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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모던 뉘우스

근대의 직업, 기생

“이것도 직업이냐?” vs. “기생도 노동자다”

정리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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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기생의 완전한 상품화, 인육화(人肉化), 퇴폐 타락한 참상을 직시해야
⊙ “사상을 높게 가진 맑은 사람을 사랑했노라”
  근대의 지식인들에 눈에 비친 기생(妓生)은 계몽의 적(敵)과 다름없었다. 풍속의 개량을 방해하는 청산의 대상으로 보았다. 계몽 지식인들은 화류계를 없애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웃음을 팔고 교태를 부리며 남성의 등골을 빼먹는다”는 것이다.
 
  《신민》 1927년 10월호에 실린 〈직업순례-기생〉편은 “몹시 냄새나는 직업” “기생 비린내”라는 표현으로 기생을 비하한다. ‘조선에서 기생의 명산지는 평양과 진주인데, 어떤 이는 진주기생이 평양파리보다 두 마리가 적다 하고, 혹설에는 평양파리가 평양기생보다 겨우 두 마리가 많다’고 적었다.
 
  《비판》 창간호인 1931년 5월호에는 계급의식을 갖춘 기생이 쓴 〈기생의 인생관〉이 실렸는데 기생 박옥화는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을 변호한다. “조선의 10분지 9나 되는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행복한 세계’가 와야 기생의 문제도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일부 프롤레타리아 사상을 지닌 지식인들은 기생을 노동자 계급으로 보았다.
 
  그러나 기생은 신문과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식민지 조선 문화예술계의 아이콘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기생 중에는 조선의 전통 예악을 전수하는 이도 있었고, 얼굴과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화초기생, 대중가요 가수나 여배우로 이름을 떨친 기생도 많았다. 이른바 ‘모던 기생’들이었다.(참고 《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직업 순례 9/ 기생
  일기자(一記者)
 
조선왕조 말엽 한 시골 양반이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 개다리소반 위에 놓인 양주병이 이채롭다.
  금회(今回)에 나오는 직업이야말로 몹시 냄새나는 직업이다. 점잖은 독자는 반드시 코를 막고 찡그릴 것이다. 그러나 눈만은 웃고 맞이할지 모른다. 어쨌든 하늘 높고 바람 맑은 이 시절에 냄새나는 직업을 들추어 점잖은 독자의 코를 비트는 것도 기자로서는 일흥(一興)이다.
 
 
  기생
 
  “이것도 직업이냐?” 현명한 우리 독자 가운데 혹이나 이렇게 물을 어리석은 양반이 계실까 보아서 필자는 그것이 직업으로서 구비 한두어 가지 조건을 들 필요가 있다.
 
  기생이 경성 같은 도회지에서는 매월 5원이라는 다액(多額)의 영업세를 부금고(府金庫)에 납입하는 점으로 보아 관허의 공연(公然)한 직업이요 4~5 내지 10여의 가족을 거느리고 물질적으로 중류 이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점에 있어서 상승(上乘)의 직업이라 할 것이다.
 
  대체 이 기생이라는 직업이 어느 때부터 조선에 있기 시작하였는가? 이제 이것을 상세히 알 수가 없으나 어쨌든 이조 전 고려조부터 있은 것만은 사실이니 적어도 반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은 무의(無疑)한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을 역사적 계통적으로 고찰 연구할 자료도 가지지 못하였거니와 또 순례의 필을 거기까지 미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저 기생에 관하여 본 대로 들은 대로 자유로운 붓끝을 들어보려 한다. 그러자면 옛이야기도 나오고 시속 이야기도 나오고 참말도 나오고 거짓말도 나오고 욕도 나오고 칭찬도 나올 것이다. 선찬후욕으로 우선 기생 예찬을 하여보자.
 
  ◇
 
  심양강두(潯陽江頭)에서 비파를 탐으로써 백거이에게 〈비파행〉이라는 천추(千秋)의 명작을 낳게 한 강남의 기생 같은 풍류의 매력을 가진 기생이나 설도(薛陶)같이 명시에 능한 기생이 우리나라에 있었는지는 내 모르거니와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움 즉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분분하니 필똥 말똥 하여라’ 이런 시를 읊은 시인이 우리 기생 중에 있었음은 나는 안다.
 
  ◇
 
  위중선(魏仲先)의 시에 쌓인 티끌을 홍수(紅袖)로 털어주던 기생 같은 영리한 기생이 우리 조선에 있은 여부는 모르지만 왜장(倭將) 청정(淸正)의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진 논개(論介) 같은 충국의 여장부로 만대의 사엽(史葉)을 곱게 장식하는 기생이 우리나라에 있었음을 자랑하고 싶다.
 
