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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역사 1

도시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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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만큼 빠르고 성공적으로 도시화를 이룩한 나라는 드물다”(벤 윌슨)
⊙ 교역이 있었기에 농경과 도시, 문명의 출현 가능
⊙ 중국 신화 속 신농씨, 농경 가르치고 市場 개설
⊙ 1972년 로마클럽 ‘암울한 미래’ 예견했지만 빗나가… ‘근본자원’인 인간의 지혜 간과
⊙ 좌파에게 도시는 언제나 질타의 대상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롯데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사진=조선DB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항상’ 문명(文明) 속에서 살아온 것은 아니다. 고고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인류사(人類史)의 거의 대부분의 기간은 문명 이전의 삶이었다. 최초의 문명은 ‘불과’ 5000년 전에 등장했다. 현생(現生)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을 기점으로 잡으면 문명의 역사는 이제 막 시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원점을 찾자면 통상 1만 년 전 일어난 어떤 변화를 지목한다. 신석기혁명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Gordon V. Childe·1892~1957년)가 1936년 펴낸 《신석기혁명과 도시혁명(원제·Man makes himself)》에서 처음 제기한 개념이다.
 
  수렵 채집에만 의존하던 인류가 농경이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식량 생산 양식을 발명함으로써 비약적인 사회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는 이론이다.
 
  고든 차일드는 농경의 시작을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라는 뜻에서 신석기혁명(The Neolithic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다. 이 식량생산혁명(Food Production Revolution)으로 인간은 마침내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는 게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문명을 잉태한 씨앗이라고 설명한다.
 
 
  도시는 곧 市場이다
 
  하지만 이것은 씨앗이지 문명의 직접적인 시작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명은 무엇보다도 도시다. 문명이라는 용어는 다양하게 사용된다. 문화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물질적·기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기독교 문명, 이슬람 문명, 유교 문명처럼 종교라는 정신문화적 구분에서도 적용된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 주목하든 도시를 빼고는 문명을 말하지 못한다. 도시의 탄생이 설명돼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는 무엇인가? 또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시는 곧 시장(市場)이다. 도시는 행정, 문화, 종교 때로는 공업 생산 등 다양한 특성을 명칭으로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든 계획도시든 시장과 무관한 도시는 없다. 문명의 기원을 찾는 것은 도시의 기원을 찾는 것이고 도시의 기원을 찾는 것은 결국 시장의 기원을 찾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신석기혁명론에는 덧붙여지는 설명이 있다. 농경의 시작으로 삽이나 손도끼 같은 생산 도구의 개발과 곡물 빻기, 의복 제작, 토기 굽기 등의 분업으로 원시적 수공업이 형성되었다. 개인이나 집단이 잉여생산물을 사유하게 됨으로써 저장경제와 교환경제가 발달하고 빈부격차도 생겨 신분·지위의 고하가 나타났다. 그리고 관개(灌漑)농업으로 농업 생산이 늘어 대규모 취락(聚落)이 형성되어 문명이 발생했다. 분업과 잉여생산이 시장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확실히 이것은 시장의 발달을 촉진했을 것이다. 그런데 농업혁명 전에는 교환경제가 없었을까? 아니다. 오늘날의 원시적인 사회에서도 물물교환이 포착되듯 수렵·채집 시대에도 교환은 있었다. 교역은 농경보다도 더 오래됐다. 농경이 시작되던 무렵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수렵·채집에서 재배로
 
  약 1만5000년 전 빙하(氷河) 시대가 끝났다. 빙하지대가 북상(北上)함에 따라 추위에 적응한 순록과 사슴도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순록과 사슴을 따라 북쪽으로 간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빙하가 사라진 지역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개발했다. 곡물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따뜻한 기후 속에서 자라난 풍부한 식물들이 인간에게 새로운 먹거리를 제공했다. 초기에는 수렵과 채집을 병행했다. 그런데 수렵과 채집을 병행하며 일종의 잡식동물로 살던 인간들이 점차 곡물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져갔다. 야생의 밀과 보리는 특히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부터 유프라테스강 유역 같은 지역의 수렵·채집인들의 중요한 먹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풍부한 식생(植生)이 있는 한은 아직 농사를 지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풍요로운 야생의 천국이었던 사하라가 사막화된 것과 같은 또 다른 변화가 왔다. 수렵과 채집만으로 먹거리를 구하는 데 한계가 왔다. 사냥감의 수가 줄어들고 잠깐 나서서 돌아다녀도 쉽게 구해지던 열매들도 드물어져 갔다. 결국 야생의 밀과 보리를 채집만이 아니라 재배(栽培)를 하게 되었다.
 
