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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Q의 시 읽기 〈48〉 아폴리네르의 ‘가을’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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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가을’… 지난여름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농부의 슬픈 콧노래
⊙ 삶이 담긴 가을 시… 천상병의 ‘들국화’, 박노해의 ‘가을볕’, 김지하의 ‘가을’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가을
  기욤 아폴리네르(황현산 역)
 
  안개 속으로 멀어진다 안짱다리 농부와
  암소 한 마리 느릿느릿 가을 안개 속에
  가난하고 누추한 동네들 숨어 있다
 
  저만치 멀어지며 농부는 흥얼거린다
  깨어진 반지 찢어진 가슴을 말하는
  사랑과 변심의 노래 하나를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으로 회색 실루엣 두 개 멀어진다
 
 

  Automne
  Guillaume Apollinaire
 
  Dans le brouillard s’en vont un paysan cagneux
  Et son bœuf lentement dans le brouillard d’automne
  Qui cache les hameaux pauvres et vergogneux
 
  Et s’en allant la`-bas le paysan chantonne
  Une chanson d’amour et d’infide´lite´
  Qui parle d’une bague et d’un cœur que l’on brise
 
  Oh! l’automne l’automne a fait mourir l’e´te´
  Dans le brouillard s’en vont deux silhouettes grises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전북 전주시 전주향교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다.
  시 ‘가을’은 민음사에서 펴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의 시집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황현산 역·2016)에 실렸다.
 
  이 시를 읽으면 회화(繪畫)의 장면처럼 머릿속이 밝아진다. 다리가 굽은 농부가 암소를 끌고서 안개 속을 걷는다. 뿌옇게 가난한 마을이 보이고 농부는 콧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슬픈 사랑의 노래. 그 콧노래는 사랑으로 뜨겁던 지난(죽은)여름과 스산한 가을이 느껴진다. 그렇게 소와 늙은 농부의 실루엣이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이 시의 또 다른 번역이 있다. 기자는 역자(譯者)를 알지 못한다. 소개하면 이렇다.
  ‌
  …안개 속을 다리가 굽은 농부가 간다./ 하찮은 보잘것없는 마을을 감추는/
  가을 안개 곳을 천천히 황소가 간다.//
  저리 사면서 농부는 노래한다./ 사랑과 우정의 노래를/ 반지와 깨진 가슴을 노래하는 노래를.//
  오! 가을, 가을은 여름을 죽였다./ 안개 속을 두 개의 회색 그림자가 간다.…

 

  위 시는 황현산의 번역보다 매끄럽게 읽히지만 어색함도 느껴진다. 산문 투의 ‘하찮고 보잘것없는’ 대신 운문 투의 ‘하찮은 보잘것없는’으로 이중수식 문장이다. ‘가을 안개 곳’ ‘저리 사면서’는 예스런 느낌이 드나 어색하다. 오타가 아닐까 생각이 들지만 역자 입장에서 음미해본다. 독자에 따라 ‘사면서’를 ‘살면서’로 해석하는 이가 있다. 기자는 ‘사라지면서(멀어지면서)’로 이해한다.
 
  ‘사랑과 변심의 노래’도 ‘사랑과 우정의 노래’로 번역해 느낌이 다르다. 포털 ‘네이버 파파고’로 번역하니 더 엉뚱(‘사랑과 불륜의 노래’)하다. 번역시마저도 아폴리네르의 시답다는 생각이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초현실주의, 다다 등 다양한 접근으로 문학의 길을 열었으나 어느 유파에 안착하지 않았으며 독창적인 길을 갔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자기 앞에 닥친 모든 것을 주제로 삼아 어디에서나 시를 읊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천상병의 ‘들국화’와 박노해의 ‘가을볕’
 
천상병 시인. 의정부예술의전당 제공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테지
 
  다시 올까?
  나의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천상병 시인의 ‘들국화’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의 삶이 겹쳐진다. 1967년 ‘동백림 사건’(독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범한 일상조차 어려웠다. 행려병자로 발견되기도 했다.
 
  시인은 어린 들국화를 보며 ‘가을은/ 다시 올테지’ 하고 읊조린다. 그러나 이내 ‘(가을이) 다시 올까?’라고 반문한다. 작은 들국화가 전하는 가을의 정감에 감동하지만, 문득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만신창이 삶이 두렵기만 하다. 훗날 그가 떠나고 사람들은 ‘애기들국화 같은 시인’으로 천상병을 기억한다.
 
