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외교관이 될 자질이 없다. 외교관들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편집자 注〕 북한의 金正日이 2001년 7월 기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당시 푸틴 대통령의 全權 특사로 그를 24일 동안 수행했던 콘스탄틴 보리소비치 풀리코프스키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과 접촉했던 이야기를 묶어 「金正日과 함께 한 24일간의 러시아 여행」을 발간했다.
저자는 현재 푸틴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서 부총리급인 러시아연방 극동지구 대통령 全權 대리인 겸 보안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동방특급열차」는 한국외국어大 통역번역대학원 강사와 경희大 비교문화연구소 러시아 지역 연구팀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성종환 박사의 번역으로 중심출판사가 출간했다. 이 기사는 출판사의 양해下에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注〕 북한의 金正日이 2001년 7월 기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당시 푸틴 대통령의 全權 특사로 그를 24일 동안 수행했던 콘스탄틴 보리소비치 풀리코프스키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과 접촉했던 이야기를 묶어 「金正日과 함께 한 24일간의 러시아 여행」을 발간했다.
저자는 현재 푸틴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서 부총리급인 러시아연방 극동지구 대통령 全權 대리인 겸 보안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이 책의 한국어판 「동방특급열차」는 한국외국어大 통역번역대학원 강사와 경희大 비교문화연구소 러시아 지역 연구팀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성종환 박사의 번역으로 중심출판사가 출간했다. 이 기사는 출판사의 양해下에 발췌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특별경호
- 2001년 7월26일 러시아를 방문한 金正日. 金正日 왼쪽에 있는 사람이 金正日을 24일간 수행했던 극동지구 대통령 전권 대리인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그는 金正日을 수행했던 이야기를 묶어「金正日과 함께 한 24일간의 러시아 여행」을 발간했다.
2001년 7월26일부터 8월18일까지 나는 열차를 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金正日 국방위원장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그가 여행하는 동안 해당 연방지구 대통령 全權 대리인들이 번갈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친선 국가의 頂上을 그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교대로 수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로 내가 선정되어 그를 줄곧 수행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나는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헬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의 열차가 도착할 하산으로 이동했다. 그를 위한 안전요원 80명은 우스리스크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우리에게 배정된 열차는 일곱 량이었다.
2001년 7월26일 오전 8시,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이 시작되었다. 객차의 문이 열리자 金正日은 환영객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후 내려왔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러시아 땅을 밟은 그를 환영했다. 나는 그의 손이 매우 크고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측 대표단을 위한 다섯 량의 객차와 우리가 탄 일곱 량의 객차가 한 조가 되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서너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양측 통역사를 통해서 1대 1로 대답을 했으나, 나중에는 회의실에 마련된 객차에 우리 두 사람을 수행한 양측 인사들이 초대되어 대화는 한층 더 광범위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뛰어난 특별 경호원을 보내 주었다. 특수복장을 한 50명 가량의 저격수들이 객차 2량에 타고, 金正日이 정차하는 모든 역의 플랫폼과 철로를 가로지르는 육교에서 사격자세를 취했다. 일부 특수 경호대는 사복 차림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전용차량으로부터 7분 거리에는 선도 기관차가 달렸다.
이들은 돌발 장애물을 事前에 발견하고, 비상시에는 7분 내에 金正日이 탄 전용열차를 정차시킬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金正日의 특별열차에는 그의 숙소 전용 칸, 회담장, 식당 칸, 그리고 메르세데스 벤츠가 두 대 실린 차고가 딸려 있었다. 나머지 차량에는 그의 수행원들이 탔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 매력적인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金正日의 수행비서로, 내가 金正日을 만날 때 항상 자리를 함께했다.
회담 전용 칸에는 두 대의 대형 평면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영화감상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자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우리들의 이동경로, 실외온도, 통과하고 있는 지역의 경제현황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 열차에는 위성통신 설비와 컴퓨터도 설치되어 있었다.
金正日은 여행을 시작한 둘째 날, 블라고베센스크를 통과하고 있을 때 나를 처음으로 오찬에 초청했다. 그는 나에게 연해주 지방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경제가 악화되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많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을 통해 나는 그가 연해주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탈린 묘지에는 가지 않다
金正日은 옴스크에서 탱크 제작 공장과 옴스크 베이컨주식회사를 방문한 뒤 극장에 들러 콘서트에 참석했다. 그는 탱크 제작 공장에서 생산된 트랙터에 관심을 표시하면서 500대를 구입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T-80 신형 탱크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시했지만 구입의사는 밝히지 않았다.
金正日은 200여 종의 육류 제품을 생산하는 옴스크 베이컨社에서도 많은 질문을 했다. 그는 이 회사가 개인소유라는 것을 알고 私有制(사유제)의 장점은 있지만 북한에는 도입할 수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좁은 땅에 25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통치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열차가 노보시비르스크에 정차했을 때 金正日은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는 金日成의 목숨을 구해 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야코프 노비첸코가 살고 있었다. 노비첸코는 1946년 3월1일 평양에서 열린 3·1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 연단으로 날아온 수류탄을 낚아채서 자기 몸으로 덮었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金日成은 뒤에 「北朝鮮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영웅 노비첸코에게」라는 獻辭(헌사)가 적힌 담배 케이스를 그에게 선물했고, 1986년 소련을 방문 중에는 그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1994년 사망했지만, 러시아 언론들은 金正日이 82세의 미망인 마리야 예브메노브나와 그 자식들을 만날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비서를 통해 선물만 전달해서 구구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신 金正日은 이곳에서 과학도시를 방문했고, 노보시비르스크 츠칼로프 항공기 생산 기업의 박물관과 기계조립 공장을 시찰한 뒤, 공장內 비행장에서 AN-38과 SU-24가 참가하는 에어쇼와 낙하산부대의 시범낙하를 관람했다. 우리는 극동의 경제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했는데, 그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의 연결사업이었다.
8월3일, 금요일 저녁 우리 열차는 모스크바에 있는 야로슬라블驛에 도착했다. 크렘린 안에 金正日의 숙소가 마련되었다. 金正日은 오전에 알렉산드르 정원의 무명용사 묘에 헌화를 한 다음, 붉은광장을 가로 질러 레닌의 묘에도 헌화를 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이나 다른 소련 지도자의 묘에는 가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은 크렘린 궁전의 녹색 접견실에서 이루어졌다. 양국 頂上이 단독회담을 가진 뒤에는 양측에서 20명씩 참가한 확대회담이 이뤄져 국제정세, 亞太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軍장비 협력,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의 연결, 북한의 나진항 이용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날 열린 공식만찬에는 양측에서 50명씩 참석했다.
金正日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돌아와 다시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 푸틴 대통령은 金正日을 그의 관저 오찬에 초청했다. 8월8일 열린 이 회담은 일정에 없었던 것이었다. 좀더 개방적이고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 오찬으로 金正日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하산驛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예기치 않았던 푸틴과의 만남에 대해 회상했다.
『만일 나를 외교적으로 대하면 나도 외교관이 됩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내게 마음을 열고 대했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마음을 열어 보인 것이오』
『내겐 외교관이 될 자질이 없다.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
3週에 걸친 러시아 여행 동안 金正日과 나눈 대화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내용은 신문에 나지 않은 것이다.
▲방문 목적=외국 신문들은 내가 철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주요 방문 목적은 내가 러시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極東과 시베리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시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왜 소련연방이, 특히 흐루시초프 시대와 新生 러시아가 우리에게 등을 돌렸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소비에트 시대에 우리에게 등을 돌린 것은 조선이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불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지만, 소련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가 우리에게 취한 태도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로 고민이 많았고, 심지어는 중국인들에게 러시아인들이 왜 우리를 그렇게 대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호전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며 기다려 보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이 변하고 있는 데 대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 흠뻑 매료되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러시아의 모든 정당과 여론 그리고 연방주체들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다. 그들이 인민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게다가 인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푸틴 정권下에서 우리의 관계는 호전되고 있다. 이전에 우리는 주로 공산주의자들하고만 접촉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신중하게 그들과 접근할 것이다.
▲대중매체=西歐의 대중매체들은 나에 관해 많은 誹謗(비방)을 한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는 마치 내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趙明祿(조명록)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金容淳(김용순)을 해임한 것처럼 쓴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金容淳은 지금 휴가 중이다. 두 사람 모두 곧 복귀할 것이다. 나는 全세계적인 비난의 대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동지역=극동시장은 매우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항상 왜 우리가 유럽시장에 진출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왔다. 일단 연해주 지방과 다른 러시아 지역들과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 대체로 亞太지역 시장은 매력적이다. 중국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南朝鮮이 있기 때문이다.
