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학창시절부터 1등 놓치지 않아… 진명여고보 졸업 후 조선인으론 처음 도쿄여자미술학교로 유학 가
⊙ 일본 도쿄에서 연애 폭발… 오빠 친구 최승구, 변호사 김우영, 소설가 이광수와 불꽃 같은 ‘겹다리 연애’ 시작
⊙ 김우영과 결혼식 때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前 애인 최승구의 碑石을 세워줄 것 등 요구해 세간의 이목 집중
⊙ 남편과 함께 간 프랑스 여행에서 최린과 불륜 시작… 결국 이혼하면서 몰락
⊙ 이별 통보한 최린을 ‘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주며 무마 시도
⊙ 1934년 쓴 〈이혼 고백서〉 장안의 화제 일으켜…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수원의 ‘나혜석 거리’에 살아 있다
⊙ 일본 도쿄에서 연애 폭발… 오빠 친구 최승구, 변호사 김우영, 소설가 이광수와 불꽃 같은 ‘겹다리 연애’ 시작
⊙ 김우영과 결혼식 때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前 애인 최승구의 碑石을 세워줄 것 등 요구해 세간의 이목 집중
⊙ 남편과 함께 간 프랑스 여행에서 최린과 불륜 시작… 결국 이혼하면서 몰락
⊙ 이별 통보한 최린을 ‘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주며 무마 시도
⊙ 1934년 쓴 〈이혼 고백서〉 장안의 화제 일으켜…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수원의 ‘나혜석 거리’에 살아 있다
- 나혜석의 좌상이다. 그 옆에는 조형물이 있다.
현대사에서 생(生)을 추적해 보고 싶은 여성이 몇 있다. ‘사(死)의 찬미(讚美)’로 대중을 휘어잡은 뒤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1897~1926), 동양 춤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1911~1969), 이완용 뺨친 희대의 간신 배정자(1870~1952)와 간첩 김수임(1912~1950), 당대의 명사로 친일파로 몰린 모윤숙(1910~1990) 등이다.
자료를 종횡(縱橫)으로 섭렵 중인데 눈은 어둡고 체력은 쇠해 무간(無間)의 미궁(迷宮)에 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2015년 4월 22일 부음란의 기사를 계기로 취재했던 나혜석(羅蕙錫·1896~1948)부터 시작해 본다. 당시의 부음기사 리드는 “17일 김건(金建) 전 한국은행 총재가 별세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계속 부음기사를 인용해 본다. “향년 86세. 고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고 나혜석(羅蕙錫·1896~1948)씨의 셋째 아들이다….” 이제 나는 독자들과 함께 역사의 시계추를 71년 전으로 되돌려 볼 작정이다. 1948년 12월 10일 밤 8시30분, 신원 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병원이 지금의 이태원으로 옮긴 용산구청이 아닌 옛 용산구청 근처 자제원(慈濟院)이다.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해 맏딸 김나열, 김선(12살 때 병사), 김진(서울법대 교수), 김건(한은 총재) 등 3남1녀를 낳았다.
나혜석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이 경기도 수원이다. 거기가 나혜석의 고향이다. 더 정확히 팔달구 수원행궁(行宮) 화령전(華寧殿) 앞 신풍초등학교 후문 근처로, 집터에 기념비가 서 있다. 나혜석의 부친 나기정은 용인군수를 지냈다. 고관 출신답게 집터가 왕궁 바로 옆의 좋은 위치였다.
내가 갔을 때 공교롭게도 부근의 동네 도서관에서 마침 ‘나, 나혜석’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다. 수원에는 이 밖에도 나혜석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혜석 거리’다. 길이가 약 400m쯤 되는 거리에는 나혜석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이 있고 그의 연보를 새긴 돌 조각이 놓여 있다.
