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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의 인문학 〈7〉

이탈리아 작가 자코모 카사노바의 ‘나의 遍歷’을 찾아 유럽을 周遊하다

“카사노바에게 인생은 山海珍味가 가득 차려진 식탁과 같았다. 인생이라는 식탁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는 인생을 찬미한 시인이었고, 삶의 기쁨을 만끽한 쾌락주의자였다”

글·사진 : 문갑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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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노바 자서전’이 오랜 기간 禁書가 된 것은 적나라한 애정행각을 공개했기 때문
⊙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파도바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수재… 성직자와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 프리메이슨 結社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전 유럽을 누빈 당대의 ‘세계인’
⊙ 회고록 쓰며 “어쨌거나 이 회고록은 내가 저세상에 가고 난 다음에야 이 세상에 공개될 것이므로 나를 아무리 비난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라며 독자들에게 비아냥
⊙ 한국 최고의 번역가 김석희, “프랑스혁명을 앞두고 낡은 것의 해체와 새로 태어나는 것의 발효로 이상한 활기와 감미로운 권태가 데카당스의 세계를 묘사한 수많은 작품 속에 ‘카사노바 회고록’은 우뚝 자리잡고 있다”
⊙ 독특한 여성관, “나는 여성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느꼈고, 항상 여성을 사랑했으며, 여성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쪽 알프스를 넘으면 광대한 라벤더 고원이 나온다. 그 옛날 카사노바도 이 길을 통해 파리로 갔을 것이다.
  《월간조선》 2018년 12월호에 실린 ‘방랑자의 인문학’을 쓸 때였다. 단테의 《신곡》을 정독(精讀)한 후 내친김에 ‘단테’라는 이름이 들어간 추리소설을 다 섭렵할 기세였는데, 돌연 프랑스 작가 아르노 드랄랑드의 《단테의 신곡 살인》 첫머리에 예상외 인물이 등장했다. 그 장면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이따금 자코모 카사노바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역시 엇비슷한 행운을 거머쥔 차였다. 이 얼마나 인생역전인가! 그는 베네치아 고관대작들을 따라 가슴 뛰는 권력의 현장을 목격했고 카지노에서 정기적으로 지갑을 두둑이 채웠다. 물론 그가 결점만으로 점철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감탄스러운 시를 지어낼 줄 알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통달했으며, 철학에 능했다. 해박한 지식과 카리스마, 명석한 두뇌, 재치 있는 임기응변, 그리고 듣는 이를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치다 기어이 울리고야 마는 탁월한 이야기꾼의 능력을 지닌 그는 유쾌한 벗으로서 인기가 높았다.”
 
  드랄랑드의 소설은 베네치아에서 1756년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범인은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아홉 개 옥(獄)의 형벌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첫 희생자는 배교(背敎)의 죄를 저질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육욕(肉欲)에 눈먼 두 번째 희생자는 성당 종루(鐘樓)에 매달린 채 벼락 맞아 최후를 맞는다.
 
  놀란 베네치아공화국 원수(元首)는 당대 최고의 스파이 피에트로 바라볼타를 감옥에서 빼내 사건 해결을 지시하는데, 이 감옥에서 주인공 바라볼타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게 카사노바다. 바라볼타도 후견인인 원로원 의원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이 부분은 작가가 다분히 카사노바를 의식한 듯하다.
 
유럽에는 드넓은 해바라기밭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카사노바도 이 해바라기밭을 걸으며 정열을 불태웠을 것이다.
  기자(記者)란, 이런 글을 만날 때 무엇이 ‘팩트(fact)’이고 ‘픽션(fiction)’인지 가려내는 직업과 속성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조반니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1725~1798)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카사노바의 생몰(生沒) 연대를 보면 소설에 등장하는 1756년 살인사건 당시 그는 30대였다.
 
  둘째, 그는 베네치아에서 배우의 아들로 태어나 파도바대학에서 민법과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도바대학은 유럽 최고(最古)의 대학으로서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이 생기기 이전 유럽 학문의 최고(最高) 전당이었다.
 