▲감자와 옥수수=러시아는 감자를 주식으로 활용하는 좋은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나 역시 조선에 감자를 主食으로 정착시키고 싶지만 아직 잘 실행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우리는 1ha당 30t 정도의 많은 감자를 수확했다. 앞으로 1ha당 수확량을 80t 정도로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종자를 대상으로 품종 개량이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 북쪽 양강도에 주둔하고 있는 軍부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데 감자를 활용하면 훨씬 수월하고 경제적일 것이다. 그런데 군인들은 굳이 쌀을 요구한다. 곡물운송에는 더 많은 비용이 드는 데도 말이다.
내게는 한 가지 묘안이 있다. 이미 푸틴 대통령에게 말한 바 있지만, 러시아 극동지역에 농경지를 임대해서 25만 명 정도의 노동력을 파견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곳에 콩과 호밀을 경작해서 일부는 러시아에 넘겨 주고 나머지는 우리 몫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분배비율은 30대 70이 될 수도 있고, 50대 50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인민들은 지난 45~50년간 주로 옥수수를 먹어 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옥수수를 지겨워하고 있다.
▲여행=많은 이들이 러시아 自然은 매우 단조로워 열차여행이 몹시 지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열차여행을 택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 만족한다.
▲외교=내겐 외교관이 될 자질이 없다. 외교관들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보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조상들을 비난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무엇 때문에 과거를 뒤집으려 하는가? 비평가들은 입도 아프지 않단 말인가? 하기야 그것 빼면 할 일이 없는 것을….
金正日은 美食家, 평양에서 식품을 실어와
金正日은 美食家(미식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요리법을 잘 아는 듯했지만 식사는 매우 간소하고 적당하게 했다. 마치 試食(시식)을 하듯 조금씩 먹었다. 그는 포크와 나이프, 은젓가락을 모두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에게는 프랑스에서 공부한 훌륭한 요리사들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식, 중국식, 북한식, 일식, 프랑스식 등 어떤 요리도 주문할 수 있었다. 메뉴는 보통 15~20가지 요리로 구성되었다. 식탁에는 언제나 다양한 韓食반찬이 나왔는데 항상 김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金正日은 조선 사람들은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데 필요한 일정한 효소가 결핍된 지구상의 유일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매운 양념은 일종의 대체 효소이기 때문에 매운 음식이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의사들에게 그 말이 옳은지 물어보았지만, 명확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디저트로는 고유의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이 나왔고, 차와 커피가 제공되었다. 金正日은 커피를 자주 마셨다. 그에게 제공되는 커피는 진하고 향기로웠다. 生水는 러시아산, 북한산, 일본산 탄산수와 非탄산수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식료품은 대형 특별 컨테이너로 공급되었다. 우리가 첫 정차역인 옴스크에 도착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화물트럭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북한에서 옴스크로 신선한 식품을 실은 비행기가 도착한 것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실은 듯한 밀봉 컨테이너들이 열차에서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운반되었다.
그런 작업은 모스크바, 노보시비르스크,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반복되었다. 한번은 金正日이 「쌀로」(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돼지비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옴스크 州知事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그래서 옴스크州에서 있었던 리셉션에서는 반쯤 훈제된 가슴 부위의 「쌀로」가 나왔다.
金正日은 그 맛을 본 뒤 말했다.
『이것은 진짜 쌀로가 아니군요』
식초에 담가 절인 불가리아式 오이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는 나무통 속에 넣어 소금에 푹 절여서 오이가 소금기로 약간 검은 색이 나와야 합니다』
그는 또 마요네즈와 치즈로 튀긴 동전 크기의 만두가 나오자 『이게 무슨 만두지요? 만두는 좀더 크게 만들어 肉水에 삶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열차가 벨로고르스크-치타 구간을 달리고 있던 8월15일, 金正日은 광복절을 기념하여 만찬을 열기로 했다. 나는 치타에 있는 블라디미르 볼디레프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선물을 부탁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기본화기였던 슈파긴 자동 소총을 보내 주었다.
金正日의 愛唱曲, 러시아 민요「광대한 나라 나의 조국」
나는 리셉션에서 이 자동 소총을 金正日에게 전달했다. 金正日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 선물을 받았다. 金正日은 북한에서 전투부대를 시찰할 때 기념으로 자동소총을 선물한다. 그것들은 모두 신형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반세기 전의 총을 들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5시간 정도를 같이 보냈다. 金正日은 러시아와 북한의 멜로디를 들어보라고 제안했다. 그의 음악 살롱에는 대규모 음반과 녹음테이프 보관실이 있었다. 그는 「바이칼 동부의 야생 스텝을 따라」, 「만주고원에서」, 「아무르강의 파도」, 「너와 나는 한 강물의 두 강가」를 감상했다. 그는 노래를 직접 따라 부르기도 했고, 우리가 가사를 틀리게 부르면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愛唱曲이 러시아 민요 「광대한 나라 나의 조국」이라고 말했다. 이 곡은 하산역에서 처음 그를 만날 때도 흐르고 있었다. 북한의 철도부 장관이 승무원들 가운데 노래를 잘 부르는 여성이 있다고 하자, 金正日은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4명의 아주 아름다운 차장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런 반주도 없이 러시아語와 조선語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 아가씨들이 전문 배우들이고,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특별히 열차에 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부 장관은 그 공연이 즉흥적인 것처럼 설명했지만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리셉션은 군사 퍼레이드 녹화테이프를 감상하는 것으로 끝났다. 우리가 객실로 돌아가려고 하자 金正日은 나에게 2002년 4월27일에 있을 조선인민군 창설 7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하도록 초청했다.
담배도 끊고 毒酒도 안 마시고
나는 金正日의 관심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나는 金正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때로는 예기치 않은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면 파리에 있는 카바레 리도에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면서 종업원들 가운데 러시아 여성이 80%나 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金正日이, 의사들이 양질의 포도주를 매일 반 병씩 마시도록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르도와 버건디 포도주를 좋아한다. 그의 이번 열차여행을 위해서 포도주가 파리에서 空輸(공수)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맥주를 두세 잔 정도씩 마셨다. 金正日은 러시아 군인들이 過飮(과음)을 즐긴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술을 많이 마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고 개인의 건강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자 金正日은 사과를 하면서 자기도 50세까지는 술을 좋아했으나, 의사가 그를 굴복시켜 독한 술은 금했다고 告白했다.
金正日은 의학과 관련된 얘기를 자주 꺼내곤 했다. 그는 아프리카 지역의 에이즈 감염자 보도를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많은 나라들이 국제사회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들의 불행을 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人들의 흡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러시아人들은 담배를 참 많이 피우더군요. 의지만 있으면 담배를 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1982년에 담배를 끊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2년 전에야 금연을 확실히 결심해서 이제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金正日의 수행원 중 한 사람인 군단장과 사단장을 비롯한 고급장교들도 모두 金正日의 뒤를 이어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고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金正日은 軍을 배려해서 정해진 규정에 따라 병사들에게 양질의 담배를 공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金正日은 평양을 방문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말했다.
『올브라이트는 처음부터 나를 마치 법정에서 심문하듯 했습니다. 나는 모든 질문에 답했고, 그녀는 내가 사전에 준비된 원고를 이용해서 답하는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답하는지 유심히 살폈지요. 나는 내 생각을 스스로의 말로 간단명료하게 밝혔지요. 그녀는 내 성격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습니다』
북한 대표단에는 카메라맨, TV 및 영화 촬영기사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길게, 때로는 일정에 따라 짧게나마 우리의 만남을 모두 촬영했다. 북한의 한 기자는 일찍이 소비에트 시절 촬영기사들이 영화를 촬영할 때 사용하던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金正日은 북한 기자들이 취재를 할 때마다 나에게 이의가 없는지 물었다. 나는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이 「위대한 장군」을 찬양하기 위한 선전영화의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을 반대하지 않았다.
방문 초기 러시아 언론은 金正日에 대해 시니컬하고 가시 돋친 논평을 실었다. 그것은 金正日이 탄 열차가 통과하는 全구간에 걸쳐 보안대책이 한층 강화된데다가 金正日 자신의 신비성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金正日에게 언론도 민주개혁 과정의 초기단계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과감하고 객관적인, 그리고 편견 없는 보도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스크바를 지나 旅路(여로)의 중반쯤에 이르자 金正日은 기자들의 추측기사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 우리에게 총격을 가한 듯하다든가, 金正日이 바이칼에 정차해서 호수에서 손을 씻었다는 등의 기사를 읽고는 그저 웃고 말았다.