  진주라도 촉석루 진주라도 촉석루
  논개라는 기생은 논개라는 기생은
  왜장 청정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져…
 
  취한(醉漢)의 콧노래라도 이런 노래를 들을 때에 오인(吾人)은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무엇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아 진주 남강의 물은 마를 때가 있을지라도 푸른 물결 위에 이슬같이 사라진 한 떨기 꽃향기는 사라질 때가 없을 것이다.
 
  ◇
 
  필자보다도 기생을 찬미한 문인이 있으니 그것은 무명의 위대한 소설가인 《옥중화(獄中花)》(춘향전) 작가이다. 그는 춘향이라는 기생을 통하여 조선 여성의 정조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
 
  그러나, 그러나 필자는 현대 기생의 완전한 상품화, 인육화(人肉化), 퇴폐 타락한 참상 앞에 시선을 돌릴 때 이타(耳朶)를 기울일 때 신화 같은 옛이야기를 들어 기생을 찬미하는 어리석음을 스사로(스스로-편집자) 깨달을 때 붓끝이 어지러워진다.
 
  요즘의 기생을 보고야 반언촌설의 찬사가 나올까 보냐. 그저 욕이다, 욕!
 
《신민》 1927년 10월호에 실린 〈직업순례-기생〉편 첫 장.
  고서를 보면 영기(營妓)는 군사(軍士)의 무처자(無妻者)를 위하여 생긴 것이라니까 기생이란 선천적 기생(奇生)동물인 모양이다. 그러나 무처(無妻)군사를 위로하는 기생이라면 기생의 존재 이유를 그나마 시인하겠지마는 본처 있고 첩 있는 퇴폐한 소(小)‘부르주아’의 향락적 내지 수욕적(獸慾的) 완구(玩具)로서밖에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소위 금일의 기생의 존재는 신정(新町)에 진열한 성욕도구보다는 그 유산 내지 유한계급을 상대로 하는 점에서 고급이라 할런지는 모르나 그 사회적 존재 이유로는 전자보다 훨씬 박약하다. 기생의 무리가 일조(一朝) 그 영자(影子)를 이 사회에서 감춘다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호발(毫髮)의 통양(痛痒)을 감(感)치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없어서 무방할 점에 있어서는 페스트균을 전한다는 쥐와도 방사(倣似)하다. 그렇다. 쥐와 기생이 아울러 이 세상에서 없어지기로서니 이 세상으로 하여금 무슨 결함을 느끼게 할 것이냐 말이다.
 
  필자는 이렇게 그 존재를 무시하였으나 그러나 금일 우리 사회 더욱이 경성 같은 도회에 있어서 그 존재야말로 훌륭하다. 소위 권번(기왕에는 조합이라고 하였으나 밀려오는 왜 풍조에 이렇게 개명되었다. 모르는 것 없이 떠드는 필자도 이것만은 모른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이 현대인의 지혜이다. 나도 어떤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고 권번 권번 하고 부를 뿐이다. 자-어느 식산은행에 땅 많이 잡혀 기생 외도 많이 한 외입장이가 있거든 권번의 의의와 유래 혹은 그 아는 바를 설명하라)이라는 경성에만도 사개 진영을 통하여 500여 명의 낭자군이 있다 하니 전 조선을 통하여 보면 일본의 육군사단만치 그 진영이 수가 될 듯하고 그 사졸(士卒)의 수도 그만은 할 듯도 하다.
 
  대체 기생이란 무엇에 쓰는 것이냐? 또 한 번 물어보자. 그 쓸모란 자못 다종다양의 굉장한 것이다. 신사의 회합에, 부랑자 유탕(遊蕩)에, 코 큰 양반 대접에, 일인(日人) 아첨에, 대관 초대에, 미두(米豆)해서 이(利)낫다고, 술 먹는 자리에 미두해서 망했다고, 화나서 술 먹는 나락에 야구단이니 축구단이니 환영석상에 무슨 회사 창립회니 중역회니 심지어 양말직공위안회에까지도 기생이 있어야 하고 그나 그뿐이냐 정치니 사상이니의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회합에까지도 기생 비린내가 가미를 하여야 되는 판이 아니냐.
 
