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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혁명 40주년 5·16 주체세력들 그룹 인터뷰

『우리가 군사혁명으로써 反共 자유 민주체제를 수호했다』(蔡命新 당시 5사단장)

배진영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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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혁명이 발생한 지도 벌써 40년이 지났다. 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던 5·16 주체들은 그 후 어떤 삶을 살았고, 오늘의 시점에서 5·16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새벽의 銃聲
  1961년 5월16일 새벽 3시20분경, 한강인도교에서는 5·16군사혁명의 선봉 부대인 해병 제1여단(여단장:金潤根 준장)병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헌병대 병력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요란한 총성에 단잠을 깬 서울 시민들은 새벽 5시, KBS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朴鍾世(박종세) 아나운서의 방송을 듣고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隱忍自重(은인자중)하던 軍部(군부)는 드디어 今朝(금조) 未明(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새벽의 고요를 깬 총성과 「혁명 방송」은 朴正熙(박정희) 시대 18년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울러 이는 정치적으로는 文民(문민)엘리트의 통치에서 軍部-관료 엘리트들에 의한 통치로, 경제·사회적으로는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이 군사 행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당시 나이는 거사의 지도자인 朴正熙 소장(당시 44세)을 비롯한 몇몇 장성급 인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30代 중·후반에 불과했다. 5·16 주체세력에 의해 일시적이나마 명목상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육군참모총장 張都暎(장도영) 중장이나, 5·16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軍에서 축출당한 이른바 「反혁명세력」들도 5·16주체세력과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
 
  「5·16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몇 명인지, 그리고 그들 가운데 현재 얼마나 살아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혁명주체 153명
 
  1962년 7월 「5·16 군사혁명사 편찬위원회」에서 펴낸 「5·16 혁명實記(실기)」를 보면 1961년 4월 말까지 만들어진 혁명 조직도가 나와 있는데, 100명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朴正熙 소장이 포섭한 張坰淳(장경순)·韓雄震(한웅진)·尹泰日(윤태일)·宋贊鎬(송찬호) 준장등 몇몇 장성급 인물들이나, 金東河(김동하) 예비역 소장,·金潤根 准將·吳定根(오정근) 중령 등 해병대의 혁명 주체들, 그리고 鄭鳳旭(정봉욱) 대령(제1군 포병참모)처럼 5·16 거사 직후 朴正熙 少將과의 개인적 인연에 따라 혁명에 가담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은 나와 있지 않다.
 
  1978년 「5·16민족상 재단」에서는 「革命主體인사 기록카드」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153명이 「革命主體」로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도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朴倉巖(박창암) 예비역 육군준장 등 후일 反혁명으로 거세된 일부 인사들이나, 車智澈(차지철) 前 경호실장 등 5·16 당시 尉官級(위관급)으로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5·16 참가자들의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것도 의외지만, 5·16 참가자들의 모임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뜻밖이다. 4·19 관련자들이 「4월회」, 「4·19혁명 부상자회」, 「4·19혁명희생자 유족회」등을 만들어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거나, 3·4共 시절 朴正熙 정권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민족중흥회」(3·4共시절 고위공직자들의 모임), 「은행나무 동지회」(공화당 사무처 요원들의 모임) 등을 만들어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금은 「5·16민족상 재단」(이사장:金在春·김재춘)이 그나마 5·16 관계자들의 모임 역할을 하고 있다. 「5·16민족상 재단」에서는 간헐적으로 5·16과 관련된 史料(사료)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도했지만, 재정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태라고 한다.
 
  5·16 주체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 이 시점에서 5·16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 『조용히 老年을 보내고 있는 터에 지나간 일에 대해 새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얘기였다.
 
  5·16 후 反혁명으로 고초를 겪은 이들 가운데는 5·16에 대한 기존의 기록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당당하게 5·16 옹호론을 전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5·16 주체들의 지난 40년간의 족적을 살펴보면서, 일반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5·16 주체들을 통해 5·16 군사혁명 40주년을 맞는 그들의 소감을 들어 보기로 한다.
 
 
 
 『5·16이 성공한 것은 國運이었다』
 
  李周一(이주일·83) 前감사원장은 5·16 당시 제2군 참모장(육군 소장)으로 대구를 비롯한 후방 지역에서의 부대 출동을 책임졌다. 그는 軍政기간 중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財經위원장·同부정축재처리위원장·同부의장 등을 맡아 공식적으로는 혁명의 2인자 역할을 했다. 民政 이양과 함께 육군 大將으로 예편한 후에는 1971년까지 감사원장으로 재직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5·16민족상 재단 총재·함북장학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그가 함북장학회를 만든 것은 軍政 기간 중 「朴林恒(박임항) 중장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고향인 함북 출신 인사들이 많이 희생된 데 대한 贖罪(속죄)의 표시라는 해석이 있다. 軍政기간 중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인연으로 현재 대한체육회 고문을 맡고 있다. 언론과의 접촉을 한사코 기피하는 것으로 유명한 李 前원장은 『팔십이 넘은 늙은이가 무슨 할 얘기가 있겠느냐』며 5·16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張坰淳(장경순·80) 前 국회 부의장은 朴正熙 소장이 육군작전참보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작전교육처장(육군 准將)으로 있으면서 시국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거사모의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사 하루 전인 5월15일 오후 5시 朴正熙 소장으로부터 『내일이 D-데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주저없이 『제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대답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5·16 당일에는 신당동 朴正熙 소장집에서 제6관구사령부까지 朴正熙 소장을 수행했고, 제1공수전투단의 출동을 독려했다.
 
  혁명정부에서는 최고위원·농림부 장관 등으로 일한 그는 民政이양과 함께 육군 중장으로 예편, 정계에 투신했다. 6대부터 10대까지 내리 다섯 번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그는 공화당 사무총장·국회부의장·공화당 중앙위원회 의장·무임소 장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그가 세운 최장수 국회부의장(1963∼1973)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張 前부의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지금도 (주) 코리아 내추럴 워터스 회장·삼호실업 회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경영은 동생에게 맡긴 상태라고 한다.
 
  유도 9단인 張 前부의장은 1964년부터 1983년까지 20년간 대한유도회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유도고단자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1995년에서 1997년까지는 前職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憲政會(헌정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張 前부의장은 4·19 후의 혼란, 특히 대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추진을 지적하면서 『5·16 직전 거사 계획이 이미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거사가 결국 성공한 것은 「國運(국운)」이었다』고 말했다. 그 한 마디에 5·16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녹아 있는 듯했다.
 
