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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完이 만난 사람] 朴楠杓의 현대사

6개국에서 다섯 개 언어로 邊方을 떠돌다!

김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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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없거나 약하면 가족·언어·고향 없거나, 그 뿌리가 흔들립니다』

朴楠杓
1923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생. 일본 중앙大 법학과 중퇴. 육사 2기, 육군大·연세大 대학원 졸업. 한국전쟁 참전(소령 5사단), 맹호사단 참모장(대령), 백마사단 연대장(대령), 육군정훈학교 교장(준장), 보병21사단장(소장), 국방대학원 부원장, 논산훈련소 소장 역임. 1970년 1월 예편. 대한 사이클 연맹 회장 역임. 1973년 5월 渡美.
소련에서 출생, 중국 훈춘서 성장
  그의 삶은 기구했던 한국 근대사의 實錄(실록)이다. 가족은 邊境(변경)의 풀꽃이 되어 흩어졌고 그는 사고무친으로 東北亞(동북아)를 떠돌았다. 삶이 번번이 자신을 속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1923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중국 훈춘에서 성장했고, 일본 東京에서 학령기를 보내고 국군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삶은 한 세기의 자오선을 넘어선 뒤에야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가 겪은 세월은 창망한 가운데서 恨(한)이 서려 있었고, 외로운 가운데서 긍지를 지녔습니다. 독립운동으로 조부모와 부친을 겨레에 바친 자손으로 저의 가슴은 언제나 뜨거웠고 아팠습니다』
 
  朴楠杓(박남표·84) 예비역 소장. 육사 2기로 朴正熙(박정희) 前 대통령과 동기다. 그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육군 소장에서 예편한 뒤 1973년 미국에 정착, 현재 워싱턴州 타코마에 살고 있다. 벌써 아내와 함께 한국을 떠난 지 33년이 지났다.
 
 
  친척 60여 명이 타슈켄트에서 생활
 
아홉 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끝내 만나지 못했다. 1989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어머니 묘소에서.
  지난 10월2일 중국으로 혈육을 만가기 위해 일시 귀국한 朴장군 내외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를 만난것은 지난 6月 이후 세번째다. 온화한 미소에 정감 있는 어투는 그가 武官(무관) 출신임을 잊게 만들었다.
 
  그는 잘 쓰지 않던 한국어를 두서없이 쏟아냈다. 수다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그는 『짓밟힐 만큼 짓밟혀 왔으나 나름대로 일어서 이제 혼자가 아니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동생들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살고 있다. 친동생과 친누이 동생 집안의 후손만 25명에 이른다. 숙부와 5촌 식구에다 알마아타에 사는 외가까지 합치면 60여 명에 육박한다.
 
  북한에는 큰고모의 아들·며느리·손자들이 살고 있으며, 중국 만주에는 숙부네와 막내 고모 식구들, 4~8촌, 심지어 12촌까지 살고 있다. 조상의 묘도 만주에 있다. 처가와 아내, 자식을 제외하고 친척들이 모두 북한과 러시아, 중국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살기 위해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배웠고 학업(일본 중앙大 중퇴)을 잇기 위해 일본어를 습득했다. 미국 이민을 가서는 시골농장에서 날품을 팔며 영어를 익혔다. 그에게 제2외국어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의 비애였다.
 
  『저의 삶은 6개국(미·일·중·러·북·남한)에서 5개국의 언어와 6개국의 사회제도, 6개의 이질 문화권에서 살아왔기에 그 어찌할 수 없는 곡절 많은 지정학적인 삶이 「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抗日투사의 집안
 
朴楠杓 장군의 어머니 김광숙과 아버지 박지영씨.
  朴장군은 1923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버지 朴枝榮(박지영), 어머니 金光淑(김광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만강에서 불과 300리 길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당시 한인들의 독립운동 거점지였다.
 
