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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7 | 구치관(具致寬)전

올곧음 하나로 정승에 오르다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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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실록)
⊙ “성품이 정직하여 진취(進取)에 염치 있는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아무도 높이 등용되도록 이끌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서거정)
⊙ 정난공신이 아니면서도 치밀한 일 처리로 세조의 눈에 들어 출세
⊙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실록)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경기도 광주에 있는 구치관 신도비(神道碑).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구치관(具致寬·1406~?)은 흔히 구정승, 신정승의 야사(野史)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애초에 구치관이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당시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와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워낙 술을 좋아했던 세조는 이에 두 사람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러고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자신의 물음에 바르게 답하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세조가 “신정승” 하고 부르자 신숙주가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왜 신(申)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이번엔 “구정승” 하고 불렀다. 구치관이 “네” 하고 대답하자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왜 구(具)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다시 “신정승”을 부르자 아무도 대답을 못 하니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감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둘 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렇게 술잔이 오가다 보니 두 정승의 어색한 관계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세조 9년(1463년) 8월 29일 이후의 일이다. 구치관이 우의정, 한명회가 좌의정에 오른 날이기 때문이다. 즉 당대 최고의 실력자 한명회가 좌의정, 구치관이 우의정, 실권은 없지만 영의정에 신숙주가 있었던 시절의 일화다.
 
  그러면 과연 구치관은 어떤 배경으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세조는 정란(靖亂)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적어도 정승이 되려면 정란에서 큰 공로가 있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구치관은 오직 본인의 실력과 강직함 하나로만 이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 시대에 한직 맴돌아
 
  1406년에 태어난 구치관은 남들보다 조금 늦은 28세 때인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세종의 치세에 집현전 학사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평범한 관리로 지낸 것을 보면 크게 현달했다고는 할 수 없다.
 
  구치관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때는 《세종실록》 21년 7월 16일 자이다.
 
  이때 구치관은 황해도관찰사 허조(許稠)를 보좌하는 도사(都事)에 임명되어 세종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임지로 떠났다. 세종 시대에 구치관은 그저 한직을 맴돌았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그가 무관(武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 쪽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문종 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즉위년인 1450년 11월 24일 문종은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조정랑 구치관을 급파할 것을 명했다. 또 12월 14일 자에는 당시 최고 실력자 김종서가 구치관을 평하는 대목이 실려 있다.
 
  “이제 병조정랑(兵曹正郞) 구치관을 신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병조는 일이 번잡하니 오랫동안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또 구치관은 재능이 가히 쓸 만하고 나이가 장차 50이 되니, 병조에서 체임(遞任·해임)시켜 우대하여 탁용(擢用)을 더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이에 다른 여러 신하도 같은 말로 구치관을 천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종 때도 구치관은 요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로 김종서나 황보인의 종사관 정도를 지냈을 뿐이다.
 
 
  “惡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그 이유를 곁에서 지켜본 서거정(徐居正)은 이렇게 말했다.
 
  “공은 지조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식견이 고매하여, 당시 일을 논의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때는 대범하고 엄격하며 언행이 바르고 곧았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정직하여 진취(進取)에 염치 있는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아무도 공을 치켜세워 추천하거나 높이 등용되도록 이끌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낮은 벼슬에 배회한 지가 10여 년이었는데 공은 높이 보고 큰 걸음으로 걸었을 뿐이다.”
 
  이는 《세조실록》에 실린 졸기(卒記)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전후(前後)하여 인재 선발의 임무를 맡았으나 자기 집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뽑아 쓰기를 모두 공평하게 하였다. 혹 간청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응당 옮길 사람이라도 끝내 옮겨주지 아니하였다.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한마디로 곧음[直]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조가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된 계유정난(癸酉靖難)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종 1년(1453년) 5월에 일어난 계유정난은 구치관의 삶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해 10월 안평대군 당여(黨與)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이때 구치관은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있다가 의금부도사가 되어 안평대군 당여인 경성도호부사 이경유를 베었다.
 