  셋째, 카사노바는 로마 가톨릭 추기경 밑에서 일했으며 군인(軍人)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리메이슨 결사(結社)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최근 미국 작가 댄 브라운 유(類)의 픽션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프리메이슨 단원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넷째, 그런가 하면 그는 당시로선 상상을 초월한 ‘세계인’이었다. 베네치아, 파리, 리옹, 콘스탄티노플, 드레스덴, 프라하, 빈, 런던, 베를린, 피렌체, 바젤, 바르셀로나, 로마, 리가, 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보헤미아를 끊임없이 여행하고 때론 망명하면서 18세기 유럽 사회의 정치·문화 현장을 생생히 체험했고, 또 그것을 글로 남긴 당대의 작가였다.
 
  다섯째, 그의 직업은 도무지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무뢰한과 방랑자들의 친구, 탁발 수도승, 모험 군인, 사기꾼, 도박사, 마술사, 복권사업가, 금융업자, 외교관, 철학자, 연금술사, 바이올린 연주자, 어릿광대 등 생각나는 것만 열 가지가 넘는다. 한마디로 재주가 넘치는 다재다능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가 남긴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는 수많은 여인과의 연애담과 당대 유럽 문화와 풍속도를 박진감 있는 문체로 담고 있다. 이탈리아인이면서 프랑스어로 쓴 책인데 불문학도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불문학자로 한국 최고의 번역자라고 할 수 있는 김석희의 평가를 인용한다.
 
  “프랑스혁명을 앞두고 낡은 것의 해체와 새로 태어나는 것의 발효로 이상한 활기와 감미로운 권태가 데카당스의 세계를 묘사한 수많은 작품들 속에 ‘카사노바 회고록’은 우뚝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자를 유혹하는 카사노바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카사노바의 책은 12권인데 한국에서는 세 권짜리 《카사노바 나의 편력》(김석희 역·한길사)이 출간됐을 뿐이다. 또 그가 쓴 《20일간의 이야기》는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의 선구(先驅)라는 평을 받는다. 영국 동화작가 비어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에서 영감을 받은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낸 것과 비슷하다.
 
  카사노바의 자서전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나는 보헤미아에서 나를 서서히 죽이고 있는 끔찍한 권태를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이 회고록을 쓰고 있다. 육신은 비록 늙었으나, 내 영혼과 욕망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회고록은 내가 저세상에 가고 난 다음에야 이 세상에 공개될 것이므로 나를 아무리 비난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방탕한 생활을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나는 건전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고 내 가슴속에는 일찍부터 신(神)의 원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평생 동안 감각의 노예였다. 나는 옳은 길을 엇나가는 데에서 기쁨을 느꼈고, 내 잘못을 자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위안도 없이 계속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니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내 회고록에서 참회자의 모습이나 무분별한 방탕을 고백하는 자의 부끄러운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내 이야기를 뻔뻔스러운 자화자찬으로 듣지 말고 그것이 일반적인 고백에 어울리는 말투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카사노바의 초상화다. 카사노바는 키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렇다면 카사노바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카사노바의 아버지는 희극배우고 어머니는 성악가였다. 6남매 중 장남이 카사노바다. 카사노바의 동생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는 훗날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로 성공한다. 카사노바의 초상화 역시 동생이 그려준 것이다.
 
  카사노바는 콘스탄티노플로 여행을 떠났다가 베네치아로 되돌아간 뒤 동생 프란체스코 카사노바와 해후하는데, 동생은 죄를 지은 게 아니면서도 요새에 갇혀 전쟁화(戰爭畵)를 모사하고 있었다. 분개한 카사노바는 육군 장관을 만나 자신이 군인 직업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동생을 당장 석방하는 허락을 받아낸다.
 
