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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중간 보스 출신 姜秉漢의 증언 - 조폭들의 세계

『신세대 조폭은 컴퓨터와 GPS 등 IT 장비로 중무장했다.
조폭에게 자금 대주는 귀족 조폭 전국에 30여 명 있다』

백승구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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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미수와 범죄단체 구성 혐의로 12년 수형생활, 2001년 斷指사건 주동
●『불행한 나의 삶을 청소년에게 反面敎師로 들려주고 싶다. 조폭 세계에 의리는 없다. 오직 돈이 지배할 뿐』
●『유명 조폭 두목 C씨, 교도소 안으로 마약까지 밀반입』
지난 1월 月刊朝鮮 찾아온「몰락한 조폭」
姜秉漢씨
  그의 밑바닥 인생은 이랬다. 23세에 살인미수로 10년간 수형생활을 하는 중에, 교도소 인질사건으로 2년 형을 추가받아 1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중 9년을 독방에서 살았다. 출소 후 중부권 최대 폭력조직인 「송악파」 副두목을 했다. 2001년에는 고이즈미 일본 前 총리의 신사참배에 항의, 30여 명의 행동대원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조폭 출신 姜秉漢(강병한·45)은 초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10代 초반부터 충남 천안시내를 배회했다. 배운 것은 싸움질뿐이었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그 탓에 집보다 소년원에서 숙식하는 일이 더 많았다. 스무 살이 돼서는 이름깨나 날린 「천안곰」 조일환 밑에서 일했다.
 
  姜秉漢은 그쪽 세계에서 「시라소니의 재림」, 「싸움닭」으로 불렸다. 싸움질에 특이한 능력을 보였다. 汎서방파 두목 김태촌과는 「형님·동생」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2001년 斷指(단지)사건 이후 70여 명으로 이뤄졌던 그의 조직은 검·경의 단속으로 사실상 해체됐다.
 
  이후 술집·오락실·식당을 운영하며 건달 행세를 하다가 2004년 조폭 세계에서 홀연히 잠적했다.
 
  조폭계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숨어 있는 그를 찾아와 『돌아오라』며 협박했다. 그는 완강히 버텼다.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으면 다 함께 죽는 방법을 택하겠다』고 했다. 2~3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는 사이 조폭조직의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서서히 자유의 몸이 돼 갔다.
 
  지난 1월 말 그가 기자를 찾아왔다. 168cm의 작은 체구였지만, 떡 벌어진 어깨에 유난히 큰 주먹이 눈에 띄었다. 그는 月刊朝鮮이 보도한 「汎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초라한 몰락」(2006년 12월호)을 읽고 왔다고 했다. 姜씨는 『全斗煥 대통령 시절 교도소에 들어가 金大中 대통령 때 세상에 나온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라도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며 『내 삶을 외부에 알려 다시는 나 같은 「비참한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기자는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터뷰는 곤란하다. 자칫 당신의 삶이 美化(미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그는 말없이 돌아섰다.
 
  며칠 후 그가 소포를 보내왔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원고지 한 뭉치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교도소 안에 있을 때 틈틈이 쓴 글이다. 이 원고를 토대로 조만간 자전적 소설을 낼 예정이다. 시간 되면 읽어 보라』고 했다.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와 소포가 배달된다. 『시간이 되면 읽어 보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2월 말쯤에서야 원고를 펼쳐 봤다.
 
  원고지 뭉치에는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대전교도소장·청송교도소장·서울지방교정청장을 지낸 법무부 고위공무원 출신인 안유씨가 姜씨의 자서전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에 보낸 추천사였다. 안씨는 姜씨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毒氣와 반항
 
1986년 폭력 조직을 이끌어온 혐의로 수배를 받아온 김태촌씨가 인천에서 검거되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30년 넘게 교정직에 있으면서 참으로 많은 인간 군상을 보았다. 한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와 참회와 회한의 고통에 잠 못 들어 하던 사람들을 보았다. 선한 사람도 있었고 악한 사람도 있었다. 범죄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마구니가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소름 돋는 사람도 보았다.
 