주변은 온통 먹자골목이어서 대체 왜 이곳을 ‘나혜석 거리’로 정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나혜석 거리에 좌상과 함께 입상(立像)도 있는데 얼굴 생김이 사뭇 다르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한 나혜석은 학창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진명여고보 졸업 후엔 조선인으론 처음 도쿄여자미술학교로 유학 갔다.
그가 서양화를 택한 건 오빠 나경석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때부터 나혜석의 불같은 사랑이 시작되는데 첫 상대가 하필이면 오빠의 친구 최승구였다. 최승구는 1916년 폐결핵으로 고향 전남 고흥에서 요절했다. 나혜석이 문병을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둘의 사랑은 비극적이었다.
최승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집안에서 맺어 준 본처가 있었다. 최승구는 도쿄유학생 중에도 ‘천재’로 불리며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간여했지만 나경석은 그의 불우한 환경을 꺼려 여동생과의 교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최승구가 숨을 거둘 때 나혜석은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혜석은 한동안 신경쇠약 증세를 앓기도 했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悲運)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엇갈린 사랑은 두 번째에도 잘못되기가 십상인데 나혜석 역시 그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번째 상대 김우영(金雨英· 1886~1958)은 부산 출신으로 교토(京都)제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 역시 1916년 첫 부인과 사별(死別)했다. 그가 나혜석을 만난 것은 1917년이다. 나중에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는데 김우영이 조선 땅으로 돌아온 것은 1918년이었다.
처음에는 반일(反日) 변호사처럼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다. 3·1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붙잡혀 간 연인 나혜석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올 정도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선의 숱한 엘리트들이 빠져들어 몸을 망치고 만 자치론(自治論)에 경도(傾倒)되고 만다.
자치론이란 일본의 식민지이되 자치권을 가지면 만족한다는 일종의 타협 노선이다. 그와 비슷한 논리를 편 이들이 설산(雪山) 장덕수와 훗날 연적(戀敵)이 되는 최린이다. 김우영과 나혜석의 러브스토리를 본격적으로 말하기에 앞서 언급해야 할 이가 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1892~1950)다.
춘원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난 뒤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로 유학을 갔다. 고등예과에 편입한 것이다. 19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성사된 춘원의 일본 유학은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춘원은 그때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꿈꾼다.
그런 그에게도 이미 애인이 있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다. 요즘 말로 ‘양다리 걸치기’인데 춘원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은 이번에도 오빠 나경석이었다. 춘원이 고향에 백혜순이라는 본처까지 둔 유부남인 걸 알았던 것이다. 남자들이 군침 흘리는 동생을 둔 나경석은 평생 골이 아팠을 것 같다.
문제는 춘원 못지않게 나혜석 역시 김우영과 춘원 사이를 오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新)지식인의 사랑은 요즘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이 대담하게 “인간에게는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自由) 연애론’을 편 것이다.
춘원은 백혜순과 이혼한 뒤 1918년 10월 허영숙과 제물포항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세상의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훗날에는 변절자로 낙인 찍히고 그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니 딱한 팔자다.
다시 김우영·나혜석으로 방향을 돌려 본다. 1920년 두 사람은 결혼하는데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4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조건이란,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둘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셋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 줄 것이었다. 놀랍게도 김우영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 준다. 이런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 왔다.
4가지 조건 외에 결혼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체한 것이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편 김우영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줬을까? 그렇지 않다는데 비극의 씨앗이 숨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접살림을 시어머니 집에서 차린 것이었다.
비석 세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떨어져 지내게 했지만 신혼살림은 시어머니가 있는 서울 숭인동 집에서 차린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건 아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조건도 깨졌는데 이는 나혜석의 불륜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왜 파격적인 여성이 된 것일까.
첫째, 나혜석은 너무도 똑똑했다. 그는 삼일여학교·진명여고보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았다. 진명여고보 졸업 때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얼굴 사진까지 실릴 정도였다.