  제36사단장 尹泰日(윤태일) 준장은 거사 전날 상경하여 朴正熙 소장을 수행했다. 軍政기간 중에는 서울시장을 지냈다. 1963년 중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주택공사 사장, 국회의원·국회건설위원장을 역임했다. 1982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崔泓熙 소장은 反韓인사로 변신
 
  육군정보학교장이던 韓雄震(한웅진) 준장도 거사 당일 朴正熙 소장을 수행했다. 혁명 후 잠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안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나, 1962년 軍에 복귀했다. 제9사단장·3관구 사령관을 거쳐 1970년 제2군 부사령관을 끝으로 소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농장을 경영하다 1988년 64세로 사망했다.
 
  崔周鍾(최주종) 前주택공사 사장은 5·16 당시 제31사단장(육군 소장)으로 光州를 점령했다. 최고위원·제8사단장·제5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 1963년 「朴林恒 장군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일시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곧 석방되어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냈다. 1968년 예편한 뒤에는 주택공사 사장을 지낸 후, 용인에서 목장을 경영했다. 1998년 76세로 별세했다.
 
  제 37사단장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金振暐(김진위·84) 前수도경비사령관은 최고회의 건설위원장·수도경비사령관·논산훈련소장 등을 역임했다. 예편 후에는 농장을 경영했는데, 10여년 전부터 老患(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金容珣(김용순) 前중앙정보부장은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참모장(육군 준장)으로 혁명에 참여, 부산市를 장악했다. 이후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거쳐, 1963년 한 달 남짓 제2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았다. 같은 해 중장으로 예편한 후 국회의원, 5·16민족상 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으나, 1975년 49세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고사포 여단장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宋贊鎬(송찬호·78) 前브라질 대사는 1961년 7월 「反혁명음모사건」으로 獄苦(옥고)를 치렀다. 그후 駐삿포로 총영사·駐브라질 대사 등을 지냈다. 5共 출범과 함께 공직에서 물러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崔泓熙(최홍희·83)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는 논산훈련소장(少將)으로 있으면서 혁명에 가담했다. 이후 6군단장·駐말레이시아 대사 등을 지냈으나, 1972년 캐나다로 망명, 反韓활동을 벌였다. 그는 1954년 개별 명칭을 쓰던 6개 무도관을 통합, 「跆拳道(태권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태권도界의 원로이다. 캐나다 망명 후 북한의 지원을 받아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 金雲龍 IOC 위원이 이끄는 세계태권도연맹과 대립해 왔다. 최근 세계태권도 연맹과 국제태권도연맹의 통합이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訪韓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公權力이 살아 있지 않은 국가는 국가라고 할 수 없다』
 
  蔡命新(채명신·75) 前 駐越軍 사령관은 5·16 당시 제5사단장(준장)이었다. 4·19 이후 제5사단 주둔지인 철원에는 40여명의 사이비 기자들이 득실거렸다. 돈 주고 기자증을 사서 「귀에 연필을 꽂고, 손에 수첩만 들고 다니면」 누구나 기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軍納(군납)업자들은 부대에 납품하는 소에 물을 먹이는 등 군대를 상대로 갖은 농간을 부렸다.
 
  이러한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현실을 보며 그는 『公權力(공권력)이 살아 있지 않은 국가는 국가라고 할 수 없다』,『이대로 가다가는 앉아서 빨갱이들에게 당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1960년 12월경부터 朴正熙 소장 등과 쿠데타를 논의하게 됐다. 그는 1961년 5월18일 제5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진주, 야전군도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을 내외에 시위함으로써 혁명 초기 유동적이던 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軍政시절 감찰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963년 軍에 복귀했다. 이후 육군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65년부터 1969년까지 駐越한국군 총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武名(무명)을 떨쳤다.
 
  蔡 前사령관은 1972년 제2군 사령관을 끝으로 육군 中將으로 예편, 駐스웨덴·駐그리스·駐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駐越軍 사령관으로 국내외에 널리 이름을 떨쳤던 그가 軍사령관에서 武運(무운)이 그치고, 그 후 외국 대사로 한동안 한국을 떠나 있어야 했던 데 대해 朴正熙 대통령이 그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었다.
 
  요즘 蔡 前사령관은 대한해외참전전우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월남양민학살시비가 일어났을 때에는 TV토론에 참여, 적극적으로 반박 주장을 개진했다. 해외참전전우회 고엽제피해대책총본부 명예총본부장도 맡고 있는데, 蔡 前사령관 자신이 고엽제 환자이기도 하다. 駐越사령관 시절 잦은 戰線시찰이 원인으로, 蔡 前사령관은 6·25와 월남전에서 죽어간 수많은 戰友(전우)들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堪耐(감내)하고 있다고 한다.
 
  蔡 前사령관은 5·16의 의미로서, 우리의 反共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했고, 경제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과 함께, 5·16의 연장선상에서 越南파병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에 나가 피를 흘리지 않고 선진국이 된 例는 없습니다. 우리도 越南 파병을 시작으로 해외 수출시장 개척·中東 진출 등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蔡 前사령관은 이런 점에서 5·16은 민족의 활로를 개척한 쾌거였다고 역설했다. 朴正熙 대통령에 대해서도 蔡 前사령관은 『 朴正熙 대통령이 10월 維新(유신)을 하면서 장기집권으로 치달은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功過를 따진다면 功은 70%, 過는 30%정도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5·16을 성사시킨 사람은 朴正熙·張都暎·尹潽善』
 
  5·16 당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육사 5기 출신 대령들이었다.
 
  1961년 5월15일 밤 李哲熙(이철희) 방첩부대장과 李相國(이상국) 제30사단장을 통해 쿠데타 음모를 보고 받은 張都暎(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수도권 부대들을 관할하는 제6관구 사령부에 예하 부대들을 잘 장악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6관구 사령부는 5·16 당일 혁명군의 지휘소이기도 했다.
 
  이때 6관구 참모장(대령)으로 있던 사람이 金在春(김재춘·74) 前중앙정보부장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을 집행해야 할 그가 혁명 주체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張都暎 총장에게 6관구 사령부의 상황이 진정되었다고 허위보고하는 한편, 혁명군측 장교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 병력들을 이끌고 6관구 사령부에 나타난 憲兵次監 李光善(이광선) 대령을 설득, 혁명 지지쪽으로 돌려 놓았다.
 
  張都暎 前육군참모총장은 최근에 펴낸 회고록 「望鄕(망향)」에서 「金대령(金在春 前중앙정보부장)이 쿠데타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얘기했을 정도이다.
 
