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侖世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고전번역원) 졸업 / (주)인산가 회장, 《인산의학저널》 발행인, 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1955년생.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現 한국고전번역원) 졸업 / (주)인산가 회장, 《인산의학저널》 발행인, 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월간조선》 명예기자 / 저서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네》 《자연치유에 몸을 맡겨라》 《내 안의 자연이 나를 살린다》 등

- 사진=게티이미지
청명시절우분분 노상행인욕단혼
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
차문주가하처재 목동요지행화촌
그 맑다는 청명절에 분분히 비 내리니
길 가던 나그네, 정신없이 허둥대네!
묻노니, 주막은 어디메 있느뇨?
목동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중국 당나라 후기 시인 두목(杜牧·803~853년)의 ‘청명(淸明)’이란 제목의 시다.
4월 5일은 청명일로서, 병오년 입춘(立春) 이후 다섯 번째 절후에 해당하는 청명절(淸明節)이 시작되는 날이다. 청명절은 춘분(春分)과 곡우(穀雨) 사이에 들어 있으며 올해의 청명절은 4월 5일부터 19일까지의 15일간이다.
청명일은 한식(寒食)의 하루 전날이고, 식목일이다.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이날을 기하여 논밭 둑을 손질하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 된다.
청명절은 겨울의 찬 기운이 완전히 물러가고 만물 소생의 봄기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절후다. 천하(天下)로 말하면 모든 환란(患亂)을 해결 극복한 뒤에 맞이하는 ‘태평성세(太平聖世)’로서 가장 살기 좋은 시절의 상징이라 하겠다.
이렇듯 좋은 청명 시절에 갑자기 분분히 비가 내리니 길 가던 노상 행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우선 비를 피해 쉴 만한 주막을 찾다가 때마침 만난 목동에게 ‘주막이 어디메 있느뇨?’ 물으니, 그는 말없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
지은이는 마치 전쟁을 비롯해 온갖 재화(災禍)와 자연재난(自然災難)의 피해가 미치지 않는, 인류의 이상향(理想鄕)으로 일컬어지는 도화원(桃花源)이나 행화촌(杏花村), 청학동(靑鶴洞) 또는 자하도(紫霞島)를 찾으려는 간절한 바람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수선한 세상을 떠나 평화로운 별천지(別天地)로 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 보인 시(詩)라고나 할까?
‘우리 집안은 정승의 집안, 칼 차고 떵떵거렸지’
지은이 두목은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시안시(西安市)] 사람으로,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중당(中唐)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712~770년)와 구별하기 위해 두보를 노두(老杜)라 부르고 두목을 소두(小杜)라 부르며, 동시대의 시인 이상은(李商隱·812~858년)과 함께 ‘만당의 이두(李杜)’로 통칭한다.
두목은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19년(803년)에 태어났다. 당의 명문가였던 경조 두씨(京兆杜氏) 가문 출신으로 두목 자신도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조카에게 보내는 시에서 ‘우리 집안은 정승의 집안, 칼 차고 떵떵거렸지(我家公相家, 劍佩嘗丁當)’라고 읊기도 했다.
두목은 스무 살에 수도 장안(長安)에 나와 학문을 익혔는데, 당시 태학박사 오무릉(吳武陵)에게 인정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 두목이 지은 ‘아방궁부(阿房宮賦)’라는 시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아방궁부’는 두목이 청년 시절에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작품으로 화려한 수사와 유장한 리듬이 특징이다.
대화(大和) 2년(828년) 26세 때 진사(進士)에 급제했으며 31세 되던 해인 대화 7년(833년), 양주(楊州)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우승유(牛僧孺)의 밑에서 서기(書記)를 맡아, 양주에 머무르는 3년 동안 밤만 되면 기루(妓樓)에 드나들며 풍류(風流)를 즐겼다고 한다. 양주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고도(古都)로 중국에서는 예부터 ‘일양이익(一楊二益)’, 즉 ‘제일이 양주요, 두 번째가 익주(益州)’라 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고, 따라서 기녀(妓女)도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두목은 양주에서의 관직 생활 이후, 일족을 부양하기 위해 명문 출신임에도 중앙에서의 출세를 단념하고 지방관 부임을 지망하여 황주(黃州)·지주(池州)·목주(睦州)·호주(湖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하였으며, 대중(大中) 6년(852년)에 중앙으로 돌아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두목을 가리키는 두자미(杜紫微)라는 이름도 중서성의 다른 이름이었던 자미성(紫微省)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류를 즐긴 멋쟁이
장편 시 감회시(感懷詩)·군재독작(郡齋獨酌) 등은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고시(古詩)는 두보·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근체시(近體詩)는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은데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문집으로는 《번천문집(樊川文集)》이 있다.
풍류적이고 향락적인 두목의 일생과 그것을 바탕으로 쓰인 시들은 그가 생활에서 겪은 갈등과 고민을 하릴없이 풀어놓은 것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죽기 전 작품 대부분을 불태워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명’을 비롯해 ‘아방궁부’ ‘박진회(泊秦淮)’ ‘강남춘(江南春)’ 등의 시가 특히 유명하다.
두목은 풍류에만 능한 것이 아니고 대단한 풍채를 지닌 멋쟁이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양주에서 변변치 않은 벼슬아치로 있을 때, ‘술집이 있는 저잣거리를 지날라치면 그를 유혹하려는 여인들이 모두 나와 귤을 던졌다(醉過楊州橘滿車)’라는 일화가 생겨날 정도였다.
시풍(詩風)은 동시대의 두보와는 달리 남성적이고 호방한 편이며 천재 시인일 뿐만 아니라 용모도 준수해서 여인들과 많은 염문을 뿌린 풍류남아로 이름이 높다. 그래서 후세에도 잘생긴 미남, 시 잘 짓고 풍류를 즐기는 한량, 풍류남의 표상으로 흔히 언급되었다.
한국 고전시가 〈춘향전〉, 즉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에도 방자가 춘향에게 이몽룡을 소개하는 장면에 “우리 사또 자제 도령님이 얼굴은 관옥(冠玉)이요,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이며, 문장은 이태백(李太白)이요, 필법은 왕희지(王羲之)라…”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나온다.
16세기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세 가지 한(恨)이 있다고 했다. 그 첫째가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두 번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당나라 때의 시인인 두목지와 같은 사람과 맺어지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조 말엽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 역시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서 자신을, “얼굴은 관옥이요, 풍채는 두목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두목의 ‘청명’이라는 시는 1000년의 시공을 넘어 지금까지 많은 시인 묵객에게 사랑받는 애송시로, 그의 시풍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걸작이라 하겠다. 혹여라도 이번 청명일에 비가 내린다면 너무 허둥대지 말고 핑계 김에 행화촌은 아닐지라도 인근 카페나 주막집에서 마음에 맞는 벗들과 곡차(穀茶)를 곁들여 정담(情談)을 나누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