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이렇게 험난하고 위험하니 우리들 마음속의 순진한 휴머니즘에 의해 겁없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이 영화에서처럼 인생이 박살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만나서 닭싸움을 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걸 권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장은커녕 이렇게 하다간 망한다는 걸 보여준 거죠. 영화에서는 처음에 순진하게 진행되다가 결말에 가서는 순진하지 않게 끝나는 겁니다』
영화의 힘
正體性(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통일의 열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남북한 군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한 편이 우리 사회에서 大폭발중이다.
지난 9월9일 전국 130개 영화관에서 일제히 개봉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명필름 제작)」는 1919년 한국 영화가 처음 상영된 이래 단시간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면서 최대 관객동원 기록에 도전중이다. 영화 「쉬리」는 약 두 달 동안 서울 개봉관에서만 총 243만명을 동원, 한국 영화사상 최대 관객동원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는 개봉 25일 만에 150만명(「쉬리」는 36일째)을 돌파했다. 이런 속도라면 조만간 「쉬리」가 세운 최대 관객동원의 기록도 깰 것으로 보인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상영되는 극장 앞은 개봉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매진사태가 빈번하다.
취재를 위해 이 작품을 세 번 본 기자는 우리 사회에 파급되는 「영화의 힘」을 보았다. 원작소설도 표현하지 못한 섬세한 부분까지 한 장면 속에 담아내고, 웃음과 스릴을 느끼게 하면서도 분단이란 무거운 주제를 대중으로 하여금 기꺼이 즐겁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힘. 사회학자 맥루한이 적시한 대로 관객을 한 시간 반 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핫 미디어(Hot Media)」의 위력을 본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386세대의 소설가와 386세대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지하서클이 대학 내에서 유행하고 전대협에 이어 한총련이 붉은 깃발을 휘두르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이들은 唯物史觀(유물사관)의 문화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창조해 낸 작품에 「재미」와 「인간미」가 풍성함을 발견했을 때 기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0년 가을 한국 사회를 붕 뜨게 만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감독 朴贊郁(박찬욱·38)씨를 만나보았다.
이 시대의 중간지대에 선 사내
朴暾緖(박돈서·68·건축학 교수·現 거제大 학장)씨의 장남인 그는 1982년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386세대」이지만 철학이나 당시 유행하던 학생운동보다 영화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 영화 관련 학과는 없어도 영화 관계 원서가 많았던 서강대학교 도서관은 그의 또다른 서재가 되었다. 전산화가 되지 않았던 그 시절, 朴贊郁은 대출카드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들을 찾아내 영화 서클을 만들고,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가 만든 영화서클을 통해 감독으로 진출했거나 진출 중인 사람도 많다. 김용태 감독(영화 「미지왕」), 윤태용 감독(「베니싱 트윈」), 배병호 감독(데뷔 중), 이광훈 감독(「자귀모」), 최성식 감독(「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 조재홍 감독(다큐 전문) 등.
朴贊郁은 18개월 방위 생활을 거친 뒤 학교를 졸업한 그 길로 영화계에 들어갔다.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에 데뷔한 뒤 1994년의 「삼인조」에 이어 이번 영화는 세 번째 작품. 그동안 주로 B급 영화(非주류 영화)에 몰입해 왔던 그는 영화 「아나키스트」의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대중의 性感帶를 건드리게 된 것이죠』
지난 10월5일 오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빌딩 2층 커피숍에서 그와 대면했다.
서른여덟 살의 팽팽함이 매서운 눈매 속에 숨겨진 朴감독을 보는 순간, 촬영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을 꽤나 들볶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史의 획을 그어버린 심정을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서울 토박이의 매끄러운 음성으로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벌어진 것뿐이죠』라고 말했다. 수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자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기자와 朴감독은 주머니 속에서 권총 뽑듯 담배갑을 꺼냈다.
―관객이 몰리는 이유를 뭐라고 봅니까.
『대중적인 파괴력은 작가가 아니고 대중들이 만드는 것이죠. 이 영화는 한국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민족감정-냉전과 전쟁공포를 무릅쓰고 북한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하는 감정, 어쩌면 이것만이 발전되었을 때는 위험할지도 모르는, 그런 격한 감정을 속으로 갖고 있는데, 어떤 놈이 나타나서 이걸 좀 건드려 주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저로 인해 대중의 이런 性感帶(성감대)가 건드려져 흥분한 거죠』
―대중의 性感帶는 어떻게 형성됐다고 봅니까.
