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에서도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나 敵을 만들지 않는 사람
프로야구 3대 高手로 꼽히는 고스톱의 大家,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성격, 공 쥔 손으로 심판을 때려 12경기 출장 정지를 받은 다혈질 감독, 국가대표 한 번 못해본 그저 그런 선수 출신 감독. 그러나 승부라 생각하면 부부싸움에서도 반드시 이기는 사람. 그런 李감독이 큰 승부인 한국 시리즈에선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선수를 믿고 맡겨 두었다
승부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자신 스스로에게 승부를 걸어 성취도를 느끼는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상대와 고도의 심리전을 즐기는 축도 있다. 「수읽기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대체로 後者(후자) 쪽이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를 첫 우승으로 이끈 李熙守(이희수·51) 감독은 한때 「프로야구 3대 高手(고수)」로 불릴 만큼 고스톱의 大家(대가)였다. 감독이 된 이후에는 자제하고 있지만 심심풀이로라도 한번 붙었다 하면 그의 빠른 계산에 두 손 들고 물러선 야구인이 한둘 아니다. 두 번 정도 패가 돈 뒤에는 상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떻게 쳐야 모두에게 피해가 최소화되는지 수를 훤히 읽는다. 프로야구 3대 高手로 꼽히는 고스톱의 大家,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성격, 공 쥔 손으로 심판을 때려 12경기 출장 정지를 받은 다혈질 감독, 국가대표 한 번 못해본 그저 그런 선수 출신 감독. 그러나 승부라 생각하면 부부싸움에서도 반드시 이기는 사람. 그런 李감독이 큰 승부인 한국 시리즈에선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선수를 믿고 맡겨 두었다
프로야구계에서는 10여년 전 앞서 말한 3대 高手가 하룻밤을 꼬박 새워 누가 최고의 꾼인지를 겨뤄본 일화가 아직도 얘깃거리로 남아 있다. 李감독에 따르면 高手끼리 쳐봐야 나오느니 무효판이요, 승자도 패자도 없더라나.
상대의 패를 읽는 데 천재적으로 소문난 李감독은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원칙을 세워놓았다. 우선 詐術(사술)을 부리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한다. 또 졌으면 깨끗하게 승복할 일이지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판을 벌이지 않는다. 주머니가 비었으면 아예 끼어들지 않는다. 그 원칙에는 지금껏 변함이 없다.
이런 李熙守 감독의 인물상은 프로야구계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천안북일고 감독이었다가 1984년 롯데 코치를 시작으로 1987년부터 한화(1993년까지의 팀 명칭은 빙그레)에 몸담으면서 프로야구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작전 코치, 2군 감독, 수석코치, 1군 감독 등 여러 보직을 두루 거쳤지만 그중 李감독에 가장 어울리는 이미지로 상당수 사람들이 작전 코치를 꼽고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야구에서 작전 코치는 주로 3루에 나가 있는 베이스 코치다. 3루 코치의 원래 임무는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으로부터 나오는 각종 작전을 선수들에게 사인으로 지시하는 일이다. 센스 있고 눈치가 빠른 코치들은 그 와중에서도 상대방 더그아웃의 분위기와 작전을 감지해 내고 그날의 키(Key) 사인을 파악해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3루 코치가 코를 만졌다가, 모자로 옮겼다가 다시 벨트를 만지는 등 요란한 몸짓을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상대방에게 들키는 것을 우려한 위장일 뿐이고 그날의 포인트는 단 하나다. 그게 바로 키 사인이다.
그런데 李감독이 3루 코치로 뛰던 시절, 상대방 벤치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데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自他(자타)가 공인하는 프로야구 최고의 3루 코치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 李감독은 최근 『올해 한국 시리즈 3차전에서 롯데에게 연장전 끝에 1점차로 아깝게 패한 날 밤새 단 한숨도 못 잤다. 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실수 때문』이라고 실토했다. 과연 그 실수가 무엇일까. 분명 상대방의 키 사인을 눈치챘는데도 순간적으로 깜빡하는 바람에 그에 대비하지 못한 것이 패배로 연결됐고 그것이 억울해 잠이 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그의 승부근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감독으로선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그는 감독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덕목 중에서 수읽기 쪽으로 지나치게 발달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프로야구 감독직이란 여러 가지의 능력을 요구한다. 팀을 이끌기 위해서는 보스 기질도 있어야 하고 對人(대인) 관계도 원만해야 하며 사교적인 이미지가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李熙守 감독은 화술이 뛰어난 것도 외모가 출중한 것도 아니다. 의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지만 선수단을 휘어잡을 만한 카리스마는 없다.