  보아라. 밤이나 낮이나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하야 거미줄 늘어놓듯 하는 기생의 인력거 자국을… 따라서 그들 낭자군의 수입은 황나사 군복에 보리밥 얻어먹고 하루에 조일(朝日) 한 갑(匣) 얻어 피우는 일본 군인의 그것은 말도 할 것이 없거니와 딴 수단 없이 월봉(月俸)만 바라고 앉은 사회중역이나 고등관이 탈화불급(脫靴不及)할 바가 있다. 이제 그들의 수입을 조사해 보자. 그들의 수입이란 그 항과 목에 있어서 자못 복잡하다. 그 표면에 나타나는 것으로만 보면 노름 나가는 시간대라는 것이니 경성이 일시간 평균 1원30전 기타 2류 도시 3류 도시 지방에는 1원 혹은 그 이하도 있는 모양이다. 위선(爲先) 경성을 표준으로 하여 그들의 수입을 보면 1류 기생이면 병기나 특별한 장(障)이 없는 한도에서 매일 평균 10시간 이상 내지 15, 16시간을 불린다 하니 권번과 요정에 그 수입의 2할의 공제를 당하고 관납 5원을 한 뒤에도 월 300원 이상의 수입이 있을 것이요, 제2류 기생이면 7, 8시 내지 10여시, 제3류로 내려간다 할지라도 돈 100원의 수입은 무려(無慮)하고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소위 건달 기생이니 권번에 등록만 하여놓고 한 달 내 가야 요정 출입 3번을 제대로 못하여 보고 밤낮 극장이나 구경판으로 아니면 여관 순회나 하는 제4류 기생 그네들이다. 그러나 어떤 헌 기생의 말을 들으면 그네들에게도 경멸치 못할 수입이 있다 한다. 잘 불리는 기생, 이름이 없어 못하는 별동 수입 혹은 기밀비는 그들이 독점하는 상태에 있다 한다. 그도 그럴듯한 수작이다. 들어두기로 하자. 기생의 수입 아래는 적어도 3항을 들 수가 있으니 ①시간대 ②비밀수입 ③살림 들어가는 것이다. ①과 ②는 전기(前記)한 바요, 소위 살림 들어 안는다는 것은 무더기 수입이요, 고관중역의 퇴직수당에 비할 바 아니다. 이것은 기생의 중요한 수입으로 빠져서는 아니 될 중요한 수입이다. 그들의 결산을 좌우하는 수입은 여기에 있다. 그 수입은 아무리 못난 기생이라도 일회에 몸값이라는 명의(名義)하에 천원은 불하(不下)하고 기외(其外)에 집이니 세간이니 버려놓는 것이 몸값보다는 훨씬 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한은 장단을 예측키 어려운 것이다.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도 모른다. 혹여 마음 무던한 기생이요, 기생의 부모나 착하면 반년 혹은 1년을 살고 나오는 수도 있고 예외로 다시 권번등록을 아니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육군대장의 은급(恩給) 폭이나 되는 일생의 은급을 타고 앉은 것이니까. 그 수입에 있어서는 비관할 바가 없을 것이다. 이 밖에 기생의 잡수입으로 연말에 외입장이로부터 들어오는 세찬(歲饌)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연말상여금과도 방불한 것이다. 일개 여자의 수입이 이만하다 보니 이해(利害)에 눈이 밝은 평양 마누라들이 이웃집 여자가 외모 똑바로 생긴 계집애를 나아 업는 것을 보고 혀를 끌끌 채며 “에그 이전 남자넨 그것만 바로 키웠으면 의식걱정은 멀리 갔습느니” 하고 부러워하는 것도 무리는 없는 말이다. 하하.
 
  대체 이 직업은 어떻게 구하는 것인가. 어떠한 자격을 가져야 하는가? 사회는 진보된다. 문화는 향상된다. 인구는 증식된다. 따라서 생존은 경쟁이다. 그 결과로는 구직난, 취업난을 낳는다. 취업난이 금일같이 구조되는 때에 기생만은 지나간 옛날과 정반대이다. 옛날에는 기생 행세를 하려면 음률은 물론 심지어 서화까지라도 흉내를 내어야 비로소 한 것이, 연마는 금일의 그 자격은 아무런 준비도 없다. 남자나 ‘고녀’만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시집살이를 하기 싫어도 기생으로 나오고, 학교 공부하다 학자(學資)가 중도에 끊어져도 권번문을 두드리고 사회운동을 한다고 단발을 하고 돌아다니다가도 예기(藝妓) 허가를 내고 그야말로 목단봉(牧丹峰) 밑이나 촉석루 아래에서 대대로 자라는 뼈있고 씨있는 아씨들이 자가(自家)의 위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연맹분기(聯盟奮起) 자격심사제도를 제창하여야 당연할 일이다.
 