  金 前부장은 5·16 혁명을 성사시킨 것은 朴正熙·張都暎·尹潽善(윤보선) 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우선 수많은 청년 장교들이 자신의 운명을 걸 정도로 朴正熙 장군의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둘째, 張都暎 총장은 몇 군데 부대 출동을 차단하고, 몇 사람 잡아 넣으면 사태가 수습될 것으로 쉽게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尹潽善 대통령이 유혈사태를 우려해 미군의 진압요청을 거부하고, 전방 지휘관들에게 자제를 당부하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결국 이 세 분이 혁명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5·16은 張都暎 총장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혁명 주체들로부터 돈독한 신망을 얻었던 朴正熙 장군의 「인격」으로 성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金 前부장은 5·16 이후 육군방첩부대장 겸 軍檢警합동수사본부장·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3년 民政이양을 앞두고 少將으로 예편한 그는 같은 해 2월, 제3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中情 부장이 된 그는 공화당의 사전조직 문제 등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자, 공화당을 대신할 새로운 「汎국민정당」을 만들어보라는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자유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朴正熙 의장이 결국 공화당을 선택함에 따라, 그는 7월에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金 前부장은 무임소장관·자민당 최고위원을 잠깐 지낸 후 半강제적인 外遊(외유)를 떠나야 했다.
 
 
 
 『돌이켜 보면 JP가 옳았다』
 
  이 당시 共和黨 창당의 주역 JP와 맞섰던 정치적 행보에 대해 金 前부장은 『비밀리에 공화당을 만든 JP의 행태가 原隊(원대)복귀를 선언한 혁명 공약 제6항에 反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民政에 참여, 당초 5·16혁명이 지향했던 조국근대화를 책임지고 마무리하려 했던 朴正熙 대통령과 JP의 판단이 옳았다고 봅니다』
 
  한동안 정계를 떠나있던 金 前부장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고, 이후 공화당 공천으로 제9대·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통일민주당에 입당, 한때 YS진영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곧 결별했다. 1993년부터 「5·16민족상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6관구 작전참모(중령)였던 朴圓彬(박원빈·79)씨는 그후 최고위원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다. 무임소 장관·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한국원양어업협회 회장·한국 원양공판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4년 6·3 사태 때에는 조국수호국민협의회 간사장으로 野黨진영에 가담하기도 했다.
 
  제30사단 작전 참모(중령)였던 李白日(이백일) 前의원은 자신이 포섭했던 李甲榮 대령 등이 거사 직전 배신하는 바람에 부대 뒷산으로 도주하는 등 곤욕을 치뤘다. 軍政기간 중 수원시장을, 준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7년 별세.
 
  제33사단 작전참모(중령)였던 吳學鎭(오학진·73) 前의원은 4選을 기록하면서 국회상공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부인과 함께 목욕탕을 경영했다. 육사 동기 모임이나, 헌정회 모임 등에 나가곤 한다.
 
  육군 항공학교장(대령)으로 혁명지지공약 전당을 살포하는 역할을 맡았던 李元燁(77) 前감사원장은 軍政기간 중 심계원장·감사원장·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지냈다. 1963년 少將으로 예편한 후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석유화학지원공단 이사장·남해화학 사장 등을 역임했다. 공직생활 당시부터 그림을 그리는 데 취미를 붙여 「일요화가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李 前원장은 요즘도 여전히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6군단 포병 지휘관들의 그 후
 
  5·16 당일 서울에 가장 먼저 진주한 혁명군 부대는 5월16일 새벽 3시30분 육군본부를 점령한 文在駿(문재준) 대령이 지휘하는 6군단 포병 5개 대대였다.
 
  文在駿씨는 혁명 후 최고위원·헌병감 등을 지냈지만, 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한달 반 만인 1961년 7월1일 이른바 「反혁명 음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구속되고 말았다.
 
  이 「反혁명 음모 사건」은 5·16 당일부터 內燃(내연)해 오던 명목상 지도자인 張都暎 중장 과 실질적 지도자인 朴正熙 소장, 거사 당일 행동 부대를 지휘관들이었던 5기생과 혁명의 브레인 역할을 한 8기생들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었다.
 
  이들은 朴正熙 소장에 의해 포섭되었으면서도, 張都暎 참모총장이 거사의 최고 지도자인 것으로 여기고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朴正熙 최고회의 부의장-金鍾泌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張都暎 총장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과 동기인 金在春 前중앙정보부장은 『反혁명 음모는 실체가 있는 것이었다. 당시 공수단장 朴致玉 대령·헌병감 文在駿 대령 등이 舊황실재산관리총국장 盧昌漸(노창점) 대령의 방에 모여 朴正熙 장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여러 번 주의하라고 얘기를 했지만, 워낙 성격이 직정적인 사람들이라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文在駿씨는 생전에 「육사5기생」에 기고한 글에서 『金鍾泌의 獨走(독주)와 전횡을 비판하고, 軍의 조속한 병영복귀를 주장하다가 金鍾泌 中情부장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나는 사실 예하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본보기로 金鍾泌을 체포, 그를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한 바 있다. 나의 이와 같은 기도는 사전에 누설되어 그들의 반격을 받았고, 급기야는 張都暎 장군에게까지 누를 끼친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에 와서 회고하여 보면 그들 일파가 꾸준히 우리들의 감정을 자극, 저절로 대항해 오도록 유도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反혁명 음모사건으로 獄苦를 치르고 나온 후, 승용차 계기판에 부착하는 시계를 생산하는 동선산업사라는 공장을 차렸다. 1971년 大選때는 DJ 진영에 가담하기도 했다. 만년에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1994년 10월 작고했다.
 
  文在駿 6군단 포병사령관 밑에서 포병대를 이끌고 서울에 진주한 대대장들은 申允昌(신윤창·作故)·具滋春(구자춘·933대대장·作故)·鄭五敬(정오경·제1重砲대대장)·白泰夏(백태하·822대대장)·金仁華(김인화·911대대장) 중령이었다.
 
 
 
 「5·16은 민주 파괴였다」고 한 白泰夏
 
  申允昌씨는 軍政기간 중에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을 지냈다. 그는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후 공화당 사무차장, 제6대·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고비마다 확고하게 JP를 지지했다. 3선 개헌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롯데전기(주) 사장을 지냈다. 1989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具滋春씨는 혁명 후 경찰에 투신, 忠南·全南 道警국장, 서울 市警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후 제주지사·수산청장·경북지사·서울시장·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다. 1988년 JP의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달성·고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에도 민자당·자민련을 거치면서 JP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했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 급사했다. 향년 64세.
 