『김훈 중위 사건, 6·15 남북 頂上회담, 이산가족 상봉… 뭐 이런 것들이 운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라 봅니다. 게다가 젊은 층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느낌과 反共에 대한 생각… 그것이 환상이든 오해든 대중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朴감독의 「젊은 층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느낌과 反共에 대한 생각」이란 말을 꼬투리 삼아 「당신은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식의 질문을 해보았더니 그는 한마디로 「공포」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동포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의 인식이 이중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다루면 오히려 역효과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에서도 남한 사회도 비판하면서 북한을 좀더 비판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朴감독에 의해 비판받는 남한체제 덕분에 朴감독의 영화가 성공했다고 보지 않아요?
『그런 면도 있죠.…그렇죠』
―과거의 반공 영화가 실패했던 이유를 들라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反共이든 아니든 개인의 자유 쪽에 서 있어요. 金日成 주체사상도 싫지만 과잉 반공주의도 싫다는 겁니다. 6·25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증오감을 바탕에 깔고 반공 교육을 저희들에게 주입했죠. 그게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나름의 모순이라고 보는 것이죠. 反共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反共이 이데올로기化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된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교육받는 입장에서는 갑갑하고 답답했고 그리고 전쟁의 체험 없는 우리에게 전쟁의 무서움만 심어주어 공포감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세대에게 「북한의 잔학상」만을 보여주는 반공영화는 「우리 정치 체제가 비교적 덜하니 좋은 것」이란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왜냐. 戰後(전후) 세대에게 북한은 실감나지 않는 실체입니다. 반면 기성세대에겐 실감나는 敵國(적국)이었겠지요. 문제는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386세대로 통칭되는 저같은 사람에겐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언급되는 정치폭력 등 사회 모순들이 더 큰 敵으로 다가왔어요.
6·25 전쟁에서 우리가 목숨걸고 견지한 메시지가 자유와 인권이었다면 이후 정치 문화도 그런 식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반공영화가 제작되었다면 훨씬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反共이념을 표방한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도덕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여려움을 겪었잖아요. 그런 만큼 反共에 대한 강요는 더 거세졌죠. 이것이 휴머니즘을 기조로 한 反共이념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봐요.
1980년대 후반에 반공 이데올로기의 반동으로 등장한 민중 영화나 문학도 결국 같은 길을 걸어갔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공식이 있어요. 「특정 이념의 영화를 만들면 특정 이념에 열광하는 관객 이외엔 아무도 안 본다」는 것이죠. 이념보다 그것을 넘어서는 감정적인 문제, 인간적인 문제를 다루니까 이만한 반응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극장 앞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메시지는 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봐야겠다는 식의 표현을 한다. 영화는 분명히 재미있지만 할리우드 영화처럼 善惡(선악)이 분명하지 않고, 감동을 받고서도 영화가 주장하는 메시지의 실체가 여운 속에 감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나를 직접 물어보았다.
『金正日도 좋아하지 않더라는데…』
『휴머니즘이죠. 휴머니즘을 통해 남북한을 들여다보면 분단상황이 부조리의 극치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그럼에도 주인공 네 사람의 휴머니스트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결말은 무얼 암시하는 걸까요.
『현실은 이렇게 험난하고 위험하니 우리들 마음속의 순진한 휴머니즘에 의해 겁없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이 영화에서처럼 인생이 박살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만나서 닭싸움을 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걸 권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장은커녕 이렇게 하다간 망한다는 걸 보여준 거죠. 영화에서는 처음에 순진하게 진행되다가 결말에 가서는 순진하지 않게 끝나는 겁니다』
―朴감독이 제시하는 휴머니즘이 통일이거나 삶의 기준이 된다면 북한이 더 많이 변해야 하겠는데요. 이런 의미에서 북한체제를 비판한 영화이지만 드러내지 않으려 상당히 절제했다는 평가도 있더군요.
『그쪽 사람들이 이런 영화를 볼 기회가 없겠지만, 이 영화에서 가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같은 민족이 서로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있어요. 영화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모여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데, 원래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왜 이렇게 갈라져서 적대시하고 살게 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것, 이 정도에서 메시지는 머물러 있어요.
그러니까 분단이 주는 아픔을 그렸다고 봐야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버리면 교과서처럼 되어 흥행에도 실패했을 겁니다. 공감하는 대중들이 많다면 그들은 분명히 다시 한번 왜 이렇게 분단이 됐는지 돌아보게 될 겁니다』
―이 영화는 정치적 논란의 여지를 절묘하게 피해가고 있습니다. 朴감독이 1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얻어낸 산물이라 보는데, 북한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애써 선전하지도 않으면서 인민군 중사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앉혀놓았죠. 그렇다면 북한에서도 이 영화는 환영받을 것 같습니까?
