회 때마다 민청학련 시위하던 이야기를 꺼내고 구류를 살던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지난 두 번의 大選에서 한나라당을 이긴 것은 지역주의를 넘고 민주주의에 대한 대의와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민주세력 大통합을 통해 통합의 정부를 세우겠다』고 역설한다.
1970년대 초 維新반대 시위에 참가, 몇 달간 구치소에서 지냈던 시위 경험이 결과적으로 「민주세력 대통합」이란 명제를 끄집어 내고, 스스로 「민주세력의 적통」임을 내세우는 대의명분이 된 셈이다.
1970년대 초 서울大 동숭동 캠퍼스 4·19탑과 마로니에 주변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청년들의 그 후 험난했던 인생역정을 감안한다면 鄭東泳의 민주화 前歷(전력)은 「동지와 함께 불의에 맞섰다」라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울大 문리대 72학번이 주축인 모임 「마당」의 한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鄭東泳 前 장관이 운동권의 전면에 서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 시절, 얼마나 치열하게 민주화에 헌신했는지는 개인 「양심」의 차원입니다. 그가 「양심」에 떳떳하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다만 양심상 떳떳하지 않은데도 민주화 전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 민주화 얘기를 당장 접어야 합니다』
鄭東泳 前 장관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풀려난 뒤 강제 징집돼 1974년 10월 입대한다. 제대 후에는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한양大 뒤 판자촌에서 어머니와 아동복을 만들어 청계천 평화시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앵커와 기자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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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鄭東泳은 MBC에서 촉망받았고 굵직한 특종도 여럿 남겼다. 방송 앵커로도 활약했다. |
鄭東泳의 말솜씨는 뛰어났다. 군더더기가 없었고, 전라도 방언의 냄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입사 동기 중에는 신경민·구영회·강성주·조정민·배귀섭 등이 있었지만, 단연 그가 돋보였다. 「타고난 방송기자」였다.
前職 MBC 보도본부장의 회고다.
『방송을 잘해요. 복잡한 자료들도 요령껏 잘 간추려 보도했어요. 탁월했고요, 앵커 체질이었습니다. 사건기자처럼 경찰서 바닥에 뒹구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방송을 잘하는」 앵커 스타일의 기자였어요』
입사 3년 선배인 MBC 前職 계열사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방송을 맛있게 했어요. 발군의 자질에다 순발력 같은 애드리브까지 다 갖췄어요. 아마 MBC에 남았다면 차근차근 밟아서 사장이 될 재목이었습니다』
앵커가 아니라 기자로서 특종을 여럿 썼다. 기자 鄭東泳은 어린이날인 1983년 5월5일 발생한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과 관련한 중국 대표단과 외무부의 협상 보도를 자신의 첫 특종으로 꼽는다. 공로명 당시 외무차관과 未(미)수교국이던 중국 측 협상대표의 협상 결과를 가장 먼저 취재했다. 신문들과 경쟁사인 KBS가 「이견」, 「난항」, 「재협상」을 보도할 때 MBC는 「협상 타결」을 내보냈다.
1983년 11월 「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 보도를 비롯해 1986년 7월 「재산세 중과세 백지화」 보도, 1994년 7월9일 「金日成 시신 공개와 金正日 공식 참배」 보도로 社內 특종상을 받았다. 당시 취재지시를 내렸던 前職 기자의 회고다.
『당시 鄭東泳씨가 외무부를 출입했는데 아웅산 폭발과 관련한 「폭탄 배터리」를 취재해 왔어요. 배터리가 日製 「소니」인가 그래요. 북한 공작원이 사제폭탄에 日製 배터리를 많이 썼잖아요. 그게 그 사건을 푸는 단서가 됐죠. 그것을 鄭東泳씨가 특종보도했어요』
金日成 사망과 관련한 보도는 KBS가 3~4분 빨랐으나, MBC는 金日成의 유리관 속 시신 모습과 후계자 金正日 등 死後(사후) 북한 軍部(군부) 취재를 경쟁사보다 빨리 내보냈다. 鄭東泳 前 장관의 이야기다.
<북한 주석궁 내부가 공개되고 북한 권력의 핵심들이 금수산 의사당에 전원 도열했다. 화면대조 작업을 통해 이을설 국가호위총국장,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등 군 수뇌부와 당 실력자들의 얼굴을 기존 스틸사진과 대조하는 확인 작업을 북한부 기자 4명이 꼬박 밤을 새운 결과 인물의 90% 이상을 대조하는 확인을 할 수 있었다>
MBC는 이를 토대로 「金日成 사후 48시간 현재 북한 권력서열 변동 없다」는 골자의 기사를 내보냈다. 급박했던 당시 북한 군부의 단면을 잘 드러낸 분석 기사였다.
