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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17 | 이항복(李恒福)전

난세(亂世)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명재상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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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선조 호종… 전쟁 중 5번 병조판서 역임
⊙ 문장력과 실무 능력 겸비해 선조의 총애받아
⊙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비와 영창대군 살해에 반대하다 귀양 가서 사망
⊙ “조정이 겨우 모양만 남았어도 사대부들이 그런대로 염치를 알았던 것은 공이 전석(銓席)에 있었기 때문”(신흠)
⊙ “문자에 종사하는 선비인데 전곡(錢穀)을 다스리는 재간까지 있단 말인가?”(윤두수)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이항복
  이항복(李恒福·1156~1618년)은 우리에게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인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과의 기지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경륜이나 정치적 역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 대단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그의 정치 역정만 추려내서 보아도 숨 가쁠 만큼 이항복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다.
 
  1556년(명종 11년)에 태어난 이항복은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8세 때 시를 지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거상(居喪)을 예(禮)에 따랐다.
 
  소년 시절에는 재물을 풀어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했고 씩씩하여 남의 제재를 받지 않았으며 골목길에서 서로 용맹을 뽐낼 때는 다른 소년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때 무뢰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따끔한 가르침이 계기가 돼 학업에 열중했다.
 
  “내가 미망인으로 곧 땅속에 들어갈 판인데 너는 오히려 무뢰한 자제들과 놀고 있으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이에 호방한 성격을 버렸다.
 
  1571년(선조 4년)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특히 시가 호방하여 많은 선비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당시 재상 권철(權轍·1503~1578년)은 그 소문을 듣고 손녀사위로 삼았는데 첫눈에 재상감임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권철은 훗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대표적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권율(權慄·1537~1599년)의 아버지이니 이항복은 권율의 사위이다.
 
 
  이이를 통해 서인의 길을 걷다
 
이이
  이항복은 정치 노선이 서인(西人)이다. 신흠(申欽·1566~1628년)이 지은 이항복 비명(碑銘)에 이항복이 서인의 길을 걷게 된 연유가 적혀 있다. 먼저 《선조수정실록》 15년(1582년) 6월 1일 기록부터 보자.
 
  〈상이 경연에 나아가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말했다.
 
  “내가 강목(綱目)을 읽고 싶으니 경은 재주 있는 신하를 미리 선발하여 그들에게 강독을 전담케 해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라.”
 
  이이가 봉교(奉敎) 이항복, 정자(正字) 이덕형, 검열(檢閱) 오억령, 수찬(修撰) 이정립, 봉교 이영을 선발에 응하게 했다.〉
 
  해당 연도는 1년 차이가 나지만 신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에 선묘(宣廟)가 장차 《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독하려고 해 미리 재주 있는 신하를 가려 뽑았는데 다섯 사람 중에 공이 참여했으니 바로 율곡 이이 공이 추천한 것이었다. 율곡은 도학(道學)과 문장이 한 세상을 압도하였는데 공은 한 번 보고 당장에 뜻이 부합하였다.〉
 

  대개 당색(黨色)은 가학(家學)이나 사승(師承)으로 인해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정해지던 당시 풍토와 달리 이항복은 뒤늦게 스스로 이이를 흠모해 서인의 길을 걷게 된 경우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보듯이 정통 서인들이 걷는 길과는 다른, 매우 독자적인 서인의 노선을 고수하게 된다.
 
  그런데 선조 17년(1584년) 이이가 4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권은 동인(東人) 쪽으로 넘어간다. 이 무렵 이항복은 예문관 봉교(奉敎)에서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과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특히 임금의 글을 짓는 지제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필력이 출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선조가 총애한 때문이기도 했다. 선조 18년(1585년) 9월 그가 정언에서 이조좌랑으로 옮겼을 때 실록 사관은 이런 평을 남겼다.
 
  〈항복은 재기(材器)가 남보다 뛰어나 상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발(李潑) 등이 시기했으나 배척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일 처리 능력
 
  이항복은 반대파인 동인의 수장(首長) 대사간 이발(李潑·1544~1589년)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오히려 선조의 특명으로 옥당(홍문관)에 머문 적도 있었다.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됐고 얼마 후에 조선을 뒤흔든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됐다. 비명에는 당시 일 처리하는 이항복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묘사가 담겨 있다.
 