  「인간학교」를 펴낸 강병한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과장으로 임지를 돌 때 만났던 강병한은 사고뭉치였다. 거칠고 독기로 외연과 내연을 뿜어 대는 재소자들을 단숨에 휘어잡고 직원들까지 마음대로 어떻게 해보려던 폭풍의 사내였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마산에서였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그때 강병한은 7년여 형기를 남기고 있었는데 독기와 반항심이 가장 컸던 시절이었다. 1년 남짓 그와 마산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강병한은 그 후로 타지 이감을 거듭하면서도 내게 끊이지 않고 편지를 썼다. 나는 인간의 천성은 선하다고 믿는다. 강철 같은 완력의 사나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혼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알고 새삼 교정직에 희망을 갖기도 했다>
 
  지난 3월 초 그를 만났다. 그는 『연락이 안 올 줄 알았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姜씨에게 「인터뷰 기사는 기대하지 말라. 다만 최근의 조폭 실상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그가 엉뚱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답변하겠다』고 했다.
 
 
  의리 사라진 조폭 세계
 
청송 제2교도소 재소자들이 사방 8m 높이의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운동장에서 족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조직폭력배의 소득원 연구」, 「폭력조직의 서식환경 연구」 등을 보고서로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요즘 조폭은 돈 없는 선배에게 인사도 안 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건달 세계도 많이 달라졌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의리 없는 것이 건달 세계입니다. 행동대장이나 똘똘한 친구들은 자기 밥그릇은 몰래 챙겨 놓고 건달 생활을 합니다. 조직보다 자기가 우선이지요. 돈이 최고입니다. 돈이면 형님이고 뭐고 다 배신하는 게 요즘 건달 세계입니다. 돈으로 상대 조직원을 포섭하기도 해요. 조폭 세계에서도 스카우트가 있는 셈이지요. 그런 세계에 무슨 의리가 있겠습니까. 형님 대신 감방 가는 얘기는 옛날 얘기입니다. 요즘 잘못 걸리면 최하가 10년형이에요. 누가 그런 일을 대신하겠습니까』
 
  ―의리도 없는 폭력조직이 사회에 계속 기승하는 이유는 뭡니까.
 
  『먹고살기 위해서지요. 사회에서 제대로 직업을 갖기 어려우니까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이 때문에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요』
 
  ―신참 조직원은 어떻게 공급합니까.
 
  『입사시험을 통해 뽑는 것도 아니고 현재까지는 전통적인 방법을 쓰는 것 같아요. 학교 주변이나 시내 사정을 잘 아는 행동대원이 적당한 녀석을 물색하지요. 조직이 원하는 놈은 「깡이 있는 놈」입니다. 건달 생활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애들은 안 받아들여요. 영화에 나오는 조폭 세계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 친구는 문제아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가입식을 하거나 행동강령을 만들기도 합니까.
 
  『그런 일은 절대 안 합니다. 조직 이름도 전혀 만들지 않아요. 언론에 나오는 ○○파 같은 식의 이름은 수사기관이 붙여 준 이름이지요. 단체 이름이나 강령이 외부에 알려지면 곧바로 범죄단체 구성 혐의로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올라요』
 
  ―요즘 조폭은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경제가 어려운 탓에 건달 세계도 많이 침체돼 있어요. 경찰이 조직을 집중 단속하고 있고, 시민들의 의식 또한 많이 바뀌다 보니 살기가 더욱 힘들어졌어요. 일반 시민을 협박하다가는 곧바로 철창 신세가 됩니다. 과거처럼 강탈하고 협박하는 건달은 많이 사라졌어요. 대신 기업형 건달이 많아졌어요.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기업활동을 하면서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가지요. 경찰이 그런 조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요』
 
  ―전국의 폭력조직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과거보다 줄어들었습니까.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어요. 전남의 한 항구도시에는 지금도 60개의 패거리가 있어요. 서울의 미아리·장한평·영등포 그리고 부천市 등에는 여전히 그쪽 세계가 존재하지요. 강남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력들이 서로 점조직 형태로 활동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경찰이 파악하기 힘들게 돼 있어요』
 
 
  귀족 조폭
 
   ―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폭력조직의 사업 유형에 따르면, 유흥업소·오락실·게임장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 67%이고, 이들 업소를 「간접관리」하는 것이 61%였습니다.
 
  그 외 건축·부동산개발·시행사업(49.1%), 사채업·채권추심업(41.7%), 도박장·사설경마(32.4%), 연예사업(29.6%), 직업소개소(27.8%), 유통업(9.3%), 기업인수(8.3%)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비교적 맞아요. 돈 되는 사업에는 무조건 뛰어듭니다. 한 가지 유념해서 볼 게 있어요. 귀족 건달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언론이나 수사기관에 전혀 포착되지 않은 조폭들입니다. 그들은 조폭들에게 사업자금을 대줍니다. 조폭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기도 하지요. 일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의 이름이 절대 공개되지 않도록 방어벽을 단단히 만들어 놓습니다』
 
  ―귀족 조폭은 얼마나 됩니까.
 