통일정책 계도에 기여한 「통일로 가는 길」, 「통일 전망대」
金日成 사후 보도에 鄭東泳 기자가 보여 준 활약은 북한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金日成 사망 이전인 1992년부터 북한부 기자로 통일원을 출입했고, 매주 토요일 오전 방송되는 「통일전망대」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LA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해 맡은 첫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입사 초년병 시절인 1982년에는 「통일로 가는 길」이란 프로그램 진행에 참여했다.
「통일로 가는 길」이란 프로그램으로 1982년 12월 구본홍 당시 MBC 정치부 기자는 국토통일원 장관상을, 鄭東泳 기자는 社內 표창장을 받았다. 「통일정책을 계도했다」는 공로였다. 참여정부 시절, 金正日을 만나고 親北的 통일정책을 외치던 통일부 장관이 젊은 기자 시절, 군사정부의 통일정책을 계도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북한 관련 프로그램은 안기부가 제공하는 북한 TV 녹화화면을 그대로 받아 써야 했다. 안기부는 군사 정부의 반공의식을 극대화하거나 북한의 주체사상을 비난하는 장면을 MBC에 전달했을 개연성이 크다. 집권초기 全斗煥 정권이 내건 강력한 사회정화 조치를 감안할 때 안기부가 「건네준」 북한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왜곡됐을 것이다.
그가 기자 초년병 시절, 북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나 「對北觀(대북관)」을 짧은 시간 안에 드러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前職 MBC 보도국 간부 두 사람의 이야기다.
『북한 프로그램 자체는 안기부 자료를 가지고 방송했습니다.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겠지요. 「통일로 가는 길」은 鄭東泳씨가 입사 4~5년차 시절에 했던 것인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소신을 드러낼 위치가 아니었을 겁니다. 군사정부가 제공하는 북한 그림(화면)을 소개한다는 의미였겠지요』
『군사정부 시절이잖아요. 북한內 분위기가 험악하고… 이럴 때일수록 북한을 제대로 알려 경각심을 주자는 차원에서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뉴스 말미에 2분짜리 북한 소개 프로그램이었지만, 정부 입장이 아닌 시민의 입장에서 접근하려 노력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향이 좋았어요』
이후 鄭東泳 기자는 「통일전망대」 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그러나 안기부의 천편일률적인 북한 화면 제공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 사람들의 생활형태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생활상의 생생한 자료보다는 주체사상과 군사·정치·경제 등 판에 박은 듯한 소재가 대부분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게다가 모든 북한 TV 자료의 방영 내용에 대해 안기부의 검열도 여전했다.
그는 경직된 방송에 갑갑함을 느꼈겠지만 어떤 것도 바뀌지 않았다. 金泳三 정부가 「국제화·세계화」를 외쳤지만 정작 민족문제에 있어선 「마이동풍」이었다. 그렇다고 방송앵커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할 용기도, 맞서 싸울 소신도 부족했다.
군사정부 시절 떠난 영국 유학(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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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東泳 기자는 1986년 영국 웨일스大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그는 이 시절을「가장 우아하고 행복스러웠던 시기」로 기억한다. |
역설적으로 全斗煥 정권이 기자들에게 해외연수의 길을 열어 주었다. 언론통폐합으로 신문이 독점시장을 구축하도록 만든 것이 5공화국이다. 서울의 신아일보를 폐간시키고 6개 중앙일간지를 조·석간으로 나누었다. 지방지는 「1道1신문」 원칙에 따라 대거 정비했으며 해당 언론사가 해야 할 기자교육을 한국언론연구원이 맡았다. 엄밀히 따진다면 기자들에게 특혜를 배푼 것이다.
기자들의 월급이 오르기 시작했고 세금혜택, 주택자금 융자, 해외연수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한국언론연구원이 기자들에게 해외연수를 보내는 관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 부처마다 기자들에게 선심성 해외여행을 보내 주었다.
鄭東泳 기자가 5共 정권의 폭압성 때문에 해외연수를 갔다고 하지만, 군사정부의 특혜를 받아 연수를 떠났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영국 유학 시절, 그는 바쁜 기자생활 때문에 소홀히 했던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가장 우아하고 행복스럽게 지냈던 시기」였다. 주말이면 영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방학 때는 스페인과 유럽대륙을 여행했다.
또한 골프를 처음 배우던 시절이었다. 웨일스大가 있는 「카디프」 지역은 폐광을 관광자원으로 개발, 주변에 골프장이 많았다고 한다.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골프 배우는 일도 열심이었다.