러시아 경호원들에게 1000달러씩 주려고 해 진땀
우리는 북한과 다른 국가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논의했다. 金正日은 부시 정권이 들어선 뒤 미국의 對北정책이 달라진 데 대해서 유감스러워했다. 그는 美 행정부가 북한을 극단주의와 테러, 폭력을 일삼는 나라들과 동일시한 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말했다.
『클린턴 시절 北美관계는 개선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측과 남북철도연결협약을 거의 맺을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부시는 재래식 무기 문제를 양국 간 협상의제에 포함시키자는, 우리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미국인들의 우려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래식 무기 문제를 1차 협상 대상으로 삼으려는 그들의 제안은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강경노선을 취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하게 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워싱턴 행정부가 전임자로부터 권력뿐만이 아니라 정책도 승계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때와 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재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르州를 지나면서 金正日은 점심식사 중 자신을 수행한 러시아 측 수행원들을 격려하고 싶다고 하면서, 러시아 방문 마지막날 공식 인사들에게는 1000달러씩, 특별 경호원들에게는 300달러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金正日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설사 북측의 경호원들이 우리 수행원 주머니에 몰래 돈을 찔러 넣어 준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모스크바에서 대통령 비서실에 반납할 것입니다』
金正日은 끝까지 돈을 주겠다고 하다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으므로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다음날 金正日이 다시 포상금 이야기를 꺼내자 우리 측의 한 노련한 외교관이 ▲金正日이 러시아 대통령에게 부탁해서 모든 수행원들을 치하하도록 한다 ▲북한정부가 우리 수행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한다 ▲金正日 생일에 우리 모두를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초대한다 ▲金正日이 1, 2, 3 방안을 모두 한꺼번에 해준다 등의 네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金正日이 결국 어떤 방안을 선택했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金正日은 내게 아름다운 벽걸이용 手製(수제) 패널화를 선물했다. 천으로 된 화폭에 그림 같은 북한 풍경이 그려져 있고, 한쪽 모서리에는 러시아語로 「풀리코프스키」라고 쓰여 있었다. 金正日을 수행했던 우리 측의 모든 수행원들이 그와 함께 기념촬영을 허락받은 것도 큰 선물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일로, 金正日과 함께 사진을 찍을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金正日 주위에는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으나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비롯한 3~4명의 장관은 줄곧 그와 함께 이동했다. 그와 늘 함께한 사람들은 경호원들로, 그들은 우리 측 경호원들과 몇 곡의 러시아 노래를 함께 부를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金正日은 평범한 주위 사람들에 대해 매우 소탈하게 행동했으며, 측근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金正日 앞에 설 때마다 머리를 깊숙이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고, 자세를 바로 하라는 장군님의 보일락 말락 하는 신호가 있을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도 소지한 金正日의 경호팀
측근들은 金正日과 함께한 자리에서도 그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사랑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우리 장군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등 3인칭을 사용했다. 경호원들은 金正日에 대해 더욱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이들은 키가 겨우 156cm밖에 되지 않는 육군 대령이 지휘했다. 우리 측 경호원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金正日 경호팀은 25명 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일반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항상 金日成 배지를 달고 다녔다.
金正日는 카키색 인민복을 입고 다녔다. 그는 긴 소매나 혹은 반소매에 가슴이 트였거나 막힌 점퍼를 입고 회담장에 나오곤 했다. 金日成 배지를 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金正日뿐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측 경호원들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7월26일 북한에서 온 열차가 하산역에 도착했을 때, 양측 경호원들은 권총과 기타 총기의 번호가 적힌 서류를 교환하면서 소지한 무기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전문가들의 눈에는 누가 어디에 총을 차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북측 경호원들은 겨드랑이 밑과 혁대에 권총을 두 자루씩 차고 있었다.
그들은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金正日이 자동차를 타고 모스크바나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는 기관총으로 무장했지만, 한 번도 가방에서 꺼내 들지는 않았다. 나는 북한 경호원들의 실제 경호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번은 金正日의 전용 칸에서 그와 회담을 하고 있는데, 내 공보관이 그에게 너무 빨리 다가갔다. 그러자 북측 경호원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두 팔을 비틀어 올렸다.
지나치게 의욕적인 北 경호팀
한번은 북한 경호원과 우리 측 경호원들이 팔씨름 시합을 했다. 이들은 객차 승강구에 의자 2개와 책상을 가져다 놓고 대결했다. 우리 팀 대표로는 키가 183cm인 하바로프스크 출신 경호원이 나섰다. 북한 측에서는 키가 179cm인 경호원이 나왔다. 승강구가 꽉 들어찰 정도로 양측 응원단이 모여들었다.
첫판은 러시아 측이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이겼다. 알고 보니 그는 육상·복싱·킥복싱을 했고, 20세 때는 100m를 10.7초에 주파했다고 한다. 북한대표는 레슬링 선수 출신이었다.
그러나 2차 대결에서는 북한 측 대표가 이겼다.
북한 측 경호원들의 나이는 모두 35세 이상이었다. 그들은 모두 헐거운 정장을 입고 다녔는데, 아마도 옷 속에 숨긴 무기가 잘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 측 경호원들은 치수가 꼭 맞는 옷을 입었는데, 무기를 어디에 숨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 경호원들은 자주 우리 측 경호원들을 껴안고 어깨나 등을 가볍게 치거나 손가락으로 배를 찔러 보는 등 장난을 하면서 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한 경호원이 우연을 가장해 내 몸에 손을 스치더니, 또 다른 경호원이 번갈아 가며 손을 스치곤 했다. 한번은 열차 복도에서 金正日의 밀착 경호원 중 한 사람과 부딪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단단한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담무쌍한 용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측 경호원들은 북측 동료들이 「지나치게 의욕적」이라고 푸념하면서도 金正日 경호는 우리가 주도한다는 점을 그들에게 정중하게 일러 주곤 했다.
두 대의 金正日 전용 방탄 메르세데스 벤츠도 잘 보관되었다. 열차 한 량이 이 자동차를 위해 배정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방문 중 단 하루만 이 차가 운행되었다. 우리 일행이 모스크바 시내를 이동할 때도 승객은 타지 않고 운전기사만 탔을 뿐이다. 金正日에게 러시아 대통령의 전용차 한 대가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시골 아이들의 投石
우리 열차를 이끈 기관차 전담 경호원은 2명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안전대책에도 불구하고 車窓(차창)이 깨지는 사고가 두 차례나 일어났다. 다행히 북한 측 차량이 아니라 러시아 측 차량의 창문이었다. 아마 지나가는 열차에 돌팔매질을 하는 시골 아이들이 한 짓 같았다. 우수리스크 근교와 모스크바 근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던 중 線路 위에서 작은 시멘트 덩어리가 발견되어 열차가 급정차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열차에 앞서 달리던 선도 기관차가 통과할 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결국 선도 기관차가 통과한 직후 누군가가 한 짓이다. 하지만 마주 오던 열차의 기관사들이 시멘트 덩어리를 발견하고 가까운 역에 연락해 준 덕분에 우리도 신속하게 이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장애물을 치운 뒤 다시 출발했고, 그 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선도 기관차 외에 또 한 대의 기관차가 줄곧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기관차의 임무는 다른 열차가 우리를 追突(추돌)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환 도중 金正日의 전용열차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기 1주일 전에 市 공안 당국도 金正日의 경호에 참여하라는 통지가 현지 경찰에 접수되었다.
이 작전에는 1000명 가량의 경찰관이 투입되었다. 우리 열차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기 하루 전 市 교통안전감독국은 金正日과 그의 수행원들을 태우고 다닐 모든 자동차를 점검했다. 日製 지프, 독일製 메르세데스 벤츠와 러시아製 볼가 등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폭발물 설치를 확인한 후 모든 차량을 완전히 封印(봉인)했다.
경찰은 8월12~13일 밤 사이에 역광장에 차를 세워 둔 모든 운전자들에게 차를 이동시켜 광장을 깔끔히 청소했다. 우리 열차가 역에 도착한 아침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오전 9시 金正日의 행렬이 하바로프스크市 시찰 길에 나섰다. 차량행렬은 시속 80km를 유지했다. 맨 앞에 교통안전감독국의 선도 차량이 지나면서 차량행렬이 이어지므로 길을 양보하도록 경고했다.