급한 성격
이런 단점들을 커버하고 결국 그가 모든 야구인이 갈망하는 프로야구 감독의 자리에 오른 것은 통칭 감각으로 통하는 수읽기와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모나지 않은 對人관계 덕분이다. 李熙守 감독은 성격이 아주 급한 편이다. 잠시도 참지를 못한다. 약속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빨리 안 오냐고 채근하는 전화가 서너 번은 온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말이다.
李감독은 성격이 급한 이유에 대해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끼어들고 봤다. 이런 성격은 감독이 되고 나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선수들이 연습 때 미적미적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배팅볼(타자들의 타격 연습을 도와주기 위해 던져주는 공)은 보통 코치나 지원요원이 던져주지만 李감독은 자신이 던져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이를 후회한다. 감독은 자신의 성향에 관계없이 감독으로서의 직분이 있다는 것과 감독이 배팅볼을 던지면 코치들이 할 일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예민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감독이 코치의 일까지 자처하고 나선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소탈한 일면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자칫 영역 침범으로 오해받을 소지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한화는 코칭 스태프간의 화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李감독은 이에 대해 『「내가 먼저 나서면 늬들도 따라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인데 이것이 나쁜 쪽으로 발전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시인했다.
李감독은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시기로 1994년을 꼽는다. 당시 한화는 팀 이름을 빙그레에서 한화로 바꾸는 한편 신임 강병철 감독을 영입하면서 대부분의 코치진을 개편,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李감독의 경우는 워낙 오래 한화에 몸담았던 터라 留任(유임)됐다.
공 쥔 손으로 심판 폭행
그러나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모 코치가 『李코치가 前任(전임) 감독을 再영입하려고 한다』고 소문을 냈고 이것이 지방의 어느 신문에 보도됐다. 이때부터 李코치는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오해를 받기 시작했으며 한때는 그만둘 생각으로 구단의 고위간부에게 이를 털어놓기도 했다. 구단의 만류를 받아들인 李감독은 대신 1군을 떠나 2군 감독으로 보직을 바꿨다. 『언젠가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괴로웠다』고 회고한다.
올해 한화 코칭 스태프에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알 만한 야구인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것은 태생적인 문제였다. 한화 구단은 지난해 시즌 도중 성적 부진과 분위기 쇄신이라는 이유로 강병철 감독을 해임했다. 그 大權(대권)을 물려받은 것이 李熙守 감독代行(대행)이었다. 완전한 감독이 아니라 「代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구단도 정식 감독이 누가 될지는 시즌이 끝난 뒤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감독代行이 되고 나서 처음에 반짝했던 한화는 4强(강) 진출 목전에서 시즌 막바지에 8연패를 당해 7위로 주저앉았고 이 때문에 누가 감독이 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李熙守 감독代行을 지지하는 쪽과 또 다른 코치의 감독 승진을 미는 쪽으로 구단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한동안 오리무중이던 이 사태는 李감독代行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코치진의 구성에서 고위층과 李감독의 의견이 엇갈렸다. 李감독의 주장은 『내가 생각하는 야구觀(관)을 펼칠 수 있게 원하는 코치를 뽑아달라』는 것이었고 구단의 고위층은 『감독으로 밀어줬으면 코치선임권은 구단에 넘겨라』는 방향이었다. 이 때문에 「성격 급한」 李감독이 『정 그렇다면 감독직을 사양하겠다』며 맞섰다. 이것 역시 주위의 간곡한 만류로 없었던 일이 됐지만 그는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구단에 약점을 잡힌 꼴이 됐다. 구단의 의도대로 코치가 구성됐음은 물론이다.
프로야구는 대체로 감독이 바뀌면 새 감독의 성향에 맞는 코치들이 줄줄이 따라 옮긴다. 놀고 있던 실업자 야구인들이 감독이 바뀌는 팀에 새로 둥지를 틀기도 하고 어느 코치는 한순간에 실업자가 되기도 한다. 모든 야구인들이 감독의 이동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며 감독의 파워를 재는 척도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뜻과는 달리 組閣(조각)이 됐으니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야구단은 성적이 좋으면 아무리 허술한 조직과 인력관리를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성적이 나쁘면 어떤 명문팀(성적뿐만 아니라 조직관리와 경영능력까지 포함)이라도 문제의 팀으로 낙인이 찍히고 좋지 않은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게 마련이다.