 
  “경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세조)
 
  이징옥(李澄玉·?~1453년)은 뛰어난 무장(武將)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경원절제사·영북진절제사·판경흥도호부사·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郡)과 6진(鎭) 개척의 공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김종서를 오래 섬겼다.
 
  1453년 5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고, 이어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으로 몰아 파면하고 그 후임으로 박호문(朴好問)을 보냈다. 이징옥은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 소식을 듣고 분개해 박호문을 죽이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였다. 그러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은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않을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단종은 수양대군을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로 임명했다. 수양은 두 차례 도통사를 사양했으나 단종은 윤허하지 않고 대호군(大護軍) 구치관을 도통관 종사관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수양대군과 구치관은 관계를 맺게 된다.
 
  구치관은 이듬해 2월 6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된다. 처음으로 중앙 요직을 맡는 순간이었다. 이때 신숙주는 도승지, 박팽년(朴彭年)은 좌승지가 되었다. 물론 수양대군이 행한 인사였다고 보아야 한다.
 
  세조가 아직 즉위하기 전 영의정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을 때 구치관과 함께 일을 해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경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
 
  그 후 구치관은 승지가 되어 지근거리에서 세조를 보필했다. 구치관의 일 처리는 한마디로 빈틈이 없고 주도면밀했다. 승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조가 즉위하자 책훈(策勳)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됐다. 실은 세조 즉위 과정에서는 아무런 공로가 없었지만 정란 이후 즉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업무 능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에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고 다른 공신들보다 훨씬 빠른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세조 즉위 후 구치관은 승지로서 여러 업무를 맡으며 좌승지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것은 도승지뿐이었다. 이때 북방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조는 핵심 신하들과 대책을 토의했는데 그때마다 구치관은 반드시 포함되었다. 세조의 신임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다. 세조 2년 7월 구치관은 승지에서 이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고 10월에는 병조참판으로 옮긴다. 두 자리 모두 각각 문관과 무관의 인사를 책임지는 자리이다. 이 무렵 구치관에 대한 세조의 신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세조 3년 6월 17일 자 기록이다.
 
 
  文武兼全한 直臣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조회)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참판 구치관, 도승지 한명회에게 머물도록 명하여 정사(政事)를 토의했다.〉
 
  구치관은 세조 3년에서 4년 사이에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한명회와 함께 명(明)나라에 다녀온다.
 
  세조는 평안도를 북문(北門)의 자물쇠로 아주 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절도사(節度使)는 무신(武臣) 가운데에서 등용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그곳 백성들을 어루만져 잘 다스리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중신(重臣)으로 이 지역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임명키로 생각하고선 구치관을 보냈다. 세조 4년 윤(閏) 2월 19일이다. 이때 세조가 한 말은 구치관에 대한 그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이 부임한 뒤에는 나는 다시 서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뜻대로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자 보상은 컸다. 세조 5년 7월 3일 이조판서에 임명된 것이다. 이때 사대부들은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바른 사람이 전형(銓衡)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공도(公道)가 시행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인사권을 쥔 당시 이조판서 구치관의 모습을 서거정은 이렇게 전한다.
 
  “비록 작은 벼슬 낮은 직책일지라도 일찍이 한 번도 혼자 천거하는 일이 없었고, 또 친한 친구라고 하여 개인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일도 없었다. 한편 간청(干請·청탁)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미워하여, 간청의 대상자는 꼭 자리를 옮겨서 서용(敍用)하지 않았다. 일찍이 위에 건의하여 도태시킨 용관(冗官·쓸데없이 자리만 지키는 사람)만도 백수십 명이나 되었다. 또 고관이나 귀인(貴人)이 자제(子弟)를 위하여 좋은 벼슬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면 이들 먼저 도태시켰다.”
 
  세조 7년 1월 19일 함길도(함경도) 지방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세조는 구치관을 불러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맡겨 현지로 파견한다.
 
  함길도 도체찰사 구치관이 하직하니 인견(引見)하고 구치관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구치관에게 일러 말했다.
 
