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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3 | 하륜(河崙)전

‘조선의 길’을 만든 현실주의 경세가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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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륜은 충직한 신하이므로 그 덕의를 높여서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스승으로 대접”(태종)
⊙ ‘관상’ 앞세워 태종 이방원에게 접근, 왕자의 난 등 추진
⊙ 고려 말 權臣 이인임의 조카사위
⊙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건의한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경남 진주에 있는 하륜의 무덤. 사진=조선DB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과 하륜(河崙·1347~1416년)은 상극(相剋)이다. 조선 500년 현실 역사에서 하륜에 대한 평가가 올라갈수록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내려갔다. 정도전이 이상주의 경세가(經世家)였다면 하륜은 현실주의 경세가였다. 정도전은 실패한 사상가였던 반면 하륜은 성공한 경세가였다. 현실 속의 조선은 정도전의 길을 버리고 하륜의 길을 따랐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에는 정도전은 알아도 하륜은 모른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역전돼버렸다. 어쩌면 정도전의 ‘실패한 꿈’이 주는 묘한 매력 때문에 정도전에게 이끌리는 경향은 앞으로 더 강해질지 모른다. 반면 하륜은 현실정치에 깊이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해 건강함을 잃은 우리 학계 풍토가 만들어낸 학문적 천박성의 한 단면이라 하겠다.
 
  하륜을 망각의 늪에 빠트려놓고서는 조선(朝鮮) 탄생의 온전한 비밀을 알 수 없다. 반쪽도 안 되는 사실(史實)에 허구를 집어넣는 팩션이 우리 역사일 수는 없다. 역사는 역사로 보고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 그쳐야 한다.
 
  7년간 《조선왕조실록》 읽기를 통해 새롭게 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큰 인물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임금의 경우 이미 6명에 대한 조명 작업을 마쳤기 때문에 이제 국가를 이끈 재상(宰相)에 주목하고자 한다. 뛰어난 재상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런 인재를 알아보고 중용한 임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륜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곧 태종의 인사(人事)를 살피는 길이기도 하다. 하륜 없이 태종 때의 치세(治世)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마치 황희(黃喜) 없이 세종 때의 치세를 설명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조카사위
 
이인임의 조부 이조년.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유명하다.
  하륜이 조선이라는 새로운 배에 올라타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하륜은 1347년(충목왕 3년) 당시 순흥부사 하윤린(河允潾)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륜이 문과에 급제한 때는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 19세였다. 전형적인 소년등과(少年登科)였다. 《태종실록》 16년 11월 6일 하륜 졸기(卒記)다.
 
  “좌주(座主) 이인복(李仁復)이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이인복은 성주(星州) 이씨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형이며 학식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해 옳은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기뻐했고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다고 한다.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관리로서도 정도(正道)를 걸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최대 명문가이자 실력자 집안인 성주 이씨 집안 사위가 됐다는 것은 하륜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절이 녹록지 않았다. 마침 그때는 신돈(辛旽)의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15년(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정추(鄭樞)가 정식으로 상소를 올려 신돈을 비판하다가 관직에서 축출당하고 유배를 가야 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개혁 성향의 신진사대부들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신돈에 맞섰다.
 
  하륜도 예외는 아니었다. 춘추관검열, 공봉(供奉)을 거쳐 1368년(공민왕 17년) 관리 3년 차이던 하륜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어 신돈 문객을 규탄하다가 좌천을 당하게 된다. 감찰규정이란 조선 시대의 사헌부 감찰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종6품직이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으니 혈기왕성할 때다. 그로서는 첫 시련이었다.
 
  복직되어 관리 생활을 하던 하륜은 1388년(우왕 14년) 최영(崔瑩)이 주도한 요동 정벌에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결국 하륜은 유배지에서 조선 개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하륜 졸기와 달리 《고려사절요》에는 하륜이 이인임 인척이었기 때문에 유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악 천도 주장
 
  즉 배경 자체가 이성계(李成桂)와는 다른 쪽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하륜은 개국 1년이 지난 1393년(태조 2년) 9월 13일 경기좌도 관찰출척사로 관직에 복귀한다. 이때 그는 흥미롭게도 풍수지리학을 통해 여러 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李穡)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태조 2년 12월 11일 글을 올려 계룡산 신도(新都) 건설론을 중단시킨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후에도 천도론이 제기되자 하륜은 일관되게 무악(지금의 연세대 자리)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 3년 8월 12일 그가 올린 글이다.
 