『전혀 아닐걸요. CNN인지 어느 매체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저에게 「金正日도 이 영화를 보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해주었어요. 틀림없이 북한의 기득권층이 이 영화를 본다면 거부반응이 심각했을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朴감독이 전해들었다는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촬영 후 원본을 영화진흥공사에서 127本으로 복사해 현재 전국의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카피本 한 세트는 6개의 롤로 이루어 져 있어 스크린을 여러 개 갖고 있는 멀티 시네마型의 극장에서는 두세 개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하고 있다. 영화진흥공사측은 총 127本으로 현재 전국의 130개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므로 카피本이 북한에 흘러 들어갔다고는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金正日의 반응에 신경쓰면서 영화를 만들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펄쩍 뛰었다.
『절대 아니죠. 앞으로도 우리 영화인들이 그런 상황에 봉착한다면… 아,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거죠』
『인민군 吳중사는 북한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아 인간성을 지킨 인물』
그는 『金正日이라는 사람이…』라며 말을 이었다.
『金正日이라는 사람이 지도했다는 북한 영화들을 보면 그들이 가진 예술적 너그러움의 범위로서는 이 영화를 결코 허용할 것 같지가 않아요. 예술 애호가 혹은 영화 애호가로서 金正日은 상당한 센스가 있을 텐데요. 예를 들면 지난 6월12일 金大中 대통령이 訪北했을 때 金正日이 연출한 행동들을 보면 (센스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 인민군 오경필 중사(송강호 役)가 부동자세로 「조선 노동당 만세, 金正日 장군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나오죠. 오중사는 자신과 이수혁 병장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겁니다.
만약 알려진 대로 金正日이 영화 애호가여서 영화를 보는 눈이 있다면 그는 이 장면이 오경필 중사가 쇼를 하는 것이란 걸 단박에 알 겁니다. 기분 좋을 리 없죠. 불쾌해 할 것이 틀림없지만 뭐, 개의할 필요도 없죠』
―이 영화는 남북한 군인들이 등장하지만 남한 쪽에 부정적인 인물들이 더 많이 나오는데.
『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니까 그렇죠. 또 그동안 북한 사람들을 나쁘게 표현해 온 데 대한 대중들의 反感(반감)도 감안했어요. 북한에도 좋은 사람은 있을 거고, 외국 경험을 가져 북한 체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캐릭터로 오경필 중사를 만들어 영화에 등장시켰어요』
禁忌를 깨버린 代價
그는 우리 사회가 예술가들에게 금기의 벽을 넘는 데 관대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체제가 쳐놓은 금 밖으로 어느 정도 나가는 걸 지식 사회가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朴감독의 철학대로 현실이 쳐 놓은 금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던 代價(대가)는 다른 데서 지불해야 했다.
영화가 시중에 개봉된 지 17일째인 지난 9월26일 오후 3시에 서울 명륜동의 (주)명필름 사무실에 JSA전우회 회원 20여 명이 찾아가 항의하다 난동으로 번진 사건이 있었다. 李靑根(이청근) JSA전우회 총무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敵과 가장 가까이서 대치하며 근무해 온 JSA 요원들이 영화에서는 조금 非현실적으로 그려졌어요. 지뢰를 밟았는데 인민군이 구해주었다는 등의 설정이나 두 명씩이나 JSA 요원이 자살하는 식으로 그려진 영화라면 자막을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밝혔어야죠.
1984년 가을에는 러시아 기자가 판문점을 통해 망명하면서 양측이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전우 한 명이 적탄에 맞아 戰死(전사)했어요. 유가족들의 심정을 고려한다면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JSA의 명예를 무시하고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주장을 전달하러 갔다가 감정적으로 격해져 난동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명필름측은 이들의 항의 내용을 받아들여 9월29일자 全일간지 광고면을 통해 JSA의 요구와 관련된 입장을 밝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현 근무자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일을 막고, 모든 JSA 요원이 이 영화에 묘사된 바와 같은 군법 위반 행위를 저질러 왔던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다음의 내용을 영화의 신문광고에 삽입하고 상영용 프린트에 자막처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특히 여기 묘사된 내용은 실제 JSA 요원의 근무현실과 다름을 밝히며 이 영화로 인하여 JSA 요원 및 전역자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명필름과 영화제작자 일동은 JSA전우회측의 난동에 대해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탈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서울지검에 JSA전우회 20여 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고발해 놓은 상태다. 10월8일 현재, 양측은 합의를 전제로 한 회합을 가지고 있다고 李靑根 총무는 말했다.