방송기자로서 영국 뉴스를 열심히 보았다. 졸업 논문 제목은 「BBC와 MBC 뉴스의 비교연구」였다. 당시 국내 상황은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1987년 6·29선언까지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민주화 희생자가 넘쳐났다. 그는 영국에서 한국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국외에서 우리나라 상황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고 또 부끄러웠다. 마치 우리가 국내에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군사쿠데타의 놀음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발짝 떨어져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니 우리는 비감스러울 정도로 정치적으로 미개한 나라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기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쥐구멍을 찾게 만들었다>
강성勞組 활동하다 LA특파원 발령
유학에서 돌아온 鄭東泳 기자는 2년 뒤인 1989년 5월 미국 LA에 파견, 특파원으로 3년2개월간 근무한다. 당시 LA에는 MBC를 비롯, 조선일보와 연합뉴스, KBS 기자가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특파원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前職 기자의 회고다.
『제가 알기로 LA 파견은 파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강경 노조활동 때문인지 회사에서 반대급부로 특파원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느 날 갑자기」 LA에 오게 된 것이지요. 잘은 몰라도 MBC 다른 특파원보다 나이가 어렸다고 기억합니다』
鄭東泳 기자는 심야에 방송되는 「0시 뉴스」를 진행하다가 MBC 간부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뉴스 밸류를 정하는데 「앵커가 고집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때는 아직 방송언론이 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0시 뉴스」 진행자를 1년 하다 쫓겨났습니다. 해외에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회사의 보호 조치였죠』(2002년 2월7일)
LA특파원 시절, 그는 두 아들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썼고, 취재원 관리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駐美 LA총영사관에 근무하던 외교관이나 재무관 등과 교분을 쌓아 귀국 후에 별도 모임을 가질 정도였다.
특히 고향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호남 특유의 친화력을 보이더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른 특파원들이 『정치를 하면 잘 하겠다.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절대 안 한다』고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LA특파원을 마친 뒤에는 유럽여행을 떠났다. 물론 회사의 지원을 받았다. 다른 특파원들이 부러워한 것은 물론이었다.
지난 8월5일 鄭東泳 前 장관은 1980년 광주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미래로 가야 하지만 그 미래는 역사에 뿌리박아야 한다. 1980년 광주와 1987년 6월이 있었기에 지난 10년의 민주정권이 있었다』고 했다.
민주화 항쟁 시절, 「구경꾼」 鄭東泳
그가 흘린 눈물은 영상 美學에 감동을 받아서일까, 불귀의 광주 영령에 대한 참회와 부끄러움의 눈물이었을까. 그러나 어떤 형식의 눈물이든 그는 떳떳하지 않았을 것이란 게 기자의 짐작이다.
1980년 5·18 당시 입사 18개월밖에 안 됐던 鄭東泳 기자는 광주 현장에 급파됐지만 기사를 쓸 상황이 아니었다. 취재팀 중 막내였던 그는 도청 앞 집회와 희생자들을 취재했지만 보도할 수 없었고, 광주 MBC 사옥이 성난 군중들의 손에 불타는 것을 망연자실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울 MBC 본사로 전화통화한 녹음테이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가 지난 6월29일 광주·전남 경영자 총연합회 초청강연에서 한 말이다.
『얼마 전 5·18 광주묘역에 참배하고 우연히 광주MBC에 들렀더니 당시 취재기자로 와 있을 때 서울 본사와 통화했던 내용이 녹음테이프로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화한 내용이 보관돼 있어서 그 내용을 들었습니다. 13분 정도 통화한 내용에 지금의 심정이나 청년시절의 심정이 똑같이 테이프에 담겨 있었습니다. 「광주는 민주주의가 만발한 공화국이다」 그런 이야기가 밖으로 알려졌으면 무사하진 않았었겠죠. 5·18도 구경꾼이었으나 참담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눈물을 흘리는 선배를 보고 「무력감과 굴욕감이 무엇인지 느꼈다」고 썼고, 「나는 구경꾼이었다」고 고백했다. 「기자를 그만둘까 생각까지 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고 했다.
鄭東泳 기자만이 아니라 당시 현장에 있던 모든 기자들이 무력감에 떨어야 했던 시절이다. 1980년 5·18은 대한민국 모든 언론이 참회록을 써야 한다.
아울러 鄭東泳 기자는 1987년 「6·29 선언」이 있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던 1987년 민주화 항쟁 당시 국내에 없었다. 기자 8년차였던 그는 「과감한 정리와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영국 웨일스大로 해외연수를 떠난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기자들이 한국언론연구원으로부터 경비 지원을 받아 미국과 영국으로 1년간 해외로 떠났다. 사실 全斗煥 정권의 암묵적 협조가 없었다면 연수 특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영국 유학 시절, 그는 BBC 방송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까지 「비감스러울 정도로 정치적으로 미개한 나라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고 했다.
