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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 하기와라 료(萩原遼)

日本 공산당 기관지 「赤旗」의 평양특파원 출신으로 金賢姬가 북한 여성임을 사진으로 확인해 준하기와라 료(萩原遼)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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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산주의자로서 金日成-金正日과 싸우는가?

『권력세습 金正日은 공산주의의 진정한 敵. 눈사람 같은 金正日은 난롯가에 가면 죽는다. 金日成-金正日의 심층 심리는 한민족의 애환을 모르는 異民族 상태』

KAL 858기 폭파범 金賢姬의 소녀 시절 사진특종, 金日成의 남침 확인 문서 발굴, 黃長燁 저서 번역의 주인공. 지금은 페리 보고서 연구에 열중하고 있는 이 집념의 사나이는 「金正日은 南北 人民의 公敵」이라고 했다
  「萩原 遼, 싸리 들판 아득히」
 
  기자가 하기와라 료(萩原 遼)씨를 인물연구라는 형식으로 접근해 보리라 생각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가 언제나 한반도를 핵심어로 놓고 무시할 수 없는 작업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의외로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다. 1987년의 KAL 858기 폭파범 金賢姬(김현희)가 안기부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터져나오고 있을 때 이를 반박하는 물증을 제시한 인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기억할 만하다고 여겨졌다.
 
  또 하나는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다. 하기와라씨는 재작년 기자가 프리랜서 자격으로 쓴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등 주사파 운동가들의 전향(月刊朝鮮 1999년 6월) 기사를 발췌 번역했고, 또 논평을 곁들인 기사를 일본의 월간지 「正論(정론)」에 게재하여 얼굴을 모르는 사이 기자와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직접 대면하기는 작년 10월이 처음이었다. 그가 한국에 다녀갔을 때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에서 한 번, 趙甲濟(조갑제) 편집장과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또 한 번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눴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에서 20년 간 기자생활을 했으며,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그에게서 詩的인 감수성이랄까, 뭔가 낭만적인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거기에 골몰해 온 기자에게 하기와라씨의 그런 기질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싸리 들판 아득히」란 이름 뜻
 
  하기와라 료라는 필명부터 그렇다. 일본의 고도로 정제된 詩형식인 하이쿠(俳句)에서 따온 그의 이름은 말 그대로 「싸리 들판 아득히」로 직역된다. 표박(漂迫)의 시인이라 불리는 하이쿠의 대가 芭蕉(바쇼)가 7개월에 걸친 긴 여행길을 나설 때 따랐던 제자 曾良(소라)가 중간에 위장병이 나서 먼저 집으로 돌아가면서 스승에게 남긴 하이쿠가 이렇다.
 
  「가다 가다 쓰러져 넘어져도 싸리 들판」(行き行きてたふれ伏とも萩の原)
 
  하기와라씨는 필명을 정한 배경에 대해 『걷기를 계속하다가 쓰러진다 해도 싸리나무 들판이라는 낙천성. 온통 싸리나무인 들판이란 인민의 평원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믿고 그 속에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기와라씨는 한국과 일본 양국도 「인민의 平原」이라는 지평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인민이란 결국 누구도 지배하지 않는, 말 그대로 보통 사람일 것인데, 그것은 그가 일본의 가난한 기층서민 출신이었던 것에 기인하는 것 같다. 17세 무렵이었던 1954년 가난 때문에 그는 고향 高知(고치)현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오사카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다. 우유배달원, 생과자집의 견습공을 동시에 하면서 거의 노예노동에 가까운 노동강도를 견뎌야 했던 그에게는 어디에도 쉴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야간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어두운 전등 불빛 아래의 교실에서 만난 백종호(가명)라는 조선인 청년. 백은 戰禍(전화)가 휩쓸고 간 한국의 제주도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 동급생을 따라 하기와라씨는 제삿날 초대를 받아 낯선 조선의 풍습을 엿보기도 했다.
 