 
박노해 시인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박노해 시인의 ‘가을볕’ 전문

 
  한때 뜨겁고 절절한 시를 썼던 박노해의 시 ‘가을볕’이다.
 
가을볕에 고추를 말리는 모습.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평상에서 말리던 고추를 살펴보고 있다.
  화자(話者)는 붉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마당에 널어놓는다. 뜨거운 가을볕 아래 고추는 노란 씨가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문득 고개를 드니 바람에 흔들리는 흰 빨래가 눈부시다. 투명한 고추, 흰 빨래를 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한때의 슬픔과 상처 난 욕망이 일렁인다. 살아온 날들이 고추가 투명한 속(씨)을 보이듯 다 보인다.
 
 
  백석의 추야일경과 노천명의 ‘가을날’
 
백석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한국 현대시의 토속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구축한 시인이다. 평안북도 정주 태생인 시인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이 신문사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신문사에서 일한 만큼 표준어에 능숙했겠지만, 자신의 시를 고향인 북방의 토속어로 가득 채웠다. 시 ‘추야일경(秋夜一景)’은 한국인의 정취가 느껴지는 따뜻한 시다.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지만, 안방엔 어둑하니(홰즛하니) 등불이 켜져 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박, 무, 호박 등을 썰며 정담을 나눈다. 문밖에서 물새 소리 들리지만, 토방에는 (고소한) 햇콩두부가 익어간다.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념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백석 시인의 ‘추야일경’ 전문
 
  *오가리: 박, 무, 호박 따위의 살을 오리거나 썰어서 말린 것.
  *석박디: 섞박지. 김장할 때 절인 무와 배추, 오이를 썰어 여러 가지 고명에 젓국을 조금 쳐서 익힌 김치.

 
 
노천명 시인
  노천명(盧天命·1911~1957) 시인의 ‘가을날’도 정겨운 시다. 겹옷 사이로 바람이 차다.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외길로 이어진 산길을 걷는다. 그때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쓸쓸한 가을의 서정을 느끼게 한다. ‘단풍 한 잎을 따 들고’ 가을 숲속을 걷는데 치맛자락이 이슬에 젖었다. 그때 기차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은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예저기 흩어져
  촉촉이 젖은 낙엽을
  소리 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들어 거닐어 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 마디엔
  제철의 아픔을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 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 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노천명 시인의 ‘가을날’ 전문

 
  시인은 5연에 ‘애연히’라는 부사어를 썼다. ‘애연(靄然)히’의 사전적 의미는 ‘구름이나 안개 따위가 짙게 낀 상태’를 말한다.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귀뚜라미(풀벌레) 울음이 안개처럼 자욱하다는 뜻이다.
 
  노천명 시인은 친일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당시 피란을 못 가 인민군에 부역했다. 9·28수복 후 재판을 받고 20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여러 문인의 구명(救命)으로 출감했다. 이후 가톨릭에 입교해 영세를 받았다.
 
 
  김지하의 ‘가을’과 이원규의 ‘단풍의 이유’
 
김지하 시인
  김지하(金芝河·1941~ ) 시인의 ‘가을’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다. 병든 어머니를 만나고 집을 나선다. 어머니 걱정에 발걸음이 무겁다. 길에 떨어진 낙엽을 밟다가 문득 발바닥이 가볍고 부드럽게(살갑게) 느껴진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마치 ‘생(生)’을 외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어지럼증을 앓는 어머니 앞에
  그저 막막하더니
  집을 나서는데
  다 시든 낙엽을 밟으니
  발바닥이 도리어 살갑구나
 
  -김지하 시인의 ‘가을’ 전문

 
 
이원규 시인
  이원규 시인의 ‘단풍의 이유’는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빨갛게 물든 단풍을 예찬한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면서 단풍잎이 비록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었지만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에’ 불행·불쌍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사랑해보라고, ‘한 번이라도/ 타오르라’고 권한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폭설이 내려 온몸이 얼고
  얼다가 축축이 젖을 때까지
  합장의 뼈마디에 번쩍 혼불이 일 때까지
 
  -이원규 시인의 ‘단풍의 이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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