  『주로 서울에 포진돼 있지만 지방에도 있어요. 30명 정도 됩니다. 그들 중 일부는 IT 등 첨단산업에도 진출합니다. 조폭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신종 건달도 생기고 있어요. 과거에는 건달들이 사람을 찾을 때 알고 지내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 주소지를 알아냈는데 요즘은 그게 어려우니까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요. 컴퓨터나 고성능 도청기구, GPS로 중무장해 「손볼 사람」을 찾아냅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사람도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식은 죽 먹기지요』
 
  ―귀족 조폭 중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만, 이 자리에서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의 사업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수백억원대에서 많게는 수천억원대에 달해요』
 
  ―국가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해외 범죄조직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어 봤습니까.
 
  『국내 마약조직이나 연예계를 장악하고 있는 건달들과 손잡고 일한다고 들었어요. 재미있는 사실은 국내 건달들도 해외로 진출하지요.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주로 동남아지역에 나가요. 제가 아는 한 호남 조직은 韓流(한류) 분위기를 등에 업고 태국에 진출했는데,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냥 무턱대고 해외로 나가지는 않을 텐데요.
 
  『철저히 현지 실사를 합니다. 투자자로 위장해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해요. 그렇게 해서 자리를 잡으면 동료 조직원을 대거 불러들입니다』
 
  ―현지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유흥업소를 운영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돈이 그쪽보다 가치가 높으니까 돈놀이도 해요. 국내와 연계된 사업을 하기도 하고, 현지실정에 맞는 업종을 골라 현지화하기도 합니다』
 
  姜씨의 얘기를 한참 듣다가 「건달 생활을 청산했다」는 그가 최근 조폭 정보를 어떻게 꿰뚫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도 조직 생활을 계속하는 것 아닙니까.
 
  정색을 하고 물었다.
 
  『詩人 윤동주의 「서시」를 감옥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첫 대목을 인용하고 싶네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인터뷰 기사를 원하지도 않아요. 月刊朝鮮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과거를 반성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더욱 강하게 함이었어요』
 
 
 
교도소 요지경

 
姜씨는 교도소에서 정치인과 민주화 인사를 만났다. 1998년 소설가 황석영씨가 동료문인과 친지들에 의해 헹가래를 받으며 출감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姜씨와 저녁식사를 한 후 헤어졌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一抹(일말)의 솔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수사기관을 통해 그의 최근 행적을 확인했다. 그를 잘 아는 경기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문제 없이 조용히 살고 있다』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그가 보낸 원고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의 수형생활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듯했다.
 
  그는 1985년 안양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시작해 원주·마산·홍성·공주·대구·청주·대전·청송·광주 교도소를 옮겨 다녔다. 12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세상은 군사정권에서 민주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교도소는 바뀌지 않았다. 교도소 내의 폭행은 金泳三·金大中 정권 때도 계속됐다고 한다. 교화를 목적으로 만든 교도소가 재소자를 악질로 만드는 일도 여전했다. 글의 일부이다.
 
  <전두환 때였다. 전국 교도소에 설치된 순화교육은 엉뚱하게도 유격훈련으로 변질되어 재소자들의 악과 깡만 돋웠다. 삼청교육대가 설치되면서 순화교육은 교도소까지 들어온 군사문화였다. 기합과 폭력은 날로 심해 갔다. 욕과 구타로 사람을 교육시킬 수 있다면 세상은 이미 천국이 되었을 것이고 세상의 악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운동권 학생 40여 명을 순화교육을 한다는 명목으로 M16소총으로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교도소에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며 「교도소 요지경」을 자세히 적었다.
 
  <교도소에는 「도둑놈」이라는 재소자와 「마개비」라는 교도관들의 세계가 있다. 두 개의 세계는 바다와 같은 먼 거리를 두고 서로 경원하다가, 어떤 때는 성벽 하나를 두고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기도 한다. 이따금 정전 협정을 맺어 평화를 추구하고 때로는 형님·동생 하며 인간적인 교류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근본은 언제나 경원과 경계의 대상이다.
 