金正日의 시찰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가 통과하게 될 모든 도로에서 전차나 트롤리 버스,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 외의 모든 차량 운행이 금지되었고, 金正日이 역에서 출발한 직후부터는 대중교통 수단마저 운행이 금지됐다. 그런데 한 교차로에 서있던 화물트럭 한 대가 경호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엔진이 멈춰 버려 트럭을 치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승용차 행렬은 조심스럽게 장애물을 우회해야 했는데,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이것이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金正日은 중앙백화점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백화점 맞은편 건물이 외부수리 중이어서, 인부들이 5층 정도 높이에서 요람을 타고 외벽을 칠하고 있었다. 연방경호대는 그들을 즉각 철수시켰다. 오전 10시 정각 金正日의 차량행렬이 상가에 들어섰다. 金正日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백화점 위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큰 소리가 울렸다.
모두 놀랐으나, 백화점 사장 올렉 쿠젠코프가 건물 위 시계탑을 가리켰다. 그것은 크렘린의 시계탑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하바로프스크 시민들은 그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金正日과 그의 경호원들은 놀랐을 것이다. 金正日은 우랄지역에서 태평양 연안 사이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국영 백화점에 들어갔다.
金正日은 名品族
그는 먼저 화장품 코너에 들렀다. 유리 진열장에 값비싼 화장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金正日이 『화장품을 어디서 공급받느냐』고 묻자 사장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사온다』고 답했다. 그 다음 金正日은 해외 유명 회사들의 스포츠웨어와 산악스키 용품 전문매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상품진열장 사이를 오가면서 상품을 만져 보고, 손가락으로 천을 문지르면서 상품의 質(질)을 감정했다. 그는 남성복 코너에도 들러 바지와 정장, 외투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왜 어떤 바지에는 커프스 장식이 있는데, 다른 바지에는 없는지 물었다. 사장은 『커프스 장식이 있는 바지가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해서 그런 바지를 들여오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金正日은 이탈리아와 스페인製 남성용 구두 진열대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가장 비싼 구두는 1만2000루블(약 50만원)이었다. 그는 『그렇게 비싼 신발이 팔리느냐』고 묻자 백화점 사장은 『하루에 한두 켤레는 팔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金正日은 한 수행원을 불러 뭔가 얘기하자 그는 재빨리 메모지에 받아 적었다.
金正日은 백화점을 둘러보면서 여러 차례 그를 다시 불렀고 그럴 때마다 그는 그의 지시를 열심히 메모했다. 金正日은 백화점에 주로 어느 나라 상품이 공급되는지 물었다.
金正日은 높은 굽에 코가 뾰족한 구두로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계단을 통해 백화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먼저 종업원들을 위해 마련된 미용실을 방문했다. 그는 여기서도 구두·옷·인형 등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처음에는 백화점을 둘러보는 데 5~7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金正日은 러시아의 공산품 판매 제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며 30분 가량 보냈다.
그러나 그는 3층에는 올라가지 않고 다과가 마련되어 있던 사장 집무실에도 들르지 않았다. 떠날 때 백화점 사장은 칼리닌그라트州의 예술가들이 발틱 지방의 천연호박으로 제작한 작은 그림을 선물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金正日은 북한에 돌아간 뒤 백화점에 조선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 은제 주화를 선물로 전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많다. 마약 사용자는 총살하라!』
金正日은 시내 관광 중에는 『난방 파이프는 왜 저런 식으로 단열하는가?』,『건축자재로 왜 조립식 콘크리트 블록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을 사용하는가?』, 『비철금속이 도난당하지는 않는가?』, 『주거환경은 어떻게 유지 보수되는가?』 등 많은 질문을 던졌다.
하바로프스크 지방에 거주하는 韓人들도 화제에 올랐다. 하바로프스크 부지사 알렉산드르 포포프는 한인들의 數(수)는 8000명 정도이며, 아주 근면해서 경제·의학·교육 등 어느 분야에서든지 성공을 거둔다고 말했다. 金正日은 『조선사람들은 생명력이 강해서 어디서든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대답했다.
젊은이들의 마약 사용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金正日도 국가원수로서 이 문제에 대한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는 우리나라에서 마약 밀매자는 물론이고, 마약 사용자도 모두 총살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인구가 많습니다. 다만 중국인 마약 밀매자들은 몽둥이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일 조선인 마약 사용자가 적발되면 내가 허락할 테니 총살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러시아 국가보안위원회에서 마약 문제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극동 연방지구에는 대마초, 마리화나, 헤로인 및 기타 약물 등 마약 복용자가 2만5000명 정도 등록되어 있다. 이에 관련해 2001년 8개월 동안 5000건 이상의 중범죄 및 특수범죄가 발생했다.
러시아 대통령은 마약 확산을 국가 安危(안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제 마약 사업의 신흥시장으로 부상했다. 1990년 이래 러시아의 마약중독자 수는 10배 증가하여 95만 명에 달하며, 러시아인 250만 명 이상이 불법 마약유통에 연루되어 있다. 金正日의 지시에 따른다면 머지않아 러시아에는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金正日은 외국인 투자 회사를 방문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2001년 2월 일본 자본 1500만 달러를 들여 설립한 아동식품 가공공장으로 金正日을 안내했다. 공장에서는 80명의 근로자가 하루 천연우유 15t을 가공한다. 하얀 가운을 입고 15분 동안 생산공정을 지켜본 金正日은 평양에도 똑같은 공장이 있다고 말했다. 金正日은 어린이용 발효우유, 응유, 비타민 첨가 우유 등의 試飮(시음)에 응하지 않았으나 그의 경호원들은 기꺼이 맛을 보았다.
金正日은 하바로프스크 참전용사 수용시설과 향토박물관을 방문했다. 나는 金正日을 러시아연방 극동지구 全權 대리인 관저에 초대했다. 내 집무실에 들어온 그는 대통령과의 직통전화를 보여 달라고 한 뒤, 내 책상 옆에 서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 다음 우리는 겨울정원을 꾸며 놓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유리 벽 너머로 하바로프스크의 전경이 펼쳐졌다. 金正日은 시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저기 건설 현장이 참 많군요.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한 번 더 러시아에 와서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다른 도시들을 좀더 가까이 접해 보고 싶습니다』
金正日은 전설적인 여객선 모스크바-75호를 타고 아무르江을 유람했다. 243석 규모의 이 유람선은 이 도시를 방문하는 귀빈용으로 개조되었다. 유람 첫날부터 레스토랑 아크바리움은 이 여객선에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전에 주문은 없었지만, 이 레스토랑의 주인 마라트 가틴은 북한 사람들의 食性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해산물 요리를 많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객선에서는 마치 야외에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파티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쳤다. 金正日은 기꺼이 모든 요리를 먹어 보았다. 우리 요리사들도 프랑스에서 유학한 북한 요리사들에 비해 결코 손색없었다.
흑빵 20개 구입
金正日과 함께 배 3척이 아무르江 유람을 떠났다. 맨 앞에 경비정 파트룰니-4호가 서고, 모스크바-75호, 모스크바-205호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모스크바-205는 본선과 동일한 것으로 모스크바-75호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金正日과 다른 모든 일행을 옮겨 태우기 위해 동원되었다.
金正日은 유람선 전체를 둘러보았던 말레이시아 총리와는 달리, 나의 권유로 단 한 차례 갑판 위로 올라가 보았을 뿐이다. 배에서는 보드카 한 잔씩과 맥주, 간식을 내왔다. 우리는 2시간 정도 아무르江을 둘러보았다. 유람이 끝난 2週 뒤 아나톨리 구빈 선장은 金正日이 보낸 조선노동당 기념메달을 받았다.
아무르江 유람이 끝날 무렵, 金正日의 보좌관 한 명이 마라트 가틴에게 가서 식탁에 있던 브로진스키 흑빵을 20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수행원이 식빵을 받아들고 역에 왔을 때 金正日의 열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그 수행원은 하바로프스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 金正日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빵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가틴은 빵을 영하 20도로 냉동시킨 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金正日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것 같았다. 특히 아무르江을 유람할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우리 앞에서 노래하던 예술인들과도 쉽게 어울렸다. 그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미소를 짓기도 하고, 하바로프스크市의 전경에 계속 놀라워했다. 저녁에 우리는 金正日과 함께 식사를 한 뒤 각자의 객차로 돌아갔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 국경에 위치한 하산역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현지시각 2001년 8월18일 오전 7시40분, 열차는 텅빈 하산역에 진입했다. 여기서 러시아 측 차량과 북한 측 차량은 분리되었다. 우리 측 경호원들은 金正日 측 경호원들과 기념촬영을 시작했다. 잠시 후 金正日의 열차는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 러시아와 북한 영토에 각각 3개와 6개의 교각을 두고 서 있는 「友好의 다리」에서 제동을 걸었다. 金正日의 전용칸은 「金日成의 오두막」이 서 있는 국경 근처 플랫폼에 멈추었다.
