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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5 | 맹사성(孟思誠)전

外柔內剛의 淸節家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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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의 사위… 拙直한 성품으로 황희와 함께 세종 치세를 이끈 쌍두마차
⊙ 《태종실록》 감수 맡았을 때, 세종이 보려 하자 거부
⊙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仁柔], 큰일을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실록)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맹사성
  태조 때 좌의정 조준(趙浚)에게 우의정 김사형(金士衡)이 있었다면 세종 때 좌의정 황희(黃喜)에게는 우의정 맹사성(孟思誠·1360~1436년)이 있었다. 황희가 양(陽)이면 맹사성은 음(陰)이라 조화를 이루며 세종 치세를 이룩해낼 수 있었다.
 
  맹사성은 신창(新昌) 맹씨로 조부 맹유(孟裕)는 최영(崔瑩)과 친구 사이였다.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고려 말 한성윤 등 중간 관리를 지낸 인물이며 정몽주 등과 교분이 있었다. 명문가는 아니어도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셈이다.
 
  맹사성은 26세이던 우왕 12년(1386년) 병인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2년 후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한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은 몰락했지만 아직 초급 관리였던 맹사성에게 역사의 파고는 덮치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가 망할 때까지 춘추관 검열을 비롯해 사간원 우헌납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 나가 수원판관과 면천군수 등을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맹사성은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고향 온양으로 내려갔다. 맹사성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때는 태조 5년(1396년) 8월 29일이다. 어떤 문제로 여러 사람이 탄핵당할 때 예조의랑 맹사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관직으로 복귀하게 되는 때는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 때이다. 우간의대부, 좌산기, 문하부 낭사 등이 그가 맡았던 관직인데 모두 언관(言官)이었다. 아마도 그는 관리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이재(吏才)보다는 간언(諫言)에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생의 후원자 성석린
 
  태조 때나 정종 때 그리고 태종 때 맹사성이 관직으로 돌아오는 데는 선배 성석린(成石璘·1338~1423년)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성석린은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고 앞에 나서지는 않았어도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정치 노선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그래서 태조와 태종 모두로부터 큰 신망을 얻어 두 임금을 화해시키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태종 때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낼 만큼 현달했지만 자기를 크게 내세우는 성품이 아니었다.
 
  성석린은 일찍부터 맹사성을 눈여겨보았다. 아마도 태조 5년 맹사성이 관직으로 돌아오는 데는 성석린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스승 권근(權近)의 권유도 있었을 것이다.
 
  맹사성은 태종 3년(1403년) 좌사간대부에 오른다. 역시 간관(諫官)이었다. 이듬해 기밀 누설죄로 온양으로 유배를 가지만 1405년 동부대언으로 복귀한다. 이는 태종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성석린과 권근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2년 동안 승정원 대언(훗날의 승지)으로 활동하며 태종 지근거리에서 일을 도왔고, 지신사(후일의 도승지·오늘날의 비서실장) 황희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예문관 제학으로 있을 때는 세자를 보필해 명나라에 다녀온다. 훗날 이 사행(使行) 덕분에 맹사성은 세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된다.
 
 
  너무 곧기만 했던 대사헌
 
  그는 오로지 관리의 바른길을 걷는 사람일 뿐 시세(時勢)에 곁눈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곧은 직무 수행으로 인해 죽을 고비가 오기도 했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에 오른 그는 태종의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한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잠시 역모의 혐의를 받고 있을 때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했다. 조대림은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재상(宰相) 조준(趙浚)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태종도 조대림을 의심했다가 진행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면서 목인해(睦仁海·?~1408년)라는 자의 농간에 조대림이 놀아난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터였다. 즉 태종으로서는 사위 조대림을 처벌할 생각은 없었고 일단 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맹사성은 대사헌으로서 원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실제로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 일은 흔히 ‘목인해 무고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지신사 황희는 이 사건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 오히려 태종으로부터 큰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태종실록(太宗實錄)》 8년 12월 11일이다. 맹사성 등에 대한 옥사(獄辭)가 올라오자 태종은 이렇게 명했다.
 
  “맹사성·서선·박안신·이안유와 맹귀미(孟歸美)를 모두 극형에 처하라.”
 
  맹귀미는 맹사성의 아들로 이때 사헌부 감찰이었다. 부자(父子)가 모두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틀 전 감옥 안에서 박안신이 죽음을 직감하고서 맹사성에게 서로 한마디라도 하고 죽자고 말했다. 먼저 맹사성은 이렇게 적었다.
 
  “충신이 그 직책으로 인해 죽는 것은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요, 조종(祖宗)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박안신은 이렇게 썼다.
 
