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의 그림 속 사물엔 정해진 의미 없어… 대표적인 오해”(닐 스프링햄 영국 NHS 미술치료 총책임자)
⊙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건 분단, 전쟁, 가난 등 겪으면서 생긴 집단적 트라우마 영향인 듯”
⊙ “韓 미술치료 연구 수준 높아… 국가 공인 미술치료사 자격 도입할 때”
닐 스프링햄(Neil Springham) 박사
영국 옥슬리스 국민보건서비스(NHS) 치료·환자경험 총괄 책임자, 런던 베슬램 갤러리 이사장, 前 영국미술치료학회(BAAT) 회장, 前 골드스미스 런던대 미술심리치료학과 학과장
林盛倫 교수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 디지털미디어학 학사, 플로리다주립대 예술행정 석사, 플로리다주립대 미술교육·예술행정 박사 / 평택대 미술치료학과 교수, 한국미술치료학회 국제교류위원장, 한국예술경영학회 총무이사, 인디애나대 방문연구원, School of Public Health, Indiana University - Bloomington 《Arts in Psychotherapy》 저널 심사위원 / 저서 《예술심리상담사를 위한 ETC 자기돌봄》
⊙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건 분단, 전쟁, 가난 등 겪으면서 생긴 집단적 트라우마 영향인 듯”
⊙ “韓 미술치료 연구 수준 높아… 국가 공인 미술치료사 자격 도입할 때”
닐 스프링햄(Neil Springham) 박사
영국 옥슬리스 국민보건서비스(NHS) 치료·환자경험 총괄 책임자, 런던 베슬램 갤러리 이사장, 前 영국미술치료학회(BAAT) 회장, 前 골드스미스 런던대 미술심리치료학과 학과장
林盛倫 교수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 디지털미디어학 학사, 플로리다주립대 예술행정 석사, 플로리다주립대 미술교육·예술행정 박사 / 평택대 미술치료학과 교수, 한국미술치료학회 국제교류위원장, 한국예술경영학회 총무이사, 인디애나대 방문연구원, School of Public Health, Indiana University - Bloomington 《Arts in Psychotherapy》 저널 심사위원 / 저서 《예술심리상담사를 위한 ETC 자기돌봄》
- 닐 스프링햄 박사(사진 왼쪽). 임성윤 평택대 미술치료학과 교수. 사진=월간조선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을 본 이들이라면 으레 기억할 장면이다. 기정(박소담 분)은 연교(조여정 분)의 집에 미술 교사로 취업한 첫날 대문 앞에서 자신의 동생과 이 노래를 맞춰 부른다. 이어 기정은 연교의 아들 다송(정현준 분)이 그린 그림을 보고 다송이 ‘신경정신과적 징후’가 있다고 분석한다.
기정처럼 미술활동을 통해 그림 그린 사람의 심리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을 ‘미술치료(art therapy)’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한국의 건강보험공단 격) 미술치료 총괄책임자인 닐 스프링햄 박사는 영화의 이 장면이 “실제 미술치료 방법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미술치료는 환자 그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환자와의 ‘관계 만들기’”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미술치료 진행 과정과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스프링햄 박사는 어린 시절 난독증(難讀症)이 심해 ‘어리석은 놈’ ‘게으른 놈’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미술이었다. 미대에 진학해 미술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차츰 몸과 마음이 안정돼 갔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로 사람들을 치유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스프링햄 박사는 2024년 10월 말 한국미술치료학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국내 대학과 학회에서 강연했다. 미술치료 연구자들과도 만나 노하우를 주고받았다. 한국미술치료학회는 회원 2만여 명으로 구성된 국내 대표적인 미술치료학회로 지난 1992년 창립됐다.
지난 10월 28일 스프링햄 박사를 임성윤 평택대 미술치료학과 교수와 함께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림 그려보라고 하면 혼란스러워 해”
― 여러 매체를 통해 미술치료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요. 미술치료란 정확히 어떤 개념인가요?
“많은 사람이 미술치료라고 하면 그림을 그려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어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자격을 갖춘 치료사가 대화를 통해 환자와 감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서로 생각을 나눕니다. 미술치료는 치료사와 환자 사이의 상담 그리고 예술행위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죠.”
― 영화 〈기생충〉의 미술치료 장면은 실제와 어떻게 다른가요?
“미술치료는 환자가 그림을 그리고 치료사가 이를 분석해 어떤 증상이 있는지 판단하는 치료법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미술치료는 치료사와 환자 사이 대화가 우선시돼야 하는 분야죠.”