  조선에서 기생의 명산지로는 두 군데를 꼽을 수 있으니 북으로는 평양, 남으로는 진주이다. 어떤 이는 진주기생이 평양파리보다 두 마리가 적다 하고 혹설에는 평양파리가 평양기생보다 겨우 두 마리가 많다 하니 평양과 진주의 그 기생 수효의 차가 여하한지 수학천재의 답안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생적 지반과 세력으로는 진주가 평양에 차(差)함이 수등(數等)이라 한다.
 
  (출처=《신민》 1927년 10월호, p.81~84)
 

  기생의 인생관
  박옥화(朴玉花)
 
《비판》 1931년 5월호에 계급의식을 갖춘 기생이 쓴 〈기생의 인생관〉이 실렸다.
  기생의 인생관을 하나 실어보자 하고 우리는 의식을 가진 기생을 모조리 끄집어내어 전형(詮衡)을 하였다. 중의일치 박옥화 양이 당선되었다. 그에게 글 써주기를 청하기 위하야 농담 제일의 김군과 같이 그를 찾았다. 안색이 여옥(如玉), 태도가 혼쭐, 미목(眉目)이 청수, 기품이 여학(如鶴), 변재(辯才)가 파능(頗能), 이것만 하여도 외미(外美) 만점인데 게다가 계급의식을 가졌으니 내미외미가 구족(具足)한 명기(名妓)다. 어떠한 인텔리의 담론일지라도 하나 빼지 않고 다 알아들으니 지식도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는가. 좌기(左記)한 그의 언언구구(言言句句)가 점두(點頭)치 않고는 안 될 곳이 많을뿐더러 그의 계급적 감정에서 유로(流露)된 편구(片句)를 읽을 때가 우리는….
 
  “기생도 사람이 아니냐.” 이 소리는 벌써 시대에 뒤진 소리입니다. 우리도 사상을 가졌고 이 세상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근본적으로 송두리째 해결코저 하는 불길 같은 정열과 투지도 가졌습니다. 내 자신의 먹고살기를 걱정한다는 것보담 내 뒤에 딸린 많은 식솔들의 목전에 닥친 생활문제를 해결하기가 곤란하야 그작저작 이날이날을 보내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벌써 나도 거리에 나서서 먼지와 바람을 무릅쓰고 온 세상에 가득 찬 의롭지 못한 것과 바르지 못한 것과 고르지 못한 악죄의 덩어리와 한바탕 싸웠을 것입니다. 이런 소리는 그만두고 내 생활에 대해서 몇 마디 적고자 합니다. 내 생활의 지난바 일이 내 몸뿐만 아니라 우리 기생들에게 거의 똑같은 일일 것입니다.
 
  × × ×
 
  이 사회제도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탓이라고 할까. 또는 가정관계라고 할까. 어쨌든 나는 내 몸을 화류계에 내놓아 돈 있는 사람들의 한 개의 노리개가 되고 그리고 이리 팔리고 저리 팔려다니기 시작한 지가 벌써 열세 해 전부터입니다.
 
  지금 내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니까 열세 해 전부터입니다. 열세 해 동안을 꼭 기생질만 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동안 부르주아의 첩으로 살림도 들어갔었고 그러다가 다시 화류계로 나왔습니다.
 
  맨 처음 요릿집에 노름을 나가니 그때는 철없는 때라서 아무 이렇다는 감상도 없고 가슴에 찔리는 느낌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는 없었습니다. 다만 어리떨떨하고 수줍어서 어쩔 줄을 몰랐을 뿐입니다.
 
  나를 오입쟁이들은 귀애하기도 하고 사랑도 하야 주었습니다. 이러하기를 하루를 지내고 이틀을 지나고 한 달 두 달 이리하야 한 해 두 해를 넘어가니 나는 내 직업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취미가 붙기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룻밤이라도 노름을 가지 않으면 어쩐지 쓸쓸하기도 하야 그날밤은 기쁘지 못하게 밤을 새운 적도 많았었소. 이리하다가 내 나이가 열여섯을 넘으니 돈 있는 사람들은 나를 꺾어서 그들의 욕심을 채우려고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들에게 내 몸을 허락하기가 싫었소. 돈만 가졌고 아무것도 모르는 고깃덩어리에게 내 몸을 허락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리하야 나는 늘 까마귀 떼처럼 모여드는 무리들을 본때 좋게 거절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갑진 선사를 내게다 보낸다, 어떤 사람은 나를 저녁마다 요릿집으로 부른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 내 고기를 탐하는 들짐승의 무리들이라고 해서 나는 끝끝내 그들에게 내 몸과 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느껴진 그 바는 이 세상을 위하야 싸우는 용사–사상을 높게 가진 맑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야 주는 사람이 없나 하고 나는 늘 그러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하다가 세월은 가고 오고 하더니 내 나이 열아홉 살 되는 때에 내가 항상 가슴 가운데 그리고 있던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프롤레타리아이었습니다. 그이는 황금과는 인연이 먼 사람이었소. 그이는 세상을 위하야 민중을 위하야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불쌍한 무리들을 위하야 용감하게 싸우는 전사(戰士)이었습니다.
 