  카사노바에 따르면, 그는 여덟 살하고도 넉 달이 될 때부터 ‘기억’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기억을 위한 기관(器官)이 내 두뇌 속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생후 8년4개월부터였다. 그때야 비로소 내 영혼은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만질 수도 없고 만져질 수도 없는’ 무형의 실체가 어떻게 느낌을 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네 가지 기질을 가졌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네 가지 기질을 모두 타고났으며 그것은 때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린 시절에는 점액질이어서 게을렀고, 젊은 시절에는 다혈질이어서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다. 그다음에는 성미가 까다로운 담즙질이 되었고, 지금은 걸핏하면 우울해지는 기질이 있는데 이 기질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듯싶다.”
 
  번역자 김석희는 카사노바의 인생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카사노바에게 인생은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 차려진 식탁과 같았다. 인생이라는 식탁 앞에서,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느 음식부터 맛보면 좋을지 몰라 어리둥절하지만 그 식탁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 갈망의 눈길은 관능적인 욕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을 찬미한 시인이었고 삶의 기쁨을 만끽한 쾌락주의자였다.”
 
  카사노바가 책에서 밝힌 좌우명은 이렇다.
 
  “자신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마르세유 대성당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유럽인들은 신앙심이 깊었지만 종교의 가르침과 다른 행동도 많이 했다.
  카사노바는 파도바대학에서 라틴어·그리스어·프랑스어·히브리어·스페인어·영어·고전문학·신학·법학·자연과학 등 다양한 지식뿐 아니라 춤·펜싱·승마·카드게임 같은 사교술도 익혔는데, 이것이 그가 훗날 세월을 초월한 ‘바람둥이의 대명사’처럼 각인되게 한 여인 잡는 잡기(雜技)가 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여성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내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여성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느꼈고, 항상 여성을 사랑했으며, 여성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또한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는 억누를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
 
  그는 특이하게도 여성을 책에 비유, 여성의 외향과 ‘겉표지’를 동일시했다.
 
  “사실 여자란 좋든 나쁘든 처음에는 겉표지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책과 마찬가지다. 첫 부분이 재미가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 못하며, 우리의 욕망은 우리가 느끼는 흥미와 정비례한다.
 
  여자의 겉표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책의 그것과 똑같고,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남자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위인 여자의 바른 책의 판본(版本)과 마찬가지의 흥미를 준다. 대부분의 아마추어들은 여성의 발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거나 혹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어떤 책이 초판본인가 혹은 10판째인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의 미각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여기엔 음식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된다.
 
  “나는 솜씨 좋은 나폴리 출신 요리사가 만든 마카로니라든가 에스파냐 사람들이 즐겨 먹는 잡탕찜, 뉴펀들랜드에서 잡아 온 대구 자반, 양념을 듬뿍 친 날짐승 고기,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치즈처럼 향이 강하고 맛이 진한 음식을 좋아했다. 특히 치즈의 참맛은 그 속에서 미생물이 활동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여성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냄새를 풍기는 여자를 사랑했고 여자가 땀을 많이 흘릴수록 냄새가 좋았다.”
 
카사노바가 방문했던 콘스탄티노플은 인종의 용광로였다.
  카사노바는 일생 122명의 여인을 품에 안았다고 이 자서전에서 밝히는데, 첫 행각(行脚)은 17세에 성직자로 갓 임명된 시절 벌어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을 지도해준 말리피에로가 70대임에도 불구하고 17세 여가수를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그의 여성관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말았다.
 
  카사노바는 한 백작부인의 집에 초대됐다 관리인의 딸과 사랑에 빠졌는데, 사제라는 신분 때문에 애써 절제했다. 하지만 훗날 그녀는 한 호색한(好色漢)의 노리갯감이 됐고 이 사실을 알고 그는 ‘사랑이란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이상한(?) 결심을 하며 본격적으로 여성들을 후리고 다녔다니 특이한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인터넷에는 카사노바의 여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자세히 정리해놓은 글들이 있다. 몇 가지 인용해본다.
 
