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라스베이거스의 한국인 딜러들

카지노 딜러들도 도박의 유혹에서 못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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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명의 韓人이 딜러로 일해. 수입은 2만 달러에서 10만 달러까지 천차만별

『도박에서는 패배밖에 없습니다. 도박은 삶 자체를 피폐화시킵니다. 「올인」이라는 드라마가 도박의 세계를 너무 미화시킨 것 같습니다』(독신 딜러 강모씨)

李勳周 Natural Pharms社 대표
1955년 충남 아산 출생. 서강大 대학원 졸업. 국방과학연구소, 국방품질연구소. 플로리다大 박사. 플로리다 의과대학 교수. 치매치료제 세계 특허 보유. 교육방송 「지금은 정보시대」 진행, 부산방송 「시사진단」 진행. 라스베이거스 「The Korea Post」 칼럼니스트. 現 美 「Natural Pharms」 社 대표.
韓人 딜러 중에서 몇 안 되는 크렙 게임 딜러인「플로라 朴」씨. 스튜어디스 출신이다.
7년째 카지노 딜러를 하고 있는 캐티(46·여)씨의 토요일 아침은 분주하다.
 
  토요일에 일하는 게 부담이 되지만 예상되는 팁 수입을 생각하면 생기가 돈다. 여섯 살 연하인 미국인 남편 로버트는 그녀가 휴식시간에 마실 건강음료를 챙겨 준다. 오늘은 수백만 달러를 들고 와서 도박을 하는 고급 손님들을 상대로 바카라 게임을 하는 날이어서 화장과 옷 매무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라스베이거스에는 수천 명의 韓人 딜러들이 일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카지노로 불리는 「윈(Wynn) 호텔」 카지노에서 일하는 그녀는 성공한 한국인 카지노 딜러에 속한다. 연봉이 10만 달러를 넘는다. 같은 카지노 호텔에서 일하는 남편의 봉급을 합하면 부부의 소득이 연간 20만 달러 이상이다. 미국 家計(가계) 평균 수입이 4만5000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상류층이라고 볼 수 있다.
 
  88 서울올림픽이 끝날 무렵 미국인과 한국에서 결혼한 그녀는 미국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높은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혼 후 혼자서 캘리포니아 토렌스에서 작은 선물가게를 연 그녀는 1년여 만에 빚만 지고 가게 문을 닫았다.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지만 막막했다. 한국에서 전문대학을 졸업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흔치 않았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했지만 수입이 너무 적었고, 무엇보다 몸이 견디질 못했다.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딜러 스쿨에 등록했다.
 
  2개월간의 과정을 마치고 라스베이거스 다운타운의 조그만 호텔 카지노에 취직했다. 그녀는 여기서 만난 중간급 매니저인 로버트와 새 인생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4월 문을 연 「윈 호텔」 카지노의 개장 멤버로 입사했다. 베테랑 딜러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그녀는 맵시 있고 빠른 손동작과 예의 바른 자세로 세계 최고의 카지노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다.
 
  캐티는 어둠과 설움에 눌려 지내온 지난날의 삶에서 벗어났다. 「프로 딜러」의 세계에 안착하면서 안정된 생활과 따뜻한 가정을 보장받게 됐기 때문이다.
 
 
 
 도박을 合法化한 유일한 도시, 라스베이거스
 
한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즐기는 블랙잭 게임. 간단해 보이지만 플레이어들의 팀워크가 상당히 중요한 게임이다.
  라스베이거스는 미국에서 도박을 합법화한 유일한 도시다. 1855년 모르몬교 선교사 30명이 라스베이거스 밸리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그 후 「골드 러시」가 이뤄지면서 라스베이거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05년 유타州(주)의 솔트레이크 시티와 남쪽 캘리포니아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라스베이거스는 중요한 철도 중간 정류장이 되었고, 1911년 3월16일 市로 승격되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금광산업과 도박산업이 어우러져 오늘의 라스베이거스가 탄생했다.
 