한화의 올시즌 출발은 좋았다. 4월에는 매직리그 1~2위를 오가며 좋은 성적을 냈다. 문제는 5월부터 시작됐다. 홈구장인 대전구장에서 10연패를 당하며 추락을 거듭했다. 5월21일 사건이 발생했다. 李熙守 감독이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공 쥔 손으로 한 차례 때린 것이다. 프로야구에서 보기 드문 사건이라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이때 그룹이 재빨리 움직였다. 한화그룹은 金昇淵(김승연) 회장) 명의로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각계에 공개 사과문을 보냈고 신문에 사과 광고도 게재했다.
『우리 감독은 데이터를 너무 안 본다』
12경기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당한 李감독도 공식으로 사과의 뜻을 밝히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로써 감독의 발언권과 입지가 좁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부터 야구계에는 「李熙守 감독이 해임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구체적인 정황 증거까지 제시했다. 소문이란 반사이익을 챙기는 쪽에서 의도적으로 흘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그런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구계에서 참견하기 좋아하고 늘 이런저런 얘기를 몰고 다니는 야구인 모씨가 한화구단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참에 감독을 해임하고 ○○○씨를 감독으로 선임하라고 은근한 협박이 실린 권유를 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화구단의 이남헌 사장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성격. 『책임은 내가 진다. 당신들은 우리 구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대응했다.
李사장의 분명한 대응이 있었음에도 그 야구인이 추천한 ○○○씨와 그를 따르는 코치들은 사태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했다. 정말로 감독이 바뀌는 것으로 착각, 허세를 부리고 다녔다. 누가 새로 감독이 되고 어느 코치에는 누가 선임되며 누구는 어떤 직책을 맡는다더라는 내용이 아주 구체적으로 떠돌았다. 감독은 허수아비요, 실세는 따로 있다는 말이 돌았으며 매일같이 선수단과 얼굴을 대하는 심판들도 『한화에는 감독이 따로 있는 것 같더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가끔은 李감독이 전혀 모르는 일들이 은밀하게 진행됐다. 분위기에 예민한 선수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서로 겉도는 듯한 코칭 스태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것이 거꾸로 선수들이 단합하는 계기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데는 李감독의 책임도 있다. 보다 강력하게 대응했더라면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아낼 수도 있었으나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이 부분에 대해 李감독은 『일단 우리 팀이 좋은 성적을 내면 구단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할 얘기는 다 하겠다』고 했으니 한화 사상 첫 우승을 이끌고 난 이제부터 그의 발언을 지켜볼 일이다.
球團(구단)이 먼저 감독의 입지를 좁히려 했다는 사실은 다음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야구단의 감독은 과연 어느 직급에 해당하는지는 야구계에서 해묵은 논란거리였다. 결론은 대체로 야구 감독은 단장급이라는 것. 감독을 필드 매니저, 단장을 제너럴 매니저로 부르는 메이저 리그의 예를 국내에도 원용했을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화 李熙守 감독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과장이나 차장 부장 직급의 간부가 기자들에게 『우리 감독은 데이터를 너무 안 본다』며 은근히 비난을 하고 다닌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정규 시즌이 끝난 뒤 성적에 따른 보너스를 분배할 때 감독과 코치를 같은 액수로 나눴다는 소문은 말 많은 야구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 윗선도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한화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어느 야구인은 『李감독은 고립무원의 처지』라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올해 한화 2군이 우승을 차지하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1군의 우승에 공헌한 점을 球團이 고려해 격려금을 주는 것이 어떠냐는 李감독의 의견이 이런 실정에서 제대로 반영될 리는 만무한 일.
포스트 시즌에서 변신
한화 球團의 입김이 세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지난 겨울 주력 투수 중의 한 명인 노장진을 삼성으로 넘겨주고 외야수 최익성을 받아들이는 트레이드를 할 때 李熙守 감독을 비롯한 현장은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밝혔음에도 球團은 이를 강행했다. 한화는 올해 선발투수가 부족해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삼성으로 옮겨간 노장진은 올해 삼성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은 15승을 따냈다. 감독은 어떻게 보면 야구단의 얼굴이고, 그 감독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 결국 야구단이나 母(모)그룹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망각한 처사다.