  1961년 5월16일 陸本에서 열린 陸本참모-혁명군 연석회의에서 권총을 빼들고 張都暎 총장을 위협했던 白泰夏씨는 중앙정보부 서울·경기 지부장 등을 지내다 미국으로 건너갔다. 몇 해 전 『5·16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반역적 행동이었다』면서 자신의 5·16 참여를 참회하는 내용의 회고록을 펴냈다.
 
  鄭五敬(81)씨는 혁명 후 江原 道警국장·총무처 訴請(소청)심사위원·국가안보회의 전문위원·수자원개발공사 감사 등을 지냈다.
 
  金仁華(76)씨는 혁명 직후 바로 軍으로 복귀, 육군방공학교 교장·제20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1977년 少將으로 예편했다. 1966∼1968년 백마사단 포병사령관으로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방위산업진흥회 부회장을 지냈다.
 
  6군단 작전참모로 포병단의 출동을 지원했던 洪鍾哲(홍종철) 대령은 軍政기간 중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지냈다. 民政이양 직후 잠시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았고, 이어 문교부 차관·공보부 장관·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 司正특보로 있던 1974년 팔당댐 아래 덕소로 낚시하러 갔다가 溺死(익사)했다. 향년 50세.
 
 
 
 『5·16은 肅軍 쿠데타』
 
  혁명의 주력 부대 가운데 하나였던 제1공수전투단 단장을 지낸 朴致玉(76) 씨는 혁명 후 최고위원이 되었지만, 1961년 7월1일 「反혁명음모사건」으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출옥한 후에는 대한석탄공사·한국수출산업공단 전무이사 등을 지내다가, 1980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아들과 안양에서 농장을 경영하다 지금은 군포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5·16민족상 재단 이사.
 
  朴致玉씨는 5·16에 대한 기존의 인식 자체를 부정했다.
 
  『5·16은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肅軍 목적의 쿠데타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張勉(장면) 정부가 전복되자, 朴正熙 장군-金鍾泌 中情부장 등이 권력에 욕심이 생겨 반대자들을 反혁명으로 제거하고 장기집권·독재를 획책했다는 것이다.
 
  『내가 反혁명으로 밀려났지만, 진짜 逆賊(역적)은 朴正熙-金鍾泌입니다』
 
  그는 『5·16을 일으킨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내가 한 5·16인데 왜 후회하느냐』면서 『잘못된 5·16에 대한 기록들이 바로잡힐 날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5·16 당시 공수단 부단장이었던 金悌民(김제민·74)씨는 공수단 창설 직후인 1959년부터 대대장·부단장 등으로 공수단에서 근무해 온 공수단의 터줏대감이었다. 이때 全斗煥·盧泰愚·車智澈 대위 등이 그의 밑에 있었다. 다른 장교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던 車智澈 대위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와는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1960년 말 어느 날 일면식도 없던 육군작전참모부장 朴正熙 소장이 공수단을 방문했다. 朴소장은 『얼마 전 대만을 방문했을 때 본 대만軍 공수부대가 인상적이어서, 우리 육군의 공수부대는 어떤가 살펴보러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후일 朴正熙 대통령은 金悌民씨에게 그날의 방문이 공수단을 혁명에 가담시키기 위한 事前 布石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反혁명사건으로 고초 겪었지만 朴대통령 업적은 바로 봐야』(金悌民)
 
  金悌民 중령이 혁명 모의에 가담하게 된 것은 1961년 3월의 일이었다. 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 朴圓彬 중령이 그에게 가담을 권유해 온 것이다. 金悌民 중령은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함께 근무했던 朴圓彬 중령의 사람됨을 믿고 혁명에 가담하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비슷한 무렵 朴致玉 대령이 공수단장으로 부임해 왔다. 「5·16혁명 實記」에는 공수단에 혁명 조직을 구축하는 데 있어 朴致玉 대령보다는 金悌民 중령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金悌民씨는 5·16 당일 6관구 사령부에서 지원하기로 되어 있던 차량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공수단 출동이 지연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공수단에 와서 요인체포조들을 이끌기로 한 陸士 8·9기 출신 영관급 장교들이 제때 공수단에 오지 않은 것이 부대 출동이 지연된 이유라는 것이다. 그날 공수단에 오기로 했던 장교들 가운데 실제로 나타난 장교는 朴鐘圭(박종규) 소령뿐이라고 한다. 그는 車智澈 대위 등이 무기고 문을 부수고 공수단 장병들을 무장시키면서 출동을 독려했다는 이야기도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5·16 직후 공수단은 덕수궁에 주둔했다. 혁명 초기 상황이 유동적일 때 공수단은 혁명 주체들에게는 든든한 의지처였고, 反혁명세력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朴致玉 대령이 反혁명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당시 최고위원이던 金悌民 중령 역시 같은 혐의로 구속되어 10개월간 복역했다. 金悌民씨는 『朴致玉 대령이 가끔 「JP를 혼내 주어야겠다」는 얘길 하기는 했지만, 임금님 없는 자리에서는 임금님 욕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JP를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계획은 없었다』고 말했다.
 
  出監(출감)한 후 金悌民씨는 요업센터 상무·한국조폐공사 이사 등을 지냈다. 안양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웃한 아파트 단지에 李周一 前감사원장이 살고 있지만, 접촉은 없다고 한다.
 
  金悌民씨는 『5·16 으로 결국 軍門에서 일찍 나와야 했고, 反혁명 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를 이 정도로 발전시킨 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은 역사가 바로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61년 5월18일 陸士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를 지켜보는 朴正熙 소장의 좌우에 朴鐘圭 소령·車智澈 대위가 서 있는 사진은 유명하다. 두 사람은 朴대통령 집권 기간 중 차례로 경호실장을 지냈다. 車智澈 前실장은 1979년 10·26사태 때 피살됐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 朴鐘圭 前실장은 1985년 55세로 별세했다.
 