  2003년부터 라스베이거스의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인근 지역인 캘리포니아의 집값이 갑자기 상승하자, 젊은 부부나 은퇴 후 여유자금을 갖고 여생을 즐기고자 하는 노년 세대들이 대거 라스베이거스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라스베이거스市 정부는 도시의 이미지 전환을 위해 각종 산업을 유치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컨벤션 산업 육성 정책은 주효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한 해에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방문자가 3000만 명을 넘어섰다. 명실공히 세계적 상업도시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호텔마다 컨벤션 센터, 대형 쇼핑몰을 건설하면서 도박도시 라스베이거스의 면모는 완전히 탈바꿈했다.
 
  라스베이거스는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이다. 비 한 번 안 오는 가운데 45℃를 넘어서는 라스베이거스의 지루한 여름이 지나면 세계적인 컨벤션들이 줄지어 문을 연다. 선선해지는 가을에 접어들면 관광객이 부쩍 늘고 호텔마다 방이 동난다. 비수기 때 하루에 100달러 하는 방이 이 시즌에는 300~400달러를 넘는다.
 
  식당은 외지 사람들로 빽빽이 채워지고, 카지노 역시 대목을 맞이한다. 「파트타임」 딜러까지 동원된다.
 
 
 
 용모와 계산 실력으로 선호받는 韓人 딜러
 
  등록된 카지노 딜러만 2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여성 딜러가 60%를 차지한다. 딜러들을 포함해 40만 명 이상의 인구가 호텔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물론 모든 딜러가 높은 수입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벨라지오」, 「엠지엠」, 「시저스 팔레스」, 「맨들래이 베이」 같은 대형 카지노의 딜러는 연봉이 8만 달러 정도지만, 외곽에 위치한 호텔의 딜러는 4만~5만 달러 수준이다. 경력이 없는 초보 딜러는 연봉 3만 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수입이 충분치 않아 부부가 함께 딜러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딜러의 경우 수입이 적을지라도 의료보험 등의 후생복지가 있기 때문에 한번 딜러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떠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나도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인력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일정 수입을 보장해 주는 딜러 직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일류 카지노에 입사하려면 3~5년의 경력이 기본이다. 학력은 중요하지 않다. 前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는지 꼼꼼하게 점검한다. 마약이나 노름에 빠져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은 입사할 엄두도 낼 수 없다. 모든 호텔은 입사 지원자를 대상으로 꼼꼼히 신용도 조사를 한다.
 
  외국인을 상대하기 때문에 언어 구사능력이 중요하다. 韓人 딜러 가운데 미국인과 결혼한 경력이 있는 여성들이 많은 까닭은 이들의 회화 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라스베이거스의 일류 호텔에 근무하는 韓人 딜러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한국인 출신들이 일류 호텔 카지노 경영 조직의 상층부에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해서다.
 
  한국 워커힐 호텔에서 딜러 생활을 시작했고, 라스베이거스에 이민 와서 팰리스 스테이션 호텔에서 30년간 딜러 생활을 하고 있는 김윤복(59)씨는 韓人 딜러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엄격한 신앙생활과 건강관리로 후배 딜러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1년째 「미라지 호텔」에서 근무하는 김모(37·여)씨는 남편과 함께 유학을 왔다가 딜러로 자리 잡았다. 그녀는 변두리 카지노에서 일한 지 3년 만에 최고급 카지노에 들어갔다. 이력서를 써서 각 일류 호텔 카지노 매니저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그 뜻을 이루었다.
 
  韓人 딜러들은 빠른 손재주와 계산 실력, 빼어난 용모로 인해 다른 지역 출신보다 선호된다.
 
  韓人 딜러는 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정확한 인원수는 파악이 안 되고 있다. 딜러들은 직업 특성상 인간관계를 기피하는 성향이 있지만, 지난 시절의 아픔을 감추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도박은 삶을 피폐화시킨다
 
라이베이거스의 카지노.
  「엑스칼리버 호텔」에서 만난 「르네이」라는 한국 여성 딜러는 이런 얘기를 했다.
 
  『여기서 한국 사람들은 만나지 마세요. 너무 말들이 많아요. … 저는 그냥 직장 끝나면 집에 가서 한국 연속극 보는 재미로만 살아요』
 
  이혼의 아픔을 겪은 캐티와 달리 화려한 시절을 보낸 이도 있다. 올해 41세인 독신 딜러 강모씨의 인생역전은 드라마 같다.
 