스프링햄 박사의 말에 따르면, 미술치료는 개인의 억압된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 감정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이를 삶에 적용해 나가면서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사는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 미술치료사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첫인상은 어떻습니까?
“환자 대다수는 일생 미술을 접해 본 적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그려보라고 하면 약간 혼란스러워 합니다. 자신의 그림을 평가받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 증세를 보이죠. 마치 저를 미술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듯해요. 이 때문에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먼저 갖습니다. 그다음 이 치료의 목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그 뒤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정신과의 약물치료와 상호보완적”
― 환자가 그린 A라는 사물이 정형화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순 없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환자가 그린 그림 속 사물의 정해진 의미는 없습니다. 또 환자가 빨간색을 사용했다고 ‘화가 많구나’, 검은색을 사용했다고 ‘우울하구나’ 이런 식의 일반화도 곤란합니다. 미술치료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죠.”
― 미술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질환을 앓고 있습니까?
“일반적인 불안이나 우울, 공황장애 등 감정조절장애나 성격장애부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나 학습장애, 치매, 조현병 등 다양합니다.”
― 미술치료는 일반적인 정신과 치료와 다른가요?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진단하고 약물로 치료합니다. 정신의학은 환자의 발현 증상에 따라 환자가 어떤 질환을 앓는지를 분류해 놨죠. 진단을 한 뒤 각 질환에 맞는 약물을 투여해 환자를 안정시킵니다. 반면 미술치료의 경우, 이 증상들의 근원을 알아내는 데 좀 더 집중합니다.”
― 보통 환자들의 정신질환 근원엔 어떤 것이 있나요?
“특정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대표적입니다. 이 트라우마가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 등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 미술치료로 호전 효과를 보려면 얼마나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
“약물치료와 달리 단기간에 증상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대화를 통해 치료사와 환자가 서로를 이해해야 하니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또 환자마다 표현하는 ‘예술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치료사가 이를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죠. 일반적으로 환자당 6~12차례 치료를 거치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입니다. 과거 만난 한 환자는 18개월 동안 치료를 하기도 했죠. 증상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 미술치료와 약물치료와의 관계도 궁금합니다.
“미술치료가 약물을 배척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죠. 과거 정신질환은 대부분 약물치료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 부작용이 대두하기 시작했어요. 영국 의료 당국은 최근 들어 환자에 투여하는 약물의 양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술치료는 이 같은 약물치료가 미처 짚지 못한 증상의 근원을 파고듭니다. 적절한 약물치료와 미술치료를 병행하면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英, 공공 미술치료 서비스 무료 제공
영국 NHS는 환자들에게 무료 미술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프링햄 박사는 NHS 런던 남동부 옥슬리스(Oxleas) 지역의 최고 심리치료 책임자로서 다양한 치료 분야에서 활동하는 900명의 치료사를 이끌고 있다. 그는 이 지역 주민 100만 명의 정신건강을 책임진다.
―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게 미술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니 인상적입니다.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만족도는 어떤가요?
“만족도는 높은 편입니다. 치료 효과를 보면 알 수 있죠. 치료 이후 이들에게 만족도를 직접 묻기도 하고요. 인지행동치료(CBT)나 정신의학 치료 효과와 비교했을 때 미술치료의 효과가 좋다고 말합니다. 환자 대다수의 증상이 나아지는 등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지만, 치료 과정이 길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하죠.”
―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요?
“극도의 성격장애와 분노조절장애로 판정된 32세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저희를 찾아왔을 때 거의 치료 불능 상태였죠.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CBT도 도움이 안 됐습니다. 문제는 그녀 역시 자신의 분노 원인을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죠. 그런 그녀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거부하다가 대화 이후 서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러더니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속의 응어리를 그림으로 분출하기 시작했어요. 18개월 동안 치료를 거쳐 그녀는 정상이 됐습니다. 그 뒤 뒤늦게 임상치료사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성격장애 치료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무료이다 보니 미술치료를 받으려는 대기 인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증상이 심할 경우엔 신청 3~4달 만에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아이들의 경우 수요가 높아 대기 기간이 더 긴 편입니다. ADHD 치료를 받으려면 3년 이상 기다리는 경우도 있어요.”
― 아이들의 경우 치료 시기가 중요할 텐데 차례를 기다리다가 적정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것 아닌가요?
“저희 역시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NHS가 아이들 대상 미술치료 서비스에 더 많이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논의가 실제 진행되고 있고요.”