 
 
 『하루 놀고 하루 쉽니다』(金潤根)
 
  張都暎 前육군참모총장이 『5·16은 해병대가 성공시킨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5·16 당시 金潤根(김윤근·75) 준장의 해병 제1여단은 혁명 성사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혁명 후에는 수도방위사령관·최고위원·최고회의 교통체신위원장 등을 지냈고, 1963년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다. 같은 해 「朴林恒 中將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호남비료 사장·수산개발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5·16 당일 부대 출동에 앞서 軍牧(군목)에게 출동 장병들의 武運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줄 것을 부탁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한국기독장교회 총회장·영락교회 장로 등을 지내기도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묻자 그는 『하루 놀고 하루 쉰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金潤根씨는 5·16에 가담하게 된 경위에 대해 『IMF 사태이후 두세 사람만 모이면 YS 욕을 했듯이, 4·19 이후에는 두 세 사람만 모이면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분열상을 비난하곤 했다』면서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朴正熙·金東河 장군과 세상 돌아가는 것을 걱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쿠데타 얘기가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계속 해병대 사령부의 참모로 있었거나, 여단장으로 나간 후 부대에 혁명 조직을 만들 여건이 되지 못했다면 몰라도, 여단장으로 나가 보니 거기서도 이미 혁명을 모의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러다 보니 나라 걱정하는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자연스럽게 거사 참여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金潤根씨는 5·16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제 그런 것을 얘기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느냐』면서 입을 다물었다.
 
  金潤根씨의 만주군관학교 선배로 해병대를 거사에 끌어들이는 데 이바지했던 金東河(김동하) 당시 예비역 해병 少將은 5·16 후 현역으로 복귀, 최고회의 고문·財經위원장·국방위원장·대한체육회장 등을 지냈다. 民政이양 과정에서 金鍾泌系와 대립했던 그는 1963년 中將으로 예편, 정계에 투신했으나, 얼마 후 「朴林恒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마사회장·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한 후 1995년 12월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金潤根 준장과 함께 출동, 서울市警과 치안국을 점령했던 鄭世雄(정세웅) 해병 제2훈련단 참모장은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농림·문교사회위원장을 지낸 후 1963년 해병 준장으로 예편했다. 중앙공무원교육원장·한국조폐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고 1979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해병 대대장으로 한강 인도교를 돌파했던 吳定根(오정근) 중령은 최고위원·공화당 정책위원장·수산청장·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국세청장·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1974년 8·15 저격 사건으로 朴鐘圭 경호실장이 물러난 후, 그 후임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982년 별세했다.
 
  5·16 당일 한강 인도교에서 헌병대와 교전 중 부상을 당했던 李俊燮(이준섭·68) 대위는 197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중앙정보부 충북·충남 지부장 등을 역임했고, 1979년 공화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원내부총무를 지내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李源祚(이원조)씨 밑에서 한국석유개발공사 총무이사·同부사장을 거쳐, 1993년까지 대한송유관공사 사장을 지냈다.
 
 
 
 2軍 사령부의 혁명주체들
 
  5·16 당시 후방 책임자 李周一(이주일) 少將을 도와 후방 장악 작전을 맡았던 朴基錫(박기석·74) 2軍 사령부 공병부장은 혁명 후 잠시 건설부 장관(5·16 직후 설치되어 국가경제건설을 담당했던 부서로 경제기획원의 前身. 건설교통부로 통합되기 전에 있었던 건설부와는 다름- 기자 注)을 지낸 후 軍에 복귀, 육군공병학교장·국방부 건설본부장 등을 역임한 뒤 준장으로 예편했다. 3·4共 시절 주택공사 총재·원호처장·도로공사사장 등을 역임했다. 1981년 이후에는 삼성건설 사장·同회장을 거쳐 현재는 삼성물산 건설부문 상담역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朴正熙 장군이 혁명 지도자로 추대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朴正熙 장군은 청렴하면서도 인정이 있어 주위에 사람이 몰렸습니다. 인격·능력·포용력·德을 두루 갖춰 통솔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박식하고 정보를 정확히 분석·평가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5·16 당시 대구 지역 장악에 동원된 것은 張東雲(장동운·제208 공병대대장)·林光燮(임광섭·제1重工대대장)·徐相麟(서상린·제5관구 공병시설대대장) 중령 등이었다.
 
  張東雲(장동운·74)씨는 혁명 후 주택영단 이사장을 맡아 주택영단을 대한주택공사로 개편했다. 그는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공화당 사무차장·대한주택공사 총재·원호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주)세부유통 회장을 맡고 있지만, 실무는 아들이 담당하고 자신은 경영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陸士8기생회 회장을 맡고 있고, 작년 9월에는 「6·25참전 소대장모임」의 창설을 주도했다.
 
  張회장은 『나라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면서 『DJ는 말끝마다 「튼튼한 안보」를 부르짖는데, 투철한 反共의식 없이 「튼튼한 안보」가 가능한지 묻고 싶다. 세상이 변해도 근본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正日 答訪(답방) 문제에 대해 張회장은 『6·25 참전 군인의 입장에서 보면 敵將(적장)이 오는 셈인데, 과거지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우리 내부의 이념적 갈등만을 부추길 金正日 답방은 수긍할 수 없다』고 말했다.
 
  林光燮(73)씨는 대한해운공사 사장·대한海事협회 회장·도로공사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청소년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同부총재 등을 지냈다. 현재 5·16민족상재단 사무총장을 맡아, 5·16 주체들과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徐相麟(76)씨는 民政이양 후 제6대∼10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국회 건설위원장·교통체신위원장·法司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金龍泰(김용태)씨가 만든 국제문화교류협회 부회장으로 있다.
 
 
 
 李翰林 장군에게 인사 다닌 曺昌大씨
 
  5·16 당시 혁명군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존재는 李翰林(이한림) 中將 예하의 제1군이었다. 한국군 야전병력의 대부분이 소속되어 있는 제1군이 혁명 진압에 나섰다면 해병대·공수단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전투병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던 혁명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朴正熙 소장은 李翰林 중장을 견제하기 위해 제5군단장 朴林恒 중장·제5사단장 蔡命新 준장, 제12 사단장 朴春植 준장 등을 포섭해 놓고 있었다.
 
  朴林恒 중장은 5·16 후 제1군 사령관·최고위원·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1963년 民政이양을 앞두고 JP와 대립하다가 「朴林恒 장군 쿠데타 음모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실각했다. 그후 한국항공정비 사장을 지냈고, 1985년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朴春植 준장은 5월18일, 12사단을 동원하여 춘천을 점령, 유사시 야전군이 서울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했다. 이후 軍政기간 중 제2군 참모장·교통부장관 등을 지냈고, 民政이양 후에도 軍에 남아 제6관구 사령관·육군 관리참모부장·제3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1979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
 
  야전군의 혁명 진압기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좌절시킨 것은 1961년 5월 아침 李翰林 1군 사령관을 체포한 사령부 참모들, 특히 曺昌大(조창대)·李鐘根(이종근)·朴容琪(박용기)·沈怡燮(심이섭)·嚴秉吉(엄병길) 중령 등이었다.
 
