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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주유천하 〈16〉 취가정과 비운의 의병장(義兵將)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은 홀대하고 교묘한 꾀로 일신의 영달을 좇은 이들은 성공하니 이 어찌 정의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으랴.”

글·사진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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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원효계곡은 한국 정자 미의 정수(精髓)가 집결된 곳
⊙ 취가정은 역모 누명 쓰고 옥사(獄死)한 김덕령 장군 기리는 곳
⊙ 부근엔 김덕령 장군 생가도 있어
⊙ 김덕령이 선조에게 당하는 것 보고 곽재우는 벼슬 꿈 단념
⊙ 토정의 서자(庶子)인 이산겸 의병장도 송유진의 난에 연루됐다며 죽음 맞아
⊙ 솥바위는 곽재우의 승첩지이자 한국의 3대 부자 전설도 어려 있어
신록에 둘러싸인 환벽당은 호남의 유명한 선비들이 얽힌 일화가 많다.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서 담양(潭陽)으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오른편으로 광주댐이 있다. 광주 시민들의 식수를 담당하는 곳으로 무등산 국립공원 일원이다. 담양에서 광주댐으로 흘러 들어가는 꽤 큰 개울을 ‘자미탄(紫薇灘)’이라고 하며 그 일대를 ‘원효계곡’이라고 부른다.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에 따르면 자미는 북두성(北斗星) 북쪽의 별 이름으로 천제(天帝)의 거처, 즉 황궁(皇宮)이라고 한다. 지명치고는 최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미탄 주변은 그야말로 한국 정자 미(亭子美)의 정화(精華)가 집대성된 곳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소쇄원·식영정·환벽당·독수정·명옥헌은 세계적인 자랑거리
 
한국 정원의 걸작인 소쇄원이다. 지금은 공사중이다.
  16세기 호남 사림(士林)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던 소쇄원·식영정·환벽당·독수정·풍암정·면앙정·명옥헌이 있으며 멀지 않은 전남 장성에 요월정 원림이 있으니 그 주인들은 하나같이 교우(交友)였다. 어린 시절 송강 정철이 멱을 감았다는 환벽당 옆에 다른 정자가 있는데 사연이 기구하다.
 
  앞면 3칸 규모로 온돌방을 두고 있는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의 대표적인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관련이 있다. 정철의 제자 권필이 친구 허균(許筠)과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 잠을 자는데 꿈에 김덕령이 나타났다. 옥사(獄死)한 그가 “너무 억울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아마 꿈에 김덕령이 나타난 이유는 당대의 기재(奇才)인 허균과 함께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김덕령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고향 주변을 서성이던 김덕령의 혼은 자신의 결백을 알아준 후배들에게 넋이라도 보여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는 이렇다.
 
  취해서 부르는 이 노래 들어주는 이 없네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바라지 않고
  높은 공을 세우는 것도 바라지 않네
  공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고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
  취해서 부르는 이 노래
  아무도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네
  다만 긴 칼 들고 밝은 임금 받들고저
 
  - 김덕령의 취가(醉歌)

 
  술 취한 김덕령의 하소연에 권필은 그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1890년에 처음 세워진 이 정자는 6·25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955년에 다시 세웠으며 최근에 보수공사를 마쳤다. 정자 안에는 설주 송문회가 쓴 현판과 송근수의 취가정기 등이 걸려 있다.
 
  정군께서 지난날 금빛 창을 잡았건만
  장한 뜻 도중에 꺾이니 어찌된 운명인가
  지하의 영령께서 한이 그지없어
  취하여 부르신 노래 아직도 생생하네
 
  - 권필의 답가

 
 
  무등산에서 무예 익히고 임진왜란 터지자 의병 조직
 
환벽당 맞은편이 식영정이다. 사진에 보이는 정자는 부용정이다.
  광산 김씨인 김덕령의 자는 경수(景樹)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이다. 김덕령은 1567년 취가정 부근의 광주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김붕섭(金鵬燮)과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潘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는데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빛난 것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다.
 