  『조부(朴昌一)는 일본 관헌을 한꺼번에 둘씩 잡아 두만강에 처넣을 정도로 장사셨고, 우리 집안에 그런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북간도 출신인 아버지와 블라디보스토크 출신 어머니에서 태어난 저는 외가에서 자라다 세 살 무렵 북간도에서 옮겨 오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은 두만강이 전부예요. 아직도 기억 속엔 두만강 은물결이 찰랑대고 있습니다』
 
  그가 살던 곳은 옥천동으로 불리던 북한 및 러시아 접경지역인 중국 지린성 훈춘의 두만강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고, 여름이면 이가 시리다고 해서 「玉泉(옥천)」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902년생인 선친 朴枝榮은 중국 용정에 있는 캐나다 미션스쿨인 恩眞(은진) 중학교를 거쳐 길림사범大를 나와 북간도 훈춘 현립 제일소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고 한다.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故 金在俊(김재준) 목사가 선친의 동창이고, 故 姜元龍(강원용) 목사와 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한 故 安炳茂(안병무) 교수 등은 선친의 후학들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朴장군의 집은 항일투사들의 합숙소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나이 아홉 살 때인 1932년 선친이 왜경에 체포, 훈춘 옥천동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러나 사형집행 날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탈출해 12명의 복역수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그를 남겨 두고 당시 두 살난 동생 楠主(남주)를 업고 외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된다. 다음은 연변작가 한정훈이 선친의 일대기를 쓴 실화소설 「두만강」의 일부분이다.
 
  <박지영이 탈옥에서 성공하여 로씨야로 갔다는 확실한 소식을 들은 그의 안해(아내)는 애기를 들쳐 업고 남몰래 국경선을 넘어 남편을 찾아갔다. 그때인즉 쏘련에서 조선사람들을 중앙아세아로 집단이주를 시킬 때였다. 박지영 부부도 기차에 실리여 나지끌(우즈베키스탄)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모는 소련으로, 홀로 중국에 남겨지다
 
1993년 7월24일 美 워싱턴 한국전 참전기념비 제막식에서. 박남표 장군은 기념비 건립사업을 주도했다.
  朴장군의 계속된 증언이다.
 
  『할아버지께서 어머니가 떠나기 전 뜻밖의 말씀을 했어요.
 
  「남표야, 엄마 따라 멀리 갈래? 아니면 할아버지랑 고향에서 같이 살래?」
 
  문득 인자했던 할머니 얼굴이 떠올라 무심코 고향에 남겠다고 했어요. 후회가 됩니다. 왜 그랬는지… 어머니는 떠나기 전 제게 이렇게 얘기했지요.
 
  「남주하고 나는 아버지 따라 멀리 간다. 그렇지만 이번 겨울만 지나면 다시 너를 데리러 올게.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 잘 들어라」
 
  그렇게 동생을 들쳐 업고 떠난 어머니는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같이 따라 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던 한이 평생의 아픔으로 남았다. 母子(모자)의 생이별은 멀고도 길었다.
 
  『시베리아 벌판으로 사라져 간 어머니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제 가슴에 젖어 있습니다. 아홉 살 소년이 무엇을 알았으랴만 석별은 한순간의 일이었고 한 맺힌 추억은 기나긴 아픔이 됐어요』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모는 1937년 겨울 일본 관동군의 기습으로 무참히 학살됐고, 조부 역시 아버지의 탈주를 추궁하던 일본 경찰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1944년 봄 숨졌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할머니는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항일투쟁의 공로가 인정돼 연금을 받아 오고 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막내 숙부 박우영이, 숙부가 돌아가신 뒤에는 막내 고모(박분옥)가 훈춘에 거주하며 그 연금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던 15세 때까지 중국어만 썼다. 이후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일본 학교에 입학, 일어만 배웠다. 한글은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일본학교에 다니던 2년 동안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다나카(田中) 교장과 5·6학년 때 담임 馬建夏(마건하) 선생의 각별한 지도와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던들 유학의 꿈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馬建夏는 아동문학가 馬海松(마해송) 선생의 삼촌이다. 馬建夏는 일본 와세다大를 마치고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해 당시 소학교 선생으로 부임해 온 터였다. 馬선생은 그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형편도 안 됐지만 제겐 渡航券(도항권)이 없었습니다. 경찰에서 독립투사 아들이라며 「부정한 조선인에겐 도항권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馬선생님 소개로 도항권을 얻기 위해 함북 회령의 일본인 고아원에서 6개월간 지냈고, 함북 청진으로 가 과자 도매점 점원으로 일하며 사립중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때 일본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고, 일본인 주인이 신원 보증을 서줘 도항권을 손에 쥘 수 있었어요』
 