이 오두막은 1986년 金日成이 역시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연해주 지도자들과 만나 환담할 수 있도록 특별히 건립된 것이다. 오두막에는 조그만 식탁이 마련되었다. 나와 金正日은 그가 러시아를 떠나기에 앞서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임무 끝
金正日은 러시아 측의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헤어지기가 매우 아쉬운 듯했다. 우리는 2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는 동안 매우 가까워졌다. 그는 내 옆에 있는 동안은 항상 권위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金正日이 전용차에 오르자 수행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우호의 다리」를 지나 북한 측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하산역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기서 하산지역 대표에게 평범한 러시아식 사우나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주민의 집에 현대식 설비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소박한 사우나가 있었다.
우리는 4시간 정도 사우나를 하면서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여러 나라에서 간혹 「동방의 수수께끼 같은 지도자」라고 불리는 金正日과 지난 3週 동안 여행을 하면서 쌓인 긴장감을 훌훌 털어 냈다. 사우나가 끝난 뒤 세르게이 다리킨 연해주 주지사는 우리에게 조그만 보트를 내주었다. 우리는 보트를 타고 신선한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이렇게 해서 『金正日과 함께 러시아를 여행하라』는 나의 임무는 끝이 났다.●
나는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헬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의 열차가 도착할 하산으로 이동했다. 그를 위한 안전요원 80명은 우스리스크에서 열차로 이동했다. 우리에게 배정된 열차는 일곱 량이었다.
2001년 7월26일 오전 8시,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이 시작되었다. 객차의 문이 열리자 金正日은 환영객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후 내려왔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러시아 땅을 밟은 그를 환영했다. 나는 그의 손이 매우 크고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 측 대표단을 위한 다섯 량의 객차와 우리가 탄 일곱 량의 객차가 한 조가 되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매일 서너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양측 통역사를 통해서 1대 1로 대답을 했으나, 나중에는 회의실에 마련된 객차에 우리 두 사람을 수행한 양측 인사들이 초대되어 대화는 한층 더 광범위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푸틴 대통령은 뛰어난 특별 경호원을 보내 주었다. 특수복장을 한 50명 가량의 저격수들이 객차 2량에 타고, 金正日이 정차하는 모든 역의 플랫폼과 철로를 가로지르는 육교에서 사격자세를 취했다. 일부 특수 경호대는 사복 차림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전용차량으로부터 7분 거리에는 선도 기관차가 달렸다.
이들은 돌발 장애물을 事前에 발견하고, 비상시에는 7분 내에 金正日이 탄 전용열차를 정차시킬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金正日의 특별열차에는 그의 숙소 전용 칸, 회담장, 식당 칸, 그리고 메르세데스 벤츠가 두 대 실린 차고가 딸려 있었다. 나머지 차량에는 그의 수행원들이 탔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 매력적인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金正日의 수행비서로, 내가 金正日을 만날 때 항상 자리를 함께했다.
회담 전용 칸에는 두 대의 대형 평면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영화감상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자 지도였다. 이 지도에는 우리들의 이동경로, 실외온도, 통과하고 있는 지역의 경제현황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 열차에는 위성통신 설비와 컴퓨터도 설치되어 있었다.
金正日은 여행을 시작한 둘째 날, 블라고베센스크를 통과하고 있을 때 나를 처음으로 오찬에 초청했다. 그는 나에게 연해주 지방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경제가 악화되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많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을 통해 나는 그가 연해주의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金正日은 200여 종의 육류 제품을 생산하는 옴스크 베이컨社에서도 많은 질문을 했다. 그는 이 회사가 개인소유라는 것을 알고 私有制(사유제)의 장점은 있지만 북한에는 도입할 수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좁은 땅에 25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통치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열차가 노보시비르스크에 정차했을 때 金正日은 플랫폼에 나오지 않았다. 이곳에는 金日成의 목숨을 구해 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야코프 노비첸코가 살고 있었다. 노비첸코는 1946년 3월1일 평양에서 열린 3·1운동 27주년 기념식에서 연단으로 날아온 수류탄을 낚아채서 자기 몸으로 덮었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金日成은 뒤에 「北朝鮮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영웅 노비첸코에게」라는 獻辭(헌사)가 적힌 담배 케이스를 그에게 선물했고, 1986년 소련을 방문 중에는 그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1994년 사망했지만, 러시아 언론들은 金正日이 82세의 미망인 마리야 예브메노브나와 그 자식들을 만날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비서를 통해 선물만 전달해서 구구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신 金正日은 이곳에서 과학도시를 방문했고, 노보시비르스크 츠칼로프 항공기 생산 기업의 박물관과 기계조립 공장을 시찰한 뒤, 공장內 비행장에서 AN-38과 SU-24가 참가하는 에어쇼와 낙하산부대의 시범낙하를 관람했다. 우리는 극동의 경제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했는데, 그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의 연결사업이었다.
8월3일, 금요일 저녁 우리 열차는 모스크바에 있는 야로슬라블驛에 도착했다. 크렘린 안에 金正日의 숙소가 마련되었다. 金正日은 오전에 알렉산드르 정원의 무명용사 묘에 헌화를 한 다음, 붉은광장을 가로 질러 레닌의 묘에도 헌화를 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이나 다른 소련 지도자의 묘에는 가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은 크렘린 궁전의 녹색 접견실에서 이루어졌다. 양국 頂上이 단독회담을 가진 뒤에는 양측에서 20명씩 참가한 확대회담이 이뤄져 국제정세, 亞太지역 국가들과의 관계, 軍장비 협력,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종단철도의 연결, 북한의 나진항 이용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날 열린 공식만찬에는 양측에서 50명씩 참석했다.
金正日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돌아와 다시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 푸틴 대통령은 金正日을 그의 관저 오찬에 초청했다. 8월8일 열린 이 회담은 일정에 없었던 것이었다. 좀더 개방적이고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이 오찬으로 金正日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하산驛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예기치 않았던 푸틴과의 만남에 대해 회상했다.
『만일 나를 외교적으로 대하면 나도 외교관이 됩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내게 마음을 열고 대했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마음을 열어 보인 것이오』

3週에 걸친 러시아 여행 동안 金正日과 나눈 대화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내용은 신문에 나지 않은 것이다.
▲방문 목적=외국 신문들은 내가 철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주요 방문 목적은 내가 러시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極東과 시베리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시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와의 관계=왜 소련연방이, 특히 흐루시초프 시대와 新生 러시아가 우리에게 등을 돌렸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소비에트 시대에 우리에게 등을 돌린 것은 조선이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불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지만, 소련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가 우리에게 취한 태도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로 고민이 많았고, 심지어는 중국인들에게 러시아인들이 왜 우리를 그렇게 대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들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호전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며 기다려 보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마침내 그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이 변하고 있는 데 대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에게 흠뻑 매료되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러시아의 모든 정당과 여론 그리고 연방주체들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있다. 그들이 인민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게다가 인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푸틴 정권下에서 우리의 관계는 호전되고 있다. 이전에 우리는 주로 공산주의자들하고만 접촉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신중하게 그들과 접근할 것이다.
▲대중매체=西歐의 대중매체들은 나에 관해 많은 誹謗(비방)을 한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는 마치 내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趙明祿(조명록)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金容淳(김용순)을 해임한 것처럼 쓴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金容淳은 지금 휴가 중이다. 두 사람 모두 곧 복귀할 것이다. 나는 全세계적인 비난의 대상이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동지역=극동시장은 매우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항상 왜 우리가 유럽시장에 진출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왔다. 일단 연해주 지방과 다른 러시아 지역들과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 대체로 亞太지역 시장은 매력적이다. 중국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南朝鮮이 있기 때문이다.
▲감자와 옥수수=러시아는 감자를 주식으로 활용하는 좋은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나 역시 조선에 감자를 主食으로 정착시키고 싶지만 아직 잘 실행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우리는 1ha당 30t 정도의 많은 감자를 수확했다. 앞으로 1ha당 수확량을 80t 정도로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종자를 대상으로 품종 개량이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 북쪽 양강도에 주둔하고 있는 軍부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데 감자를 활용하면 훨씬 수월하고 경제적일 것이다. 그런데 군인들은 굳이 쌀을 요구한다. 곡물운송에는 더 많은 비용이 드는 데도 말이다.
내게는 한 가지 묘안이 있다. 이미 푸틴 대통령에게 말한 바 있지만, 러시아 극동지역에 농경지를 임대해서 25만 명 정도의 노동력을 파견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곳에 콩과 호밀을 경작해서 일부는 러시아에 넘겨 주고 나머지는 우리 몫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분배비율은 30대 70이 될 수도 있고, 50대 50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인민들은 지난 45~50년간 주로 옥수수를 먹어 왔다. 이미 많은 이들이 옥수수를 지겨워하고 있다.