  밀항자들이 숨어 사는 첩첩 골목 속의 조선인 밀집지역은 남루한 삶이 영위되고 있었다. 일본인 고학생과, 역시 가난한 조선인 고학생의 만남이 환갑을 훌쩍 넘을 때까지 그를 아직도 한반도 문제에 붙들어 놓은 원체험이 된 것이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은 오사카 외국어 대학 조선어과.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 제1세대에 해당된다. 「相互(상호)」라고 할 것을 「互相(호상)」이라고 한다든지 억양에 북한 투가 배어 있다든지 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남한보다는 북한 쪽에 가까운 인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장의 사진으로 김현희 조작설에 쐐기
 
  하기와라씨는 지금 워싱턴에 있다. 1989년부터 약 3년간 머문 이래 미국 장기체류는 두 번째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3년 정도 워싱턴의 할렘街에 허름한 방을 구해놓고 그는 국립공문서 보관소에 파묻혀 보냈다.
 
  160만 쪽에 이르는 북한문서를 읽기 위해서였다. 대략 세로 40cm, 가로 15cm, 높이 30cm인 상자 1300개에 보관돼 있는 이 문서들은 韓美연합군이 각 전장과 점령지의 정부, 당, 군 기관에서 닥치는 대로 노획해 온 것들이다.
 
  1946년 초부터 1953년 중반경까지 북한에서 낸 신문, 잡지, 도서, 팸플릿, 삐라를 비롯하여 조선노동당과 조선인민군, 정부 각 부처의 기밀문서, 극비보고서 등 전사한 인민군 장병의 속주머니에서 빼내온 피묻은 수첩까지 생생한 자료의 보고다. 미국은 이 자료들을 1977년부터 서서히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하기와라씨는 아카하다 기자직을 그만 둔 1988년 문득 이 문서들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6·25를 두고 「북침설」이니 미국에 의한 「남침유도설」이니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그동안 한반도 문제를 다루어 온 나 하기와라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저널리스트답게 방대한 실증자료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6·25의 원인과 金日成의 본질에 대해 탐구해 들어갔던 이 시절을 「至福(지복)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동안의 삶이 너무 피로했던 탓일까.
 
  일본 공산당 기관지 기자가 북한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김현희」 사건으로 여러 가지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87년 11월29일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난 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듬해 1월15일 상세한 수사발표를 했다. 1972년 11월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을 대표단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 제2회 공동위원장 회의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그 때 헬리콥터에서 두 번째로 내린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준 아이가 바로 범인 김현희라는 발표가 포함돼 있었다. 일본에서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하기와라씨로서는 화들짝 놀랄 일이었다. 그때 그 장소에 자신이 취재기자로 있었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는 묵혀두었던 16년 전 필름을 찾아 현상을 했고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이 사진을 日本 공산당에서 펴내는 화보 「그래프 안녕하십니까」 1988년 3월6일자에 「김현희인 듯한 소녀」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당시 조총련이나 한국 운동권 가운데서 퍼져나가던 「김현희 조작설」에 분명한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金賢姬가 그 사진을 보고 『내가 틀림없다』고 확인해 국내외에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이후 북한은 『김현희가 아니라 당시 평양외국어학원 교원인 정희선이라는 여자』라며 본격적으로 공세를 취해왔다. 그 여자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 회견을 하는 등 반격을 하는 바람에 공방은 계속되었다. 하기와라씨는 또 한 장의 사진을 내놓게 된다. 이 사진은 그 정희선은 두 번째가 아니라 네 번째 소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소녀가 두 번째 내리는 사람에게 꽃다발을 줄 수는 없다는 반박이었다. 이 사진을 발표했을 때 『불확실한 것을 세상에 공포했느냐』 『언론인으로서 경솔하지 않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요미우리 사진기자의 결정타
 
  나중에 밝혀진 데 따르면 애초에 하기와라씨가 「김현희인 듯한 소녀」라는 제목으로 공표한 사진(사진♥, 사진설명엔 ④번 소녀를 김현희로 지목했으나 김현희는 ③번 소녀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은 잘못이었음이 드러났다. 1972년 당시 북한에서 이 화동들의 꽃다발 선사 장면을 찍은 또 다른 일본 기자인 요미우리(讀賣) 신문의 三石英昭씨가 은밀히 이 제3의 사진(사진♥)과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이 사진의 ③번 소녀가 김현희인데 지금의 김현희 모습과도 흡사해서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북한이 하기와라씨를 반박하기 위해 내놓은 사진(사진♥)에는 주목되지 않은 ③번 소녀가 김현희다.
 