  밀과 보리를 재배하면서 먹거리 가운데 곡물의 비중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농경은 가장 원시적이고 초기적인 방법으로도 뿌린 씨앗의 몇 배나 되는 곡물 생산을 가져왔다. 풍부한 곡물 생산은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했다. 더 많은 인구가 농업에 유리하기도 했다. 인구 증가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렇게 늘어난 인구는 역으로 농사가 아니고선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소금과 교역
 
농경을 가르치고 시장을 열었다는 신농씨.
  이제 인간은 정착을 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착 농경을 위해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소금 문제였다. 육식을 중심으로 하던 때에는 따로 소금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육류 자체에 이미 염분(鹽分)이 함유돼 있었다. 하지만 곡물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소금을 따로 섭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곡물은 암염(巖鹽)이 있는 소금기를 품은 땅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했다.
 
  인간의 생존에는 염분 섭취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착 농경을 위해선 소금이 필요했다. 교역은 필수였다. 소금처럼 자신의 정착지에서 생산할 수 없는 것을 확보할 방법은 필요한 물자가 생산되는 지역과의 교역뿐이었다. 교역이 없는 정착지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농경과 교역의 관계 문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신화(神話)가 있다. 바로 고대(古代)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 삼황오제 중 하나인 신농씨(神農氏) 이야기다. 명칭에서 이미 보이듯 그는 농경의 시조다. 신농씨는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신농씨가 동시에 시장을 세워 백성들에게 교역을 가르쳤다. 덕분에 그는 중국 경제의 조신(祖神)이기도 하며 중국문명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고대의 신화와 전설 가운데 농경과 교역의 관계를 이만큼 선명히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사실 교역은 농경보다도 더 오래된 것이다. 수렵을 하던 시절에도 이미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흑요석(黑曜石)이다. 흑요석은 그 특유의 날카로운 유리질 특성 때문에 오래전부터 칼이나 화살촉으로 사용되었다. 흑요석의 산지(産地)는 특정 지역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흑요석을 사용한 칼과 화살촉은 산지에서 현저히 멀리 떨어진 지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교역이 아니고선 설명이 어렵다.
 
  인간은 자신의 영역에서 구하거나 직접 생산할 수 없는 물자라도 필요하면 교역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농경 정착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이 정착 농경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교역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문명은 본질적으로 상업문명
 
  농경을 하지 않지만 곡물을 알고 농경지대로 곡물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농경지대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갖고 왔다. 소금을 가져온 사람들이 우선 가장 중요했다. 그 외에도 필요한 물자들이 많이 있었다. 청동기가 발명되면서 구리와 주석을 가져온 사람들이 있었다. 모피를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어느덧 귀한 대접을 받기 시작한 금은이나 보석들을 가져온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교환을 위해 모여들고 북적대기 시작했다. 교환의 공간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이다.
 
  정착지 내부의 분업화에 따른 교환도 이미 있었다. 각종 도구를 만드는 장인(匠人)들은 자신의 생산품과 곡물을 교환하고 있었다. 내부 분업에 따른 교환과 원격지 교역이 결합하면서 시장은 더욱 복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원격지 물자들에는 기회비용을 지불해주어야 했다. 먼 거리를 넘어 필요한 물자를 가져온 만큼 수송비용이 지불되어야 했다. 또한 위험을 감안한 대가도 지불되어야 했다. 흥정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농경 정착지 인근에 등장한 교역의 중심지는 서서히 위치와 위상이 굳어져 갔다. 그러면서 도시의 원형인 성읍(城邑)이 자리 잡는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신전(神殿)이 있고 정치적 중심도 자리 잡는다. 문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문명은 본질적으로 상업문명이다. 정착 농경이 중대한 전진이고 그것이 문명을 탄생시킨 동력이긴 했으나 교역 없이는 정착 자체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수렵·채집의 시절, 직업으로서의 상인은 아직 없었으나 그때도 물물교환을 하며 필요한 물자를 얻고 있었다. 인간은 사냥꾼 시절부터 이미 교역인이었으며 정착 농경을 하게 된 이후에는 교역의 이점을 더 충분히 활용했다. 교환하는 인간의 속성은 정착 이후 더욱 빛을 발해 정착지에서 생산할 수 없는 물자를 교역을 통해 조달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정착 생활이 문명으로 도약한 것은 상업성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가능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요건을 기반으로 시작된 최초의 문명으로 일반적으로 4대 문명을 꼽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0~5000년 전쯤이다. 이 모든 문명은 도시의 고대적 원형을 보여준다.
 
