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대중문화상품, 1970년대 후반 즈음부터 국제 경쟁력 갖추기 시작했지만 개발도상국이라는 한계 때문에 해외 진출 한계
⊙ 문화적 감수성은 해당 문화상품이 탄생한 국가 자체에 대한 동경심이 바탕… 어느 정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야 대등한 교류 가능
⊙ 1950~70년대에 일본·홍콩·필리핀의 영화·음악이 歐美에서 먹혀든 것도 나름 잘사는 나라였기 때문
⊙ 韓流의 全 세계적 확산은 기존 유통권력을 넘어선 인터넷 덕분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문화적 감수성은 해당 문화상품이 탄생한 국가 자체에 대한 동경심이 바탕… 어느 정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야 대등한 교류 가능
⊙ 1950~70년대에 일본·홍콩·필리핀의 영화·음악이 歐美에서 먹혀든 것도 나름 잘사는 나라였기 때문
⊙ 韓流의 全 세계적 확산은 기존 유통권력을 넘어선 인터넷 덕분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 2019년 12월 31일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공연하는 방탄소년단. 사진=AP/뉴시스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근래 관련 화젯거리들이 으레 그렇듯, 이번에도 미국 시장에 대한 성과 관련이다. 먼저 2020년 11월 30일(현지시각) 방탄소년단 새 앨범 〈Be〉와 타이틀곡 ‘Life Goes On’이 미국 대표 음악차트인 빌보드 앨범차트와 싱글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했다. 특히 한국어 곡으로는 처음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해 의미가 깊다. 한편 그 전주(前週)인 10월 24일에는 K팝 가수 중 최초로 미국 최고 권위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거뒀다. 단순히 인기만 많은 게 아니라 이제 영향력 있는 대중음악인으로서 권위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미국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한국대중문화상품은 현시점에서 비단 방탄소년단뿐이 아니다. 같은 K팝 분야에서 또 다른 그룹 슈퍼엠이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룹 블랙핑크도 앨범차트 2위까지 올랐다. K팝뿐 아니라 2020년 3월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한국 영화 〈기생충〉이 최우수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글로벌 OTT(Over The Top) 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등이 미국에서 선풍적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야말로 대중문화 각 분야에 걸쳐 미국 시장 공략에 차례로 성공하는 분위기다.
대중문화 분야에서 미국을 정복했다는 건 곧 세계를 정복한 것과 같다. 미국이 세계 최대 대중문화 시장이기도 하거니와, 문화적 보수성이 특히 강한 시장인 만큼 전 세계를 평정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성(入城)할 수 있는 게 바로 미국 시장인 탓이다.
韓流 성공 이유는?
이 같은 미국 시장, 아니 지구촌 한류(韓流) 정복기는 그간 대중문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들에겐 어느 정도 위화감(違和感)이 드는 광경일 수 있다. 한국대중문화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세계 시장의 성공 가능성은커녕 그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가조차 이렇다 하게 받아본 적 없기 때문이다. 국내 평가가 특히 박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10~20년 만에 이 정도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룰 수도 있는 건가. 문화란 게 과연 이처럼 단박에 성장을 거두기도 하는 분야인가 말이다.
이런 의문에 대중이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답이 있다. 한국인은 ‘본래’ 문화예술 감각이 뛰어난 민족인데, 그동안 한국이 못 먹고 못사는 통에 세계로부터 무시당하다 보니 그런 문화를 거들떠보지 않은 것뿐이란 논리다. 그러다 이제 경제가 발전해 국가 브랜드도 상승하다 보니 문화 역시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 인정해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큰 차원에서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먼저 ‘문화예술의 민족’ 차원부터 짚고 넘어가자.
물론 엄밀한 문화상대주의(文化相對主義) 차원에서 보자면 특정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후한서(後漢書)》 등 옛 중국 문헌 속 한반도 거주민에 대한 묘사까지 거론할 이유는 없다. 다만, 글로벌 문화교류 차원에서 해외 진출에 유리한 나라는 곧 문화 유행 등에 있어 글로벌 감각이 뛰어나고 문화적 흡수력과 소화력이 뛰어난 나라라는 점은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은 그런 측면에서 그간 꽤나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볼 만하다.
돌이켜보면 왜 아니겠나 싶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특히 근현대 들어와 외세(外勢)로 인해 운명이 몇 번씩 뒤바뀌어온 나라다. 그만큼 거리상으로 멀든 가깝든 해외 각국 사정에 더없이 민감하고, 그 문화양식에도 관심을 쏟아온 흐름이 존재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의 문화양식은 20세기 들어 어떤 식으로든 한국 문화에 꾸준히 영향을 끼쳐왔다.
수출입국과 김완선
한국은 어느 시점부터 사실상 ‘수출신앙(輸出信仰)’이라고까지 불릴 만한 정서를 국민 대부분이 공유해온 분위기다. 정확히 말하면 1964년 국가 산업정책을 수출 주도 전략으로 전환해 수출입국(輸出立國)이 천명되고, 그게 곧 사회 전반의 핵심가치로 떠오르면서 시작된 일이다.