『폭력은 잘못이지만, 항의는 일리 있는 것. 미안한 마음이다』
朴감독에게 그들(JSA전우회)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 서운한 감정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런 현실에 얽매어 있으면 발전이 참 힘들다고 생각해요. 영화나 예술은 현실이 허용하는 경계를 넘어서 조금 더 가줘야 의미가 있거든요. 조금 서운한 분들이 있더라도, 그래서 영화인들이 욕을 조금 먹더라도 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 영화는 북한으로부터 비극을 겪은 유가족들의 너그러운 마음 덕분에 성공했다고도 생각됩니다.
또다른 하나는 JSA에 근무하는 분들께 저를 포함해 제작진들은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작사인 명필름측과 저는 JSA전우회측의 항의를 받고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어 즉시 받아들였어요』
그는 JSA 요원이 戰死한 사실을, JSA 전우회측이 명필름 사무실을 찾아와 항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명필름을 찾아와 「우리가 이 영화를 어떻게 용납해야 하느냐」고 항변을 했을 때 「우리가 생각이 짧았구나. 이것은 虛構(허구)이며 우리가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현재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의도가 없다는 자막이라도 최소한 넣어줬어야 했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그런 자막과 광고가 나갔지요.
그분들의 사고 방식이 설사 경직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또 비록 우리와 생각이 틀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옳고 그분들 생각이 틀리더라도 그건 그분들의 잘못이거나 책임이 아니라고 봐요.
그분들은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야 했고 자신의 청춘을 거기에 바쳤을 것인데…. 그런 면에 있어서 그분들도 분단의 희생자이고 少數(소수)이지만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항의하는 과정에서 다만 폭행, 폭력에 대해서는 영화인 모두를 대표해서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한 것이죠』
만약 JSA전우회측의 항의 내용을 미리 알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는 『정중한 자막처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감독은 영화 자막에 「한국 對人지뢰 대책회의」측의 요구도 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수혁 병장이 밟은 지뢰는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놓으면 폭발하게 되는 부비트랩이다.
이 가상현실적 소품에 대해서도 항의를 받은 명필름측은 「(중략)현재 한반도에는 이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건드려도 안 터질 가능성이 있는 그런 지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뢰는 밟는 즉시 폭발합니다(하략)」라는 자막도 넣을 예정이란 것이다.
『뭔가 미흡하고 공부도 더 해야…』
많은 비평가들이 말했듯이 이 영화의 미덕은 현실과 낭만적 휴머니즘 사이의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하는 솔직성, 이념적으로 편향되기 쉬운 장면과 대사의 절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이 영화를 보면 전쟁체험이 없는 신세대가 북한체제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이념에 대한 공포감이 앞서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우리 사회가 양산한 결과물이라 여겨질 수 있도록 영화는 남한 사회의 인물들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북한측 주인공인 오경필은 북한에서도 예외적인 인물이다. 이 부분이 관객들의 공감대를 오히려 확산시켰다.
메시지 전달이 강한 영화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이 영화의 眞意(진의)에 대해 갸웃거릴 것이다. 남한을 비판하는 듯하면서도 북한을 편들지 않는 어색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朴감독은 『아무런 정치적 입장이 없다는 것은 한마디로 밥맛 없는 기회주의자이지만, 예술가로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한국처럼 체제와 反체제만 존재하는 듯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非체제가 살아남아야 영화든 문학이든 창조할 기회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 非체제적인 인물임을 다시 한번 고백한 셈이다.
분단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영화로 분단을 다룬다는 데 대한 느낌을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막상 해놓고 보니 역시 어렵다는 걸 실감해요. 각본을 짜는 데만도 1년이 넘었는데 그래도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뭔가 미흡하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자기가 하고픈 영화에만 관심을 쏟았던 朴贊郁의 대학생활은 기성세대가 몸으로 지키며 구축한 체제 속에서 기성세대가 원하는 태도로 학창생활을 자유롭게 보낸 인물의 전형이다.
朴贊郁 감독은 견고하게 맞붙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의 단단한 보도블록 틈 사이로 뿌리내린 작은 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非체제적 사고를 통해 만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인 셈이다. 남한의 自由民主主義라는 열려진 보도블록의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흥행에 성공한 영화란 우리 사회의 내면을 제대로 비쳐주는 거울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비춰주는 우리의 내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朴贊郁 감독처럼 새로운 세대의 맑은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어 간다면 머지않아 그들의 손에 의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소재로 한 제2의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가 또다른 「대박」을 터뜨리며 나올 수 있다는 희망도 확실히 가져볼 만하다. 노벨 평화상뿐 아니라 아카데미 상도 기대해 볼만 하지 않겠는가. 朴감독과 헤어지는 순간 기성세대의 품을 떠나 날개를 펴고 불안한 듯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를 보는 느낌이었다.●
지난 9월9일 전국 130개 영화관에서 일제히 개봉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명필름 제작)」는 1919년 한국 영화가 처음 상영된 이래 단시간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면서 최대 관객동원 기록에 도전중이다. 영화 「쉬리」는 약 두 달 동안 서울 개봉관에서만 총 243만명을 동원, 한국 영화사상 최대 관객동원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는 개봉 25일 만에 150만명(「쉬리」는 36일째)을 돌파했다. 이런 속도라면 조만간 「쉬리」가 세운 최대 관객동원의 기록도 깰 것으로 보인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상영되는 극장 앞은 개봉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매진사태가 빈번하다.
