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으로 옮겨진 문화재를 원래 소유국에 되돌려주는 것이 국제적 추세
⊙ 멕시코의 국민감정을 못 이겨 아스텍문명 유물을 영구대여 형식으로 양보한 프랑스
⊙ ‘약탈문화재 전시회’ 열어 약탈문화재의 존재를 인정하고 알린 스웨덴 왕립박물관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駐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초빙교수.
⊙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멕시코의 국민감정을 못 이겨 아스텍문명 유물을 영구대여 형식으로 양보한 프랑스
⊙ ‘약탈문화재 전시회’ 열어 약탈문화재의 존재를 인정하고 알린 스웨덴 왕립박물관
金瓊任
⊙ 64세. 서울대 미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애크런 로스쿨 연수.
⊙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駐 튀니지 대사 역임. 現 중원대 초빙교수.
⊙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세계 문화유산 약탈사》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일본은 지난 2011년 조선왕실의궤 등의 도서 1200권을 한국에 반환했다.
2006년 이탈리아 정부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에 협상을 제안했다. BC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 항아리(Euphronios krater)의 반환에 관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전부터 이 항아리가 이탈리아에서 도굴당한 문화재라고 주장했다. MET는 불법도굴 여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없을뿐더러 1972년 당시 100만 달러를 주고 정당하게 구입했을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2006년 협상을 제안하면서 이탈리아 측은 여러 명의 도굴꾼 및 중간상들로부터 30년간 수집한 간접증거를 내세웠다. MET는 처음에는 도굴을 입증하는 ‘부정할 수 없는(incontrovertible)’ 직접증거를 요구했지만, 결국은 이탈리아가 제시한 여러 증거가 ‘상당한 또는 높은 개연성이 있는’ 증거이고, 도굴을 입증한다고 인정했다. 2008년 MET는 이탈리아가 요구하는 대로 항아리를 비롯하여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는 BC 6~4세기 문화재 10여 점을 모두 반환했다. MET가 도굴로 추정된 문화재를 반환한 것은 불법 반출된 문화재의 소유권은 문화재 원소유국에 있음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공공 문화재를 소장하고 관리하는 박물관이 문화재의 내력을 확인해 일정 수준의 ‘윤리적 기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1970년 세계박물관협회(ICOM)의 <문화재 구득윤리에 관한 권고>는 ‘문화재 내력에 의문점이 있는 경우 문화재 기원국과 접촉해야 할 것’을 규정했다. 2009년 ICOM은 ‘박물관의 문화재 구득 시 성실한 조사를 통해 문화재를 불법으로 취득하거나 거래한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고 윤리규정을 통해 못 박았다. 미국 박물관협회(AAM)도 2008년 ‘박물관의 소장품 중 내력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한 문화재의 경우, 조사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문화재 도난 소송에 공소시효 없앤 프랑스
여러 증거를 종합해 볼 때, 부석사 불상은 약탈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630~640여 년 전에 일어난 약탈사건인 만큼 현실적으로 오늘날 사법판단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관음사 측은 불상이 약탈된 이래 수백 년간 계속하여 불상을 문제 제기 없이 점유해 왔기 때문에 당연히 소유권을 주장할 것임에 반해 부석사 측이 약탈된 불법문화재임을 근거로 관음사의 소유권에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법적 난관이 크다. 우선 국내법상, 국제법상 수백 년 전의 사건을 다루는 공소시효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가입하고 있는 국제협약으로서 불법문화재 반환에 관한 1970년 유네스코협약에는 문화재 반환소송을 위한 공소시효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협약은 소급효가 없으므로 1970년 이후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만을 다룬다. 따라서 이 협약에 근거하여 한국은 부석사에서 약탈당한 불상의 회복을 요구할 수 없지만, 일본은 이 협약에 근거하여 관음사에서 도난당한 불상의 반환을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반환소송과 관련하여 프랑스는 공소시효에 큰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1913년 제정한 ‘역사적 유물에 관한 법(La loi sur les monuments historiques)’은 도난문화재 소송에서 프랑스 문화부장관에게 무제한의 공소시효를 인정하여 국가의 문화재 회복을 법적으로 지원해 오고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앞으로 문화재 소송이 속출할 것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고려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최근 독일 정부는 제2차 대전 중 나치 약탈 예술품의 소송에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안을 검토 중이다. 이것은 2012년 독일 세무 당국이 나치시대 예술품 수집가의 아들인 구를리트(Cornelius Gurlitt)의 뮌헨 아파트에서 1300여 점에 달하는 미술품을 적발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예술품의 상당수가 나치 약탈미술품으로 추정되자 독일 정부는 원소유자의 소송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이들 미술품의 소송에서 공소시효의 폐지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다른 문화재 소송에도 준용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독일의 예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 소송에도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 국제적으로 문화재 소송의 공소시효와 관련하여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국민감정 힘입어 문화재 돌려받은 멕시코
약탈과 도난사건이 얽힌 부석사 불상의 경우는 국제적으로 희귀한 사례이지만, 과거 국제적으로 비슷한 사건이 처리된 예를 검토함으로써 부석사 불상의 해결에 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982년 6월. 당시 36세의 멕시코 변호사 호세 루이스 카스타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멕시코 고문서의 열람을 신청했다. 복잡한 신원확인이 끝난 후 도서관은 나무상자에 보관된 문서의 열람을 허용했다. 그가 상자를 반납하고 떠난 퇴근 무렵, 도서관은 나무상자에 들어있던 고문서 중 14~15세기의 아스텍 달력, 즉 <오뱅 토날라마틀(Aubin Tonalamatl)>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도서관을 나온 카스타냐는 이미 출국을 했고, 2주 후 인터폴의 협조를 통해 그는 도서관에 남긴 주소지인 멕시코 칸쿤에서 문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멕시코 주재 프랑스 대사관은 즉각 멕시코 정부에 대해 문서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체포된 직후 카스타냐는 고문서를 멕시코 국립 인류·역사학연구소에 기증하면서 이것은 유실된 멕시코 고문서 회복의 첫 번째 거사라고 선언했다. 검찰총장은 즉시 그를 석방했으며, 멕시코 언론은 그를 멕시코 문화유산 회복의 영웅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 측은 명백한 절도행위를 통한 문화재 회복은 인정할 수 없다며 문서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멕시코 국민들의 거센 민족주의 감정을 촉발시킬 뿐이었다.