한국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가기 위해선 일단 해외를 알아야만 했고, 늘 그것을 주시하며 관심 기울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문화적으로도 해외 유행이나 새로운 사조(思潮) 등에 극히 민감한 체질로 변모했다. 영화 분야에선 프랑스 본국에서조차 익숙지 않은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 등 신(新)사조가 종합일간지 지면에서 심도 있게 다뤄져왔고, 대중음악 역시 신중현이나 김시스터즈 등 미8군 무대를 배경 삼은 음악인 중심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유행을 재빠르게 따라잡으려 애써왔다.
곧 대중문화 분야에서도 ‘해외 진출’은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이자 궁극적으론 모두가 지향해야 할 목표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 밤무대 가수조차 소개 멘트로 ‘동남아 순회공연을 방금 마치고 돌아온’을 채용하기 일쑤였으니 말 다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선 실제 성공 가능성과 관계없이 ‘진짜’ 해외 진출을 꾀하는 대중가수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 예가 댄스가수 김완선이다. 1986년 화려하게 데뷔해 활동 2년 만인 1988년 바로 일본 진출을 모색했고, 최전성기던 1992년 돌연 국내 은퇴를 선언한 뒤 중화권 진출에 나섰다. 이 같은 인기 가수의 최전성기 국내 은퇴와 해외 진출은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행보였다. 그러나 그때 시대적 공기(空氣)를 떠올려보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면 누구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출역군(輸出役軍)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當爲)가 성립되던 때다.
수출 지향의 한국 문화, 內需 지향의 일본 문화
이런 풍조는 이후 K팝 개막을 담당한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가 당시로선 무모해 보이던 중국과 일본 시장에 ‘어떻게든’ 진출해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그런 ‘맨땅에 헤딩’ 자세 자체가 곧 K팝 효시(嚆矢)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같은 한국대중문화산업의 특유 분위기는 옆 나라 일본 사정과 크게 대비되는 구석이 있다. 일본도 분명 해외 진출 자체는 1950~60년대에 거창하게 포문을 열었지만, 1980년대 즈음부턴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점차 내수(內需)에만 치중하면서, 어떤 의미에선 훨씬 리스크가 적은 합리적 산업 방향을 택했다. 반면 한국은 당시 상황에서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임에도 어찌됐든 해외 진출을 사명처럼 여기며 도전해왔고, 그를 위해 꾸준히 해외 유행이나 사조 등에 민감히 대처해왔다. 결국 이런 차이가 지금의 한국과 일본 간 대중문화 양상 및 위상의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은 해외로 가는 길을 가히 부조리(不條理)해 보이기까지 하는 집착과 끈기를 통해 결국 닦아낸 흐름이다. 오랜 기간 자국 문화상품에 대한 자국 내 평가가 가장 박했던 것도 실제적으로는 우리끼리 즐길 만하지 못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걸 들고 어떻게 해외까지 나가 팔 수 있겠느냐’는 채찍질 차원이 컸다.
한마디로, 바로 미국·유럽 시장서 안 먹힐 것 같은 상품이라면 들입다 비판부터 가하는 풍조다 보니, 그런 미디어 태도를 바라보는 대중 입장에선 한국대중문화 수준 자체가 늘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엄밀한 차원에선, 대략 1970년대 후반 즈음부터는 한국대중문화상품도 일정 수준 이상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실제 그렇게 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소위 ‘못 먹고 못사는’ 나라라서 무시당한 측면이 컸다.
대중문화계에선 본래 ‘계단식 전파’란 속성이 늘 존재해왔다. 해외로 문화 전파란, 경제적으로 우월한 곳에서 그보다 낮은 곳으로 마치 계단 내려오듯 진행된다는 뜻이다. 물론 경제력 있는 나라가 그만큼 문화 시장도 융성해 치열한 경쟁구도하에서 상품 질(質)도 높아지는 맥락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외에 정서적 요인도 분명 존재한다. 문화란 어찌 됐든 감수성(感受性)에 기반하고 있으며, 해외 문화를 받아들일 때 감수성은 해당 문화상품이 탄생한 국가 자체에 대한 동경심(憧憬心)이 바탕이 되는 경우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런저런 개발도상국에서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나 문화 콘텐츠가 나와도 좀처럼 해외로 진출하기 어려운 이유다. 반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 각종 개발도상국은 물론 비슷한 위상의 선진국에서도 ‘같은 계단’에 서 있다는 느낌으로 서로 동등하게 문화 교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잔인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문화 전파 및 교류란 어떤 의미에서 국가 자체의 ‘힘’을 증명하는 단락처럼 여겨져온 게 사실이다.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 국가 중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지닌 나이지리아 대중문화는,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마치 한류가 아시아 국가에 끼치는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 외 대륙에서는 존재조차 거의 모른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태국의 영화나 방송이 라오스·캄보디아 같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위세를 떨치지만 동북아시아로는 거의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오리엔털리즘 시대
그런데 이런 맥락과 속성이 한국 입장에서 좀 더 치명적이었던 이유가 있다. 소위 ‘흐름’을 제때 타지 못했다는 한계가 생각보다 오래,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에서, 1950~70년대는 이른바 오리엔털리즘(orientalism)의 전성기였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자본주의 황금기’ 시절,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서구인들 사이에서 그간 돌아보지 못했던 정신세계(精神世界)에 관심이 폭증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낯설고 신비스러운 동양(東洋)정신문화에 이목이 집중됐다. 각종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영국 인기그룹 비틀스는 인도 수도승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직접 인도까지 날아가는 일정도 감행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자연스럽게 대중문화 측면에서도 강한 영향이 일었다. 아시아 각국 중 가장 경제력 있던 일본이 최고의 수혜 대상이 됐다. 1950년대 중반부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가 차례차례 서구에 소개되며 〈황야의 7인〉 〈황야의 무법자〉 등 할리우드 서부영화로 리메이크돼 인기를 끌었다. 1963년에는 일본 가수 사카모토 큐(坂本九)의 노래 ‘위를 보며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아시아 가수 최초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는 방탄소년단이 2020년 같은 성과를 내기 전까지 무려 57년간 아시아 가수 유일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기록으로 남았다.