어쨌거나 시즌이 한창일 무렵 터진 내분에도 불구하고 한화는 정규시즌에서 삼성에 이어 매직리그 2위를 차지한 뒤 두산과의 플레이오프를 4연승으로 가볍게 통과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 롯데를 4승 1패로 따돌리고 팀 14년 역사상 처음 우승을 차지했다.
정규시즌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의미의 「총알」 덕분이었다. 총알이란 야구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투수에 대한 속어이고 또다른 총알은 보너스나 격려금을 선수들이 부르는 말이다. 정민철 구대성 송진우 등 투수력이 뛰어났고 유통업체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이남헌 사장의 베팅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했다는 것은 한화 선수단이 시인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포스트 시즌에서 두드러진 李熙守 감독의 변신이었다. 승부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페넌트 레이스에선 고등학교 야구를 한다느니, 작전을 너무 많이 펼친다느니 하는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李熙守 감독. 그룹 내에서조차 『색깔이 없다』며 시즌 내내 눈총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적어도 포스트 시즌에서의 李熙守 감독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웬만하면 선수들에게 맡기고 작전 구사를 극도로 자제했다. 상대방의 벤치가 誤判(오판), 자충수를 둘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했고 이 승부수가 맞아 떨어졌다. 『감독이 달라졌다』고 선수들이 놀랐다.
동기생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인 河日成(하일성) KBS 해설위원은 『한화가 플레이오프나 한국시리즈를 치를 때 李감독이 주무르면 진다고 봤는데 어떻게 그렇게 느긋하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이 부분도 한화의 우승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단언했다.
『첫 게임은 솔직히 떨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두 번째 게임부터는 페넌트 레이스보다 마음이 편해졌다』고 밝힌 李감독은 역시 「판」이 커져야 투지가 솟는 노름꾼인 모양이다.
李감독은 『내가 만약 야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연예계에 뛰어들었을 것』이란 얘기를 하곤 하는데 자신이 직접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無名(무명)을 발굴해 키우는 매니저가 제격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보다는 뭔가 스릴 있고 모험을 걸 만한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국가대표는 한 번도 못 지내
이제 그가 살아온 길과 살아가는 주변을 얘기해 보자. 李熙守 감독은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이 畸形(기형)이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농협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당시에 다쳤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바로 그 손가락을 갖고 놀리는 적이 많다. 그럴 때마다 『이 손가락을 갖고도 나는 다른 선수보다 훨씬 열심히 했고 또 잘했다고 자부한다』고 응수한다.
1948년 1월17일생. 원래 고향은 부산이며 대동중학교 1학년 때 배구선수였다가 야구감독의 권유로 2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부산工高(공고)에 입학해 1학년을 뛰었으나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서울의 성남고로 옮겼다. 공교롭게도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맞선 롯데의 사령탑 김명성 감독이 부산工高 2년 선배다. 그러나 부산工高를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고 李熙守 감독 하면 성남고를 졸업하고 출세한 야구인으로 꼽힌다.
선수 시절 3루와 2루수를 번갈아 맡아 재치 있고 경기를 읽는 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것이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성남고 졸업 후에는 農協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해병대에 입대했다. 1972년 제대 후 農協에 복귀했다가 1977년 20대의 나이로 천안북일고 창단 감독에 부임했다. 선수 시절 국가대표 후보 명단에는 항시 끼었다가 최종 평가전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바람에 단 한 번도 국가대표를 지낸 적은 없다. 당시 강병철씨 등 워낙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렸기 때문이고 이것은 李감독이 영원히 풀지 못할 恨(한)으로 남아 있다. 1978년, 나중에 프로야구에서 오랫동안 감독으로 모셨던 김영덕씨가 천안북일고 감독으로 오는 바람에 1년 남짓 다시 農協으로 복귀했다가 김영덕 감독의 권유로 북일고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한화그룹의 인물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으며 현재 이남헌 사장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김승연 회장이 북일고에 쏟는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에 북일고 감독 경력이 많다는 것은 상당한 강점이다. 또 고교 무대에서 북일고가 강자로 대접받았던 게 이 시절이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 김영덕 감독이 OB의 사령탑으로 떠난 이후 1983년까지 북일고 감독으로 재직했다. 1984년 롯데의 코치로 프로와 인연을 맺기 시작. 이후 1987년부터 오늘날까지 한화에서 코치·감독을 맡고 있다. 한 번도 팀을 옮겨본 적이 없다. 감독직은 내년까지 계약돼 있으며 계약금과 연봉이 각각 8천만원이다.