‘달력(Pages of Days)’이라는 뜻의 토날라마틀은 아스텍인들의 260일 별자리표를 상징하는 신비한 그림들을 13개의 용설란 껍질에 그려 넣은 그림문서로서 아코디언처럼 접게 되어 있다. 원래는 20장이었지만 이리저리 떠도는 중에 2장이 유실되어 18장만 남아 있다. 1521년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 약 1세기 동안 지금의 중부 멕시코 지역에서 사용된 이 달력은 사라진 아스텍 문명의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며 또한 그 희소성으로 막대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이다.
이 문서가 처음 확인된 것은 뉴스페인(멕시코 지역)에 체재했던 이탈리아 귀족 로렌조 보투리니 베나두치(Lorenzo Boturini Benaduci)의 소장품 목록에서였다. 1743년 베나두치가 뉴스페인에서 추방된 후 이 문서는 압수되어 스페인 총독부의 소유가 된 후 멕시코의 대학과 공공도서관을 전전한 끝에 9~20페이지(12장)가 멕시코의 저명한 천문학자 가마(Antonio de Leon y Gama)의 소유가 되었다. 1802년 독일 석판화가 네벨(Karl Nebel)이 이를 구입하여 프랑스 유물학자 발데크(Jean-Frderico Waldek)에게 매각했고, 발데크는 1840년 이를 유럽으로 반출하여 1841년 프랑스 천문학자 오뱅(Joseph Marius Aubin)에게 매각했는데, 금화 200프랑의 가격이었다 한다. 오뱅은 유실된 3~8페이지를 다른 곳에서 구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3~20페이지를 만들었고 문서의 명칭도 이때부터 <오뱅 토날라마틀>이 되었다. 오뱅은 1889년 프랑스 유물 수집가 구필(Charles Eugene Epidon Goupil)에게 매각했고, 구필의 사후 1898년 그의 부인이 이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양심적 지식인의 ‘절취’라는 점 감안해야
프랑스 측은 소유권의 내력이 확실하게 입증된 이 문서가 1841년 이래 프랑스의 소유였고 1898년 이래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품이었음을 근거로 이 사건은 원소유국의 문화재 회복과는 관계없는 절도 범죄임을 강조하며, 이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대해 멕시코 측은 이 문서가 19세기 멕시코에서 약탈되어 유럽으로 건너온 것이며, 멕시코는 약탈문화재를 당연히 회복한 것이라고 맞섰다. 멕시코 측은 또 <오뱅 토날라마틀>이라는 문서의 명칭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이 문서는 1740년대 이후의 소유자들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문서가 아스텍 원주민으로부터 유럽인에게 넘어간 경위와 유럽인이 이를 멕시코에서 반출한 경위가 불명인 점에서 멕시코 측은 약탈을 주장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82년 당시 외교가의 분위기는 프랑스가 명백히 도난당한 이 문서의 회복을 포기할 경우 이것은 위험한 전례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유네스코 등 국제무대에서 식민지 시대 탈취된 문화재 반환운동에 앞장섰던 멕시코로서는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불법유출의 가능성이 큰 문화재를 프랑스 측에 되돌려주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정복과 식민지배하에서 아스텍, 마야문명 등 원주민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사라진 문명을 증거할 귀중한 유물들을 유럽에 빼앗긴 멕시코에서 이 아스텍 고문서의 귀환은 민족감정을 폭발시켰기 때문에 멕시코 정부가 이 문서를 프랑스 측에 되돌려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후 프랑스와 멕시코는 조용한 협상에 들어갔다. 멕시코 측의 엄청난 국민감정 때문에 사실상 문서의 반환이 불가능함을 인식한 프랑스 측은 소유권을 보유하는 대신에 문서의 실질적 소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의 비밀협상 끝에 양국은 매 3년 협정을 갱신하는 조건으로 단기대여에 합의했고, 2009년에는 멕시코에 영구대여하는 협정이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멕시코 국립 유물·역사연구소 간에 체결되어 사건은 최종 타결을 보았다.
프랑스와 멕시코 모두 최소한의 명분과 실리를 챙긴 것으로 평가된 이 협상이 성공한 이유는 문서를 절취한 카스타냐가 돈을 바라지 않고 양심적으로 행동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았음을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이다. 또한 문서가 원주민에게서 유럽인으로 건너간 경위가 기증, 매매, 탈취 어느 쪽도 입증할 수 없었지만, 일단 총독부와 학교 등 공공기관의 소장품이 유출된 점에서 멕시코는 이 문화재가 일정 부분 불법문화재임을 효과적으로 주장했고, 프랑스는 이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멕시코의 국민감정을 고려할 때 프랑스로서는 가능한 회수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전세계를 뒤흔든 <모나리자> 도난사건
문화재 도난사건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로 모나리자 도난사건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절도사건은 또한 애국심을 내세운 문화재 절도범을 재판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모나리자 도난사건은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루브르 박물관의 휴관일에 일어났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설 보수업무에 종사하던 30세의 이탈리아인 빈센조 페루기아(Vincenzo Perugia)는 그 전날 하루의 업무가 끝난 후 귀가하지 않고 창고에 숨어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나리자가 걸린 전시실에 잠입했다. 모나리자를 벽에서 떼어낸 페루기아는 계단 층 사이에 설치된 청소용구 보관창고에 들어가 프레임을 벗겨내고 그림 패널만을 입고 있던 작업복 속에 감추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그림의 도난 사실은 다음 날인 화요일 오전에 확인되었다. 프랑스 경찰 대부대가 루브르에 몰려와서 관람객들을 조사하고 내보낸 다음 1주일간 루브르를 폐쇄한 가운데 직원들을 정밀 조사했다. 모든 국경에서 검문이 강화되었다. 모나리자의 도난사건은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의 뉴스였다. 루브르에는 모나리자가 걸렸던 빈 벽을 보기 위해 연일 관람객들이 쇄도했으며, 당시 《뉴욕타임스》는 도난된 모나리자의 가치가 500만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모든 직원과 함께 페루기아도 경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거짓 알리바이를 내세워 혐의에서 벗어났다. 수사가 장기화되자 이 사건은 단순한 문화재 절도가 아니라 프랑스에 쇼크를 주려는 정치적·문화적 사건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경찰은 평소 모나리자의 명성을 시기해 왔다고 의심되는 현대 예술가들에게 혐의를 두기도 했다. 루브르를 불태우라는 구호를 외친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시인 아폴리네르를 구속하였고 피카소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했다.