  “우리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곳은 계림과 평양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의지할 만하여, 우리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다. 지금의 한양 천도로 결정이 났다. 이후 태종 때 다시 천도 문제가 불거지자 하륜은 그때도 무악 천도설을 주장했다.
 
 
  ‘관상’ 내세워 태종에게 접근
 
하륜의 정적이었던 정도전.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권력을 향한 그의 노력은 집요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李芳遠·태종)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 한 인물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 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南誾)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이야기이고 다시 태조 때로 돌아간다.
 
  하륜은 태조 때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줄곧 맡은 관직은 충청도 도관찰사(都觀察使)이다. 실록 졸기이다.
 
  〈갑술년(甲戌年·1394년)에 다시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병자년(1396년)에 중국 고황제(高皇帝·명 태조 주원장)가 우리 표사(表辭·외교문서)가 공근(恭謹)하지 못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문장을 쓴 사람 정도전을 불러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조가 비밀리에 보낼지 안 보낼지를 정신(廷臣·조정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서로 돌아보고 쳐다보면서 반드시 보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하륜 홀로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니 정도전이 원망하였다. 태조가 하륜을 보내 경사(京師·남경)에 가서 상주(上奏)하여 자세히 밝히니, 일이 과연 풀렸다.〉
 
 
  이방원과 ‘왕자의 난’ 모의
 
  이 무렵부터 정안군 이방원과 하륜이 더욱 밀접해지며 거사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졸기에 이어지는 글이다.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어린 서자)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륜이 일찍이 임금(태종)의 잠저(潛邸·임금 되기 전 사저)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했다.
 
  “이는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임금은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말했다.
 
  “이는 다만 아들이 아버지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것일 뿐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 하륜은 충청도 도관찰사로 있었다.
 
  실제로 이미 무인정사(戊寅定社) 1년 전부터 이방원과 하륜은 밀접해 있었고 정도전은 이를 경계해 하륜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내보냈다.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것이었다. 태조 6년(1397년)에 일어난 박자안(朴子安·?~1408년) 사건은 흔히 태종이 박자안의 아들 박실(朴實·1367~1431년)의 요청으로 박자안을 구원해준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실은 하륜과도 무관치 않았다.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자안 사건
 
  태조 6년(1397년) 5월 18일 경상전라 도안무사 박자안이 왜적을 제대로 막지 못해 태조 이성계가 크게 화를 내며 목을 베라고 명했다. 그때 박자안의 아들 박실이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정안공의 집에 찾아와 울며불며 애걸했다. 박실은 정안공 휘하 사람이었다. 왕자 정안공도 마땅한 길이 없었다. 그도 처음에는 “국가의 큰일을 내가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박실은 땅에 엎드려 떠날 줄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사이는 안 좋지만 태조에게 총애를 받는 남은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남은은 “사자가 이미 떠났으니 어찌하겠는가?”라며 외면했다.
 
  일이 어렵게 되었지만 남은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하는 박실을 보고 불쌍하게 여긴 정안공은 다시 자기 집에 있던 영안공 이방과(李芳果·훗날 정종)와 의안공 이화 등 종친들에게 함께 주상을 찾아뵙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들도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이는 국가 기밀사항인데 상감께서 만일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정안공은 “그 책임은 내가 지겠소”라고 답한다.
 
  종친과 함께 대궐에 간 정안공은 내시 조순을 시켜 청을 올리게 했다. 그때 조순이 물었다. “비밀스러운 사안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안공은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일인데, 바깥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답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성계는 처음에는 화를 내며 “너희는 자안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했다가 잠시 후 중추원에 명을 내렸다.
 
  “급히 말 잘 타는 사람을 보내 자안의 죄를 용서한다는 명을 전하라.”
 
  중추원 심구수가 힘차게 말을 달렸다. 한 사람의 목숨이 자기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어쩔 수 없이 역참 관리로 하여금 대신 자기가 받은 명을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다행히 박자안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기 직전, 그 역리는 사형장에 도착해 사면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때 아들과 정안공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박자안은 3년 후 정안공이 왕위에 오르자 왕위 계승에 대한 승인을 구하는 습위주문사(襲位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간다. 귀국 후에는 의흥삼군부사 참판사와 경상도 도절제사를 거쳐 1405년에는 오늘날 해군참모총장 격인 수군 도절제사까지 겸하게 된다.
 