  하기와라씨는 공교롭게도 북한 쪽에서조차 김현희의 얼굴을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진에 김현희는 가려져 있을 뿐이었지만 이 사진으로 말미암아 김현희가 북한 여성임을 증명하는 후속 자료들이 나오게 되고 「조작설」에 쐐기를 박게 된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북한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배척할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해 있는 일본공산당측에서도 이 저돌적이고 정직한 기자가 불편했던 것 같다. 같은 해 하기와라씨는 결국 아카하다紙를 떠나게 된다.
 
  하기와라씨에게 남한과 북한은 무엇일까. 그는 『나는 남한도 북한도 모두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할 때, 기자는 그의 눈빛을 응시해 보았다. 무엇이 그를 한반도에 대한 거의 터무니없어 보이는 열정을 갖게 했을까.
 
 
  평양 특파원으로 지옥 체험
 
  조선인 밀항자 친구 백종호와의 체험으로 돌아간다. 아카하다의 기자로서 하기와라씨는 1972년부터 약 1년 간 평양주재 특파원으로 근무했다. 이미 백종호가 「조국건설」이라는 희망을 안고 북송선을 탔기 때문에 「친구가 사는 나라」라는 데 이끌림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공산당과 북한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하기와라씨는 공포 속에서 제대로 된 취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의 체험을 「서울과 평양」이라는 책에서 밝혔죠.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출판됐는데, 사실 그 책에서도 평양 체험을 솔직하게 쓴 건 아닙니다. 지금은 더 심하다고 하지만 그때도 역시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어요. 내 책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했어요』
 
  자유롭게 취재를 나서거나 친구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감시와 경고의 메시지를 몇 차례 들은 하기와라씨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인가 누군가로부터 친구 백종호가 근처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 결국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방된 이후에도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토록 궁금해 하던 친구가 코앞에 와 있다는데도 만날 수 없다니.
 
  「왜 이런 체제가 생겼을까? 언제부터일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어떤 나라이고 金日成은 누구이며 6·25는 왜 일어났는가?」
 
 
  북한 자료로 6·25 남침 입증
 
  의문은 시작됐다. 1988년 아카하다에 사표를 낸 다음 얼마 안 되는 全 재산을 털어 워싱턴으로 떠난 것은 바로 궁극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기와라씨는 고난의 문헌 열독 작업의 결과물로 1993년 「조선전쟁」이라는 단행본을 냈다. 이 책은 1차 자료뿐 아니라 워싱턴을 거점으로 모스크바, 타슈켄트, 北京, 서울 등을 넘나들며 증언들을 취재한 경험적이고 현장성 있는 저작이다. 일본에서는 2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북침설을 비롯한 6·25에 관련된 여러 가지 억측을 일본 학계에서 잠재우는 데에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 책에서 하기와라씨는 「金日成이란 인물은 사실상 외국인이나 다름없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광복 前에 만나 金日成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통역을 맡았던 유성철(러시아 거주)씨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대목에서 유씨는 『金日成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조선어를 할 줄 아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안다고 했더니 통역을 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중국과 소련을 전전했던 金日成이 과연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하기와라씨는 회의한다.
 
  「민족주의」로 버텨온 왜곡된 사회주의 국가에서 진정으로 구현하고 있는 민족성과 민족문화가 무엇일까. 그 나라를 50년 이상 통치하고 있는 두 통치자는 과연 무엇을 통해 민족적인 것을 구현하고 있는가. 金日成은 처음부터 「이민족」에 가까웠다고 진단하는 하기와라씨의 질문은 해외 민족주의자들까지 광범위하게 끌어들인 북한의 민족주의가 어떤 기반 위에 있는지 회의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밖에 160만 쪽의 방대한 자료 중에서 중요 자료만 1000여 건 발췌해서 「북한의 극비문서」라는 타블로이드판 세 권짜리 자료집을 펴내기도 했다.
 