‘재미’는 일본만 보지 않았다. ‘아시아의 할리우드’로 자리매김하던 홍콩서도 슈퍼스타 이소룡(李小龍) 영화가 서구 각국 박스오피스를 뒤흔들었고, 쿵후·가라데·태권도 등 아시아 무술의 서구 보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어 필리핀까지 세계 무대에 진출했다. 이런저런 디스코 음악들이 유럽 등지에서 관심을 모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프레디 아길라의 노래 ‘아낙(Anak)’은 세계 56개국서 27개 국어로 번안돼 수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여기서 서구사회 오리엔털리즘 붐을 타는 데 성공한 아시아 국가의 공통점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모두 당시 아시아 부국(富國)으로 꼽히거나, 최소한 그런 인상을 주던 나라라는 점이다. 경제부국의 문화 시장 활성화로 상품 질(質)이 높아진 것과 별개로, 위 언급한 ‘계단식 전파’ 논리가 또 먹혀들어 간 셈이다. 한마디로, ‘이 정도 나라 문화면 우리가 받아줄 만하다’는 분위기로 서구 진출이 이뤄진 것이다.
그 대열에 한국은 없었다. 아직 그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해 소위 ‘낄 자리’가 못 되는 셈이었다.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 엄밀히 문화상품의 질이 상대적으로 그리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국가 브랜드 자체에 대한 인식이 따라주지 못한 게 사실이니까.
‘인식의 유통 장벽’
문제는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나고 서구사회 오리엔털리즘 붐도 함께 꺼지고 난 뒤 발생한다. 전성기 시절엔 그래도 아시아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지라 문턱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지만, 일단 붐이 꺼지니 딱 ‘그 시절’ 서구에서 받아들인 나라의 문화상품만 신뢰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어느 수입업자도 선뜻 한국문화상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리 88올림픽이 열리고 달라진 경제적 위상(位相)을 알려도 문화 분야에서만큼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 사이 공고한 ‘인식의 유통 장벽’이 쌓인 것이다.
그나마 서로 간의 사정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같은 아시아 국가 사이에선 분위기가 좀 더 빠르게 재편되긴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이 신흥(新興) 부국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우리 문화도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MBC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등 TV드라마를 시작으로 중국과 대만 등 중화권부터 한국대중문화 붐이 시작됐다. 그렇게 1990년대 후반이 되니 드디어 대만서 한국대중문화 붐을 가리키는 ‘한류(韓流)’란 용어가 탄생되기에 이른다.
한국대중문화의 아시아 영향력을 인지한 일본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2000년대부터다. 일본은 이미 88올림픽 전후부터 조용필·김연자·계은숙 등의 트로트가요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른바 주류(主流)문화 일부로서 한국대중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였다. 한국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일본 극장가에서 대대적 성공을 거뒀고,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보아가 성공적으로 일본대중음악 시장에 상륙한다. 그리고 2004년 KBS2 TV드라마 〈겨울연가〉가 공영방송 NHK에서 방영되면서 일대 붐이 시작됐다.
그래도 여전히 서구 ‘인식의 유통 장벽’은 높았다. 사실상 그 어느 한국문화상품도 미국 등 서구로는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2002년 이탈리아 가수 반디도가 한국 가수 이정현의 노래 ‘와’를 그대로 표절한 곡 ‘Vamos Amigos’를 내놔 2002년 상반기 유럽 최고 히트곡으로 거듭나는 등 상품 질적 차원에서는 사실상 이미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올라 있었다. 다만, 국가 브랜드에 대한 변치 않는 인식과 그를 기반으로 쌓인 유통 장벽을 허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인터넷 유통혁명
그럼 지금 대중음악·영화·TV드라마, 심지어 웹툰 등 만화와 각종 캐릭터 상품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 세계적’ 한류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아주 단순하다. 인터넷 등장과 그 상용화 덕택이다.