“韓, ‘정신건강’ 범위 좁게 보는 듯”
세계 여러 나라가 자격을 갖춘 치료사에게 국가 공인 미술치료 자격증을 부여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국가 공인 미술치료 자격제도가 없다. 대신 각 학회나 협회별로 자체 자격증을 만들어 발급하고 있다. 임성윤 교수는 “민간 자격증이다 보니 돈만 내면 쉽게 딸 수 있는 것도 많다”며 “이 때문에 치료사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환자들이 질 높은 치료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 한국에 와서 미술치료 분야 관계자들과 만나보니 어땠습니까?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미술치료 연구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보니 한국의 미술치료 연구 수준이 굉장히 높다고 느꼈습니다. 연구자·치료사들의 열의와 실력도 대단하고요. 정부가 국가 공인 자격증을 만들면 한국 환자들도 질 높은 미술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 한국은 매년 자살률, 우울증 지표에서 OECD 상위권을 차지하곤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딸이 엄청난 K팝 팬이라서 제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무척 부러워했는데……. (웃음) 그만큼 한국은 문화적·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나라입니다. 한국인들이 현재 정신적으로 힘들어한다는 말을 저도 들었습니다. 분단, 전쟁, 가난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긴 집단적 트라우마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때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살았는데 이제 먹고살 만하니 그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죠. 2차 세계대전 당시 힘든 시절을 겪은 저희 부모님 세대, 패전을 겪고 다시 일어선 독일인, 공산 치하에 살았던 동독 사람들이 겪은 트라우마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 한국에서 미술치료가 확대되고 대중화되기 위해선 어떤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봅니까?
“이번 방문으로 본 바로는, 한국의 미술치료 연구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갖고 치료에 접근합니다. 연구 수준이 높죠. 이제 공은 정부에 넘어갔습니다. 제가 보기엔 한국 의료 당국은 ‘정신건강(mental health)’의 범위를 다소 좁게 보는 듯합니다. 한국의 정신건강 치료는 대부분 언어치료 등에 치중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NHS는 미술치료가 전체 정신치료의 9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합니다. 한국 또한 미술치료를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과 같은 수준의 치료법으로 인정하고 이에 맞는 제도를 구축해야 하죠. 실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미술치료는 정신의학과 병행되는 치료법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 역작 나오기도”
― 그런데 의아한 점도 있습니다. 미술치료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유명 화가들 가운데는 괴팍한 성격을 가졌거나 우울증 등을 앓은 이들도 있으니까요.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예술과 창의성, 광기(狂氣)에 대한 관계는 학계의 오랜 연구 주제입니다. 대표적으로 반 고흐가 있는데요. 예술활동은 ‘때론’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슬픈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수채화를 반복해서 그리면 우울감이 심화될 수 있죠. 반면 미술 덕에 정신 상태가 안정되어 삶을 더 발전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술사를 보면 실제 많은 화가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역작(力作)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 예를 들면요?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 (Ka˙˙the Kollwitz·1867~1945년)가 대표적이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이 죽자 큰 실의(失意)에 빠졌어요. 트라우마가 됐죠. 하지만 그녀는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그 충격을 이겨냈습니다. 미술이 준 치료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임성윤 교수가 “미술치료는 요리 레시피 책처럼 정해진 순서와 과정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미술치료는 굉장히 유연한 치료법”이라며 “그만큼 치료사와 환자 사이 유대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프링햄 박사 역시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치유법이 다양하다”며 “따라서 치료사는 환자를 깊이 파악하고 이에 맞는 치료법을 찾기 위해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을 본 이들이라면 으레 기억할 장면이다. 기정(박소담 분)은 연교(조여정 분)의 집에 미술 교사로 취업한 첫날 대문 앞에서 자신의 동생과 이 노래를 맞춰 부른다. 이어 기정은 연교의 아들 다송(정현준 분)이 그린 그림을 보고 다송이 ‘신경정신과적 징후’가 있다고 분석한다.
기정처럼 미술활동을 통해 그림 그린 사람의 심리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을 ‘미술치료(art therapy)’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한국의 건강보험공단 격) 미술치료 총괄책임자인 닐 스프링햄 박사는 영화의 이 장면이 “실제 미술치료 방법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미술치료는 환자 그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환자와의 ‘관계 만들기’”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미술치료 진행 과정과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스프링햄 박사는 어린 시절 난독증(難讀症)이 심해 ‘어리석은 놈’ ‘게으른 놈’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미술이었다. 미대에 진학해 미술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차츰 몸과 마음이 안정돼 갔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술로 사람들을 치유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스프링햄 박사는 2024년 10월 말 한국미술치료학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국내 대학과 학회에서 강연했다. 미술치료 연구자들과도 만나 노하우를 주고받았다. 한국미술치료학회는 회원 2만여 명으로 구성된 국내 대표적인 미술치료학회로 지난 1992년 창립됐다.