  〈기축년(1589년·선조 22년) 겨울에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정여립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였는데, 선묘(宣廟)가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논죄할 때 공은 응대(應對)하기를 빈틈이 없이 민첩하게 하고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절도에 맞았으며,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입으로는 묻고 손으로는 글씨를 쓰기를 동시에 하는데, 상대방의 말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고 붓대는 잠시도 멈추지 않으면서 종횡무진으로 계속 움직이되 그 요점을 전부 파악하였으므로, 백관들은 팔짱만 끼고 서리들은 곁에서 보기만 하며 놀라서 귀신이라고 하였다. 선조는 누차 공이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고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죄수가 많이 연루되어 옥사가 빨리 끝나지 않음으로써 남이 화를 당하는 것을 바라는 자의 마음을 열어놓는 상황을 민망히 여긴 나머지 죄상이 의심스러울 때는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기에 힘썼으며, 옥사를 심의할 때 자주 곁에서 의견을 제시하는가 하면 문서 중에 혹시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일을 담당한 자에게 꼼꼼히 따져보는 등, 붓대를 잡고 문서만 작성하지는 않았다.〉
 
 
  실각한 정철 외면하지 않아
 
  이에 선조는 이항복을 점차 글 짓는 분야에서 정치를 보좌하는 쪽으로 키우기 시작한다. 비명이다.
 
  〈경인년(1590년·선조 23년) 여름에 응교에서 의정부의 검상(檢詳)·사인(舍人)으로 천전(遷轉)되고, 가을에 평난공(平難功)을 책록(策錄)할 때 공은 문사(問事)의 공로로써 3등 공신에 책록되고 전한(典翰)으로 옮겼다. 언젠가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 선조가 공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고서는 공이 옥사를 국문할 때의 일을 이야기하고 뛰어난 재주라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직질(職秩)을 올려 장려하고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시켰다가 특지(特旨)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여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는데 장차 공을 크게 등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선조 24년(1591년) 정여립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던 좌의정 정철(鄭澈)이 건저의(建儲議) 문제로 갑자기 실각했다. 정철은 당시 동인파 거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1539~1609년)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정철이 실각하여 논죄를 당하자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정철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이항복은 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했다. 이 일로 이항복은 정철 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됐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됐다. 그만큼 선조의 신임이 컸다. 또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의 적극적인 비호로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당시 동인이던 이원익은 “이항복을 탄핵하려면 나부터 탄핵하라”며 이항복을 아꼈다.
 
  이항복은 문재(文才)뿐만 아니라 이재(吏才)에도 능했다. 재상 윤두수(尹斗壽·1533~1601년)의 비명에 나오는 일화다.
 
  〈신묘년(1591년·선조 24년) 봄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겨우 한 달 만에 본조(本曹)의 사무가 어지러운 것이 없고 창고에 저장한 물자가 새어나가는 것이 없자 상국(相國·재상) 윤두수가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크게 중시하여 말하기를 “문자에 종사하는 선비인데 전곡(錢穀)을 다스리는 재간까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병조판서 5번 지내
 
서울 종로구 필운동 필운대(弼雲臺). ‘필운’은 이항복의 아호다. 필운대는 이항복의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그의 장인인 권율, 혹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터라고 한다. 사진=조선DB
  이항복의 진가가 발휘된 때는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했다. 몽진하던 도중 선조는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 대신(大臣)과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는데 이항복이 가장 먼저 말했다.
 
  “우리나라의 병력으로는 이 적(賊)을 당해낼 수 없고 오직 관서 쪽으로 가서 명(明)나라에 호소하여 원병을 요청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됐다. 말 그대로 눈부신 승진이었다.
 
  훗날 신흠은 항복의 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공은 무릇 병조판서를 다섯 차례, 이조판서를 한 차례 지냈는데, 마음씀이 바르고 밝아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람을 의망하고 발탁할 때 오직 그 재능의 유무만 보며 오로지 공론을 따랐고, 감히 다른 길로 진출시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관서에 질서가 있고 벼슬길이 맑았으니, 조정이 겨우 모양만 남았어도 사대부들이 그런대로 염치를 알았던 것은 공이 전석(銓席·인사권을 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흠이 같은 서인이긴 하지만 인사의 공정성과 관련된 이 대목은 훗날 이항복이 받게 되는 신망을 감안할 때 과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재상이 되었지만…
 
  전란이 한창이던 1598년 이항복은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1564~1635년)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2년 후인 1600년 영의정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 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됐다. 1602년 북인(北人)의 정인홍(鄭仁弘·1535~1623년), 문경호(文景虎·?~1620년) 등이 정여립 사건 당시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1535~1598년)이라고 발설하자 삼사(三司)에서 성혼을 공격했다. 성혼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이었다.
 