  교도소 안은 요지경 속이다. 교도소 안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들어온다. 그러나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 백이면 백이 다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드물다. 모두가 변명을 댄다. 사람을 죽이고 들어온 사람도 변명을 늘어 놓는 것이 교도소다>
 
  姜씨는 감옥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났다. 세상이 다 아는 정치인·민주화 인사를 만났다.
 
  <노태우 때였다. 운동권 사람들이 사동을 꽉 채울 정도로 많았다. 김○○(현직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물었다. 그는 거침없이 시국상황을 말했다. 「세상은 아직도 멀었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 때부터 계속되어 온 무식하고 무자비한 군인들의 정권이 끝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고 했다.
 
  황석영을 만났다. 그는 북한을 다녀온 이유로 들어와 교도소에 들어왔다. 독방을 쓰고 늘 혼자 지내기를 좋아했다. 그에게 담배를 건네고 인사를 하곤 했다. 또 한 사람이 있다. 문익환 목사였다. 문목사는 단식의 대가였다. 그 나이에 그 정도로 단식한다는 것은 초능력자처럼 보였다. 그는 노인의 몸으로 열심히 테니스장을 걸으며 운동을 했다. 女사동과 취장(식당) 사이에 작은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소내(所內·교도소 내)에서는 「양은이 테니스장」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조양은씨가 재소자들의 황제처럼 행동하며 개인 운동장으로 사용하는 곳이라 그렇게 불렀다>
 
 
  0.8평의 철창 감옥
 
청송교도소의 독방 내부.
  姜秉漢은 오랜 기간 독방 생활을 하면서 철저히 외로웠다. 24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0.8평짜리 독방에서 혼자 살았다. 그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재소자들끼리 뒤엉겨 싸우다가 얻어맞는 일이 오히려 혼자 있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창을 붙잡고 먼동이 트도록 소리도 쳐봤다. 그때마다 그에게 돌아오는 건 진정제 주사였다. 그는 멀쩡한 사람이 미쳐 가는 걸 직접 체험했다. 그때의 유일한 친구는 성경이었다. 그는 구약·신약 성경을 여섯 차례나 읽었다.
 
  姜秉漢씨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40代 중반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질곡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됐을까.
 
  천안에 살고 있는 그는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다가 최근에 그만뒀다고 한다. 동네 선후배들이 찾아오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姜씨는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서울 광화문에서 오후 3시에 만나자」고 하면 3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 기자를 기다렸다.
 
  ―원고를 끝까지 읽어 봤습니다. 교도소에서 고생을 한 것 같더군요. 독방생활이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아니 실제로 미쳐 버렸죠. 정말이지 사람 살 곳이 못 돼요. 온갖 생각이 다 떠올라요. 저는 먼저 「누구 때문에 내가 이 신세가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복수심 때문에 한동안 잠을 못 잤지요. 「출소하면 누구 먼저 죽여야겠다」며 살생부까지 만들었어요. 그놈을 어떤 식으로 죽이겠다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생각해 뒀죠. 그러다가 말할 상대가 없고 나 자신의 분에 견디지 못해 결국 미쳐 버린 겁니다.
 
  自我(자아)인식이 없어지더군요. 또다른 나 자신이 철창에 갇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밤새도록 철창을 붙잡고 소리를 치는 나를, 0.8평짜리 방에서 뒹구는 나를 쳐다보는 겁니다. 몇 번씩 정신이 왔다갔다 했어요. 어느 날 성경이 제 손에 잡혔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섯 번을 읽었어요. 그러면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어요』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과 주먹깨나 쓴다는 자만심이 조폭 세계로 빠져 든 첫 번째 원인인 것 같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못 배운 탓이겠지요. 핑계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정환경이 나빴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지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고요』
 
  ―싸움질하는 것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싸움은 타고난 것 같아요. 힘이 세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게 못 되지만 수백 번을 싸웠는데 진 적은 없어요. 교도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부산 출신 건달들이 제가 들어왔다고 신고식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출력(재소자들이 所內에서 노동을 하는 것)하러 나가다가 그쪽 패거리 열두 명과 싸움이 붙었어요. 다 때려 눕혔습니다. 상대방을 氣(기)로 제압한 후 급소를 치면 그냥 넘어져요.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거지요』
 
 
 
마약과 난동 사건

 
  이 일을 계기로 姜씨는 교도관들 사이에 요주의 인물이 됐다고 한다. 마침내 일이 터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직전이었다. ○○교도소 난동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교도소로 移監(이감)된 후 그곳에서 아는 형님들을 만났어요. 한 사람은 「서진 룸살롱 사건」의 주모자였고, 또 다른 사람은 충청도 건달들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형님들보다 한 단계 위인 「거물」 C가 있었어요. 세상이 다 아는 조폭 두목이었지요.
 