지난 10월 28일 스프링햄 박사를 임성윤 평택대 미술치료학과 교수와 함께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림 그려보라고 하면 혼란스러워 해”
― 여러 매체를 통해 미술치료가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요. 미술치료란 정확히 어떤 개념인가요?
“많은 사람이 미술치료라고 하면 그림을 그려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어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자격을 갖춘 치료사가 대화를 통해 환자와 감정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서로 생각을 나눕니다. 미술치료는 치료사와 환자 사이의 상담 그리고 예술행위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죠.”
― 영화 〈기생충〉의 미술치료 장면은 실제와 어떻게 다른가요?
“미술치료는 환자가 그림을 그리고 치료사가 이를 분석해 어떤 증상이 있는지 판단하는 치료법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미술치료는 치료사와 환자 사이 대화가 우선시돼야 하는 분야죠.”
스프링햄 박사의 말에 따르면, 미술치료는 개인의 억압된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 감정을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이를 삶에 적용해 나가면서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사는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 미술치료사를 찾아오는 환자들의 첫인상은 어떻습니까?
“환자 대다수는 일생 미술을 접해 본 적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을 그려보라고 하면 약간 혼란스러워 합니다. 자신의 그림을 평가받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 증세를 보이죠. 마치 저를 미술 선생님으로 생각하는 듯해요. 이 때문에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먼저 갖습니다. 그다음 이 치료의 목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그 뒤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정신과의 약물치료와 상호보완적”
― 환자가 그린 A라는 사물이 정형화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순 없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환자가 그린 그림 속 사물의 정해진 의미는 없습니다. 또 환자가 빨간색을 사용했다고 ‘화가 많구나’, 검은색을 사용했다고 ‘우울하구나’ 이런 식의 일반화도 곤란합니다. 미술치료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죠.”
― 미술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주로 어떤 질환을 앓고 있습니까?
“일반적인 불안이나 우울, 공황장애 등 감정조절장애나 성격장애부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나 학습장애, 치매, 조현병 등 다양합니다.”
― 미술치료는 일반적인 정신과 치료와 다른가요?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진단하고 약물로 치료합니다. 정신의학은 환자의 발현 증상에 따라 환자가 어떤 질환을 앓는지를 분류해 놨죠. 진단을 한 뒤 각 질환에 맞는 약물을 투여해 환자를 안정시킵니다. 반면 미술치료의 경우, 이 증상들의 근원을 알아내는 데 좀 더 집중합니다.”
― 보통 환자들의 정신질환 근원엔 어떤 것이 있나요?
“특정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대표적입니다. 이 트라우마가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 등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 미술치료로 호전 효과를 보려면 얼마나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
“약물치료와 달리 단기간에 증상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대화를 통해 치료사와 환자가 서로를 이해해야 하니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또 환자마다 표현하는 ‘예술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치료사가 이를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죠. 일반적으로 환자당 6~12차례 치료를 거치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입니다. 과거 만난 한 환자는 18개월 동안 치료를 하기도 했죠. 증상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 미술치료와 약물치료와의 관계도 궁금합니다.
“미술치료가 약물을 배척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죠. 과거 정신질환은 대부분 약물치료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 부작용이 대두하기 시작했어요. 영국 의료 당국은 최근 들어 환자에 투여하는 약물의 양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술치료는 이 같은 약물치료가 미처 짚지 못한 증상의 근원을 파고듭니다. 적절한 약물치료와 미술치료를 병행하면 더욱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英, 공공 미술치료 서비스 무료 제공
영국 NHS는 환자들에게 무료 미술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스프링햄 박사는 NHS 런던 남동부 옥슬리스(Oxleas) 지역의 최고 심리치료 책임자로서 다양한 치료 분야에서 활동하는 900명의 치료사를 이끌고 있다. 그는 이 지역 주민 100만 명의 정신건강을 책임진다.
―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게 미술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니 인상적입니다.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만족도는 어떤가요?
“만족도는 높은 편입니다. 치료 효과를 보면 알 수 있죠. 치료 이후 이들에게 만족도를 직접 묻기도 하고요. 인지행동치료(CBT)나 정신의학 치료 효과와 비교했을 때 미술치료의 효과가 좋다고 말합니다. 환자 대다수의 증상이 나아지는 등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지만, 치료 과정이 길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하죠.”
―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요?