취재를 위해 이 작품을 세 번 본 기자는 우리 사회에 파급되는 「영화의 힘」을 보았다. 원작소설도 표현하지 못한 섬세한 부분까지 한 장면 속에 담아내고, 웃음과 스릴을 느끼게 하면서도 분단이란 무거운 주제를 대중으로 하여금 기꺼이 즐겁게 고민하도록 만드는 힘. 사회학자 맥루한이 적시한 대로 관객을 한 시간 반 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핫 미디어(Hot Media)」의 위력을 본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386세대의 소설가와 386세대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지하서클이 대학 내에서 유행하고 전대협에 이어 한총련이 붉은 깃발을 휘두르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이들은 唯物史觀(유물사관)의 문화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창조해 낸 작품에 「재미」와 「인간미」가 풍성함을 발견했을 때 기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0년 가을 한국 사회를 붕 뜨게 만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감독 朴贊郁(박찬욱·38)씨를 만나보았다.
이 시대의 중간지대에 선 사내
朴暾緖(박돈서·68·건축학 교수·現 거제大 학장)씨의 장남인 그는 1982년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386세대」이지만 철학이나 당시 유행하던 학생운동보다 영화에 주된 관심을 보였다. 영화 관련 학과는 없어도 영화 관계 원서가 많았던 서강대학교 도서관은 그의 또다른 서재가 되었다. 전산화가 되지 않았던 그 시절, 朴贊郁은 대출카드에서 자주 보이는 이름들을 찾아내 영화 서클을 만들고,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가 만든 영화서클을 통해 감독으로 진출했거나 진출 중인 사람도 많다. 김용태 감독(영화 「미지왕」), 윤태용 감독(「베니싱 트윈」), 배병호 감독(데뷔 중), 이광훈 감독(「자귀모」), 최성식 감독(「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 조재홍 감독(다큐 전문) 등.
朴贊郁은 18개월 방위 생활을 거친 뒤 학교를 졸업한 그 길로 영화계에 들어갔다.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에 데뷔한 뒤 1994년의 「삼인조」에 이어 이번 영화는 세 번째 작품. 그동안 주로 B급 영화(非주류 영화)에 몰입해 왔던 그는 영화 「아나키스트」의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연히 대중의 性感帶를 건드리게 된 것이죠』
지난 10월5일 오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빌딩 2층 커피숍에서 그와 대면했다.
서른여덟 살의 팽팽함이 매서운 눈매 속에 숨겨진 朴감독을 보는 순간, 촬영 현장에서는 스태프들을 꽤나 들볶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史의 획을 그어버린 심정을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서울 토박이의 매끄러운 음성으로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벌어진 것뿐이죠』라고 말했다. 수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자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기자와 朴감독은 주머니 속에서 권총 뽑듯 담배갑을 꺼냈다.
―관객이 몰리는 이유를 뭐라고 봅니까.
『대중적인 파괴력은 작가가 아니고 대중들이 만드는 것이죠. 이 영화는 한국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민족감정-냉전과 전쟁공포를 무릅쓰고 북한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하는 감정, 어쩌면 이것만이 발전되었을 때는 위험할지도 모르는, 그런 격한 감정을 속으로 갖고 있는데, 어떤 놈이 나타나서 이걸 좀 건드려 주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저로 인해 대중의 이런 性感帶(성감대)가 건드려져 흥분한 거죠』
―대중의 性感帶는 어떻게 형성됐다고 봅니까.
『김훈 중위 사건, 6·15 남북 頂上회담, 이산가족 상봉… 뭐 이런 것들이 운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라 봅니다. 게다가 젊은 층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느낌과 反共에 대한 생각… 그것이 환상이든 오해든 대중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朴감독의 「젊은 층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느낌과 反共에 대한 생각」이란 말을 꼬투리 삼아 「당신은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식의 질문을 해보았더니 그는 한마디로 「공포」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동포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의 인식이 이중적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다루면 오히려 역효과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에서도 남한 사회도 비판하면서 북한을 좀더 비판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朴감독에 의해 비판받는 남한체제 덕분에 朴감독의 영화가 성공했다고 보지 않아요?