  뉴욕대학에서 MBA(경영학석사)를 공부한 그는 뉴욕에서 증권투자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뉴욕에서 가까운 애틀랜틱市를 주말마다 찾아가 도박을 한 것이 화려한 인생의 막을 내린 계기였다. 그는 카지노 게임을 증권과 비슷한 투기성 사업으로 생각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카지노는 달랐다. 갖고 있던 돈 50만 달러를 다 날려 버렸다.
 
  그는 『증권 투자는 베팅을 하는 데 통계자료가 동원되고 호흡이 길어서 이성을 차릴 여유가 있지만, 도박은 이성보다 감성이 훨씬 앞서서 그냥 물귀신처럼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노름빚 때문에 그는 이혼까지 해야 했다. 빚 잔치를 하고 남은 돈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라스베이거스를 찾았다. 수중에 갖고 있던 현금 5만 달러와 신용카드로 빼낸 돈 2만 달러를 다 날렸다. 한 달간을 방황하던 그는 「카지노 딜러를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1998년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다 묻고 딜러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도박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
 
  『도박에서는 패배밖에 없습니다. 도박은 삶 자체를 피폐화시킵니다. 「올인」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사람들에게 도박의 세계를 너무 미화시킨 것 같습니다』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활달한 성격 덕에 딜러로 성공했다.
 
 
 
 『기가 빠지니까 패가 들어오지 않았다』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하는 이들도 카지노의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어느 날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는 딜러들이 가끔 있다고 한다. 십중팔구 도박에 돈을 날린 경우다.
 
  카지노 딜러였던 朴모(51)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 초반에 라스베이거스로 이민을 온 그 역시 도박을 좋아한 나머지 딜러가 됐다.
 
  딜러 일이 끝나면 반드시 다른 호텔 카지노에 가서 몇 시간이고 게임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카지노에서 밤을 새웠다. 초기에는 예상치 못한 돈을 거둬들였다. 자신의 특출난 재능을 확인한 그는 도박을 「제 2의 수입원」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카지노 출입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따는 날보다 잃는 날이 더 많아졌다. 『초기에는 氣(기)가 충만해서 매번 돈을 땄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몸에서 기가 빠지니까 패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朴씨의 습관성 노름을 알아차린 부인은 그의 노름벽을 막아 보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시간이 갈수록 朴씨가 베팅하는 액수는 커졌고, 심각한 경제 문제가 집안의 문턱을 넘어섰다. 부인은 살기 위해서 자신이 버는 돈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돈을 어딘가에 감추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돈을 찬장·옷장 등에 꼭꼭 숨겨 놓았으나 朴씨는 귀신같이 찾아냈다. 카펫 밑에 숨겨 놓은 돈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100달러짜리 고액권을 비닐 종이에 꽁꽁 싼 후 냉동 조기의 배 속에 밀어 넣었다. 혹시나 해서 문제의 생선 위에 다른 생선들을 겹겹이 올려 놓았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았고 부엌에는 배가 짝 갈라진 조기가 도마 위에 올려져 있었다.
 
  찾는 기술의 속도가 숨기는 기술을 앞지른 것이다. 부인은 『남편을 잡고 있는 도박귀신이 남편에게 숨긴 돈을 찾는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일 이후 부인은 돈 숨기는 걸 포기했다고 한다. 朴씨는 부인이 임신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도박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러다가 내 아이마저 굶겨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朴씨는 지금 라스베이거스에서 전기사업을 하는 중견사업가이다.
 
 
 
 여성 딜러들의 고단한 삶
 
  이류 혹은 삼류 호텔에서 일하는 여성 딜러들의 삶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Y씨는 과로로 쓰러져 운명을 달리한 선배 딜러 金모(52·여)씨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그녀는 딜러 전용 휴게실에 앉아 건강음료를 마시면서 선배 언니에게 닥친 비운이 자기에게도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Y씨는 2000년 초반 멀쩡하게 직장을 잘 다니던 남편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미국行을 감행했다. 아이들에게 선진교육의 기회를 주자는 이유에서였다. 「質 높은 교육」이라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나, 그녀의 가정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의 권유로 라스베이거스를 이민지로 선택했으나, 아이들의 교육에 적당한 도시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남편과 함께 딜러 스쿨을 다녔고, 변두리 호텔에 힘겹게 직장을 잡았다. 남편은 새로운 직장에 만족하지 못했다.
 