 
  16세 때 東京 유학
 
왼쪽부터 생전 어머니와 동생 박남식, 왈려.
  결국 1939년 일본 東京 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 東京의 현실은 꿈에서 동경하던 공간이 아니었다. 만주 고향집에서 보내오던 학비가 점점 줄어들어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학비를 벌었다. 오후에는 입시학원에 소사 일을 하며 칠판을 닦고 교실을 청소했다. 일본 학생의 어깨 너머로 익힌 공부로 東京 동아상업학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4년 3월 동아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중앙大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전쟁 탓에 군사훈련이 학업 시간보다 많았고, 강제 징용 탓에 인력난도 극심했다. 그 때문인지 일당도 껑충 뛰어 부두에서 막일을 하고 번 돈은 학비와 식대(매월 30원)를 내고도 30원 이상을 꼬박꼬박 저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은 많은데 노동력이 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법과 출신의 고문(고등문관) 합격자에게는 군수 자리가 보장돼 있기 때문에 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식민지 조국에 돌아오면 제일 안정된 직장이 군수였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겪었다. 중앙大에 입학하고 맞은 첫 여름방학 때였다. 그는 배고픔에 잠시나마 귀향해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배삯이 모자라 처음 타려던 케히마루(氣比丸) 연락선을 못 타고 말았다.
 
  『타려다 못 탔던 연락선이 항해 도중 소련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말았어요. 문부성 대신이며 경도제대 학장 등 승객 대부분 수장됐지요. 케히마루 대신 콩고마루(金剛丸) 연락선을 타게 한 운명의 神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광복과 월남
 
육군 소장 시절의 朴楠杓씨(사진 오른쪽).
  또 한 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10일 일본 육군 기념일에 B29기 수백 대가 東京을 폭격했다. 당시 그는 하숙집에서 몇 km 떨어진 친구네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밤늦게 하숙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집은 흔적도 없었다. 하숙집 식구들 역시 몰살당한 뒤였다.
 
  1945년 8·15 광복은 그를 흩어진 육친과 친척을 만날 꿈으로 부풀게 만들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와 38선을 넘어 만주로 향했다.
 
  『일본 천황의 목메인 항복 방송을 東京 바닥에서 들으면서 「이제 독립되는 것이구나」 하는 감격으로 가슴이 뜨겁게 출렁거렸어요. 이제는 부모와 육친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부산에서 무작정 걸었지만,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두만강을 단숨에 넘어 북간도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부모가 블라디보스토크나 연해주, 머나먼 타슈켄트로 강제 이주했으니 만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 팔로군이 만주로 주둔해 들어왔고 마오쩌둥(毛澤東) 바람까지 불어 당시 한인 교포사회에는 이념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어떤 정치적 의사표시만 해도 반동분자로 몰릴 판이었습니다』
 
  그가 일본에서 익힌 서구 문물과 근대적 사고는 곧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질책을 받게 되었고, 분방한 그의 성격을 억압했다.
 
  『꿈에도 그리워해 온 부모를 만나 뵙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붉은 사상 체제 밑에서 더 이상 배겨 낼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만주 독립운동 근거지인 만주 용정에서 선친과 동기였던 金在俊 목사의 도움으로, 그가 설립한 「조선 신학원」(한신대학교의 前身)에 머물렀다.
 
  생계를 잇기 위해 용산 미군부대에 가서 땅을 파고 짐을 나르는 막일에 매달렸지만 경제적 곤궁은 배겨낼 수 없었다고 한다.
 
  1946년 여름 육군사관학교 입학생 모집 공고가 나붙었다.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하는 마당에 마다 할 상황이 아니었다. 힘든 경쟁을 뚫고 육사2기생으로 그해 9월24일 입교했다.
 
  육사 2기는 대통령과 6명의 대장, 9명의 중장을 포함한 79명의 장성, 8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근·현대사를 따져 2기만 한 성취를 이룬 기수는 없을 것이다. 5·16 이후 10·26까지 2기생들은 제3공화국을 이끄는 주축이었다. 하지만 朴正熙 대통령과 그를 쏜 金載圭(김재규) 前 중앙정보부장도 모두 2기생이니 성과만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朴장군은 90일간의 단기교육을 받은 뒤 1946년 12월24일 졸업과 함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초급장교 시절 思想 의심당해
 
  그러나 초급 장교 봉급으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실향민이자 혈혈단신인 처지가 외롭고 고달팠다. 게다가 억울한 시달림까지 받아야 했다.
 
  『일본 헌병 출신으로, 북간도에서 조부모와 아버지를 추적했던 이가 국군에 들어와 저를 「빨갱이 집안」이라고 상부에 보고하며 괴롭혔습니다. 親日(친일)이 아닌 抗日 투쟁을 한 집안을 사상의 눈길로 쳐다봤어요』
 
  부모와 친척이 무장 항일운동을 했으니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와 가까웠으리라. 그의 집안과 관련된 사상기록은 중앙정보부까지 보고됐다고 한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후 朴장군과 친분이 있던 金在春(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의 선처로 관련 기록은 말소됐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겪었다.
 
