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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한 提言 ⑥ ‘문제는 경제다: 대통령과 경제’

“내년 총선 결과에 관계없이 대통령 영향력 줄어들 것”(최중경 前 지식경제부 장관)

글 : 정호윤  기획위원ㆍ국정리더십포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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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와 보수 정책을 가르는 게 뉴딜
⊙ ‘오바마 케어’라는 진보 정책이 결론적으로 우리 경제에 타격
⊙ 진보주의건 보수주의건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올바른 결정
⊙ 박정희, 수입대체 산업화 물결 때 ‘수출 산업화’로 눈부신 성장 이뤄
⊙ 전두환, 모자란 사람 아니다
⊙ 자유화와 세계화 개념 혼동해 위기 자초한 김영삼

鄭皓尹
1979년생. 중앙대 법대 졸업 / 박근혜 정부 청와대 제1부속실 및 홍보수석실 행정관, 국회 정책보좌관, 국회 입법정책연구회 연구위원, 여의도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임. (사)국정리더십포럼 상임대표

※ 편집자 註
이번 호에서는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한 여섯 번째 제언으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의 ‘문제는 경제다: 대통령과 경제’ 강연 내용을 소개한다. 최중경 전 장관은 이번 강연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이념적 성향과 경제정책이 미국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 특히 우리 경제에까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기 쉽게 강연했다. 미국의 ‘오바마 케어’가 일본의 재무장을 부르고, 이것이 다시 대한민국의 위기로 이어지는 상황을 제시하면서 국정 리더에게 국제무대를 바라보는 큰 시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부터 김영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과 주변 참모의 경제적 이해도와 사고가 우리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쳐왔는지를 설명하면서 대통령과 참모들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번 강연 내용이 독자들에게도 ‘대통령과 경제’를 바라보는 큰 시각을 키우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이번 호에서 소개하지 못한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남은 이야기는 차후에 계속 전하고자 한다.
  오늘 주제가 ‘대통령과 경제’인데, 우선 대통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곁에서 본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취임 연차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1년 차, 2년 차, 3년 차가 다르다. 1~2년 차 때까지는 청와대에서 행사하면 사람들이 멀리 있다가도 대통령에게 가까이 가려고 몸싸움을 한다. 3년 차쯤 되면 뛰어오는 사람은 없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그래도 3년 차에는 대통령 근처에 사람이 온다. 그런데 4년 차가 되어 하반기를 넘어가면 아무도 안 간다. 주변에서 눈치만 본다. 오라고 해야 온다. 그래서 1년 차와 3년 차 초만 해도 수석이나 장관이 대통령 옆에 갈 수가 없다.
 
  대통령 임기가 3년 차의 반을 지나면 반환점을 돈다. 4년 차 되니까 근처에 잘 안 간다. 그게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모습을 희화화했는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라는 존재의 영향력이 연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통령이 국정 전반을 장악하는 영향력은 선거에 따라 달라지지만, 3년 지나 4년 차 되면 벌써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책이란 게 일단 방침이 결정되면 법을 고친다. 법에 따라 예산이 필요하면 조치를 하고 통상 빠르면 2년, 정상적일 때는 3년이 걸린다. 대통령이 뭔가 해서 임팩트 있는 정책을 추진하려면 초반 1~2년에 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대통령중심제, 5년 단임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 정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반환점을 돈다. 내년 초가 되면 벌써 청와대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던, 대통령에게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훅 떨어진다. 그만큼 대통령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길어야 3년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대통령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그건 길어야 한 3년이다. 어떤 방식으로 총선에서 이기든 대통령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결국 대통령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그건 길어야 한 3년이다. 어떤 방식으로 총선에서 이기든 대통령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여당이 압승하게 되면, 승리의 공(功)을 여당이 가지면서 차기가 급격히 가시화된다. 차기가 나오면 지금의 대통령은 뒤로 물러나게 된다. 선거에서 지면 말할 것도 없다. 내년 총선이 지나면서 굉장히 행정부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의 뉴딜정책을 예로 들어보겠다. 흔히 뉴딜정책이라고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재정경제부 국장일 때 정부에서 한국판 뉴딜을 한다고 했었다. 경기를 촉진하기 위해서 땅을 파고, 토목공사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그래서 전국의 골프장을 늘리고 그랬다. 나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공화당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에 있었다. 그때 아메리칸 이데올로기를 공부했었는데, 책을 많이 읽어보니까 ‘뉴딜정책이란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보와 보수 정책을 가르는 게 뉴딜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실업자가 생기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니까 가난한 사람을 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복지정책에 대해 연방정부가 얼마나 개입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게 뉴딜이다. 과거 기독교 사회에서 미국의 건국이념은 개인의 자유, 기업의 자유, 작은 정부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이 어떻게 사느냐는 자기 책임이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커뮤니티의 베이스로 복지를 하는 것이지 정부 개입은 아니라는 것이 미국의 건국이념이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원래 대학교수였다. 프린스턴대학교 총장 출신이다. 그때 미국에도 진보적인 사고가 생기기 시작했다. 왜 개인이 다 책임을 져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커뮤니티가 형성되지 않고 있는데, 개인의 낙오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논리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이끄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우드로 윌슨이었다. 그때 어떻게 됐나. 당시 선거 분위기상 공화당이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해서 민주당에서는 후보가 안 나왔다. 그래서 윌슨 총장에게 후보로 나오라고 해서 윌슨이 나간 것이다. 그런데 공화당에서 후보가 분열되는 바람에 3파전이 됐다. 공화당 표가 분산되면서 결국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윌슨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드로 윌슨이란 사람이 창안한 진보주의가 꽃을 피운 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였다.
 