  나도 그를 정열적으로 사랑하였으려니와 그이도 나를 골똘하게 깨끗하게 뜨겁게 사랑하야 주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행복스러웠고 기꺼웠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의 열매가 생겼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더욱~ 강렬한 사랑을 속살거렸습니다.
 
  이러한 행복스럽고 기쁜 세월은 흐르듯 어느덧 삼사 년을 달아났습니다.
 
일제시대 인천권번 소속 기생들이 국악 연주자들의 반주에 맞춰 전통 무용을 공연하는 모습.
  좋은 일에는 반드시 지장이 있는 것인지, 나에게는 나의 의성과 그이에 대한 사랑을 덮어버리고 어지럽게 하는 한 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외다. 어릴 적부터 친하기만 친하던 어떤 부르주아의 아들이 외국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는 나에게 도끼질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려. 열 번 찍어서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필경 그에게 내 몸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이외다. 나는 번민과 고통을 맛볼 대로 맛보았습니다. ‘어쩔까, 이 일을! 사랑을 버리고 자식을 떼고 황금을 따라가나’ 이것이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해결 짓기 어려운 큰 문제이었습니다.
 
  하다가 나는 한번 어두워진 의성의 눈은 밝아지지를 못하였습니다. 나는 끊임없는 빵의 행락을 얻기 위하야 결국 부르주아의 첩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몸 튼튼한 감은 병들어 보아야만 아는 것과 같이 돈 있는 사람에게 간 뒤에야 옛날의 애인의 사랑이 얼마나 컸고 높았고 깊고 멀고 넓고 튼튼하였었다는 것을 통절히 느끼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를 약 두어서너 달 동안은 나를 사랑하였습니다. 다른 여성과 관계도 끊었으며 그리 잘 다니던 요릿집 기생집도 아니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돈 있는 냄새–더러운 냄새를 피웠습니다. 그것이 가끔가다가 속이 상하고 아니꼬워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 보시오 두서너 달을 지내더니 기생집 출입, 요릿집 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반년이 지난 뒤는 나가다니는 수효가 늘어집니다 그려. 나는 이곳에서 다시금 참회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옛날의 애인을 버린 것을 참회하였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이 사람과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염소가 도사(屠舍)를 벗어나는 듯하야 기뻐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걸어갈 곳은 어디입니까. 할 수 없이 어쩌는 수 없이 또 화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지옥을 벗어나서 또다시 지옥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첫 번 인력거가 옵니다. 그 인력거에 몸을 얹지니 죽으러 가는 것 같습니다. 가슴 가운데 오고가는 감개한 생각이야 당한 사람이나 알까 제3자의 추측으로는 근경도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과 세태도 달라지고 사람들 마음도 약아졌습니다. 나도 변하여졌습니다.
 
  옛날은 술도 안 먹었습니다. 지금은 술도 먹고 놀기도 잘합니다. 그러나 기뻐서 그런 것이 아니외다. 내 속에 가득이 찬 한과 수심을 잠시나마 잊고자 하야 억지로 일부로 그러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세상을 인생을 비웃고 지냅니다. 세상과 싸우는 것과 비웃는 것과의 서리가 멀지 않는 것입니다. 웃음과 노여움이 똑같은 성질의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세상을 끝없이 저주하다가도 웃습니다. 웃다가는 저주합니다. 내 이 생활이 언제나 바로잡힐까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내 몸만이 행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와 같이 수기(手旗·손에 쥐는 작은 기-편집자)한 운명에 부대끼는 사람이 하나둘이겠습니까. 조선을 말할지라도 2천만 인구 중에서 10분지 9는 나와 같은 계급이 아닙니까. 이 무리의 행복스러운 세계가 오는 그때라야만 내 자신의 문제도 해결이 될 것을 믿고 있는 까닭입니다.
 
  (출처=《비판》 1931년 5월호, p.1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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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7-11-29) 찬성 : 89   반대 : 51
그럼 기생이 노동자지, 재벌이냐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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