  “내 직책을 수행하지 못해 달갑게 죽음에 나아가지만 임금이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오명을 얻게 될까 염려된다.”
 
 
  ‘謀弱王室’
 
  다시 12월 11일이다.
 
  태종이 이들에게 지운 죄명은 모약왕실(謀弱王室), 즉 왕실 약화를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나서 태종을 말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날 여러 대신이 보여준 장면은 맹사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태종은 평상심을 잃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실록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기록했겠는가?
 
  이때 태종의 총애가 깊은 안성군 이숙번(李叔蕃)이 나서 맹사성을 적극 변호했다. 언관의 직분에 충실했을 뿐인데 역적으로 모는 것은 너무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은 화를 내며 “누구의 지도를 받고 이런 말을 하느냐?”고 오히려 이숙번에게 따져 물었다. 이숙번은 물러서지 않았다.
 
  “신은 젊어서부터 전하를 따랐으니, 전하께서 신의 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신은 지도를 받은 일도 없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았는지 태종은 ‘이숙번이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이숙번은 태종이 평상시에 즐겨 쓰던 말, 즉 ‘모진 매 밑에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랴?’를 인용하며 맹사성도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모약왕실’이라는 초사(招辭·조서)에 승복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극형에 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불똥이 지신사 황희에게 튀었다. 왜 많은 재상이 이렇게 말하는데 지신사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임금을 생각해 직언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숙번도 순금사 사직 김이공을 불러 “남 판서(남재)와 박 참지(박은)는 모두 도리를 아는 재상인데, 어째서 다시 아뢰지 않고 모두 임금의 뜻에만 아첨하여 옥사(獄事)를 이렇게 처리하는가? 그대도 명색이 선비인데 어째서 이같이 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숙번은 “주상께서 만일 이 사람들을 반드시 사형하려고 하신다면, 나는 머리를 깎고 도망하겠다”고 말했다.
 
  뒤이어 병중에 있던 권근, 영의정 하륜(河崙), 좌의정 성석린, 삼군영사 조영무(趙英茂) 등 문무 최고 관리들이 대궐 뜰에서 태종에게 맹사성을 사형해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말을 올렸다.
 
 
  拙直한 성품
 
  태종은 “맹사성은 모반한 것도 아니며, 무고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공사(公事)를 처리하면서 실수를 했을 뿐인데 극형에 처하면 어찌 사람의 정리(情理)에 맞겠습니까?”라고 한 하륜의 말꼬리를 잡아 화를 벌컥 내며 이렇게 말한다.
 
  “경은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다 하는 것인가? 공사를 처리함에 있어 어찌 실수할 수 있는가?”
 
  태종의 말이라면 대부분 복종하던 하륜도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명재상 양운(楊惲)을 죽이려 할 때 신하들이 제대로 간하여 사형을 저지하지 않은 중국 고사를 길게 인용한 다음 “신은 동방에 그런 임금은 없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는데 오늘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고 정면으로 맞섰다.
 
  태종은 정확히 반걸음 물러섰다.
 
  “내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그런데 아무리 반복하여 생각해보아도 사성의 죄는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들이 이렇게까지 간하니, 내가 우선 생각해보겠다.”
 
  이후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이 서둘러 사형 집행 결정을 철회해줄 것을 청하자 마침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말 끝머리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다.
 
  “사안이 극히 중대하고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가볍게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임금이 혼자서만 국가를 다스릴 수 없고, 경들도 어찌 나를 불의(不義)에 빠뜨리고자 하겠는가? 경들의 말을 따르겠다. 대신 경들도 왕실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
 
  이렇게 해서 맹사성 등은 극형 대신 유배를 떠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태종 9년 1월 1일 신년하례를 마치고 세자 및 대언들과 식사를 하던 중에 세자 이제가 가만히 아뢰었다.
 
  “맹사성이 신을 따라 중국에 입조(入朝)하여 간난(艱難)한 일들을 같이 겪어, 그때 그 성품이 졸직(拙直·성격이 고지식하다는 뜻)한 것을 알았습니다. 성상의 뜻을 거슬러 죄를 받을 때에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천위(天威)를 범할까 두려워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은 가납(嘉納·권하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했다. 직(直)은 태종이 좋아하던 말이다. 졸직이란 다소 서툴기는 해도 그 마음속은 곧다는 뜻이다.
 