인터넷 등장은 애초 경제적 유통혁명(流通革命)으로서 가장 큰 충격을 줬다. 이 같은 특질이 문화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건 당연하다. 소위 ‘중간유통’ 과정이 생략되자 유통 과정에 강한 입김을 불어넣던 기존 유통권력 힘이 크게 약화됐다. 기존 유통권력들의 이런저런 편견이나 아집 등이 함께 휘발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드디어 한류에도 기회가 왔다. 인터넷을 통해 이런저런 장벽 없이 자유롭게 정보와 콘텐츠를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서구의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한국대중문화가 아시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을, 역시 인터넷을 통해 깨닫게 된 서구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는 칸·베니스·베를린 등 유럽에서 개최되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의 단골손님이 됐다. 수상 성과도 점차 화려해졌다. 2005년 동영상 공유 플랫폼 유튜브가 등장하면서부터는 K팝도 서서히 서구까지 닿기 시작했다. 기존 유통권력 측면에선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없기에’ 꺼려왔던 콘텐츠지만, 그런 중간유통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수요자들에게 전달되고 보니 국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춘 콘텐츠였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마치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일본 문화계가 받은 충격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일본 문화계는 패전(敗戰) 충격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고, 여전히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한동안 해외로 자국 문화상품을 내밀어본 적이 없었기에 과연 자국 영화가 국제 감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구로사와는 베니스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고, 영화제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최고상을 안기니 그제야 일본 문화계도 자국 영화가 국제 레벨에서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대중문화도 사실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전까진 ‘인식의 유통 장벽’에 가로막힌 줄도 모르고 그저 우리 문화상품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시아 정도는 뚫어도 미국·유럽 등지까지는 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직거래(?) 분위기가 성립되자 비로소 한국대중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 있는지, 어느 정도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 순서다.
정치·외교적 장벽도 넘는 韓流
인터넷 기반 문화 전파는 심지어 기존에 뚫어놨던 아시아 시장이 각종 정치·외교적 마찰로 새롭게 장벽이 쌓일 때조차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 한국 드라마를 많이 틀어준다는 이유로 일본 민영방송사 후지TV 앞에서 대규모 혐한(嫌韓)시위가 일어나고, 같은 해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일본 천황(天皇) 관련 발언 이후 일본 방송계에선 한국 콘텐츠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일본서 한류는 이제 끝났다’는 인식까지 퍼져나갔다. 그런데 인터넷이 판도를 뒤집어놓았다. 기존 유통권력, 올드 미디어 방송사가 아무리 한류를 막아 세워봤자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통해 일본 대중은 얼마든지 K팝 등 각종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류는 오히려 이전보다 일본 1020세대에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런 분위기에 압도돼 결국 각 일본 방송사는 2017년을 기점으로 다시 K팝 등을 반영하기에 이른다. 한일(韓日) 간 정치·외교적 전환점이 마련돼 바뀐 흐름이 아니라, 막아봤자 소용이 없으니 포기한 흐름에 가깝다.
중국의 한한령(限韓令)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2017년부터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규제조치지만, VPN(Virtual Private Network·가상사설망)으로 우회해 어떻게든 금지된 유튜브 등에 도달한 중국 한류 팬들 입장에서는 그런 조치가 장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K팝의 경우 중국에서 K팝 가수들이 활동하지 못해 실제로 볼 수 없게 됐다는 안타까움 탓에 중국서 직접 한국 발매 음반을 구입하려는 흐름이 일어나 2019년 초부터 지금까지 K팝 가수의 음반판매량이 전반적으로 폭증하는 현상까지 낳고 있다.
BTS, SNS 적극 활용
이제 다시 방탄소년단으로 돌아가보자. 방탄소년단은 한류가 ‘전 세계’로 번져가게 해준 마법의 도구, 인터넷을 가장 잘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룹이다. 트위터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 세계 팬들 간 소통에 주력하고, 멤버끼리 관계나 생활 등을 담은 영상을 팬과 공유(共有)하며 좀 더 살갑게 그들 일상 속에 녹아 들어가도록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가 가장 먼저 미국 시장에 안착한 그룹,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 세계에 걸친 일종의 사회문화 현상으로서 위상을 만들어냈다.
2020년에 들어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타고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Over The Top·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방송·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컨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사용자 중심적인 서비스)가 가입자 수를 급격히 늘리며 세계적 대세로 거듭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자 한국 드라마 역시 넷플릭스 공간을 통해 K팝, 영화 등과 함께 세계 무대 중심으로 나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미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등이 미국 넷플릭스 순위 10위권 내 들어선 바 있다. 한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가장 많다는 일본 중장년층조차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접하고서 새로운 한류 팬층으로 거듭나는 분위기다.