  카사노바가 당시 자주 사용하던 수법이라고 자서전에 밝힌 바에 따르면, 첫째 그는 교회 같은 곳에서 젊고 매력적인 유부녀를 찾는다. 아무 유부녀나 다 되는 건 아니고 조건이 필요하다.
 
  유부녀의 남편이 보복하려고 들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힘 있는 유력 가문이 아니라 기술자나 직공 같은 평범한 집안의 유부녀가 그의 타깃이었다. 타깃을 정하면 카사노바는 다음 행동으로 들어간다.
 
  목표로 삼은 여인의 집을 확인해두고 한밤중에 들이닥치는데, 카사노바 일당은 주로 ‘베네치아 10인 위원회’ 직속 요원을 사칭했다. 베네치아에는 10인 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미국 CIA나 영국 MI5 같은 정보기관의 원조(元祖)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세냥크 수도원이다.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수도원은 때론 여행자들의 숙소가 되기도 했다.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베네치아 10인 위원회를 영국인들은 “현대 정보기관의 시작”이라고 평가하는데, 베네치아가 해군력을 제외하고 변변한 육군력도 없이 1000년 가까이 이탈리아 라이벌 피사나 제노바, 나중엔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지중해의 여왕으로 입지를 다진 데는 10인 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여하간 카사노바 일당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타깃의 집에 난입해 남편과 아내를 모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려 서로 다른 곤돌라에 태워 납치한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먼 곳에 내려주고 아내와 관계를 갖는 식이다. 당연히 남편에겐 오늘 있었던 일을 발설하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겁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한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 전 아내를 데려다 놓으니 남편의 의심도 피할 수 있었다. 피해자 부부는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갔다 돌아왔으니 범인들의 은신처를 알 리 없고, 혹시 상대가 진짜 10인 위원회라면 후환이 두려우니 피해 사실을 알리기가 무서울 것이 당연하다.
 
  둘째, 그는 당대의 멋쟁이로, 현대 명품으로 꼽히는 버버리식 체크무늬 패턴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옷에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셋째, 그는 아무리 관계를 가져도 상대가 임신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카사노바식 피임법’이 유명해졌다. 카사노바는 당시 콘돔이 그리 완벽하지 않았기에 스위스 제네바의 금 세공사에게 큰돈을 주고 지름 18mm, 무게 60g의 금구슬을 특별 제작, 여자 몸에 삽입해 정액이 몸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레몬 과즙을 일종의 살정제(殺精劑)로 이용한 방법도 구사했다.
 
이스탄불의 상징인 아야 소피아.
  그렇다면 추리소설 《단테의 신곡 살인》에 등장하는 것처럼 카사노바는 실제로 감옥에 갇힌 적이 있을까? 사실이다. 이전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귀족의 양자(養子)로 들어갔는데, 신분을 의식해 자제하기는커녕 베네치아의 난교(亂交)파티에 수녀까지 끌어들였다가 투옥되고 말았다.
 
  당시 카사노바에게 적용된 죄목은 “이성을 유혹하는 이단(異端)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것으로, 5년 형을 받았는데 애인을 카사노바에게 빼앗긴 귀족들이 일치단결해 그를 잡아넣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투옥된 곳은 베네치아 두칼레 궁전 맨 위층 피옴비 감옥인데, 그는 훗날 이런 변명을 했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 종교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마의 콜로세움. 카사노바는 이곳을 거쳐 나폴리로 갔다.
  1년을 감옥에서 지내던 카사노바는 1756년 탈옥해 1년 뒤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거기서 친구의 도움으로 복권사업소 5곳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지만 역시 여자 문제로 막대한 금전을 탕진했다. 이후 영국과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에 도착해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난 카사노바는 항상 그랬듯 러시아 여인들을 농락하다 러시아인들의 분노를 사 스페인으로 갔고, 거기서 자서전을 집필했다.
 