  C는 교도소內 총반장이었어요. 총반장은 「회장」이라 불리며 온갖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난 게 화근이었어요. 호남 출신 건달들이 C를 따르고 있었는데 충청도 출신인 우리와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C씨가 교도소로부터 특혜를 받았던 겁니까.
 
  『所內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어요. 교도소에 술과 담배가 들어와 유통된다는 얘기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마약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믿지 않겠지만 그 교도소에는 마약이 들어왔어요. 교도관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야간 재소자들의 이동은 물론이고 옆방의 재소자들끼리 노름판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부패의 배후에 C가 있었어요』
 
  ―두 패거리가 한판 붙었던 겁니까.
 
  『당시 재소자 중에 윤○○이라는 곱상한 아이가 있었어요. 교도소를 장악한 C의 성폭행 상대였지요. 마약을 하며 서로 그짓을 한 겁니다. 어느 날 윤○○이 히로뽕에 취한 상태로 취장(식당)에 들어와 펄펄 끊는 기름솥 안으로 뛰어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름에 살이 튀겨지는 소리가 났어요. 「아악」 하는 그의 비명 소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해요. 재소자들이 달려들어 꺼냈지만 이미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일이 마약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재소자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사건은 흐지부지됐어요. 교도소 측은 사건을 덮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윤○○의 억울한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을 교도소 측에 요구했어요. 저 또한 살인미수로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일을 도무지 묵과할 수 없었지요. 저는 동료 재소자들을 모아 「샤우팅」(재소자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것)했습니다. 저의 건의는 묵살됐고 보름 동안 징벌방에 감금됐습니다』
 
 
  「맛이 간 인생, 죽어도 상관없다」
 
姜씨가 쓴 육필 원고와 동료 행동대원과 함께 찍은 사진.
  ―조용히 넘어갔습니까.
 
  『일을 벌였죠. 징벌방을 다녀온 후 저는 철판을 갈아 만든 칼을 들고 취장을 점거했습니다. 교도소가 또다시 발칵 뒤집혔어요. 경비대원들은 총기로 무장하고 취장을 완전히 포위했고, 당시 보안과장은 농성해제를 요구하며 협상을 걸어왔어요. 저는 몇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며 끝까지 버텼지요. 20여 시간 동안 취장을 점거했습니다. 식당을 점거한 탓에 1000명이 넘는 재소자들의 식사는 대전교도소에서 공수해 왔어요. 결국 교도소 측이 제 요구를 들어 주겠다고 해서 농성을 풀었는데 속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다시 징벌방에 들어갔어요』
 
  ―얼마나 있었습니까.
 
  『한 달 만에 나왔습니다. 독기가 오르더라고요. 취장점거 사건보다 더 큰일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일을 계획하는 도중에 교도소 측에 들통나자 저를 포박하려는 거예요. 달아났지요. 所內에서 추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여자 재소자들이 생활하는 건물로 뛰어 들어갔어요. 저는 여직원 한 명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판사판이었어요. 「어차피 맛이 간 인생,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급해진 교도소 측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가 있는 女재소자 건물에 연막탄과 가스탄까지 마구 쏘아 댔어요.
 
  인질극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됐습니다. 발악을 한 겁니다. 그러다 직원들의 협박과 설득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제 머리 위에 뭔가 묵직한 것이 날아왔어요. 뜨거운 피가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면서 저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떡을 칠 때 나는 소리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났지요』
 
 
  『경찰, C씨 내사 중』
 
  재소자 姜秉漢은 所內 난동 혐의로 기소돼 2년 형이 추가됐다. 사건의 발단이 된 조폭 C씨는 그 일로 다른 교도소로 이감됐다고 한다.
 
  ―그 이후 C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다른 교도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가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오더군요. 그 이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C씨는 요즘 뭐합니까.
 
  『몇 년 전 출소한 그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걸로 알려졌지만 과거 생활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2년 전의 일입니다만 그가 강원랜드 VIP실에서 도박하다가 돈을 다 날렸다고 해요. 도박하러 마카오까지 다녀온 걸로 압니다. 조폭은 이름 자체가 흉기입니다. 경찰이 또 다른 일로 그를 內査(내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교도소의 요지경에 대해서도 글을 썼더군요.
 