  『한국전 당시 육군본부에 있다가 광주 5사단의 정보참모로 부임한 뒤 2주 만에 6·25를 만났습니다. 사단의 정보참모면 군사전력이나 전술 전반의 비상대책이 서 있어야 하고, 적에 대한 정보가 확실해야 하는데도 정보참모인 나부터 백지상태에 있었어요』
 
  의정부 전선에 투입됐지만 전투 한 번 못 해보고 광주사단으로 다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28일 새벽 2시30분쯤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가는데 갑자기 한강대교가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왔다고 한다. 불과 몇 분 만에 생사가 엇갈린 것이다.
 
  그는 신상철 사단장이 지휘하는 7사단 참모로서 포항전투에 참전했다. 하지만 이 전투는 개인사의 슬픔만이 아니라, 민족상잔의 비극이 묻어 있다.
 
 
  같은 집안끼리 총부리 겨눠
 
한국전쟁 당시 모습. 朴楠杓 장군은 1951년 3월 강원도 인제 「현리작전」에서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죽을 고비를 겪었다.
  『1988년 중국 연변을 찾았다가 매우 놀라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제 고모부는 인민군 5사단 보병대대장으로 참전했으며, 6촌 동생은 인민군 4군단 정치수석참모로 포항·안강·영천 전투에 참전했다는 겁니다. 6촌 동생이 6명이나 그 전투에서 전사했고요. 당시 저는 경주·안강·영천에서 분전한 보병 7사단 참모였습니다』
 
  헤어진 가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눈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그의 부대가 38선을 돌파할 때 그는 「고향 가는 길」도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8·15 광복 당시 어머니를 찾을 생각에 북간도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시절이 눈에 아련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몰려들면서 그의 꿈은 부서진다.
 
  『평양을 거쳐 진격하다가 평북 덕천지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그 전투에서 대부분의 장병이 중공군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어요. 하지만 저는 포위망을 뚫고 평양에서 철수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끝내 혈육과 해후할 수 없었어요』
 
  朴장군은 1951년 대령으로 맹호사단 참모장이 된 뒤 강원도 백마사단 연대장을 역임했으며, 1958년 준장으로 승진해 육군 정훈학교 교장이 됐다. 이 시절 초등학교 교사이던 李松子(이송자)씨를 만나 재혼한다. 연세大 국문과 출신인 그녀는 朴장군에게 당시까지도 어색했던 한글 어법과 글쓰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1963년 소장(보병 21사단장)으로 진급, 국방대학원 부원장과 논산훈련소 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당시 경상도 출신이 아니면 진급이 어렵던 軍 내부 사정 탓에 육군 소장 집무 8년 동안 진급을 못 해 1970년 1월 전역하게 된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미국 이민과 어머니 소식
 
  전역 후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모아둔 돈도 없었다. 잠깐 동안 대한사이클 연맹 회장직을 맡긴 했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길을 열었다. 영어에 유창한 아내가 먼저 渡美(도미), 미국 영주권을 따서 워싱턴州 타코마市 교육청 이중언어 교사로 취직한 것이다.
 
  『당시 동양정비 회장인 친구가 이민을 말렸어요. 「너 거기 가서 왜 고생하냐」며 회사 소유의 공업전문학교를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工大 출신도 아니라 거절했어요. 아이들을 공부시킬 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에 가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살고 있을 혈육에게 연락할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의 첫 미국생활은 시골 농장에서 오이나 딸기를 따는 일이었다. 한 박스에 3달러씩, 하루 종일 일하면 그럭저럭 10달러는 벌 수 있었다. 그 돈으로 밤에는 어학원에 등록해 영어를 배웠다.
 
  이후 자동차 부품회사에 취직했다. 이 회사는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값싼 자동차 부품을 수입·판매했는데 그가 중국어와 일어에 능했기에 오너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회사도 발전을 거듭, 자본금 120만 달러로 출발한 회사가 몇 해 안 돼 연평균 2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경제적 안정을 찾은 그는 러시아와 중국으로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안부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1975년 무렵이다. 朴장군은 과거 만주에 살던 집주소를 더듬어 조부모의 이름과 삼촌, 고모 그리고 친구 앞으로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글과 중국어, 영어로 각각 쓴 글을 동봉했다. 몇 달 뒤 막내 삼촌 박우영에게 연락이 왔고, 그를 통해 러시아로 강제 이주 간 부모의 주소도 구할 수 있었다.
 