  “경(卿)이 평안도(平安道)를 관할(管轄)하면서 그 수염이 점점 희어졌는데, 이제 함길도로 가게 되었으니 마음이 매우 편치 않다. 그러나 변방의 일이 지극히 중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곤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 신숙주 및 모든 재추(宰樞·재상)를 불러서 구치관을 전송하도록 하였다. 또한 물품을 후하게 하사하였으며, 형조판서 박원형(朴元亨)과 환관(宦官) 안로(安)에게 명하여 보제원(普濟院)까지 전별하게 하였다.
 
  구치관에게 한 세조의 하교다.
 
  “경이 함길도 군무(軍務)를 맡아 살피도록 명하니, 경의 지휘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군법(軍法)대로 일을 처리함이 가할 것이다.”
 
  함길도 순찰사(咸吉道巡察使) 강효문(康孝文)과 함길도 도관찰사 정식(鄭軾), 도절제사 강순(康純)에게도 유시했다.
 
  “이제 구치관을 도체찰사로 삼고, 경을 부관(副官)으로 삼으니 경은 마땅히 그를 본받도록 하라.” “이제 구치관에게 명하여 도내의 군무를 살피도록 하였으니, 경 등 이하 모든 장수는 구치관의 지휘를 듣도록 하라.”
 
 
  세조의 비밀 어찰
 
  이틀 후 구치관에게 보낸 비밀 어찰을 보면 세조가 구치관을 얼마나 극진히 아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경을 보내지 않았을 때는 근심스러운 마음을 놓지 못하겠더니, 이미 경을 보낸 뒤에는 즐거운 마음이 뭉게뭉게 생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경이 승부(勝負)에 대한 까닭을 알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하나 도리어 우려되는 바가 있으니, 나는 비록 이겼어도 교만하고 저들은 비록 졌더라도 근심하기 때문에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이 첫 번째 까닭이고,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사(常事)이므로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이 두 번째 까닭이고, 경은 비록 까닭을 알지만 휘하(麾下)의 장사(將士)는 그 까닭을 모르니 어찌 능히 교만함을 다 없애겠는가? 그 형세가 어려운 것이 세 번째 까닭이다. 경이 다시 이 세 가지 까닭을 살핀다면 하늘같이 큰 공을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룩하게 될 것이다.
 
  이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족한 것을 알고 너무 공을 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고, 둘째는 적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며, 셋째는 때를 보아 움직여서 경솔히 거병(擧兵)하지 말고 너무 신중히 거병하지도 말며, 반드시 공벌(攻伐)하지 말고 반드시 공벌하지 않으려고도 말 것이며 깊기는 못[淵]과 같고 움직이기는 우레[雷]와 같이 하며, 간사함도 없고 우직함도 없이 권도(權道)로 지혜를 돕는 것이 그것이다. 경이 나의 고유(告諭)하는 바를 살핀다면 글자 한 자도 헛된 것이 없을 것이니, 경은 말하지 않더라도 믿을 것으로 안다.”
 
  글의 후반부는 《주역》에 능했던 세조의 말솜씨를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야인(野人·여진족)들과 전투가 한창이던 세조 7년 6월 3일 세조는 구치관을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한다. 이제 정승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6월 21일 구치관이 돌아와 복명했다.
 
 
  《주역》으로 읽는 구치관의 관리 생활
 
  필자는 이미 《이한우의 주역》이라는 책에서 태괘(兌卦· ) 밑에서 네 번째 자리에 있는 양효에 대한 풀이를 통해 구치관을 읽어낸 바 있다.
 
  먼저 구사(九四)에 대해 주공(周公)은 이렇게 말을 달았다.
 
  “구사는 헤아리면서 기뻐해 편안치 못한 것이니 절조를 지켜[介] 미워하면 기쁨이 있다.”
 
  이를 공자(孔子)는 다음과 같이 짧게 풀이했다.
 
  “구사의 기쁨은 좋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태괘의 구사의 처지를 보자. 양강의 자질로 음유의 자리(4)에 있으니 바르지 못하고 육삼(六三)과는 음양이 달라 친하고 구오(九五)와는 같은 양효라 친하지 않다. 초구와도 같은 양효라 호응관계가 아니다. 여러 가지로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정이천(程伊川)의 풀이다.
 