 
  이념의 시대는 끝날 수 없어
 
  우리는 뉴딜정책이 테네시 계곡 사업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그건 극히 일부분이다. 뉴딜과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싱글맘’에 대한 복지가 추가되는 등 미국의 사회복지가 완성됐다. 결혼을 안 해도 지원이 되다 보니 ‘가정파괴법’이라고 할 정도였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하워드대학에서 한 연설을 보면 “기회의 평등으로는 안 된다. 결과의 평등까지도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는 게 의문이 들 정도지만, 그것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완성한 것이 바로 ‘오바마 케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민개보험(皆保險)제도를 도입한 게 우리나라다. 그런데 이것을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미국이 도입했다. 당시 미국은 ‘유럽식 사회주의’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현장에서 그걸 보며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2008년 3·1절 기념사에서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헤리티지재단 가서 공부하고, ‘오바마 케어’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 보면서 이념의 시대는 끝날 수가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바마 케어’가 일본 재무장화 촉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장관은 “오바마 케어 가지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 보면서 ‘이념의 시대는 끝날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사진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복지정책을 위해 재원이 많이 필요하니 오바마 정부에서 뭘 했겠나? 바로 국방예산을 삭감했다. 국방예산 깎아서 복지에 넣은 것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로부터 시작된 극우와 재무장 이론은 모두 오바마 케어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부상하고 있는데, 그걸 가둬놓으려면 다른 나라의 국방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와이의 태평양 사령부를 ‘인도-태평양 사령부’로 명칭을 바꿨다. 인도와 태평양, 오세아니아로 중국을 가두는 것이다. 미국-일본-인도-오스트레일리아가 4개의 축이다. 한국은 옵서버(observer) 정도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정책에서 우리는 조연에 불과하다. 오바마 케어가 미국의 국방정책에 영향을 준 것이고, 일본 재무장을 불러온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14년 12월 1일 도쿄 우치사이와이초(內幸町)의 기자클럽에서 열린 중의원 선거 토론회에 참석해 ‘이 길밖에 없다’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이 길(아베노믹스)밖에 없다는 확신 아래 전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한국에는 어떤 영향을 줬을까. 한국은 일본의 재무장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손해를 봤다. 바로 ‘아베노믹스’다. 일본은 무슨 돈으로 재무장하나.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안 그래도 군국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미국이 재무장하라니까 경제적 요구를 한다. 그게 ‘아베노믹스’다. 일본은 재무장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환율에 손을 대서 달러당 150엔까지 올렸고, 지나치게 절하한 것 아니냐는 오바마의 지적까지 나왔다. 일본의 인위적인 환율 평가절하로 주변국인 우리가 궁핍해진 것이다. 국제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데, 미국이 그걸 허용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손해를 많이 봤다. 조선・기계산업이 힘들어진 것이 다 그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기계가 일본에 비해 품질은 조금 떨어져도 가격이 싸기 때문에 잘 팔렸다. 그런데 일본 환율이 78엔 하던 것이 130~140엔으로 변하니까 가격이 대등해진다. 그럼 품질이 떨어지는 한국 기계를 누가 사나. 거기에 중국이 우리를 바짝 추격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오바마의 복지정책이 국방비 삭감을 부르고, 일본의 재무장을 부르고, 일본 재무장이 아베노믹스를 부르고, 결국 한국 산업을 걷어차게 된 것이다.
 