  이에 이항복은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했다. 이 점은 이항복의 독특한 면모이기도 하다. 정철 때도 그렇고 성혼 때도 그렇고 자신의 당파가 공격을 당할 때는 거침없이 최일선에 나섰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됐으나 이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북인에게 서인은 정적(政敵)이었으니 이항복으로서는 정치적 시련기에 들어선 것이다. 광해군 초기에 이항복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임해군과 광해군
 
  정권을 장악한 북인은 광해군을 설득 협박해 광해군 즉위년 2월 14일 광해군 친형 임해군 이진(李珒·1572~1609년)을 반역 혐의로 전격 잡아들인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열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일부 대신의 주청에 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 임해군은 후일 1623년(인조 1년)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자 복작신원(復爵伸寃·관작을 회복하여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이때 이항복은 영의정이었고 아직 선조가 살아 있을 때인 선조 39년(1606년)에 조정을 대표해 중국 사신에게 광해군이 세자임을 분명히 밝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준 바 있었다. 《선조실록》 선조 39년(1606년) 4월 16일 자이다.
 
  〈소방(小邦)의 세자에 대해 천조(天朝)에서 책봉하는 명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간절히 바라건대 태자(台慈)께서는 온 나라 사람의 심정을 곡진히 살피시어 귀국하시는 대로 천자께 주달함으로써 속히 은전을 내리게 해주셨으면 하는 일로 정소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적장자(嫡長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이 상경(常經)이긴 하지만, 공로를 우선하고 현인을 택하는 것 역시 예법의 권도(權道)인 것입니다. 과군(寡君·자기 임금을 신하가 칭하는 호칭)이 임진년 병화(兵禍)를 당하던 날 국세(國勢)는 창황하고 인심은 안정될 곳이 없게 되자, 신민들이 모두 세자를 세워 위태로운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과군의 여러 아들 중에 오직 임해군 이진과 지금의 세자가 가장 장성했는데, 과군께서는 세자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인효(仁孝)하고 공검(恭儉)하다는 것을 평소부터 아시고 주기(主器)를 맡겨야 하겠다고 일찍부터 마음을 정하셨으며, 사람들이 촉망하는 바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료에게 자문을 구하고 의논을 해서 후사로 세운 뒤, 위로 종묘사직의 신령들에게 고하고 아래로 온 나라의 백성에게 유시하였으니, 명분이 이미 정해지고 책임의 소재가 귀결된 것입니다.
 
  그 당시 일의 형세가 하도 창황하여 미처 전주(轉奏)해서 품명(稟命)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때에도 요동(遼東)에 자보(咨報)하여 조정에 전주(轉奏)하였습니다. 이어 세자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위(神位)를 받들게 하고 약간의 신료를 수행시켜 험고한 지역에 의지해서 보전책을 도모케 하였으니, 대개 이렇게까지 되었고 보면 백성을 감호(監護)하고 무마하는 책임을 이미 전적으로 세자에게 맡겼다 하겠습니다. 세자가 이에 온갖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평안도에서 나와 황해도를 거쳐 동으로 강원도에 이르러 진격을 도모하고, 동남쪽으로 가서 호남과 기전(畿田)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지나는 곳마다 성세(聲勢)를 떨쳐 격문(檄文)을 전하여 소모(召募)하며 대의(大義)로 유시하니, 달아나 숨었던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정인홍과 틀어지다
 
  분명 이항복은 광해군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그는 임해군에 대해서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광해군 10년(1618년) 5월 13일 자 그의 졸기(卒記) 일부이다.
 
