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는 6·25 때 行不, 넷째 형은 불교居士, 한 형수는 일본인, 「천하의 개구쟁이」 JP의 어릴 적 별명은 「틀물레」 「댕고」
●公州中에서 八方美人… 급장·최우등권·검도대표선수·스트라이크 주동·만돌린의 명수
●두 번 교사 생활·한국 최초의 마이카族·서울사대에서 제적·실연·사병으로 입대한 뒤 탈영·재입대
金鍾泌의 「무덤」●公州中에서 八方美人… 급장·최우등권·검도대표선수·스트라이크 주동·만돌린의 명수
●두 번 교사 생활·한국 최초의 마이카族·서울사대에서 제적·실연·사병으로 입대한 뒤 탈영·재입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있어서 金鍾泌(김종필·73) 총리만큼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온 이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金鍾泌의 삶은 주로 5·16 이후 40년 가까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비쳐진 그의 굴곡 많은 행로이다. 그의 삶 또다른 절반의 기간에 해당하는 5·16 이전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현재의 한 인간이란, 그의 출생에서 부터 단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경험과 인식의 결과물이라면, 5·16 군사혁명 이전의 「소년 김종필」, 「청년 김종필」은 현재의 「정치인 김종필」의 原形(원형)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인간 金鍾泌의 원형을 찾아 그의 성장기와 일곱 형제들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들을 쫓아갈 것이다.
충남 부여읍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걸리는 후미진 동네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그 마을 뒤 玉女峰(옥녀봉)이라는 산 발치에 잔디로 깔끔하게 단장된 가족묘가 있다. 최소한 3代(대)가 계단식으로 묘를 쓸 수 있게 이미 터가 닦여져 있는 이곳에 金鍾泌 총리의 장래 무덤이 마련되어 있다. 金총리의 형제들이 묻힐 맨 윗계단에는 벌써 화강암으로 각자의 묘소 자리가 잡혀져 있고, 작고한 金총리의 형과 형수들의 묘엔 검은색 화강암 비석이 서 있다.
金총리가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절대 국립묘지에 안 갈 거야. 이 고향, 부모님 산소 밑에 묻힐 거야…』
그래서 이 가족묘도 金총리가 1990년대 들어 제안해 만든 것으로, 앞으로는 이곳에 납골당을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 상태에서도 한 基(기)의 묘소라고 해봤자 불과 두어 평 정도로 촘촘이 자리가 잡혀 있어 그저 단아하다고 할 정도인데 그 자리 차지하는 면적을 더 줄이겠다는 얘기다. 각 묘소는 부부를 合葬(합장)하도록 되어 있고, 가족묘에서 산 위로 50m쯤 떨어진 곳에 金총리의 부모(金相培-李貞薰) 묘소가 있었다.
6월4일, 부여가 전국 최고기온을 기록한 이날 기자와 金총리의 가족묘까지 동행한 이는 金海金氏(김해김씨) 駕洛(가락) 부여군 종친회 회장 金順泰씨(72)였다. 金총리가 아저씨뻘 된다는 그와 기자는 산비탈에 같이 앉아 金총리 가족들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가 말했다.
『총리님 祖父(조부)가 청양에서 이 동네로 이사와 천 석을 일궜어요. 안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는데 그렇게 근검절약했다고 합니다. 총리도 참 힘들게 산 사람이지요. 朴正熙(박정희)한테 그렇게 구박받고 하면서도 아직도 뭔가 해보겠다고 저리 애쓰니…. 기자 양반, 어째 한 번 할 거 같습니까?』
부여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기자가 『총리가 혁명할 때는 나이가 겨우 서른 다섯이었지요. 총리를 가까이서 보니 목숨걸고 혁명을 할 만큼 굳세고 과감한 사람처럼 보이던가요』라고 물었더니 『글쎄 말이여』라고 말을 흐렸다.