  조그만 카지노 호텔에서 3년간 일했지만 세금을 공제한 두 사람의 한 달 수입은 각각 2000달러 정도였다.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그녀의 남편은 근무가 없는 날이면 다른 카지노를 찾곤 했다. 도박에 손을 대니 수입보다 지출이 커졌고, 노름빚이 늘어갔다. 가계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자 그녀는 아이들만이라도 지키겠다는 의지로 이혼을 선택했다.
 
  혼자만의 수입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Y씨는 다른 카지노에서 파트타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하루에 16시간씩 서서 일을 해야 한다. 열심히 뛰어 보지만 몸이 고단해서 아이들의 뒷바라지조차 힘겹다.
 
 
 
 『딜러는 경력이 쌓여도 수입은 제자리』
 
라스베이거스의 전경.
  韓人 딜러 플로라 朴(45·여)은 스튜어디스 출신이다. 여러 번 거절당한 끝에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그녀를 취재하고 싶었던 이유는, 제일 다루기가 어렵다고 하는 주사위를 던지는 「크랩 게임」 전문 딜러였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딜러 3명이 동원되는 복잡한 게임이다. 탁월한 영어 실력이 없으면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게임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크랩 게임」을 하는 韓人 딜러는 손꼽을 정도이다.
 
  스타벅스에서 3시간에 걸쳐 5년째 카지노 딜러를 하고 있는 플로라씨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Y씨와는 정반대로 한국 생활에 흥미를 잃은 남편의 끈질긴 채근으로 무작정 라스베이거스에 이민을 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상태로 반 년을 보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았다. 이들 부부도 한국에서 누려 왔던 사회적 지위를 잊고 카지노 딜러라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새 출발을 했으나 남편은 일년 만에 딜러 직을 포기했다.
 
  플로라씨도 딜러 일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각양각색의 경력, 과거를 가진 동료들과 마음을 열고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 딜러들이 추근대는 게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속상하고 힘들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딜러 4년 차에 들어서면서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肩臂痛(견비통)이었다. 하루 종일 수 천 장의 카드를 돌리다 보니 근육에 어혈이 생기면서 팔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달 전부터는 무릎 관절에 이상이 생겼다.
 
  플로라씨는 딜러라는 직업의 어려움을 이렇게 정리했다.
 
  『다른 직업과 달리 딜러는 경력이 쌓여도 수입이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경력 30년의 택시운전사와 처음 시작한 운전사의 월급이 별 차이가 안 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죠. 딜러 직에서 탈출하려고 늘 마음을 먹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요. 직장을 그만두면 당장 가족들의 의료보험 혜택이 사라지니까요』
 
  그녀는 『남들이 보기에는 딜러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마다 다르다』며 『매일 일어나는 풍랑 같은 격정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는 데에서 심한 갈등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지겨운 딜러 생활을 접기 위해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땅에서 아이들에게 검약을 가르치기 힘들어』
 
  플로라씨가 라스베이거스로 이민 온 것을 뼈 아프게 후회하는 것은 카지노 도시의 非교육적인 환경 때문이다.
 
  『아이들을 교육하기에는 주위 여건이 너무 열악합니다. 남들은 재산을 축내 가면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실정이라서 아이들의 선진교육이 덤으로 이루어질 줄 알고 이민을 왔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라스베이거스의 열악한 교육환경은 도박도시가 갖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부모가 카지노 호텔에서 일하는 경우, 근무시간대가 잘 맞지 않아 아이들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 플로라씨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반인 딸이 있으나, 대학입시에 대한 긴장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한다.
 