 
  페리 보고서가 對北정책 이해의 열쇠
 
  본인의 평가는 그만두고라도 그의 첫 번째 워싱턴行은 화제가 될 만한 결과를 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두 번째 워싱턴 체류의 결과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곧 나올 요량이지만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작년 6월부터 그는 워싱턴에서 1998년 제출된 페리보고서와 최근의 남북관계에 관해 연구중이다. 知人 중에는 『왜 하필 남북한이 사상 최고로 좋은 화해국면에 들어와 있는 요즘에 현장에 있지 않고 미국에 가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역시 총지휘부는 미국이라고 본다. 지휘받는 사람보다 지휘하는 사람 쪽을 취재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라고 답변한다는 것이다.
 
  하기와라씨는 한반도나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에 대해 의심치 않고 있다. 최근 남북관계의 변화에 대한 DJ 정부의 이니셔티브가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남북 頂上회담을 비롯하여 최근의 화해 상황은 사실상 누가 주도했느냐는 이미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金正日 정권을 살리겠다고 판단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하기와라씨는 1998년에 발표된 페리보고서를 검토하면서 요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문득 日·北 간에 국교정상회담이 시작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라야마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움직이기 시작하더군요. 미국은 52년 동안 北·日수교를 반대해 왔습니다. 1990년에 가네마루 신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북한에 가고 국교를 수립하려고 애썼지만 미국의 방해로 결국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의 방해로 日·北수교가 불가능했는데도 페리보고서 이후 日·北수교 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일본도 민족적 긍지가 있는데 국교를 맺고 맺지 않고를 다른 나라의 지휘봉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막대한 희생이 발생한다고 보고 사실상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 포기를 천명한 셈이었습니다. 특히 5만에 이르는 주한미군과 그 가족들의 안위를 생각했다고 봅니다. 페리는 「북한은 지금 민중의 저항력이 약해 타도될 가능성이 없고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죠. 2차 대전 후 패전국의 천황을 보호하고 일본의 통치기구를 유지시켰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國體保持(국체보지)인 셈입니다』
 
  미국은 지휘를 하고 일본은 따라야 하는 식으로 일본의 주체성이 不在한 데 대한 그의 반감은 일본 공산당이 전통적으로 유지해 온 입장과도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와라씨는 1990년대 초 당시 가네마루 신(金丸信)을 중심으로 北·日수교 움직임이 있었는데 가네마루가 퇴각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결국 리쿠르트 사건의 첩보를 흘려 가네마루를 좌절시킨 것은 미국이며 그것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하기와라씨의 판단이다.
 
  『페리보고서대로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합니다. 결국 지휘봉은 미국이 쥐고 돈은 일본이 내는 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韓·美·日 삼국동맹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하기와라씨의 日·北수교 전망은 비관적이다.
 
  『북한 쪽에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식민지 사죄, 전쟁배상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의 지배층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은 약간 나쁜 면이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동상이몽을 하는 당사자들이 교섭을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과 같은 日·北수교는 반대합니다. 정의가 있는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본인 납치 문제가 日·北수교의 변수로 등장했습니다만, 이 문제도 교섭중에 해결되어야 합니다』
 
 
  金正日은 눈사람이다
 
  ―北·日수교든 北·美수교든 북한이 개혁 개방으로 가는 신호탄이 될 것 같습니다. 북한이 순조롭게 개혁 개방으로 나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눈사람이 밖에 있습니다. 집안에서 난로를 따뜻하게 피우고 집주인이 「이 봐. 눈사람. 밖에서 떨지 말고 이쪽으로 들어와 같이 불을 쬐세」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金正日은 눈사람입니다』
 
  ―중국도 성공했는데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지요. 金正日이 鄧小平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요.
 