둘째, 나혜석이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유학 간 것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으며 남자까지 포함해도 당시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다섯 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어머니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게 나혜석이 유학 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국내외 잡지에 썼다는 글이다. 나혜석은 그 글에서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夫)는 없는가?”
김우영과 결혼한 직후 나혜석은 짧은 전성기를 맞았다. 결혼 이듬해 만삭의 몸으로 개최한 개인전에 이틀간 5000여 인파가 몰렸으며 70여 개의 작품 모두가 고가(高價)에 팔린 것이다. 이 개인전은 서울서 열린 첫 유화전(油畵展)이었다. 이후 나혜석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런 화려한 외양 속에서도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이 파탄을 가져온 것이다. 두 사람의 여행루트는 지금 봐도 대단하다. 서울에서 기차로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까지 간 뒤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 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프랑스 파리까지 간 것이다.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특별포상을 받아 이뤄진 것이었다. 나혜석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간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자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된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다. 그러나 둘은 예전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 있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날 아침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 준 것이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 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
자료를 종횡(縱橫)으로 섭렵 중인데 눈은 어둡고 체력은 쇠해 무간(無間)의 미궁(迷宮)에 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2015년 4월 22일 부음란의 기사를 계기로 취재했던 나혜석(羅蕙錫·1896~1948)부터 시작해 본다. 당시의 부음기사 리드는 “17일 김건(金建) 전 한국은행 총재가 별세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계속 부음기사를 인용해 본다. “향년 86세. 고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고 나혜석(羅蕙錫·1896~1948)씨의 셋째 아들이다….” 이제 나는 독자들과 함께 역사의 시계추를 71년 전으로 되돌려 볼 작정이다. 1948년 12월 10일 밤 8시30분, 신원 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병원이 지금의 이태원으로 옮긴 용산구청이 아닌 옛 용산구청 근처 자제원(慈濟院)이다.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나혜석이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해 맏딸 김나열, 김선(12살 때 병사), 김진(서울법대 교수), 김건(한은 총재) 등 3남1녀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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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거리. |
내가 갔을 때 공교롭게도 부근의 동네 도서관에서 마침 ‘나, 나혜석’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다. 수원에는 이 밖에도 나혜석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혜석 거리’다. 길이가 약 400m쯤 되는 거리에는 나혜석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이 있고 그의 연보를 새긴 돌 조각이 놓여 있다.
주변은 온통 먹자골목이어서 대체 왜 이곳을 ‘나혜석 거리’로 정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나혜석 거리에 좌상과 함께 입상(立像)도 있는데 얼굴 생김이 사뭇 다르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한 나혜석은 학창시절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진명여고보 졸업 후엔 조선인으론 처음 도쿄여자미술학교로 유학 갔다.
그가 서양화를 택한 건 오빠 나경석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때부터 나혜석의 불같은 사랑이 시작되는데 첫 상대가 하필이면 오빠의 친구 최승구였다. 최승구는 1916년 폐결핵으로 고향 전남 고흥에서 요절했다. 나혜석이 문병을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둘의 사랑은 비극적이었다.
최승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집안에서 맺어 준 본처가 있었다. 최승구는 도쿄유학생 중에도 ‘천재’로 불리며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간여했지만 나경석은 그의 불우한 환경을 꺼려 여동생과의 교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최승구가 숨을 거둘 때 나혜석은 도쿄에 머물고 있었다.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혜석은 한동안 신경쇠약 증세를 앓기도 했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悲運)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 엇갈린 사랑은 두 번째에도 잘못되기가 십상인데 나혜석 역시 그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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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옆 건물들에는 나혜석을 기리는 벽화나 조각들이 많아 눈길을 끈다. |
처음에는 반일(反日) 변호사처럼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다. 3·1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붙잡혀 간 연인 나혜석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올 정도였다고도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선의 숱한 엘리트들이 빠져들어 몸을 망치고 만 자치론(自治論)에 경도(傾倒)되고 만다.