  曺昌大씨는 民政이양 후 진해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무렵 그가 5·16 당시 체포했던 李翰林 장군이 진해화학 사장으로 진해에 내려와 있어 曺昌大씨는 명절 때마다 부부동반으로 인사를 갔다고 한다. 曺昌大씨는 1969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李鐘根(74)씨는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정계에 투신, 3·4共시절 4選을 기록하면서 국회 농림위원장·교통체신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정치활동을 재개, 13대·14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신민주공화당 부총재·국회윤리특위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6년 정계에서 은퇴한 그는 지금 鄕里인 충북 충주에서 농림위원장 시절 朴正熙 대통령이 마련해 준 낡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自他가 공인하는 청렴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朴容琪(74)씨는 朴正熙-金鍾泌 라인과 연결되기 이전에 이미 李錫濟(이석제) 前감사원장 등과 혁명을 모의했었다. 혁명 후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963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1970년대에는 용호운수라는 운수업체를 경영하기도 했다. 5·16 민족상 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沈怡燮(73)씨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차장·한국전력 부사장을 거쳐 1970년대 중반 민생운수라는 운수업체를 경영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 이렇다 할 공직을 맡지 못하고 있는 혁명 주체들의 생활을 돕기 위해 그들에게 운수업체 면허를 내주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嚴秉吉(72)씨는 중앙정보부 춘천·서울·부산지부장, 강원지사, 감사위원 등을 역임했다.지금은 영월 엄씨 중앙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다.
 
  이들이 李翰林 장군을 체포하는 것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헌병참모 朴泰元(박태원) 대령, 포병참모 鄭鳳旭(정봉욱) 대령, 심리전 참모 許順五(허순오) 대령 등이었다.
 
  6·25 당시 인민군 포병 中佐로 국군에 귀순했던 鄭鳳旭(77) 대령은 朴正熙 대령이 3군단 포병단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부단장을 지냈다. 비슷한 前歷을 가진 두 사람은 同病相憐(동병상련)의 情을 나누는 사이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鄭鳳旭 대령은 사전 모의없이 李翰林 장군 체포 작전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제7사단장·육군제3사관학교 초대 교장을 거쳐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국가안보회의 사무차장·同위원 등을 지냈다.
 
  許順五(81) 대령은 토지개량조합연합회 이사장·사단장 등을 거쳐 1968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韓電 이사·한국전기안전공사 이사장·星友구락부 사무총장 등을 지냈다.
 
 
 
 JP에 대한 비판과 애정 엇갈리는 8期 출신 주체들
 
  5·16 혁명으로 혜성과 같이 등장, 사실상 「혁명의 2인자」역할을 했던 金鍾泌(김종필·75) 자민련 명예총재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그의 정치적 파트너는 공교롭게도 5·16 사흘 전에 실시되었던 인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가, 의원 등록일 아침 군사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의원직을 상실했던 金大中 대통령이다.
 
  1997년 大選을 앞두고 JP가 DJP 共助를 선언하자 많은 5·16 주체들 사이에서 개탄의 소리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反共을 國是(국시)의 제1의로 삼는」 군사혁명을 일으켰던 5·16 주체들로서는 그들이 보기에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DJ와의 공조가 못내 못마땅했을 것이다.
 
  5·16 주체들 가운데는 「세대교체」를 기치로 내걸고 혁명을 했던 JP가 칠순을 훨씬 넘기고도 「아직도 정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반면에 『그래도 3金 가운데는 JP가 가장 과오도 적고 낫지 않느냐』며 아직까지도 JP에게 애정과 기대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4·19 후 軍內 整軍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吳致成(오치성·75) 前내무부 장관은 5·16 후 최고회의 내무·운영 위원장을 지냈고, 1963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공화당 사무총장·국회의원·무임소 장관을 거쳐 1971년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 그는 내무부 장관 취임 후 당시 「공화당 4人 체제」에 선을 대고 있던 지방행정관료들과 경찰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이른바 「4人 체제」의 반격을 받아 야당이 제출한 장관 해임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바람에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10·2 정치파동」).
 
  1988년 신민주공화당이 만들어지자 부총재를 맡아, 再起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3·4共 인사들의 모임인 「민족중흥회」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포천의 농장에서 살고 있는데 아직도 부인과 농장을 돌보고, 포천에서 서울까지 스스로 차를 운전할 정도로 건강이 좋다고 한다.
 
  吉在號(길재호) 前공화당 사무총장도 整軍운동단계에서부터 혁명에 참여했다. 최고위원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 제6·7대 국회의원과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4인 체제」의 일원으로 육사 동기이자 혁명 동지인 吳致成 내무장관이 국회에서 불신임된 「10·2 정치파동」 후, 中情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은 후 정계를 떠났다. 이후 삼정펄프 사장·생명보험협회장 등을 지냈다. 1985년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李錫濟(이석제·76) 前감사원장은 혁명 전 고시공부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서, 혁명 후 최고회의 法司위원장을 지냈다. 총무처 장관·감사원장·국회의원으로 朴正熙 대통령 18년 동안 내내 공직에 머물렀는데, 지나칠 정도로 청렴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아직까지도 감사원 직원들 사이에서는 名감사원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1980년대 이후에는 5·16 민족상 재단 이사장·덕수개발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지금은 서울 거여동의 임대 아파트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있다. 1995년 회고록 「각하! 혁명합시다」를 냈지만, 요즘은 5·16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李洛善-5·16의 史官
 
  柳承源(유승원) 前의원은 혁명 후 인천시장·국회의원·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등을 지냈다. 1984년 63세로 사망했다.
 
  李洛善(이낙선) 前상공부 장관은 民政 이양 후 대통령 민정비서관·국세청장·상공부 장관·건설부 장관 등을 지내면서 경제개발에 일익을 담당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롯데그룹 부회장·롯데상사 회장·롯데호텔 사장 등을 지냈다. 그가 軍政시절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수집, 정리해 놓은 朴正熙 대통령 관련 자료들은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기본적인 史料가 되고 있다. 1989년 62세로 별세했다.
 
  尹必鏞(74) 前수도경비사령관은 軍政기간 중 최고회의 의장비서실장 대리를 지냈다. 그후 방첩부대장·派越 맹호사단장·수도경비사령관으로 승승장구했으나, 1973년 私席에서 「朴正熙 대통령도 노쇠」운운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비리 혐의를 쓰고 전격적으로 구속되었다. 하나회의 代父로 알려졌던 그는 5·6共시절 도로공사 사장·담배인삼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요즘은 옛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 여행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金東煥(김동환) 前의원은 주미공사·공화당 사무총장·同원내총무 등을 역임한 후 롯데 호텔·유니온 개스 사장 등을 지냈다. 1980년 53세로 사망했다.
 