  전쟁이 나자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노모의 봉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형 김덕홍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노모가 1593년 8월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상중(喪中)에도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감동한 선조가 김덕령을 격려해 달라는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 추천을 받고 표창을 내렸으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1월 김덕령은 의병을 이끌고 담양을 출발해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군을 격퇴한 뒤 진주에 주둔했다.
 
 
  엄격한 군율로 팔도 의병을 김덕령 휘하에 둬
 
  조정은 여러 도(道)의 의병을 김덕령 휘하에 뒀다. 1594년 선조가 왜병에 잡힐 것에 대비해 세워진 광해군의 분조(分朝) 휘하 무군사(撫軍司)에서 김덕령은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선조는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내리기도 했다.
 
  김덕령의 의병은 군율이 엄격했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자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버지를 잡아들였다. 이때 윤근수가 선처를 부탁했으나 김덕령은 거절하고 종의 아버지에게 매를 때려 숨지게 했다. 화가 난 윤근수가 김덕령을 체포했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김덕령은 3년간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했고 군율마저 엄격해 불만을 품은 의병들이 많았다. 부하 장졸들에게 가혹한 군율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됐지만 우의정 정탁(鄭琢)의 탄원으로 석방됐다. 정탁은 이순신도 구명한 바 있다. 김덕령의 군율이 엄격했다는 사료는 여러 곳에 나온다.
 
  1596년 2월 19일 선조를 만난 권율은 김덕령이 용력(勇力)은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군율을 엄격히 적용해서 곤장을 치거나 귀를 잘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망쳤다라고 말했으며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서도 ‘김덕령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며 비판한 대목이 나온다.
 
  김덕령의 공적에 대해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있다. 기록에는 김덕령이 선조의 명을 받고 경상도로 넘어가 진해, 고성 방면을 방어했다고 하며 오희문의 〈쇄미록〉에는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崔堈)이 고성에서 40여 명을 이끌고 왜군과 교전해 90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4년 9월 2일 왜군이 경남 고성에 등장하자 김덕령이 사로잡혔던 남녀 50여 명을 구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1694년 펴낸 〈김충장공유사〉와 1799년 호남 출신 의사들의 행적을 모아 기록한 〈호남절의록〉에는 김덕령이 경남 의령에서 곽재우군과 함께 적을 기습해 절반을 익사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이몽학의 난에 이름 거론돼 선조가 6회나 직접 친국

 
  1596년 7월에 김덕령의 목숨을 앗아간 원인이 된 사건이 터졌다. 충청도 홍산 지역 근처에서 왕족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김덕령은 의병을 모집해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려 충청도로 갔으나 반란이 곧 진압되고 말았다. 그런데 반군을 문초하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최, 홍, 김이라고 적힌 패가 나와 반란군 일당을 문초하는데 고문을 견디다 못한 한 명이 “최는 최담령, 홍은 홍계남, 김은 김덕령이다”라며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분 것이다. 이 말을 한 신경행은 무과에 급제한 정식 장수였으나 김덕령의 막하에서 종군했던 것을 불만으로 여기던 자였다.
 
  김덕령은 워낙 명성이 높아 반란군들이 군사를 모을 때 그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경우가 많았다.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터진 송유진의 난 때도 반란 수괴 사이에서 김덕령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이다.
 
  이 일이 이몽학의 난 때도 반복됐는데 반군이 김덕령, 홍계남, 곽재우, 고언백 등이 합류하고 이덕형이 중앙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선전한 것이다. 선조는 곽재우, 홍계남, 고언백 등은 모두 무혐의로 불문에 부쳤지만 김덕령은 관계자 증언이 많아 선전관을 보내 그를 한양으로 압송했다.
 
  선조는 신경행의 무고에 마침내 8월 4일 반란수괴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한양으로 압송해 친히 김덕령을 국문하기 시작했다. 선조가 6회 연속 직접 형문을 가했으나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김덕령 처리를 두고 벌어진 일이 나온다.
 
  서애 류성룡은 김덕령의 죄를 신중히 따지자고 했으나 김덕령과 앙숙이 된 윤근수의 형제였던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고문을 받고 김덕령은 정강이뼈가 다 부러졌고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남겼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연기없는 불’이라 함은 모함을 받고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썼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김덕령이 역모를 꿈꾸거나 권력에 대한 사심(私心)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그가 진중(陣中)에 있을 때 지은 시 〈군중작(軍中作)〉을 들기도 한다.
 