  아들 맹귀미도 이때 풀려났지만 이듬해 장인 이무(李茂)가 민씨 형제들과 연루되어 사형당할 때 다시 고초를 겪고는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실록을 통해 맹사성의 관력(官歷)을 추적해보면 이 일 말고는 특별한 허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저 중앙의 요직과 지방의 관찰사를 오가며 치적(治績)을 쌓아간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비결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그의 천품이 흔히 환해풍파(宦海風波)라고 부르는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순항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禮는 허조, 樂은 맹사성
 
  조대림 사건이 있고 정확히 2년 후인 태종 10년 8월 10일 맹사성은 직첩(職牒)을 돌려받는다. 일단 다시 벼슬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얼마 후에 맹사성은 예악(禮樂)을 관장하는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태종 11년 윤 12월 7일 맹사성이 외직인 충주목사에 제수되자 예조에서 아뢰었다.
 
  “관습도감제조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政務)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맹사성을 도성에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이에 얼마 후 그는 공안부윤(恭安府尹)이라는 내직을 맡았다. 그다지 중요한 자리는 아니다. 태종은 맹사성에 대해 마음을 다 풀지 않았던 것이다.
 
  1412년 5월 3일 맹사성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영의정 하륜이 태종에게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해달라 아뢰었다.
 
  “본국의 악보(樂譜)가 다 폐결(廢缺)되어 오직 맹사성만이 악보에 밝아서 오음(五音)을 잘 어울리게 합니다. 지금 감사의 임명을 받아 장차 풍해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머물러서 악공(樂工)을 가르치게 하소서.”
 
  이처럼 태종과 세종 대에 예(禮)를 정비하는 일을 허조(許稠)가 맡았다면 맹사성은 악(樂)을 정비하는 일을 책임졌다.
 
  태종 16년 6월 24일 맹사성은 이조참판이 되고 3개월 후에 마침내 예조판서가 되어 판서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후 호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세종 1년에는 인사를 책임지는 이조판서가 됐다. 이때는 상왕(上王) 태종이 인사를 하던 때이므로 마침내 태종이 맹사성의 진가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황희보다 1년 늦은 1427년에 우의정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이라는 세종 치세 쌍두마차의 탄생이다. 이후 《세종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황희·맹사성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이다. 정사(政事) 하나하나를 두 정승과 토의해가며 결정했다는 것을 이 표현만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먼저 맹사성은 상왕 태종이 살아 있던 때에 이조판서를 거쳐, 한성부판사,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다음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된다. 처음에는 두 달여밖에 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이조판서는 2년 이상 하게 된다.
 
 
  태종의 총애를 받은 조말생
 
조말생
  태종의 구상에 이때 황희는 남원에 유배 중이었기 때문에 이조판서 맹사성,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1370~1447년)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을 세종에게 재상감으로 물려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구상은 결국 황희가 막판에 복귀하고 조말생은 끝내 세종에게 배척당함으로써 황희-맹사성 구도로 가게 된다.
 
  세종 3년 12월 7일 맹사성은 이조판서에서 의정부찬성사로 옮긴다. 우의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리이다.
 
  조말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먼저 세종 29년(1447년) 4월 27일 졸기(卒記)를 통해 알아보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학문에 힘써서 신사년(辛巳年·1401년 태종 1년)에는 장원급제로 뽑혀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제수되었고 감찰(監察)·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이조정랑으로 영전했다가 정해년(丁亥年·1407년) 중시(重試)에 (변계량에 이어) 둘째로 뽑혀 전농부정(典農副正)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사헌장령에 제수되어 직예문관(直藝文館)을 담당했고 신묘년(辛卯年·1411년)에는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선공감판사)가 되었다가 곧 승정원동부대언에 잠시 제배(除拜)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해 지신사가 되고 무술년(戊戌年·1418년)에는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품계를 뛰어 정덕대부(靖德大夫)로 가자(加資·품계 승진)하니 말생(末生)이 사양하여 말했다.
 
  “신이 오래 출납(出納·임금의 말과 신하의 말을 전달함)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조금도 계옥(啓沃·의견을 내어 임금에게 도움이 되는 것)한 것이 없사온데 등급을 뛰어 제수하시오니 성은(聖恩)이 너무 지중해서 진실로 부끄럽습니다.”
 
  태종이 말했다.
 
  “경을 대신 자리에 두고자 하나 아직 천천히 하려 하니 사양하지 마라.”
 
  다음 달에 형조판서로 승진시켰다가 곧 병조판서로 옮겨서 군정(軍政)에 관한 시종(侍從)을 맡게 하여 태종이 총애하는 대우가 더욱 융숭했다.〉
 
 
  뇌물죄가 조말생의 발목 잡아
 
  이것만 봐서는 ‘정승 조말생’은 시간문제다. 상왕 태종이 신왕 세종에게 조말생을 정승감으로 꼽았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끝내 조말생은 정승에 오르지 못했다. 졸기 중에서 세종 때를 살펴보자.
 