  「육사 8기 주동 16人 하극상 사건」의 멤버였던 玉昌鎬(옥창호) 前최고위원은 民政 이양 후 이렇다하게 하는 일 없이 15년을 지냈다. 한때 그가 중앙정보부장에 기용된다는 說이 나돌자 절친한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金炯旭(김형욱) 당시 中情부장은 그를 은밀히 감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5·16 관련 모임에서 玉昌鎬씨를 만난 朴正熙 대통령이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玉씨는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玉씨에게 너무 무심했다고 생각한 朴正熙 대통령은 玉씨가 강남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에서 주유소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玉씨는 단시간 내에 큰 돈을 벌어 근처에 화훼 상가인 「인창빌딩」을 지었지만, 5共 정권이 들어서자 소유권이 넘어갔다고 한다. 玉씨는 말년에 이 문제로 訟事를 벌이다가 1996년 70세로 사망했다.
 
  軍政기간 중 최고위원을 지냈고, 3共 시절 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며 惡名을 떨쳤던 金炯旭 前중앙정보부장은 3選 개헌 후 中情부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제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7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9년 파리에서 실종된 그는 1991년 3월 법원으로부터 실종 선고를 받아 「법적으로」 사망했다. 만일 그가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올해 76세가 된다.
 
 
 
 金龍泰씨는 腦卒中으로 病苦
 
  陸士9기 출신인 姜尙郁(강상욱)씨는 朴正熙-8기생 그룹과 연계되기 전, 陸本 작전참모부 소속 중령으로 독자적인 쿠데타를 구상하다가 陸士8기생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姜尙郁씨는 5·16 후 최고위원·청와대 대변인·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유통업에 뒤어들어 한국물류센터 사장·同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축산물·식품 수입업체인 (주)코스카 商易, 工程관리프로그래밍 업체인 (주)공관프로테크 회장을 맡고 있지만, 경영은 자식들에게 넘긴 상태라고 한다.
 
  朴蒼岩(78) 前혁명검찰부장은 1963년 준장으로 예편된 직후, 「朴林恒 쿠데타 음모 사건」 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自由」誌를 발행하면서 在野 國家主義 史學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
 
  柳原植(유원식) 前최고회의 財經위원장은 1962년 통화개혁이 실패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1963년 준장으로 예편한 후 협화실업이라는 기업체를 경영했다. 1987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육군 대위로 혁명에 참가했던 金鎔采(김용채·69) 한국토지공사 사장은 JP를 제외하면 공직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혁명주체가 아닌가 싶다. 3·4共 시절 7·9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1980년대 이후에도 12·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신민주공화당 사무총장·同원내총무·자민련 부총재·정무제1장관·노원 구청장 등을 역임했고, 金大中정권 출범 후에도 DJP 共助에 힘입어 국무총리 비서실장·토지공사 사장 등 官運(관운)이 그치지 않고 있다.
 
  민간인 5·16주체들로는 金龍泰(김용태)·李學洙(이학수)·金德勝(김덕승)·南相沃(남상옥)·張太和(장태화)씨 등을 들 수 있다.
 
  충무공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JP의 서울師大 후배라는 인연으로 혁명에 참여한 金龍泰(75)씨는 3共초기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내면서 JP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68년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공화당에서 제명되는 풍파를 겪은 후에도 8·9·10대 국회의원, 무임소장관·공화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했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상임고문·총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정계 일선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1985년 국제문화교류협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일해 오던 중 몇 년 전 腦卒中으로 쓰려졌다. 근래 병세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혁명공약 등을 인쇄했던 李學洙 당시 광명인쇄소 사장은 혁명 후 고려원양·고려조선 등을 경영하며 富를 일궜으나, 1970년대 후반 몰락했다.
 
  함북 출신인 그는 만주 용정에 있던 광명중학교의 脈(맥)을 이어 1973년 학교법인 「광명학원」을 설립하고, 1989년 부산에서 광명고등학교를 개교했다. 같은해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5·16 직전 거사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오인환이라는 사업가에게 접촉하다가 검찰에 체포되었던 金德勝(김덕승)씨는 혁명 후 마사회장을 지냈다. 한때 서울 시내에서 손꼽히는 대형식당이었던 국일대반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1987년 63세로 별세했다.
 
  가장 많은 거사 자금을 댔던 南相沃(남상옥) 前국제약품 회장은 1984년 76세로 별세했다. 族靑系 쿠데타說 등 逆정보를 유포하는 일을 맡았던 張太和(장태화·84)씨는 혁명 후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서울시내에서 칩거중인데, 5·16관계자들과도 접촉이 별로 없다고 한다.
 
 
 
 『당신 무슨 큰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국민들이 지지할 겁니다』
 
  과연 軍이 나서야 할 정도로 1961년의 상황이 위기 국면이었느냐에 대해서는 5·16에 대한 입장에 따라 견해가 엇갈린다.
 
  蔡命新·金在春·張東雲씨 등 혁명 주체들은 『5·16 직전의 상황은 단순한 사회혼란을 넘어 나라가 공산화되느냐, 마느냐 하는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에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李哲承(이철승·79) 자유민주민족회의 의장은 『4·19 후의 혼란은 12년 자유당 독재에서 비롯된 일시적이고 불가피한 혼란이었을 뿐』이라면서 『당시 혁신계나 학생들은 지금의 在野·운동권과는 달리 순수하고 낭만적인 이상주의자들에 불과했고, 나라의 공산화가 우려되는 지경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5·16 당시 6군단장으로 있다가 反혁명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金雄洙(김웅수·77)박사도 『나는 지금도 「군인들이 정치에 개입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면서, 『5·16 직전의 상황은 데모도 점차 줄어들고, 미국의 원조로 경제사정도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쿠데타 직전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구상에 따른 예산을 편성했던 민주당 정권에게는 정권의 成敗를 가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金박사는 『朴正熙 장군은 부산 정치파동 때부터 계속 쿠데타 기회를 노려 온 것으로 보아 민주당 때 혼란이 수습되었다 해도 쿠데타는 시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면서도 金박사는 『軍의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학생들의 통일 운동에 대한 우려가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은 인정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5·16 주체인 某씨는 이렇게 말했다.
 