시중에는 미국의 재벌 모르간(J.P. Morgan)의 손에 들어갔다는 첩보도 돌았다. 부주의로 모나리자를 파손한 루브르가 실수를 감추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모나리자를 여행가방에 담아 파리 아파트에서 2년간 보관해 오던 페루기아는 1913년 11월 플로렌스의 유명한 화랑주인 게리(Alfredo Geri)에게 가명으로 서신을 보내 모나리자의 매각을 제의했다. 게리로부터 협상의 요청을 받은 페루기아는 바닥을 개조한 트렁크에 모나리자를 숨겨 플로렌스로 와서 게리를 만났다. 그는 게리에게 50만 리라(당시 약 10만 달러 상당)의 보상금과 함께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인 조콘다(Lisa del Gioconda)의 고향인 플로렌스의 우피지 미술관에 영원히 소장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12월 10일 진품 확인을 요청하는 우피지 박물관에 모나리자를 인계하고 호텔에 돌아온 페루기아는 플로렌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비밀리에 소집된 이탈리아 국회에서는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반환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가 있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12월 13일 모나리자의 회수를 프랑스에 통보하고 반환을 약속했다.
12월 30일 주 이탈리아 프랑스대사관에 인도되기 전 모나리자는 ‘돌아온 문화유산’이라는 기치를 달고 15일간 우피지 미술관을 비롯하여 로마, 밀라노의 주요 미술관에서 이탈리아 국민을 위한 대대적인 순회전시를 가졌다.
모나리자 절도범, 이탈리아에서 애국자로 통해
페루기아는 재판에서 나폴레옹에게 약탈당한 이탈리아 문화재의 상징으로서 모나리자를 조국에 되돌리려고 한 애국적 동기를 강조했다. 법정은 대부분 그의 애국심을 인정하여 징역 1년의 처분에서 7개월로 감형하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고 재판과정에서 7개월을 보낸 페루기아는 재판의 종료와 함께 석방되었다. 그는 언론에서 애국자로 묘사되었고 국민적 인기를 누렸으며, 그가 머물던 호텔 트리폴리 이탈리아는 ‘호텔 라 조콘다’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에도 유명한 고급호텔이 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직후이며, 전쟁이 임박했을 때였다. 페루기아는 제1차 대전에서 이탈리아 병사로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파리에 다시 건너가 페인트 장사를 하다 그곳에서 46세에 죽었다.
사건의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게리는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2만5000프랑의 보상금을 받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지만 그는 곧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모나리자 가격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요구했다. 분실물 신고에 대한 법적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다. 재판에서 그의 요구는 거부되었는데, 모나리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문화재이며, 게리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였다.
페루기아는 모나리자 절취동기가 나폴레옹에게 약탈당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문화재를 회복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고 국민들은 이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이것은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모나리자는 나폴레옹의 약탈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프랑스의 문화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3년 경 플로렌스에서 조콘다의 초상화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올 때 다빈치는 미완 상태의 모나리자를 가져와서 1516~17년 무렵 프랑스에서 완성했다. 1519년 임종 시 다빈치는 이 그림을 제자 겸 조수였던 살라이(Andrea Salai)에게 유증했고 살라이는 그가 1524년 사망하기 전 프랑수아 1세에게 4000에쿠라는 거금을 받고 모나리자를 매각하였다. 이후 그림은 퐁텐블로궁에 150여 년간 소장되다가 1682년 루이 14세와 함께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전되어 그곳에서 100년간 머물렀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국보로 지정을 받고 1797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다.
이같이 모나리자는 프랑스에서 완성된 예술품으로서 유증을 통해 프랑스 왕에게 정당하게 매각되어 프랑스 왕실과 국가에서 보관해 온 프랑스의 문화재인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소유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페루기아가 이 작품을 절취하여 이탈리아에 반입했을 때 이탈리아 정부는 당연히 이것을 프랑스에 반환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세계대전이 임박한 가운데 국제적 위세가 대단한 프랑스를 상대로 신생국 이탈리아가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여유가 없었던 것이 즉각 반환하게 된 보다 절실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모나리자의 순탄한 반환을 통해 프랑스에는 큰 생색을 내는 한편 대대적인 국내 순회전시회를 개최하여 자국민에게도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국민감정을 위로했고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약탈문화재 전시회 연 스웨덴 왕립박물관
2007년 11월부터 2009년 1월까지 스톡홀름의 왕립 무기박물관(Royal Armory)에서 ‘약탈문화재 전시회(War Booty Exhibition)’가 열렸다. 평화의 국가 스웨덴에서 웬 약탈문화재 전시인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스웨덴은 세계 어느 강대국에 못지않게 약탈문화재를 대거 보유한 국가이다. 16~18세기 동안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스웨덴은 이웃 북유럽 국가들, 즉 러시아, 폴란드, 신성로마제국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조직적으로 유럽 여러 국가들의 문화재를 약탈했다.