“극도의 성격장애와 분노조절장애로 판정된 32세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저희를 찾아왔을 때 거의 치료 불능 상태였죠.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CBT도 도움이 안 됐습니다. 문제는 그녀 역시 자신의 분노 원인을 모른다는 점이었습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죠. 그런 그녀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거부하다가 대화 이후 서서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러더니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속의 응어리를 그림으로 분출하기 시작했어요. 18개월 동안 치료를 거쳐 그녀는 정상이 됐습니다. 그 뒤 뒤늦게 임상치료사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성격장애 치료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무료이다 보니 미술치료를 받으려는 대기 인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증상이 심할 경우엔 신청 3~4달 만에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아이들의 경우 수요가 높아 대기 기간이 더 긴 편입니다. ADHD 치료를 받으려면 3년 이상 기다리는 경우도 있어요.”
― 아이들의 경우 치료 시기가 중요할 텐데 차례를 기다리다가 적정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것 아닌가요?
“저희 역시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NHS가 아이들 대상 미술치료 서비스에 더 많이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논의가 실제 진행되고 있고요.”
“韓, ‘정신건강’ 범위 좁게 보는 듯”
세계 여러 나라가 자격을 갖춘 치료사에게 국가 공인 미술치료 자격증을 부여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국가 공인 미술치료 자격제도가 없다. 대신 각 학회나 협회별로 자체 자격증을 만들어 발급하고 있다. 임성윤 교수는 “민간 자격증이다 보니 돈만 내면 쉽게 딸 수 있는 것도 많다”며 “이 때문에 치료사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환자들이 질 높은 치료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 한국에 와서 미술치료 분야 관계자들과 만나보니 어땠습니까?
“학회에서 발표도 하고 미술치료 연구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보니 한국의 미술치료 연구 수준이 굉장히 높다고 느꼈습니다. 연구자·치료사들의 열의와 실력도 대단하고요. 정부가 국가 공인 자격증을 만들면 한국 환자들도 질 높은 미술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 한국은 매년 자살률, 우울증 지표에서 OECD 상위권을 차지하곤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요?
“딸이 엄청난 K팝 팬이라서 제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무척 부러워했는데……. (웃음) 그만큼 한국은 문화적·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나라입니다. 한국인들이 현재 정신적으로 힘들어한다는 말을 저도 들었습니다. 분단, 전쟁, 가난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긴 집단적 트라우마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때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살았는데 이제 먹고살 만하니 그 트라우마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죠. 2차 세계대전 당시 힘든 시절을 겪은 저희 부모님 세대, 패전을 겪고 다시 일어선 독일인, 공산 치하에 살았던 동독 사람들이 겪은 트라우마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 한국에서 미술치료가 확대되고 대중화되기 위해선 어떤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봅니까?
“이번 방문으로 본 바로는, 한국의 미술치료 연구자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갖고 치료에 접근합니다. 연구 수준이 높죠. 이제 공은 정부에 넘어갔습니다. 제가 보기엔 한국 의료 당국은 ‘정신건강(mental health)’의 범위를 다소 좁게 보는 듯합니다. 한국의 정신건강 치료는 대부분 언어치료 등에 치중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NHS는 미술치료가 전체 정신치료의 90% 가까운 비중을 차지합니다. 한국 또한 미술치료를 심리상담이나 정신의학과 같은 수준의 치료법으로 인정하고 이에 맞는 제도를 구축해야 하죠. 실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미술치료는 정신의학과 병행되는 치료법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 역작 나오기도”
― 그런데 의아한 점도 있습니다. 미술치료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유명 화가들 가운데는 괴팍한 성격을 가졌거나 우울증 등을 앓은 이들도 있으니까요.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예술과 창의성, 광기(狂氣)에 대한 관계는 학계의 오랜 연구 주제입니다. 대표적으로 반 고흐가 있는데요. 예술활동은 ‘때론’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슬픈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수채화를 반복해서 그리면 우울감이 심화될 수 있죠. 반면 미술 덕에 정신 상태가 안정되어 삶을 더 발전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술사를 보면 실제 많은 화가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역작(力作)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 예를 들면요?
“독일 화가 케테 콜비츠 (Ka˙˙the Kollwitz·1867~1945년)가 대표적이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이 죽자 큰 실의(失意)에 빠졌어요. 트라우마가 됐죠. 하지만 그녀는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그 충격을 이겨냈습니다. 미술이 준 치료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임성윤 교수가 “미술치료는 요리 레시피 책처럼 정해진 순서와 과정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미술치료는 굉장히 유연한 치료법”이라며 “그만큼 치료사와 환자 사이 유대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프링햄 박사 역시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치유법이 다양하다”며 “따라서 치료사는 환자를 깊이 파악하고 이에 맞는 치료법을 찾기 위해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