  주위에 있는 선배들을 보면 대충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딜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데 굳이 열심히 공부에 매달려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절에 미래에 대한 설계는 고사하고 편안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사고가 몸에 배는 것 같아요.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땅에서 아이들에게 검약을 가르치기도 힘들어요. 학부모들이 이걸 경계하느라 애쓰지만 효과가 없어요』
 
 
 
 『딜러는 잠시 머물기에 좋은 직업』
 
김영환씨.
  라스베이거스에 거주하는 韓人들은 현재 1만5000명 정도로 집계된다.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1만8000명이 될 것으로 韓人會(한인회)는 추산한다.
 
  라스베이거스 韓人 이민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캘리포니아나 뉴욕처럼 성공한 사람들이 아직은 많지 않다. 조그만 가게를 열어 오랫동안 장사를 해서 富(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몇몇 있고, 부동산 투기 열풍을 타고 얼마간의 돈을 번 사람은 있지만, 기업으로 성공한 교민은 전혀 없다.
 
  지난해 12월 초 라스베이거스 교민 100여 명이 모인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부유층 백인들이 몰려 사는 지역에 수 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집을 장만한 김영환(64)씨를 축하하는 모임이었다. 과거 국가대표 레슬링 코치였던 김영환씨는 24년 전 라스베이거스로 이민 와서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다.
 
  김영환씨 부부는 카지노 딜러, 버스 보이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미용 사업에 뛰어들어 갖은 역경을 헤치고 성실하게 富를 일구어 이 지역 韓人사회 귀감이 되고 있다.
 
  김영환씨는 『딜러로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박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며 『이 도박의 도시에서는 한 번쯤 도박으로 노름빚으로 홍역을 치러야만 정신을 차리고 돈을 벌 수 있는 것 같다』고 한다.
 
  金씨 부부는 이민 초기에 이주 자금을 관리해 주던 절친한 친구가 그 돈을 모두 도박으로 날리는 바람에 쓰디쓴 고생을 했다.
 
  김영환씨에게 딜러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잠시 머물기에는 그보다 좋은 직업이 없지만, 개인에 따라서는 때가 되면 자신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직업 전환을 고려해 보는 게 바람직합니다』
 
  라스베이거스 대학의 호텔경영학과와 카지노학과만큼은 미국 최고 수준이다. 호텔 산업에 관심을 갖는 한국 학생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강원랜드 카지노가 성업하고, 드라마 「올인」이 히트를 친 후 카지노학과에서 수학을 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도 적지 않다.
 
  이들 중 대부분의 학생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직장을 잡고 싶어 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을 한 후 한국에 돌아가면 좋은 경력이 되기 때문이다. 유학생의 경우 취업 비자 문제가 걸려 있어 생각만큼 이곳에서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라스베이거스 대학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리처드 朴(37)씨는 졸업 후 카지노에서 일을 시작했다. 8년간 일한 후 그는 새로운 직업에 도전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론 브로커(Loan Broker)」라는 일이다. 라스베이거스의 부동산 비즈니스와 맞물려 가는 전문 분야이다. 부동산 붐이 일기 직전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그는 카지노를 떠났다.
 
  한국과는 달리 적은 돈으로도 부동산을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여러 부동산을 잡아 둔 것이 큰 재산이 됐다. 그가 카지노 딜러를 그만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아이들이 커 가는데 아빠가 도박 산업에 종사한다는 것이 좀 떳떳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당장은 힘이 들더라도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직업전환을 시도했습니다』
 
 
 
 딜러라는 직업
 
  딜러라는 직업이 갖는 큰 매력은 역시 학벌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원 자격이 주어지고, 전문성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두 달간의 교육을 받으면 바로 카지노 현장에 뛰어들 수 있다.
 
  막 이민을 온 사람들이나 이혼으로 갑자기 家長(가장)이 된 여성들에게 단시간적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없다. 의료보험 등 후생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져 있어 상당한 매력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했던 이민자들은 딜러라는 직업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꿈이 있는 젊은이들이 오래 머물기에는 딜러라는 직업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하는 3000여 韓人 딜러들의 꿈은 도심에 우뚝 선 일류호텔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이 딜러라는 직업에 그냥 머물러 있다. 남의 주머니를 터는 산업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게 썩 마음 편하지는 않지만, 그 공룡 같은 카지노 호텔들이 그래도 자신들의 안락한 생활기반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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