결론적으로, 한국대중문화는 일정 시점부턴 특유의 국제 감각과 해외 유행에 민감한 체질 등을 보유, 국제 경쟁력 차원에선 충분한 가능성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세계로 진출하지 못했던 한계를 뚫어준 게 바로 유통혁명 도구 인터넷 등장이다. 한국대중문화는 유튜브부터 넷플릭스까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인터넷 공간 속 플랫폼에 기대서 국제 경쟁력을 인정받고 그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그런 시장 가능성이 검증되고 나니 비로소 세계 각국 지상파 방송 등 올드 미디어들도 이제 한류를 적극 반영하려는 흐름으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우리 문화에 대한 과소평가도 곤란
요즘 ‘국뽕’이란 인터넷 신조어가 여기저기서 많이 쓰인다. 자국에 대한 과도한 자긍심에 도취되거나 맹목적으로 자국을 찬양하는 태도를 비꼬는 말이다. 당연히 주의해야 할 태도가 맞다. 그러나 동시에, ‘국뽕’에 대한 경계 탓에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까지 과소평가(過小評價) 내지 폄하(貶下)되는 사례가 적잖다. 한류도 현상이 목격되기 시작한 20여 년 전부터 늘 그런 폄하와 의심, 자기 단속에 의해 현상의 본질 자체가 숱하게 오독(誤讀)돼온 역사가 존재한다. 매년 한류는 위기이고 이대로 가다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고 미래 전망은 늘 어둡다는 식의 주장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주장의 근저(根底)엔 대부분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식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현상과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주의와 경계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잘못된 조언으로 오히려 미래 판도를 스스로 망쳐놓는 결과를 낳기 쉬워서다. 일단은 그룹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 TV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등에 이르기까지 지금 한국대중문화가 이뤄낸 성과는 ‘그럴 만했다’는 점부터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은 세계 대중문화 강국 중 하나가 ‘되기 쉬운’ 조건들을 우연찮게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한 뒤에야 그 미래에 대한 관점도 바로 세워질 수 있다.⊙
미국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낸 한국대중문화상품은 현시점에서 비단 방탄소년단뿐이 아니다. 같은 K팝 분야에서 또 다른 그룹 슈퍼엠이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룹 블랙핑크도 앨범차트 2위까지 올랐다. K팝뿐 아니라 2020년 3월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한국 영화 〈기생충〉이 최우수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다. 글로벌 OTT(Over The Top) 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등이 미국에서 선풍적 반응을 얻기도 했다. 그야말로 대중문화 각 분야에 걸쳐 미국 시장 공략에 차례로 성공하는 분위기다.
대중문화 분야에서 미국을 정복했다는 건 곧 세계를 정복한 것과 같다. 미국이 세계 최대 대중문화 시장이기도 하거니와, 문화적 보수성이 특히 강한 시장인 만큼 전 세계를 평정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성(入城)할 수 있는 게 바로 미국 시장인 탓이다.
韓流 성공 이유는?
이 같은 미국 시장, 아니 지구촌 한류(韓流) 정복기는 그간 대중문화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들에겐 어느 정도 위화감(違和感)이 드는 광경일 수 있다. 한국대중문화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세계 시장의 성공 가능성은커녕 그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가조차 이렇다 하게 받아본 적 없기 때문이다. 국내 평가가 특히 박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10~20년 만에 이 정도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룰 수도 있는 건가. 문화란 게 과연 이처럼 단박에 성장을 거두기도 하는 분야인가 말이다.
이런 의문에 대중이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답이 있다. 한국인은 ‘본래’ 문화예술 감각이 뛰어난 민족인데, 그동안 한국이 못 먹고 못사는 통에 세계로부터 무시당하다 보니 그런 문화를 거들떠보지 않은 것뿐이란 논리다. 그러다 이제 경제가 발전해 국가 브랜드도 상승하다 보니 문화 역시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 인정해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큰 차원에서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먼저 ‘문화예술의 민족’ 차원부터 짚고 넘어가자.
물론 엄밀한 문화상대주의(文化相對主義) 차원에서 보자면 특정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후한서(後漢書)》 등 옛 중국 문헌 속 한반도 거주민에 대한 묘사까지 거론할 이유는 없다. 다만, 글로벌 문화교류 차원에서 해외 진출에 유리한 나라는 곧 문화 유행 등에 있어 글로벌 감각이 뛰어나고 문화적 흡수력과 소화력이 뛰어난 나라라는 점은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국은 그런 측면에서 그간 꽤나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볼 만하다.
돌이켜보면 왜 아니겠나 싶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특히 근현대 들어와 외세(外勢)로 인해 운명이 몇 번씩 뒤바뀌어온 나라다. 그만큼 거리상으로 멀든 가깝든 해외 각국 사정에 더없이 민감하고, 그 문화양식에도 관심을 쏟아온 흐름이 존재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의 문화양식은 20세기 들어 어떤 식으로든 한국 문화에 꾸준히 영향을 끼쳐왔다.
수출입국과 김완선
한국은 어느 시점부터 사실상 ‘수출신앙(輸出信仰)’이라고까지 불릴 만한 정서를 국민 대부분이 공유해온 분위기다. 정확히 말하면 1964년 국가 산업정책을 수출 주도 전략으로 전환해 수출입국(輸出立國)이 천명되고, 그게 곧 사회 전반의 핵심가치로 떠오르면서 시작된 일이다.
한국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가기 위해선 일단 해외를 알아야만 했고, 늘 그것을 주시하며 관심 기울여야 했다. 자연스럽게 문화적으로도 해외 유행이나 새로운 사조(思潮) 등에 극히 민감한 체질로 변모했다. 영화 분야에선 프랑스 본국에서조차 익숙지 않은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 등 신(新)사조가 종합일간지 지면에서 심도 있게 다뤄져왔고, 대중음악 역시 신중현이나 김시스터즈 등 미8군 무대를 배경 삼은 음악인 중심으로 미국 대중음악의 유행을 재빠르게 따라잡으려 애써왔다.