  『그동안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미국 식민지 노예로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끼니를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최근의 남북한 상황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중국도 강하지만 미국처럼 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金正日이 개혁 개방을 하겠다고 하는데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이 남북한을 자신들의 뜰처럼 좌지우지한다면 불쾌감을 표시할 것입니다. 金正日에게 주의를 주겠죠. 그러나 북한에서 중국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식량이든 기름이든. 그래서 중국도 북한의 개혁 개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金正日이 막고 있을 뿐입니다』
 
  ―북한에서 개성공단을 개방한다든지 경의선 철도를 복구한다든지 하는 것은 상당한 변화의 징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金正日은 눈사람입니다. 저 안쪽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지만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남북관계가 실질적으로 변하고 있다면 적어도 이산가족 10만 정도는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만 對北 정책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요.
 
  『페리보고서가 획기적인 것은 미국이 선제 무력 공격을 포기했다는 데 있습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 5~10만을 포함해서 100만 이상의 사상자가 나옵니다. 전쟁은 안 된다고 자인한 셈입니다. 부시 정권의 對北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인식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가 증진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서방 쪽의 물자나 정보가 유입되면 될수록 북한인민들이 외부 사정을 알 기회가 많아집니다.
 
  인민의 각성이 높아지면 金正日 정권은 불안정해집니다. 긴장이 강화될 수밖에 없겠지요』
 
 
  黃長燁 言路를 막아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기와라씨는 黃長燁 前 노동당 비서의 회고록과 인권문제 관련 저서 「미친 개를 겁내지 마라」를 번역했다. 출판 대리인으로서 한국에 건너와 몇 차례 黃씨를 만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黃씨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작년 7월 중순 일본의 격주간지 「SAPIO」의 요청으로 黃長燁·金德弘 공동명의로 된 「남북 頂上회담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해」를 번역하기도 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현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이 글이 한국에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분노했다고 한다. 黃長燁씨의 노여움과 자신의 노여움이 합치되어서인지 놀랄 만큼 빨리 번역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言路를 봉쇄하고 金大中 대통령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라고 그는 묻고 있다.
 
  『요즘에는 아예 만날 수도 없습니다. 1999년 6월에 새로 낼 책의 원고를 받으러 갔는데 안색이 안 좋으시더군요. 마지막으로 출판계약서에 사인을 받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기관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옵디다. 큰소리로 「그것만은 안 됩니다」 라고 소리를 치는데 黃선생이 「시민에게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있다」고 하면서 舌戰(설전)을 벌이시더군요』
 
  그후 하기와라씨는 黃長燁씨로부터 문서 한 건을 받았다고 한다. 非공개를 요청해 잘 간직하고 있다는데 이 문건을 통해 수많은 가족과 동료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내려온 자신의 선택에 대해 깊이 회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기와라씨는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다. 黃長燁씨의 言路를 차단한다는 것은 작금의 남북관계가 본질적인 문제를 애써 가리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정의가 없는 협상이나 교류」가 결국 무엇인가,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정의가 있는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이 하기와라씨의 입장이다.
 
 
  공산당의 진짜 敵은?
 
  긴급사태처럼 도래했던 남북화해. 거기에 과연 정의는 있는 것일까. 하기와라씨는 「이산가족 10만의 상봉」이라는 바로미터를 제시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잣대는 이러한 화해국면의 이득이 「북한의 서민들에게는 얼마나 나눠지고 있는가」일 것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한 속담처럼 섣불리 정답을 얻으려는 것은 물론 곤란하다. 그러나 하기와라씨의 목격자로서의 분노는 지금 북한주민들의 처절한 삶이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3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은 최악으로 달리고 있다. 그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기와라씨의 측은지심은 가슴 뭉클하게 하는 데가 있다.
 
  한반도 상황에 관한 그의 여러 가지 견해는 말 그대로 「하기와라 료」라는 저널리스트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가난한 북한사람들과 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하기와라씨는 20년 간 일했던 아카하다 기자직에서 해임된 셈이지만 아직 일본 공산당에서 탈당은 하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실패했다 해도 정치에서 이상주의를 고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여전히 의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도 공산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의리와 충성, 효성을 강조하는 나라를 어떻게 공산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이런 가치관이야 말로 공산주의의 敵입니다. 金正日은 공산주의의 진정한 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의 공산주의는 무엇입니까.
 