▲여행=많은 이들이 러시아 自然은 매우 단조로워 열차여행이 몹시 지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열차여행을 택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 만족한다.
▲외교=내겐 외교관이 될 자질이 없다. 외교관들은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맛이 없어도 맛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역사를 왜곡시키지 않고 고스란히 보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조상들을 비난하는 것이 마치 유행처럼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무엇 때문에 과거를 뒤집으려 하는가? 비평가들은 입도 아프지 않단 말인가? 하기야 그것 빼면 할 일이 없는 것을….

金正日은 美食家(미식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요리법을 잘 아는 듯했지만 식사는 매우 간소하고 적당하게 했다. 마치 試食(시식)을 하듯 조금씩 먹었다. 그는 포크와 나이프, 은젓가락을 모두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에게는 프랑스에서 공부한 훌륭한 요리사들이 많다고 한다. 러시아식, 중국식, 북한식, 일식, 프랑스식 등 어떤 요리도 주문할 수 있었다. 메뉴는 보통 15~20가지 요리로 구성되었다. 식탁에는 언제나 다양한 韓食반찬이 나왔는데 항상 김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金正日은 조선 사람들은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데 필요한 일정한 효소가 결핍된 지구상의 유일한 민족이라고 하면서, 매운 양념은 일종의 대체 효소이기 때문에 매운 음식이 꼭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나는 의사들에게 그 말이 옳은지 물어보았지만, 명확한 답변은 들을 수 없었다. 디저트로는 고유의 케이크와 아이스크림이 나왔고, 차와 커피가 제공되었다. 金正日은 커피를 자주 마셨다. 그에게 제공되는 커피는 진하고 향기로웠다. 生水는 러시아산, 북한산, 일본산 탄산수와 非탄산수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식료품은 대형 특별 컨테이너로 공급되었다. 우리가 첫 정차역인 옴스크에 도착했을 때 북한 사람들은 화물트럭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북한에서 옴스크로 신선한 식품을 실은 비행기가 도착한 것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실은 듯한 밀봉 컨테이너들이 열차에서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운반되었다.
그런 작업은 모스크바, 노보시비르스크,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반복되었다. 한번은 金正日이 「쌀로」(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돼지비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옴스크 州知事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그래서 옴스크州에서 있었던 리셉션에서는 반쯤 훈제된 가슴 부위의 「쌀로」가 나왔다.
金正日은 그 맛을 본 뒤 말했다.
『이것은 진짜 쌀로가 아니군요』
식초에 담가 절인 불가리아式 오이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는 나무통 속에 넣어 소금에 푹 절여서 오이가 소금기로 약간 검은 색이 나와야 합니다』
그는 또 마요네즈와 치즈로 튀긴 동전 크기의 만두가 나오자 『이게 무슨 만두지요? 만두는 좀더 크게 만들어 肉水에 삶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열차가 벨로고르스크-치타 구간을 달리고 있던 8월15일, 金正日은 광복절을 기념하여 만찬을 열기로 했다. 나는 치타에 있는 블라디미르 볼디레프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선물을 부탁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기본화기였던 슈파긴 자동 소총을 보내 주었다.


그날 우리는 5시간 정도를 같이 보냈다. 金正日은 러시아와 북한의 멜로디를 들어보라고 제안했다. 그의 음악 살롱에는 대규모 음반과 녹음테이프 보관실이 있었다. 그는 「바이칼 동부의 야생 스텝을 따라」, 「만주고원에서」, 「아무르강의 파도」, 「너와 나는 한 강물의 두 강가」를 감상했다. 그는 노래를 직접 따라 부르기도 했고, 우리가 가사를 틀리게 부르면 바로잡아 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愛唱曲이 러시아 민요 「광대한 나라 나의 조국」이라고 말했다. 이 곡은 하산역에서 처음 그를 만날 때도 흐르고 있었다. 북한의 철도부 장관이 승무원들 가운데 노래를 잘 부르는 여성이 있다고 하자, 金正日은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4명의 아주 아름다운 차장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런 반주도 없이 러시아語와 조선語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 아가씨들이 전문 배우들이고, 우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특별히 열차에 태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부 장관은 그 공연이 즉흥적인 것처럼 설명했지만 모두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리셉션은 군사 퍼레이드 녹화테이프를 감상하는 것으로 끝났다. 우리가 객실로 돌아가려고 하자 金正日은 나에게 2002년 4월27일에 있을 조선인민군 창설 7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하도록 초청했다.

나는 金正日의 관심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나는 金正日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때로는 예기치 않은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면 파리에 있는 카바레 리도에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면서 종업원들 가운데 러시아 여성이 80%나 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金正日이, 의사들이 양질의 포도주를 매일 반 병씩 마시도록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르도와 버건디 포도주를 좋아한다. 그의 이번 열차여행을 위해서 포도주가 파리에서 空輸(공수)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맥주를 두세 잔 정도씩 마셨다. 金正日은 러시아 군인들이 過飮(과음)을 즐긴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술을 많이 마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고 개인의 건강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자 金正日은 사과를 하면서 자기도 50세까지는 술을 좋아했으나, 의사가 그를 굴복시켜 독한 술은 금했다고 告白했다.
金正日은 의학과 관련된 얘기를 자주 꺼내곤 했다. 그는 아프리카 지역의 에이즈 감염자 보도를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많은 나라들이 국제사회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자신들의 불행을 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人들의 흡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러시아人들은 담배를 참 많이 피우더군요. 의지만 있으면 담배를 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1982년에 담배를 끊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2년 전에야 금연을 확실히 결심해서 이제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金正日의 수행원 중 한 사람인 군단장과 사단장을 비롯한 고급장교들도 모두 金正日의 뒤를 이어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고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金正日은 軍을 배려해서 정해진 규정에 따라 병사들에게 양질의 담배를 공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金正日은 평양을 방문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말했다.
『올브라이트는 처음부터 나를 마치 법정에서 심문하듯 했습니다. 나는 모든 질문에 답했고, 그녀는 내가 사전에 준비된 원고를 이용해서 답하는지, 아니면 즉흥적으로 답하는지 유심히 살폈지요. 나는 내 생각을 스스로의 말로 간단명료하게 밝혔지요. 그녀는 내 성격이 맘에 드는 모양이었습니다』
북한 대표단에는 카메라맨, TV 및 영화 촬영기사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길게, 때로는 일정에 따라 짧게나마 우리의 만남을 모두 촬영했다. 북한의 한 기자는 일찍이 소비에트 시절 촬영기사들이 영화를 촬영할 때 사용하던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金正日은 북한 기자들이 취재를 할 때마다 나에게 이의가 없는지 물었다. 나는 金正日의 러시아 방문이 「위대한 장군」을 찬양하기 위한 선전영화의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을 반대하지 않았다.
방문 초기 러시아 언론은 金正日에 대해 시니컬하고 가시 돋친 논평을 실었다. 그것은 金正日이 탄 열차가 통과하는 全구간에 걸쳐 보안대책이 한층 강화된데다가 金正日 자신의 신비성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金正日에게 언론도 민주개혁 과정의 초기단계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과감하고 객관적인, 그리고 편견 없는 보도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스크바를 지나 旅路(여로)의 중반쯤에 이르자 金正日은 기자들의 추측기사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 우리에게 총격을 가한 듯하다든가, 金正日이 바이칼에 정차해서 호수에서 손을 씻었다는 등의 기사를 읽고는 그저 웃고 말았다.

우리는 북한과 다른 국가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논의했다. 金正日은 부시 정권이 들어선 뒤 미국의 對北정책이 달라진 데 대해서 유감스러워했다. 그는 美 행정부가 북한을 극단주의와 테러, 폭력을 일삼는 나라들과 동일시한 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말했다.