  물론 정안공이 움직인 이유는 아들 박실의 효심 때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숨어 있었다. 5월 27일 자 실록이다. 박자안 공사(供辭)에 계림부윤 하륜이 언급돼 모두 옥으로 불려 온 것이다. 이에 하륜은 수원 감옥에 갇혔다. 정안공이 박자안에 대해 손을 쓰지 않았다면 하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1년 동안 관직에서 배제된 하륜은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인 태조 7년 7월 19일에야 다시 관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역시 충청도 도관찰출척사였다.
 
  그만큼 정도전 일파는 하륜을 경계했으나 끝내 막지는 못했다.
 
 
  이거이 제거
 
  하륜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차 왕자의 난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올랐다. 공로로 보자면 이미 조준(趙浚)을 앞서고 있었다.
 
  즉위 초 하륜이 가장 먼저 태종의 뜻을 헤아린 일은 이거이(李居易) 제거다. 당시 태종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인물은 이거이 부자였다. 이거이는 왕자의 난으로 태종이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출세하기 시작하였다. 왕자의 난 직후, 정사공신에 올랐으며, 또한 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좌명공신에 책봉되었다. 이거이는 조선 왕조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이거이 아들 이저(李佇)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하였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가 조선 왕조 건국 이후에도 이거이의 정치적 진출을 쉽게 하였으며, 나아가 태종 집권 이후에도 이거이가 공신이 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정종 때 세자 이방원 주도로 시행된 사병혁파(私兵革罷) 조처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연유가 되어 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때 태종이 불러 올려 좌정승에 임명했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이에 우정승 하륜이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자기가 먼저 변괴 등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결국 이거이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 1년 3월 28일 자 실록이 전하는 그때 배경 설명이다.
 
  〈즉위(卽位)한 뒤에 이거이를 좌정승으로 삼았으니, 대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요, 오래 맡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이거이가 이를 알지 못하고 조금도 사면할 뜻이 없으므로 하륜이 가만히 임금께 고하고 재이(災異)를 칭탁하여 사직한 것이었다.〉
 
 
  明君과 賢臣
 
  이거이가 물러난 이후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실권(實權)은 하륜에게 있었다. 아직 정승에 오르기 전인 태종 2년 9월 17일에 태종은 하륜이 비방으로 인해 관직을 사직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4일 김사형을 갈고 하륜을 좌정승으로 임명한다. 이때 하등극사(賀登極使) 사신을 가야 하는데 김사형과 이무 모두 사양하니 하륜이 나서 자신이 직접 가겠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기뻐서 울고 하륜도 울었다”고 기록했을까?
 
  정승 하륜은 무엇보다 일을 알아 계책을 낼 줄 아는 정승이었다. 실록에 “하륜의 의견을 따랐다”는 표현이 수도 없이 나오는 이유다.
 
  태종 즉위와 더불어 하륜은 오랜 기간 좌정승으로 있으며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태종을 지근거리에서 도왔다. 관제(官制) 개혁을 통해 새로운 국가의 관료제도를 확립했고 의정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를 추진하던 태종의 구상을 앞장서 실현시켰다. 《태종실록》은 네 차례나 좌정승에 있으며 국정을 이끌었던 그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건의한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사실 이 대목은 《서경(書經)》 ‘군진(君陳)’편에 나오는 재상의 바른 도리와 그대로 일치한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은 군진이라는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며 여러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중 한 대목이다.
 
  “너는 아름다운 꾀와 아름다운 계책이 있거든 들어와 안에서 네 임금에게 고하고 너는 마침내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꾀와 이 계책은 우리 임금님 덕분이다’라고 하라.”
 
  훗날 하륜이 세상을 떠나고 다른 신하들이 태종에게 하륜을 그토록 총애했던 까닭을 물은 적이 있었다. 이에 태종은 말했다.
 
  “하정승의 귀로 들어간 일이 그의 입으로 나오는 것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하륜이 태종이 총애하는 측근이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탁월한 경륜으로 태종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다. 그런데 하륜은 자기 세력이 없었다. 어쩌면 키우려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륜은 태종과 민제 사이를 오가며 힘든 줄타기를 해야 했다. 사실 태종과 하륜을 연결해준 인물이 민제다. 그와 민제의 교제는 계속된다. 그러면서도 너무 태종에 기운다 싶으면 민제의 비판이 따랐고 민씨 집안으로 기울 때는 태종의 견제가 따랐다. 어쩌면 그것은 테크노크라트의 숙명이기도 했다.
 