스웨덴이 약탈한 문화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프라하 궁전에서 약탈한 예술품, 폴란드의 유서 깊은 여러 수도원에서 약탈한 서적, 종교전쟁을 비롯하여 유럽의 대소 전쟁에 참가하여 노획한 무기들이 대종을 이루는데, 이들 약탈품은 스웨덴의 왕실과 교회, 대학과 박물관을 채우면서 유럽 변방의 가난했던 바이킹의 나라 스웨덴을 유럽문화권의 중심에 합류시켰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약탈물들은 주로 체코, 폴란드, 덴마크, 러시아, 라트비아, 독일 등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무기들인데, 13~17세기 유럽 여러나라의 왕들이 사용한 각종 투구와 무기·마구 등, 1620년 죽은 유럽의 마지막 들소 뿔, 나폴레옹의 가죽 서류가방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주목을 끄는 것은 러시아의 초대 황제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의 투구이다. 이것은 1612년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약탈한 것을 1655년 스웨덴이 폴란드로부터 약탈한 것이다. 이 투구는 스톡홀름 전시가 끝난 후 2009년 3~5월 모스크바에서 전시되었다. 이 투구는 이반 뇌제의 유일한 유품이라는 점에서 러시아로부터 강력한 반환요청이 있을 법도 하지만, 러시아 역시 다량의 스웨덴 문화재를 약탈하여 보관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반환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전시회에 출품되지는 않았으나 스웨덴의 약탈물 중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필사본인 《은성서(銀聖書·Silver Bible, Codex Argenteus)》와 《악마의 성경(Devil's Bible, Codex Gigas)》이 있는데, 두 책 모두 체코에서 약탈한 것이다. 《은성서》는 476년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 오도아케르를 정복한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 the Great, 454~526년)를 위해 제작하였으나, 1000년간 사라졌다가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소장품으로 프라하 궁전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1648년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약탈한 것이다. 지금은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에 소장되어 있는 이 성서는 6세기 초 동고트 언어로 쓰여져 있어 고대 노르딕어, 독어 및 영어의 연구에 막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은성서》와 함께 약탈한 《악마의 성서》는 1229년 보헤미아에서 제작되어 16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소유가 되었다가 스웨덴이 약탈한 것인데, 스톡홀름에서 약탈물 전시회가 열리는 기간 중 체코 프라하에서 전시되었다. 프라하 전시 조건으로 체코는 스웨덴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험료 1510만 달러를 지불했다. 4개월간 전시에서 관람객 1인당 10분의 관람이 허용되었다. 2009년 9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주간 전시된 <몽유도원도>에 대해 1인당 30초의 관람이 허용되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1990년 체코의 하벨 대통령은 스웨덴 방문 시 두 성서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스웨덴은 이 성서가 스웨덴의 문화재로서 반환의 의무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 왜 스웨덴은 체코, 폴란드 등 관련국들이 강력히 반환요청을 제기할 것을 예상하면서 이같이 도발적인 전시회를 열었는가? 더구나 전시회 팸플릿 중 폴란드 부분은 폴란드 왕궁박물관장 안드제이 로터문트 교수가 작성했다. 전시회 대변인 마가레타 함그렌은 과거 역사를 모두 꺼내 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지만 유럽의 역사와 지도가 변하는 차제에 유럽의 약탈문화재에 관한 논의를 제기해 보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시회 측은 이들 약탈문화재는 스웨덴의 합법적 소유임과 동시에 유럽의 공동 문화재로서 원소유국에 반환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이유는 스웨덴은 19세기 이래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모든 약탈물을 온전히 보존해 왔으므로, 앞으로도 이들 문화재를 계속 보존해야 할 책임과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조속한 유럽통일을 추진 중인 유럽연합이 유럽국가 간에 복잡한 과거 역사에서 일어나는 약탈문화재의 반환 문제에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문화재 반환에 제동을 거는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스웨덴이 약탈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이들 약탈물들이 합법적이라는 이유이다. 당시 그로티우스의 국제법하에서 약탈은 정당화되었고, 특히 30년 전쟁을 마감한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은 전쟁의 상처를 빨리 잊기 위해 참전국들 간에 약탈물 반환 금지를 규정했기 때문에 스웨덴은 이들 약탈문화재를 반환해야 할 하등의 법적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 유럽국가들은 18세기의 유럽국가들과 정체성을 달리하므로 진정한 원소유국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폴란드와 체코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주변국들과 합종연횡해 왔기 때문에 16~18세기의 폴란드, 체코는 오늘날의 폴란드, 체코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웨덴의 원칙적 입장과는 달리 스웨덴은 과거 약탈문화재를 반환한 사례가 있다. 1974년 올로프 팔메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할 때 양국 간 우정의 증표로서 17세기 스웨덴이 폴란드에서 약탈한 대형 그림을 반환한 적이 있다. <스톡홀름 두루마리(Stockholm Scroll)>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의 바르샤바 입성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을 겸했던 인물인 만큼 이 그림은 스웨덴에서도 대단한 문화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의 여망에 부응하여 이 약탈문화재를 기증한 스웨덴의 조치는 당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인가? 스웨덴의 약탈문화재 전시는 ‘약탈문화재 전시회’라는 명칭을 내건 세계 최초의 전시회였다. 물론 민감한 주제인 만큼 유럽 국가들의 적극적인 호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약탈문화재를 통해 과거를 직시하려는 이 전시회는 약탈물을 일국의 보물로서 소유하는 데 급급하여 약탈물의 존재를 은닉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해 온 국가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국가들의 오랜 관행에서 벗어난 이 전시회는 약탈물의 공개를 통해 과거 역사를 복원하려는 대단히 용기 있는 시도임이 분명하며 문화재 문제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 청구권협약과 부석사 불상 문제
다시 한국과 일본 간의 문화재 문제로 돌아오자면, 공식적으로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약에 의해 과거 한국과의 모든 청구권이 최종적으로 해결되어 어떠한 문화재도 반환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데, 일본의 한국 강점 100주년이 되는 2010년 체결된 ‘한일 도서협정’에 의거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가 반출하여 일본 정부가 보관해 온 도서 150종(1205책)을 반환한 사례가 있다.