  1977년 舊소련의 우즈베키스탄공화국 타슈켄트에 사는 어머니와 극적으로 연락이 닿았다. 여기에는 타슈켄트와 자매결연을 맺었던 당시 시애틀 시장 부인인 로샌 로여씨의 헌신적인 노력이 컸다고 한다. 50년 만에 받은 어머니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남표야, 네가 살아 있다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너와 떨어져 이 머나먼 곳에 흘러 와 자리 잡고 살면서 하루인들 너를 잊어본 날이 없단다. 내가 죽기 전에 너를 꼭 만나고 싶구나. 나는 이미 늙고 병이 있단다. 그러나 지금은 괜찮다. 큰 병원엘 가려고 모스크바에 갈 계획이다…>
 
1989년 8월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타슈켄트에서 꿈에도 그리던 동생 가족들을 만났다.
 
  어머니의 죽음
 
  그가 부모와 아홉 살 때 헤어질 당시 어머니의 등에 업혀 러시아로 떠났던 동생 남주는 두 살배기였다. 그 뒤로 여동생 왈려와 까리나, 남동생 남식이가 더 태어났다. 그로서는 동생이 3명이나 더 된다는 사실을 나이 육십 줄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 게 된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찾아가겠다고 편지를 썼다. 격정적인 모정이 담긴 편지가 대륙을 오갔다.
 
  『전에 없이 느껴 보지 못한 감격으로 제 마음은 나이답지 않게 출렁거렸습니다』
 
  그러나 1979년 舊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을 포함한 자유진영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집단 보이콧했다. 결국 어머니와의 재회도 무기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표현대로 「운명치고는 가혹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듬해인 1981년 8월28일 향년 81세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두 사람 사이에 놓였던 「세월의 강」은 결국 생전엔 건널 수 없는 강이 되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89년 8월 타슈켄트를 찾은 朴장군 내외는 어머니 묘소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어머니가 묻힌 고려인들의 묘소에는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뒤덮여 있었다.
 
  『따뜻한 진지나 옷 한 벌 해드리지 못해 깊은 죄책감을 가졌습니다. 우리를 갈라놓은 세월이 원망스러웠어요』
 
  기자가 「아들을 데려가지 못한 어머니가 더 마음이 아팠을 것」이라고 위로하자, 그는 『더했겠죠』하고 말을 잃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그의 가족들은 60명이 넘는다. 남동생 남주와 남식, 누이동생 왈려·까리나의 후손들이 25명에 이르고 숙부 박춘영과 5촌 고모 자손이 15명에 이른다. 또 어머니의 언니인 큰이모는 사위 손자까지 합쳐 20여 명이 알마아타에 살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 3주간 머물면서 친척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어요. 헤어지던 날 다시 만나자며 「오래 앉읍소(오래 사세요), 오래 앉읍소」라고 인사했고, 외사촌 형은 「산과 산은 맞댈 수 없어도 산 사람은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셨어요』
 
 
  북한 방문
 
  그는 우즈베키스탄에 머물 당시 우연히 북한에 사는 고모의 소식을 듣게 됐다. 정말이지 「사람은 살아 있으면 만나게 되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레닌기치 신문사」가 朴장군의 사연을 듣고 평양청춘 가무단의 공연을 초청했다. 평양가무단 송석환 단장(現 북한 문화성 부상)과 인사하게 되었고 이야기 끝에 朴장군의 고종사촌들이 평양 음악계에서 알려진 인물임을 듣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놀라웠다.
 
  특히 宋단장은 그의 사촌동생 채기덕을 자신의 스승이라며 평양 심포니 지휘자라고 했다. 또 동생 채기영은 작곡가라고 전했다. 宋단장은 평양으로 朴장군 내외를 초청하겠다고 했고 그는 가족사진을 고모 식구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귀국 후 宋단장에게 전해 들은 이북의 친지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평양과의 연락은 이런 과정에서 이뤄질 수 있었고, 1991년과 1995년 직접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북한을 떠난 지 40여년 만이었다.
 