 
  이승만의 최고 업적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장관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최고 업적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생각이 어떻게 미국을 바꾸고, 오늘날 한국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했다. 동북아에서 일어나는 일, 한일 간에 일어나는 일, 한·중·일 간의 일을 볼 때 그 뒤에 일어날 역학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봐야 한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전쟁을 겪고 뚜렷한 업적을 내기에는 너무나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1948년 취임을 해서 1950년에 전쟁이 나고, 폐허에서 어떻게 해보려다가 4·19를 겪었다. 이승만의 업적이라 하면 각자의 이념에 따라 생각이 다르겠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본다. 이 조약 덕분에 대한민국이 국방비 걱정을 안 하면서 경제에만 자원을 투입할 기회를 받았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무이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린스턴대학을 나왔는데 그때 총장이 우드로 윌슨이다. 당시 미국 국무부에 프린스턴 동문이 많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승만의 청을 많이 들어줬다. 또한 닉슨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을 어마어마하게 존경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방미(訪美)를 하면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데, 상하원 의원들이 참석한 데서 제대로 연설한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밖에 없다. 다른 대통령 때는 의석이 반절도 차지 않았고, 의원이 아닌 사람도 많았다. 대한민국이 투자한 주(州)의 의원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상 의회 연설이 아니라 의회에서 사람을 집단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갔을 때는 상하원 의원 전원이 참석하고 대법관, 장관 등 모두가 참석했다. 보통 우리나라 대통령이 앤드루스공항에 가면 영접 나오는 사람이 의전관이다. 중요한 경우에는 국무부 장관이 직접 나오기도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 때는 영접 나온 사람이 닉슨 당시 부통령이었다. 처음에는 닉슨이 이승만 대통령을 야단치러 1953년에 방한(訪韓) 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고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한 것이다. 그래서 부통령이 직접 앤드루스공항으로 영접을 온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승만의 토지개혁, 인적자원 확보 계기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장관이 국정리더십포럼에서 ‘문제는 경제다: 대통령과 경제’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토지개혁을 하면 자기가 직접 자경하는 땅이 아니면 다 내놓아야 한다. 소작인에게 줘야 하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에 국가가 지주로부터 땅을 사는데, 당시 지불 수단이 채권이었다. 그 채권을 소작농한테 팔았다. 즉 유상몰수, 유상분배였다. 이게 사회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유상몰수할 때에 제값을 쳐줬다. 시가를 반영해준 것이다. 그런데 유상분배는 턱없이 싼 가격에 했다. 3년 치 수확물을 분납하면 됐다. 소작농으로서는 죽어라 일해야 받는 것이 얼마 없지만, 유상분배 후에는 3년 치 수확물을 10년에 나눠 내니까 30%만 내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멋있게 보이지만, 재정학자들이 보면 큰일 날 일이다. 정부가 큰 빚을 진 것이지 않나. 다행히 잠재적인 재정 적자가 나중에 일거에 해결됐는데, 바로 전쟁으로 해결됐다. 전쟁이 나면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국채가 휴지 조각이 된다. 경제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이러한 토지개혁은 ‘엄청난 재정부담을 예고했다’거나 ‘자본형성을 늦췄다’고 비판을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잘했다’고 한다. 나는 진보주의건 보수주의건 간에 토지개혁은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본다.
 
  최중경이 사회주의자가 아닌데 왜 토지개혁을 지지하겠나. 우리나라는 자원이 사람밖에 없다. 그런데 토지개혁을 하니 어떤 일이 벌어졌나. 교육열이 생겼다. 너도나도 학교에 가게 됐다. 소작농의 한은 못 배운 것이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한글 배우는 데 몇 시간이면 다 배운다고 하는데, 1960년대 군대에서는 사병들의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일이었다. 산간오지는 토지개혁을 했는지도 몰랐다. 화전민이 정리된 게 1970년대 중반이다. 그러나 토지개혁으로 웬만한 사람은 학교에 가게 됐다. 토지개혁을 통해서 교육의 기회를 가진 것이다. 결국 산업화 시대에 고급 인력을 공급하는 베이스가 된 것이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이것은 이념에 관계없이 사람밖에 없는 대한민국이 인적자원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라고 하면 이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제학적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박정희에게 한 4가지 조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경인경수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도로에 샴페인을 뿌리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다음으로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하겠다. 우리나라 경제의 분수령이 이때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방문을 한다. 대통령 되고 나서 왜 서독에 갔느냐 하면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박 대통령을 군사정권이라고 홀대를 했다. 차관도 안 주고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했다. 고민 끝에 같은 분단국가니까 혹시 잘해주지 않을까 하고 서독에 간 것이다. 에르하르트 수상(총리)을 만났는데, 그때 에르하르트가 한 얘기가 “첫째는, 자동차 산업을 해라. 전후방으로 연관 효과가 가장 큰 게 자동차 산업이다. 둘째는, 현대산업의 핵심은 철강이니까 철강을 해라. 그다음으로 고속도로를 깔아라. 마지막으로 수출 드라이브를 걸어라. 너희는 수출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이 네 가지를 조언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일본하고 관계를 정상화해서 일본과 협력을 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계은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를 밀어붙였다. 그다음에 국교정상화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게 정말 중요하다. 당시 국제기구나 경제기구는 수입대체 산업화를 강조했다. 수입하지 말고 스스로 만들라는 얘기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 드라이브’를 걸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 드라이브를 교조적으로 실천했다. 당시에 태국, 말레이시아, 남미 등 다 우리나라보다 잘살았는데 ISA(수입대체 산업화)를 채택했고, 우리나라만 수출 드라이브를 채택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만 성공했다. ISA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규모의 경제’ 때문이다. 당시 2000만~3000만 정도의 남한 인구로는 공장의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럼 제조단가가 오른다.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수입대체 산업화를 하려면 관세를 높여 자국 산업을 보호해야 하는데 밀수가 있지 않나. 후진국은 밀수를 막을 장비나 병력이 없다. 규모의 경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관세인데, 밀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다.
 