  『빈부의 차를 없애나가고 진정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모두 화목하게 살 수 있으면 이상사회 아닐까 하는 것이죠』
 
  방랑자 같은 그의 삶을 견디지 못한 가족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고 했다. 『黃長燁씨도 그렇지만 저도 참 가련한 사람이지요』라고 했는데 사상과 한반도에 대한 집념은 안정된 생활로부터 그를 이탈시켰고, 환갑이 넘은 그를 아직도 끝없이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 인도하고 있다. 기자는 하기와라씨의 한반도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그의 노력이 전환기를 겪고 있는 우리 역사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내어 우리가 한 일본 지식인의 한반도에 대한 열정을 훈훈한 마음으로 기억하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기와라씨가 발표한 북한관련 저서
 
  서울과 평양
  (김종선 옮김/ 도서출판 다나/ 1990)

 
  1972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 평양 주재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체험한 북한과,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취재로 약 한 달간 서울에 머문 체험을 바탕으로 남북한에 대한 자신의 물리적 심리적 체험을 수필체로 쓴 책이다. 그는 남북한을 모두 애정 있는 시선으로 보려고 애썼는데 「조선사람이든 한국사람들이든 모두 소박하면서도 순수한 사람들이다」라는 판단에서 기인한다. 후에 하기와라씨는 「당시만 해도 남북한을 대등하게 보려고 했기 때문에 북한의 적나라한 면을 솔직하게 쓰지는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최태순 옮김/ 한국논단/ 1995)

 
  1993년 「文藝春秋」에서 「朝鮮戰爭」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책으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2년 동안 미국 워싱턴의 국립공문서관에서 6·25 관련 자료 160만 쪽을 통람한 후 쓴 책이다. 미국은 1977년부터 정보공개법에 따라 1950년부터 휴전 때까지 북한의 각 지역에서 노획한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하기와라씨는 이 책을 통해 「남북한 문제를 푸는 열쇠는 6·25」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北朝鮮に消えた友と私の物語」(북한으로 사라진 벗과 나의 이야기)
  (文藝春秋, 1998)

 
  이 책으로 일본 유수의 논픽션상을 받았다. 하기와라씨를 한반도 문제에 천착케 한 중요한 원인은 야간 고등학교에서 어렵게 공부하던 시절의 조선인 친구 백종호(가명)와의 만남에 있다. 백과의 만남에서부터 60평생을 남북한 문제와 함께 해오기까지 자신의 인생역정과 생생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평양 특파원 시절 하기와라씨는 북송선을 타고 갔다가 사라진 친구 백종호를 만나려고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그로 하여금 북한체제의 문제점에 대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北朝鮮の極秘文書」(상·중·하)
  (美 국립공문서관 소장자료 발췌록, 夏の書房, 1996 )

 
  美 국립공문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6·25 관련 북한문서 160만 장 중에서 약 1000건을 발췌해 묶은 타블로이드판 자료집. 상 중 하 세 권으로 된 이 자료집은 「일제시대를 지나 광복이 되자마자 소련의 점령하에 들어간 북한의 실상과 6·25를 중심에 놓고 편집」되었다고 한다. 국내외에서 제기되어온 6·25에 관한 여러 가지 논점을 해명할 수 있는 실증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다.
 
 
  「狂犬におびえるな」(미친개를 겁내지 마라)
  (萩原 遼 譯, 文藝春秋, 2000)

 
  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의 「북한의 인권문제」, 「평화통일전략」, 「개혁과 개방」 등의 논문을 번역한 책이다. 이에 앞서 황장엽씨의 회고록을 번역하기도 하여 일본에서 황장엽씨 저서를 전담해 번역하고 있다. 이 책은 2만 부 이상 팔려나가는 등 일본에서 높은 호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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