  “구사는 위로 중정의 다움을 지닌 구오를 받들고 아래로 유약하고 사악한 육삼과 가까이 있으니 양강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처한 자리가 바르지 않다. 육삼은 음유한 자질의 사람이니 양효가 기뻐하는 자이므로 단호하게 결단할 수가 없어 헤아리느라고[商=商量]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 이는 따라야 할 사람을 비교하고 계산하지만 결단하지 못해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사이[兩間]를 개(介)라고 하니 나누어진 경계다. 사람이 절도를 지키는 것을 개(介)라고 한다. 단호하게 바른 도리를 지켜 사악한 자를 미워하면서 멀리하면 기쁜 일이 있다. 구오를 따르는 것은 바른 것이다. 육삼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구사는 군주와 가까운 자리이니 강직하고 단호하게 바른 도리를 지켜 사악한 자를 미워하고 멀리하면 군주의 신임을 얻어서 도리를 시행해 복과 경사가 사람들에게 미칠 것이니 기쁜 일이 있는 것이다. 구사와 같은 자는 얻고 잃음[得失]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자신이 따르는 것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까지 구치관이 보여준 행적 그대로임을 알 수 있다.
 
 
  위기
 
  세조 8년 1월 구치관은 좌찬성(左贊成)에 제수된다. 정승의 자리에 한발 더 다가선 것이다.
 
  세조 8년 9월 27일 세조는 강원도 철원 쪽에서 강무(講武·사냥)를 벌이기 위해 전라도·경상도·황해도에서 군사를 징집했는데 규모는 기병 7800여 명, 보병 2400여 명이었고 서울에서는 기병 2400여 명, 보병 3600여 명이었다. 이때 구치관은 지응사(支應使)가 되어 모든 병사를 지휘하는 일을 떠맡았다.
 
  그런데 어가(御駕)가 철원 남산(南山) 밑 사장(射場)에 이르자 마침 비가 내려 주장(主將) 구치관이 급히 파진(罷陣)하였다. 저녁에는 영평현(永平縣) 굴동(堀洞)에서 머물렀는데, 병조(兵曹)에서 구치관이 마음대로 파진한 죄를 들어 추국(推鞫)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잠시 후에 승정원에서 아뢰었다.
 
  “구치관의 죄는 가볍지 아니하니, 청컨대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그러나 세조는 만류하며 “내가 마땅히 면대(面對)하여 타이르겠다”고 말한다. 다음 날 영의정 신숙주까지 나서 구치관을 국문할 것을 청하자 세조는 이렇게 말한다.
 
  “‘대궐 밖의 일은 장군이 제어한다’고 하는 것은 임금과 장수가 각기 따로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데도 구치관이 아뢰지 아니하고 파진한 것은 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뜻은 군사를 불쌍히 여기는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군신 간에 틈[隙]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정승에 오르다
 
  세조 9년(1463년) 8월 29일 권람(權擥)이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한명회가 제수됐다. 한명회 후임 우의정에는 구치관이 제수됐다. 정난공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치관이 권람, 한명회 같은 1등 공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치밀한 일 처리와 더불어 기밀을 잘 지킨 데 따른 것이다.
 
  다시 《주역》 계사전(繫辭傳)이다.
 
  〈“집안의 뜰[戶庭]을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无咎].” 공자가 말하기를 “어지러움[亂]이 생겨나는 것은 언어(言語)가 사다리[階]가 된다. 임금이 주도면밀하지 못하면[不密] (좋은) 신하를 잃게 되고[失臣] 신하가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게 된다[失身]. (특히) 기밀을 요하는 일[機事]을 하면서 주도면밀하지 못하면 해로움이 이뤄지니 이 때문에 군자는 신중하면서도 주도면밀하여[愼密] 함부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不出]”라고 했다.〉
 
  구치관은 주도면밀해 세조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고 세조는 주도면밀해 좋은 신하 구치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세조 10년(1464년) 1월 22일 세조는 우의정 구치관에게 이렇게 명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수찬(修撰)할 때 반드시 착오(錯誤)가 많았을 것이므로 이제 내종친(內宗親)과 승지 등으로 하여금 좌우(左右)로 나누어 틀린 것을 찾도록 하였으니 경이 이를 살펴보도록 하라.”
 