『클린턴 시절 北美관계는 개선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측과 남북철도연결협약을 거의 맺을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부시는 재래식 무기 문제를 양국 간 협상의제에 포함시키자는, 우리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미국인들의 우려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래식 무기 문제를 1차 협상 대상으로 삼으려는 그들의 제안은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강경노선을 취한다면 우리는 더욱 강하게 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워싱턴 행정부가 전임자로부터 권력뿐만이 아니라 정책도 승계를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때와 같은 수준에서 대화를 재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무르州를 지나면서 金正日은 점심식사 중 자신을 수행한 러시아 측 수행원들을 격려하고 싶다고 하면서, 러시아 방문 마지막날 공식 인사들에게는 1000달러씩, 특별 경호원들에게는 300달러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金正日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설사 북측의 경호원들이 우리 수행원 주머니에 몰래 돈을 찔러 넣어 준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모스크바에서 대통령 비서실에 반납할 것입니다』
金正日은 끝까지 돈을 주겠다고 하다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으므로 다른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다음날 金正日이 다시 포상금 이야기를 꺼내자 우리 측의 한 노련한 외교관이 ▲金正日이 러시아 대통령에게 부탁해서 모든 수행원들을 치하하도록 한다 ▲북한정부가 우리 수행원에게 표창장을 수여한다 ▲金正日 생일에 우리 모두를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에 초대한다 ▲金正日이 1, 2, 3 방안을 모두 한꺼번에 해준다 등의 네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金正日이 결국 어떤 방안을 선택했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金正日은 내게 아름다운 벽걸이용 手製(수제) 패널화를 선물했다. 천으로 된 화폭에 그림 같은 북한 풍경이 그려져 있고, 한쪽 모서리에는 러시아語로 「풀리코프스키」라고 쓰여 있었다. 金正日을 수행했던 우리 측의 모든 수행원들이 그와 함께 기념촬영을 허락받은 것도 큰 선물이었다. 수수께끼 같은 일로, 金正日과 함께 사진을 찍을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金正日 주위에는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으나 조선인민군 참모장을 비롯한 3~4명의 장관은 줄곧 그와 함께 이동했다. 그와 늘 함께한 사람들은 경호원들로, 그들은 우리 측 경호원들과 몇 곡의 러시아 노래를 함께 부를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金正日은 평범한 주위 사람들에 대해 매우 소탈하게 행동했으며, 측근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金正日 앞에 설 때마다 머리를 깊숙이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고, 자세를 바로 하라는 장군님의 보일락 말락 하는 신호가 있을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측근들은 金正日과 함께한 자리에서도 그에 대해 말할 때는 항상 『사랑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우리 장군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등 3인칭을 사용했다. 경호원들은 金正日에 대해 더욱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이들은 키가 겨우 156cm밖에 되지 않는 육군 대령이 지휘했다. 우리 측 경호원들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金正日 경호팀은 25명 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일반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항상 金日成 배지를 달고 다녔다.
金正日는 카키색 인민복을 입고 다녔다. 그는 긴 소매나 혹은 반소매에 가슴이 트였거나 막힌 점퍼를 입고 회담장에 나오곤 했다. 金日成 배지를 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金正日뿐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측 경호원들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7월26일 북한에서 온 열차가 하산역에 도착했을 때, 양측 경호원들은 권총과 기타 총기의 번호가 적힌 서류를 교환하면서 소지한 무기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전문가들의 눈에는 누가 어디에 총을 차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북측 경호원들은 겨드랑이 밑과 혁대에 권총을 두 자루씩 차고 있었다.
그들은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金正日이 자동차를 타고 모스크바나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는 기관총으로 무장했지만, 한 번도 가방에서 꺼내 들지는 않았다. 나는 북한 경호원들의 실제 경호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번은 金正日의 전용 칸에서 그와 회담을 하고 있는데, 내 공보관이 그에게 너무 빨리 다가갔다. 그러자 북측 경호원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두 팔을 비틀어 올렸다.


첫판은 러시아 측이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이겼다. 알고 보니 그는 육상·복싱·킥복싱을 했고, 20세 때는 100m를 10.7초에 주파했다고 한다. 북한대표는 레슬링 선수 출신이었다.
그러나 2차 대결에서는 북한 측 대표가 이겼다.
북한 측 경호원들의 나이는 모두 35세 이상이었다. 그들은 모두 헐거운 정장을 입고 다녔는데, 아마도 옷 속에 숨긴 무기가 잘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 측 경호원들은 치수가 꼭 맞는 옷을 입었는데, 무기를 어디에 숨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북한 경호원들은 자주 우리 측 경호원들을 껴안고 어깨나 등을 가볍게 치거나 손가락으로 배를 찔러 보는 등 장난을 하면서 총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한 경호원이 우연을 가장해 내 몸에 손을 스치더니, 또 다른 경호원이 번갈아 가며 손을 스치곤 했다. 한번은 열차 복도에서 金正日의 밀착 경호원 중 한 사람과 부딪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단단한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담무쌍한 용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측 경호원들은 북측 동료들이 「지나치게 의욕적」이라고 푸념하면서도 金正日 경호는 우리가 주도한다는 점을 그들에게 정중하게 일러 주곤 했다.
두 대의 金正日 전용 방탄 메르세데스 벤츠도 잘 보관되었다. 열차 한 량이 이 자동차를 위해 배정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방문 중 단 하루만 이 차가 운행되었다. 우리 일행이 모스크바 시내를 이동할 때도 승객은 타지 않고 운전기사만 탔을 뿐이다. 金正日에게 러시아 대통령의 전용차 한 대가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열차를 이끈 기관차 전담 경호원은 2명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안전대책에도 불구하고 車窓(차창)이 깨지는 사고가 두 차례나 일어났다. 다행히 북한 측 차량이 아니라 러시아 측 차량의 창문이었다. 아마 지나가는 열차에 돌팔매질을 하는 시골 아이들이 한 짓 같았다. 우수리스크 근교와 모스크바 근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던 중 線路 위에서 작은 시멘트 덩어리가 발견되어 열차가 급정차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열차에 앞서 달리던 선도 기관차가 통과할 때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결국 선도 기관차가 통과한 직후 누군가가 한 짓이다. 하지만 마주 오던 열차의 기관사들이 시멘트 덩어리를 발견하고 가까운 역에 연락해 준 덕분에 우리도 신속하게 이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장애물을 치운 뒤 다시 출발했고, 그 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선도 기관차 외에 또 한 대의 기관차가 줄곧 우리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기관차의 임무는 다른 열차가 우리를 追突(추돌)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환 도중 金正日의 전용열차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기 1주일 전에 市 공안 당국도 金正日의 경호에 참여하라는 통지가 현지 경찰에 접수되었다.
이 작전에는 1000명 가량의 경찰관이 투입되었다. 우리 열차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기 하루 전 市 교통안전감독국은 金正日과 그의 수행원들을 태우고 다닐 모든 자동차를 점검했다. 日製 지프, 독일製 메르세데스 벤츠와 러시아製 볼가 등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폭발물 설치를 확인한 후 모든 차량을 완전히 封印(봉인)했다.
경찰은 8월12~13일 밤 사이에 역광장에 차를 세워 둔 모든 운전자들에게 차를 이동시켜 광장을 깔끔히 청소했다. 우리 열차가 역에 도착한 아침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오전 9시 金正日의 행렬이 하바로프스크市 시찰 길에 나섰다. 차량행렬은 시속 80km를 유지했다. 맨 앞에 교통안전감독국의 선도 차량이 지나면서 차량행렬이 이어지므로 길을 양보하도록 경고했다.
金正日의 시찰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가 통과하게 될 모든 도로에서 전차나 트롤리 버스,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 외의 모든 차량 운행이 금지되었고, 金正日이 역에서 출발한 직후부터는 대중교통 수단마저 운행이 금지됐다. 그런데 한 교차로에 서있던 화물트럭 한 대가 경호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엔진이 멈춰 버려 트럭을 치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승용차 행렬은 조심스럽게 장애물을 우회해야 했는데,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이것이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金正日은 중앙백화점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백화점 맞은편 건물이 외부수리 중이어서, 인부들이 5층 정도 높이에서 요람을 타고 외벽을 칠하고 있었다. 연방경호대는 그들을 즉각 철수시켰다. 오전 10시 정각 金正日의 차량행렬이 상가에 들어섰다. 金正日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백화점 위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큰 소리가 울렸다.
모두 놀랐으나, 백화점 사장 올렉 쿠젠코프가 건물 위 시계탑을 가리켰다. 그것은 크렘린의 시계탑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하바로프스크 시민들은 그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金正日과 그의 경호원들은 놀랐을 것이다. 金正日은 우랄지역에서 태평양 연안 사이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국영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는 먼저 화장품 코너에 들렀다. 유리 진열장에 값비싼 화장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金正日이 『화장품을 어디서 공급받느냐』고 묻자 사장은 『프랑스와 미국에서 사온다』고 답했다. 그 다음 金正日은 해외 유명 회사들의 스포츠웨어와 산악스키 용품 전문매장을 둘러보았다.