李감독의 특징 중 하나는 절대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카드를 딱 한번 만들어본 적이 있으나 워낙 사용실적이 없어 부인(김정숙씨)이 잘라 버렸다. 카드를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李감독은 자신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남에게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활신조를 갖고 있는데 워낙 술을 좋아하다 보니 절제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운전기사나 음지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철마다 용돈을 집어준다. 그렇다고 아랫사람을 다스릴 때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과 술마시는 것을 즐기는데 음주습관에서도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앞에 잔이 채워지면 참지 못하고 마시고 곧바로 상대방에게 권해야 직성이 풀린다. 술마실 때마다 하는 한 마디는 『술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마시는 것이며 따라서 즐겁게 마셔야 한다』는 것.
그러나 가정에서는 「꼽표」(李감독은 X표시를 이렇게 불렀다)라는 게 자신에게 내린 평가. 워낙 남의 일에 앞장서기를 즐기다 보니 가정에 충실할 시간과 여력이 없었다고. 대신 젊었을 때는 부부싸움에서도 늘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해왔으나 나이가 들면서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것이 훨씬 마음 편하더라고 고백한다.
부인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술값으로 나가는 용돈이 적지 않기 때문.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끝까지 보답해야 한다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사고방식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과 하는 술자리는 늘 밤 늦게까지 이어지고 성격 급한 그가 계산을 하는데야 화수분이 아닌 이상 살림을 하는 입장에서는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는 없다. 李감독은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과 高 3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요즘 李감독은 둘째가 걱정이다. 아버지가 이끄는 팀이 어떻게 되는지 신경쓰느라 도통 공부를 못한다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한화가 포스트 시즌에서 중요한 경기를 계속할 때는 담임선생님에게 『야구에 신경이 쓰여 공부가 안된다』며 조퇴해서 야구중계를 봤다는 말도 李감독은 들었다.
이 때문에 李감독은 최근들어 『야구감독을 그만두면 절대로 야구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적어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자식이나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야구가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준 만큼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욕은 앞에서, 칭찬은 뒤에서 하라』
李감독의 특징은 단순함이라고 할 수 있다. 李熙守 감독은 어떤 문제에 대해 그리 오랫동안 생각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원칙에 맞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져본 뒤 곧바로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인간생활에서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으로 작용할 경우도 있다. 보스는 때로 신중하고 사려 깊은 측면이 필요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아니다.
그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하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실천하는 일종의 교조주의자다. 그와 대화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하는 것이 원칙 아녜요?』라는 반문이다. 선수단을 통솔하는 데서도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만약 어떤 선수가 상당한 부진에 빠졌을 때 李감독은 선수와 해당코치를 불러 꼭 이 얘기를 해준다.
『이 상황을 놓고 보자.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첫번째는 선수요, 두 번째는 코치, 세 번째가 감독이다. 본인이야 오죽하겠는가. 스스로 헤쳐나가고 윗 사람은 인간적으로 미워하지 말라』
그리고 당사자가 없는 데서 뒷얘기를 하는 것을 싫어한다. 욕은 앞에서 하고 칭찬은 뒤에서 하라는 「원칙」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어쨌거나 李熙守 감독은 자신의 표현대로 야구 인생에서 올해 최고의 해를 보내고 있다. 내년에도 올해 같은 영화가 되풀이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올해 그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운이 따랐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올해의 성공에는 운도 따랐고 고비마다 상대팀들의 도움도 있었다. 스포츠는 어차피 상대적인 것. 내가 잘해서 이기는 경우가 있고 상대가 못했기 때문에 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한화의 경우는 경쟁관계에 있는 팀을 다른 팀이 고비 때마다 발목을 잡아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
『우리 감독이 인간적인 것은 참 잘한다. 우리를 미워하는 팀은 없지 않느냐』는 한화 某코치의 말도 결국 李감독의 對人관계를 설명하는 것. 그 원인이 한화가 强者처럼 보이지 않아 견제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감독 개인적인 인간관리 덕분일 수도 있지만 야구단의 1년 종합평가 항목 가운데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