당시 마쓰모토 외상은 국회 답변에서 “도서의 반환은 한일 청구권협약과는 관계없이 양국 간의 미래지향적 관계구축을 위한 일본 정부의 자발적 조치”라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는 자발적 조치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총독부 보관 서적을 통감, 총독, 총독부 관리가 근거 없이 불법 반출해 간 도서를 반환한 경우로서 불법문화재 반환에 해당된다. 불법문화재 문제는 청구권협약과는 관련이 없으며, 그 반환은 의무적 반환이며 자발적 조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석사 불상의 약탈이 확인될 경우, 불법문화재의 문제가 되어 청구권협약과는 관련 없이 이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반환이 실현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2006년 협상을 제안하면서 이탈리아 측은 여러 명의 도굴꾼 및 중간상들로부터 30년간 수집한 간접증거를 내세웠다. MET는 처음에는 도굴을 입증하는 ‘부정할 수 없는(incontrovertible)’ 직접증거를 요구했지만, 결국은 이탈리아가 제시한 여러 증거가 ‘상당한 또는 높은 개연성이 있는’ 증거이고, 도굴을 입증한다고 인정했다. 2008년 MET는 이탈리아가 요구하는 대로 항아리를 비롯하여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는 BC 6~4세기 문화재 10여 점을 모두 반환했다. MET가 도굴로 추정된 문화재를 반환한 것은 불법 반출된 문화재의 소유권은 문화재 원소유국에 있음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공공 문화재를 소장하고 관리하는 박물관이 문화재의 내력을 확인해 일정 수준의 ‘윤리적 기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미 1970년 세계박물관협회(ICOM)의 <문화재 구득윤리에 관한 권고>는 ‘문화재 내력에 의문점이 있는 경우 문화재 기원국과 접촉해야 할 것’을 규정했다. 2009년 ICOM은 ‘박물관의 문화재 구득 시 성실한 조사를 통해 문화재를 불법으로 취득하거나 거래한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고 윤리규정을 통해 못 박았다. 미국 박물관협회(AAM)도 2008년 ‘박물관의 소장품 중 내력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한 문화재의 경우, 조사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문화재 도난 소송에 공소시효 없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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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로마 근교의 무덤에서 도굴한 것으로 밝혀진 <에우프로니오스 항아리(Euphronios krater)>. 그리스 화가 유프로니오스(Euphronios)의 트로이 전쟁 삽화를 그려 넣은 항아리다. |
관음사 측은 불상이 약탈된 이래 수백 년간 계속하여 불상을 문제 제기 없이 점유해 왔기 때문에 당연히 소유권을 주장할 것임에 반해 부석사 측이 약탈된 불법문화재임을 근거로 관음사의 소유권에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법적 난관이 크다. 우선 국내법상, 국제법상 수백 년 전의 사건을 다루는 공소시효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가입하고 있는 국제협약으로서 불법문화재 반환에 관한 1970년 유네스코협약에는 문화재 반환소송을 위한 공소시효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협약은 소급효가 없으므로 1970년 이후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만을 다룬다. 따라서 이 협약에 근거하여 한국은 부석사에서 약탈당한 불상의 회복을 요구할 수 없지만, 일본은 이 협약에 근거하여 관음사에서 도난당한 불상의 반환을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반환소송과 관련하여 프랑스는 공소시효에 큰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1913년 제정한 ‘역사적 유물에 관한 법(La loi sur les monuments historiques)’은 도난문화재 소송에서 프랑스 문화부장관에게 무제한의 공소시효를 인정하여 국가의 문화재 회복을 법적으로 지원해 오고 있는데, 이러한 제도는 앞으로 문화재 소송이 속출할 것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고려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최근 독일 정부는 제2차 대전 중 나치 약탈 예술품의 소송에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안을 검토 중이다. 이것은 2012년 독일 세무 당국이 나치시대 예술품 수집가의 아들인 구를리트(Cornelius Gurlitt)의 뮌헨 아파트에서 1300여 점에 달하는 미술품을 적발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 예술품의 상당수가 나치 약탈미술품으로 추정되자 독일 정부는 원소유자의 소송을 지원하는 방안으로 이들 미술품의 소송에서 공소시효의 폐지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다른 문화재 소송에도 준용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독일의 예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 소송에도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 국제적으로 문화재 소송의 공소시효와 관련하여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국민감정 힘입어 문화재 돌려받은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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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의 아스텍 달력인 <오뱅 토날라마틀(Aubin Tonalamatl)>. |
1982년 6월. 당시 36세의 멕시코 변호사 호세 루이스 카스타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멕시코 고문서의 열람을 신청했다. 복잡한 신원확인이 끝난 후 도서관은 나무상자에 보관된 문서의 열람을 허용했다. 그가 상자를 반납하고 떠난 퇴근 무렵, 도서관은 나무상자에 들어있던 고문서 중 14~15세기의 아스텍 달력, 즉 <오뱅 토날라마틀(Aubin Tonalamatl)>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도서관을 나온 카스타냐는 이미 출국을 했고, 2주 후 인터폴의 협조를 통해 그는 도서관에 남긴 주소지인 멕시코 칸쿤에서 문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멕시코 주재 프랑스 대사관은 즉각 멕시코 정부에 대해 문서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체포된 직후 카스타냐는 고문서를 멕시코 국립 인류·역사학연구소에 기증하면서 이것은 유실된 멕시코 고문서 회복의 첫 번째 거사라고 선언했다. 검찰총장은 즉시 그를 석방했으며, 멕시코 언론은 그를 멕시코 문화유산 회복의 영웅이라고 보도했다. 프랑스 측은 명백한 절도행위를 통한 문화재 회복은 인정할 수 없다며 문서의 즉각적인 반환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멕시코 국민들의 거센 민족주의 감정을 촉발시킬 뿐이었다.