  카사노바는 말년(末年)을 체코 프라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헤미아 발트슈타인 백작의 둑스성에서 사서(司書)를 하며 보냈다. 젊었을 때 너무 정력을 낭비한 탓인지 40대 중반부터 성기능을 상실했다고 하는데, 1798년 6월 4일 73세로 세상을 뜨며 남긴 유언(遺言)이 그의 삶과 정반대여서 그의 성격을 짐작게 한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
 
로마의 산탄젤로 성은 원래 황제의 묘였으나 나중에 교황의 거처로 바뀌었다.
  일설에는 비슷한 시대를 산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할 때, 60대 중반의 노년 카사노바가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모차르트에게 자신의 화려한 여성편력사를 자랑하며 돈 조반니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부도덕하고 문란한 주인공 돈 조반니를 묘사하는 게 영 마땅치 않았던 모차르트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카사노바보다는 돈 조반니가 훨씬 낫겠다”며 원래 스토리대로 작곡을 진행했다고 한다. 비록 카사노바는 연애사로 묘사했지만 모차르트의 귀에는 연애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만 부각시키면 카사노바가 과연 천하의 난봉꾼처럼 보이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스프라는 귀족과 나눈 종교에 대한 논쟁을 보면 언제 여성들을 유혹하는 바람둥이였나 싶게 반짝이는 지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 논쟁을 간단히 인용해본다.
 
  유스프(이하 유): “위대한 예언자(무함마드)께서 신에 대해 알려준 민족들은 하나같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어요.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예요. 예언자의 사도들이 계속 똑같은 대상을 보았다면 그들은 아마 이전의 잘못을 다시 범하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카사노바(이하 카): “형상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민족은 없었습니다. 그 형상이 나타내고 있는 신을 경배하는 겁니다.”
 
  유: “그건 나도 인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신은 물질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속인들의 머릿속에서 신이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없애버린 것은 올바른 일입니다. 신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당신네 기독교도뿐이오.”
 
  카: “그건 사실입니다. 우린 그걸 확신합니다. 하지만 신앙만이 우리에게 그러한 확신을 준다는 걸 알아두십시오.”
 
  유: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오. 물질적인 표상에 불과한 것을 보면서 신을 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말이오. 당신네 신앙이 그것을 부인한다고 말하지 않는 한.”
 
  카: “그런 말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우리의 확신을 확인해주고 있는걸요.”
 
  유: “우리는 그러한 자기 기만을 할 필요가 없어서 신에 감사하고 있지요. 스스로를 기만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철학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어요.”
 
  카: “그건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학의 문제입니다. 신학은 아주 뛰어난 학문이지요.”
 
  유: “당신은 지금 우리 신학자들이 쓰는 말을 하고 있군요. 우리 신학자들과 당신네 신학자들이 다른 점은 단 한 가지뿐이오. 우리 신학자들은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애쓰는 반면 당신네 신학자들은 그 진리를 더욱 모호하게 하려고 애쓴다는 점이오.”
 
  카: “진리가 하나의 신비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토스카나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성이다.
  끝으로 카사노바가 남긴 어록(語錄) 가운데 유명한 몇 가지를 인용해본다.
 
  ‐ “내 오감(五感)의 즐거움을 함양하는 게 내 인생에서 주된 업무였다.”
 
  ‐ “내 인생에서 성공과 불행, 밝은 날들과 어두운 날들과 같은 모든 것이 내게 입증한 것은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악에서 선이 나오듯 선에서 악이 나온다는 것이다.”
 
  ‐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
 
  ‐ “인간은 자유롭지만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기 전까지는 아니다.”
 
  ‐ “기록될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한 게 없다면 적어도 읽을 가치가 있는 뭔가를 쓰라.”
 
  ‐ “젊은이를 과감하게 만드는 것은 얄팍한 욕망이다. 강렬한 욕망은 그를 당혹하게 만든다.”
 
  ‐ “실수하지 않는 자는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 “내게 유일한 삶의 체계는 부는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내가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 “사랑의 4분의 3은 호기심이다.”
 
  ‐ “나는 사랑에 굴복할 뿐 사랑을 정복하지 않는다.”
 
  ‐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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