『우리도 모르지요. 근데 사람은 역시 좀 멀리서 봐야 혀요. 호랑이도 길거리에 돌아다니면 개처럼 보이지 누가 호랑이라고 그러겠어요. 호랑이는 산 속에 숨어있어야 호랑이지…. 총리 맘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우리는 모르지요. 그저 손주들하고 놀고 얘기하는 걸 보면 보통 할아버지와 하나 다른 게 없고 그런 사람인데 말이여…』
아버지를 가슴 속에…
金鍾泌 총리는 그 자신이 예비역 장군(1963년 1월5일 준장으로 진급하고 그날로 전역)이고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지내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이 있다. 하지만 굳이 고향 先山(선산), 부모 발치를 고집하는 것은 그가 가진 고향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고 한다. 5·16으로 金총리가 권세를 잡고 나서 바로 한 일 중 하나가, 지금 부여의 백마강 옆 구룡평야 둑을 쌓은 것인데, 金順泰씨는 『해마다 물이 넘쳐 농사를 지을 수 없던 것을 총리가 했다』면서 『총리는 흙에 대한 애착이 큰 분』이라고 말했다.
그의 형인 金鍾珞(김종락·80·前 야구협회 회장)씨는, 金총리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자신을 끔찍이도 아꼈던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늘 부담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부친은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金총리에게 애정을 쏟았고, 학교에 다닐 때는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병이나 다름없다고 의사들이 포기했던 金총리를 한 달 동안 같이 자면서 고쳤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 사람이 다 클 때까지도 각별하게 보았고, 때론 엄하게도 키웠지만 귀여워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1947년)는 임종을 못한 게 형제들 중 그 사람뿐이어서 그게 아마 가슴에 늘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金총리 자신이 과거에 한 술회에 따르면 부친은 金총리에게 『이놈이 그래도 내 뜻을 펴줄 놈이야』하고 대견해 했다고 한다. 그의 형인 金鍾翊(김종익) 전 의원도 『아버지가 가끔 형제들을 나란히 무릎에 앉혀놓고 훈계를 하는데 그 괴롭고 길었던 시간 동안 코를 훌쩍 이면서도 끝까지 자세를 헝클어뜨리지 않는 것은 언제나 종필이뿐이었다』면서 『그 때문에 아버지는 형제 중에서도 종필이에 대한 기대가 가장 컸다』고 말했다.
金총리의 이 시절 별명은 「틀물레」라거나 「댕고」라는 것이었다. 워낙 고집이 세고 장난이 심해 야단을 많이 맞았는데, 아무리 야단맞아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참아낸다는 것이 「틀물레」라고 한다. 金鍾珞씨에게 「댕고」가 뭐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붙여준 건데 아무 뜻도 없는 그냥 댕고』라고 했다.
『한번 성질을 부리면 풀지 않는다는 뜻이야. 요새는 유해서 타협을 잘한다고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속은 안그래. 안하면 안했지…. 어려서부터 그랬어』
金鍾珞씨는 이런 기억도 갖고 있다.
『鍾翊(종익) 형하고 나하고 부여읍내에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 가려면 꼭 JP가 따라오려고 그래. 떼놓고 가려고 해도 악착같이 쫓아와. 학교에 따라와서는 입학도 안한 애가 내 책상 옆에 앉아 있어. 공부를 하는지 안하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성질이 유별났지』
그렇게 고집이 셌던 金총리는 동네 개구쟁이로도 소문나 있었다.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자기가 꼭 대장이 되었다고 한다. 동네 애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일본아이를 두들겨 패 밤낮으로 울렸는데, 이때문에 어머니가 그집에 가서 빌곤 했다는 것이다.
그와 초등학교(金총리가 다니던 1932년∼1938년 당시의 이름은 부여공립보통학교) 동기인 金容達씨(김용달·74·부여 규암신용협동조합 이사장)도 金총리를 「惡童(악동)」으로 기억한다.
『엄청스럽게 개구쟁이였습니다. 얼마나 장난질을 많이 했는지, 새 집을 지어놓으면 거기다가 똥 같은 걸 발라놓고 그랬어요. 나는 총리집 사랑방에서 함께 놀기도 했는데, 집 뒤 석류나무 석류를 따먹는다고 돌을 던지다 장독대도 숱하게 깨곤 했지요. 공부요? 참 잘했어요. 성적도 좋았고』
金총리는 조숙하기도 했다. 역시 초등학교 동기인 李祥基(이상기·77·부여에서 법무사 활동)씨는 『총리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서울사범을 나온 여선생에게 반해서 쫓아다니곤 했다』면서 『李種順(이종순)이라는 이름의 그 여선생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뾰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