  『저의 얘기가 현재의 교도소 사정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봐요. 교도행정이 굉장히 투명해졌다고 합니다. 다만 지난 얘기를 하는 것은 교도소가 추가범행의 「학습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노파심에 얘기를 꺼낸 겁니다. 교도관을 왕에 비유한다면 돈은 좌의정, 폭력은 우의정이었어요. 교도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수긍할 겁니다.
 
  교도소는 범죄 유형에 따라 재소자를 관리합니다. 건달들은 건달끼리 모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서로 먹고 자고 하면서 정이 들고 그러면서 또 다른 「사업」을 모색하지요. 전라도 촌구석 건달이 경상도 촌구석 건달과 서로 친구가 되는 일이 흔해요.
 
  건달들은 교도소 안에서 한두 명의 보스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교도관들과 상황에 따라 긴장ㆍ협력관계를 유지해 갑니다. 건달은 교도소 안에서도 조폭 짓을 해요. 그들은 所內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종횡무진했습니다』
 
  ―요즘에도 교도소에 마약이 밀반입될까요.
 
  『세상이 몇 차례 바뀐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설마 있겠습니까』
 
  ―1998년 출소한 후 또다시 폭력조직에 가담한 이유는 뭡니까.
 
  『부끄럽습니다만, 그 생활을 쉽게 정리할 수 없었어요.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그쪽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달 생활이 이어졌어요』
 
  ―2001년 광복절을 앞두고 서울 독립문 인근에서 조직원 30여 명과 함께 斷指(단지)사건을 주동했습니다. 고이즈미 前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와 독도 망언을 문제 삼아 일으킨 일이라고 하지만 유치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수사기관은 「송악파」가 사전에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도모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송악파 조직원들은 斷指사건이 아닌 개별 사건에 의해 모두 구속됐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일본 정부가 斷指 사건에 대해 항의하자, 수사기관이 별개 사건을 이용해 조직을 일망타진한 것으로 압니다』
 
 
  뒤로 가는 인생
 
  ―조직 생활을 하면서 김태촌씨와 같이 「사업」을 한 적이 있습니까.
 
  『말하기 부끄럽지만 몇 번을 같이 했습니다』
 
  ―김태촌씨를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감옥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지냈어요』
 
  ―경찰에 따르면, 김태촌씨는 이름만 남은 「양아치」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한때 서울을 휘젓고 다녔지만 감옥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사회 물정을 전혀 몰라요. 이제 또다시 나쁜 짓을 하면 끝이라는 걸 스스로가 잘 압니다. 그가 권상우씨를 협박했다고 알려졌지만 그 일은 양측이 없던 일로 합의했다고 해요. 그런데 검찰이 그 부분을 문제삼았다고 합니다』
 
  ―김태촌씨와 가끔 연락을 합니까.
 
  『그는 지금 진주의 한 병원에서 수형생활을 하고 있어요. 폐가 좋지 않아요』
 
  ―폭력조직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뭡니까.
 
  『감옥에서 허무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인질 사건도 벌여 보고, 히로뽕 사건도 경험해 보고 사회에서 못 한 일을 교도소 안에서 다 해본 겁니다. 출소 후 다시 건달 생활을 했지만 예전 같지는 않았어요. 제 인생이 자꾸 뒤로 간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텅 빈 건달 인생이 비참해지더라고요.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말입니다. 제 나이 마흔다섯에 남은 것은 고통과 좌절뿐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 겁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한 게 없어요. 한 후배가 「천안 인근의 신도시 탕정에 근무하는 삼성 직원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해보라」고 했는데,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꼭 한 가지 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그게 뭡니까.
 
  『저의 밑바닥 인생을 청소년들에게 反面敎師(반면교사)로 들려주고 싶어요. 저 같은 불행한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말이죠.
 
  조폭 세계에 남자의 의리나 꿈이 사라진 지는 오래입니다. 오직 돈이 지배할 뿐이죠. 진짜 의리를 꿈꾼다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을 위해 의리를 지키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기자는 그를 여러 차례 만났지만 인터뷰 기사를 약속하지 않았다. 姜씨에게 「기사가 나간다」는 얘기는 원고 마감 당일에서야 알려 줬다. 수화기에 흘러 나온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바르게 살겠다」는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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