  가야금 타고 노래하는 건 영웅이 할 일이 아니지
  칼춤은 옥장(玉帳·군막)에서 추어야지
  다음에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간 뒤
  강호에서 낚시나 하지 또 무엇을 찾으랴
 
  - 김덕령의 〈군중작〉

 
 
  300년 뒤 파낸 시신이 썩지 않아 모두가 놀라
 
김덕령 장군 생가 옆의 왕버들이다.
  훗날 신원이 됐지만 김덕령의 묘는 문중의 무덤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1965년 광산 김씨 문중의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질 때 관을 여니 여전히 살이 썩지 않고 있었다는 믿지 못할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김덕령이 생전에 입었던 갑옷 등은 현재 무등산 충장사에 전시돼 있다.
 
  김덕령이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부인 이씨는 벼랑에서 투신했으며 아들 김광옥은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 숨어 본관을 용안으로 고치고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광옥은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로 이주해 핏줄을 이어 갔다고 한다.
 
  1661년에 김덕령의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증 병조참의에 추증됐다. 1681년에 다시 증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정조 때인 1788년 증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이 내려졌다. 숙종 때인 1678년 광주 벽진서원에 제향됐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됐다.
 
  슬픔으로 잔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겼는데
  시내의 다리가 안개비 속에 아득하구나
  봄 언덕에 달리던 용마는 채찍이 끊어졌고
  가을 물에 용처럼 날던 칼날은 녹슬었구나
  옛 유업을 이어 정자를 세우니
  전해 내려온 이 마을에 새빛이 나는구나
  고기 잡는 늙은이는 그때 일을 알까?
 
  - 김만식 〈창립취가정유감〉

 
  선조 때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戰亂)에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싸울 때마다 패하는 관군과 달리 혜성처럼 등장한 의병장들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의병장 김덕령, 곽재우, 이산겸이 모두 역모사건에 연루됐다. 선조가 존경받는 의병장들을 라이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덕령의 경우 공적이 있느냐 없느냐 논란이 있지만 김덕령이 거병(擧兵)할 당시 상황을 보면 거병 자체가 남들이 흉내내지 못할 용기였음을 알 수 있다. 김덕령이 거병했을 때 금산 전투에서 의병장 고경명과 앞서 말했던 김덕령의 형 김덕홍이 전사했다.
 
  관군과 함께 전투에 임했는데 관군이 갑자기 도망쳐 버린 것이다. 진주 전투에서도 의병장 김천일이 왜군 10만에 밀려 패배한 뒤 아들과 함께 강에 투신해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 26세의 젊은 의병장 김덕령이 나타나 엄한 군율로 썩어 빠진 관군과 비교가 된 것이다.
 
 
 
곽재우는 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첫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동상이 정암진 바로 옆 의령관문 위에 서 있다.
  홍의장군이라 불리며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곽재우 역시 의령, 창녕, 정암진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의 3대 대첩(大捷)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을 지원하기도 했다. 더구나 곽재우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더구나 재산이 많았던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은, 오늘날로 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곽재우도 이몽학의 난 때 붙잡힌 반군들이 분 주모자 명단에 나와 문초를 받기도 했다. 김덕령의 옥사는 곽재우의 삶을 바꿨다.
 
  조선왕조에 더 이상의 미련을 버린 것이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내린 공신(功臣) 목록을 보면 선조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도망친 대신 80여 명은 공신 리스트에 있지만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진짜 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이런 풍조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민족의 악습이 된다.
 
  비록 무죄로 풀려났지만 곽재우는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는 길을 택했다. 이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는 나라가 자기 힘을 필요로 할 때만 나섰을 뿐 벼슬을 한사코 사양하고 낙향하는 쪽을 택했다. 곽재우는 초야에 묻혀 도가(道家)의 도를 닦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여기서 잠깐 곽재우(郭再祐·1552~ 1617)의 삶을 돌아본다.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이 명문이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낸 곽지번(郭之藩)이 할아버지였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 아버지였다.
 