『그런 면도 있죠.…그렇죠』
―과거의 반공 영화가 실패했던 이유를 들라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反共이든 아니든 개인의 자유 쪽에 서 있어요. 金日成 주체사상도 싫지만 과잉 반공주의도 싫다는 겁니다. 6·25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증오감을 바탕에 깔고 반공 교육을 저희들에게 주입했죠. 그게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나름의 모순이라고 보는 것이죠. 反共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反共이 이데올로기化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된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교육받는 입장에서는 갑갑하고 답답했고 그리고 전쟁의 체험 없는 우리에게 전쟁의 무서움만 심어주어 공포감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세대에게 「북한의 잔학상」만을 보여주는 반공영화는 「우리 정치 체제가 비교적 덜하니 좋은 것」이란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왜냐. 戰後(전후) 세대에게 북한은 실감나지 않는 실체입니다. 반면 기성세대에겐 실감나는 敵國(적국)이었겠지요. 문제는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386세대로 통칭되는 저같은 사람에겐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언급되는 정치폭력 등 사회 모순들이 더 큰 敵으로 다가왔어요.
6·25 전쟁에서 우리가 목숨걸고 견지한 메시지가 자유와 인권이었다면 이후 정치 문화도 그런 식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반공영화가 제작되었다면 훨씬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反共이념을 표방한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도덕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여려움을 겪었잖아요. 그런 만큼 反共에 대한 강요는 더 거세졌죠. 이것이 휴머니즘을 기조로 한 反共이념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봐요.
1980년대 후반에 반공 이데올로기의 반동으로 등장한 민중 영화나 문학도 결국 같은 길을 걸어갔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공식이 있어요. 「특정 이념의 영화를 만들면 특정 이념에 열광하는 관객 이외엔 아무도 안 본다」는 것이죠. 이념보다 그것을 넘어서는 감정적인 문제, 인간적인 문제를 다루니까 이만한 반응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극장 앞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에게 메시지는 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십중팔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봐야겠다는 식의 표현을 한다. 영화는 분명히 재미있지만 할리우드 영화처럼 善惡(선악)이 분명하지 않고, 감동을 받고서도 영화가 주장하는 메시지의 실체가 여운 속에 감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메시지가 무엇이었나를 직접 물어보았다.
『金正日도 좋아하지 않더라는데…』
『휴머니즘이죠. 휴머니즘을 통해 남북한을 들여다보면 분단상황이 부조리의 극치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그럼에도 주인공 네 사람의 휴머니스트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결말은 무얼 암시하는 걸까요.
『현실은 이렇게 험난하고 위험하니 우리들 마음속의 순진한 휴머니즘에 의해 겁없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이 영화에서처럼 인생이 박살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만나서 닭싸움을 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걸 권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장은커녕 이렇게 하다간 망한다는 걸 보여준 거죠. 영화에서는 처음에 순진하게 진행되다가 결말에 가서는 순진하지 않게 끝나는 겁니다』
―朴감독이 제시하는 휴머니즘이 통일이거나 삶의 기준이 된다면 북한이 더 많이 변해야 하겠는데요. 이런 의미에서 북한체제를 비판한 영화이지만 드러내지 않으려 상당히 절제했다는 평가도 있더군요.
『그쪽 사람들이 이런 영화를 볼 기회가 없겠지만, 이 영화에서 가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같은 민족이 서로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있어요. 영화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모여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데, 원래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왜 이렇게 갈라져서 적대시하고 살게 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것, 이 정도에서 메시지는 머물러 있어요.
그러니까 분단이 주는 아픔을 그렸다고 봐야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버리면 교과서처럼 되어 흥행에도 실패했을 겁니다. 공감하는 대중들이 많다면 그들은 분명히 다시 한번 왜 이렇게 분단이 됐는지 돌아보게 될 겁니다』
―이 영화는 정치적 논란의 여지를 절묘하게 피해가고 있습니다. 朴감독이 1년에 걸친 시나리오 작업을 통해 얻어낸 산물이라 보는데, 북한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애써 선전하지도 않으면서 인민군 중사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앉혀놓았죠. 그렇다면 북한에서도 이 영화는 환영받을 것 같습니까?