  〈병오년(丙午年·1426년)에 장죄(贓罪·장물죄)에 연좌되어 외직(外職·지방 관직)으로 좌천되었다가 무신년(戊申年·1428년)에 불러들였다가 임자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봄에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겨울에 병으로 사면했는데 갑인년(甲寅年·1434년) 9월에 중추원사에 제수되고 을묘년(乙卯年·1435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중추원판사)가 되고, 예문관대제학으로 옮겼다가, 무오년(戊午年·1438년)에 도로 중추원판사가 되었으며 기미년(己未年·1439년)에 궤장을 받고 임술년(壬戌年·1442년)에 숭록대부(崇錄大夫·종1품)에 승진하고 갑자년(甲子年·1444년)에 보국(輔國·정1품)으로 가자를 받고 병인년(丙寅年·1446년)에 중추원영사가 되었는데 이해(1447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78세였다.〉
 
  세종 즉위년부터 병오년까지 8년 동안 조말생은 줄곧 병조판서로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의정부가 아닌, 원로원에 해당하는 중추원에서 품계만 영의정에 준하는 영중추에 머물러야만 했다. 중앙정치에서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을까?
 
  졸기는 그가 끝내 정승에 오르지 못한 까닭을 뇌물죄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말생은 기개와 풍도가 넓고 컸으며[氣度恢洪·기도회홍] 일을 처리함에 너그럽고 두터워[處事寬厚·처사관후] 태종이 소중한 그릇으로 여겼으나 옥에 티(뇌물죄)가 신상에 오점이 되어 끝끝내 국무대신이 되지 못했다.〉
 
  국무대신, 즉 정승이 되지 못한 점이 조말생에게 천추의 한이었음을 졸기가 인정하고 있다. 사람됨에 있어 “넓고[恢] 크며[洪] 일 처리가 너그럽고[寬] 두터웠다[厚]”면 타고난 정승감 아닌가?
 
 
  권세를 즐긴 잘못
 
  사실 태종 때도 뇌물 수수는 흔했다. 하륜이 그랬고 박은이 그랬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결국 조말생을 정승의 자리에 올리지 않았을까? 그 해답은 세종 8년(1426년) 3월 7일 자 실록에 담겨 있다. 세종의 말이다.
 
  “옛날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대체로 모든 관원을 임명함에 있어서, 임금이 그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무를 맡은 대신에게 이를 맡기는 것이요, 대신이 사람을 쓰는 것은 반드시 과거부터 알던 사람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무를 오래 잡으면 아무리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는 사람일지라도, 남들이 반드시 그가 사사로운 정실(情實)을 행사한다고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지신사로부터 병조판서까지 10여 년간이나 오랫동안 정무를 잡은 사람으로는 조말생처럼 오래된 사람이 없더니 과연 오늘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세종은 조말생의 뇌물 수수를 단순 뇌물죄가 아니라 사사로이 자기 권력을 행사한 문제로 인식했다. 정승은 임금을 돕는 자일 뿐 임금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조말생은 세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던 것이다.
 
  이 질문, 즉 “왜 세종은 조말생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는 “왜 태조는 정도전을 정승으로 삼지 않았을까?”만큼이나 흥미로운 문제 제기다. 게다가 태종에서 세종으로의 권력 이양기에 줄곧 병조판서를 맡아 병권(兵權)을 쥐었던 인물이 바로 조말생이다. 사실 조말생은 아버지의 신하였다. 그럼에도 세종은 《논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명심했기에 8년 내내 조말생을 병조판서에 그대로 두었다.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에는 3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조금도 잊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효라고 이를 만하다.”
 
  우선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태종이 조말생에게 맡긴 병조판서 자리를 그 후에도 4년 동안 그대로 맡겼다.
 
  조말생으로서는 오히려 자신을 내치지 않은 세종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단지 그는 본인의 처신에서의 잘못, 즉 권세를 즐긴 잘못으로 인해 끝내 정승까지 올라갈 수 없었을 뿐이다. 그 반대쪽에 맹사성이 있었던 것이다.
 