 
  홍의장군의 선조는 송나라 팔학사 중 한 명
 
  원래 그의 선조는 중국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1117~1179)으로, 그는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했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해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했다. 5대조 곽안방(郭安邦)은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청백리였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훗날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되기도 했다. 그는 15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그가 쓴 글이 선조의 기분을 나쁘게 해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에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했다.
 
  40세가 넘도록 농사를 지으며 공부에 전념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 1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갑옷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 적은 깃발을 내걸었다. 그가 이끈 의병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곽재우의 의병은 게릴라전의 명수로 의령·창녕 등지의 산악에 매복했다가 신출귀몰하게 왜군을 물리쳐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했고 왜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김시민의 진주성 대첩 때는 앞서 말했듯 원군을 보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
 
  그의 전공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지금의 의령관문 앞에서 벌어진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전투다. 곽재우는 이때 정암진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 명을 선발,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한 다음 매복이 없는 줄 알고 강을 건너던 왜군을 전멸시켰다.
 
 
  정암진 전투에서 왜병 2만명 몰살시켜
 
이곳이 곽재우 장군이 왜군 2만명을 몰살시킨 정암진이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 표시 등 표지를 만들었는데 곽재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표식을 늪지로 향하게 바꾸어 놓았다. 이때 죽은 왜군이 2만명이다.
 
  정암, 즉 솥바위는 조선 말기 한 도사가 그곳을 지나다 남긴 예언으로 다시 유명해졌다. “이 솥바위 주변 이십리에 조선을 대표할 갑부 셋이 태어난다”고 했는데 과연 삼성 이병철 사주, 엘지 구인회 사주, 효성 조홍래 사주가 솥바위 근방에 살았던 것이다.
 
  또한 GS그룹 창업자인 효주 허만정 선생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큰 기업을 일궜을 뿐 아니라 이병철·구인회·조홍래 사주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으며 진주 일대에 거액을 쾌척해 학교를 짓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것이다.
 
  지금 솥바위 옆에는 거대한 의령관문과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서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 중기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였던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뜻이 후세에 의해 유지되고 있음을 하늘에서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곽재우의 연전연승에 관군은 그를 시기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왜군을 피해 도망 다녔던 경상도 관찰사 김수였다. 김수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곽재우에게 누명을 씌웠는데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사정을 알고는 조정에 특별히 건의해 석방시키기도 했다.
 
  이몽학의 난 이후 은둔하던 곽재우는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정유재란의 조짐이 엿보이자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돼 현풍에 석문산성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전쟁이 재발하자 창녕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곽재우는 이후 밀양·영산·창녕·현풍 등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했는데 전란이 끝나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승진시키려는 것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산겸은 토정 선생의 서자로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
 
취가정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몽학의 난에 앞서 2년 전 일어난 송유진의 난 때는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생몰년 미상)이 목숨을 잃고 만다. 이산겸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선생의 서자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그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청도 보령(保寧)에 거주하는 서얼 출신으로서 의병장 조헌(趙憲)의 부하로 들어갔다. 조헌이 사망한 뒤 휘하의 병사들을 모아 평택(平澤)과 진위(振威) 사이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건의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의 통제를 받았다. 그 후 부대를 해산한 뒤 김덕령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594년(선조 27) 비변사(備邊司)의 보고를 받은 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이 계속되면서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충청도 지방에서 백성과 병졸들을 포섭하여 민란을 일으킨 송유진(宋儒眞)을 친국(親鞫)했을 때 이산겸을 지목하여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국문(鞫問)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 모두가 역모한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계속하여 형신(刑訊)을 당하였지만 반역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몸이 심하게 망가진 뒤에야 하옥(下獄)되었다.

 
  취가정에 얽힌 김덕령의 사연과 곽재우·이산겸의 이야기는 왜 우리나라가 물질적인 성장을 이뤘음에도 강국(强國)으로 성장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주고 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은 홀대하고 교묘한 꾀로 일신의 영달을 좇은 이들은 성공하니 이 어찌 정의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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