  『처음에는 남쪽 가족들이 크게 말렸어요. 생명을 걸고 갔습니다. 동포들이 살고 있는 분단된 조국을 보고 싶었어요. 막상 가보니 사상만 빼고 언어·문화·복장이 다 통하더군요』
 
  당 책임자의 소개로 평양에서 큰고모(당시 89세)를 47년 만에 만났다. 고모의 아들·며느리, 손자·손녀 등 1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말이 나오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1991년 45년 만에 큰고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조카들을 평양에서 만났다. 조카 집안은 북한에서도 유명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선친의 행적을 찾은 중국여행
 
  『조부모는 日警(일경)에 의해 학살되고 부모는 구사일생으로 소련으로 탈출하셨으니 한반도에 사는 핏줄은 두 사람뿐인데 고모는 北에, 저는 南에 살며 그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와 고모는 실신할 정도로 울기만 했어요』
 
  알고 보니, 고모 집안은 북한에서도 성공한 가정이었다. 고종사촌 동생은 3명인데 둘은 관현악단 지휘자이고 막내는 오페라 바리톤 가수며 이미 유럽과 호주까지 연주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유명했다. 제수들은 의사·무용가·도서관 책임자였다.
 
  朴장군은 타슈켄트로 가기 앞서 1988년 9월 중국 지린성 훈춘을 찾아 선친의 흔적을 확인했다. 선친이 옥고를 치렀던 「일본 영사관 본관 破獄址(파옥지)」를 찾은 것이다. 「훈춘현 문물지」에 적힌 선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박지영 등 12명의 항일자들은 1932년 2월10일 사형집행 전날 박지영 지휘하에 破獄을 감행, 2명은 희생되고 10명은 탈출에 성공함>
 
  그러나 선친의 묘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무렵 아버지는 舊소련에서 나와 중국 연변과 북간도, 북한 함북 청진과 함남 원산을 다니며 조선의 독립을 꿈꿨다고 해요. 소련 KGB 북간도 공작원 책임자로서 훈춘 지방에 계셨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43세 나이로 돌아가셨고 그 유해는 찾을 길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만주 일대에 사는 가족들의 생사를 묻고 연길대학과 공업지대인 심양, 두만강 연안도시인 도문市를 둘러보았다. 6촌 동생이 도문市 건설국장에 재직하고 있었다.
 
  『북간도 연변에 사셨던 할아버지는 원래 6남매의 대가족을 이루셨어요. 만주에는 셋째 삼촌과 넷째 삼촌, 막내 고모와 그 후손들, 즉 내게는 3~6촌 혈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연변에서 장춘, 北京에 이르기까지 자손이 100여명이 넘습니다』
 
 
  원이 없다
 
아내 李松子씨와 朴楠杓 장군.
  朴장군은 『이제 원이 없다』고 했다. 부랑아처럼 대륙을 떠돌던 그의 청년기도 아득한 옛 얘기가 됐다. 간혹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러, 여든 줄에 접어든 고향 친구와 육사 동기들을 만나는 게 요즘 낙이다.
 
  하지만 그가 겪은 가족사는 우리 민족의 고된 근대사와 다름아니다. 그래서 값지고 아픈 기억이다.
 
  『나의 가족과 친척은 중국과 우즈베키스탄에 산재해 있어요. 제 고모와 6촌 동생 가족들은 대부분 북한 평양에서 삽니다. 장남과 차남은 서울에서 살고, 셋째와 넷째는 미국에 있어요. 흩어진 제 가족사는 약소민족의 비애와 다름없습니다. 나라가 없거나 약하면 가족·언어·고향이 모두 없거나 그 뿌리가 흔들리게 마련이에요. 그러나 꿋꿋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는 워싱턴州에서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아직도 자부심이 가득하다. 『묵은 빚을 갚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한국 참전비 건립은 1989년 워싱턴州의회 승인을 받아 한인사회에서 모금한 5만8000달러 등 33만 달러를 모아 1993년 7월 제막식을 가졌다. 당시 그는 한인사회모금위원장을 맡았었다.
 
  『한국전 참전비에는 全斗煥·盧泰愚·金泳三 대통령이 다녀갔고, 金大中 대통령도 시애틀을 방문하던 길에 들르셨습니다. 참전비는 韓美동맹을 지속하는 상징입니다. 미국 일각에서는 은혜를 모르는 나라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는 『세상이 변해 지금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민족 비극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향 산천을 놓아 둔 채 부모 형제가 갈라져 사는 것이야 불행한 역사였다고 쳐도 민족의 비참한 수난사는 다시금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해요. 그것이 후세들에게 무거운 짐을 덜어 주는 길입니다. 또 남북으로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이 이제 죽을 날만 손꼽고 있어요. 빨리 통일이 돼 제가 경험한, 아니 우리 민족이 겪은 離散(이산)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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