영국 유학 시절, 「가장 우아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는 그의 고백처럼, 1986~1987년 당시 목숨을 내놓고 민주화 물결에 동참했던 이들의 희생에 견준다면 「정치적으로 미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경험은, 지나치게 나이브하고 순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權魯甲씨에게 정계입문 타진
25세 무렵 언론계에 발을 내디딘 그는 MBC 보도국을 떠날 때까지 18년 동안 방송기자로 일했다. 당시 「9시 뉴스데스크」 메인 앵커는 아니었지만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가 정치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 주위에서 반대하는 이가 있었지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를 정치로 이끈 이는 고교동창인 高道源(고도원) 당시 「월간중앙」 기자였다. 高씨가 그를 權魯甲(권노갑)씨에게 소개했고, 얼마 후 鄭 前 장관을 만났다. 權魯甲씨의 말이다.
『1995년 봄, 3~4월쯤, 당시 「월간중앙」 高道源씨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鄭東泳씨가 정치하기를 희망한다」며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高道源씨와 鄭東泳씨는 전주高 동창입니다』
그렇다면, 鄭 前 장관은 총선 1년 전 공천을 희망했고, 그 기간 동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방송 앵커 생활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당시에 이력서를 받지 않았어요. 그 후 鄭東泳씨를 만났습니다. 그가 「정치를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알았다. 다만 지금 전주에는 張永達(장영달) 의원하고 吳坦(오탄) 의원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전전긍긍할 테고 잡음이 나게 마련이다. 연말까지만 기다려서 정식으로 공천과정을 거쳐서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비밀로 하고 연말에 이력서와 입당원서를 받았습니다』
이력서와 입당원서는 15代 총선이 있기 5개월여 전인 1995년 말 權魯甲씨에게 제출했다. 鄭東泳 前 장관은 이성재 변호사와 함께 1996년 1월11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앞서 1월8일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한다고 밝힌 그는, 출마선언 사흘 전인 1월5일 기자로는 이례적으로 「주병진 토크쇼」에 출연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방송기자 경험담과 특종 이야기를 한참동안 했다. 나중 MBC 측은 그의 출연에 대해 『출마사실을 사전에 몰랐다』고 해명했지만 사전 의견교환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게 중론이다.
「서울이냐, 전주냐」를 두고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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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회의 대변인 시절 1997년 3월28일 金大中 총재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기 전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왼쪽)과 회견내용을 조율하고 있다. |
『다 결정하고 나서 찾아왔었습니다. 얼마나 고민을 했겠어요. 지역구를 서울로 할 것이냐 전주를 할 것이냐를 두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더군요. 그의 출마를 두고 내부적으로 설왕설래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체로 「鄭東泳은 정치하겠다는 뜻이 보였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인지 「잘되길 바란다」는 말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여권의 大選후보 가운데 鄭東泳 前 장관만 한 인물이 드물다. 정치인 중에서 그만한 행운아가 없다. 굼뜨지 않고 직설적이며 고비 때마다 정치적 소신을 드러내 왔다. 15代와 16代 총선 당시 전국 최고 득표를 얻었고, 金大中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했다.
2000년 「權魯甲 최고위원 2選 퇴진」 때도 「배신」의 욕을 얻어먹으면서까지 金大中 대통령 면전에서 소신발언을 했다.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그가 없었다면 각종 게이트에 휘청거리던 민주당이 살아날 수 없었고, 오늘날 열린당이 태어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鄭東泳이 외치는 「민주세력 大연합」
盧武鉉 후보와의 민주당 경선에서 끝까지 완주했으며, 참여정부의 정권 再창출을 일궈 낸 인물이 바로 그다. 2004년 7월 외교안보부처 팀장으로 승격된 부총리급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성과를 한껏 높였다.
그러나 정계입문 당시 보여 주었던 합리적 실용적 노선과는 점점 멀어져 나갔다. 그의 참신함은 「토크쇼」처럼 인기를 잃었고 「군더더기 없던 열정」은 대학 시절, 민주화 전력을 끄집어 내는 열정 이상으로 치닫지 못하고 있다.
鄭東泳 前 장관은 현재 「민주세력 大연합」을 주장한다. 하지만 청년 시절 그가 민주화운동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얼마나 처절하게 「전쟁」, 「독재」,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수구 세력과 맞서 싸웠는지 모를 일이다. 방송기자 시절, 군사정권과 투쟁하며 얼마나 언론자유를 고양시켰는지 그만이 답할 수 있다.
그가 自派(자파) 386 정치인을 등에 업고 「민주세력 大연합」을 외치며 1980년 광주와 1987년 민주화 항쟁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것은 낯설다. 그가 민주화 세력의 「적통」인지는 그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