‘달력(Pages of Days)’이라는 뜻의 토날라마틀은 아스텍인들의 260일 별자리표를 상징하는 신비한 그림들을 13개의 용설란 껍질에 그려 넣은 그림문서로서 아코디언처럼 접게 되어 있다. 원래는 20장이었지만 이리저리 떠도는 중에 2장이 유실되어 18장만 남아 있다. 1521년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이전 약 1세기 동안 지금의 중부 멕시코 지역에서 사용된 이 달력은 사라진 아스텍 문명의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며 또한 그 희소성으로 막대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이다.
이 문서가 처음 확인된 것은 뉴스페인(멕시코 지역)에 체재했던 이탈리아 귀족 로렌조 보투리니 베나두치(Lorenzo Boturini Benaduci)의 소장품 목록에서였다. 1743년 베나두치가 뉴스페인에서 추방된 후 이 문서는 압수되어 스페인 총독부의 소유가 된 후 멕시코의 대학과 공공도서관을 전전한 끝에 9~20페이지(12장)가 멕시코의 저명한 천문학자 가마(Antonio de Leon y Gama)의 소유가 되었다. 1802년 독일 석판화가 네벨(Karl Nebel)이 이를 구입하여 프랑스 유물학자 발데크(Jean-Frderico Waldek)에게 매각했고, 발데크는 1840년 이를 유럽으로 반출하여 1841년 프랑스 천문학자 오뱅(Joseph Marius Aubin)에게 매각했는데, 금화 200프랑의 가격이었다 한다. 오뱅은 유실된 3~8페이지를 다른 곳에서 구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3~20페이지를 만들었고 문서의 명칭도 이때부터 <오뱅 토날라마틀>이 되었다. 오뱅은 1889년 프랑스 유물 수집가 구필(Charles Eugene Epidon Goupil)에게 매각했고, 구필의 사후 1898년 그의 부인이 이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양심적 지식인의 ‘절취’라는 점 감안해야
프랑스 측은 소유권의 내력이 확실하게 입증된 이 문서가 1841년 이래 프랑스의 소유였고 1898년 이래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품이었음을 근거로 이 사건은 원소유국의 문화재 회복과는 관계없는 절도 범죄임을 강조하며, 이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대해 멕시코 측은 이 문서가 19세기 멕시코에서 약탈되어 유럽으로 건너온 것이며, 멕시코는 약탈문화재를 당연히 회복한 것이라고 맞섰다. 멕시코 측은 또 <오뱅 토날라마틀>이라는 문서의 명칭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이 문서는 1740년대 이후의 소유자들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이 문서가 아스텍 원주민으로부터 유럽인에게 넘어간 경위와 유럽인이 이를 멕시코에서 반출한 경위가 불명인 점에서 멕시코 측은 약탈을 주장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82년 당시 외교가의 분위기는 프랑스가 명백히 도난당한 이 문서의 회복을 포기할 경우 이것은 위험한 전례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유네스코 등 국제무대에서 식민지 시대 탈취된 문화재 반환운동에 앞장섰던 멕시코로서는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에도 불구하고 불법유출의 가능성이 큰 문화재를 프랑스 측에 되돌려주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스페인의 정복과 식민지배하에서 아스텍, 마야문명 등 원주민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고, 사라진 문명을 증거할 귀중한 유물들을 유럽에 빼앗긴 멕시코에서 이 아스텍 고문서의 귀환은 민족감정을 폭발시켰기 때문에 멕시코 정부가 이 문서를 프랑스 측에 되돌려줄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후 프랑스와 멕시코는 조용한 협상에 들어갔다. 멕시코 측의 엄청난 국민감정 때문에 사실상 문서의 반환이 불가능함을 인식한 프랑스 측은 소유권을 보유하는 대신에 문서의 실질적 소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0여 년의 비밀협상 끝에 양국은 매 3년 협정을 갱신하는 조건으로 단기대여에 합의했고, 2009년에는 멕시코에 영구대여하는 협정이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멕시코 국립 유물·역사연구소 간에 체결되어 사건은 최종 타결을 보았다.