 
  문명과 도시는 인간 자신의 책임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단어는 ‘도시국가’라는 뜻의 라틴어 ‘civitas’에서 비롯되었다(최초의 의미에선 도시와 국가는 분리돼 있지 않았다). 즉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화인 셈이다. 이 ‘civilization’이라는 용어는 18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영국·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그것을 한자문화권에서는 문명이라 했다.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가 1867년 《서양사정 외편(西洋事情 外篇)》에서 ‘civilization’을 ‘文明’으로 번역하면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후 1875년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을 저술했다.
 
  그런데 기독교 성서 창세기는 죄인인 카인(Cain)이 최초의 도시를 만들고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했다고 서술한다. 즉 도시는 성서적 기원에서는 죄인이 만든 것이다. 이 같은 성서적 전통은 중동(中東)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서술에 그대로 이어져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바빌론에 대한 서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성서적 전통에서도 후대로 가면 도시는 마냥 부정적으로 기술되지는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의 황금기, 다윗에 이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예루살렘은 ‘위대한 도시’로 간주됐다. 예루살렘에는 성전도 있고 시장도 있었다.
 
  18세기 영국에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1731~1800년)라는 기독교 복음주의 계열의 시인이 있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답게 “신(神)은 시골을 만들었다(God made the country)”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그리고 인간은 성읍을 만들었다(and man made the town)”라는 말을 덧붙였다.
 
  인간의 자연적 거점(the country)은 신이 만들었지만, 인간의 인위적 거점으로서의 성읍(the town)은 인간 스스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경계의 함의도 포함돼 있지만 인간 자신의 책임감의 의미도 담고 있다.
 
  도시(the city)는 성읍(the town)이 성장하여 체계화된 영속을 지향하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쿠퍼는 그 도시를 사람이 살 만하게 만들고 도시의 영속인 문명을 그만한 가치를 가질 수 있게 유지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다.
 
 
  500만 명에서 80억 명으로
 
  최초의 문명들이 시작된 이래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굴곡을 거쳤다. 지역별로 문명이 탄생하고 또 무너지고 재탄생했다. 야만에 머물다 문명을 습득하여 주역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재앙도 있었고 수많은 쟁패도 있었다.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현대에도 그랬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지구문명 시대로 진입했다.
 
  그러는 동안 전 세계 인구는 비교가 무의미할 만큼 거대한 수준으로 증가했다. 인구역사학자들은 기원전 8000년경 농경 정착이 시작되기 직전 세계 인구를 5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기원 30년경에는 2억1000만~2억5000만 명으로 본다. 물론 추정일 뿐이다. 학자들마다 다르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인구 증가는 깊은 의미를 느끼게 한다. 인구 폭증에 대한 우려? 아니다! 인류 문명사의 장엄한 발자취다.
 
  2022년 11월 15일 세계 인구가 80억 명을 돌파했다. 하루 전인 11월 14일 유엔은 보도자료를 내어 그 사실을 알렸다. 좀 오래된 통념으로 보면 이 같은 인구 증가 소식은 세계적으로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런 분위기가 거의 없었다.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가 걱정인 한국으로선 더욱이 그랬다. 게다가 안토니우 구테흐스(A.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에 대한 인류 공동의 책임을 고려하면서 다양성과 발전을 축하하기 위한 기회”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반(半)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로마클럽이라는 단체가 내놓은 비관적 예견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마클럽은 1970년 3월 세계 25개국의 과학자·경제학자·교육자·경영자들이 창립한 민간단체다. 로마클럽은 1970년 ‘인류의 위기에 관한 프로젝트’ 연구를 미국 MIT에 의뢰했다. 로마클럽은 이 연구에 대한 보고서를 1972년 3월 2일 책으로 출간했다.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책이다.
 
  《성장의 한계》는 인구 급증, 급속한 공업화, 식량 부족, 환경오염, 자원 고갈 등 다섯 가지 문제로 인해 ‘지금(1972년)’ 추세가 계속된다면 세계의 경제성장은 100년 이내에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인류의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했다. 특히 중대한 문제로 지적한 것은 인구 증가였다. 인구는 연 2.1%씩 증가하는 데 반해 식량 생산은 인구증가율을 결코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은 이 같은 근본적 한계에 대한 대응책이 전혀 될 수 없으며 자원 고갈만 가속화시켜 파국을 앞당길 뿐이라 했다.
 