곧 대중문화 분야에서도 ‘해외 진출’은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이자 궁극적으론 모두가 지향해야 할 목표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 밤무대 가수조차 소개 멘트로 ‘동남아 순회공연을 방금 마치고 돌아온’을 채용하기 일쑤였으니 말 다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선 실제 성공 가능성과 관계없이 ‘진짜’ 해외 진출을 꾀하는 대중가수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 예가 댄스가수 김완선이다. 1986년 화려하게 데뷔해 활동 2년 만인 1988년 바로 일본 진출을 모색했고, 최전성기던 1992년 돌연 국내 은퇴를 선언한 뒤 중화권 진출에 나섰다. 이 같은 인기 가수의 최전성기 국내 은퇴와 해외 진출은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행보였다. 그러나 그때 시대적 공기(空氣)를 떠올려보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면 누구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출역군(輸出役軍)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當爲)가 성립되던 때다.
수출 지향의 한국 문화, 內需 지향의 일본 문화
이런 풍조는 이후 K팝 개막을 담당한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가 당시로선 무모해 보이던 중국과 일본 시장에 ‘어떻게든’ 진출해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그런 ‘맨땅에 헤딩’ 자세 자체가 곧 K팝 효시(嚆矢)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같은 한국대중문화산업의 특유 분위기는 옆 나라 일본 사정과 크게 대비되는 구석이 있다. 일본도 분명 해외 진출 자체는 1950~60년대에 거창하게 포문을 열었지만, 1980년대 즈음부턴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점차 내수(內需)에만 치중하면서, 어떤 의미에선 훨씬 리스크가 적은 합리적 산업 방향을 택했다. 반면 한국은 당시 상황에서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결정임에도 어찌됐든 해외 진출을 사명처럼 여기며 도전해왔고, 그를 위해 꾸준히 해외 유행이나 사조 등에 민감히 대처해왔다. 결국 이런 차이가 지금의 한국과 일본 간 대중문화 양상 및 위상의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은 해외로 가는 길을 가히 부조리(不條理)해 보이기까지 하는 집착과 끈기를 통해 결국 닦아낸 흐름이다. 오랜 기간 자국 문화상품에 대한 자국 내 평가가 가장 박했던 것도 실제적으로는 우리끼리 즐길 만하지 못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걸 들고 어떻게 해외까지 나가 팔 수 있겠느냐’는 채찍질 차원이 컸다.
한마디로, 바로 미국·유럽 시장서 안 먹힐 것 같은 상품이라면 들입다 비판부터 가하는 풍조다 보니, 그런 미디어 태도를 바라보는 대중 입장에선 한국대중문화 수준 자체가 늘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엄밀한 차원에선, 대략 1970년대 후반 즈음부터는 한국대중문화상품도 일정 수준 이상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실제 그렇게 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소위 ‘못 먹고 못사는’ 나라라서 무시당한 측면이 컸다.
대중문화계에선 본래 ‘계단식 전파’란 속성이 늘 존재해왔다. 해외로 문화 전파란, 경제적으로 우월한 곳에서 그보다 낮은 곳으로 마치 계단 내려오듯 진행된다는 뜻이다. 물론 경제력 있는 나라가 그만큼 문화 시장도 융성해 치열한 경쟁구도하에서 상품 질(質)도 높아지는 맥락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외에 정서적 요인도 분명 존재한다. 문화란 어찌 됐든 감수성(感受性)에 기반하고 있으며, 해외 문화를 받아들일 때 감수성은 해당 문화상품이 탄생한 국가 자체에 대한 동경심(憧憬心)이 바탕이 되는 경우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런저런 개발도상국에서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나 문화 콘텐츠가 나와도 좀처럼 해외로 진출하기 어려운 이유다. 반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 각종 개발도상국은 물론 비슷한 위상의 선진국에서도 ‘같은 계단’에 서 있다는 느낌으로 서로 동등하게 문화 교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좀 잔인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문화 전파 및 교류란 어떤 의미에서 국가 자체의 ‘힘’을 증명하는 단락처럼 여겨져온 게 사실이다.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 국가 중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경제 규모를 지닌 나이지리아 대중문화는,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마치 한류가 아시아 국가에 끼치는 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 외 대륙에서는 존재조차 거의 모른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태국의 영화나 방송이 라오스·캄보디아 같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위세를 떨치지만 동북아시아로는 거의 넘어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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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왼쪽)는 미국에서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됐다. |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에서, 1950~70년대는 이른바 오리엔털리즘(orientalism)의 전성기였다. 1950년부터 1973년까지 ‘자본주의 황금기’ 시절,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된 서구인들 사이에서 그간 돌아보지 못했던 정신세계(精神世界)에 관심이 폭증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낯설고 신비스러운 동양(東洋)정신문화에 이목이 집중됐다. 각종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영국 인기그룹 비틀스는 인도 수도승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직접 인도까지 날아가는 일정도 감행했다.
분위기가 이러니 자연스럽게 대중문화 측면에서도 강한 영향이 일었다. 아시아 각국 중 가장 경제력 있던 일본이 최고의 수혜 대상이 됐다. 1950년대 중반부터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가 차례차례 서구에 소개되며 〈황야의 7인〉 〈황야의 무법자〉 등 할리우드 서부영화로 리메이크돼 인기를 끌었다. 1963년에는 일본 가수 사카모토 큐(坂本九)의 노래 ‘위를 보며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가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아시아 가수 최초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는 방탄소년단이 2020년 같은 성과를 내기 전까지 무려 57년간 아시아 가수 유일의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기록으로 남았다.