프랑스와 멕시코 모두 최소한의 명분과 실리를 챙긴 것으로 평가된 이 협상이 성공한 이유는 문서를 절취한 카스타냐가 돈을 바라지 않고 양심적으로 행동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았음을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이다. 또한 문서가 원주민에게서 유럽인으로 건너간 경위가 기증, 매매, 탈취 어느 쪽도 입증할 수 없었지만, 일단 총독부와 학교 등 공공기관의 소장품이 유출된 점에서 멕시코는 이 문화재가 일정 부분 불법문화재임을 효과적으로 주장했고, 프랑스는 이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멕시코의 국민감정을 고려할 때 프랑스로서는 가능한 회수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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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를 훔친 빈센조 페루기아. 1911년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의 모습. |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설 보수업무에 종사하던 30세의 이탈리아인 빈센조 페루기아(Vincenzo Perugia)는 그 전날 하루의 업무가 끝난 후 귀가하지 않고 창고에 숨어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나리자가 걸린 전시실에 잠입했다. 모나리자를 벽에서 떼어낸 페루기아는 계단 층 사이에 설치된 청소용구 보관창고에 들어가 프레임을 벗겨내고 그림 패널만을 입고 있던 작업복 속에 감추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그림의 도난 사실은 다음 날인 화요일 오전에 확인되었다. 프랑스 경찰 대부대가 루브르에 몰려와서 관람객들을 조사하고 내보낸 다음 1주일간 루브르를 폐쇄한 가운데 직원들을 정밀 조사했다. 모든 국경에서 검문이 강화되었다. 모나리자의 도난사건은 프랑스뿐 아니라 전세계의 뉴스였다. 루브르에는 모나리자가 걸렸던 빈 벽을 보기 위해 연일 관람객들이 쇄도했으며, 당시 《뉴욕타임스》는 도난된 모나리자의 가치가 500만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모든 직원과 함께 페루기아도 경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거짓 알리바이를 내세워 혐의에서 벗어났다. 수사가 장기화되자 이 사건은 단순한 문화재 절도가 아니라 프랑스에 쇼크를 주려는 정치적·문화적 사건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경찰은 평소 모나리자의 명성을 시기해 왔다고 의심되는 현대 예술가들에게 혐의를 두기도 했다. 루브르를 불태우라는 구호를 외친 적이 있었다는 이유로 시인 아폴리네르를 구속하였고 피카소까지 불러들여 조사를 했다.
시중에는 미국의 재벌 모르간(J.P. Morgan)의 손에 들어갔다는 첩보도 돌았다. 부주의로 모나리자를 파손한 루브르가 실수를 감추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모나리자를 여행가방에 담아 파리 아파트에서 2년간 보관해 오던 페루기아는 1913년 11월 플로렌스의 유명한 화랑주인 게리(Alfredo Geri)에게 가명으로 서신을 보내 모나리자의 매각을 제의했다. 게리로부터 협상의 요청을 받은 페루기아는 바닥을 개조한 트렁크에 모나리자를 숨겨 플로렌스로 와서 게리를 만났다. 그는 게리에게 50만 리라(당시 약 10만 달러 상당)의 보상금과 함께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인 조콘다(Lisa del Gioconda)의 고향인 플로렌스의 우피지 미술관에 영원히 소장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12월 10일 진품 확인을 요청하는 우피지 박물관에 모나리자를 인계하고 호텔에 돌아온 페루기아는 플로렌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비밀리에 소집된 이탈리아 국회에서는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반환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가 있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12월 13일 모나리자의 회수를 프랑스에 통보하고 반환을 약속했다.
12월 30일 주 이탈리아 프랑스대사관에 인도되기 전 모나리자는 ‘돌아온 문화유산’이라는 기치를 달고 15일간 우피지 미술관을 비롯하여 로마, 밀라노의 주요 미술관에서 이탈리아 국민을 위한 대대적인 순회전시를 가졌다.
모나리자 절도범, 이탈리아에서 애국자로 통해
페루기아는 재판에서 나폴레옹에게 약탈당한 이탈리아 문화재의 상징으로서 모나리자를 조국에 되돌리려고 한 애국적 동기를 강조했다. 법정은 대부분 그의 애국심을 인정하여 징역 1년의 처분에서 7개월로 감형하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고 재판과정에서 7개월을 보낸 페루기아는 재판의 종료와 함께 석방되었다. 그는 언론에서 애국자로 묘사되었고 국민적 인기를 누렸으며, 그가 머물던 호텔 트리폴리 이탈리아는 ‘호텔 라 조콘다’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에도 유명한 고급호텔이 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직후이며, 전쟁이 임박했을 때였다. 페루기아는 제1차 대전에서 이탈리아 병사로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파리에 다시 건너가 페인트 장사를 하다 그곳에서 46세에 죽었다.
사건의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게리는 루브르 박물관으로부터 2만5000프랑의 보상금을 받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지만 그는 곧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모나리자 가격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을 요구했다. 분실물 신고에 대한 법적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다. 재판에서 그의 요구는 거부되었는데, 모나리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문화재이며, 게리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였다.
페루기아는 모나리자 절취동기가 나폴레옹에게 약탈당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문화재를 회복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고 국민들은 이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이것은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모나리자는 나폴레옹의 약탈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프랑스의 문화재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3년 경 플로렌스에서 조콘다의 초상화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건너올 때 다빈치는 미완 상태의 모나리자를 가져와서 1516~17년 무렵 프랑스에서 완성했다. 1519년 임종 시 다빈치는 이 그림을 제자 겸 조수였던 살라이(Andrea Salai)에게 유증했고 살라이는 그가 1524년 사망하기 전 프랑수아 1세에게 4000에쿠라는 거금을 받고 모나리자를 매각하였다. 이후 그림은 퐁텐블로궁에 150여 년간 소장되다가 1682년 루이 14세와 함께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전되어 그곳에서 100년간 머물렀으며, 프랑스 혁명 이후 국보로 지정을 받고 1797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왔다.