 
  로마클럽의 빗나간 예견
 
줄리언 사이먼 교수
  《성장의 한계》는 출간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전 세계 30여 개 언어로 출판돼 30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한국에서도 6개월 만인 1972년 9월 번역, 출간됐다. 한국판의 제목은 《인류의 위기》였다. 로마클럽의 경고가 아니래도 당시 한국은 인구 증가 억제가 중대한 과제였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이미 인구 증가 억제를 절박한 현안으로 여기고 출산(出産) 억제를 강조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정책은 197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박정희(朴正熙) 시대인 당시 한국은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이 이제 막 궤도에 오르던 터였다. 로마클럽의 주장대로면 한국의 이 같은 산업화-경제성장 노선은 추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로마클럽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그 결과는 파국이 아니었다. ‘한강의 기적’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랬다. 지난 50년의 역사는 로마클럽의 짐짓 암울한 예견과는 완전히 달랐다. 1972년 당시 세계 인구는 38억 명이었다. 2000년이면 70억 명에 달하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져 세계적으로 식량위기가 엄습해올 것이라 했다. 석유도 고갈될 것이라 했다. 필수적인 19가지 자원도 2010년경이면 완전 고갈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예측은 다 빗나갔다.
 
  1980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제학과 교수 줄리언 사이먼(Julian Simon)은 《인구폭탄》을 쓴 환경론자 폴 에를리히(Paul R. Ehrlich) 스탠퍼드대 교수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5가지 천연자원(구리·크롬·니켈·주석·텅스텐)이 10년 뒤 가격이 오르면 에를리히가, 내려가면 사이먼이 이기는 내기였다. 결과는 사이먼의 승리였다. 자원이 유한(有限)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채굴 기술이 발전할 뿐만 아니라 대체 자원도 찾게 되는 것이었다.
 
  로마클럽의 비관적 예견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과거 맬서스(Malthus·1766~1834년)가 제기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만 증가한다”는 논리의 반복이었다. 그 논리는 이미 일찍이 논박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유의 비판적 감성은 늘 그럴듯하게 반복되곤 한다. 1960~1970년대 당시도 그랬다. 서구세계는 2차 세계대전 후 전후 부흥으로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좌익적 행태가 유행이었다. 나름의 지식층들은 짐짓 이런 유의 비판적 목소리를 높였다.
 
 
  ‘근본자원’은 인간의 지혜
 
  그런데 이런 부류들이 항상 놓치는 게 있었다. 인간의 지혜와 문명의 힘이었다. 사이먼은 《근본자원(The Ultimate Resource)》(1981)에서 ‘궁극의 자원(Ultimate Resource)’은 특정한 물리적 천연자원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와 적응 능력이라고 했다. 개정판인 《근본자원 2(The Ultimate Resource II)》(1996, 한국판 2000년 자유기업센터 간행)에서도 이 점을 다시 지적했다.
 
  막연한 감성적 낙관론이 아니다. 원시에서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발자취가 그 점을 보여준다. 여러 자유주의 석학들의 지적처럼 석기 시대가 끝난 것은 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가 시작된 것도 그 재료인 구리와 주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철이라는 새로운 금속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전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이 재래식 유선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고 무선통신의 휴대폰을 쓴다. 전화선에 사용할 구리선을 조달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기술발전의 결과다. 또 다른 분야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떨 것인가?
 
 
  한국의 극적 성장은 도시문명의 성취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
  〈어느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상황도 통제실 컴퓨터에 보고된다. 사고나 범죄, 화재가 즉각 탐지되면 인간의 개입 없이 자동적으로 응급구조대가 파견된다. (…) 마치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상향적 도시는 이미 존재한다. (…) 이 도시는 똑같은 주택용 고층건물이 늘어선 삭막한 도시들과 고속 경제성장으로 유명한 어느 나라에 있다.〉
 
  어느 나라의 어떤 도시를 말하는 것일까? 바로 한국의 송도 신도시다. 영국의 역사학자 벤 윌슨(Ben Wilson·1980~)이 《메트로폴리스(Metropolis)》(2020, 한국판 2021년 매일경제신문사 간행)라는 저서에서 언급하는 내용이다.
 