‘재미’는 일본만 보지 않았다. ‘아시아의 할리우드’로 자리매김하던 홍콩서도 슈퍼스타 이소룡(李小龍) 영화가 서구 각국 박스오피스를 뒤흔들었고, 쿵후·가라데·태권도 등 아시아 무술의 서구 보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어 필리핀까지 세계 무대에 진출했다. 이런저런 디스코 음악들이 유럽 등지에서 관심을 모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프레디 아길라의 노래 ‘아낙(Anak)’은 세계 56개국서 27개 국어로 번안돼 수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여기서 서구사회 오리엔털리즘 붐을 타는 데 성공한 아시아 국가의 공통점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모두 당시 아시아 부국(富國)으로 꼽히거나, 최소한 그런 인상을 주던 나라라는 점이다. 경제부국의 문화 시장 활성화로 상품 질(質)이 높아진 것과 별개로, 위 언급한 ‘계단식 전파’ 논리가 또 먹혀들어 간 셈이다. 한마디로, ‘이 정도 나라 문화면 우리가 받아줄 만하다’는 분위기로 서구 진출이 이뤄진 것이다.
그 대열에 한국은 없었다. 아직 그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해 소위 ‘낄 자리’가 못 되는 셈이었다. 거기까진 그럴 수 있다. 엄밀히 문화상품의 질이 상대적으로 그리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역시 국가 브랜드 자체에 대한 인식이 따라주지 못한 게 사실이니까.
‘인식의 유통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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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겨울연가〉는 2004년 일본 NHK에서 방영되면서 본격적인 한류붐을 일으켰다. |
그나마 서로 간의 사정에 상대적으로 민감한 같은 아시아 국가 사이에선 분위기가 좀 더 빠르게 재편되긴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이 신흥(新興) 부국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우리 문화도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MBC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등 TV드라마를 시작으로 중국과 대만 등 중화권부터 한국대중문화 붐이 시작됐다. 그렇게 1990년대 후반이 되니 드디어 대만서 한국대중문화 붐을 가리키는 ‘한류(韓流)’란 용어가 탄생되기에 이른다.
한국대중문화의 아시아 영향력을 인지한 일본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게 2000년대부터다. 일본은 이미 88올림픽 전후부터 조용필·김연자·계은숙 등의 트로트가요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른바 주류(主流)문화 일부로서 한국대중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였다. 한국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등이 일본 극장가에서 대대적 성공을 거뒀고,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보아가 성공적으로 일본대중음악 시장에 상륙한다. 그리고 2004년 KBS2 TV드라마 〈겨울연가〉가 공영방송 NHK에서 방영되면서 일대 붐이 시작됐다.
그래도 여전히 서구 ‘인식의 유통 장벽’은 높았다. 사실상 그 어느 한국문화상품도 미국 등 서구로는 제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2002년 이탈리아 가수 반디도가 한국 가수 이정현의 노래 ‘와’를 그대로 표절한 곡 ‘Vamos Amigos’를 내놔 2002년 상반기 유럽 최고 히트곡으로 거듭나는 등 상품 질적 차원에서는 사실상 이미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올라 있었다. 다만, 국가 브랜드에 대한 변치 않는 인식과 그를 기반으로 쌓인 유통 장벽을 허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 대중음악·영화·TV드라마, 심지어 웹툰 등 만화와 각종 캐릭터 상품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 세계적’ 한류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아주 단순하다. 인터넷 등장과 그 상용화 덕택이다.
인터넷 등장은 애초 경제적 유통혁명(流通革命)으로서 가장 큰 충격을 줬다. 이 같은 특질이 문화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건 당연하다. 소위 ‘중간유통’ 과정이 생략되자 유통 과정에 강한 입김을 불어넣던 기존 유통권력 힘이 크게 약화됐다. 기존 유통권력들의 이런저런 편견이나 아집 등이 함께 휘발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드디어 한류에도 기회가 왔다. 인터넷을 통해 이런저런 장벽 없이 자유롭게 정보와 콘텐츠를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서구의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한국대중문화가 아시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을, 역시 인터넷을 통해 깨닫게 된 서구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는 칸·베니스·베를린 등 유럽에서 개최되는 세계 3대 국제영화제의 단골손님이 됐다. 수상 성과도 점차 화려해졌다. 2005년 동영상 공유 플랫폼 유튜브가 등장하면서부터는 K팝도 서서히 서구까지 닿기 시작했다. 기존 유통권력 측면에선 ‘이게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없기에’ 꺼려왔던 콘텐츠지만, 그런 중간유통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수요자들에게 전달되고 보니 국제 경쟁력을 충분히 갖춘 콘텐츠였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마치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이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일본 문화계가 받은 충격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일본 문화계는 패전(敗戰) 충격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고, 여전히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다. 한동안 해외로 자국 문화상품을 내밀어본 적이 없었기에 과연 자국 영화가 국제 감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구로사와는 베니스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고, 영화제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최고상을 안기니 그제야 일본 문화계도 자국 영화가 국제 레벨에서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대중문화도 사실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이전까진 ‘인식의 유통 장벽’에 가로막힌 줄도 모르고 그저 우리 문화상품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아시아 정도는 뚫어도 미국·유럽 등지까지는 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직거래(?) 분위기가 성립되자 비로소 한국대중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 있는지, 어느 정도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 순서다.