 
  전두환에게 두 번 놀란 이유
 
  다음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하면 약간 모자란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두 번 정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예전 ‘저축의 날’에 내가 담당 사무관이었다. 그런데 이분이 얼마나 위트가 있고 유머가 있는지 좌중을 웃겼다 울렸다 했다. 아주 유연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좌중을 들었나 놨다 했다. 다들 깜짝 놀랐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내가 세계은행 상임이사를 할 때, 네오콘(neocons·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을 일컫는 용어)의 강경파인 폴 울포위츠 총재하고 도쿄에서 행사하고 내가 한국에 한번 가자고 해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탔을 때였다. 마침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울포위츠 총재가 자기가 미 국무부 아·태 차관보를 할 때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번 브리핑을 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서 인사를 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이 사람을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데도 딱 보더니 “아·태 차관보 하던 사람 아니냐”며 한번에 알아보더라. 그때가 2005년 12월이었는데, 울포위츠가 차관보 했던 게 당시를 기준으로 무려 20년 전 일이었다.
 
  그다음으로 놀란 것이 내가 통역을 하려고 했더니, 전두환 대통령이 울포위츠와 직접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영어가 아주 괜찮은 영어였다. 굉장히 놀랐다.
 
  전두환 대통령은 김재익 경제수석(아웅산 테러로 사망)을 앉혀놓고서는 “경제는 자네가 대통령이야. 자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 난 잘 모르니까”라고 했다. 굉장한 지도력이다. 사실, 잘 몰라도 그냥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을 망가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전두환 대통령은 내가 모르니까 경제에서는 당신이 대통령 해라. 그래서 김재익 수석이 이 무렵에 한 것이 인플레이션 잡아야 하고 어느 정도 자유화를 해서 시장의 메커니즘을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경제가 지속성장토록 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을 실천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그래서 인플레를 잡고 자유화가 시작되도록 한 사람이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다.
 
 
  자유화와 세계화의 개념을 혼동하여 위기 자초한 YS
 
  노태우 대통령 들어와서 88올림픽 하면서 자유화가 급속한 물결을 탔다. 그때 내가 사무관을 했는데, 금리자유화를 비롯한 자유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규제를 풀고 하다가 문민정부로 들어와서 자유화를 계속하게 되었다. 당시 문민정부는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개념을 강조했는데, 정작 세계화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실천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세계화가 개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다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한 역량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냥 개방과 세계화의 개념이 혼동된 것이다. 리버럴라이제이션(liberalization·자유화)과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세계화)이라는 게 혼용이 돼버렸다.
 
  그래서 나온 실수가 바로 개방오프닝, 마켓오프닝을 하면서 상응하는 보완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현지금융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현지금융이라는 것은 현대건설의 해외법인이 거기서 차입을 했을 때, 그것을 대개 본사에서 지급보증을 하게 되니까 결국은 현대의 채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때 보니까, 정작 우리 기업에는 현지금융 통계가 없더라. 도대체 얼마의 빚을 지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외환위기가 올 수밖에 없었다. 자유화를 했으면 최소한, 사전인가 행위를 안 하면 사후 모니터링이라도 해야 하고,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서 정확하게 분석을 하고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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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택연    (2019-10-01) 찬성 : 13   반대 : 2
잘 읽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 내용도 빨리 보고 싶네요.

20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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