  태종 7년(1407년) 6월 하륜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원래 중국 사신 황엄이 태종 집권 초 한양을 방문했을 때 중국 황녀와 태종의 세자를 결혼시키자는 논의가 있었다. 태종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별말이 없자 태종은 과거 동기생인 김한로의 딸과 결혼시키기로 약속을 했다.
 
  이런 와중에 하륜이 태종의 동서인 조박과 함께 민제를 만나 세자와 황녀의 결혼 문제를 은밀하게 논의하다가 김한로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여느 때와 달리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함이었다”며 “하륜은 공신이니 책임을 묻지 말라”고 말한다. 얼마 후 가뭄을 이유로 좌의정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면서 하륜의 사위 이승간을 ‘특별히’ 동부대언으로 임명했다. 실록은 “하륜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고 쓰고 있다.
 
  실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태종 7년이라는 해는 사실 태종과 민씨 형제들 간의 치열한 암투가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세자 혼인 파동이 6월에 있었고 7월에는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연금(軟禁) 상태에 들어가고 11월 11일에는 두 사람의 직첩(職牒)마저 빼앗았다. 바로 이날 지신사(知申事·후일의 도승지, 현 대통령비서실장) 황희는 태종과 하륜 사이를 오가며 태종의 조치에 대한 하륜의 평가를 태종에게 전했다.
 
 
  태종, “그 충성하고 곧음을 사랑”
 
황희
  이때 하륜이 “민씨 형제가 세자를 제거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다른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 것이니 그렇게 중하지는 않다”고 잘못(?) 답변을 했다. 황희가 다시 태종에게 이 말을 전하자 태종은 대신들이 앉는 자리 중 한 곳을 가리키며 조용히 이른다.
 
  “전에 하륜이 여기에 앉아서 정사를 논할 때 내가 한심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빨리 다시 가서, ‘이 말을 다른 사람과 말한 적은 없는가?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하라.”
 
  그러면서 황희에게도 “이 말이 만일 누설된다면, 내가 아니면 네 입에서 나온 것이다”고 다짐을 받는다. 하륜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말을 황희로부터 전해 들은 하륜은 “살길을 가르쳐주시니, 몸 둘 곳이 없습니다”며 땅에 엎드려 감읍했다. 이를 보고 돌아온 황희에게 태종은 “(하륜은) 내가 아니면 보전하기 어렵다. 그 충성하고 곧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태종 8년 10월 1일 태종은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죄를 10가지 구체적으로 열거한 다음 신료들은 이들 집안과 내왕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런데 11월 7일 대간(臺諫)들이 국문(鞫問) 과정에서 민제와 하륜이 내왕한 사실을 밝혀내 하륜을 탄핵했다. 태종은 오히려 대간들을 옥에 가두고 추국(推鞫)했다. 오죽했으면 하륜이 자신 때문에 대간들이 고초를 겪으니 민망하다며 그들을 풀어줄 것을 간청할 정도였다. 이때도 태종은 한사코 “이씨 사직에 하륜만큼 특별한 공덕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하륜을 감쌌다.
 
 
  하륜의 마지막
 
  또 하륜은 죽기 4개월여 전인 태종 16년 6월 22일 봉투에 밀봉한 글을 태종에게 올렸다. 이를 읽어본 태종은 지신사 조말생(趙末生)을 불러 이 글을 보여준다. 심온(沈溫)과 황희는 간악한 소인배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인사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적고 있었다. 조말생이 다 읽고 나자 태종은 큰 실망감을 표시한다.
 
  “진산(晋山·진산부원군 하륜)은 충직한 신하이므로 내가 그 덕의를 높여서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항상 빈사(賓師·스승)로서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 글을 보니 내가 심히 마음이 편치 못하다. 황희는 내가 일찍부터 한 집안으로 대접해왔고, 더구나 심온은 충녕대군의 장인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이 치밀하지 못하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치밀하지 못하면 몸을 잃는다’고 하였다.”
 
  특별한 사실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마도 자신의 감이 그랬다는 것 같다. 그러고 11월 6일 하륜은 세상을 떠난다. 황희는 두고두고 명재상으로 칭송을 받게 되고 심온은 태종의 손에 죽게 된다.
 