  〈무신년(1608년) 초정(初政·광해군 집권 초)에 민간에는 임해군이 변을 일으키고 조정이 먼저 움직여 이덕형 또한 처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이항복만이 진중하게 뇌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훈련도감 도제조였는데 혹자는 그에게 은밀히 군사 대비를 명령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이항복이 말하기를 “임해군이 만약 반란을 일으킨다면 내가 평소처럼 처리하더라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 일찍이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젊은이들은 임해군이 신원되는 때를 볼 것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신흠은 이항복이 실력자 정인홍과 틀어지게 되는 결정적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신해년(1611년·광해군 3년)에 정인홍이 봉소(封疏)하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극구 비난하며 문묘(文廟)에 향사(享祀)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그 잘못을 해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는데,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들추어내 아뢰자 광해군이 그 논의를 주도한 자를 조사해 밝혀내어 금고(禁錮)시키라 하므로, 공은 크게 놀라 “이는 망국(亡國)의 처사”라 말하고 밤을 지새워가며 차자를 지어 아침 일찍 올렸다. 제생(諸生)들은 이와 같은 임금의 명을 듣고서 권당(捲堂·동맹휴학)하고 떠났으며, 공은 또 차자(箚刺·약식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진달하였다. 그 뒤 인대(引對)할 때 회재에 관한 일 네 조목을 기록하여 올렸는데, 정인홍은 이로 인해 크게 유감을 품어 해괴한 기틀이 점점 시작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嫡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년)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했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같은 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1617년(광해군 9년) 11월에 폐모론(廢母論)이 거의 결정되려 할 즈음 병중에 있던 이항복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습니까? 요순(堯舜)의 일이 아니면 임금께 진달하지 않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훈계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사나운 아버지와 미련한 어머니가 항상 순(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치게 하고서 입구를 막아버렸고,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라 하고서 밑에서 불을 지르는 등 위태롭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도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을 뿐, 부모가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니, 이는 진정 아비가 아무리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는 불효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이 장차 차츰 교화될 가망이 있는데, 이러한 말이 어찌하여 임금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의 도(道)는 순의 덕을 본받아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정인홍의 인목대비 규탄
 
  이항복이 언급한 《춘추》의 의리를 단서로 우리는 정인홍과 이항복의 마음가짐과 학문적 깊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광해군일기》 1613년(광해군 5년) 7월 9일 정인홍이 자신을 불러올리는 명을 사양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그중에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자모형제(子母兄弟)의 변을 당하신 것이 순(舜)임금과 정장공(鄭莊公)이 당한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으니 전하의 심정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지금 이 역적이 그 흉악한 꾀를 펼친 것은 실로 간악함을 묘사하는 괴수로서 서로 연결하여 나라 안에 일이 있기를 바란 것이 아침저녁의 일이 아닙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결하여 인목대비의 세력을 의지하고 영창을 가담시켜 명분을 세웁니다.
 
  아, 당요(唐堯·요임금)의 세상에도 사흉(四兇)의 죄는 오히려 귀양을 가고 주벌을 당함을 면하지 못했는데 지금이 어느 때이며 이것이 어떤 죄인데 도리어 이 사흉과 같은 죄를 아끼십니까. 《주역(周易)》 겸괘(謙卦) 육오(六五)에 ‘남을 침략하는 것이 이롭다[利用侵伐·이용침벌]라는 것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제왕(帝王)은 한결같이 겸공(謙恭)만을 덕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겸겸(謙謙)의 극치는 반드시 복종하지 않은 자를 정벌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 시의(時義)를 명시하여 이런 형상이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지 어찌 후세 사람을 속이려고 했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전하께서 심사숙고해 보셔야 할 부분입니다.〉
 
 
  정인홍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정인홍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정인홍은 조식(曺植·1501~1572년)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 오건(吳健), 김우옹(金宇顒),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남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했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강경파인 북인에 가담해 영수(領首)가 됐다.
 
  정인홍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했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남이공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이이첨(李爾瞻) 등과 대북을 영도했다. 1612년(광해군 4년)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 유폐 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정인홍은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했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했다.
 
  정인홍이 올린 위의 상소는 바로 계축옥사와 직결된 글 중의 하나다. 공자는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서 “곧기만 하고 사리를 알지 못하면 강퍅해진다”라고 했다. 정인홍이 딱 이런 사람이었다.
 
 
  제자 최명길 등 인조반정의 주역 돼
 
  결국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는 계축옥사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담긴 정확한 의미를 광해군이 경연에서 제대로 파악했다면 정인홍이 올린 소에 대해 “그대는 내가 순임금이 아니라 정나라 장공이 돼라 하는구나!”라고 꾸짖고 특히 《주역》을 끌어들여 “겸겸(謙謙)의 극치는 반드시 복종하지 않은 자를 정벌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어찌 영창이 주공의 형제인 관숙이나 채숙만큼 악한 행위를 했다는 말인가?”라고 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굳세고 눈 밝은[剛明] 임금의 언행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인홍의 위협에 굴복해 유약하고 어두운[柔暗] 임금의 길을 걸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고 정인홍은 비명횡사(非命橫死)했다. 정인홍의 《주역》 인용은 상황에도 맞지 않았고 일의 이치에도 맞지 않았다.
 
  반면에 이항복의 해석은 상황에도 맞고 일의 이치에도 맞았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이항복을 버리고 정인홍을 선택했다.
 
  이항복이 죽은 지 정확히 5년 만에 그의 제자들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년) 등 서인 세력이 주도한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쫓겨났고 정인홍은 비명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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