자치론이란 일본의 식민지이되 자치권을 가지면 만족한다는 일종의 타협 노선이다. 그와 비슷한 논리를 편 이들이 설산(雪山) 장덕수와 훗날 연적(戀敵)이 되는 최린이다. 김우영과 나혜석의 러브스토리를 본격적으로 말하기에 앞서 언급해야 할 이가 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1892~1950)다.
춘원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난 뒤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로 유학을 갔다. 고등예과에 편입한 것이다. 19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성사된 춘원의 일본 유학은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춘원은 그때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꿈꾼다.
그런 그에게도 이미 애인이 있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다. 요즘 말로 ‘양다리 걸치기’인데 춘원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은 이번에도 오빠 나경석이었다. 춘원이 고향에 백혜순이라는 본처까지 둔 유부남인 걸 알았던 것이다. 남자들이 군침 흘리는 동생을 둔 나경석은 평생 골이 아팠을 것 같다.
문제는 춘원 못지않게 나혜석 역시 김우영과 춘원 사이를 오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新)지식인의 사랑은 요즘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이 대담하게 “인간에게는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自由) 연애론’을 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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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옆 나혜석 생가터는 지금 작은 정원으로 변해 있다. |
다시 김우영·나혜석으로 방향을 돌려 본다. 1920년 두 사람은 결혼하는데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4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 조건이란,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둘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셋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 줄 것이었다. 놀랍게도 김우영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 준다. 이런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 왔다.
4가지 조건 외에 결혼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체한 것이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편 김우영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줬을까? 그렇지 않다는데 비극의 씨앗이 숨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접살림을 시어머니 집에서 차린 것이었다.
비석 세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떨어져 지내게 했지만 신혼살림은 시어머니가 있는 서울 숭인동 집에서 차린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건 아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조건도 깨졌는데 이는 나혜석의 불륜 때문이었다. 나혜석은 왜 파격적인 여성이 된 것일까.
첫째, 나혜석은 너무도 똑똑했다. 그는 삼일여학교·진명여고보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았다. 진명여고보 졸업 때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얼굴 사진까지 실릴 정도였다.
둘째, 나혜석이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유학 간 것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으며 남자까지 포함해도 당시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다섯 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어머니의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게 나혜석이 유학 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국내외 잡지에 썼다는 글이다. 나혜석은 그 글에서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夫)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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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한 레스토랑 밖에 걸린 나혜석 그림의 복제품이다. |
그런 화려한 외양 속에서도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이 파탄을 가져온 것이다. 두 사람의 여행루트는 지금 봐도 대단하다. 서울에서 기차로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까지 간 뒤 다시 시베리아 횡단열차 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프랑스 파리까지 간 것이다.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특별포상을 받아 이뤄진 것이었다. 나혜석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간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자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된다.
처음 부부는 여행기간을 서너 달로 예상했지만 그게 1년8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른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해 천도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빠져들고 말았다. 김우영이나 훗날의 이광수가 빠져든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였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인데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병합(倂合)의 고착화가 자치론이다.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는다. 여하간 일본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만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둘은 본격 불륜에 나선다. 두 사람은 통역을 고용해 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이게 사람들 눈에 안 뜨일 리 없고 말이 안 나올 수 없다.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이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다.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쓸쓸한 여정(旅程)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최린은 어떻게 됐을까?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했는데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줬다.
소위 입막음을 시도한 것인데 한 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 것이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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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은 윤리의 굴레를 벗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 사 온 며느리를 구박한 것이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것이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다시 세 번째로 결혼했다.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고 나니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졌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가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하고 만다.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다. 나혜석이 이 즈음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짧게 정리하기가 힘들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중2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 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 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굣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된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린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 미친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내가 논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 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 버렸다.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는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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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생애를 알리는 연표와 그의 실제 사진이다. |
하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 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 달라”고 했다.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마치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연상시킨다면 과장일까.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된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