  하륜은 태종 16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에 있는 왕실 조상들의 능침(陵寢)을 돌아보던 중 그곳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충신다운 죽음이었다.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하륜이 천성적인 자질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었으나, 관복 차림으로 묘당(廟堂·정승 집무실)에 이르러 의심을 결단하고 계책을 정함에는 조금도 다른 사람이 헐뜯거나 칭송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되도록 대체(大體)를 살리고 아름다운 모책과 비밀의 의논을 계옥(啓沃·건의)한 것이 대단히 많았고, 물러나와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몸을 가지고 물건을 접하는 것을 한결같이 성심으로 하여 허위가 없었으며, 종족(宗族)에게 어질게 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실(信實)하게 하였으며, 아래로 동복(僮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다. 인재(人材)를 천거하기를 항상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였으나, 조금만 착한 것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그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집에 거(居)하여서는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잔치하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성질이 글을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유유(悠悠)하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었다.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까지도 모두 지극히 정통하였다. 후생을 권면(勸勉)하여 의리를 상확(商確)함에는 부지런히 하여 권태를 잊었다. 국정(國政)을 맡은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 사대(事大)하는 사명(辭命)과 문사의 저술이 반드시 윤색(潤色)·인가(印可)를 거친 뒤에야 정하여졌다.〉
 
 
  세종, 하륜에 대해 인색한 평가
 
  하륜에 대한 조선 후대 평가를 보면 다양하다. 그중 세종은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세종 13년 3월 8일 자 실록이다.
 
  “태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하륜의 문장을 권근(權近)에 비한다면 마치 문부(文簿·문서)를 알아보고 처리하는 아전과 같다’라고 하셨는데, 그 뒤에 내가 하륜에게 경서(經書)를 물었던바, 과연 깊이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장에는 비록 짧았으나 이재(吏材)는 뛰어난 데가 있었다.”
 

  같은 해 9월 8일에는 신하들과 과거 인물들을 평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지나간 대신들을 말하자면 하륜·박은·이원 등은 모두 재물을 탐한다는 이름을 얻었는데, 륜(崙)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를 도모하는 신하이고, 은(訔)은 임금의 뜻에 맞추려는 신하이며, 원(原)은 이(利)만 탐하고 의(義)를 모르는 신하였다.”
 
  세종의 이 같은 평은 하륜이 청절가(淸節家) 면모는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주역》 대과괘(大過卦·䷛)로 보는 태종과 하륜
 
  대과괘(大過卦·䷛)의 밑에서 네 번째 양효(陽爻)에 대해 주공(周公)은 “구사(九四)는 들보 기둥이 높아지는 것이니 길하지만 다른 마음을 가지면 안타깝다”라고 했고 공자(孔子)는 이를 “들보 기둥이 높아지는 것이 길하다라는 것은 아래로 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풀었다.
 
  구사는 군주와 가까운 대신의 자리에 처해 대과(大過)의 임무를 맡은 자다. 구사의 처지를 보면 양효로 음위에 있어 자리가 바르지 못하고 초륙(初六)과 호응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대과(大過)의 시대다. 큰 것이 아주 지나친 대업을 이루려 할 때에는 양강의 임금인 구오(九五)를 양강의 재상인 구사가 보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이천(程伊川)이 말한 “역(易)을 말하는 사람은 형세의 가볍고 무거움, 흘러가는 때의 변역(變易)을 아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의 깊은 의미다. 구사에 대한 정이천 풀이를 보자.
 
  〈대과(大過)의 때에는 양강이 아니면 구제할 수 없고 양효로 음위에 처한 것은 (자리는 바르지 못하나) 마땅함을 얻은 것이니 만약에 또 초륙의 음과 서로 호응하게 되면 지나친 것이 된다. 이미 굳셈과 부드러움이 서로 마땅함을 얻었는데 뜻이 다시 음(陰·초륙)에 응하려 하면 이는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마음이 있으면 구오에 누가 되니 비록 큰 해로움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안타깝게 여길 만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도 ‘들보 기둥이 높아진다’라는 것을 이와 관련해 풀었다. 즉 뜻이 아래로 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는 강명(剛明)한 군주인 태종을 만나 나라의 기초를 다진 하륜에 해당하는 효라고 할 수 있다. 하륜도 만만치 않은 굳센 신하[剛臣]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때가 바로 대과를 성취하려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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