『전혀 아닐걸요. CNN인지 어느 매체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저에게 「金正日도 이 영화를 보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해주었어요. 틀림없이 북한의 기득권층이 이 영화를 본다면 거부반응이 심각했을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朴감독이 전해들었다는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촬영 후 원본을 영화진흥공사에서 127本으로 복사해 현재 전국의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카피本 한 세트는 6개의 롤로 이루어 져 있어 스크린을 여러 개 갖고 있는 멀티 시네마型의 극장에서는 두세 개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하고 있다. 영화진흥공사측은 총 127本으로 현재 전국의 130개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므로 카피本이 북한에 흘러 들어갔다고는 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金正日의 반응에 신경쓰면서 영화를 만들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펄쩍 뛰었다.
『절대 아니죠. 앞으로도 우리 영화인들이 그런 상황에 봉착한다면… 아,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거죠』
『인민군 吳중사는 북한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아 인간성을 지킨 인물』
그는 『金正日이라는 사람이…』라며 말을 이었다.
『金正日이라는 사람이 지도했다는 북한 영화들을 보면 그들이 가진 예술적 너그러움의 범위로서는 이 영화를 결코 허용할 것 같지가 않아요. 예술 애호가 혹은 영화 애호가로서 金正日은 상당한 센스가 있을 텐데요. 예를 들면 지난 6월12일 金大中 대통령이 訪北했을 때 金正日이 연출한 행동들을 보면 (센스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 인민군 오경필 중사(송강호 役)가 부동자세로 「조선 노동당 만세, 金正日 장군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나오죠. 오중사는 자신과 이수혁 병장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겁니다.
만약 알려진 대로 金正日이 영화 애호가여서 영화를 보는 눈이 있다면 그는 이 장면이 오경필 중사가 쇼를 하는 것이란 걸 단박에 알 겁니다. 기분 좋을 리 없죠. 불쾌해 할 것이 틀림없지만 뭐, 개의할 필요도 없죠』
―이 영화는 남북한 군인들이 등장하지만 남한 쪽에 부정적인 인물들이 더 많이 나오는데.
『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니까 그렇죠. 또 그동안 북한 사람들을 나쁘게 표현해 온 데 대한 대중들의 反感(반감)도 감안했어요. 북한에도 좋은 사람은 있을 거고, 외국 경험을 가져 북한 체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캐릭터로 오경필 중사를 만들어 영화에 등장시켰어요』
禁忌를 깨버린 代價
그는 우리 사회가 예술가들에게 금기의 벽을 넘는 데 관대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체제가 쳐놓은 금 밖으로 어느 정도 나가는 걸 지식 사회가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朴감독의 철학대로 현실이 쳐 놓은 금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던 代價(대가)는 다른 데서 지불해야 했다.
영화가 시중에 개봉된 지 17일째인 지난 9월26일 오후 3시에 서울 명륜동의 (주)명필름 사무실에 JSA전우회 회원 20여 명이 찾아가 항의하다 난동으로 번진 사건이 있었다. 李靑根(이청근) JSA전우회 총무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敵과 가장 가까이서 대치하며 근무해 온 JSA 요원들이 영화에서는 조금 非현실적으로 그려졌어요. 지뢰를 밟았는데 인민군이 구해주었다는 등의 설정이나 두 명씩이나 JSA 요원이 자살하는 식으로 그려진 영화라면 자막을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밝혔어야죠.
1984년 가을에는 러시아 기자가 판문점을 통해 망명하면서 양측이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전우 한 명이 적탄에 맞아 戰死(전사)했어요. 유가족들의 심정을 고려한다면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JSA의 명예를 무시하고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주장을 전달하러 갔다가 감정적으로 격해져 난동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명필름측은 이들의 항의 내용을 받아들여 9월29일자 全일간지 광고면을 통해 JSA의 요구와 관련된 입장을 밝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략)현 근무자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일을 막고, 모든 JSA 요원이 이 영화에 묘사된 바와 같은 군법 위반 행위를 저질러 왔던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다음의 내용을 영화의 신문광고에 삽입하고 상영용 프린트에 자막처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특히 여기 묘사된 내용은 실제 JSA 요원의 근무현실과 다름을 밝히며 이 영화로 인하여 JSA 요원 및 전역자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명필름과 영화제작자 일동은 JSA전우회측의 난동에 대해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탈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서울지검에 JSA전우회 20여 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고발해 놓은 상태다. 10월8일 현재, 양측은 합의를 전제로 한 회합을 가지고 있다고 李靑根 총무는 말했다.