정치·외교적 장벽도 넘는 韓流
인터넷 기반 문화 전파는 심지어 기존에 뚫어놨던 아시아 시장이 각종 정치·외교적 마찰로 새롭게 장벽이 쌓일 때조차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 한국 드라마를 많이 틀어준다는 이유로 일본 민영방송사 후지TV 앞에서 대규모 혐한(嫌韓)시위가 일어나고, 같은 해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일본 천황(天皇) 관련 발언 이후 일본 방송계에선 한국 콘텐츠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일본서 한류는 이제 끝났다’는 인식까지 퍼져나갔다. 그런데 인터넷이 판도를 뒤집어놓았다. 기존 유통권력, 올드 미디어 방송사가 아무리 한류를 막아 세워봤자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통해 일본 대중은 얼마든지 K팝 등 각종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류는 오히려 이전보다 일본 1020세대에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런 분위기에 압도돼 결국 각 일본 방송사는 2017년을 기점으로 다시 K팝 등을 반영하기에 이른다. 한일(韓日) 간 정치·외교적 전환점이 마련돼 바뀐 흐름이 아니라, 막아봤자 소용이 없으니 포기한 흐름에 가깝다.
중국의 한한령(限韓令)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 문제로 2017년부터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규제조치지만, VPN(Virtual Private Network·가상사설망)으로 우회해 어떻게든 금지된 유튜브 등에 도달한 중국 한류 팬들 입장에서는 그런 조치가 장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K팝의 경우 중국에서 K팝 가수들이 활동하지 못해 실제로 볼 수 없게 됐다는 안타까움 탓에 중국서 직접 한국 발매 음반을 구입하려는 흐름이 일어나 2019년 초부터 지금까지 K팝 가수의 음반판매량이 전반적으로 폭증하는 현상까지 낳고 있다.
BTS, SNS 적극 활용
이제 다시 방탄소년단으로 돌아가보자. 방탄소년단은 한류가 ‘전 세계’로 번져가게 해준 마법의 도구, 인터넷을 가장 잘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룹이다. 트위터 등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전 세계 팬들 간 소통에 주력하고, 멤버끼리 관계나 생활 등을 담은 영상을 팬과 공유(共有)하며 좀 더 살갑게 그들 일상 속에 녹아 들어가도록 전략을 세웠다. 그 결과가 가장 먼저 미국 시장에 안착한 그룹,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 세계에 걸친 일종의 사회문화 현상으로서 위상을 만들어냈다.
2020년에 들어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타고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Over The Top·인터넷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방송·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컨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사용자 중심적인 서비스)가 가입자 수를 급격히 늘리며 세계적 대세로 거듭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자 한국 드라마 역시 넷플릭스 공간을 통해 K팝, 영화 등과 함께 세계 무대 중심으로 나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미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등이 미국 넷플릭스 순위 10위권 내 들어선 바 있다. 한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가장 많다는 일본 중장년층조차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드라마를 접하고서 새로운 한류 팬층으로 거듭나는 분위기다.
결론적으로, 한국대중문화는 일정 시점부턴 특유의 국제 감각과 해외 유행에 민감한 체질 등을 보유, 국제 경쟁력 차원에선 충분한 가능성을 잉태(孕胎)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세계로 진출하지 못했던 한계를 뚫어준 게 바로 유통혁명 도구 인터넷 등장이다. 한국대중문화는 유튜브부터 넷플릭스까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인터넷 공간 속 플랫폼에 기대서 국제 경쟁력을 인정받고 그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그런 시장 가능성이 검증되고 나니 비로소 세계 각국 지상파 방송 등 올드 미디어들도 이제 한류를 적극 반영하려는 흐름으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우리 문화에 대한 과소평가도 곤란
요즘 ‘국뽕’이란 인터넷 신조어가 여기저기서 많이 쓰인다. 자국에 대한 과도한 자긍심에 도취되거나 맹목적으로 자국을 찬양하는 태도를 비꼬는 말이다. 당연히 주의해야 할 태도가 맞다. 그러나 동시에, ‘국뽕’에 대한 경계 탓에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까지 과소평가(過小評價) 내지 폄하(貶下)되는 사례가 적잖다. 한류도 현상이 목격되기 시작한 20여 년 전부터 늘 그런 폄하와 의심, 자기 단속에 의해 현상의 본질 자체가 숱하게 오독(誤讀)돼온 역사가 존재한다. 매년 한류는 위기이고 이대로 가다간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고 미래 전망은 늘 어둡다는 식의 주장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그런 주장의 근저(根底)엔 대부분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식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현상과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주의와 경계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잘못된 조언으로 오히려 미래 판도를 스스로 망쳐놓는 결과를 낳기 쉬워서다. 일단은 그룹 방탄소년단, 영화 〈기생충〉, TV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등에 이르기까지 지금 한국대중문화가 이뤄낸 성과는 ‘그럴 만했다’는 점부터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은 세계 대중문화 강국 중 하나가 ‘되기 쉬운’ 조건들을 우연찮게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한 뒤에야 그 미래에 대한 관점도 바로 세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