  《메트로폴리스》는 수메르 문명의 우루크라는 최초 도시의 등장에서부터 21세기 현대 대도시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역사를 짚고 있다. 아름다운 찬양으로 일관하지는 않는다. 도시 특유의 타락상과 도시 빈민촌의 실상에도 가감이 없다.
 
  그러나 지상에 존재하는 무엇인들 그렇지 않을 것인가?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답기만 한 울창한 삼림(森林)의 아름다운 산도 깊숙이 들어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밑동 바닥까지 살피면 갖은 벌레가 우글거린다. 그러나 그 숲은 수많은 생명을 지탱하는 장엄한 생태계(生態系)를 지탱한다.
 
  도시는 어떤가? 《메트로폴리스》는 도시를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포착하고 ‘도시의 역사로 보는 인류문명사’를 살핀다. 한국으로선 이 같은 관점은 특히 각별하다. 한국의 극적인 경제성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문명의 성취다.
 
  《메트로폴리스》는 “한국의 도시들을 접하고 느끼게 되는 첫인상은 활기, 실험, 열광적 에너지, 즉 대도시 생활의 매력을 더해주는 특질들”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지난 40~50년간 세계적 도시주의의 최전선”에 있었으며 “한국만큼 빠르고 성공적으로 도시화를 이룩한 나라는 드물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한국은 과거의 도시 건설자들이 맡았던 자격을 물려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도시가 더 나은 삶을 제공
 
과거의 구로공단은 첨단 IT단지로 변모했다. 사진=조선DB
  그러나 좌파들은 결코 이런 긍정적 포착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도시는 언제나 질타의 대상이다. 농촌을 떠나 도시에 인구가 모여드는 것을 원망했다. 그들에게 도시는 이런 원망이 응어리진 소외의 지옥이다. 이 같은 도시의 삭막함에 구원을 주는 것은 농촌적 감성의 재현이라 여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고가도로를 없애 공원으로 만드는가 하면 난데없이 도시농업을 하겠다고 했었다. “도시농업이 도시를 구원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런가?
 
  도시는 천국은 아니다. 애환이 있고 더 적나라하게는 타락과 고통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역사가, 그리고 오늘날 세계 도처 도시의 실제 상황은 도시와 그 문명이 결국에는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고대에도 그랬지만 근대 산업혁명기에도 그랬다. 공해에 찌들었다 해도 결국에는 도시민이 농촌 거주민보다 오래 살았다. 오늘날 세계 곳곳 대도시의 거대 빈민촌의 사람들도 결국에는 교육 수준이 더 높아졌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개발 시대 도시의 공단(工團)에는 농촌에서 올라온 여공들이 대거 들어왔다. 강제로 온 게 아니었다. 과거 농촌에서의 여성의 교육은 국민학교, 잘해야 중학교 졸업으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도시의 공단에 취직을 하면 돈을 벌 뿐만 아니라 때로는 야간 고등학교 진학의 기회가 열리곤 했다. 도시의 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동생들을 공부시킨 일들은 가슴 저린 애환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동적 성취였다.
 
 
  가치관의 혼돈이 문명적 성취 갉아먹어
 
  서울에는 이제 공단은 없다. 한때 연기를 내뿜던 공단 지역이었던 구로는 지금은 디지털단지가 됐다. 발전이다. 삶의 질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수명이 크게 늘었다. 물론 모든 성공과 성취가 다 그렇듯 그림자가 있다. 50년 전 로마클럽은 인구 폭증을 경고했지만, 한국은 지금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 우려가 심각하다. 하지만 이 위기는 ‘성장의 한계’나 ‘성장의 실패’가 아니다. 그보다는 ‘헬조선’ 같은 당치 않은 선동 따위가 야기하고 있는 이념적·정신적 역습이 초래한 바가 크다. 문명의 역사는 늘 그랬다. 예측불허의 외침(外侵)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가치관의 혼돈이 문명적 성취를 안에서부터 갉아먹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세계는 지금까지 80억 인구는 물론 그 이상도 능히 감당하고도 남을 성취를 이룩했다. 그 성취가 낡은 패권주의적 야심과 힘의 조잡한 과시밖에 모르는 퇴행적(退行的) 무리에 의해 위태로운 진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에 대한 대응이 매우 안이했다. 이 고비는 어떻게 결말을 맞을 것인가? 하지만 지금의 진통을 이겨내면 세계는 다시 한 번 미래를 향한 대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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