 
  公堂 문답
 
  맹사성이 우의정으로 있을 때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세종은 세종 12년 4월 26일 황희와 맹사성에게 《태종실록》 편찬의 감수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려고 했다. 그러자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도 이에 따랐다. 즉 성군(聖君)이라는 세종도 실록을 보고 싶어 했고 그것을 저지한 사람이 바로 맹사성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의 관리이자 문필가인 성현(成俔)의 책 《용재총화(慵齋叢話)》(1525)에는 그의 넉넉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고향인 충청도 온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그가 비를 만나 경기도 용인의 어떤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경상도에서 올라온 부호(富豪)가 패거리를 잔뜩 거느린 채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고 우의정 맹사성은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부호는 맹사성을 불러 함께 장기를 두자고 했다. 이에 응한 맹사성과 한창 장기를 두던 중에 그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서로 공(公)자와 당(堂)자를 끝에 붙여가며 문답을 하자는 것이다.
 
  이에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 하러 한양에 가는공(公)?”
 
  “녹사(錄事) 벼슬을 얻기 위해 올라간당(堂)?”
 
  “내가 그대를 위해 그 자리를 얻어줄공(公)?”
 
  “우습구나. 당치도 않당(堂).”
 
  이들의 공당(公堂) 문답은 여기서 끝났다. 한양으로 돌아온 맹사성이 의정부에 있는데 그 사람이 녹사 시험을 보러 들어왔다가 맹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떠한공(公)?”
 
  그 사람은 물러가 엎드리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당(堂)!”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맹사성이 전후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함께했던 재상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맹사성의 추천으로 녹사가 되고 훗날 지방의 유능한 관리가 됐다고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맹사성의 면모는 여유로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 여유로움이 환난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고 그 눈이 그를 이조판서와 정승 자리에까지 올렸기 때문이다. 그 후 1432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치적보다 행실 뛰어나
 
  맹사성은 고려 말부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마치 하나의 임금 밑에서 일을 한 듯이 관품이 높아졌다. 태종 때 고초를 겪은 것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정치 바람을 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윗사람에게 아첨을 일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논어》 태백(泰伯)편에서 공자가 말한 이 한마디가 아닐까?
 
  “그 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윗자리를 넘보지 않고 윗자리에 나아가서는 아랫사람들의 일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7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치적보다는 그의 행실을 높이 평가해 이렇게 말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階梯)가 얕은 자라도 만나보고자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은 맹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의 집이 맹사성의 집 아래에 있었다. 맹사성은 늘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성석린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위(魏)나라 유소(劉邵)의 《인물지》 재상 유형에 따르면 맹사성은 일을 하는 술가(術家)나 법가(法家)라기보다는 청절가(淸節家)라고 할 수 있다. 태평성대에 꼭 필요한 유형이니 세종 때 재상을 지낸 것은 본인이나 나라로서 모두 큰 행운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미 《이한우의 주역》(21세기북스)에서 맹사성을 절괘(節卦) 육사(六四), 즉 밑에서 네 번째 음효(陰爻)로 풀어낸 바 있다. 이 효에 대해 공자는 “자연스럽게 절제해 형통한 것은 위의 도리[上道·상도]를 받들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육사는 부드러운 자질로 부드러운 자리에 있으니 바르고 육삼(六三)과는 친하지 않지만 구오(九五)와는 가깝다. 또 초구(初九)와도 호응 관계이니 여러 가지로 좋다. 정이천(程伊川)의 풀이다.
 
  “육사는 굳세면서 중정(中正)을 이룬 구오의 도리를 고분고분 따르며 받드니 이것이 중정함으로써 절제하는 것이다. 음의 자질로 음의 위치에 있어 바른 도리에 편안하니 절제함이 있는 모습이고 아래로 초구에 호응한다. 육사는 감괘(坎卦)의 몸체에 있으니 물에 해당한다. 물이 위로 넘치는 것은 절제가 없는 것이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은 절제가 있는 것이다. 육사와 같은 사람의 마땅한 의리는 억지로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함에 편안하니 형통함에 이를 수 있다. 절제는 우러나서 편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억지로 절제하면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를 써서 안정을 이루지 못하면 오래도록 지속할[常] 수가 없으니 어찌 형통할 수 있겠는가?”
 
  즉 위에 있는 구오를 받드는 마음이 억지스러움이 없고 우러나서 하는 편안함이기에 형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사성의 단점
 
  이는 《논어》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안인(安仁)과 이인(利仁)의 차이를 통해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도리를 통해 자신을) 다잡는 데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고, 좋은 것을 즐기는 데에도 오랫동안 처해 있을 수 없다. 어진 자는 어짊을 편안하게 여기고[安仁] 사리를 아는 자는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利仁].”
 
  여기에는 오래도록 지속함의 문제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조선 재상 중에 절괘의 육사에 가까웠던 인물로는 맹사성을 빼놓을 수 없다. 실록 졸기는 맨 마지막에 그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仁柔] 무릇 조정의 큰일이나 거관처사(居官處事)에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
 
  술가나 법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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