『폭력은 잘못이지만, 항의는 일리 있는 것. 미안한 마음이다』
朴감독에게 그들(JSA전우회)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 서운한 감정도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현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런 현실에 얽매어 있으면 발전이 참 힘들다고 생각해요. 영화나 예술은 현실이 허용하는 경계를 넘어서 조금 더 가줘야 의미가 있거든요. 조금 서운한 분들이 있더라도, 그래서 영화인들이 욕을 조금 먹더라도 치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 영화는 북한으로부터 비극을 겪은 유가족들의 너그러운 마음 덕분에 성공했다고도 생각됩니다.
또다른 하나는 JSA에 근무하는 분들께 저를 포함해 제작진들은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작사인 명필름측과 저는 JSA전우회측의 항의를 받고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어 즉시 받아들였어요』
그는 JSA 요원이 戰死한 사실을, JSA 전우회측이 명필름 사무실을 찾아와 항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명필름을 찾아와 「우리가 이 영화를 어떻게 용납해야 하느냐」고 항변을 했을 때 「우리가 생각이 짧았구나. 이것은 虛構(허구)이며 우리가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현재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의도가 없다는 자막이라도 최소한 넣어줬어야 했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래서 그런 자막과 광고가 나갔지요.
그분들의 사고 방식이 설사 경직되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또 비록 우리와 생각이 틀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옳고 그분들 생각이 틀리더라도 그건 그분들의 잘못이거나 책임이 아니라고 봐요.
그분들은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서야 했고 자신의 청춘을 거기에 바쳤을 것인데…. 그런 면에 있어서 그분들도 분단의 희생자이고 少數(소수)이지만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항의하는 과정에서 다만 폭행, 폭력에 대해서는 영화인 모두를 대표해서 강력하게 대처하겠다고 한 것이죠』
만약 JSA전우회측의 항의 내용을 미리 알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는 『정중한 자막처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朴감독은 영화 자막에 「한국 對人지뢰 대책회의」측의 요구도 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수혁 병장이 밟은 지뢰는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놓으면 폭발하게 되는 부비트랩이다.
이 가상현실적 소품에 대해서도 항의를 받은 명필름측은 「(중략)현재 한반도에는 이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건드려도 안 터질 가능성이 있는 그런 지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뢰는 밟는 즉시 폭발합니다(하략)」라는 자막도 넣을 예정이란 것이다.
『뭔가 미흡하고 공부도 더 해야…』
많은 비평가들이 말했듯이 이 영화의 미덕은 현실과 낭만적 휴머니즘 사이의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하는 솔직성, 이념적으로 편향되기 쉬운 장면과 대사의 절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이 영화를 보면 전쟁체험이 없는 신세대가 북한체제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이념에 대한 공포감이 앞서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우리 사회가 양산한 결과물이라 여겨질 수 있도록 영화는 남한 사회의 인물들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북한측 주인공인 오경필은 북한에서도 예외적인 인물이다. 이 부분이 관객들의 공감대를 오히려 확산시켰다.
메시지 전달이 강한 영화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이 영화의 眞意(진의)에 대해 갸웃거릴 것이다. 남한을 비판하는 듯하면서도 북한을 편들지 않는 어색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朴감독은 『아무런 정치적 입장이 없다는 것은 한마디로 밥맛 없는 기회주의자이지만, 예술가로서는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한국처럼 체제와 反체제만 존재하는 듯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非체제가 살아남아야 영화든 문학이든 창조할 기회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 非체제적인 인물임을 다시 한번 고백한 셈이다.
분단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영화로 분단을 다룬다는 데 대한 느낌을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막상 해놓고 보니 역시 어렵다는 걸 실감해요. 각본을 짜는 데만도 1년이 넘었는데 그래도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뭔가 미흡하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자기가 하고픈 영화에만 관심을 쏟았던 朴贊郁의 대학생활은 기성세대가 몸으로 지키며 구축한 체제 속에서 기성세대가 원하는 태도로 학창생활을 자유롭게 보낸 인물의 전형이다.
朴贊郁 감독은 견고하게 맞붙어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의 단단한 보도블록 틈 사이로 뿌리내린 작은 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非체제적 사고를 통해 만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보도블록 사이에 핀 꽃인 셈이다. 남한의 自由民主主義라는 열려진 보도블록의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흥행에 성공한 영화란 우리 사회의 내면을 제대로 비쳐주는 거울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비춰주는 우리의 내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朴贊郁 감독처럼 새로운 세대의 맑은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어 간다면 머지않아 그들의 손에 의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소재로 한 제2의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가 또다른 「대박」을 터뜨리며 나올 수 있다는 희망도 확실히 가져볼 만하다. 노벨 평화상뿐 아니라 아카데미 상도 기대해 볼만 하지 않겠는가. 朴감독과 헤어지는 순간 기성세대의 품을 떠나 날개를 펴고 불안한 듯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를 보는 느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