  인사 문제와 관련해 구치관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러한 일화는 또 있다. 세조 10년 2월 4일 자 기록이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했다.
 
  “윤씨(尹氏)의 족친(族親)으로서 아직 서용되지 못한 자를 이제 모두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이에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을 불러서 말했다.
 
  “내가 중궁(中宮)의 족친으로서 서용되지 못한 자를 다 쓰고자 하였더니, 중궁이 내게 이르기를 ‘관작(官爵)은 마땅히 뛰어난 사람을 선택하여 제수(除授)하여야 하는 것인데, 윤씨가(尹氏家) 자제(子弟)는 하나가 아닌데 어찌 현부(賢否)를 가리지 않고서 다 쓰겠습니까? 또 이씨(李氏)·심씨(沈氏)의 족친으로서 아직 서용되지 못한 자도 오히려 많은데, 홀로 윤씨의 족친만 쓰겠습니까? 마음에 실로 미안(未安)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매우 옳은 것이므로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너는 구치관 등과 더불어 이씨·심씨·윤씨의 족친 중에 가히 쓸 만한 자를 널리 의논하여서 아뢰어라.〉
 
 
  세조, “능성군은 나의 만리장성”
 
신숙주
  세조 10년 2월 23일 구치관은 드디어 실권을 가진 좌의정에 오른다. 이때 그의 후임으로 우의정에 오른 이는 황희(黃喜)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이다.
 
  구치관은 2년 2개월 동안 좌의정에 있다가 세조 12년 4월 18일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고 10월 19일 영의정에서 물러나 원로 자리인 능성군(綾城君)으로 간다. 그러나 북방에서 변고가 벌어지면 세조는 늘 능성군 구치관을 찾았다. 졸기의 한 대목이다.
 
  〈병술년(1466년·세조 12년)에 성만(盛滿)으로 사임하고, 도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중국 황제의 명에 의하여 건주위(建州衛) 야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여 패배시켰는데, 그 잔당이 변경을 엿보므로, 국가에서 근심하여 구치관을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으로 삼아서 보냈다. 세조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능성은 나의 만리장성이다’라고 하였다.〉
 
  세조 13년 5월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고 신숙주·한명회를 끌어들였다. 5월 19일 세조는 이렇게 말한다.
 
  “근자에 신숙주와 한명회 등이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뭇사람의 입에 구실감이 되었으니, 비록 반역(反逆)한 것은 아닐지라도, 반종(伴從·수행인)을 신칙(申飭)하지 못하고 임금을 배반하였다는 악명(惡名)을 받아서, 원근의 의혹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다. 나도 또한 어리석고 나약하여 위엄이 없는데, 백성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방편(方便)을 생각하지 않음은 옳지 못하니, 우선 이들을 가두어 두는 것이 옳겠다.”
 
  그런데 실록은 말미에서 “이날 구치관이 밀계(密啓)하여 신숙주와 한명회 등을 가두도록 청한 까닭에 임금의 이 같은 명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구치관에 대한 세조의 총애가 신숙주·한명회 두 사람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세조는 실상을 살핀 다음에 신숙주·한명회 두 사람의 죄는 “무례하게 자기 마음대로 한 죄”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 정치에 복귀하게 된다.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는 비방 듣기도
 
  예종 때 진서대장군을 맡아 잠시 평안도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던 구치관은 성종 1년(1470년) 9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어서는 불우(不遇), 즉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나 중년에 이르러 세조의 알아줌을 만나 이렇다 할 공로도 없이 오직 곧은 성품과 탁월한 일 처리 능력으로 영의정에까지 오른 것이다. 이로 인해 능성(綾城) 구씨는 조선이 끝날 때까지 명문가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그의 졸기(卒記)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
 
  비방의 사실 여부를 떠나 흔히 곧은 자들이 쉽게 받게 되는 비난이기도 하다.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예(禮)를 다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첨한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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