이같이 모나리자는 프랑스에서 완성된 예술품으로서 유증을 통해 프랑스 왕에게 정당하게 매각되어 프랑스 왕실과 국가에서 보관해 온 프랑스의 문화재인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소유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페루기아가 이 작품을 절취하여 이탈리아에 반입했을 때 이탈리아 정부는 당연히 이것을 프랑스에 반환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세계대전이 임박한 가운데 국제적 위세가 대단한 프랑스를 상대로 신생국 이탈리아가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여유가 없었던 것이 즉각 반환하게 된 보다 절실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는 모나리자의 순탄한 반환을 통해 프랑스에는 큰 생색을 내는 한편 대대적인 국내 순회전시회를 개최하여 자국민에게도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국민감정을 위로했고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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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의 투구. 1550년대 제작. 금박세공의 철제 투구 끝은 깃발을 꽂게 되어 있다. |
스웨덴이 약탈한 문화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프라하 궁전에서 약탈한 예술품, 폴란드의 유서 깊은 여러 수도원에서 약탈한 서적, 종교전쟁을 비롯하여 유럽의 대소 전쟁에 참가하여 노획한 무기들이 대종을 이루는데, 이들 약탈품은 스웨덴의 왕실과 교회, 대학과 박물관을 채우면서 유럽 변방의 가난했던 바이킹의 나라 스웨덴을 유럽문화권의 중심에 합류시켰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약탈물들은 주로 체코, 폴란드, 덴마크, 러시아, 라트비아, 독일 등과의 전쟁에서 빼앗은 무기들인데, 13~17세기 유럽 여러나라의 왕들이 사용한 각종 투구와 무기·마구 등, 1620년 죽은 유럽의 마지막 들소 뿔, 나폴레옹의 가죽 서류가방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주목을 끄는 것은 러시아의 초대 황제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의 투구이다. 이것은 1612년 폴란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약탈한 것을 1655년 스웨덴이 폴란드로부터 약탈한 것이다. 이 투구는 스톡홀름 전시가 끝난 후 2009년 3~5월 모스크바에서 전시되었다. 이 투구는 이반 뇌제의 유일한 유품이라는 점에서 러시아로부터 강력한 반환요청이 있을 법도 하지만, 러시아 역시 다량의 스웨덴 문화재를 약탈하여 보관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반환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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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송아지 가죽에 금과 은으로 4복음서(마태, 요한, 누가, 마가복음)를 기록한 《은성서》. 원래 336장이나 오늘날 188장만 남아 있다. |
《은성서》와 함께 약탈한 《악마의 성서》는 1229년 보헤미아에서 제작되어 16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소유가 되었다가 스웨덴이 약탈한 것인데, 스톡홀름에서 약탈물 전시회가 열리는 기간 중 체코 프라하에서 전시되었다. 프라하 전시 조건으로 체코는 스웨덴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험료 1510만 달러를 지불했다. 4개월간 전시에서 관람객 1인당 10분의 관람이 허용되었다. 2009년 9월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주간 전시된 <몽유도원도>에 대해 1인당 30초의 관람이 허용되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1990년 체코의 하벨 대통령은 스웨덴 방문 시 두 성서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스웨덴은 이 성서가 스웨덴의 문화재로서 반환의 의무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 왜 스웨덴은 체코, 폴란드 등 관련국들이 강력히 반환요청을 제기할 것을 예상하면서 이같이 도발적인 전시회를 열었는가? 더구나 전시회 팸플릿 중 폴란드 부분은 폴란드 왕궁박물관장 안드제이 로터문트 교수가 작성했다. 전시회 대변인 마가레타 함그렌은 과거 역사를 모두 꺼내 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지만 유럽의 역사와 지도가 변하는 차제에 유럽의 약탈문화재에 관한 논의를 제기해 보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시회 측은 이들 약탈문화재는 스웨덴의 합법적 소유임과 동시에 유럽의 공동 문화재로서 원소유국에 반환할 계획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이유는 스웨덴은 19세기 이래 유럽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모든 약탈물을 온전히 보존해 왔으므로, 앞으로도 이들 문화재를 계속 보존해야 할 책임과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조속한 유럽통일을 추진 중인 유럽연합이 유럽국가 간에 복잡한 과거 역사에서 일어나는 약탈문화재의 반환 문제에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문화재 반환에 제동을 거는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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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년 체코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제작한 《악마의 성서》. 160마리의 당나귀 가죽으로 만들었다. |
이러한 스웨덴의 원칙적 입장과는 달리 스웨덴은 과거 약탈문화재를 반환한 사례가 있다. 1974년 올로프 팔메 수상이 폴란드를 방문할 때 양국 간 우정의 증표로서 17세기 스웨덴이 폴란드에서 약탈한 대형 그림을 반환한 적이 있다. <스톡홀름 두루마리(Stockholm Scroll)>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의 바르샤바 입성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 왕을 겸했던 인물인 만큼 이 그림은 스웨덴에서도 대단한 문화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인의 여망에 부응하여 이 약탈문화재를 기증한 스웨덴의 조치는 당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인가? 스웨덴의 약탈문화재 전시는 ‘약탈문화재 전시회’라는 명칭을 내건 세계 최초의 전시회였다. 물론 민감한 주제인 만큼 유럽 국가들의 적극적인 호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약탈문화재를 통해 과거를 직시하려는 이 전시회는 약탈물을 일국의 보물로서 소유하는 데 급급하여 약탈물의 존재를 은닉함으로써 역사를 왜곡해 온 국가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국가들의 오랜 관행에서 벗어난 이 전시회는 약탈물의 공개를 통해 과거 역사를 복원하려는 대단히 용기 있는 시도임이 분명하며 문화재 문제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일 청구권협약과 부석사 불상 문제
다시 한국과 일본 간의 문화재 문제로 돌아오자면, 공식적으로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약에 의해 과거 한국과의 모든 청구권이 최종적으로 해결되어 어떠한 문화재도 반환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데, 일본의 한국 강점 100주년이 되는 2010년 체결된 ‘한일 도서협정’에 의거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총독부가 반출하여 일본 정부가 보관해 온 도서 150종(1205책)을 반환한 사례가 있다.
당시 마쓰모토 외상은 국회 답변에서 “도서의 반환은 한일 청구권협약과는 관계없이 양국 간의 미래지향적 관계구축을 위한 일본 정부의 자발적 조치”라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는 자발적 조치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총독부 보관 서적을 통감, 총독, 총독부 관리가 근거 없이 불법 반출해 간 도서를 반환한 경우로서 불법문화재 반환에 해당된다. 불법문화재 문제는 청구권협약과는 관련이 없으며, 그 반환은 의무적 반환이며 자발적 조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석사 불상의 약탈이 확인될 경우, 불법문화재의 문제가 되어 청구권협약과는 관련 없이 이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반환이 실현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