그는 상품진열장 사이를 오가면서 상품을 만져 보고, 손가락으로 천을 문지르면서 상품의 質(질)을 감정했다. 그는 남성복 코너에도 들러 바지와 정장, 외투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왜 어떤 바지에는 커프스 장식이 있는데, 다른 바지에는 없는지 물었다. 사장은 『커프스 장식이 있는 바지가 다시 유행을 타기 시작해서 그런 바지를 들여오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金正日은 이탈리아와 스페인製 남성용 구두 진열대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가장 비싼 구두는 1만2000루블(약 50만원)이었다. 그는 『그렇게 비싼 신발이 팔리느냐』고 묻자 백화점 사장은 『하루에 한두 켤레는 팔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金正日은 한 수행원을 불러 뭔가 얘기하자 그는 재빨리 메모지에 받아 적었다.
金正日은 백화점을 둘러보면서 여러 차례 그를 다시 불렀고 그럴 때마다 그는 그의 지시를 열심히 메모했다. 金正日은 백화점에 주로 어느 나라 상품이 공급되는지 물었다.
金正日은 높은 굽에 코가 뾰족한 구두로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계단을 통해 백화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먼저 종업원들을 위해 마련된 미용실을 방문했다. 그는 여기서도 구두·옷·인형 등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처음에는 백화점을 둘러보는 데 5~7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金正日은 러시아의 공산품 판매 제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며 30분 가량 보냈다.
그러나 그는 3층에는 올라가지 않고 다과가 마련되어 있던 사장 집무실에도 들르지 않았다. 떠날 때 백화점 사장은 칼리닌그라트州의 예술가들이 발틱 지방의 천연호박으로 제작한 작은 그림을 선물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金正日은 북한에 돌아간 뒤 백화점에 조선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 은제 주화를 선물로 전했다.

金正日은 시내 관광 중에는 『난방 파이프는 왜 저런 식으로 단열하는가?』,『건축자재로 왜 조립식 콘크리트 블록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을 사용하는가?』, 『비철금속이 도난당하지는 않는가?』, 『주거환경은 어떻게 유지 보수되는가?』 등 많은 질문을 던졌다.
하바로프스크 지방에 거주하는 韓人들도 화제에 올랐다. 하바로프스크 부지사 알렉산드르 포포프는 한인들의 數(수)는 8000명 정도이며, 아주 근면해서 경제·의학·교육 등 어느 분야에서든지 성공을 거둔다고 말했다. 金正日은 『조선사람들은 생명력이 강해서 어디서든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대답했다.
젊은이들의 마약 사용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金正日도 국가원수로서 이 문제에 대한 걱정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는 우리나라에서 마약 밀매자는 물론이고, 마약 사용자도 모두 총살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인구가 많습니다. 다만 중국인 마약 밀매자들은 몽둥이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일 조선인 마약 사용자가 적발되면 내가 허락할 테니 총살하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러시아 국가보안위원회에서 마약 문제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극동 연방지구에는 대마초, 마리화나, 헤로인 및 기타 약물 등 마약 복용자가 2만5000명 정도 등록되어 있다. 이에 관련해 2001년 8개월 동안 5000건 이상의 중범죄 및 특수범죄가 발생했다.
러시아 대통령은 마약 확산을 국가 安危(안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제 마약 사업의 신흥시장으로 부상했다. 1990년 이래 러시아의 마약중독자 수는 10배 증가하여 95만 명에 달하며, 러시아인 250만 명 이상이 불법 마약유통에 연루되어 있다. 金正日의 지시에 따른다면 머지않아 러시아에는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金正日은 외국인 투자 회사를 방문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2001년 2월 일본 자본 1500만 달러를 들여 설립한 아동식품 가공공장으로 金正日을 안내했다. 공장에서는 80명의 근로자가 하루 천연우유 15t을 가공한다. 하얀 가운을 입고 15분 동안 생산공정을 지켜본 金正日은 평양에도 똑같은 공장이 있다고 말했다. 金正日은 어린이용 발효우유, 응유, 비타민 첨가 우유 등의 試飮(시음)에 응하지 않았으나 그의 경호원들은 기꺼이 맛을 보았다.
金正日은 하바로프스크 참전용사 수용시설과 향토박물관을 방문했다. 나는 金正日을 러시아연방 극동지구 全權 대리인 관저에 초대했다. 내 집무실에 들어온 그는 대통령과의 직통전화를 보여 달라고 한 뒤, 내 책상 옆에 서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 다음 우리는 겨울정원을 꾸며 놓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유리 벽 너머로 하바로프스크의 전경이 펼쳐졌다. 金正日은 시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저기 건설 현장이 참 많군요.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한 번 더 러시아에 와서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다른 도시들을 좀더 가까이 접해 보고 싶습니다』
金正日은 전설적인 여객선 모스크바-75호를 타고 아무르江을 유람했다. 243석 규모의 이 유람선은 이 도시를 방문하는 귀빈용으로 개조되었다. 유람 첫날부터 레스토랑 아크바리움은 이 여객선에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사전에 주문은 없었지만, 이 레스토랑의 주인 마라트 가틴은 북한 사람들의 食性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해산물 요리를 많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객선에서는 마치 야외에 나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파티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쳤다. 金正日은 기꺼이 모든 요리를 먹어 보았다. 우리 요리사들도 프랑스에서 유학한 북한 요리사들에 비해 결코 손색없었다.

金正日과 함께 배 3척이 아무르江 유람을 떠났다. 맨 앞에 경비정 파트룰니-4호가 서고, 모스크바-75호, 모스크바-205호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모스크바-205는 본선과 동일한 것으로 모스크바-75호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金正日과 다른 모든 일행을 옮겨 태우기 위해 동원되었다.
金正日은 유람선 전체를 둘러보았던 말레이시아 총리와는 달리, 나의 권유로 단 한 차례 갑판 위로 올라가 보았을 뿐이다. 배에서는 보드카 한 잔씩과 맥주, 간식을 내왔다. 우리는 2시간 정도 아무르江을 둘러보았다. 유람이 끝난 2週 뒤 아나톨리 구빈 선장은 金正日이 보낸 조선노동당 기념메달을 받았다.
아무르江 유람이 끝날 무렵, 金正日의 보좌관 한 명이 마라트 가틴에게 가서 식탁에 있던 브로진스키 흑빵을 20개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수행원이 식빵을 받아들고 역에 왔을 때 金正日의 열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그 수행원은 하바로프스크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면 金正日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빵을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가틴은 빵을 영하 20도로 냉동시킨 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金正日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것 같았다. 특히 아무르江을 유람할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는 우리 앞에서 노래하던 예술인들과도 쉽게 어울렸다. 그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미소를 짓기도 하고, 하바로프스크市의 전경에 계속 놀라워했다. 저녁에 우리는 金正日과 함께 식사를 한 뒤 각자의 객차로 돌아갔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 국경에 위치한 하산역에 도착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현지시각 2001년 8월18일 오전 7시40분, 열차는 텅빈 하산역에 진입했다. 여기서 러시아 측 차량과 북한 측 차량은 분리되었다. 우리 측 경호원들은 金正日 측 경호원들과 기념촬영을 시작했다. 잠시 후 金正日의 열차는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 러시아와 북한 영토에 각각 3개와 6개의 교각을 두고 서 있는 「友好의 다리」에서 제동을 걸었다. 金正日의 전용칸은 「金日成의 오두막」이 서 있는 국경 근처 플랫폼에 멈추었다.
이 오두막은 1986년 金日成이 역시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연해주 지도자들과 만나 환담할 수 있도록 특별히 건립된 것이다. 오두막에는 조그만 식탁이 마련되었다. 나와 金正日은 그가 러시아를 떠나기에 앞서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金正日은 러시아 측의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헤어지기가 매우 아쉬운 듯했다. 우리는 24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하는 동안 매우 가까워졌다. 그는 내 옆에 있는 동안은 항상 권위 있는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金正日이 전용차에 오르자 수행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우호의 다리」를 지나 북한 측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하산역으로 돌아왔다. 나는 여기서 하산지역 대표에게 평범한 러시아식 사우나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 주민의 집에 현대식 설비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소박한 사우나가 있었다.
우리는 4시간 정도 사우나를 하면서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여러 나라에서 간혹 「동방의 수수께끼 같은 지도자」라고 불리는 金正日과 지난 3週 동안 여행을 하면서 쌓인 긴장감을 훌훌 털어 냈다. 사우나가 끝난 뒤 세르게이 다리킨 연해주 주지사는 우리에게 조그만 보트를 내주었다. 우리는 보트를 타고 신선한 바닷바람을 만끽했다. 이렇게 해서 『金正日과 함께 러시아를 여행하라』는 나의 임무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