  『특정 시점에서 데모가 줄어들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張勉(장면) 정권의 총체적인 국정운영 능력 부족이 문제였습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장기·중기·단기 계획을 내놓아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은 그것을 하지 못했어요. 자유당 시절 자기들이 집권하기만 하면 장미빛 세상이 올 것처럼 환상을 심어주었던 민주당 정권은 정권 잡자 능력 부족을 드러냈습니다. 10kg의 짐밖에 짊어질 능력이 없는 나귀가 100kg의 짐을 짊어지려다가 다리가 부러진 셈이라고나 할까요?
 
  대학생들이 국회를 점거하고, 경찰관들이 데모하는 세상이었습니다. 파벌싸움에 短命 장관이 속출했구요.나라를 이끌어가는 두 기둥은 정치와 군대였는데, 정치는 제 기능을 못하고 사회 각 부문이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군대가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수단 부단장으로 혁명 주체의 하나였던 金悌民씨의 다음 증언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5·16 직전 金悌民씨는 거사논의를 위해 私服(사복)으로 갈아 입고 시내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전에 없던 일이라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어느 날 부인은 외출하려는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요새 무슨 큰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하면 아마 국민들이 지지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金悌民씨는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세상 일은 잘 모르는 집사람까지 저런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이 일은 되는 일이구나」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 군인」들이 아니라 「野戰 군인」들이 5·16을 일으켰다』
 
  5·16 주체들에 대한 성격규정이나 거사 동기에 대해서도 관점에 따라 주장이 엇갈린다.
 
  5·16에 대한 비판자들은 혁명 주체들을 「정치 군인」으로 규정지으면서, 이들이 軍內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거나, 인사 적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金雄洙 박사도 5·16을 일으킨 군인들을 「정치 지망 군인들」로 규정지었다.
 
  반면에 혁명 주체인 張東雲 前원호처장은 이러한 시각에 대해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5·16에 참여한 군인들은 소대장·중대장·대대장 등으로 6·25 전쟁을 치뤘던 순수한 「野戰(야전) 군인들」입니다. 5·16 주체들 가운데 자유당·민주당 정권 아래서 정치에 관련되었던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혹자는 朴正熙 장군이나 JP의 陸本 정보국 경력을 문제삼지만, 그들은 「전략 정보」를 다룬 것이지, 정치 사찰이나 수사 분야에 종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5·16은 6·25 당시 피흘려 나라를 지켰던 젊은 장교들이 그 연장선상에서 4·19 후의 혼돈을 극복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었어도 다른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前述한 5·16 주체 某씨도 『軍內의 인사 적체가 거사의 원인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다』면서도 『그러나 사람이 그런 것 때문에 목숨까지 걸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姜英勳(강영훈·79) 前총리는 5·16 당시 陸士교장으로 5·16에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미국으로 망명했었다. 姜 前총리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쿠데타에 반대했었다』면서도 5·16의 원인과 동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5·16주체들을 이해하는 듯한 말을 했다.
 
  『첫째, 광복 후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행태나 의식을 보면 권위주의적이었고, 사회발전 단계상으로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둘째, 당시 군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조직체였을 뿐 아니라, 선진 과학 기술과 관리운영기법을 익힌 조직체이기도 했습니다. 미군을 통해 미국의 능률적인 관리운영기법을 익힌 軍의 고급장교들이 볼 때 정부의 행정은 엉망이고, 자신들이 나라를 맡으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셋째, 張勉 총리는 존경할 만한 분이었지만, 그 밑의 정치인들 가운데는 부패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권을 잡자 「우리는 지금까지 먹지 못했다, 좀 내놔라」하는 식으로 軍에도 손을 벌리거나 인사청탁을 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젊은 장교들은 「전쟁 때 우리가 목숨을 걸고 부하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나라 꼴이 이게 뭐냐」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들로서는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어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16에 대한 평가는 끝났다』
 
  5·16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민주당 정권은 이미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5·16이 아니었어도 우리는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張東雲 前원호처장은 『그러한 주장은 하나의 假說(가설)에 불과하다』면서 『분명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해 뿌리가 든든하지 못했던 민주당 정권으로서 경제개발은 역부족이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40년 전의 5·16은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金雄洙 박사의 5·16 비판은 추상같다. 한 마디로 『治積(치적) 여하에 따라서 不法이 合法化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金박사는 『5·16 당시 反혁명으로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死後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박탈 당했다』면서 『민주화 운동자들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군사독재의 원천인 5·16에 저항한 사람들은 아직도 죄인 취급 받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張東雲 前원호처장은 『역사는 후세가 평가하는 것이지, 살아있는 사람들이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5·16에 대해서는 이미 국민들이 평가해 주고 있다. 국민들의 70% 이상이 朴正熙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만큼 5·16에 대한 평가도 끝난 것 아니냐?』고 자신했다.
 
  姜尙郁씨는 『5·16에 대해 비판도 많지만, 시대적 상황 속에서 문제를 생각해야지, 현재의 시점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잘못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제도는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봉건적인 것이고, 현재의 潮流(조류)에 맞지 않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시대상황에 적합한 체제 아니었나? 5·16으로 들어선 朴正熙정권도 당시의 시대상황·民度(민도) 등을 고려하면, 불가피했고 당시의 시대 상황에 부합하는 체제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시대가 등장한 직후에는 前시대에 대한 反動으로 무조건 비판하기 마련』이라면서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 한국 경제의 기초는 朴正熙 대통령을 모시고 우리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5·16은 역사 속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5·16에 참여했던 데 대해 후회는 없다』고 역설했다.
 
  5·16 당일의 신문들을 보면 5·16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5·16은 3·4共 기간 중에는 헌법 前文에 「혁명」으로 명기되어 있었지만, 그후 YS정권과 DJ정권을 거치면서 다시 「쿠데타」로 자리매김된 느낌이다. 이에 대해 金在春 前중앙정보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무력으로 합헌 정부를 전복시켰다는 점에서만 보면 5·16은 분명 「쿠데타」였습니다. 그러나 5·16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 걸쳐 사상 유례가 없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점에서 보면 5·16은 「근대화 혁명」이었습니다』
 
  姜英勳 前총리는 『지금 와서 생각을 해 보면 우리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 5·16은 한 개의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 朴正熙 대통령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민주정부를 때려부쉈으면 그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 경제발전에 매진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분명히 긍정적인 일입니다. 다만 정경유착, 정치·사회의 부정부패의 온상을 만든 것은 비판받아야 할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잘 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잘못했다고만 하는데, 우리가 근시안적으로 보기 보다는 史家들이 공정하게 평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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